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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r 14. 2024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네버엔딩 스토리>  2014년

영화 <빨강머리 앤 2>(1987), <빨강머리 앤>(1985), 애니메이션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2013)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는 1908년에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를 출간하였다. 소설은 열한 살 앤이 노바스코샤의 한 고아원에서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섬인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의 초록 지붕 집(Green Gables)에 입양되면서 건강하게 성장해가는 5년간의 이야기이다.     

매슈가 주뼛거리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따라오너라. 저쪽 뜰에 말이 있다. 가방 이리 다오.”

아이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제가 들게요. 별로 무겁지 않거든요. 이 안에 제 전 재산이 들어있긴 하지만 무겁진 않아요. 그리고 조심해 들지 않으면 손잡이가 빠져 버려요. 그러니 잡는 법을 잘 아는 제가 드는게 나아요. 굉장히 오래된 가방이거든요. 아, 아저씨가 와주셔서 너무 기뻐요. 벚나무에서 자는 게 아무리 좋아도 말이에요. 집까지는 한참 걸리겠죠, 그렇죠? 스펜서 아주머니가 12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하셨거든요. 전 마차 타는 걸 좋아하니까 다행이에요. 아, 아저씨 집에서 아저씨의 가족으로 함께 사는 건 정말 멋진 일일 거예요. 전 지금껏 한 번도 가족이 없었거든요. 사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아원은 정말 끔찍해요. 넉 달밖에 안 있었지만 그걸로 충분해요. 아저씨는 고아원에서 지내 본 적이 없을 테니 거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실 거예요. 정말 상상도 못할 만큼 지독한 곳이라고요. 스펜서 아주머니는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절 못됐다며 나무라셨지만 제가 일부러 나쁘게 말한 건 아니에요. 나쁜 말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기 쉽잖아요. 안 그래요? 사람들은 좋았어요. 고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하지만 거긴 고아들 빼곤 상상할 거리가 전혀 없어요. 아이들에 대해선 이렇게 상상하면 참 재미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아저씨 옆에 앉은 여자 아이가 사실은 백작의 딸이었는데, 어릴 때 못된 유모한테 유괴를 당한 거예요. 그런데 그 유모가 사실을 털어놓기 전에 죽어 버린 거죠. 전 밤마다 잠자리에 누워 그런 상상을 하곤 했어요. 낮엔 그럴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말랐나 봐요. 저 정말 말라깽이죠, 그렇죠? 뼈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전 제가 팔꿈치가 폭 들어갈 만큼 포동포동하고 예쁜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게 참 좋아요.”      (P26-27)     

“.....벌써부터 이 섬이 마음에 들어요. 여기서 살게 돼서 정말 기뻐요. 프린스에드워드 섬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란 소리는 늘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서 사는 상상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건 기쁜 일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이 길은 흙이 붉은 게 참 희한하네요. 샬럿타운에서 기차를 탔는데, 지나가며 언뜻언뜻 보이는 길 색깔이 붉은 거예요. 그래서 스펜서 아주머니한테 길이 왜 붉은지 몰었죠. 아주머니는 모른다고 하면서 제발 부탁이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하셨어요. 제가 질문을 벌써 1,000번도 더 했다나요. 저도 그런 것 같긴 했어요.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으면 세상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길이 왜 저렇게 붉은 거죠?”

매슈가 대답했다. 

“글쎄다, 잘 모르겠는걸.”

“음, 나중에 알아봐야겠어요. 나중에 알아볼 것들을 생각하는 일도 근사하지 않나요? 살아 있다는 게 기쁘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아요우리가 모든 걸 다 안다면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일도 없겠죠? 그런데 제가 말이 너무 많나요?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제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으세요? 아저씨가 그렇다면 조용히 할게요. 전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만둘 수 있거든요.”

매슈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말없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매슈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혼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그에게 무슨 의견을 기대하지 않을 때가 좋았다. 하지만 여자 아이의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지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매슈는 여자들이라면 질색이었고, 여자 아이들은 특히나 더했다. 여자 아이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겁먹은 얼굴로 슬슬 피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이들은 마치 한마디라도 했다간 매슈가 한입에 꿀꺽 삼켜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에이번리에 사는 번듯한 집안의 여자 아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하지만 이 주근깨투성이 여자 아이는 전혀 달랐다. 매슈의 느린 이해력으로는 아이의 통통 튀는 상상력을 따라가기가 꽤 벅차긴 했지만, 재잘대는 여자 아이의 수다가 싫지만은 않았다.              (P31-32)     

