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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 1996년

by 노용헌

2018년 7월,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50주년을 기념하여 수상작들 중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황금 맨부커상(The Golden Man Booker Prize)'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바로 1992년 '맨부커상'(당시 '부커상')을 수상했던 마이클 온다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이다. 안소니 밍겔라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던 이 작품은 제69회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감독상 등 9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남주인공 알마시는 실존 인물 라즐로 알마시 백작(László Ede Almásy de Zsadány et Törökszentmiklós, 1895-1951)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실존 인물 알마시 백작은 헝가리 귀족으로 사하라 사막을 항공기로 여러차례 탐험한 탐험가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 아프베어에 고용되어 독일 스파이들을 이집트에 몰래 침투시키는 'salam 작전'에 참가했고 그 공로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영화 속 알마시와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1951년까지 살다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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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은 젊은 여자의 얼굴에 박혀 있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그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 벽으로 향한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숙인다. 어쩌다 화상을 입으셨어요?

늦은 오후다. 그의 손이 시트를 잡고 흔들며 손가락 뒤로 시트를 어루만진다.

사막에 불이 붙어 떨어졌어요.

그들이 내 몸을 발견하고 막대로 들것을 만들어 질질 끌고 사막을 건넜어요. 우리는 모래의 바다에 있었어요. 가끔은 마른 강바닥을 건넜죠. 유목민들 알죠. 베두인. 마는 추락했고 모래 자체에 불이 붙었어요. 그 사람들은 내가 벌거벗은 채로 거기서 빠져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머리에 쓰고 있던 가죽 헬멧에는 불이 붙었어요. 그들은 나를 요람, 시체를 옮기는 들것에 묶고는 나를 데리고 쿵쿵 달렸습니다.

베두인들은 화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1939년부터 하늘에서 떨어져댔으니 비행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죠. 그 사람들의 연장과 식기들은 추락한 비행기와 탱크의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나던 시대였죠. 그 사람들은 상처 입은 비행기가 윙윙거리는 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고 그런 잔해를 헤치며 천천히 나아가는 법을 알고 있었어요. 조종석의 작은 나사는 장신구가 되었어요. 나는 아마도 활활 타오르는 기계에서 처음으로 살아서 나온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은 내 이름을 몰랐어요. 나도 그 사람들이 무슨 부족인지 몰랐죠.

당신은 누구죠?

나도 몰라요, 당신은 계속 질문을 하는군요.

당신은 영국인이라고 하셨어요. (P12-13)


모로코 남부에는 아제지라고 하는 회오리바람이 있는데, 펠루힌(이집트와 시리아 등 북부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토착 농민)들은 이에 칼로 맞선다. 간혹 로마까지 닿는 아프리코도있다. 알름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다. 아레프 혹은 리피라고도 하는 아리피는 불티나게 달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들은 현재형으로 존재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바람들이다.

그 외, 풍향이 변하여 드문드문 불어오는 바람들이 있다. 말과 말을 탄 사람들을 넘어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게 하는 바람들이다. 비스트 로즈는 170일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뛰놀며 마을들을 묻어버린다. 뜨겁고 건조한 기블리는 튀니지에서 불어오는데, 굽이치듯 불어와 불안한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또 하부브라고 수단에서 불어오는 먼지바람은 진노란색 벽같이 보일 정도로 높이가 천 미터나 되고 이후에는 비가 따라온다. 하르마탄은 계속 불다가 마침내는 대서양으로 빠져든다. 임바트는 바다에서 북 아프리카로 들어오는 산들바람이다. 그저 하늘을 향해 조용히 한숨짓는 바람들도 있다. 추위와 함께 불어오는 한밤의 먼지폭풍. 3월부터 5월까지 이집트에 부는 먼지바람인 크함신은 쉰 날 동안 불어온다고 ‘50’에 해당하는 아랍어를 따서 이름 지어졌는데, 이집트에서는 제9의 역병으로 여겨진다. 지브롤터 해협에서 생겨난 다투에는 향기가 깃들어있다. (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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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두인들이 나를 살려놓은 건 이유가 있었어요. 나는 쓸모가 있었죠. 거기 내가 탄 비행기가 사막에 추락했을 때 내가 기술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던 거죠. 나는 지도에서 대략적인 형태만 보고 이름 없는 마을을 알아볼 수 있어요. 나는 항상 내 안에 바다와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만약 다른 사람의 집에 혼자 남겨지면 책장으로 가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이마실 사람입니다. 그렇게 역사가 내 안으로 들어오지요. 나는 해상(海床)의 지도들을 알고 순상지 안 약점들을 묘사한 지도들과 십자군들이 지났던 여러 통행로를 그려놓은 가죽 위의 지형도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 사이에 추락하기 전에 그들이 사는 곳을 알고 있었어요. 알렉산더 대왕이 이전 시대에 대의명분 때문이든 다른 탐욕 때문이든 횡단했던 때를 알았죠. 나는 비단이나 우물에 푹 빠진 유목민들의 관심사를 알았어요. 어떤 부족은 골짜기 바닥 전체를 까맣게 물들여서 대류현상을 촉진시켜서 비가 올 가능성을 높이려 했지요. 또 그들은 구름 한가운데를 뚫을 만큼 높은 건물도 지었어요. 어떤 부족들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두 손바닥을 들어요. 적시에 이렇게 하면 폭풍우의 방향을 돌려 사막의 인접 영역, 덜 총애받는 다른 부족에게로 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죠. 침수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부족들은 순식간에 모래에 파묻혀 역사가 되죠. (P30-31)


