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 앤 카민스키> 2015년
갈아탄 기차는 아주 작았다. 조그만 기관차에 객차 두 칸만 달랑 붙어 있었다. 좌석은 딱딱한 나무의자였고, 여행가방을 올려놓을 선반조차 없었다. 객차에는 거친 덧옷을 걸친 사내 둘과 늙은 여인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남자 둘이 웃음을 터뜨렸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경사가 심한 산길이 나타났다. 기차가 급회전을 하는 바람에 나는 나무의자의 모서리로 얼굴을 처박았다. 가방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화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시 급회전.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또다시 급회전. 현기증이 일었다. 차창 밖으로 협곡이 보였다. 절벽은 기이한 모양의 가시덩굴로 뒤덮였고 바닥에는 침엽수가 누워 있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했다. 오른쪽에 협곡이 나타났다. 다시 터널. 이번에는 협곡이 왼쪽에 있었다. 소똥 냄새가 났다. 압력 때문에 두 귀가 멍멍했다. 침을 삼키자 그 느낌이 사라졌다. 그러나 곧 되살아나 지속되었다. 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무 담장을 두른 고지대 목장과 절벽 너머 산의 능선만 눈에 들어왔다. 또 한 번 급회전. 기차가 멈춰 서면서 여행가방이 마지막으로 넘어졌다.
나는 기차에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지러움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 뒤 마을 쪽으로 길이 보였다. 그리고 뒤쪽으로 폭풍우에 시달려 낡아 버린 문짝과 유리창 덧문을 열어놓은 2층집이 서 있었다. ‘펜션 쇤블릭, 조식 제공, 훌륭한 요리’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창문으로 박제된 사슴머리가 보였다. 우울한 눈길이었다. 예약을 해 놓았으니 어쩔 수 없지. 다른 곳은 너무 비쌌다. (P18-19)
그는 예상보다 훨씬 체구가 작았다. 옛날 사진 속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너무 왜소했다. 스웨터 차림에 검은 색안경을 쓴 그는 한 팔로 미리암의 팔을 붙잡고, 다른 한 팔은 흰색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갈색 피부는 가죽처럼 주름이 잡혔고, 뺨이 축 늘어진 얼굴에 비해 손은 지나치게 컸다.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코르덴바지에 오른쪽 끈이 풀린 실내화를 신은 모습. 왠지 생경한 느낌이었다. 미리암이 그를 의자로 안내했다. 그는 팔걸이를 더듬어 의자에 앉았다. 미리암이 선 채로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쵤너 씨라고 했나.” 그가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이 질문처럼 들리지 않았던 데다 뜬금없이 수줍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악수를 청하려다 말고 얼른 손을 거두었다. 미리암이 경멸하듯 나를 지켜보았다. 이런, 멍청하게 실수할 뻔 했군! 나는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세바스티안 쵤너입니다.” (P25-26)
나는 온수꼭지를 틀었다. 너무 세게 틀어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조금 약하게. 이제 알맞다. 욕조 가장자리에 책을 기대어 세웠다. 그와 이야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는 언제부터 눈병을 앓게 됐을까? 왜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을까? 광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녹음해 둔 터였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다. 내 책은 그가 죽기 전에 출간되어서도 안 되고, 죽은 다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출간되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죽은 직후라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관심의 초점이 될 수 있다. 나는 텔레비전 프로에 초대되어 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화면 하단에는 내 이름과 카민스키의 전기 작가라는 타이틀이 자막으로 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형 미술잡자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책은 많이 젖어 있었다. 나는 <반영>의 나머지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고 그 후 10년간 그려진 템페라 화풍의 소형 유화들로 넘어갔다. 당시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도미니크 실바가 규칙적으로 생활비를 대 주었다. 때로는 그림을 몇 점 팔기도 했다.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선은 훨씬 간결해졌다. 그는 추상화의 경계에 근접할 만큼 형태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풍경화를 그렸다. 도시 풍경이었다.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한 장면을 담은 길거리가 끈적끈적한 안개 속으로 해체되고 있다. 한 남자가 희미한 윤곽을 뒤에 늘이고 길을 걸어간다. 산의 능선이 구름에 휘감기고, 앞으로 밀려오는 듯한 매우 강한 필치의 배경 속에 투명한 탑 하나가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탑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창문처럼 보이던 것은 빛이 반영된 것이었고, 온갖 기교로 장식된 성벽처럼 보이던 것은 현란한 층을 이루는 구름의 무리였다. 오래 바라볼수록 탑을 알아보기가 더욱더 어려워진다. 첫 인터뷰에서 카민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죽도록 어려운 일입니다. 