“... 기쁨의 하얀 길.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멋진 이름 같지 않아요? 전 장소나 사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붙이고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고아원에 있던 헵지바 젠킨스라는 여자 아이도 로잘리아 드 비어라고 항상 상상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거길 가로수길이라고 부를지 몰라도 전 언제나 기쁨의 하얀 길이라고 부르겠어요. 정말 1.5킬로미터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하나요? 전 기쁘면서도 섭섭해요. 오는 길이 너무 즐거웠거든요. 전 즐거운 일이 끝날 때면 늘 섭섭해요. 나중에 더 즐거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장담할 순 없으니까요. 게다가 즐거운 일이 계속되는 일은 잘 없잖아요. 어쨌든 지금까지 전 그랬어요. 하지만 집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면 기뻐요. 아시겠지만, 전 한 번도 진짜 가정에서 살아 본 적이 없거든요. 진짜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다시 기분 좋은 통증이 밀려와요. 어머, 너무 아름다워요!”    (P40)     

앤은 무릎을 꿇고 창가에 기대어 6월의 아침 풍경을 바라보았다. 앤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아,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보다 멋진 곳이 또 있을까? 여기서 살 수만 있다면! 앤은 자신이 이곳에 산다고 상상했다. 여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밖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가지가 창에 부딪혀 톡톡 소리를 낼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자라고 있었고, 꽃이 어찌나 가득 피었는지 잎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집 양옆에 있는 큰 과수원에서도 사과나무와 벚나무가 하얗게 꽃잎을 흩날리고, 나무 밑 풀밭에는 노란 민들레가 지천이었다. 정원에 핀 자줏빛 라일락꽃이 풍기는 아찔하게 달콤한 향기가 아침 바람을 타고 창으로 흘러들었다.             (P60)     

마릴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무슨 일에나 그렇게 열을 내는 구나, 앤. 앞으로 살면서 실망할 일이 얼마나 많을지 걱정이구나.”

“어머, 어떤 일이든 기대하는 데 그 즐거움의 반이 있는걸요. 혹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기쁨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실망할 일도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P168)     


앤이 큰 소리로 말했다.

“마릴라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을 보고 계세요. 전 완전히 행복해요. 네, 머리털이 빨간데도 그래요. 지금은 빨간 머리 따윈 아무래도 좋아요. 배리 아주머니는 제게 입을 맞추시고 울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전 무척 당황했지만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어요. ‘배리 아주머니, 전 아주머니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이애나를 취하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한 번 더 자신 있게 말씀드리겠어요. 그리고 앞으로 지난 일은 망각의 장막으로 덮어 버리겠어요.’하고 말이죠. 꽤 품위 있게 말했죠. 그렇죠, 아주머니? 마치 원수를 은혜로 갚아 배리 아주머니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다이애나와 전 행복한 오후를 보냈어요. 다이애나가 카모디에 있는 숙모에게 배웠다며 멋진 코바늘뜨기를 가르쳐 주었어요. 에이번리에서는 우리 둘밖에 몰라요.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말자며 엄숙하게 맹세했어요. 다이애나가 장미 화관이 그려진 예쁜 카드를 줬는데, 이런 시가 적혀 있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듯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죽음이 아니고는 우릴 갈라놓지 못하리.    (P259-260)    

 

“얘야, 그건 네가 조심성이 없고 충동적이라서 그래.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는 법이 없잖니. 무슨 일이든 머리에 떠올랐다 하면 잠시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말하거나 행동에 옮겨 버리니 말이야.”

앤이 반박했다.

“어머, 하지만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걸요. 무언가 멋진 생각이 떠오르면 다 쏟아 내야 해요. 자꾸만 생각하다 보면 모두 망쳐버리거든요. 그랬던 적 없으세요, 린드 아주머니?”                  (P278)


앤이 말했다.

“산사나무가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안됐어요. 다이애나는 그 사람들이 더 좋은 걸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산사나무만 하겠어요. 안 그래요? 다이애나는 또 산사나무가 어떤 건지 처음부터 모른다면 아쉬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전 그보다 슬픈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산사나무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건 그야말로 비극이에요. 제가 산사나무 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세요, 아주머니? 전 그게 지난여름에 져버린 꽃들의 영혼이며, 여긴 그 영혼들의 천국이라고 생각해요. 오늘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오래된 웅덩이 옆에 이끼로 뒤덮인 우묵하고 넓은 곳에서 점심을 먹었어요. 아주 낭만적인 장소예요. 찰리 슬론이 아티 길리스에게 웅덩이를 뛰어넘어 보라고 하자 아티가 뛰어넘었어요. 비겁하게 뺄 수는 없으니까요. 학교에선 누구나 다 그래요. 도전하는 게 요즘 유행이거든요. 그리고 필립스 선생님이 산사나무 꽃을 프리시에게 한 아름 안기며 ‘아름다운 그대에게 아름다운 꽃을’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전 선생님이 책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선생님이 조금은 상상력이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누군가에게서 꽃을 받긴 했지만 차갑게 거절했어요. 저 스스로 그 애 이름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이름을 말할 수는 없어요. 우린 산사나무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모자에 얹었어요. 집으로 돌아올 땐 꽃다발을 들고 머리엔 화관을 쓴 채 <언덕 위의 집>을 부르며 둘씩 짝을 지어 걸었어요. 아,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아주머니, 사일러스 슬론 씨네 사람들이 모두 달려 나와 우리를 쳐다보았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다 들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어요. 대단한 화젯거리였다고요.”      (P286-287)     

