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Jun 16. 2024

릴리 머레이의 <인어공주>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마법물약의 비밀>  2024년

<인어공주>(1975), <인어공주>(1989), <인어공주:새로운 모험>(2015), <인어공주:매직어드벤처>(2018), <인어공주>(2023)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서, <인어공주>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만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하다.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뒤로 1970 ~ 1980년대에 장기적인 침체기를 겪은 회사의 명성을 다시금 회복시키며 제2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디즈니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열어준 작품이자, 그야말로 디즈니 왕국의 시작을 알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인어공주의 흥행의 매력은 무엇일까?  

    

디즈니는 실사 영화 <인어공주>(2024)를 선보였다. 그러나 흑인 배우 할리 베일리(24)를 주인공 아리엘 역으로 캐스팅하면서 원작과 실사판 사이의 괴리감을 들게 해 '원작 훼손' 논란이 불거졌다. 논란 속에서 지난해 5월 실사 영화는 개봉했다. 해외에서 흥행이 부진해 순조로운 출발을 하지 못했고 결국 최종 수익은 기대에 못 미쳤다.     

멀고 먼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면, 바닷물은 아름다운 수레국화 꽃잎처럼 새파랗고, 말간 유리알처럼 투명하지만, 아무리 긴 닻줄을 내려뜨려도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깊습니다. 뾰족하고 높은 교회 종탑을 바닥부터 몇 개나 쌓아올려도 수면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깊디깊은 그 바다 속에 인어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P14)     


이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인어들의 왕이 사는 용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용궁의 벽은 산호로 지어졌고, 뾰족한 창문은 노랗고 투명한 보석인 호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조개껍질로 장식된 지붕은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습니다. 커다란 그 조개껍질 하나하나엔 여왕의 왕관 장식처럼 반짝이는 진주가 알알이 박혀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인어들의 왕은 여러 해 전에 왕비를 잃고 혼자가 되었지만, 왕의 어머니가 대신 집안일을 맡아주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지혜로운 분이었지만 왕족이라는 출생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해서 꼬리에 열두 개나 되는 진주조개를 장식으로 달고 다녔습니다. 다른 인어들은 제아무리 신분이 높더라도 여섯 개 이상의 장식은 달 수 없었습니다. 이것만 제외하면 왕의 어머니는 아주 훌륭한 분이었고, 귀여운 인어공주 손녀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았습니다. 인어 왕에게는 딸이 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 막내 인어공주가 제일 예뻤습니다.              (P15)     


가장 어린 막내 인어공주는 해님을 닮은 동그란 화단을 만들고 태양처럼 붉은 꽃을 심었습니다. 막내 인어공주는 생각이 깊고 말수가 적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어니들은 침몰한 배에서 주워온 여러 신기한 물건들로 화단을 장식했지만, 막내 인어공주의 동그란 화단은 하늘 높이 뜬 태양을 닮은 붉은 꽃을 가득 심고 아름다운 대리석상을 세워둔 것이 전부였습니다. 순백의 대리석을 깎아 만든 아름다운 소년 조각상으로, 난파당해 가라앉은 배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막내 인어공주는 이 소년의 조각상 옆에 붉은 장밋빛 수양버들을 심었습니다.             (P18)     


인어공주는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할머니는 배와 도시, 인간과 동물 등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신기한 일은 땅 위에서는 꽃에서 향기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다 속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P18)     

할머니는 새를 본 적이 없는 인어공주들이 이해하기 쉽게 새들을 물고기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열다섯 살이 되면 바다 위로 올라가 인간 세상을 구경할 수 있단다. 바위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커다란 배가 지나가는 것도 보고, 숲과 마을도 실컷 구경하렴!”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내년은 맏언니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였습니다. 인어공주들은 모두 한 살 터울이었기 때문에, 막내 인어공주가 바다 위로 올라가 인간 세상을 구경하려면 꼬박 오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P19)      


인어공주들은 처음 바다 위로 올라가면, 난생처음 보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기하다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때고 원하기만 하면 바다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흥미를 잃고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모두들 한 달만 지나면 가장 아름다운 곳은 바다 속이며 집이 제일 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고 다섯 자매는 거의 매일 밤 서로 손을 잡고 바다 위로 올라갔습니다. 인어공주들의 목소리는 인간들이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P23)      


