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1951년
<아메리카의 비극>은 1920년대 두 차례 걸쳐 희곡으로 각색되어 무대에 공연되기도 했다. 1931년 조세 폰스턴버그 감독이 같은 제목의 영화 <아메리카의 비극>을 선보였으며, 1951년에 조지 스티븐스 감독이 몽고메리 클리프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라는 제목으로 다시 영화화했다. 이 영화는 원작의 초점을 축소하여, 사랑을 통해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려는 젊은이의 욕망을 예리하게 표출한 성공작이다. 아카데미 각본상, 감독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의상 디자인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다.
[1]
[제1부]
클라이드는 우연히 눈에 띄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면 곧게 우뚝 솟은 잘생긴 코며, 높고 흰 이마며, 파도처럼 나부끼는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이며, 때로는 조금 우수에 잠긴 듯한 까만 눈동자 등 그다지 못생긴 얼굴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참한 집안 형편과 부모가 하는 일과 대인관계 때문에 친구다운 친구 하나 사귀어 본 적 없었고, 또 앞으로도 사귈 것 같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점점 더 의기소침해지고 우울해졌고, 그의 장래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반항적이고 때로는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부모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다른 아이들보다 잘생기고 매력적인데도 그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에 속하는 젊은 아가씨들이 어쩌다 던지는 호감 어린 시선, 즉 그가 흥미를 느끼는지 무관심한지, 용기가 있는지 겁쟁이인지 저울질하려고 던지는 경멸하는 듯하면서 약간은 유혹적인 시선을 오해하기 일쑤였다.
클라이드는 돈을 벌기 전부터 언제나 다른 아이들처럼 좀 더 멋진 칼라 깃, 좀 더 좋은 셔츠, 좀 더 멋진 구두, 좀 더 말쑥한 양복, 좀 더 호화로운 코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생각했다. 아, 훌륭한 양복이며, 깨끗한 집이며, 몇몇 아이들이 치장하고 다니는 손목시계와 반지, 값비싼 넥타이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벌써 맵시를 내고 다니는 게 아닌가! 그 또래 중에는 실제로 아버지가 사 준 자동차를 몰고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캔자스시티의 중심도로를 마치 풍뎅이처럼 이리저리 휙휙 지나가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더구나 예쁜 여자애들을 태우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 하나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면 클라이드는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어떤 직업을 골라 익혀야 할까? 그가 앞으로 성공할 수 있는 그 어떤 일 말이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딱 못 박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별난 그의 부모는 그에게 어떤 조언도 해 줄 능력이 없었다. (P34-35)
언제나 남편보다 감정이 훨씬 풍부한 그리피스 부인은 이런 시련에 부딪히자 눈에 띄게 달라지면서 더욱더 생기에 넘쳤다. 삶에 대한 일종의 짜증이나 불만이, 눈에 띄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마치 눈에 보이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는 손을 뻗어 쪽지를 받아들더니 충격으로 주름 잡힌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그것을 노려보았다. 마음이 몹시 동요되고 불만스러운 사람, 손가락으로 매듭을 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풀 수 없는 사람,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이 지를 법한 태도였다. 지난 세월 동안 전도 사업과 신앙에 몸을 바쳐 왔는데, 그녀의 어설픈 양심에 비춰보더라도 이런 꼴을 당한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라고 가냘프게나마 소리치는 듯했다. 누가 봐도 죄악이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순간 그녀의 하나님은, 그녀의 그리스도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 왜 그분은 그녀를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분께선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인가? 성경에서 하신 그 약속들은! 그분의 영원한 인도는! 그분이 내세우시는 자비는!
클라이드 생각으로는 이렇게 엄청난 재앙에 부딪힌 어머니가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 같았다. 물론 이 문제를 결국에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클라이드는 잘 알고 있었다. 광신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어머니와 아버지도 어떤 맹목적이고 이원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은 재앙이나 오류, 불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다른 어떤 것,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힘에 직면해서도 사람들을 속이도 배반하는 어떤 사악하고 믿을 수 없고 기만을 일삼는 힘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는 했으나 통제하기 싫어서 통제하지 않는 인간의 마음이 저지른 실수와 사악함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P43-44)
그러나 여러 객실에 불려가 손님들의 모습을 얼핏 보는 것 못지않게 흥미를 끄는 것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중앙 로비였다. 메인 데스크 뒤에 있는 여러 사무원 — 객실 담당, 열쇠 담당, 우편물 담당, 회계 담당과 그 조수 — 의 모습, 그 근처에 있는 온갖 매점과 시설 — 꽃가게며, 신문 매점, 담배 매점, 전보 취급소, 택시 안내소 — 등에는 그곳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들이 배치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것들 주변과 사이로 유행에 맞게 옷을 차려입고 혈색 좋고 행복해 보이는 위풍당당한 성인 남녀들과 젊은 남녀들이 걸어 다니거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때쯤이나 조금 늦게 몇몇 손님을 태우고 나타나는 자동차와 마차의 홍수, 휘황한 바깥 전등 불빛에 그는 손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밖에 그들이 입고 있거나, 벨보이에게 들게 하는 어깨걸이며, 모피 외투, 그밖의 소지품들도 보였다. 다른 벨보이나 그 자신이 그것들을 들고 로비를 지나 자동차나 식당,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갔다. 클라이드가 보기에 그 옷가지들은 하나같이 아주 훌륭한 직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 얼마나 화려한가! 정말로 부자라는 것이, 또 이 세상에서 출세한다는 것이, 한마디로 돈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자기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 것을 뜻했다. 이런 모든 사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가고 싶은 방식대로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P90-91)
레스토랑이나 객실은 말할 것도 없고 로비나 그릴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다 보니,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아직 분별력이 없는 어떤 소년이라면 돈깨나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극장에 출입하고 시즌에 야구를 즐기거나, 댄스파티에 참석하고, 자동차로 드라이브하고 친구들을 만찬에 초대하거나, 또는 뉴욕이나 유럽이나 시카고, 캘리포니아 등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인생에서 하는 주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벨보이 대부분은 클라이드와 마찬가지로 사치는커녕 안락이나 취미 따위도 아예 모르고 자라 왔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과장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서 자신들도 그런 것을 누릴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돈이 있는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일까? 또 무슨 일을 했기에 얼핏 봐서는 그들 자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사람들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엄청난 사치를 누린단 말인가? 성공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무엇이 그렇게 다른 것일까? 클라이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생각이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지 않은 벨보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P93-94)