“하지만 있다고 상상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매일 밤 난 잠들기 전에 창밖을 보면서 요정이 정말 여기 앉아 샘물을 거울삼아 머리를 빗고 있을까 궁금해하는걸. 가끔은 아침 이슬 위에 요정 발자국이 나 있나 찾아볼 때도 있어. 아, 다이애나, 제발 요정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     (P306)     


“마릴라, 아주머니, 내일은 아무런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 새 날이라고 생각하니 기쁘지 않으세요?”

“넌 분명히 내일도 실수를 많이 저지를 거야. 너 같은 실수투성이는 본 적이 없으니까, 앤.”

앤이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좋은 점도 있다는 거 아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절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요.”

“그 대신 날마다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는데, 뭐가 좋은 점이라는 거냐.”

“어머, 모르세요,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다고요. 제가 그 한계까지 간다면 더 이상 실수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놓여요.”          (P313)     

“정말 근사하다! 넌 어떻게 그런 멋진 얘기를 만들어 내니, 앤? 나도 너처럼 상상력이 풍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매슈와 성향이 비슷한 비평가인 다이애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앤이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상상력은 기르면 돼. 나한테 좋은 생각이 났어, 다이애나. 우리끼리 이야기 클럽을 만들어서 글 쓰는 연습을 하는 거야. 네가 혼자서 쓸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줄게. 너도 알겠지만 사람은 상상력을 키워야 해. 스테이시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물론 방향을 잘 잡아야겠지만 말이야. 내가 선생님께 유령의 숲 얘기를 해드렸더니 그건 상상력을 엉뚱한 쪽으로 발휘한 거래.”

이리하여 이야기 클럽이 만들어졌다. 처음엔 다이애나와 앤 둘뿐이었지만 곧 제인 앤드루스와 루비 길리스를 비롯해, 상상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한둘이 더 들어왔다. 루비 길리스는 남자 아이들이 끼면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남학생들은 제외되었고 회원들은 1주일에 이야기 한 편을 지어야 했다.         (P366)     


아, 다이애나, 기하 시험만 무사히 끝난다면 바랄 게 없겠어!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 말씀처럼, 내가 기하 시험을 망치든 말든 태양은 여전히 뜨고 또 질 거야. 맞는 말이야. 하지만 별로 위로는 되지 않아. 합격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세상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앤. 

기하 시험과 나머지 시험을 모두 치르고 앤은 금요일 저녁 집으로 돌아왔다. 약간 지쳐 보이긴 했지만 앤의 얼굴엔 고난을 이겨 낸 기쁨이 엿보였다. 다이애나가 초록 지붕 집에서 앤을 기다리고 있었고, 둘은 몇 년 만에 만난 사이처럼 반가워했다.        (P450)  

   

제인이 확신 없는 투로 대꾸했다.

“난 잘 모르겠어. 다이아몬드가 있으면 사람들이 훨씬 위안 받을 것 같은데.”

앤이 분명하게 말했다. 

“글쎄, 난 다이아몬드가 없어 평생 위안받지 못하더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긴 싫어. 난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충분해. 분홍 드레스를 입은 부인의 보석 못지않게 이 목걸이에 담긴 매슈 아저씨의 소중한 사랑을 난 알고 있으니까.”         (P472)   

  

에이브리 장학금이라고! 앤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 야망의 수평선이 저 멀리로 넓게 펼쳐졌다. 조시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앤의 최고 목표는 일 년 뒤에 1급 교사 자격증을 따고, 가능하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조시가 한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엔은 에이브리 장학금을 받아 레드먼드 대학 문과 과정을 수료한 다음 가운과 학사모를 쓰고 졸업식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게다가 에이브리 장학생은 국어 성적으로 뽑는 것이었기에 앤은 고향집에라도 온 듯 마음이 든든했다.

