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8년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코맥 매카시의 2005년 소설을 원작으로 조얼과 에선 코언 형제 감독의 2007년 미국 영화로 제8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 주요상을 휩쓸었다. 1980년을 배경으로 우연히 거액의 돈가방을 손에 넣은 남자가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쫒기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었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한 2000년대 걸작 스릴러 영화이다.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내다보는 창인지 나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이 있으니 이 모든 소동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덕분에 나는 평생 생각도 못해 본 일을 겪고 말았다. 저기 어딘가에는 살아 있는 진정한 파괴의 예언자가 있다. 다시는 그 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진짜라는 것을. 나는 그가 한 일을 보았다. 한때 나는 그 자의 눈앞에서 걸어 다녔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두 번 다시는 내 운명을 걸고 그 자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그랬었길 바라지만, 누구라도 감히 그러고 싶지는 않으리라. 애가 언제나 알았듯이 이 일을 하려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니 말이다. 그것이 언제나 진실이었다. 영광 따위는 바랄 수도 없지만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당신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들도 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린다. 어쩌면 당신은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모험에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테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P12-13)
그것들은 손에서 손으로 떠돌아다니지만 사람들은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 그리고 어느 날 결산이 이루어지는 거요. 그다음에는 아무것도 똑같지 않지.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 겨우 동전 아니냐고. 별다를 것 없는 동전일 뿐이라고. 행위와 사물을 구별하면서, 마치 역사의 한 순간을 다른 순간과 손쉽게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듯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론 이건 그저 동전일 뿐이오. 그렇소, 맞소. 그저 동전, 하지만 정말 그럴까? (P69)
나는 아무도 죽여야 한 적이 없었는데 이 점을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예전의 보안관들은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짐 스카보로우는 총 따위는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물론 더 젊었을 때의 짐 얘기다. 개스턴 보이킨스 역시 총 한 자루 없이 다녔다. 저 위의 코먼치 군에서 발이다. 나는 언제나 그런 옛날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럴 기회가 있으면 결코 놓치지 않았다. 옛날에 보안관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보인 관심은 사방에 골고루 스며들었다. 그들의 관심을 못 느낄래야 못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베스트로프 군의 검둥이 호스킨스는 모든 군민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이런 걸 생각하면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권력 남용의 가능성이 상존하니 말이다. 텍사스 주 헌법은 보안관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을 정해두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정한 게 없다. 군 법에도 그런 요건이 없다. 거의 하느님과 같은 권위가 있는 직업에 아무런 자격 요건을 두지 않았으니 보안관이란 존재하지도 않는 법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얘기인데, 이게 참 이상하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런 게 잘 통하냐고? 물론이다. 십중팔구는 잘 통한다. 선량한 주민들을 다스리는 데는 힘쓸 일이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리고 나쁜 인간들을 다스리기가 아예 불가능하다. 아니면 다스릴 수 있었나는 얘기를 내가 들어본 적이 없거나. (P75-76)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친구를 잃었다. 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아니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사람이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 우리는 봉급을 주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물론 자기가 남긴 기록에도 신경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군에서는 지난 41년 동안 미해결 살인 사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한 주 동안 아홉 건이나 발생하고 말았다. 해결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내게 불리하다. 시간도 내 편이 아니다. 마약상 일당의 꿍꿍이를 알아냈다는 게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다. 그들이 우리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애쓰는지도 모르겠다. 놈들은 법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반은 맞는 말이다. 얼마 전에는 여기 샌안토니오에서 연방 판사가 총에 맞아 죽었다. 아마도 그들과 관련된 판사일 것이다. 이 국경 근처에는 마약으로 부자가 된 경찰도 몇 명 있다. 알면 괴로운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부패 경찰은 그냥 몹쓸놈이다. 그 말밖에는 할 수 없다. 범죄자보다 열 배는 더 나쁜 놈이다. 이런 일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나도 이런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 일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P237-238)
당신이 악마라면, 그리고 인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면, 결국 마약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더니 사람들이 나보고 악마의 존재를 믿느냐고 물었다. 내가 요점은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건 아는데 어쨌든 믿느냐고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때는 믿었던 것 같다. 중년이 되면서 믿음은 다소 시들해졌다. 지금은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어진다.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많은 일이 설명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P239)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냐. 네가 그곳에 가면서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생각이 요점이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너의 생각. 아니 누구의 생각이든.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없어. 내가 말하려는 게 이거야. 너의 발자국은 영원히 남아. 그걸 없앨 수는 없지. 단 하나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조금은요.
아직 이해 못하는 것 같으니 한 마디 더 하마. 너는 어제 몇 시에 일어났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어제야. 다른 건 중요치 않아.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너의 인생이 되지. 그밖엔 아무것도 없어. 너는 도망가서 이름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할지 몰라.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천장을 바라보며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하고 묻게 돼. (P249)
전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는 뭐 그런 일에 대해서요.