스커트 위로 보이는 해나의 피부는 투명했다. 이 부엌 안에서 해나가 입은 옷은 그게 다였다. 마치 침대에서 막 일어나 부분만 옷가지를 걸쳐 입고 나온 듯했다. 부엌문으로 언덕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망토처럼 감쌌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젖어 있었다.

“해나.”

“이해하시겠어요?”

“어째서 그처럼 그 사람을 숭배하는 거니?”

“난 그 사람을 사랑해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냐. 숭배하는 거지.”

“가세요, 카라바지오 아저씨. 부탁이에요.”

“넌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스스로 시체에 매달려 있는 거야.”

“그 사람은 성인이에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절망에 빠진 성인.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기를 바라잖아요.”

“그 사람은 상관도 안해!”

“난 그 사람을 사랑해요.”

“스무 살짜리가 유령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다니!”

카라바지오는 잠깐 말을 멈췄다.

“넌 슬픔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호해야 해. 슬픔은 거의 증오에 가까워. 이 말만 하자. 이게 내가 배운 교훈이야. 네가 누군가의 독을 받아들일 때 -- 너는 그걸 나눔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 너는 그 대신 독을 네 안에 쌓아놓는 거야. 사막에 있던 사람들은 너보다 훨씬 영리했어. 그들은 그가 유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구해 준 거야. 하지만 그가 더 이상 쓸모가 없자, 그들은 그를 버렸어.”

“나를 가만히 놔두세요.” (P64-65)


제8 군대가 동부 해안의 가비체에 도착했을 때, 공병은 야간 순찰대를 맡게 되었다. 이틀째 밤, 그는 물속에 적의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단파 수신기를 통해 받았다. 경비대는 폭탄을 쏘았고 거친 경고 사격으로 물이 폭발했다. 적중시키지는 못했지만 물속에서 폭발로 인해 하얀 물거품이 일면서, 무언가 움직이는 검은 윤곽선이 잡혔다. 그는 라이플을 들어 떠도는 그림자를 1분은 좋이 노려보았지만 가까이에서 다른 움직임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쏘지 않기로 했다. 적은 여전히 북쪽, 리미니 도시의 가장자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후광이 성모 마리아의 머리 주변에 비쳤다. 성모는 바다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성모는 배 위에 서 있었다. 두 남자가 배를 젓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이 성모를 똑바로 지탱했다. 배가 해안에 닿았을 때 마을 사람들이 열려 있는 캄캄한 창문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공병은 크림색 얼굴과 배터리로 작동되는 작은 전구로 이루어진 후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읍내와 바다 사이의 콘크리트 토치카에 누워서, 배에서 내린 네 남자가 1.5미터 높이의 석고상을 팔에 들고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지회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해안가로 걸어갔다. 아마도 독일군들이 그곳에 있었을 때 지뢰가 파묻히는 모습을 보고 도표를 그려놓았을지도 몰랐다. 그들의 발은 모래에 푹푹 잠겼다. 1944년 5월 29일, 가비체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성모 마리아 해양 축제였다. (P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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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아기에게 얘기하는 걸 그만두었니?”

