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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카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1962년

by 노용헌

미국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1961년 영화. 블레이크 에드워즈 연출, 오드리 헵번, 조지 퍼파드 주연. 트루먼 카포티의 1958년 출판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오드리 햅번의 대표작 중 하나인만큼 원작보다는 영화가 훨씬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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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파트에 일주일 남짓 살았을 무렵, 문득 2호 아파트 우편함의 이름 칸에 끼어 있는 기이한 카드를 보았다. 카르티에 식으로 정중하게 인쇄된 명함에는 “홀리데이 골라이틀리 양”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아래 모서리에는 “여행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글씨는 왠지 노랫가락처럼 내 마음속에서 빙빙 돌았다. “홀리데이 골라이틀리 양, 여행 중.” [......] 나는 복도로 나가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만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여자는 아직도 계단에 서 있었다. 이제는 계단참에 다 올라, 소년처럼 짧고 색깔이 뒤섞인 머리카락이 보였다. 간간이 섞인 황갈색 머리카락, 알비노처럼 하얀 금발과 노란머리채가 복도 불빛에 비쳤다. 여름에 가까운 따뜻한 저녁이었고, 여자는 날씬하고 시원한 검은 드레스에 검은 샌들을 신었으며, 진주 초커를 걸고 있었다. 세련되게 마른 몸매였지만 아침 식사용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거친 분홍빛이 뺨을 짙게 물들였다. 커다란 입에 위로 들린 코, 검은 선글라스가 눈을 가렸다. 유아기를 넘어선 얼굴이었지만 아직 어린 여성의 이편으로 넘어왔다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여자가 열여섯에서 서른 사이 어디쯤이리라고 짐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열아홉 살 생일에 고작 두 달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P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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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를 아직도 떠들어대요?” 그녀는 애정 어린 눈길을 방 건너에 있는 버먼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맞는 말을 했네요. 난 죄책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 사람들이 내게 역을 주었을지도 모르거나, 내가 잘 풀렸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서는 아니에요. 영화사에선 내게 역을 안 줬을 거고, 나도 그렇게 잘 풀리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면, 나는 전혀 꿈꾸지 않았는데 저 사람이 꿈을 꾸도록 놔두었기 때문이죠. 난 그저 몇 가지 자기 계발을 할 시간을 속여서 타냈던 거예요. 난 절대 영화 스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빤히 알았어요. 너무 힘들거든요. 게다가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 창피하기도 한 일이고요. 내 콤플렉스는 그럴 만큼 열등하지 못했어요. 영화 스타가 되는 것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자존심이 손에 손잡고 나란히 가야 했죠. 사실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필수적이에요.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 게 싫겠어요? 그것도 내 계획에 있답니다. 언젠가는 거기까지 이르도록 노력할 거고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난 내 자존심이 졸졸 따라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어느 맑은 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고 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당신 잔이 있어야겠네요.”

그녀는 내 손이 빈 것을 눈치챘다. “러스티! 내 친구에게 술 한잔만 갖다주겠어요?”

홀리는 여전히 고양이를 껴안고 있었다. “불쌍한 게으름뱅이 같으니.” 그녀는 수고양이 머리를 간질였다. “이름도 없는 불쌍한 게으름뱅이예요. 고양이한테 이름이 없어서 약간 불편하긴 해요. 하지만 난 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줄 권리가 없어요. 얘는 누군가의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어느 날 그저 강가에서 마주친 거나 다름없죠. 서로의 소유가 아닌걸요. 얘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나도 그래요. 난 나와 이런저런 것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그런 곳이 어디 있을지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곳이 어떨지는 알아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양이가 바닥에 내려가도록 놔두었다. “거긴 아마 티파니 같을 거예요.” 그녀는 말했다. “내가 뭐 보석에 미쳐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이아몬드야 좋죠. 하지만 마흔 살이 되기 전에 다이아몬드를 달고 다니는 건 저속한 취미예요. 위험하기도 하고, 다이아몬드는 나이가 든 여자들이 해야 정말 제대로 멋져요. 마리아 우스펜스카야라든가. 주름과 뼈, 백발과 다이아몬드가 어우러지잖아. 아, 빨리 그렇게 되고 싶어라. 하지만 내가 티파니에 열광하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심술 굿은 빨강이 솟아오르는 그런 날 알죠?”

“파랑을 우울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건가요?”

“아니에요.” 홀리는 천천히 말했다. “우울이라는 건 살이 쪘거나 비가 너무 오래 오거나 할 때 생기는 파랑이에요. 슬픈 것, 그게 다죠. 하지만 심술 궂은 빨강은 끔찍해요. 두렵고, 돼지처럼 땀이 나는데, 뭐가 두려운지도 몰라요. 다만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 말고는. 그런데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 느낌 있었던 적 있죠?”