한 마디로 나는 눈이 멀어가고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는 타일 벽에 머리를 기대고 책을 가슴 위에 얹었다. <저녁 색채의 빛>, <기도하는 막달레나>, 특히 리밍의 가장 유명한 시에서 제목을 따온 <졸음에 겨운 산책객의 생각>에서는 사람의 형상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납회색의 어둠 속으로 소멸되어 간다. 이 <졸음에 겨운 산책객의 생각>은 오로지 리밍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회에 받아들여졌다가 클라에스 올덴부르크의 눈에 띄게 된다. 2년 후 올덴부르크의 주선으로 카민스키의 졸작 중 하나인 <성 토마스의 물음>이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 전시된다. 이 제목에 ‘시력을 잃은 화가의 그림’이라는 부제가 덧붙여졌고, 그 옆에 검은 안경을 쓴 카민스키의 사진이 함께 전시되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카민스키는 분노에 치를 떨며 2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열병을 앓았다. 병석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오른손을 흔들고 이어서 왼손을 흔들었다. 책이 너무 무거웠다. 열린 문 사이로 늙은 농부의 그림이 눈에 들어 왔다. 농부는 두 손으로 잡은 큰 낫을 자랑스레 바라보고 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그림들보다 마음에 들었다.
눈이 멀었다는 소문 때문에 카민스키의 그림들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카민스키가 자신은 결코 눈이 먼 게 아니라고 밝히고, 사람들도 그의 말을 받아들였지만 유명세만큼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작품전시회를 열었고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열네살의 예쁜 소녀로 성장한 딸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뉴욕을 비롯해 몬트리올,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 출간된 책에 실렸다. 하지만 시력은 계속 나빠졌고, 그는 결국 알프스에 집을 한 채 장만하여 자취를 감춰버렸다. (P47-48)
“그분은 아직 살아 있다니까요.”
“누구?”
“테레제 말입니다. 과부가 됐지만, 아직 살아 있어요. 북쪽 해변에. 그분이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카민스키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위로 쳐들어 이마를 문지르더니 다시 밑으로 떨어트렸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나는 녹음기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켜져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녹음되고 있을 것이다.
“도미니크가 선생님께 그분이 죽었다고 말했겠지요.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어.”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인했다. 그의 가슴이 불룩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나는 그의 심장이 염려스러웠다.
“열흘 전에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알아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벽 쪽으로 돌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곧 그분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선생님께서 묻고 싶거나 궁금해 하시는 걸 모두 물어보겠습니다.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진실을 알고 싶지 않으세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겠지. 당신은 이 세바스티안 쵤너를 과소평가한 거라고! 하지만 왠지 초조했다.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매 순간 계곡의 불빛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관목 숲이 구리에 음각을 새긴 것처럼 황혼 속에 둥글게 펼쳐져 있다.
“다음 주에 그분을 찾아갈 겁니다. 그러면 그분께.....”
“나는 비행기를 못 타.” 그가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는 지금 심한 착란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는 집에 계시면 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침대 옆에 약이 있어.”
“잘됐군요.”
“멍청하기는,”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약을 챙기란 말이야.”
나는 그를 응시했다. “챙기라고요?”
“차를 타고 갈 거야.”
“설마 진심은 아니시겠지요!”
“왜 안 된다는 거지?”
“제가 모든 걸 전해드리겠습니다. 이건 안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건강이 안좋으세요.” 하마터면 너무 ‘늙었다’고 말할 뻔했다. “저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가 현실일까?
“잘못 안 건 아니지? 그 여자를 다른 사람하고 혼동한 건 아니지? 속은 것도 아닐 테고?”
“세상 어느 누구도 이 세바스티안 쵤너를.....”
그는 “흥”하고 경멸 어린 콧방귀를 쏟아냈다.
“아닙니다. 그분은 아직 살아 있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전화 있는 곳으로 가셔서.....”
“전화하지 않을 거야. 이 기회를 놓칠 거야?”
나는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까지 만사를 내 손아귀에 넣고 조정해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이틀 동안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한다는 것은 기대하지 못했다. 어쩌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그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책은 오랫동안 원천자료가 되어 대학생들과 예술사가들의 필독서가 될 것이다.