“너무 바빠졌어요. 갑자기, 군대들은 몬로 다리에서 전투를 벌인 후 우르비노로 갔죠. 아마도 우르비노에서 그만두었던 것 같아요. 군인이 아니라 사제나 간호사일 뿐인데도 총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죠. 그곳은 토끼 사육장, 좁은 내리막길 같았어요. 군인들은 몸의 일부분만 가지고 들어왔다가 한 시간 정도 나와 사랑에 빠진 후 죽어갔어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이 중요했죠. 하지만 나는 그들이 죽을 때마다 계속 아이를 보았어요. 잘못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이죠. 몇몇 군인들은 일어나 앉아 숨을 더 잘 쉬고 싶어서 감은 붕대를 뜯어버리기도 했어요. 어떤 군인들은 죽어가면서도 팔에 난 가벼운 긁힌 상처를 걱정했죠. 그런 후 입에 거품을 무는 거예요. 나지막이 무언가 터지는 소리. 한번은 죽은 군인의 눈을 감겨주기 위해서 몸을 앞으로 숙였는데, 그가 눈을 번쩍 뜨고 비웃은 일도 있었어요.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안달이 났나 보지? 쌍년!’ 그는 일어나 앉더니 내 쟁반에 담긴 모든 걸 쓸어버렸어요. 격렬히 화를 냈죠. 누가 그렇게 죽고 싶겠어요? 그런 분노를 안고 죽고 싶겠어요? 쌍년이라니, 그런 후에는 나는 항상 그들이 입에 거품을 물기를 기다렸어요. 난 이제 죽음을 알아요. 데이비드 아저씨, 모든 냄새를 알고 그들을 고뇌에서 딴 데로 정신을 쏟도록 할 수 있는 법을 알아요. 주 혈관에 모르핀을 재빨리 찔러넣어야 할 때를 알아요. 식염수 용액을 주사하기도 하죠. 죽기 전에 창자를 비우기 위해서요. 빌어먹을 장군들이 내 일을 했어야만 하는데. 빌어먹을 장군들 모두가. 강을 건너기 전에 선수 조건으로 했어야만 했어요. 도대체 우리가 뭐길래 이런 책임을 져야만 하는 거였죠? 대체 우리가 뭐라고 나이든 사제처럼 현명해져야만 하고, 아무도 원치 않는 무언가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얼마간은 편안하게 해주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거죠? 나는 그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었던 종부 성사의 말을 하나도 믿을 수 없었어요. 천박한 말들.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한 인간이 죽어가는데 감히 그렇게 말할 수가!”

불빛은 하나도 없었다. 등불은 모두 꺼졌고, 하늘은 구름에 가렸다. 살아 남아 있는 집들은 문명화된 생활양식을 보여 사람들 주의를 끌지 않는 쪽이 더 안전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집의 부지를 걸어 다니는 데 익숙했다.

“어째서 군대가 너를 영국인 환자와 여기 남겨두고 싶어하지 않았는지 알지? 아니?”

“남세스럽게 결혼이라도 할까 봐요? 내가 파더 콤플렉스가 있어서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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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도 내 근처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한참 뒤로 물러섰죠. 난 속물들의 이야기에 끼지도 않았어요. 누군가 죽을 때도 옆에 있지 않았어요. 그때 그 사람을 만난 거예요. 까맣게 타버린 사람. 나중에서야 영국인임이 밝혀진 사람. 참 오랜만이었어요, 데이비드 아저씨, 내가 남자와 무언가를 해볼 생각을 한 것은.” (P114)


두 남자는 밀가루 한 자루를 찾으러 골짜기까지 수레를 타고 내려간다. 또, 군인은 지회를 제거한 지역의 지도를 산 도메니코에 있는 본부에 전달도 해야 한다. 서로에 관한 질문을 하기가 어색한 두 사람은 해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많은 질문이 오고 가다 나이든 남자는 전쟁 전부터 그녀를 알았다고 인정한다.

“캐나다에서요?”

“그래, 거기서부터 알았지.”