“자주 있죠. 어떤 사람들은 그걸 ‘앙스트’라고 합니다.”

“맞아요, 앙스트.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해요?”

“뭐, 술이 도움이 되죠.”

“나도 그렇게 해봤어요, 아스피린도 먹어봤고요. 러스티는 마리화나를 피워보래요. 잠깐 해봤는데 그래 봤자 킬킬 웃음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내가 찾아낸 방법 중에 효과적인 건 그저 택시를 잡아타고 티파니에 가는 거예요. 그러면 즉시 마음이 가라앉죠. 그 고요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면요. 거기선 끔찍한 일은 벌어질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멋진 양복을 입은 친절한 남자들이 있고 은과 악어가죽 지갑 냄새가 사랑스러운 곳에서는 아니겠죠. 티파니와 같은 기분이 드는 현실의 장소를 찾는다면 가구도 사고 고양이에게 이름도 붙일 거예요. 전쟁 후에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요. 프레드와 나는......” 그녀는 검은 안경을 밀어 올렸다. 회색에 파랑과 초록의 기운이 섞인 눈을 아득히 먼 곳을 그리는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난 멕시코에 한 번 간 적이 있었어요. 말을 기르기가 좋은 나라더라고요. 바다 가까이 있는 집을 봐뒀어요. 프레드는 말을 잘 다뤄요.” (P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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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여행 중’이에요?”

“내 명함요?” 홀리는 언짢은 듯 말했다. “그게 웃긴 거 같아요?”

“웃기진 않아요.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니까.”

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내가 내일은 어디 살지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명함에 ‘여행 중’이라고 박아달라고 했어요. 어쨌든 그런 명함을 주문하다니 돈 낭비였죠. 다만 뭔가 작은 거라도 사지 않으면 빚지는 느낌이었거든요. 그거 티파니에서 산 거예요.” 홀리는 내 마티니에 손을 뻗었다. 손도 대지 않은 술이었다. 그녀는 두 모금 만에 꿀꺽 마셔버리고 내 손을 잡았다. “그만 어물쩍거려요. 오제이와 친해져야 해요.”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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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학창 시절에 알던 소녀, 공붓벌레 밀드레드 그로스먼이 생각났다. 축축한 머리카락과 기름 낀 안경의 밀드레드. 개구리를 해부하고 시위대에 커피를 가져다주느라 얼룩졌던 손가락. 천체의 화학적 톤수를 측정할 때만 들어서 별을 향하던 단조로운 눈. 하늘과 땅보다도 밀드레드와 홀리는 극과 극으로 달랐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이 샴쌍둥이처럼 이어졌고, 두 사람을 한데 이어 붙인 생각의 실은 이처럼 흘러갔다. 평균적 개성은 종종 모습을 바꾼다. 몇 년마다 우리 몸은 완전한 분해 수리를 겪는다. 바람직한 일이든 아니든, 우리가 변화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래도, 여기 절대로 변하지 않을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거기서 밀드레드 그로스먼은 홀리 골라이틀리와 공통점을 지녔다. 두 사람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너무 일찍 자기 성격을 받았기 때문에. 벼락부자처럼, 그 때문에 균형을 잃었다. 한 사람은 불안정한 현실주의자로 자기를 몰아넣었고, 다른 사람은 비뚤어진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이 미래에 같은 식당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밀드레드는 여전히 메뉴를 공부하며 영양가를 계산할 것이고, 홀리는 여전히 탐욕스럽게 메뉴에 있는 음식을 죄다 원할 것이었다. 두 가지는 결코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똑같이 왼쪽에 낭떨어지가 있다는 사실을 별로 개의하지 않고 결연한 걸음으로 인생을 헤쳐나갈 것이다. (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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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홀리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내 주머니에 든 작은 포장은, 빨간 리본이 묶여 침대에 떡 하니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한층 더 작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새장이었다.

“하지만, 홀리! 이건 너무하잖아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하지만 자기가 갖고 싶어 했잖아.”

“돈이 얼만데! 자그마치 350달러야!”

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화장실에 몇 번만 더 갔다 오면 되는걸. 하지만 내게 약속해요. 살아 있는 건 결코 그 안에 넣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나는 홀리에게 입을 맞추려 했지만, 홀리가 한 손으로 막았다. “나도 줘요.” 홀리는 주머니 속에 불룩한 것을 톡톡 두드렸다.

