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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영화 <네이티브 선> 2019년

by 노용헌

<네이티브 선>(1986)


네이티브 선(Native Son)은 미국에서 제작된 라쉬드 존슨 감독의 2019년 드라마 영화이다. 닉 로빈슨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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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두려움]

...... 비거는 그들의 목소리를 마음 바깥으로 몰아냈다. 식구들이 고생을 하는데도 자기한테는 도울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식구들을 미워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얼마나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사는지 속속들이 느끼게 되는 순간 자신이 두려움과 절망감에 자제력을 상실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는 그는 그들을 돌처럼 차갑게 대했다. 그들과 함게 살고는 있지만, 벽이나 커튼 뒤에서 살고 있는 격이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그는 자기가 어떤 꼴로 살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깨닫는 순간, 자살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죽이고 말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억누르고 거칠게 굴었다. (P22-23)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잖냐.” ..... “하늘에 맹세코, 안되는 거야, 아예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건 나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어.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누가 목구멍 속으로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쑥 집어넣는 느낌이야. 제기랄 생각해 봐! 우리는 여기 살고 그놈들은 저기 살아. 우리는 검고 그놈들은 희고. 그놈들한텐 이것저것 없는 게 없지만 우린 아냐. 그놈들은 뭔가 해내지만 우린 못해. 이거야 꼭 감옥살이지. 세상 밖에서 울타리에 뚫린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 때가 태반이야......” (P35-36)

...그는 누구한테도 책임을 져본 기억이 없었다. 상황이 자신한테 뭔가를 요구하면 그는 즉각 반항했다. 이것이 그의 생활 방식이었다. 그는 두렵기만 한 세계 속에서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거나 충족시키려 발버둥 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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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도주]

어쩌면, 저들은 날 경멸하지 않는 걸까? 그러나 그렇게 하나는 손을 잡고 또 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그에게 자신의 검은 피부를 느끼게 만들었다. 바로 이 순간 자신의 육체적 존재마저 사라져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스스로 증오하는 그것, 검은 피부에 부착된 ‘수치의 표지’였다. (P101)


...... 그는 살인을 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삶을 창조해냈다. 그 삶은 온전히 그 자신만의 것이었으며, 여태껏 무언가 남이 뺏어갈 수 없는 것을 가져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 그는 여기 조용히 앉아 식사하며 식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건 무관심할 수 있었다. 뒤에 숨어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벽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다. 그의 범죄는 그를 때맞춰 안전하게 붙들어줄 닻과도 같았다. 범죄는 총과 칼로는 얻을 수 없었던 자신감 같은 것을 더해주었다... (P152)


사람은 누구나 믿고 싶은 커다란 갈망이 있고 그 때문에 장님이 된다. 그러니 남들은 눈이 멀었지만 그는 볼 수 있다면, 갖고 싶은대로 가져도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다. (P154)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기 손아귀에 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기억컨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생각과 주의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는 명확히 구분된 두 극단 사이에서 난생처음 의식적으로 선택이란 걸 하고 있었다. 죽음의 형벌의 위협으로부터, 그의 가슴속에 그 팽팽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생겨나게 만든 죽음 같은 시간들로부터 벗어나, 잡지와 영화를 통해 아주 자주, 그러나 감질나게 맛보았던 그 충족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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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운명]

비거는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손으로 차가운 쇠창살을 그러쥐었다. 그렇게 서서 그는 자기가 왜 죽였는지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말하려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메리와 베시를 죽인 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게 무엇인지 결코 누구도 이해시킬 수 없다는 바로 그 생각과 느낌이었다. 그의 범죄는 밝혀졌지만, 그것을 저지르기 전에 그가 느꼈던 느낌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죄를 인정함으로써, 그의 삶이었던 그 깊고 숨막히는 증오를, 원치 않아도 품을 수밖에 없던 증오의 느낌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죄를 인정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전달할 수 있을까? 죽이고 싶은 충동이 간절했던 만큼 말해보고 싶은 충동도 간절했다. (P431-432)

“돌턴 씨, 당신은 흑인을 돕는 데 수백만 달러를 기부합니다. 화재가 났다 하면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그런 건물의 집세를 낮추고 그 차액을 자선사업 예산에서 충당하지 않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글쎄요, 집세를 낮춘다면 비윤리적인 행위가 될 것이오.”

“비윤리적이라!”

“그렇소 경쟁자들보다 싼 가격을 책정하는 셈이니까요.”

“부동산업자 사이에 흑인들한테 집세를 얼마 받아야 한다는 약정이라도 있나요?”

“그렇진 않소. 하지만 사업에는 윤리 규범이 있는 거요.”

“그래서, 토머스 가족의 집세에서 벌어들인 이윤을, 그들의 사기당한 삶의 고통을 덜어주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면하려고 도로 그들에게 내주는 겁니까?”

“그건 사실을 왜곡한 것이오, 선생!”

“돌턴 씨, 왜 흑인 교육에 돈을 기부하십니까?”

“기회를 주고 싶어섭니다.”

“당신이 교육받게 도와준 흑인을 고용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소.”