두 사람은 길 양쪽에 피워놓은 수많은 모닥불을 지나치고 카라바지오는 젊은 군인의 관심사를 그들 자신에게로 돌린다. 이 공병의 별명은 킵이다. “킵을 데려와.” “여기 킵이 온다.” 그 별명은 기이하게도 저절로 그에게 붙었다. 그가 영국에서 처음 폭탄 제거 보고서를 썼을 때, 버터가 떨어져 보고서에 얼룩을 남겼고 장교가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지? 키퍼 기름?” 주위 사람들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때 키퍼가 뭔지 몰랐지만 젊은 시크 교도는 그 후에 그 말이 염장한 영국 물고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말을 번역으로 들어 알았다. 일주일 안에 그의 본명인 키르팔 싱은 잊혀졌다. 그는 별로 거리끼지도 않았다. 서퍽 경과 그의 폭약 전담반은 그를 별명으로 부르길 좋아했고, 그는 성으로 부르는 영국식 관습보다는 별명이 더 나았다. (P116-117)


“천천히 읽어요, 아가씨, 키플링은 천천히 읽어야 돼. 쉼표가 찍힌 곳을 주의 깊게 보면 자연스레 끊어 읽는 곳을 알 수 있게 돼요. 그는 펜과 잉크를 사용했던 작가죠. 한 페이지를 쓰다가도 여러 번 고개를 들었을 거요. 창문 밖을 내다보며 새 소리에 귀를 기울였겠지. 혼자 있을 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듯이. 어떤 작가들은 새들의 이름을 모르지만 키플링은 알고 있었어요. 아가씨의 눈은 너무 빠르고 북미 대륙 사람답지. 키플링이 펜을 놀렸던 속도를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오래된 첫 문단이 얼마나 소름 끼치고 따개비처럼 끈적끈적 달라붙겠어.”

영국인 환자가 해준 첫 번째 낭독 강의였다. (P125)


1936년 7월

전쟁에는 평화 시에 일어나는 우리 인간의 배신에 비하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배신들이 일어난다. 새 연인은 다른 연인의 습관을 받아들인다. 사물은 짓뭉개지고 새로운 견지에서 드러난다. 이런 일들은 초조하거나 부드러운 문장으로 행해지지만 심장은 불의 기관이다.

사랑 이야기는 심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몸속에 살고 있는 그 음침한 거주자가 아무것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즉, 사랑을 우연히 만났을 때 우리의 몸은 그 무엇도 속일 수 없다. 현명한 잠도 습관적인 사회적 우아함도 속일 수 없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과거를 소진하는 일이다. (P130-131)


그는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사막에서 온 이 영국인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해나를 위해서 이 사람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이 사람을 위해서 피부를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탄닌산이 화상 입은 남자의 생살을 감추어주고 있듯이.

전쟁 초기에 카이로에서 일하면서 그는 이중 첩보원이나 육신을 갖춘 유령을 만들어내는 훈련을 받았다. 그는 “치즈”라는 이름의 가공 요원을 담당했고, 몇 주 동안 적에게 거짓 소문을 흘리며 이 가공의 요원에게 사실을 입히고 탐욕스럽다거나 술에 약하다거나 하는 성격을 부여했다. 카이로의 어느 구역에서는 사막에서 전체 연대를 만들어내서 일한 적도 있었다. 그는 전쟁의 한때,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바쳐진 온통 거짓말만 하던 시기를 거쳐 살아왔다. 그는 마치 새 울음소리를 흉내 내며 어두운 방 안에 있는 남자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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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얼굴 조각상이 그려진 <역사> 판본도 본 적이 있어. 프랑스 박물관에서 발견된 조각상이었지. 하지만 내 상상 속의 헤로도토스는 그런 모습이 아니야.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은 사막에서 볼 수 있는 마른 체격의 남자지. 오아시스마다 떠돌아다니며 씨앗을 교환하듯 전설을 교환하고 의심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신기루를 꿰뚫는 사람. 헤로도토스는 말했지. ‘나의 이 역사책은, 시작에서부터 주요한 역사적 주장들에 대한 보충 설명을 추구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점은 역사가 미치는 범위 안 막다른 곳이야.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서로를 배신하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몇 살이라고 했지, 해나?”

“스무 살이에요.”

“내가 사랑에 빠졌던 건 그보다 훨씬 늦은 나이였지.”