글쎄, 너무 이른 판단 아닐까.
왜요? 저를 사막에 묻으시게요?
아니, 하지만 세상에는 불운한 일도 많아. 너도 좀더 살아보면 네 몫만큼 겪게 될 거야.
이미 겪었는 걸요. 이제는 운이 바뀔 때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미 바뀌었는 지도 몰라요.
그래? 글쎄, 그렇지 않을걸.
왜 그런 말을 하세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아가씨, 내가 한 마디 할게. 이 세상에서 절대로 보기 힘든 게 있다면 그건 넝쿨째 굴러다니는 행운이야.
미운 소리만 골라 하시네요. (P256-257)
아버지는 언제나 최선의 길을 선택하고 진실을 숨김 없이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누구인지 결정할 필요가 없는 것만큼 마음 편한 일은 없다고 하셨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곧바로 이야기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서 자기 잘못을 껴안고 가야 한다.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꽤 간단하게 들리는 말이다. 나에게도 그렇다. 그러니 오히려 생각해 볼 이유가 더 많은 셈이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한 말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는 두 번씩 말씀을 하실 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귀를 기울여 들었다. 나는 아마도 젊은 시절에 벌써 아버지의 말씀에서 벗어났을 것이지만 다시 그 길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그 말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섰고 정말로 그렇게 했다.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 단순해야 한다.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늦게 된다. 그것을 이해할 때는 벌써 늦은 것이다. (P272)
나에겐 결정권이 없어.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어느 순간 당신은 선택을 했어. 다 거기서 초래된 일이지. 결산은 꼼꼼하고 조금의 빈틈도 없어.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절대로,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다.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구나 없지. 당신이 가야할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P283)
살아오시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지요.
노인은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그가 입을 열었다. 후회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아. 하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많이 생각나. 걸어다닐 수 있는 것도 그 중 하나지. 자네도 그런 목록을 만들 수 있겠지.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나이가 들면 자기가 행복해지고 싶은 만큼 행복한 법이야.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지만, 결국 예전에 행복했던 만큼 행복한 거야. 아니면 그만큼 불행하든가. 이걸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 (P288-289)
어쩌면요. 하지만 전우가 된다는 건 서로의 생사를 돌보기로 맹세를 하는 거지요. 제가 왜 그러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 부름을 받게 되면 어떤 결과든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죠. 하지만 어떤 결과가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국 계획에 없던 일이 문 앞에 쌓이게 마련이지요. 제가 거기서 제가 한 말을 지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죽어야 하는 게 옳았다면 저는 그렇게 했어야 했어요. 말이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지만 그게 정답이에요. 저는 그렇게 했어야 했지만 하지 못했어요. 제 안에서는 아직도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날로 돌아가겠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 와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때는 우리가 자기 인생도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리고 훔친 게 무엇이든 그만한 혜택을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몰랐지요. 저는 훔친 것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직도 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어요. (P304-305)
나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돈에 팔린 존재다. 단지 마약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만큼 엄청난 부가 쌓이고 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나라를 살 수 있을 만한 돈. 아니 벌써 온 나라를 사고 말았는지도. 이 나라도 살 수 있을까? 설마,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은 우리를 같이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과 한 침대에 밀어넣을 게다. 그것은 법 집행의 문제도 아니다. 언제는 그랬는가. 마약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어나자마자 아무 이유도 없이 약에 취한 적은 없다. 수백만 명이 말이다. 내가 무슨 대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특히 내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 얼마 전에 나는 젊고 예쁜 한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녀는 단지 기자처럼 굴고 싶어했다. 그녀가 말했다. 어떻게 보안관님의 담당 군에서 범죄가 그렇게 만연하게 되었을까요? 정당한 질문처럼 들렸다. 꽤 정당한 질문일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례를 용납하게 될 때 모든 게 시작됩니다. 더 이상 존칭과 경어를 듣지 못하는 순간 눈앞에 종말이 보이는 거지요. 나는 계속 말했다. 이런 풍조는 모든 계층에 스며들었어요.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지요? 모든 계층이요? 그러다 보면 마침내 상업 윤리가 무너지고 사람을 죽여 차에 집어넣고 사막에 버려 두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때는 모든 게 너무 늦게 됩니다.
그녀는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는데 어쩌면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녀에게 마약 복용자가 있으니 마약 장사꾼이 있는 게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많은 마약 복용자가 옷차림도 그럴 듯하고 직장도 근사하다. 나는 그녀에게 당신도 몇 명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얘기했다.
또 한 가지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줄곧 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를 보는 노인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언제나 의문이 생긴다. 예전에는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인들은 별로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은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런 점이 나를 괴롭혔다. 그들은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P33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