“묘한 일이군.” 그가 말했다. “내 인생에 당신 같은 사람이 끼어들다니. 기묘하고 불쾌한 일이야.”
“선생님은 명성을 바라셨고, 지금은 명성을 지니고 계십니다. 명성이 있다는 건 저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죠.”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P122-123)
“마티스도 마찬가지였어. 나를 내쫓으려 했지. 하지만 나는 떠나지 않았어. 그는 내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안 떠났어! 안 떠난다는 게 어떤 건지 혹시 알고 있나? 엄청나게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지.”
“알고 있습니다. 베르니케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어쩌겠어? 결국 나를 미술품 수집가에게 보내더군.”
“도미니크 실바에게로.”
“마티스는 위대했어. 그는 자기 세계에 빠져 있었지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예술가였지. 하지만 나하곤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젊은 예술가들은 특징이 있어. 나도 명예와 탐욕에 거의 미쳐 있었지.” (P131)
“클레랑스에 갔습니다.” 내가 말했다.
“어디?”
“소금광산 말입니다.”
“애쓰셨군!” 카민스키가 소리쳤다.
“그곳에서 정말 길을 잃으셨습니까?”
“우스꽝스럽게 들리겠지. 하지만 안내자를 찾을 수 없었어. 그때까지는 내 눈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거든. 그런데 갑자기 온 세상이 안개로 가득한 거야. 그 지하에 안개가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제야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
“황반망막퇴화증이었군요?” 칼 루드비히가 물었다.
“뭐라고?” 내가 물었다.
“이제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칼 루드비히가 물었다.
“형태, 때로는 색깔, 운이 좋으면 윤곽을 알아볼 뿐이지.”
“출구는 혼자서 찾으셨어요?” 내가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래된 방법을 써 봤지. 계속 오른쪽 벽면을 따라 갔어.” (P143-144)
“원근법은 추상의 기술이야. 1400년대에 만들어져서 그 이후로 인류에게 익숙해진 관습이지. 빛은 수많은 렌즈를 통과해야만 해. 우리가 어떤 그림을 사실적이라고 여기게 되기 이전에 말이야. 실제 현실이 사진처럼 보이는 일은 결코 없어.”
“결코 없다고요?” 나는 하품을 참으며 물었다. 우리는 완행열차의 식당차에 앉아 있었다. 카민스키가 안경을 썼다. 지팡이는 그의 곁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그의 가운을 둘둘 말아서 비닐봉지에 넣은 후 선반 위에 올려놓고, 녹음기를 켜서 탁자 위에 두었다. 그는 스프와 요리 두 접시 그리고 후식까지 먹어 치운 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고기를 썰어 주면서 그가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는 사실은 상기시켰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편안하고 쾌활해 보였다. 쉬지 않고 두 시간 내내 떠들어 댔다.
“실제 현실은 볼 때마다 변하지. 매 순간. 원근법이란 이 카오스를 평면에 가둬 놓기 위한 규칙들의 집합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그래요?” 나는 배가 고팠다. 카민스키와 반대로 맛없는 샐러드 하나만 주문했기 때문이다. 바짝 마른 풀잎사귀에 기름진 소스. 내가 불평하자 웨이터는 한숨만 내쉬었다. 녹음기가 찰칵 소리를 냈다. 카세트테이프가 다 된 것이다. 그는 이제껏 녹음을 해 둘 만한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진실은 오로지 분위기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려진 형태가 아니라 색채 속에서. 정확하게 포착된 소실점은 진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자네 교수들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지?”
“네, 전혀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조금도 아는 것이 없었다. 대학 시절의 기억은 남아 있지도 않다. 무의미한 토론, 리포트 쓰는 일에 겁을 집어먹은 창백한 표정의 학생들, 대학 식당의 맛없는 음식 냄새. 호소문에 사인을 해 달라고 끊임없이 부탁하던 일. 한번은 드가의 작품에 대해 보고서를 써야 했다. 드가? 나는 아무 착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전을 몽땅 베껴 보고서를 제출했다. 두 학기가 지난 후 삼촌의 주선으로 광고회사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 직후에 지방신문의 예술비평 담당기자 자기라 비게 된 것을 알고 지원을 해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처음부터 나는 그 일을 제대로 해냈다. 초보자들은 흔히 혹평기사를 써서 이름을 날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동료들과 같은 견해를 항상 유지하면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곧 그 자리를 내놓고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할 수 있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 화가는 없어. 필적할 인물이 없지. 하지만 그는 색채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어.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을 봐. 미켈란젤로는 그 그림이 이 세계를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지금 녹음 중인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자네는 내가 거장들의 기법들을 시도해 봤다는 걸 알거야. 한동안 나는 색을 직접 만들어 냈지. 색소를 냄새로 구분해 내기도 했어. 이걸 연습하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색을 섞을 줄 알게 돼. 그렇게 해서 나는 시력이 뛰어난 내 조수들보다도 더 잘 볼 수 있게 된 거야.” (P166-167)
“한때 나는 이런 기차여행을 그릴 수 없을까 자문해 봤지. 한순간의 풍경이 아니라 기차여행 전체의 풍경을 말이야.”