이 모험에서 클라이드가 받은 영향은 이런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가 받을 만한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간절한 호기심과 욕망에 이끌려 발을 드려놓고 굴복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귀가 따갑게 들어 온 도덕적인 교훈과 자신의 소심하고 미적인 결벽성 때문에 돌이켜보니 모든 일이 벌을 받을 만한 타락한 짓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모가 이런 짓을 천박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가르친 것은 어쩌면 옳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런 모든 모험과 모험의 무대가 된 세계가 일단 끝나자 그에게 이 일은 일종의 상스러운 이교적인 아름다움이랄까 천박한 매력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보다 더 흥미로운 다른 사건이 일어나 이 모험을 갈아치울 때까지 그는 상당한 관심과 유쾌한 추억으로 이 일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P137)
호튼스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클라이드는 점점 더 굶주린 듯 그녀의 마지막 양보를 재촉하고 있었다. 비록 클라이드에게는 한 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지만 다른 두 젊은이에게는 그런 특권을 허락하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으레 클라이드는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관심을 두는지 진실을 보여 달라고 고집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그를 좋아한다면 도대체 왜 이런저런 일을 그렇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가 원하는 만큼 실컷 키스하도록 해 주지 않고, 그가 원하는 만큼 실컷 안도록 해 주지 않는가? 그녀는 다른 사내들과는 언제나 약속을 지키면서도 자기와의 약속은 늘 깨뜨리거나 약속하기를 거부했다. 다른 사내들과는 과연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자기보다 그들을 더 좋아하는가?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으레 이 친밀한 관계 문제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가 살짝 베일에 감추고 있을 따름이었다.
호튼스는 클라이드를 괴롭힐 때마다 그가 억압한 욕망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는 생각에, 또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힘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즉, 그녀의 사디즘적인 경향은 클라이드의 마조히즘적인 갈망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P210-211)
어머니는 지금까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이렇게 의지해야 한다니 비참한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더구나 자식이 이제 막 세상에서 첫걸음을 내딛으려고 하지 않는다. 뒷날 그가 어머니와 에스터에 대해 그리고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출세해 보겠다는 야망과 용기와 욕구는 참으로 가상하지만, 어머니의 눈으로 볼 때 클라이드는 몸도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고,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바위처럼 굳건하지 못했다. 정신력으로 보나 정서적으로 보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았다. 대체로 그는 쉽게 흥분했고, 쉽게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긴장했다. 부담과 긴장 어느 쪽도 잘 견뎌내지 못하는 듯했다. 그리고 에스터와 그녀의 남편, 집안 식구들의 불우한 삶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큰 부담만 자꾸 떠맡겨 왔던 것이다.
“그래, 안 돼도 할 수 없지.” 어머니가 말했다. “나도 다른 방도를 찾아보마.”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순간 어머니에게는 다른 해결 방법이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P237-238)
바로 그때 첫 번째 오토바이가 현장에 도착했다. 클라이드가 숨어 있는 장소는 현장에서 그리 멀지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 결국 자동차를 가지고 도망칠 수 없었겠지? 네놈은 꽤나 똑똑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도망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네놈은 잡혔지. 그래 나머지 다른 놈들은 어떻게 됐어? 다 어디 있냔 말이야?”
이 말을 듣자 교외에 사는 주민은 자신은 이 사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도망쳤지만 경찰이 원한다면 곧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아직도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던 클라이드는 처음에는 손과 무릎으로 눈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남쪽과 남서쪽으로 향해, 멀리 보이는 거리 쪽을 향해 나아갔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거리의 남서쪽, 만약 붙잡히지만 않는다면 바로 그곳에 숨고 싶었다. 또 만약 운명이 그의 편을 들어 준다면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고 그의 눈앞에 닥친 불행과 처벌과 끝없는 불만과 실망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P285-286)
[제2부]
클라이드가 보기에 유니언리그 클럽은 그레이트노던 호텔과는 전혀 달랐고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심지어 그린데이비슨 호텔보다도 고급이었다. 그래서 클라이드는 불행하게도 그의 신분과 명성의 기복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삶의 유형을 가까이서 다시 한 번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호텔에는 그가 다른 곳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세계적인 일류급 명사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지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날마다 드나들고 있었다. 미국 전역의 정치가들 — 유력한 정치가들과 우두머리들, 또는 특정 지역의 자칭 경제가들 — 그 밖에 의사들, 과학자들, 내로라는 외과의사들, 장군들, 문학계와 사회 각층의 저명인사들이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클라이드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경외심을 느끼게 한 것은, 이 클럽에서는 가끔 목격한 삶의 단계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섹스의 요소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가 지금껏 접촉해 온 삶의 단계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에서 섹스의 요소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유니언리그 클럽에서 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적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떤 여성도 이 클럽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각계각층의 명사들은 대개 혼자 이곳에 찾아왔으며, 가장 성공한 명사답게 박력이 있으면서도 차분한 신중함을 잃지 않고 출입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두 사람씩 또는 그룹으로 모여 조용하게 회의를 하고,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빠른 속도로 모는 자동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클라이드의 성숙하지 않은 정신에도, 그 사람들은 그가 지금껏 살아 온 저급한 세계에서 너무 많은 일을 치닫게 하고 망치게 하는 정열의 요소를 거의 의식하지 않거나 적어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이토록 높은 명사의 지위에 오르려면 섹스 같은 천한 정열에는 관심이 없어야만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나 그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가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그런 생각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P331-333)
사실을 말하자면, 클라이드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삶의 여러 사실과 수단에서 직접 자신들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지적 통찰력과 내적 지향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분명히 없었던 것이다. (P334)