막내 인어공주가 물 위로 막 머리를 내밀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구름은 온통 장밋빛과 금빛으로 반짝였고, 연분홍 노을이 드리워진 하늘에는 초저녁별이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대기는 감미롭고 부드러웠으며, 바다는 죽은 듯 잔잔했습니다. 바다 위에는 돛대가 세 개나 있는 큰 배 한척이 떠 있었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돛을 하나만 펼친 상태였습니다. 갑판 꼭대기와 배 후미에 선원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배에서는 음악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알록달록한 등불 수백 개가 밝혀졌고, 만국기가 바람에 휘날렸습니다. 인어공주는 선실 창가로 가까이 헤엄쳐갔습니다. 파도에 몸이 들릴 때마다 수정처럼 맑은 유리창 안이 들여다보였습니다. 선실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시원한 눈매에 검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젊은 왕자였습니다. 나이는 열여섯 살쯤 되어 보였습니다. 그날은 마침 왕자의 생일이어서 모두 모여 축하를 하고 있었습니다.           (P25-27)   

   

선체가 삐걱거리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갑판이 세찬 파도를 맞아 갈리지고, 돛대가 갈대처럼 두 토막으로 부러졌습니다. 배가 서서히 옆으로 기울면서 바닷물이 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인어공주는 그제야 사람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인어공주 역시 바다 위에 떠다니는 배의 파편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번개가 내리쳐 주변이 다시 밝아지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남으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인어공주는 다급한 심정으로 왕자를 찾았습니다. 드디어 왕자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선체가 두 동강 나면서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인어공주는 이제 왕자를 데리고 바다 속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은 물속에서 살 수 없으며, 왕자는 죽어서나 용궁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왕자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P28-29)  

    

잠시 후, 한 젊은 아가씨가 왕자를 발견했습니다. 아가씨는 처음에 몹시 놀라는 듯하더니 곧 다른 사람들을 불러왔습니다. 그 무렵 정신을 차린 왕자는 둘러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인어공주에게는 미소를 짓지 않았습니다. 물론 왕자는 인어공주가 자기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어공주는 몹시 슬펐습니다. 왕자가 건물 안으로 옮겨지자, 인어공주는 구슬피 울면서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아버지가 있는 용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막내 인어공주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지만, 바깥세상에 다녀온 뒤로는 더 심해졌습니다. 바다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언니들이 여러 번 물었지만, 막내 인어공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P31)     


왕자가 살고 있는 궁전을 알게 된 막내 인어공주는 매일 밤 바다 위로 떠올라, 어떤 인어도 감히 가본 적 없는 육지 가까이까지 헤엄쳐갔습니다. 때로는 좁은 수로를 따라 올라가 멋진 대리석 계단 난간이 물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곳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밝은 달빛을 받으며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왕자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왕자가 멋진 배에 깃발을 펄럭이며 밤바다로 나오면, 인어공주는 그 배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해변에 자라는 갈대 사이로 인어공주가 왕자를 내다볼 때 바람이 불어 공주의 긴 은빛 베일이 휘날려도, 사람들은 백조가 날개를 펼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P33)  

      

“인간들은 물에 빠져 죽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나요? 바다 속에 사는 우리와 달리 죽지 않고 영원히 사나요?”

막내 인어공주가 물었습니다.   

“아니야, 인간들도 죽는단다. 게다가 우리보다 수명이 훨씬 짧지. 우리는 삼백 년이나 살 수 있잖니. 하지만 우리는 생명이 끊어지면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무덤을 만들 수 없지. 우리에겐 불멸의 영혼이 없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도 없단다. 우리는 초록빛 골풀처럼 한 번 베어지면 두 번 다시 자랄 수 없어. 그런데 인간은 육신이 흙으로 변한 뒤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단다. 영혼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천국이라 불리는 밝은 하늘로 날아 반짝이는 별들 곁으로 올라간단다! 우리는 물 위로 떠올라 인간 세상을 볼 수 있지만, 인간들은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로 떠오르는 거야.”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우리에겐 왜 불멸의 영혼이 없나요? 단 하루라도 인간으로 살 수 있다면 인어로 사는 몇 백 년을 내놓아도 좋겠어요. 저도 천국이라는 곳에 올라가고 싶어요!”

막내 인어공주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 건 생각도 하지 마라. 우리는 지상 세계의 인간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잖니.”         (P34-35)      

인어공주는 용궁의 정원을 빠져나와 마녀가 살고 있는 사나운 소용돌이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곳에 꽃도 해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량한 회색 모래뿐인 그곳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풍차처럼 맹렬하게 휘몰아쳐 주변의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깊숙이 빨아들였습니다. 마녀가 사는 곳으로 가려면 난폭한 이 소용돌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곳을 무사히 지난다 해도, 마녀가 토탄 늪이라고 부르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뜨거운 진흙 수렁을 건너야 했습니다. 토탄 늪을 건너면 나오는 기이하게 생긴 숲 한가운데에 마녀의 집이 있었습니다.             (P38)  

    

“네가 뭘 원하는지 나는 다 안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하지만 설령 불행이 찾아온다 해도 네 고집대로 하고야 말겠지. 너는 꼬리를 없애고 대신 인간들처럼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거지? 그래야 젊은 왕자가 너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될 거고, 그렇게만 되면 너는 불멸의 영혼을 갖게 될 테니까.”

