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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설터의 <사냥꾼들>

영화 <추격기> 1958년

by 노용헌

제임스 아놀드 호로비츠는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하며 소령으로 진급한 후 공중 시범팀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고, 비행대대 작전 장교가 되어 비행대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언더 밀크 우드'에서 영감을 받아 비번 시간에 첫 소설인 [사냥꾼들]을 집필하여 1956년 '제임스 설터'라는 필명으로 출판했다. 소설의 영화화 판권 덕분에 설터는 1957년 미 공군 현역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법적으로 이름을 'Salter'로 개명했다.


1958년 로버트 미첨 주연의 영화 '추격기'는 강렬한 연기와 감동적인 줄거리, 한국전쟁의 사실적인 묘사로 호평을 받았다. 할리우드 기준으로는 훌륭한 각색이었지만, 한때 '핫 샷'으로 여겨졌지만 주변 사람들이 영광을 누리는 동안 첫 전투 경험에서 좌절감만 느낀 31세 전투기 조종사의 서서히 자멸하는 과정을 다룬 원작 소설과는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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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을 가릴 만큼 환한 달이 밤하늘을 밝히고 도처에는 옅은 안개가 서리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밤안개 사이로 건물들이 인위적인 빛을 뿜어냈다. 불빛마다 작은 왕관이 하나씩 씌워져 있는 듯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거리에 쪼개졌고 입김이 덧없는 은색 연기처럼 하얗게 흩어졌다. 이곳 일본은 낯선 땅이었다. 땅을 덮은 하늘도 음산하게 빛났다. 마치 역사의 한 장을 걷는 느낌이었따. 마음이 불안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홀로 운명의 흐름 속을 걷고 있었다.

여기까지 먼 길을 왔다. 밤이 낮이 되는 것도 모르게 오랜 시간 비좁고 냄새나는 수송기 객실에 처박혀 수천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통에 그는 마치 견고한 시간을 뚫고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망망대해를 지나 세상의 저쪽 수평선에서 이쪽 수평선으로 건너오는 동안 그는 내내 바닷가에서 멀리 헤엄쳐 가는 사람처럼 자신이 한없이 약하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리는 이미 치워졌다.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그는 바다를 건너 전쟁터로 온 것이었다. 마음에 흥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인간은 보통 자신의 운명을 아는데 클리브도 그랬던 것 같다. 설령 제 운명을 알지 못했더라도 그의 눈은 분명 자신의 운명을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눈은 특별했다. 때론 슬픔만큼 민감하고 때론 조약돌처럼 무표정했다. 두 눈이 차분한 얼굴에서 그나마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었다. 클리브는 세상을 향해 가면을 쓰지 않았다. 쉽게 미소 짓는 입술에 코는 섬약해 보였고, 더욱이 그에게는 전투기 조종사 7년 경력이 가져다준 명성이 있었다. (P18-19)


단 하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서른하나는 분명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다. 일단 시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운동선수에게 제일 먼저 신호를 알리는 게 다리라면 전투기 조종사에게는 눈이다. 극한의 범위에서 전투기를 식별하는 능력이 떨어졌다 해도 얼마간은 손도 흔들림이 없고 판단력도 좋을 수 있다. 가령 다른 조종사의 눈을 이용하는 것 같은 시력 저하를 상쇄할 방법 또한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국에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되고 만다. 더욱이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무겁게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때 함부로 써버린 내일을 이제는 하루하루 손꼽아 세게 된 것이다. 불은을 한탄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다가도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불현 듯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꼭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것은 영혼을 잠식하는 암흑의 병이자 집착이었다. (P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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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해안을 지난 것은 정오가 가까웠을 때였다. 클리브는 수송기 날개 밑에 앉아 초조하게 밖을 내다보았다. 통렬한 성취의 순간을 그는 알았다. 이곳에서 지나간 날들에 걸맞은 고별 비행을 할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먼 길을 달려왔지만 아직도 앞길이 많이 남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지운 의무감과 자부심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을 벌써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 짐을 훌훌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승리의 환희와 비슷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 그는 확신했다. 알려진 모든 것이 지나 과감히 전진하는 사람처럼 자신 역시 이번 전쟁에서 뜻을 이루리라는 것을.