해나는 잠깐 머뭇거린다.

“상대 여자분은 누구였어요?”

하지만 그는 이제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린다. (P159)


우리는 계속 이동해야만 했어. 발길을 멈추면 모래바람이 가만히 있는 건 무엇이든 감싸버리겠다는 듯 차올라 마침내 사람을 그 안에 가둬버리기 때문이야. 영원히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어. 어떤 모래폭풍은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기도 하지. 심지어 몇 년 뒤에는 트럭을 타고 지나갔는데도 시야가 캄캄한 채로 운전해야만 했어. 가장 심각한 공포는 밤에 찾아와. 한 번은, 쿠프라 북쪽 어둠 속에서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었지. 새벽 세 시에, 질풍이 땅에 박혀 있는 천막들을 쓸어버려 우리는 그와 함께 날아가 버렸어. 마치 가라앉은 배에 물이 차듯 모래를 잔뜩 들이마시고 가라앉으며 질식하기 직전 낙타 운전수가 꺼내주었지.

우리는 아흐레 동안 폭풍 세 개를 지나 여행했어. 공급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작은 사막 마을들을 놓치고 말았어. 말이 사라져버렸지. 낙타 세 마리가 죽었고, 지난 이틀 동안 음식도 차도 없었고, 다른 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아침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불에 그을려 거멓게 된 차 단지와 기다란 숟가락, 유리잔이 짤랑거리는 소리뿐이었어. 사흘째 밤이 지나자, 우리는 이야기를 포기했어. 중요한 건 불과 최소한의 갈색 액체뿐.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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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소유할 수는 없어. 사막은 바람에 불려온 천 조각으로, 돌로도 눌러놓을 수 없어. 사막은 캔터베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온갖 전투와 조약이 유럽 국가들과 동방국가 사이를 조각조각 꿰매기 한참 전부터 수백 가지의 변화하는 이름이 붙여졌지. 사막을 여행하는 카라반, 이상하리만큼 한가로운 연회와 문화들은 그 뒤에 아무것도, 하다못해 깜부기불 하나도 남기지 않았어. 유럽에 집을 두고 저 멀리 아이들을 둔 우리 모두도 우리 고국의 옷을 벗어 던지고 싶어했어. 사막은 신앙의 장소이지. 우리는 풍경 속으로 사라진 거야. 불과 모래 속으로. 우리는 오아시스 항구를 떠났어. 물이 나와 만질 수 있는 곳...... 아인, 비르, 와디, 포가라, 코타라, 샤더프.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 위에 내 이름을 더하고 싶지 않았어. 내 성을 지워버려! 국가를 지워버려! 나는 사막으로부터 그런 것들을 배웠지. (P184)


그는 후에 이를 근접성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사막의 근접성, 여기서는 그 말이 유효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그 말을 사랑했다. 물의 근접성, 여섯 시간 동안 모래 바다를 달려가는 차 안에서 붙어 앉아 있는 신체의 근접성. 트럭의 변속 장치 옆에 놓인 그녀의 땀 찬 무릎, 언틀먼틀한 길을 넘을 때 휙 뒤틀리기도 하고 솟아오르기도 하던 무릎. 사막에서는 어디든 둘러볼 여유가 있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배치에 대한 이론을 세울 여유가 있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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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신앙의 장소이지. 우리는 풍경 속으로 사라진 거야. 불과 모래 속으로. 우리는 오아시스 항구를 떠났어. 물이 나와 만질 수 있는 곳……. 아인, 비르, 와디, 포가라, 코타라, 샤더프.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 위에 내 이름을 더하고 싶지 않았어. 내 성을 지워버려! 국가를 지워버려! 나는 사막으로부터 그런 것들을 배웠지. (P197)


“얘기 하나 해주마.”

카라바지오는 해나에게 말한다.

