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 1982년
<마틴 기어의 귀향>(The Return of Martin Guerre)는 1982년에 개봉한 프랑스의 영화이다. 가짜 마틴역의 제라르 드빠르디유는 이 영화를 계기로 세계적 스타가 되었으며, 중세시대 판사가 기록한 실화여서 영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1993년에 리메이크작인 <써머스비Sommersby>가 나왔다. 써머스비는 잭 써머스비(리차드 기어)는 남북전쟁에 갔다가 6년 만에 남부의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다.
마르탱 게르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그것은 1560년에 열린 16세기의 가장 유명한 재판 가운데 하나로, 몽테뉴는 <절름발이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다. 짐작건대 그는 이 재판에 참관한 듯하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툴루즈의 사법관인 장 드 코라스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는 툴루즈 고등법원의 판사이자 재판 보고서의 주 작성자였다. 코라스는 1561년부터 수 차례 재간된 자신의 책 <툴루즈 고등법원의 잊을 수 없는 판결>에서 이 사건의 전모를 방대한 주석과 함께 전하고 있다. 이 책은 “이성에 충실하라”라는 말을 꼭 지켜야 할 금언(金言)으로 삼아,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는 일에만 마음을 쓴, 올곧고 주의 깊고 매사에 정확했던 한 인간의 저술이다.
이 사건은 그동안 다양한 형태로 여러 번 다루어진 바 있다. 파스키에(Pasquier)는 <유명한 소송 모음집>이라는 책에 마르탱 게르 사건을 실었으며, 19세기 초엽에는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연극 작품도 있었다. 1941년에는 미국의 소설가 재닛 루이스 --그는 장 드 코라스의 책이 있는지 몰랐고, 파스키에의 책에서만 자료를 골라 가져왔다-- 가 <마르탱 게르의 부인>이라는 소설을 썼다.
끝으로 1981년에 우리는 이 사건을 토대로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면서 가능한 한 충실하게 장 드 코라스 --영화에서는 판사 자신도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의 보고서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4세기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탱 게르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흥미진진하고 친숙하면서도 믿기 어렵다. (P5-7)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내가 앞서 말한 일요일에 아르티가에서는 마르탱 게르와 베르트랑드 드 롤스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사람들은 그 둘이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들 했다.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열넷이나 열다섯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베르트랑드는 아들이 없는 집안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아르티가에서 매우 가까운 롤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가족으로는 홀어머니 레몽드만 있었다. 갈색 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지닌 베르트랑드는 산 너머 다른 지역 출신이라 여겨졌다. 거의 스페인 여자라고. (P14-15)
여러 해 동안 마르탱은 성 불능 상태였고, 베르트랑드 역시 숫처녀인 채로 있었다. 적어도 3년 동안은, 이런 일은 하녀에게는 감출 수 없는 노릇이다. 결혼식 다음 날, 침대를 정리하면서 밤사이에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몇 날을 기다렸다가 내가 아는 바를 베르트랑드에게 말했다(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이 일에 끼어들기는커녕, 아랑곳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베르트랑드는 잘못된 것이 무어냐는 반응이었다. 나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임신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소문이 여기저기로 퍼지기 시작했고, 소문은 부풀려 크게 떠벌리는 사람도 있었다. 레몽드는 하는 수 없이 무심한 태도를 버리고, 남자의 불능을 이유로 상대에게 결혼 파기를 요구하라고 딸에게 말했다. (P23-24)
두 사람은 사내아이를 낳았고, 이름을 상시라고 지어 불렀다. 윗대 할아버지 한 분의 바스크 식 이름을 딴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작은 일에도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여 살피는 나로서는 이 젊은 부부를 짓눌러온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르탱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늘 말이 적고 시무룩하며, 자신이 농부가 된 --농부로 태어나 영원히 농부로 있을-- 걸 남의 탓으로 돌리는 듯 그는 혼자 지냈다. 그는 네 명의 누이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바로 아래 두 명의 누이들은 특히 그에게 다정하고 살뜰했다. 마르탱은 한 지붕 아래서 젖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이방인이 거기 버려둔 아이라도 되는 양 핼끔 곁눈질하여 쳐다볼 뿐이었다. (P36)
결국 씨앗 자루는 찾지 못했다. 마르탱이 범인이었을까? 아무도 그걸 증명해내지 못했다. 마르탱은 이미 그 무렵 집에서 뛰쳐나갈 궁리를 했고, 그래서 길 떠날 비용을 마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농촌에서 씨앗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씨앗은 늘 부족했다. 흉년을 대비하기 위한 방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연히 마주친 농부나 맘에 드는 옆 마을 농부에게 씨앗을 팔아먹는 일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P43)