객실 안을 둘러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고개를 뺀 채 깨끗한 겨울 하늘 아래 잔해처럼 고요하게 펼쳐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쟁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은 많지 않았다. 보드라운 눈밭이 시야 닿는 곳마다 흩뿌려진 가운데 강물이 정맥처럼 흐르고 있었지만 클리브가 생각하는 것은 인류의 어머니 대지가 아니었다. 그의 눈은 조종사의 눈이었다. 적대적인 산줄기며 랜드마크가 없는 지형, 위급한 상황에서 불시착할 수 있는 평평한 땅이 그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가 불과 한 시간 만에 날아온 거리를 보병들은 몇 주에 걸쳐 사투를 벌이며 걸어왔을 것이다. 그는 여행자처럼 편안하게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문가의 초연함과 막중함이 느껴졌다. 앉은 자리에서 유일하게 시야로 들어오는 육중한 비행기 날개와 기체 바깥의 엔진실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번들거리는 시커먼 기름띠가 엔지 덮개 뒤로 넓게 퍼져 있었다. 그는 초조한 눈길을 다시 땅으로 돌렸다. (P29-30)


“달리 전쟁이야?” 클리브가 대꾸했다. “우리도 쏘고 저쪽도 쏘니까 전쟁이지.”

“맞아. 전쟁보다 공평한 게 있을까?”

“없지.”

“똑똑하게 처신하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해. 어떤 놈과 마주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모자라는 놈도 많지만 케이시 같은 자를 딱 맞닥뜨릴 수도 있지.”

“누구?”

“케이시 존스.”

“그게 누군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데즈먼드가 물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난 처음 들어. 러시아의 챔피언이야.”

“정확히 누군지는 나도 몰라. 까만 줄이 그어진 비행기를 모는데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띄지. 이밀 대령님께 나중에 한 번 여쭤봐. 신나서 말씀해주실 거야. 전부 다 믿지는 말고. 언젠가 대령님이 기관포를 세 군데나 맞고 귀환한 일이 있는데, 살아 돌아온게 기적이었어. 조종석 바로 앞으로 구멍이 뻥 뚫렸는데 머리통 하나가 드나들 만큼 커다랬지. 날개에도 그만한 구멍이 두 개나 더 나 있었어. 케이시 짓이었지. 사람들 말로는 케이시랑 대령님이 20분 남짓 교전을 벌였다는데 정작 대령님은 기관총 한번 제대로 못 쏴보고 돌아왔다는 거 아냐. 대령님이 조종석에서 내리는데 꼭 심장마비에 걸린 사람 같더라니까. 진짜야. (...)” (P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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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대 안에 미그기를 격추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그대로였다. 로비가 속한 바로 옆 편대는 로비의 다섯 대 말고도 석 대를 더 격추했다. 맞은편에 있는 놀런의 편대는 넉 대를 떨어뜨렸다. 그중 놀런이 두 대를 처치했다. 그 사이에 끼어서 지금껏 미그기를 한 대도 못 잡았으니 극명하게 대조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편대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 클리브가 투입된 것이었다.

클리브는 짐을 최대한 정리한 뒤 야전침대에 걸터앉았다. 흐뭇했다. 대원들도 괜찮고 그들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벅찬 감정이었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이름을 빛낼 것이다. 밑바닥에서부터 새로 시작해 영광에 이를 기회를 잡는 것, 클리브는 그걸로 충분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자 현실감이 사라졌다. 대원들이 유능한 조종사가 아니라고 해도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그가 그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이상 뛰어난 조종사로 키워내면 그만이었다. 어스름이 깔리는 한기 서린 내무실에 대원들과 함께 앉아 있노라니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슴을 가득히 채워왔다. 기대로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말없이 앉아 있기가 어느새 고역처럼 느껴졌다. 곧 그날이 올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P71-72)


미그기는 그들의 전부였다. 미그기를 잡았을 때에만 우수한 조종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태양은 그들의 머리 위를 환하게 비추고 정비병은 제 손으로 정비한 비행기를 그들에게 기꺼이 내준다. 순회공연 중인 여배우들은 앞다투어 몰려들고 그들은 찬사와 환호와 선망을 몰고 다니는 세계의 중심이 된다. 반면에 미그기를 잡지 못하면 — 그 자체로는 수치스러운 것도 아니요, 유능하고 용감한 조종사가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 에이스 3인방이 맨 앞줄에서 광휘를 뽑아내는 동안 저쪽 뒤편에서 어슬렁거릴 도리밖에 없다. 한낱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P89)