새뮤얼 그리피스는 그의 아들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급료가 적다고는 생각했지만 (일반 견습공의 급료로서가 아니라, 친척인 클라이드에게는 말이다) 종업원들에 대해서는 온정보다는 현실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신입 사원에게는 최저 생활비를 줄수록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자본가의 착취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적인 이론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자본주의의 착취와 관련한 사회주의 이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 부자(父子)는 사회의 하층 계급이 동경할 수 있는 상층 계급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신분 제도란 필요했다. 심지어 비록 상대가 친척일망정 누구에게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기준을 어리석게 간섭하고 교란하는 것이었다. 사업 면에서나 재정 면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다룰 때는 마땅히 그들이 익숙해져 있는 기준에 따라 그들을 다룰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준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그들 하층민에게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리피스 부자가 오직 유일하게 건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업에 — 물건을 만들어 내는 사업 말이다 —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혹하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그 사업의 온갖 세부 사항과 공정을 익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지 충분히 이해시켜야 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제한적이고 검소한 생활에 익숙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은 그들의 인격 연마에도 도움이 되었다. 성공하게 될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계발하고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한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게 할 수밖에 없었다. (P346-347)
갑자기 두 아가씨는 인제 그만 가 봐야겠다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래서 또다시 클라이드와 그리피스 집안 식구들만이 남게 되었다. 클라이드는 어쩐지 자기가 이 자리에 별로 어울리지 않고 푸대접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이라는 아닐지라도 새뮤얼 그리피스 부부와 벨라는 그가 속하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볼 기회를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가 아무리 이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사귀는 일을 꿈꾼다 해도 가난한 탓에 결코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갑자기 몹시 서글퍼졌다. 눈빛과 기분이 너무 우울해지자 새뮤얼 그리피스뿐만 아니라 그 부인과 마이라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 방법을 찾고 싶었다. 식당에 있는 사람 중에서 오직 마이라만이 그가 모르긴 몰라도 외롭고 우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커다란 거실로 자리를 옮길 때 — 새뮤얼은 벨라가 늘 식사 시간에 늦는다고 나무라고 있었다 — 마이라가 클라이드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라이커거스가 마음에 들 거예요. 이 근처에는 가 볼 만한 재미난 곳이 있거든요. 이곳에서 북쪽으로 110킬로미터쯤 가면 호수와 애디론댁 산맥이 있어요. 여름이 되면 우린 모두 그린우드에서 머무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끔 한 번씩 그리고 초대할 거예요.” (P437)
로버타는 이런 짓이 엄청난 죄악 — 지옥에 떨어질 무서운 죄악 — 이라고 통렬하게 확신하고 있었고, 클라이드도 부모한테서 결혼의 성스러운 영역 밖에서 이루어지는 유혹과 간음의 죄악에 대해서 귀가 따갑게 들어왔기 때문에 그녀와 똑같은 느낌이었다. 로버타는 초조한 마음으로 막연한 장래를 바라보며 만약 클라이드가 마음이 변하거나 그녀를 저버리면 어찌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돌아오면 그녀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려 어디엔가 밀회 장소로 클라이드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러고 난 뒤 밤이 이슥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도 불도 켜지 않은 그녀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고, 그 방은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낙원이 되었다. 청춘의 열기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P586)
오후 한 시에 근처 공장들에서 토요일의 일과 종료 시각을 알리는 기적을 울리자 클라이드와 로버타는 따로따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가는 도중에 뭐라고 말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정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얼음처럼 차디차게 식고 빛이 바랜 이 마당에 어떻게 느끼지도 않는 관심을 가장할 수 있을까? 겨우 보름 전까지만 해도 열렬하게 살아 숨 쉬던 관계가 이렇게 빈혈기에 빛을 잃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너무 잔인할 뿐만 아니라, 로버타가 무슨 말을 하고 또 어떤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 피해야 했다. 한편 손드라를 향한 그리움과 그녀가 사는 세계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진실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않을뿐더러 현상 유지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행동과 말을 계속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손드라가 그의 사랑에 답한다는 마음을 비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래서는 한시바삐 단호하게 로버타와의 관계를 끊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는 안 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손드라와 같은 신분이 높은 미모의 여성과 비교한다면 로버타는 그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자였다. 손드라로 말미암아 생길 연줄과 기회를 생각한다면 로버타 같은 여자가 그에게 다른 여자 생각은 하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자기에게만 깊은 사랑을 바치라고 요구하거나 그가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가정하는 게 정당한 일인가? 그것은 정말로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클라이드가 이런 생각에 계속 잠겨 있을 때 먼저 방에 도착한 로버타는 왜 자신에게 — 그리고 클라이드에게 —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을까 하고 자문하고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무관심, 크리스마스이브의 데이트 약속을 깨뜨리려는 그의 마음, 사흘 동안이나 그것도 크리스마스 때 그와 헤어져 집으로 떠나는 그녀를 폰다까지도 배웅하기 싫어하는 그의 태도에 대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는 부장 회의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사실일까? 필요하다면 그녀는 네 시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쌀쌀맞고 회피하는 듯한 그의 태도 때문에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이 모든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적어도 지금까지 두 사람을 서로 떨어질수 없도록 할 만큼 친밀하게 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는 것일까?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까? 두 사람의 감미로운 사랑의 꿈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심지어 종말을 고한다는 의미일까? 아, 맙소사!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바쳤고, 그녀의 장래 — 그녀의 삶 — 그 모든 것이 그의 성실성에 달려 있었다. (P654-656)
[2]
클라이드는 지금과 10월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로버타가 당장 결혼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미루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제까지 살면서 이토록 파멸의 가장자리에 서 있어 본 적도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 적어도 로버타를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것이 그의 도리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에스터가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것이 그의 도리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에스터가 곤경에 빠졌을 때 누가 그녀를 구해 주었던가? 그녀의 애인이었나? 애인이란 작자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떠나 버렸지만 그래도 에스터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로버타는 에스터의 처지보다 더 나쁘지도 않으면서 왜 이런 식으로 그를 파멸시키려고 할까? 사회적, 예술적, 감정적, 정서적인 암살과 다를 바 없는 파멸을 강요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이런 식으로 그를 곤경에 몰아 넣지만 않는다면 그도 나중에 가서는 — 물론 손드라의 돈이지만 — 훨씬 더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의 인생을 망치려는 그녀의 그런 행동을 그는 용납할 수도 없었고, 용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그의 인생은 파멸을 맞게 될 것이 아닌가! (P41-42)
죽음!