이 장학금은 뉴브런즈윅에 살던 부유한 실업가가 세상을 떠나면서 재산의 일부를 기부한 것으로, 바닷가에 면한 3개 주의 기준에 따라 그 지역 고등학교와 전문학교에 주어지고 있었다. 퀸스 아카데미가 포함될지 안 될지는 여태껏 미지수였는데, 이번에 드디어 결정이 난 것이다. 학년 말에 국어와 국문학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졸업생이 그 영예를 차지하며, 레드먼드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매년 250달러를 받게 된다. 그러니 앤이 그날 밤 흥분에 들뜬 얼굴로 잠자리에 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앤은 결심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그 장학금을 타는 거야. 내가 문학사 학위를 받으면 매슈 아저씨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까! 아, 야망을 품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이렇게 많은 꿈이 있어서 너무 행복해. 야망에는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바로 그게 좋은 점이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더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건가 봐.”              (P482-483)     

“.... 앤, 그동안 내가 너한테 엄하고 모질게 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오라버니만큼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젠 너한테 말하고 싶어. 내가 워낙 속마음을 잘 얘기 못하는 성격이긴 하다만 이런 일이 닥치고 보니 말하기가 오히려 편하구나. 앤,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한단다. 네가 초록 지붕 집에 온 뒤부터 너는 내 기쁨이자 위안이었어.”

이틀 뒤, 매슈 커스버트는 자신의 농장 문을 지나 손수 일군 밭과 사랑하던 과수원과 직접 심은 나무들을 뒤로 한 채 영원히 떠나갔다. 그리고 에이번리는 조용한 평온을 되찾았다. 초록 지붕 집마저도 오랜 일상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규칙적으로 일하고 의무를 다했다. 하지만 뭔가 잃어버린 듯한 아픈 상실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매슈가 없이도 세상이 변함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이 앤에게는 새로운 슬픔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전나무 너머로 태양은 떠오르고, 정원에 피어난 연분홍 꽃망울을 보면 전처럼 기쁜 마음이 솟구치며, 다이애나가 찾아오면 즐겁고, 그 명랑한 이야기와 몸짓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사실에 왠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세상과 사랑과 우정은 전혀 그 힘을 잃지 않은 채 앤의 상상력을 북돋워 주고 가슴 떨리는 감동을 안겨 주었으며, 삶은 여전히 또렷한 목소리로 끈질기게 앤을 부르고 있었다.       (P506)            

마릴라는 꿈꾸는 표정으로 앤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앤, 네가 여기에 있어 준다면, 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지만 나 때문에 널 희생시킬 수는 없단다. 그건 말이 안 돼.”

앤이 경쾌하게 웃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희생이라뇨? 초록 지붕 집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은 없어요.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다고요. 우린 이 정든 옛집을 지켜야만 해요.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요. 아주머니, 전 레드먼드에 가지 않아요. 여기 남아서 아이들을 가르칠 거예요. 그러니 제 걱정은 조금도 마세요.”   

“하지만 네 꿈은....... 그리고........”         (P517)     

 

“전 그 어느 때보다 꿈에 부풀어 있어요. 단지 꿈의 방향이 바뀐 것뿐이에요. 전 훌륭한 교사가 될 거예요...... 길모퉁이는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어둠이 펼쳐질지, 저 멀리 어떤 굽이 길과 언덕과 계곡이 펼쳐질지 말이에요.”    

마릴라가 장학금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대학을 포기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구나.”

앤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주머닌 절 못 말리세요. 이제 여섯 달만 지나면 저도 열일곱이고, 언젠가 린드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듯이 전 ‘노새처럼 고집불통’이니까요. 아주머니, 부디 제가 안됐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동정받는 건 싫어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좋아하는 초록 지붕 집에서 지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찬걸요. 아주머니와 저만큼 이 집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여길 지켜야 해요.”

마릴라가 뜻을 굽히며 말했다.

“착하기도 하지! 네 덕분에 다시 살아난 느낌이야. 대학에 가라고 끝까지 설득해야겠지만 나로선 그럴 힘이 없으니 더 이상 말을 못하겠구나. 언젠가 꼭 보답을 하마, 앤.”         (P517-518)     

“너와 길버트가 문간에서 30분 동안이나 서서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구나.”

“그래요.... 우린 선의의 경쟁자였죠. 하지만 앞으로는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게 훨씬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정말 30분이나 거기 있었어요? 몇 분밖에 안 된 것 같았는데. 하지만 우린 5년 동안 못한 얘기가 너무 많았거든요, 아주머니.”

그날 밤, 앤은 흐뭇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창가에 앉아 있었다. 벚나무 가지를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결에 박하 향기가 실려 왔다. 골짜기에 우거진 뾰족한 전나무 위로 별들이 반짝이고, 언제나처럼 나무들 사이로 다이애나 방의 불빛이 깜박거렸다.

퀸스에서 돌아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밤 이후로 앤의 꿈은 작아졌다. 하지만 앤은 발 앞에 놓인 길이 아무리 좁다해도 그 길을 따라 잔잔한 행복의 꽃이 피어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직한 일과 훌륭한 포부와 마음 맞는 친구가 있다는 기쁨은 온전히 앤의 것이었다. 그 무엇도 타고난 앤의 상상력과 꿈으로 가득한 이상세계를 뺏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었다! 앤이 나직이 속삭였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도다.”          (P52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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