비행기 편대가 임무를 마치고 귀대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은 에어쇼를 펼치듯 비행기 넉 대로 이루어진 편대가 대열을 유지한 채 상공을 날아와 시커먼 연기를 나란히 내뿜으며 활주로 상공에서 장주비행에 들어간다. 그 무엇도 그들을 파괴할 수 없는 순간이다. 기체에는 차가운 은빛 광채가 돌고 우아함은 그 무엇으로도 가려질 수 없다. 적군조차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륙할 때조차도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띠며 마치 어서 일어나 환희의 물결에 동참하라는 외침처럼 보인다. 광휘를 번쩍 내쏘며 그들이 북녘땅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동체에 연료통이 그대로 매달려 있으면 임무 중에 별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첫 번째 징후다. 반면에 연료통 없이 편대 대열이 깨진 채 두 대씩 돌아오거나 간혹 한 대가 홀로 돌아온다면 전투가 벌어졌다는 신호다. 최종 접근을 한 뒤 활주로에 내리는 비행기의 총구 주위를 유심히 살피면 발포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총구가 시커멓게 그을어 있다면 교전이 크게 벌어진 것이다. 귀대하는 비행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훨씬 전부터 전투상황실의 무전 교신 장비로 임무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교신 내용에 귀를 세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기지로 돌아오는 비행기의 외관을 먼저 살폈다. (P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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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실패를 겪으며 성숙하고, 승자도 실은 승리를 거둘 적마다 기력을 잃어서 원기를 되찾느라 더 큰 고생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일지 모른다. 패배를 당하면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각성에 이르게 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신이 더욱 강인해진다는 것 역시 맞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클리브가 보기에 그것은 빈곤이 곧 강성해지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결코 가난해서 강성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난은 영혼을 좀먹는 것이다. 마치 가슴에 달라붙은 거머리가 온 몸의 진을 몽땅 빨아 먹는 통에 껍데기뿐인 육신 하나조차 지탱하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가난을 이겨내는 사람이 드문 것처럼 패배 속에서 눈물 외에 다른 것을 발견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승리와 패배만이 존재하는 견고한 틀 속에 어떻게 해서 자신이 갇히게 되었는지 의아했다. 뛰어남의 정의가 오직 하나인 이 황폐한 땅에서는 승리와 패배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타협도 없었다. 성공과 실패 사이에 중간 지대가 얼마간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런 공간이 절실했다. 갈망으로 가슴이 텅 비는 듯했다. 불현 듯 그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명예롭게 벗어나기를, 그래서 더는 이 싸움의 일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한편 눈앞에 험로가 가없이 펼쳐진 것을 보고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한마디로 도덕적 판단을 상실한 것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라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적기가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는 적기를 만나 패배시키고 싶었다. 단지 운이 나빠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차마 직시할 수 없는 그 어떤 내밀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스스로도 모르는 문제가 자신에게 있다면 그는 패배한 것이다. 불안이 가슴을 옥죄어왔다. (P101-102)


도터스도 서울까지는 함께 가기로 해서 셋은 날이 저물자마자 길을 떠났다. 김포로 온 뒤 첫 서울행이었다. 길은 클리브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험하고 울퉁불퉁했지만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서울로 간다는 생각에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서울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질척한 거리에는 오가는 차량 없이 창문 두어 개에 희미한 불빛만이 어려 있었다. 유리창도 판자벽도 없이 뼈대만 남은 건물 사이로 텅 빈 전찻길이 길게 뻗어나가는 그곳은 유령의 도시였다. 큰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고대 유적지를 배회하는 듯했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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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오면 안 돼, 버트.” 클리브가 말했다. 그들은 삶과 죽음 사이, 존재의 고원에 있었다.

“왜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삶이니까.”

“어느 면에선 그렇죠.”

“모든 면에서 그래.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아니야, 단박에 가는 게 중요해. 가령 하늘 저 높이 별에 닿았다가 지상으로 떨어져 스러진다면 근사하지 않겠나?”

“그게 좀....”