바다 마녀는 이렇게 말한 뒤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너무 요란하게 웃은 나머지 두꺼비와 뱀이 깜짝 놀라 바닥에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마침 때맞춰 잘 왔구나. 내일 해가 뜨고 나면 일 년 동안은 나도 너를 도와줄 수가 없거든. 내가 물약을 만들어줄 테니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육지로 올라가서 그 약을 마셔라. 그러면 네 꼬리가 갈라지면서 인간들이 다리라고 부르는 멋진 물건으로 변할 거야. 하지만 몹시 아플 거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칼에 찔리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거야. 그래도 너를 보는 사람들은 난생처음 보는 미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거다. 네가 걷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 우아하고, 네 춤 솜씨는 따를 자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걸어 피를 흘리는 느낌일 거야. 그 모든 고통을 견딜 각오가 되어 있다면 도와주지.”

“견딜 수 있어요!”

인어공주는 왕자와 불멸의 영혼을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인간의 몸이 되면 두 번 다시 인어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명심해라. 넌 네 언니들과 아버지가 있는 용궁으로 다시는 내려올 수 없을 거야. 왕자가 온 마음을 너에게 빼앗겨 너를 자기 부모보다 사랑하게 되어 신 앞에서 부부가 될 것을 맹세하지 않으면, 넌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마라! 또한 만에 하나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너는 바로 그다음 날 아침 심장이 터져 물거품으로 사라져버릴 거야.”

“그래도 괜찮아요!”

인어공주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도 얻는 게 있어야지. 너는 바다 속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지. 너는 그 목소리로 왕자의 마음을 빼앗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목소리는 나한테 넘겨야 한다. 귀한 나의 물약을 얻으려면, 네가 가진 가장 값진 걸 내놔야지.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약효가 확실하도록 물약엔 내 피도 떨어뜨려주마.”

“당신이 내 목소리를 가져가면 나에겐 뭐가 남죠?”

“아름다운 자태와 우아한 걸음걸이, 마음을 전하는 눈빛이 있잖아. 그것만 있으면 너는 얼마든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용기가 없어졌니? 자, 어서 혀를 내놔라, 나는 약값 대신 네 혀를 갖고, 너는 내 마법의 물약을 갖는 거야!”

“좋아요!”                (P40-42)      


인어공주는 값비싼 비단과 모슬린 옷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녀는 궁궐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지만 노래를 부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비단과 황금 옷을 입은 아름다운 시녀들이 나와 왕자와 국왕 부부 앞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중에서 한 시녀가 특히 노래를 잘 부르자, 왕자는 그 시녀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인어공주는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목소리를 잃지만 않았다면 그 시녀보다 훨씬 아름답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왕자님 곁에 잇으려고 내가 목소리를 영원히 버렸다는 사실을 왕자님이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P44-45)     

 

인어공주는 날이 갈수록 왕자가 좋아졌습니다. 왕자 역시 인어공주를 좋아했지만 귀여운 동생처럼 대할 뿐, 왕비로 맞으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어떻게든 왕자와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 만일 왕자가 다른 아가씨와 결혼을 하면 인어공주는 불멸의 영혼은커녕 거품이 되어 사라질 운명이었습니다.

왕자가 인어공주를 품에 안고 아름다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왕자님은 나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나요?”               (P49)   

   

‘아아, 왕자님은 내가 왕자님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걸 모르는군요! 내가 왕자님을 바다에서 구해 숲과 교회가 있는 해변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왕자님을 도와줄 때까지 몸을 숨기고 지켜보았답니다. 그런데 나보다 그 아가씨를 사랑하다니요!’

인어공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습니다.         (P50)      


“난 이웃나라에 갈 수밖에 없어! 부모님이 바라시는 일이니 그 나라 공주를 만나봐야 해. 하지만 강제로 신부를 맞으라고 하시지는 않을 거야. 나는 절대로 그 공주를 사랑할 수 없어! 그녀는 너처럼 바닷가 교회에서 만난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닮지 않았을 거야. 만일 내가 신부를 맞아야 한다면 너를 선택할 거야.”
 왕자는 이렇게 말하며 인어공주의 새빨간 입술에 입을 맞추고 인어공주의 긴 머리칼을 어루만졌습니다. 그가 인어공주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을 때, 인어공주는 인간의 행복과 불멸의 영혼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넌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이웃나라로 향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왕자가 인어공주에게 말했습니다.      (P51)  

    

드디어 이웃나라 공주를 보았을 때, 인어공주는 이웃나라 공주가 지금껏 본 그 누구보다 우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피부는 비단결처럼 곱고 투명했으며, 길고 검은 속눈썹 아래에는 단호하고 진심 어린 푸른 눈동자가 웃고 있었습니다.