처음에는 마르탱이 정말로 집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베르트랑드는 마르탱이 아버지가 무서워 집을 나간 것이므로 며칠 안에 혹은 끽해야 일주일 안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르탱을 기다렸다. 그녀는 끊임없이 언덕 아랫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가축 소리, 개 짖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밤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명이 밝아오면 눈을 떠, 맨 먼저 창문 쪽으로 시선을 향하곤 했다. (P46-47)
마르탱이 고향에 돌아왔다. 때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그가 집을 나간 지 8-9년쯤 흐른 뒤였다.
맨 처음 그를 본 사람들 --이들은 나중에 수차례 당시의 일을 이야기했다-- 은 에티엔의 두 아들로,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나 있는 앙드레와 그의 동생 자크였다. 둘은 언덕 아랫길 근처의 작은 밭에서 땅을 일구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멀리서 그들에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을 멈추고 길을 걸어오는 한 사내를 보았다. 그는 손에 굵다란 지팡이를 들고, 가슴에는 두 개의 긴 배낭을 엇갈려 메고 있었다. 사내는 마치 친구한테 하듯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대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지지리 궁상 남루한 행색이었다. (P53)
나는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한 남자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새삼 삶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랑을 많이 못 받은 소심한 아이였다. 아버지 앞에서 벌벌 떨기나 하고, 산 너머로 달아날 궁리나 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 유쾌하고 당당하고 성숙한 남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험담을 우리에게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귀를 세우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늘 말이 없고, 늘 숨어 지내고, 늘 외톨이였던 그였는데 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여행은 진실로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성숙하게 하는 것인가? 죽음의 시녀인 전쟁이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해준다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아니면 떠돌아다녀 봐야 불행한 일밖에 안 생긴다거나, 이국땅에서 바람을 맞아봐야 불행한 일밖에는 안 생긴다며, 따라서 고향에서 조신하게 몸을 보전하며 사는 게 더 낫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까? 이런 고리타분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우리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사람들의 의견 또한 모두 제각각이어서 찬반양론이 분분했다. 내 생각은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달랐다. (P72-73)
세월은 유유히 흘렀다. 사람들 말마따나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흘렀다. 날이 가고 계절이 바뀌었다. 마을 전체를 뒤흔들었던 마르탱의 귀향은 조금씩 잊혀가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떠난 이후,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더 이상 세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의 변화도 없었다. 마르탱은 집에서나 밭에서나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심지어 남이 시키거나 요청하지 않아도 궂은일을 스스로 나서서 했다. 게르 집안의 땅이 전에 없이 비옥해졌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마르탱은 베르트랑드와 화목하게 지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목했다고 할 수 있었다. 성 불능은 이제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거의 매일 밤 침대가 삐걱댔으며, 때로는 낮에도 둘은 강가로 달려가 잠시 사라졌다가 볼이 벌게져서 돌아오곤 했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이 역력했고, 나도 그런 모습에 사뭇 기분이 좋았다. 그의 오랜 부재가 도리어 한 남자를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린 건장하고 활기찬 남자로 변하게 한 것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의 기운이 집 안에 그득했다. 얼마 후 그들은 딸을 낳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몇 시간밖에 살지 못했다. 곧이어 또 다른 딸을 낳았는데, 그 애는 건강하게 자랐고 지금도 살아 있다. 이 아이가 태어난 지 열두어 달쯤 되었을 때, 그 유명한 사건이 터졌다.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면서 빈번히 내가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바로 그 사건이었다. (P81-82)
“저기, 저 사람 말입니다.”