“이상하다고? 몇 낸째 해온 생각이야. 진실한 생각만 해도 부족할 판에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참 묘하지. 자네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곳의 모든 것은 완벽해야 하네.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우리는 다시 없이 순수한 이곳에 왔어. 순수하다는 건 어찌 보면 인위적이라는 뜻도 되네. 우리가 그만큼 문명화되었으니까. 아주 깨끗한 공간에서 중세의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지금 어린아이의 꿈속에 들어와 있는 거야. 어른의 천국이기도 하지. 유일무이한 그 무엇, 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모르지만, 여하튼 그 소중한 것의 마지막 남은 몇 조각을 우리가 지금 몰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그건 심지어 왕에게도 너무 사치스러운 소일거리지.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네. 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자가 영웅이야.” (P158-159)


“위험한가요?” 여자가 물었다. “아버지 말씀이 용감해야 한 대요.”

“어느 면에선 그래요.” 클리브가 대답했다. “설명하기가 힘든데 처음에는 아주 위험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져요. 스포츠가 되지요. 내가 그 스포츠의 일부가 되었다가 종국에는 그 이상이 돼요. 은신처가 된다고 할까. 하늘은 신과 같은 공간이에요. 홀로 하늘을 날고 있으면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요.”

그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했다. 그녀에게 자기 생각을 더 말하고 싶었다.

“오늘 같은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이른 여름이었는데 한국에서 일이 터졌다더군요. 난 갈 수밖에 없었어요. 나에게 맡겨진 일이 뭔지 알 것 같았으니까.”

“그게 뭔데요?”

“제일 중요한 건,” 그가 말했다. “자기 일을 잘하는 거예요. 그 일에 전념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부심이 찾아와요. 순수하고 치명적인 자부심이. 그 다음에는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행복감을 맛보게 된답니다. 당신이 위대한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잘하게 된다면 말이죠. 전투기 조종사들이 사는 세계가 있어요. 그곳에선 적기 다섯 대를 격추하면 어떤 집단, 말하자면 영웅 집단에 들어가게 돼요. 영웅 집단에 들어가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요.”

“당신도 들어갔나요?”

“아니요, 난 겨우 한 대 격추했을 뿐이에요.”

“당신은 분명 해낼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그러면 좋으련만. 이제 더는 겁먹은 소년으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아요. 한편으론 이번 전쟁이 마지막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당신이 어떤 청중 앞에서건 마지막 무대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고 싶듯이, 말하자면 이 모습으로 나를 기억해 주세요 같은 태도랄까. 그 누구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진실이 언제나 진실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건 아니지요. 우리 비행단장은 진실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없는 사람인데, 그자가 어느 우울한 날 아침 이렇게 말하더군요. ‘소수의 몇 명만이 남보다 더 멀리 간다.’ 당신에게 그런 의무가 주어진다면 어쩌겠어요? 따르는 수밖에. 내 꿈이 뭐냐고 물었지요. 내 꿈은 바로 이거예요. 실패하지 않는 것.” (P184-185)


바람이 세차게 부는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다. 계절의 변화가 한반도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부신 봄이었다. 따스한 햇살 속에 창문이 끊임없이 덜컹거렸고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문이 밖으로 활짝 열렸다. 서울로 가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의 키 작은 소나무와 이따금 눈에 띄는 버드나무들도 빛나는 것 같았다. 빈 밭마다 가래질에 쟁기질한 자국이 선명했다. 땅은 비옥해 보였지만 어쩐지 햇빛 속에 지쳐 보였다. 얼음을 판다는 팻말이 길가의 판잣집 옆에 올 들어 처음 세워졌다. 한국인들은 겨우내 꽁꽁 언 강에서 얼음 덩어리를 떼어내 톱밥에 묻어둔 다음 날이 풀어지면 내다 팔았다.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가운데 하나였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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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은 언제나 안 좋았다. 그런 까닭에 클리브는 새벽 임무가 싫었다. 무방비로 노출된 채 여전히 잠의 장막이 눈과 입을 덮고 있는 아침이 가장 취약한 시간이었다. 면도를 하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진정한 나이가 드러나는 듯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했다.