살인!
로버타 살해!
그렇지만 그녀에게서, 상식에서 벗어나고 융통성 없고 집요하게 다그치는 그녀의 요구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그의 몸은 벌써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 그렇다면 언제 — 도대체 언제!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했다.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도 죽이는 게 아닌가!
그러나 계산적으로 — 고의로 — 그런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여름철이면 세계 곳곳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물에 빠져 죽는다. 물론 클라이드는 확실히 로버타에게도 그런 사고가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때에는 말이다. 때가 때인 만큼 그가 그런 일을 바랄 리는 더욱 없었다. 그는 다른 일은 몰라도 그런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두 손과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그는 그런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제정신을 가진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말이다.
클라이드는 그런 섬뜩한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해 전율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될수록 냉정하게 그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든 그 기사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기사가 암시하는 것을 말끔히 물리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기사를 읽고 나서 그는 옷을 입고 집에서 나와 센트럴 애비뉴를 따라 와이키키 애비뉴 위쪽으로 오크 거리까지 갔다가 다시 스푸루스 거리를 거쳐 센트럴 애비뉴로 돌아왔다. 얼마 뒤 그는 바라던 대로 마음이 훨씬 가볍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지고, 또 인간적인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그의 마음속에 슬며시 스며들고 있던 간사하고 끔찍한 생각을 완전히 물리쳤다고 느끼며 그는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했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두 번 다시 말이다. 그는 절대로,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절대로 말이다.
그러고 나서 클라이드는 어렴풋이 잠이 들면서 사납게 생긴 검은 개가 그를 물려고 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개에게 물리려던 찰나 놀라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숲속인지 동굴 속인지, 아니면 양쪽에 산이 가파르게 솟아 있는 깊은 골짜기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매우 이상하고 을씨년스런 곳에 와 있었는데, 거기에는 처음에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길을 따라가 보니 갈수록 더 좁아지고, 어두워지다가 마침내는 아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가 오던 길로 돌아가려고 돌아서 보니 바로 눈앞에 처음에는 관목처럼 보이던 여러 마리 뱀이 한 데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적어도 뱀 스무 마리가 위협하듯 머리를 쳐들고 두 갈래로 갈라진 혀를 내밀고 마노(瑪瑙)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얼른 돌아서 보니 이번에는 뿔이 달린 어떤 거대한 사나운 짐승이 무거운 발굽으로 관목을 부러뜨리며 그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났다. 그날 밤, 그는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P72-74)
눈앞에는 밝은 태양이 높은 소나무들로부터 은빛의 잔물결이 이는 호수까지 펼쳐진 잔디밭에 눈부신 빛을 던지고 있었다. 호수에는 여기저기에 작은 돛배의 하얀 돛들이 보였고, 연인들끼리 햇빛을 만끽하면서 카누의 노를 젓고 있는 곳에서는 흰색, 녹색, 노란색이 난무하고 있었다. 여름의 계절 — 여유로움 — 따뜻한 날씨 — 아름다운 색깔 — 아늑함 — 아름다움 — 사랑, 이 모든 것은 몹시도 외로웠던 지난 여름에 그가 꿈꾸었던 것들이었다.
어떤 순간에 클라이드는 손이 닿는 곳에 간절한 소망이 영락 없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대에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황홀해졌다. 그러나 다른 순간에(로버타에 관한 생각이 얼음처럼 찬 바람으로 불어닥쳐) 그는 그 무엇도 지금 그를 위협하는 이런 감정보가 더 슬프고 끔찍하게 아름다움과 사랑과 행복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수에서 두 사람이 익사했다는 그 끔찍한 기사 말이다! 그의 허황된 계획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아니면 늦어도 두세 주 뒤에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영원히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는 공을 놓치거나 형편없이 공을 치고 있었다. 그럴 때면 버타인이나 손드라나 그랜트가 고함을 질렀다. ‘어이, 클라이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의 마음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로버타 생각을 하고 있어!’하고 대답할 것만 같았다. (P80-81)
상상력이 예민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병적인 단계에 이르면 — 정신이 공격을 받고 벅차고 복잡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 이성이 그 옥좌에서 내려와 비틀거리고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러 정신은 혼란에 빠지고 적어도 얼마동안은 비이성과 무질서와 잘못된 엉뚱한 생각이 다른 모든 생각을 짓눌러 버리는 때가 있다. 이런 경우 극복할 수도 감내할 수도 없는 큰 어려움에 부딪힌 의지와 용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 뒤에 공포감과 일시적인 무분별만 남을 뿐이다.