“알마시라는 헝가리인이 있었어. 전쟁 중 독일군 편에서 일했다지. 아프리카 군단하고 같이 비행을 했다던데.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더군. 1930년대에 위대한 사막 탐험가였다고 해. 사막에서 물이 솟는 구멍을 모두 알고 있었으며 모래의 바다를 지도로 만드는 일을 도왔다지. 사막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하더군. 사막의 방언을 모두 다 알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니야? 세계 대전 사이에 그는 항상 카이로에서 탐사 여행을 떠났어. 한 번은 제르주라를 찾아 나섰던 탐사였다고 해. 잃어버린 오아시스, 그런 후,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군에 입대했다지. 1941년, 그는 첩자들을 위한 안내역이 되어 그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 카이로로 갔다는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 영국인 환자는 영국인이 아니라는 거야.” (P214)


내 하루의 반 동안은 당신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

그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당신을 다시 만나건 아니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건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야.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의 문제지.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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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은 파고 있던 들판에서 걸어 나온다. 왼손은 뺀 것처럼 앞으로 쳐들고 있다.

그는 해나의 터밭에 세워놓은 허수아비, 통조림 깡통을 매달아놓은 십자가를 지나 언덕 위 빌라 쪽으로 간다. 마치 촛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막을 때처럼 앞으로 내민 손을 오므려 다른 손을 감싼다. 해나는 테라스에서 그와 마주친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기 손에 갖다 댄다. 그의 새끼손가락 손톱 위에서 맴돌던 무당벌레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으로 건너간다.

그녀는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그녀도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그녀는 부엌을 질러 위층으로 올라간다.

환자는 해나가 들어가자 얼굴을 돌린다. 그녀는 무당벌레를 담은 손으로 그의 발을 건드린다. 벌레는 그녀를 떠나 검은 피부 위로 움직인다. 하얀 시트의 바다를 피해 벌레는 저 멀리 보이는 검은 몸을 향해 긴 여로를 떠나기 시작한다. 화산 폭발이 일어난 듯한 살 위를 움직이는 빨간색이 환하다.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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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끼며 생긴 동그라미는 점점 커져 이제는 지름이 30센티미터 가까이 되었다. 몇 분만 더. 그는 누군가 폭탄에 붙여놓은 종잇조각을 보았다. 그들은 그날 아침, 모든 폭탄 해체 부대에 보내진 최신 도구 상자 속에 끼어 있던 그 종이를 읽고 웃음을 터뜨렸었다.

폭발이 합리적으로 허용되는 때는 언제인가?

만약 한 인간의 생명을 X라고 수치화하고, 위험을 Y라 하며 폭발로부터 생길 수 있는 피해를 V로 추산할 때, 논리학자는 V가 Y분의 X보다 작을 때면 폭탄이 터질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Y분의 V가 X보다 크다면 원래 그 자리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걸 피하기 위해 어떤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

누가 이런 걸 썼을까? (P274)


“어느 날 형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눈을 뜰 거야. 아시아는 아직도 자유로운 대륙이 아니죠. 형은 우리가 스스로 영국인들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데 아연실색했어요. 언제나처럼 우리는 의견이 갈려 다퉜죠. ‘언젠가 너도 눈을 뜨겠지.’ 형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는 했습니다.”

공병은 눈을 꼭 감고 그 은유를 비웃으며 말한다.

“일본도 아시아야. 나는 말했죠. 하지만 시크 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학살되었어. 하지만 형은 무시했어요. 형은 영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는 시크 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그에게서 몸을 돌린다. 세계의 분쟁. 그녀는 빌라를 덮은 한낮의 어둠 속을 걸어 들어가 영국인 환자 옆에 앉는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는 밤이면, 그는 다시 또 다른 별자리가 된다. 그는 천 개의 적도로 이루어진 팔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포옹하며 잠들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파도가 친다. 그녀는 품안에 인도의 여신을 품는다. 밀과 리본을 품는다. 그가 그녀 위에 몸을 숙이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아 자신의 손목에 묶는다. 그가 움직일 때, 그녀는 천막의 어둠 속에서 모기가 물 듯 그의 머리카락 속에 따끔한 전기가 통하는 것을 보기 위해 눈을 뜨고 있다. (P282)