“그림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됐을 때 나는 자주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봤지. 시간을 지닌 그림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당신 나는 파리와 리옹 사이의 기차여행을 그려내는 걸 구상했어. 기억 속에서 그려 보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모든 기억을 전형적인 것안에 집약시키는 방식으로 말이야.” (P169-170)
“담배 한 대 주게!” 카민스키가 말했다.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건 간에 나는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네. 자네도 그럴 거야. 안 그런가? 인생이란 게 뿌린 대로 거두기 나름 아닌가?” 나는 그에게 담배를 한 대 내밀었다. 그가 손을 떨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라고 했더라? 나도 그럴 거라고? 나에 대해서 뭔가 눈치 챈걸까.
“일례로 나는 자화상을 연작으로 그려 보려고 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거울 속의 모습이나 사진을 원본으로 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에게 느끼는 표상을 그리려고 했어. 자신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네.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완전히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서 그걸 바로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 노력한다면, 예를 들어 자신의 잘못된 이미지들을 그대로 그리려고 한다면, 모든 디테일들과 모든 특징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려 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탁자를 내리쳤다. “초상화면서도 초상화가 아닌 것이 되지! 그걸 생각할 수 있겠나? 하지만 이 착상은 아무런 결실도 이뤄 내지 못했어.”
“하지만 시도는 하셨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맞아, 시도는 했어. 그때 내 눈이..... 아니, 눈이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어. 아무튼 잘 되지 않았다네. 실패했다면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미리암이 그것들을 불태웠네.”
“뭐라고요?”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그는 머리를 숙이고 담배연기를 수직으로 내뿜었다. ‘그 이후 아틀리에로 내려가지 않았어.’
“그랬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슬퍼할 필요는 없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재능을 평가하는 거니까.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아직 쓸 만한 걸 그려내지 못했을 때.... 자네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 당시 나는 일주일간....”
“5일이지요.”
“그래 5일간 두문불출하면서 곰곰이 생각했지. 당시 나는 나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이런 일에는 어느 누구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지.” 그는 손을 더듬어 재떨이를 찾았다. “뛰어난 착상만으로는 불충분했어. 그런 건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내가 알아야 했던 건 내가 어떤 종류의 화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어.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내야 했던 거지.”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보리달마의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누구요?”
“보리달마는 중국으로 간 인도의 도승이야. 어떤 젊은이가 그의 제자가 되려 했지만, 퇴짜를 맞았지. 그래도 그 젊은이는 보리달마를 따라 다녔어. 아무 말 없이 복종하면서 수년간 헛되이 그의 뒤를 쫓아 다녔지. 그러던 어느 날 제자가 깊은 회의에 빠져 보리달마 앞에 몸을 내던지며 외쳤어. ‘스승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보리달마가 대답했지. ‘그걸 내버리라!’” 카민스키는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그때 그 제자는 깨달음을 얻은 거야.”
“이해가 안 되는군요.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당시 나는 처음으로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어. 나는 <반영> 시리즈의 첫 스케치를 손에 쥐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왔지. 쓸 만한 그림을 얻어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하지만 그건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지.” 그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위대한 화가는 못 돼. 벨라스케스, 고야, 렘브란트와 같은 급의 화가가 못 된다는 뜻일세. 하지만 때때로 나는 매우 뛰어난 그림들을 그렸지. 이건 그리 작은 일이 아닐세. 그 모든 것이 바로 그 닷새 덕분이었어.”
“그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쵤너,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인용이 아니라 느끼는 것일세!” 또다시 그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도약을 통해서만 인생의 중요한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네.” (P173-174)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인생이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사라져 버렸어. 예술은 아무 의미도 없어. 모든 건 그저 환상일 뿐이야.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는 거지.”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