그러나 밤은 더 안 좋았다. 아군기가 격추된 날에는 특히 더했다. 아군기가 격추된 날에는 특히 더했다. 머릿속을 헤집는 수많은 상상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가능성을 의심하고 따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모든 사람과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국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멀었다. 도쿄에 갈 수 있다면, 따뜻한 저녁 강가 큰 길을 지나 그 공원에 갈 수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런 생각이 격렬한 선율처럼 마음속을 훑고 지나갈 때면 그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는 듯했다. 흠씬 취한 듯한 짙은 어둠을 지나 미요시의 깨끗한 다다미방으로 다시 갈 수 있다면. 그 경건함을, 그 깊고 만족스러운 밤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P248)


비행대대는 삶의 요약판이다. 당신은 어려서 그곳에 처음 당도한다. 그때는 기회도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모든 것이 새롭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고통스러운 배움의 나날과 환희의 날들이 지나가고 어느덧 성인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 문득 당신은 이미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주위는 온통 생소한 얼굴과 관계뿐, 당신은 그 속에서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또한 당신이 알고 지냈던 모든 이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전쟁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먼 옛날의 기억으로 잊히고 만다. 마치 대학교 졸업반 시험이 끝난 것과 비슷하다. 모든 사람이 그곳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그중에 대부분이 당신의 친구들이다. 또한 그중에 대부분을 당신은 두 번 다시 못 보게 될 것이다. 데즈먼드에 이어 로비와 도터스 그리고 들레오. 병영 내무실은 끊임없이 낯선 얼굴로 채워지고 매주가 지날수록 신참들은 더 많이 밀려들어온다. 그들은 과거와 그 시절의 신성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자신들이 도착하는 날 시작되는 것이며, 그들이 전임자들처럼 전쟁에 진저리를 치면서 임무를 빨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려면 아직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 클리브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 미숙했고, 너무 자신만만했다. (P257-258)


사람은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다. 특히 전투기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전투기. 지금껏 숱한 난관이 있었지만 그 단어가 이토록 황폐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당신은 텅 빈 조종석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벨트를 매고 당신 자신을 기계에 꽂는다. 조종석 뚜껑이 닫히면 당신은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다. 당신의 산소, 그리고 금속 용기의 차가운 진공 속으로 불어넣는 당신의 숨결. 말을 하려면 무전기를 켜야 한다. 무(無)를 향해 아래가 아니라 위로 올라갈 뿐 당신은 심해의 잠수부처럼 고립되어 있다. 당신의 동료들도 비행에 나선다. 그들은 적어도 두 대씩 짝을 이루어 전령처럼 당신 옆에서 편대비행을 하고 때론 능란한 조종술로 적과 싸우지만 실제로 당신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당신은 철저히 혼자다. 끝에 가서 당신이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젠가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누군가 비탄에 찬 목소리로 애원하듯 “오, 하느님!”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당신도 그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는 있어도 그들이 당신에게 와 닿을 수는 없다. (P260-261)


그는 서약을 지켰다.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목청껏 외치고 싶었다. 자신이 약속을 지켰다고, 그리고 저 높은 청명한 하늘에서 전설을 만났고 기어코 그 전설을 정복했다고. 그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결국 진이 다 빠져나갔는지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대한 피로에 결박당한 채 자신의 나약함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고요한 여름날 밤, 어둠이 두 겹으로 내려앉게끔 눈을 꼭 감고 누워 있었지만 그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승리했으나 삶의 의욕이 완전히 소진되어버렸으므로. (P305)


그는 거의 끝에 다다랐고, 그를 사로잡았던 승리를 향한 그 끔찍한 갈망은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하듯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았다. 고통을 너무 오래 견뎌온 탓이었다. 고통은 그의 살갗에 새겨진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는 괴롭지 않았다. 만족해서가 아니라 마침내 무감각 속으로 빠져든 것이었다. 그는 정갈하게 씻긴 상태였다. (P306)


클리브에게 전쟁은 그가 언제나 두려워했던 그 최후의 고독 몇 분 사이에 끝났다. 그는 ‘작전 중 실종’으로 기록되었다. 마지막 외침이 공기 속에 정제된 채 남아 있었더라도 그것은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저들 사이로 추락하면서 함께 묻혀버렸을 것이다. 저들은 기어이 그를 갈기갈기 찢고 땅으로 떨어뜨려 침몰되었다. 무거운 총알은 그의 몸에 무수히 가 박혔고, 저들은 전염성을 띤 사냥꾼의 광기에 휩싸여 쉼 없이 총탄을 날리며 그의 뒤를 쫓았다. (P31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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