“돌턴 씨, 토머스 가족이 당신 소유의 집에 살면서 견뎌야 했던 그 끔찍한 여건과 따님의 죽임이 어떤 면에서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P459-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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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저들이 살라고 하는 곳에서 살아왔을 뿐아니라, 저들이 하라는 것을 해왔고, 저들과 결별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이런 일을 해왔고, 시키는 대로 한 다음에도, 살인한 다음에도, 여전히 저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과 영혼, 육신과 피, 모두 저들의 소유물이고, 잘 때나 걸어다닐 때나 저들의 처사가 그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장악했다. 그것은 삶의 빛깔을 결정하고 죽음의 조건을 지시했다. (P464)

“..... 저들은 금을 긋고 너희는 그쪽 편에 서 있으라고 말합니다. 이쪽에 빵이 하나도 없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아요. 사람이 죽는다 해도 아랑곳 않지요. 그래 놓곤 그런 소리나 퍼뜨리고, 누가 금을 넘어가려 하면 죽여버리는 겁니다. 당장 죽여버려야 한다고 느끼는 거예요. 모두들 당장 죽여버리지 못해 안달이지요. 그래요,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저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일 거예여. 아마 그게 이유였을 겁니다.” (P492)


“제가 행복해지고 싶은 건 이 세상에서지 저 세상에서가 아니에요. 그런 행복은 원치 않습니다. 백인들은 우리가 독실한 신자가 되기를 바라죠. 그러면 우리를 자기네 멋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P499)

사람들이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끼는 것이기에, 만약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떤 변명으로라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당화하지도 못하고 또 자신의 삶과 재산에 지나친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사태를 바로잡을 즉각적인 해결책도 찾아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바로 그것을 말살하려 할 것입니다. (P547)

....... 오늘날 이 나라에서 자행되는 것은 불의가 아니라 억압입니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질식시키고 짓밟으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 당혹감을 안겨주고, 돌 밑에서 자라나 당혹감을 안겨주고, 돌 밑에서 자라난 잡초처럼 우리가 범죄라 부르는 모습으로 스스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형태의 삶입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비추어 파악하지 않는 한, 그러한 조건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이 우리가 범죄라 부르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의식과 분노의 감정을 또다른 살인으로 달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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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흑인 빈민가 말고 다른 구역에서는 흑인에게 집을 임대해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비거 토머스를 그 숲에 묶어둔 것입니다. 당신은 따님을 살해한 사람이 따님한테 이방이이고 따님 역시 그 사람한테 이방인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토머스 가족과 돌턴 가족의 관계는 임차인과 집주인, 고객과 상인, 피고용주와 고용주의 관계였습니다. 토머스 가족은 가난해지고 돌턴 가족은 부유해졌습니다. 그리고 점잖은 돌턴 씨는 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의 기분을 달려보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돌턴 씨, 황금으론 충분치 않았습니다! 시체를 매수할 수는 없으니까요! 돌턴 씨,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 딸을 번제에 바쳤는데도 나를 괴롭히는 이것을 무덤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했다’라고.

그리고 돌턴 부인께 드릴 말은 이것입니다. ‘부인의 박애 정신은 비극적이게도 부인의 보이지 않는 눈만큼이나 눈먼 것이었습니다.’

돌턴 양이 제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돌턴 양한테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당신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P551-552)

..... 피고인은 우발적으로, 생각 없이, 계획도 의식적 동기도 없이, 메리 돌턴을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살인한 후에는 그 범죄를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피고인 인생 최초의 온전한 행위였습니다. 피고인에게 일어난 것 중 가장 의미심장하고 흥분되는 고무적인 행위였습니다. 피고인은 그것이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에, 선택과 행동의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에, 행동을 하고 자기 행동의 무게를 느낄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P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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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 자넨 곧 죽네. 그러니 이왕에 죽을 거, 자유롭게 죽게. 자넨 자신을 믿으려고 애쓰고 있어. 그런데 제대로 사는 방법을 찾아내려 할 때마다, 바로 자네 마음이 방해가 되지. 왜 그런지 아나? 그건 다른 사람들이 자네는 나쁘다고 말하면서 자네를 나쁜 여건에 살게 했기 때문이야. 그런 말을 계속 들은데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삶이 실제로 나쁘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은 자기 마음도 의심하게 되는 법이지. 감정은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지만, 자신에 대해 남들이 한 말로 가득 찬 마음이 자꾸 뒤로 잡아끌거든. 사람들로 하여금 투쟁하고 신념을 갖게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살아가면서 가진 느낌을 믿을 수 있게. 그리고 자신의 느낌이 다른 사람들의 느낌만큼 정당하다고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해.

비거, 자네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느끼는 것은 자네와 마찬가지야. 다만 울타리 저편에 있을 따름이지. 물론 자넨 흑인이지만, 그건 문제의 일부분일 뿐이네. 전에도 말했지만, 자네의 검은 피부 때문에 저들이 자네를 쉽게 갈라낼 수 있을 뿐이야. 저들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저들도 자네처럼 풍요한 인생을 원하네. 그걸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야. 사람들을 고용하고는 충분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든가, 남의 것을 빼앗아 권력을 쌓든가. 저들은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네. 자기들 마음대로 그런 짓을 하고는 사람들이 맞서 싸우지 못하게끔 모든 것을 만들어놓았지. 흑인한테 가장 심하게 굴면서, 흑인이 열등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대지. 그렇지만 비거, 부자들은 사태가 달라지는 걸 바라지 않아. 잃을 게 너무 많으니까. 그렇지만 깊은 속마음에서는 저들이 느끼는 것도 자네와 마찬가지네. 비거, 그리고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으려 드는 거지. 비거, 자네가 메리한테 미안한 마음이 없다고 고집했을 때처럼 말일세. 그렇지만 울타리 어느 편에 있든 인간은 모두 어엿한 삶을 원하네. 그래서 살기 위해 서로 싸우는 거야, 누가 이기겠나? 삶을 더 절실히 느끼는 편이, 인간성이 더 풍부하고 더 많은 사람이 있는 편이 이기겠지. 그렇기 때문에..... 자—자네도 자신을 미—믿어야 하는 거야, 비거..........” (P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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