“당신이군요!”

왕자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내가 바닷가에 쓰러져 있을 때, 바로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어요.”

왕자는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웃나라 공주를 껴안았습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루어질 거라고 감히 꿈꾸지도 못한 최고의 소망이 이루어졌어. 너는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니까 내 행복을 함께 기뻐해주겠지!”

왕자가 인어공주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인어공주는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왕자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왕자가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아침이며, 인어공주는 죽어서 물거품으로 변할 운명이었습니다.             (P53)      


인어공주는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고통이 훨씬 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왕자를 보는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인어공주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마저 포기한 채 매일 칼날 위를 걷는 고통을 참아왔지만, 왕자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왕자와 같은 공기를 마시는 일도, 깊은 바다를 바라보는 일도,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도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제 영혼에 대한 희망도 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어공주를 기다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영원한 밤뿐이었습니다.             (P55)    

  

“마냐에게 우리 머리카락을 주고 대신 너를 살려달라고 부탁했어. 그랬더니 이 칼을 주더구나. 자, 어서 받아! 아주 날카로우니까 조심해.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이 칼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 거기서 흘러나온 따뜻한 피로 네 발을 적시면, 너는 꼬리가 생겨 다시 인어로 돌아올 수 있어. 우리와 함께 다시 바다 속에서 삼백 년 동안 살 수 있는 거야. 서둘러야 해! 해가 떠오르기 전에 왕자와 너,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해. 할머니는 너 때문에 너무 상심하셔서 머리가 다 빠지셨단다. 우리 머리카락이 마녀의 가위에 잘려나갔듯 말이야. 왕자를 죽이고 함께 돌아가자! 어서 서둘러! 하늘에 붉은 기운이 도는 거 보이지? 곧 해가 솟을 거야. 이대로 해가 솟으면 너는 죽는 거야!”

언니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깊은 한숨을 쉬며 파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P56)  

    

왕자의 마음은 신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칼을 쥔 인어공주의 손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그러나 돌연 인어공주는 칼을 바다 속으로 던졌습니다. 칼이 떨어진 바다가 붉게 빛나며 물속에서 핏방울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인어공주는 벌써 절반쯤 총기를 잃은 눈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왕자를 바라본 뒤, 몸을 떨며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몸이 스르르 녹으면서 거품으로 변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바다 위로 솟아오른 태양이 죽음처럼 차가운 거품 위로 따사로운 빛을 부드럽게 비추었습니다. 인어공주는 자신이 죽은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 밝게 빛나는 태양과 함께 수백 개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형상이 하늘에 떠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힌 돛과 붉게 물든 구름도 보였습니다. 투명한 형상들이 내는 목소리는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천상의 음악이었습니다. 그들은 날개 없이도 가볍게 허공을 날아다녔습니다. 인어공주는 자기도 그들과 같은 몸을 지닌 채 거품 위로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죠?”

인어공주가 물었습니다. 인어공주의 목소리 역시 다른 형상들처럼 지상의 어떤 음악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공기의 딸들이 있는 곳으로!”

투명한 형상들이 대답했습니다. 

“인어는 불멸의 영혼이 없어서,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결코 불멸의 영혼을 지닐 수 없습니다. 인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다른 힘에 의존해야 하지요. 공기의 딸도 불멸의 영혼이 없지만, 착한 일을 하면 스스로 영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살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곳을 찾아가 시원한 바람을 불게 해줍니다. 꽃향기를 퍼뜨려 기분 좋고 상쾌한 마음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죠. 이렇게 삼백 년 동안 착한 일을 계속하면 우리도 불멸의 영혼을 얻고 인간의 영혼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답니다. 불쌍한 인어공주여, 당신도 우리처럼 영혼을 얻으려고 진심을 다해 노력했군요. 고통을 겪으며 참은 덕분에 이제 당신도 공기의 정령들의 세계로 왔습니다. 앞으로 계속 착한 일을 하면 삼백 년 뒤에는 당신도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답니다.”                  (P57-58)   

   

인어공주는 이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마음 놓고 신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왕자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다른 공기의 정령들과 함께 장밋빛 구름을 향해 높이 올라갔습니다. 

“삼백 년이 지나면 우리도 천국에서 이렇게 떠다닐 수 있겠죠?”

“더 빨리 갈 수도 있지요.”

공기의 정령 하나가 속삭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 부모를 기쁘게 하고 귀염을 받는 기특한 아이를 찾으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시련의 시간을 단축해주신답니다. 우리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아이들은 알지 못해요. 우리가 기쁨 속에서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으면 삼백 년에서 일 년이 줄어들지요. 하지만 예의 없고 마음씨 고약한 아이르 보면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데, 우리가 한 번 눈물을 흘릴 때마다 시련의 시간은 하루씩 늘어난답니다!”         (P6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