이즈음 클라이드의 마음은, 막강한 적군에 몰려 정신없이 후퇴하는 패전 군대에 빗댈 수 있었다. 다급하게 퇴각하는 상황에서 잠시 완전한 파멸을 모면할 길을 찾아보고 그런 공포 속에서도 피할 수 없는 위급한 운명을 막아보려고 엉뚱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계략에 기대 보는 것이다. 클라이드의 눈에는 때로 광기 어린 긴장된 표정이 떠올랐다. 시시각각으로 그는 지금까지의 엉뚱한 행동과 생각을 아무리 정리해보아도 어느 곳에서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난폭하고 다급하고 실망스러운 추구에서 비롯한 심인적(心因的) 상태에서 <타임스-유니온>지의 기사에서 암시받은 해결책이 그의 머릿속에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했다. 그 암시는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녔다.
사실 지금 그것은 마치 클라이드가 상상도 못했던 좀 더 높거나 좀 더 낮은 어떤 세계에서, 삶이나 죽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그와는 다른 생물들이 서식하는 그런 세계의 깊은 내면에서 그 자신의 본성에 숨어 있던 음흉하고 악마적인 소망이나 지혜의 실체가 갑자기 고개를 쳐드는 것 같았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를 우연히 만졌을 때 요정이 튀어나오는 것이나 또는 어부의 그물에 걸린 신비스러운 호리병에서 연기처럼 나타나는 악귀와 같았다고나 할까. 그 본질은 역겨우면서도 강렬하게, 음흉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다정하면서도 잔인하게 (그가 완강하게 저항하는데도) 그를 파멸시키려고 위협하는 악과 혐오스럽고 괴롭고 무섭기는 해도 자유와 성공과 사랑을 안겨 주는 또 다른 악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때 클라이드의 두뇌 작용을 관장하는 중심 부분은 밀봉된 조용한 방에 빗댈 수 있었다. 그 방 안에 앉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누구이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신비스럽거나 사악하고 끔찍한 욕망 또는 어떤 어둡고 원초적이고 타락한 본성의 충고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것을 밀고 나가거나 자리를 박차고 달아날 힘도 없었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도 없었다. (P113-115)
거울처럼 잔잔한 무지갯빛을 띤 호수의 표면은 두 사람의 눈에는 물이라기보다는 기름처럼 엄청난 부피와 무게로 아주 깊은 땅바닥 위에 얹혀 있는 용해된 유리처럼 보였다. 이곳저곳 싱그럽고 부드럽게 부는 산들바람은 마치 정신을 마비시키는 듯 호수의 표면에 잔물결조차 일으키지 않았다. 물가의 높다란 소나무들은 털처럼 부드럽고 두꺼웠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그곳에는 창 모양의 높은 소나무들이 서 있었다. 소나무들 너머로는 멀리 검은 에디론댁 산맥의 울퉁불퉁 등성이가 보였다. 노 젓는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집이나 오두막 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내인이 말한 캠프장이 있나 찾아보려 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 목소리가 — 어느 목소리라도 — 그쪽에서 들리지 않나 하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그가 젓는 노 소리와 60미터, 90미터, 150미터, 300미터 넘게 뒤쪽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보트 하우스 관리인과 안내인의 목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P155)
클라이드의 의지가 절박하게 행동해야 할 이 운명적인 순간에 갑자기 용기가, 증오나 분노가 갑자기 마비되어 버렸다. 보트의 고물 쪽에 앉아 있던 로버타는 당황한 빛을 띠다가 갑자기 일그러지고 번갯불 같으면서도 무기력하고 불안정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분노하고 포악한 악마적인 얼굴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표정이었다. 두려움(죽음이나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살인적인 잔인성에 대한 생리적인 혐오)과 행동하고 싶은 —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 괴롭고 초조하지만 억압된 행동 요구 사이에서 팽팽하게 맞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당황하고 거의 공허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행동하려는 강력한 충동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충동이 서로 균형을 이룬 이 상태는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는 잠시도 깨뜨릴 수 없었다.
한편 클라이드의 눈동자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커지면서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그의 얼굴과 몸과 손은 긴장하여 움츠러들고 있었으며,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흩뜨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균형을 이루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의 감정은 갈수록 점점 더 불길해졌지만, 그것은 살인을 범할 만한 잔인한 용기보다는 금방이라도 비몽사몽 상태에 이르거나 경련을 일으킬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로버타는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이곳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이상스럽고도 고통스러울 만큼 대조적인 섬뜩한 혼란이나 육체적-정신적 우유부단함 같은 어떤 것을 갑자기 직감하고 고함을 질렀다. “왜 그래요, 클라이드! 클라이드! 왜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요?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을, 너무 이상해요. 너무, 너무나요. 그런 표정 짓는 건 처음 봤어요. 도대체 왜 그래요?” 그러면서 로버타는 갑자기 일어나, 아니 몸을 앞쪽으로 기울이고 수평을 이룬 용골을 따라 기어서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가 보트 앞쪽으로 넘어져서 — 보트 한쪽 밖 물속으로 — 떨어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클라이드는 순간 자신의 실패, 자신의 비겁함, 자신의 무능력을 뼈저리게 깨닫는 동시에, 또 순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로버타에 대해 — 그녀의 힘 — 또는 이런 식으로 그를 구속하는 인생의 힘에 대해 잠재되어 있던 증오심의 파도에 굴복했다. 그런데도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기 두려웠고 —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는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고 — 비록 그녀가 이 세상에 그를 폭로하는 한이 있어도 그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 결코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겠다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손드라고, 그는 절대로 손드라를 놓치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조차도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클라이드는 화가 나고 당황한 나머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로버타가 다가와서 그의 손을 잡으려 하고 또 카메라를 받아 내려놓으려 하는 순간, 그는 그저 그녀에게서 — 그녀의 손의 감촉에서 — 그녀의 애원하는 듯한, 위로하는 듯한 태도에서 그녀 존재 자체에서 영원히 달아나고 싶은 나머지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아, 하나님, 맙소사!