제프리 클리프턴이라는 젊은이는 옥스퍼드에서 친구를 만났다가 그에게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는 내게 연락을 하고 다음 날 결혼하고 이 주 후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카이로로 왔지요. 두 사람의 신혼여행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게 우리 이야기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캐서린을 만났을 때, 그녀는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유부녀였지요. 클리프턴이 비행기에서 나오고,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만 염두에 두고 탐사를 계획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그녀가 나타난 겁니다. 카키 반바지에 뼈가 도드라진 무릎, 그 당시 그녀는 사막에 아주 열렬한 관심을 가졌지요. 나는 클리프턴의 아내가 가진 열렬함보다 클리프턴의 젊음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우리의 조종사이고, 연락병이며, 정찰대였으니, 그는 새 시대를 의미했고 하늘을 날며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암호로 일러주는 컬러 리본을 떨어뜨려 주었어요.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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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매독스가 우리 여행을 설명하고 클리프턴이 우스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코냑 한 병을 다 마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녀가 <역사>를 읽기 시작했지요. 칸다울레스 왕과 그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항상 그 이야기를 대충 훑고 넘겨버립니다. 그 이야기는 책 초반에 나오는 데 내가 관심을 가진 장소나 시대와는 별반 관련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물론 유명한 이야기이죠. 또한 그녀가 읽고자 선택한 이야기기도 하고.

이 칸다울레스 왕은 자기 아내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그렇게 되었으므로 아내가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훨씬 아름답다고 믿었다. 다스킬루스의 아들이 기게스에게 (왕은 모든 창병들 중에서도 그를 가장 총애했으므로) 왕은 아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는 했고 온갖 미사여구로 찬양했다.

“듣고 있어요, 제프리?”

“그래, 여보.”

그는 기게스에게 말했다. “기게스, 내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해도 그대가 못 믿는 것 같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니 방법을 궁리해 보았는데 아내가 벌거벗은 모습을 그대에게 보여주어야만 하겠어.”

이에 대해서 할 말은 많이 있겠지요. 결국 기게스가 왕비의 연인이 되고 칸다울레스를 죽인 것처럼 결국 내가 그녀의 연인이 되었던 것을 알고 있으니. 나는 종종 지리학적 실마리를 찾으려고 헤로도토스를 펴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자신의 삶을 향한 창으로서 그 책을 폈던 겁니다. (P301-302)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헤로도토스 책에 나오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읽어주었던 한 여자와. 나는 그녀가 모닥불 너머에서, 남편을 놀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책에서 읽어내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저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들 두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 말고는 굳이 그 이야기를 뽑은 숨은 동기가 없을 테니까. 단순히 그 이야기가 낯익은 상황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었죠. 하지만 인생에서의 길은 갑자기 드러나는 겁니다. 어찌했든 그녀가 처음 발을 헛디딜 때는 미처 몰랐더라도. 나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P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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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 바닥, 그녀의 남편이 비행기를 추락시킨 후, 그는 그녀가 가지고 온 낙하산을 잘라서 펼쳤습니다. 그녀는 그 위에 몸을 웅크리고 부상의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렸지요. 그는 손가락을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넣고 다른 상처가 있는지를 찾아보았다가 어깨와 발을 만져보았습니다.

이제 동굴 속에서 그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녀의 우아함. 이 팔다리들. 그는 벌써 그녀의 천성을 그의 주먹 속에 꼭 움켜쥐었습니다. (P325)


“나는 그녀가 내 아내라고 했습니다. 캐서린이라고. 그녀의 남편은 죽었으니까요. 나는 그녀가 심한 부상을 당해서 아인 두아 우물 북쪽, 우와이나트에 있는 길프 케비르의 동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물이 필요하다고. 음식이 필요하다고. 그들을 안내해서 데리고 가겠다고. 내가 필요한 건 지프차 한 대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빌어먹을 지프차 한 대..... 아마도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긴 여행을 한 끝에 미쳐버린 사막의 광인 예언자 같았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전쟁은 벌써 발발한 후였어요. 그들은 사막에서 첩자들을 색출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이름을 가지고 이 작은 오아시스 마을들을 전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용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엘 타지에 나타난 길 잃은 영국인 탐사단. 그때 나는 광포하게 날뛰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 나무 울타리 감옥을 사용했어요. 샤워실 크기만한. 나는 그런 우리에 갇혀 트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나는 이리저리 발버둥을 치다가 마침내 우리 안에 든 채로 거리 위에 나가떨어졌어요. 나는 캐서린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길프 케비르라는 이름을 외치고요.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불렀어야 하는 이름, 그들의 손 위에 명함처럼 놓일 이름은 클리프턴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다시 트럭 안으로 끌고 들어갔어요. 나는 그저 여타의 2급 스파이 용의자였습니다. 그저 평범한 국제적 악한이었던 거죠.” (P328-329)


“난 당신하고는 얘기를 나눌 수 있어요. 카라바지오. 우리 둘다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저 아가씨나, 저 젊은이. 두 사람은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죠.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든 간에, 내가 처음 해나를 만났을 때, 해나는 아주 절망하고 있었지요.”