군인은 턱으로 마르탱이 나간 헛간의 문을 가리켰다. 신부가 대답했다.
“마르탱이지.”
“마르탱 누구라고요?”
“마르탱 게르라고.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이지.”
행상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돌아온 탕아인 셈이로군.”
군인은 잠시 노름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생각을 가다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르탱 게르가 아니오.”
순간 뭔가가 나의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이를 돌보던 손을 멈추고 헛간 바닥을 뚫어져라 보았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주사위 던지는 소리도 멈췄다. 군인이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마르탱 게르가 아니오.”
어느 누구도 그에게 따져 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군인은 잠시 생각에 골몰하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아르티가의 마르탱 게르는 내가 잘 알고 있소. 나는 그를 생캉탱 전투에서 만났소. 그는 그 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단 말이외다.”
그는 입으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요, 그는 생캉탱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소. 내가 기억하기로는 오른쪽 다리였소. 포탄에 맞아 절단이 났지.”
신부는 이 말을 듣자, 잠에서 깨어난 듯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오, 그럴 리 없소. 그는 틀림없이 게르 집안의 아들 마르탱이오. 난 그를 알지. 내가 결혼을 시켰는걸.”
“그자는 마르탱 게르가 아니라니까요.”
군인이 거듭 말했다. (P86-87)
“분명히 전쟁터에서 봤는데, 뭐더라 이름이?”
“마르탱이오!”
앙투안이 말했다.
“우리는 같은 집안이라니까요.”
“아니오, 정말 아니오. 그자의 이름은.......”
이윽고 갑자기 한 줄기 빛이 그의 빈약한 뇌리를 뚫고 지나간 듯, 그가 소리를 질러댔다.
“팡세트! 그렇소, 팡세트요. 저자는 저 아랫마을 틸 출신이오. 마르탱이 아니오. 내가 잘 알죠. 이리 봬도 내가 사람 얼굴은 안 잊어버린다고요.”
“팡세트라고요?”
앙투안이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는 팡세트요. 나는 그자 또한 피카르디에서 만났소. 팡세트, 그자도 거기 있었소.” (P88)
“다들 마르탱이 틸 출신이라고 수군거리고 있어요. 그의 진짜 이름은 아르노이고, 별명은 팡세트라고요. 그가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는 모두 그를 팡세트로 알고 있으며 별 볼 일 없는 놈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사람들 말이 진짜 마르탱은 아직 살아 있을 것이고, 다만 한쪽 다리로만 살고 있을 것라고들 해요.”
피에르 게르는 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뭔가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듯했는데, 그가 내뱉을 말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에 모두 조바심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 군인이 어디서 온 자라고?”
“피카르디 지방에 주둔해 있던 부대래요.”
앙투안이 대답했다.
피에르는 다시 침묵에 잠겨 쇠스랑의 날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직하고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외지인, 주정뱅이, 망나니 들이 너주레하게 지껄인 그런 말은 믿지 마.”
피에르의 말에 우리는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P94-95)
훗날 법정에서 베르트랑드는 그날 피에르 게르가 마르탱을 죽이려고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분명하게 답을 했다.
“네, 제가 막지 않았더라면 그자들은 분명 제 남편을 죽였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남편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생각이었습니까?”
판사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제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요.”
그러자 장 드 코라스라는 판사가 물었다.
“그럼 내가 묻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 그 까닭을 설명해보시오. 당신은 목숨을 걸고 남편을 보호했소. 그렇다면 피에르 게르가 당신 남편을 고소했을 때, 당신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베르트랑드는 할 말을 잃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당신은 항의해야 했었소. 당신은 리외의 재판관을 만나야 했었소.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이 남자는 확실히 내 남편이라고 말해야 했었소.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이오. 왜 그런 거요?”