그런데도 클라이드는 카메라로 힘껏 로버타의 입과 코와 턱을 때렸고 (무의식중에도 아직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다) 그 바람에 로버타는 왼쪽 요판 위로 쓰러졌고, 보트는 뱃전이 물에 닿을 정도로 기울어졌다. 그녀가 (콧등과 입술이 찢어진 데다 배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에 놀란 클라이드는 일어나 그녀를 도와주거나 붙잡아 주고 본의 아니게 손찌검을 했다고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 때문에 보트가 완전히 뒤집혀 버리자 그 자신과 로버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물속으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보트가 뒤집히면서 왼쪽 요판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로버타의 머리를 때렸다. 이어 물속에서 처음 솟아오른 그녀는 이미 자세를 바로잡은 클라이드 쪽을 향해 극도로 겁에 질려 일그러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정신이 아찔하고 공포에 휩싸인 데다가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서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녀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을 평생 두려워했으며, 클라이드는 우연히 그리고 거의 무의식중에 주먹을 휘둘렀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아, 하나님! 지금 물에 빠져 죽고 있어요. 물에 빠져 죽고 있다고요. 살려 줘요! 오, 하나님!”
“클라이드! 클라이드.”
바로 그때 그 음성이 클라이드의 귓가에 들렸다.
“하지만 이것이 — 바로 이게 — 네가 위급한 상황에서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 아니냐? 보라! 너는 지금 겁을 집어먹고 비겁함에 떨고 있지만 이 일은 — 이 일은 너 대신 남이 해 준 셈이 아니냐? 우발 사건이야.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란 말이다. 본의 아닌 타격으로 네가 바라면서도 용기가 없어 실행하지 못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이것은 우발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니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저 여자를 살려서 그토록 너를 괴롭히고 이 사고 때문에 겨우 풀려나게 된 패배와 실패의 끔찍한 생활로 되돌아가려고 하느냐? 너는 저 여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리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저 허둥거리고 있는 모습을 봐라.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다. 저 여자는 제힘으로 살아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네가 가까이 가면 정신이 없다 보니 너까지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너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가! 저 여자가 살아난다면 앞으로 네 생활도 살만한 값어치가 없어질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 일 분만이라도 기다려라! 기다려라. 기다려라. 애처롭다는 생각은 버려라. 그러고 나면 — 그러고 나면 말이다. 이제, 됐다! 보라. 일이 모두 끝났다. 지금 그녀는 가라앉고 있다. 너는 이제 살아 있는 저 여자는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을 거다. 영원히 말이다. 네가 바라던 대로 네 모자가 저기 물 위에 떠 있구나. 그리고 보트의 노걸이에는 여자의 베일이 걸려 있구나. 그냥 내버려 둬라. 그것이 사고가 우연히 일어났다는 증거가 될 게 아니냐?”
그 목소리 말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약간의 파문, 불가사의한 이곳 풍경의 평화로움과 엄숙함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그 불길하고 사람을 얕잡아 보며 조롱하는 듯한 외로운 새의 울음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P167-171)
[제3부]
한편 로버타의 모습이 물 밑 속으로 사라지고, 자기는 물가로 헤엄쳐 나와 옷을 갈아입고 결국 샤런까지 가서 크랜스턴네 호수 별장에 도착한 이후의 클라이드 정신 상태는 완전히 정신착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로버타의 때 이른 죽음이 자기 탓인지 아닌지에 대한 혼란과 두려움에서 오는 정신 상태였다. 동시에 호숫가에서 깨달은 것이었지만, 북쪽에 있는 빅비턴 여관으로 돌아가 사고를 보고하지 않고 슬금슬금 남쪽으로 가고 있는 그를 만약 누가 본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상황을 냉혹하게 판단해서 그를 살인죄로 몰 것만 같아 몹시 괴로웠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엄격히 말해서 그에게 죄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순간에 그의 마음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돌아가서 자초지종을 보고하지 않은 이상 이제 와서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제 와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만약 그가 호수에 그 여직공과 같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그녀와 부부인 것처럼 숙박부에 이름을 기재했다는 것을 손드라가 듣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 맙소사!
나중에는 큰아버지와 쌀쌀맞기 짝이 없는 사촌, 그리고 약삭빠르고 비웃기를 잘하는 라이커거스 주민들에게 변명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 그럴 순 없어! 그건 말도 안 돼! 이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가는 데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 보았자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은 아닐지라도 파멸일 터였다. 이제는 재주껏 이 끔찍한 상황을 이용할 수밖에 — 그토록 기묘하게, 그것도 조금 그의 무죄를 증명해 주는 방향으로 끝난 이 계획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P234-235)
살인죄 혐의로 체포되다니! 죽은 로버타! 그런데 손드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적어도 그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그리피스 집안사람들! 그리고 그의 큰아버지네 식구들! 그리고 그의 큰아버지! 그리고 그의 어머니! 그리고 저 캠프의 일행 모두!