“그 애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전사했소.”

“알아요. 해나는 그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모든 이와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그녀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유일한 방법은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죠..... 당신은 우리 둘 다 아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마치 가능성을 생각해 보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내가 있습니까?”

알마시가 물었다.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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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신경도 쓰지 않는군요. 이 일이 우리 사이에서 벌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당신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은 지나쳐버리고 소유권이라거나 소유하는 행위, 소유당하며 이름이 붙여지는 행위를 혐오하죠. 당신은 우리 관계가 하나의 덕성이라고 생각해요. 난 당신이 비인간적이라 생각하고. 내가 당신을 떠나면, 당신은 누구에게 갈 거죠? 다른 연인을 찾겠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요, 나쁜 사람.”

그녀는 언제나 말을 원했습니다. 말을 사랑했고, 말을 먹고 자라났지요. 말을 통해 그녀는 명징함을 얻었고, 이성과 형태를 가질 수 있었지요. 반면 나는 말은 물속에 박힌 막대기처럼 감정의 흐름을 바꾼다고 생각했습니다. (P332-333)


나는 이런 일들을 믿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면 우리의 영혼에는 역사가인 부분, 약간 현학적인 부분이 있어서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던 만남이 있었음을 상상하거나 기억하지요. 클리프턴이 그보다 일 년 전 당신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나 필생의 운명을 무시했던 것처럼, 하지만 몸의 모든 부분은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 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분자는 일어나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한 방향으로 뛰고 있지요.

나는 수년 동안 사막에 살다 보니 그러한 일들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막은 주머니 속의 공간이에요. 시간과 물의 트롱프 뢰유. 재칼은 한쪽 눈으로는 뒤를 돌아보며, 다른 쪽 눈으로는 앞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길을 보지요. 턱에는 그가 당신에게 가져다주는 과거의 조각들을 물고 있어서, 그런 과거의 조각들을 모두 찾아 짜 맞춘다면, 지금의 운명이 모두 정해져 있었음이 증명될 겁니다. (P341-342)


그가 그들을 모두 뒤에 남겨놓고 가는 순간이었다. 길 떠나는 기사 뒤로 도개교가 닫히면 그저 자신이 가진 엄밀한 재능에 느끼는 평화로움과 함께 홀로 남겨지는 순간. 시에나에서 그녀가 보았던 벽화가 있다. 한 도시에 있던 프레스코 화. 도시 벽 외곽의 몇 미터. 화가의 그림은 바스러져 떨어져 나가서, 성을 떠나는 여행자가 널리 펼쳐진 과수원조차 볼 수 있을 만큼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가 바로 킵이 하루 종일 가 있는 곳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매일 아침 그는 벽에 그려진 풍경에서 걸어 나와 어두운 혼돈 속으로 들어갔다. 기사. 전쟁에 나간 성인. 그녀는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깜박거리는 카키 군복을 보았다. 영국인은 그를 파토 프로퍼거스라고 불렀다. 운명의 도망자. 그녀는 그가 눈을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 하루가 그를 위해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P36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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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년이죠. 뭐더라? 잠깐 까먹었어요. 하지만 달과 날은 알아요. 우리가 일본에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그래서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느껴져요. 지금부터 나는 개인의 의지는 공적인 의지와 영원히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믿어요. 우리가 이 사실을 합리화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합리화할 수 있겠지요.

패트릭은 프랑스에 있을 때 비둘기장에서 죽었어요. 프랑스에서는 17세기와 18세기에 집보다도 큰 비둘기장을 지었어요. 이렇게요. (P386)


“하늘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하루살이 같이 죽을 것이다. 좀이 옷을 먹듯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 벌레가 양털을 먹듯이 그들을 먹을 것이다.”(이사야서 51:6)

우와이나트에서 히로시마로 이어지는 사막의 비밀.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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