“약소할까 걱정되네요.” 나는 말했고, 실제로 약소했다. 성 크리스토퍼의 메달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티파니에서 산 것이었다. (P85)

“벨 아저씨는 야생 동물을 절대 사랑하지 마요.” 홀리가 충고했다. “그게 바로 닥의 실수였죠. 그는 항상 집에 야생 동물들을 안고 들어왔었어. 날개를 다친 매라든가, 한번은 다리가 부러진 다 자란 살쾡이를 데려왔지 뭐에요. 하지만 야생 동물에겐 마음을 주면 안 돼. 마음을 주면 줄수록 개들은 더 강해지니까. 강해져서 숲 속으로 도망가버려. 아니면 나무 위로 날아가든가. 그 다음에는 더 큰 나무로 날아오를 거고, 그 다음에는 저 하늘로.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아저씨, 야생 동물을 사랑하게 되면, 나중에는 결국 하늘만 바라보며 끝.” “얘, 취했군.” 조 벨이 내게 알렸다.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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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는 마티니 잔을 들었다. “닥에게도 행운을 빌어줄까요.” 홀리는 자기 잔을 내 잔에 갖다 댔다. “행운을, 그리고 내 말 믿어요, 사랑하는 닥, 하늘을 바라보는 편이 하늘에 사는 것보다는 더 좋답니다. 무척 공허한 곳이에요. 무척 흐릿하고, 천둥이 치면 다들 사라지는 그런 나라일 뿐이야.” (P104-105)

내 말은, 적어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도록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남자랑 자고 그 사람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거예요. 난 한번도 그런 적 없어. 심지어 베니 섀클릿이나 그 쥐새끼 같은 자식들이라도, 그들의 쥐새끼 같은 면에도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려고 최면 같은 걸 걸었다니까.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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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답은, 좋은 일은 내가 좋은 사람일 때만 일어난다는 거예요. 좋은 사람? 단순히 정직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밥을 잘 지킨다는 뜻의 정직도 아니고. 나 그날 재미있기만 하다면 무덤도 털 수 있어요. 죽은 사람 눈에 좋은 25센트 동전도 훔칠 수 있다고. 그런 것 말고,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식의 정직 말이에요. 뭐든 되어도 좋지만, 겁쟁이, 위선자, 감정적 사기꾼, 매춘부는 아니죠. 난 부정직한 마음으로 사느니 차라리 암에 걸리겠어. 착한 척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현실적인 거지. 암에 걸리면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르게 살면 확실히 죽어버릴 거야.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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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는 차에서 내렸다. 고양이도 데리고.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여긴 너처럼 거친 사나이에게는 딱 어울리는 곳일 것 같아. 쓰레기통. 쥐가 득시글대는 골목. 같이 어울릴 고양이 무리도 많을 거야. 그러니까 가.” 그러면서 고양이를 내려놓았다. 고양이가 움직이려 하는 대신 우락부락한 얼굴을 들어 노란 해적 눈으로 질문을 던지자, 홀리는 한 발을 굴렀다. “가버리라고 했잖아!” 고양이는 홀리의 발에 몸을 비볐다. “꺼져버리라고!” 홀리는 고함을 지르며 차에 도로 올라타더니 문을 쾅 닫았다. “가요.” 그녀는 기사에게 말했다. “가요, 가요.”

나는 얼이 나갔다. “참, 당신 정말이었어. 정말 나쁜 년이었어.”

한 블록 정도 갔을 때 그녀가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우리는 어느 날 강가에서 만난 것뿐이라고. 그게 다야. 독립적으로 사는 존재. 우리 둘 다 그래요. 우리는 절대로 서로에게 어떤 약속도 한 적 없어. 절대로…….”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경련, 병자 같은 창백한 기운이 얼굴을 덮쳤다. 차는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그때 홀리는 문을 열더니 거리를 뛰어 내려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P152~153)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다시 돌아와서 그녀의 고양이를 찾겠다고. “내가 돌봐주기도 할게요. 약속해요.”

홀리는 미소를 띠었다. 기운 없고 새로운, 한 줌의 미소. “하지만 나는요?” 그녀는 속삭이더니 다시 파르르 떨었다. “나 너무 두려워요, 친구. 그래, 드디어. 이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으니까. 내던져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내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야. 심술궂은 빨강,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뚱뚱한 여자,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건, 나 입이 너무 말랐어요. 생사가 걸렸다 해도 침을 뱉을 수도 없을 만큼.” 홀리는 차에 올라타 의자에 푹 주저않았다. “미안해요, 기사 아저씨. 가요.”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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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어디에 있을 지도 모르고,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 결국 삶은 그 자리를 향한 길고 긴 여로, 거친 항해인 것만 같다.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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