아, 하나님, 맙소사! 도망치라고 그토록 속삭였는데도 — 그게 무엇이든 — 도대체 왜 도망치지 않았던가? (P285)
그리하여 흥미진진하면서도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갖 사악한 요소들로 — 사랑, 로맨스, 부, 가난, 죽음으로 — 이루어진 한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급 화제가 되어 이 북부 산림 지대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곧 클라이드가 라이커거스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가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가 어떻게 한 아가씨와의 관계를 숨기고 그동안 다른 아가씨와 도망갈 계획을 꾸몄는지, 이 같은 선정적인 기사들을 범죄의 전국적인 뉴스 가치에 민감한 편집자들이 타전(打電)하고 또 신문에 실었다. 좀 더 상세한 범죄 사실 내용을 묻는 전문(電文)이 뉴욕, 시카고, 보스턴,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국 동부와 서부 대도시에서 메이슨 검사나 AP 또는 UP 통신의 현지 주재원들에게 쇄도하였다. 이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미모의 부잣집 아가씨는 과연 누구인가? 그 아가씨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그 아가씨와 클라이드는 정확히 어떤 사이였는가? 그러나 핀칠리, 그리피스 두 가문의 엄청난 재력에 위압당한 메이슨 검사는 손드라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 우선은 그 아가씨는 라이커거스의 어느 큰 제조업자의 딸이지만 이름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클라이드가 리본으로 조심스럽게 묶어 놓은 편지들을 서슴지 않고 보여주었다. (P326-327)
그러나 변호인 측에서나 검찰 측에서나 이곳에 구류되어 있는 클라이드에 관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그의 가족이나 큰아버지 집에서 그를 옹호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지금껏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클라이드의 부모가 어디 살고 있는지 밝힌 사람은 벨크냅과 제프슨뿐이었다. 클라이드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부모, 아니면 적어도 형제자매 중에서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유리한 발언을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두 변호사는 가끔 생각해 보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클라이드는 버림받은 사람, 처음부터 그를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외면을 당하고 있는 쓸모없는 건달이나 부랑아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애러 브룩하트와 만난 자리에서 클라이드의 부모에 관해서 물은 두 변호사는 라이커거스의 그린피스 집안에서는 서부의 친척 집에서 누구든 불러오는 걸 완강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서부의 친척들과는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너무 커서 그 점이 이곳에서 표면화되는 것을 라이커거스의 그리피스 집안에서는 달갑게 여기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클라이드의 부모에게 통지가 가거나 황색 신문에서 그의 부모에 관해서 알게 되면 그들이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클라이드 자신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의 가족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게 새뮤얼 그리피스와 길버트 그리피스 두 사람의 의도라고 브룩하트는 벨크냅에게 설명했다. 그리피스 부자가 클라이드의 변호를 위해 얼마나 재정적으로 지원할 것인지 하는 문제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 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P406-407)
물론 손드라에게서 전혀 소식이 없었다. 처음의 충격과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손드라는 클라이드를 달리 생각했다. 그 사람이 로버타를 죽이고 스스로 지금과 같은 희생양이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떠들썩한 편견과 여론을 생각하면 그녀는 클라이드에게 소식을 전하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살인범이 아니던가? 더욱이 길거리 전도 사업을 한다는 서부의 초라한 그의 가족. 그 사람도 어려서 길거리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지! 그러나 그녀는 간혹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듯한 그의 무모하고 열렬한 사랑을 생각했다.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기에 감히 그런 무서운 짓까지 했을까?) 그래서 손드라는 때로는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여론이 조금 잠잠해지면 아무도 눈치챌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클라이드와 연락을 취해서 그토록 자기를 사랑해 준 그를 잊은 것은 아니라고 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안 돼, 정말로 안 돼. 그녀의 부모가, 아니 다른 사람들이,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알게 되거나 짐작이라도 하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안 돼, 적어도 지금은 안 돼. 어쩌면 나중에, 그 사람이 석방되거나 아니면, 아니면 기소된다면 그건 그녀도 알 수 없었다. 클라이드가 비록 자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저지른 일일지라도 그녀는 그 끔찍한 범행이 몸서리를 칠 정도로 싫어졌다. (P424-425)
때로는 유치장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한 한밤중이나 동트기 직전 클라이드는 꿈속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음산한 광경을 보면 그나마 남아 있던 용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면 그의 가슴이 마구 뛰고 눈에는 핏발이 서고 얼굴과 손은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의자, 주 교도소 어딘가에 있다는 그 의자! 그는 전기의자에 관해 어떻게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서 죽어 가는지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이어 그는 감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만약 제프슨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재심이 기각된다면 — 만약 그렇게 된다면 — 혹 이런 유치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유치장은 낡은 벽돌 벽으로 되어 있었다. 두께가 얼마나 될까? 남동생 프랭크나 여동생 줄리아가, 아니면 래터러나 헤글런드 중에서 누군가와 연락을 취해서 망치나 돌 같은 것을 갖고 오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창살을 자를 수 있는 톱만 입수할 수 있다면! 그러고 나서는 그때 그랬어야 했던 것처럼 도망을, 정신없이 도망을 가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어디로? (P425-426)
그러고 나서 증인들 차례가 되어 자그만치 127명이 한 사람씩 증언대에 섰다. 그들 증인 중, 특히 의사들과 안내인 세 사람, 로버타의 단말마 비명을 들은 여자의 증언에 대해 제프슨과 벨크냅은 번번이 이론을 제기했다. 클라이드를 위해 만든 대담한 변론이 설득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들이 지적할 수 있는 증언의 약점과 오류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판은 십일월로 넘어가고 메이슨 검사가 그토록 바랐던 판사직에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된 뒤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재판의 열기와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결 때문에 갈수록 관심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 갔다. 법정에 나온 신문 기자들이 보기에 클라이드의 유죄는 명백했다. 그래도 제프슨의 반복되는 지시에 따라 클라이드는 침착하고 심지어 대담하게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 증인 한 사람, 한 사람과 맞섰다. (P463)
이 특정 교도소의 ‘죽음의 집’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이렇다할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에 따라 건설되고 유지되는 투박스러운 건물 중 하나였다. 실제로 전반적인 계획과 절차는 일련의 법률상의 규정, 그리고 다양한 교도소장의 기질과 피상적인 필요에서 비롯하는 결심과 충동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마침내 이곳에서는 어느 한 사람의 창의성 따위는 개입할 여지도 없이 어느새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필요하고 부당한 잔인성이나 어리석고 파괴적인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배심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그 자신이 처형되기 전에 먼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처형되는 고통을 함께 나눠야 했다. 사형실의 위치를 비롯하여 수감자들의 생활과 행동을 규제하는 규칙은 좋든 싫든 이런 고통을 초래하기에 충분했다. (P669)
한편 클라이드는 좋게 표현해서 단테 같으면 “이곳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정신병자들의 지옥이라고 할 세계에 갇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능력껏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음산하기만 한 이 세계, 느리지만 영혼을 불태워 버리는 이 세계의 심리적인 힘! 끊임없고 확고부동한 공포와 의기소침! 용기가 있든 공포에 짓눌려 있든, 허세를 부리든 무관심하든(그중에는 무관심한 수감자들도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그 순간을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장 춥고 가장 괴로운 형태의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육체적 의미에서는 아니더라도 정신적 의미에서는 자신과 같이 성격이나 상황에서 비롯한 흥분과 욕정과 불행의 노예가 되어 버린 기질과 국적이 저마다 다른 스무 명의 다른 사형수와 늘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결과나 마지막 일화로서 정신적이고 법정 투쟁과 패배의 무섭고 고달픈 과정을 치른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스물두 개의 쇠 우리에 갇혀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P685)
행렬이 지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 사람은 지금 그 방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아마 가죽끈으로 그를 묶고 있을 것이다. 이제 더 할 말이 없느냐고 묻겠지. 제 정신이 아닌 그에게 말이다. 이제는 가죽끈으로 묶었을 테고 모자도 뒤집어 씌웠겠지. 이제 곧, 이제 곧 확실히......
이어 클라이드는 그 순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감방 안과 교도소 전체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것은 같은 전원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또 모든 감방을 밝히는 어리석으면서도 생각 없는 조치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시작이다! 바로 그거야. 그 친구 이제는 다 끝났군.”
또 두 번째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 끝났군, 불쌍한 녀석.”
그러고 나서 일 분 정도 지난 뒤 30초 동안 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윽고 세 번째로 불빛이 흐려졌다.
“그래, 확실해. 이제는 모두 끝났어.”
“맞았어. 이젠 그 친구 저승 구경을 하고 있겠구나.”
그러고 나서는 깊은 침묵, 죽음 같은 고요가 흐르더니 여기저기서 기도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클라이드는 오한이 나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울기는커녕 감히 아무것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식으로 집행하는 거였다. 커튼을 친다. 그러고 나서 —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이제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불빛이 세 번 흐려졌다. 바로 의자에 전기를 넣었을 때였다. 수많은 밤을 기도로 보냈는데! 그토록 신음했는데! 감방 바닥에 그렇게 머리를 쳐박았는데! 불과 일 분 전에는 살아서 이 앞을 지나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은 죽었어. 언젠가는 그도...... 그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클라이드는 침대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고 마구 몸을 떨었다. 교도관들이 와서 마치 세상에 죽음이 어딨냐는 듯 삶에 안주하는 태도로 커튼을 올렸다. 이윽고 교도관들이 다른 수감자들 몇몇에게 — 지금껏 너무 말이 없던 그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한 파스칼레. 이런 사형 제도는 전적으로 옳지 않았다. 교도소 소장도 그렇게 생각했다. 수감자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소장은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P695-697)
한편 클라이드로서는 처음으로 — 그러나 분명히 회개하고 — 자신의 죄의 중대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는데도 그가 처형된다면 그때는 죄에 다시 죄를 뒤집어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번 경우에는 뉴욕주가 죄를 범하는 것이 되었다. 맥밀런 목사는 교도소 소장을 비롯한 다름 많은 사람처럼 사형 제도를 반대했으며 범법자에게는 주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사는 클라이드가 결백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클라이드를 영적으로 면죄시키길 바란다고 해도 그가 무죄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맥밀런은 클라이드에게 그의 도덕적-정신적인 각성으로 그의 삶과 행동이 그 이전보다 좀 더 완벽하고 아름답게 되었다고 지적해 주었지만, 그것은 모두 한낱 부질없는 일이었다. 클라이드는 외로웠다.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사건 전의 그의 괴로웠던 행동에서 가장 흉악한 범죄 사실 말고는 그밖의 의미를 헤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손드라와 맥밀런 목사, 그리고 그 문제로 말하자면 메이슨 검사, 브리지버그의 배심원들, 브리지버그 배심원들의 평결을 확정하기로 판단한다면 올버니의 상소 법원 등 세상의 모든 사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클라이드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죄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뭐니 뭐니 해도 세상 사람들은 그처럼 자기와 결혼해서 일생을 망치도록 고집부리던 로버타에게서 시달림을 받지 않았다. 그처럼 아름다운 꿈속에서 손드라에 대한 정열로 가슴을 불태워 보지도 않았다. 그처럼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 때문에 더 좋은 생활을 갈망하면서도 창피하게도 길거리에 나서 억지로 고통스럽게 조롱을 받으며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해야 했던 경험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 어머니까지도 포함해서 — 그가 어떤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를 심판한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과거의 아픔과 정신적인 독소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이런 모든 사실이 엄연히 있었고, 또 세상 사람들이 그의 유죄를 믿고 있다고 해도 그의 내부 깊숙한 곳에는 그것에 반대해서 외치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고, 놀랄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맥밀런 목사가 있었다. 그는 매우 공정하고 온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 모든 일을 그가 미칠 수 없는 높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는 때론 자신의 결백을 믿었지만, 또 자신의 유죄를 시인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질 때도 있었다. (P742-744)
클라이드가 전기의자가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첫 번째 문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잘 가게, 클라이드!”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클라이드도 “안녕히들 계십시요!” 하고 인사할 만큼 사고 능력과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고 힘없이 들렸다.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어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멀리서 들렸다. 걷고 있었지만 그의 발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는 문 쪽으로 가는 교도관들의 귀에 익은 그 발소리를 —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소리를 — 의식하고 있었다. 어느새 문이 눈앞에 있었다. 그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 그것이 꿈속에서 자주 보았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그 의자가 놓여 있었고, 지금 그는 마지못해 그 의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열린 문을 통해서 그는 그것을 향해 — 그것 속으로 — 그곳 위로 떠밀려 가다 마침내 앉혀졌다. 문은 그가 지나온 이 세상을 뒤로한 채 다시 재빨리 닫혔다. (P766-7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