아! 그 점은 정말 모든 사람이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베르트랑드가 축사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간신히 마르탱을 구해내고 며칠이 지난 후, 피에르 게르는 노새를 타고 리외로 가서 재판관에게 고소장을 제출했다. (P119-121)
고등법원 판사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리외의 재판관관 눈빛을 교환하고는, 마침내 힘차고 장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반되는 주장의 조정에 의거해(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는데, 나는 이 말이 반대 의견이 무효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툴루즈 고등법원의 판사인 나, 장 드 코라스는 이 남자가 마르탱 게르가 아니라고 판단할 아무런 사유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는 바이다.”
밝은 미소가 마르탱의 얼굴에 감돌았다. 판사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따라서 증거 부족으로 무혐의를 선언하고, 피고는 방면되어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판결을 내린다. 피에르 게르에게는 그의 조카와 국왕에 대한 무고죄로 500리브르의 벌금형에 처한다.”
많은 사람들이 코라스의 판결에 만족했다. 제일 먼저 마르탱과 그의 아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남편의 팔을 꼭 잡아 그를 곧장 집으로 데려갔다. (P134-135)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날 아침 베르트랑드가 보인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이리저리 떠밀려 우왕좌왕 헤매다가 혹시 머리가 돌아버린 건 아닐까 하고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전날까지만 해도 무혐의로 풀려난 남편의 팔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와 그렇듯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바로 다음날 아침 자기 남편이 국외자(局外者)처럼, 부당한 침입자처럼 체포되는데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며, 고소장에 적힌 자기 서명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다. (P142-143)
그가 이번에는 피에르를 겨냥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봤습니다. 포탄이 날아다니는 소리, 전장의 끔찍한 비명 소리도 들었습니다. 숙부, 숙부가 제게 가하는 고통은 그동안 제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다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바로 이게 고향을 떠나 세상 물정에 대해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자신의 자리는 바로 여기 이 집이고 자신의 임무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이 땅을 일구는 것임을 비로소 깨달은 자가 받아야 하는 대가입니까?”
사람들은 이 말도 조용히 들었다. 피에르 게르는 부아가 끓어올랐지만 반박할 만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나는 마르탱이 구사하는 단어와 표현에 탄복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눈이 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마르탱은 말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늙은 장님인 자크메트에게로 몸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자크메트, 이리 좀 와보세요. 당신은 손으로 기억을 하는 분입니다. 이리 오셔서 제가 누군지 그들에게 말해주세요. 진실을 말해주세요.” (P176-177)
고등법원 판사 코라스도 심문 도중에 두 차례나 --이는 그가 자신의 주장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법이란, 인간이 누구나 선하고 정직하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저녁에 수도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나중에 마을에 돌아와서도 겉으로 보기에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말에 대해 골백번도 넘게 자문해 보곤 했다. 만약 법이 인간은 누구나 선하고 정직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과연 인생도 그러할까? 법에서는 전제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문제 삼고 있고 경험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인간의 천성적인 선함에 도대체 무슨 변고가 생긴 걸까? 이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내 보잘것없는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 속에 어떤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이 진리ㅐ를 탐구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회의를 겪었을까 하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P182-183)
마르탱과 또래로 보이는 한 사내가 판사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먼 길을 걸어왔는지 매우 피곤한 기색이었다.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스스로를 마르탱 게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까?”
“네.”
그가 대답했다.
“분명히 제 이름입니다.”
그 순간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소리를 질러대거나 사내에게 달려드는 사람들로 난리도 아니었다. 재판장은 질서유지를 위해 경비병들을 불렀다 사내는 피고에게 경멸 가득한 눈길을 한 번 던졌을 뿐 잠자코 서 있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재판장이 물었다.
“피카르디 지방에 주둔했던 군대에서 왔습니다. 저는 생캉탱 전투에서 포탄을 맞아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아르티가에 갔다가 이곳 소식을 들었고, 제 가족도 여기 있다고 해서 오는 길입니다.” (P203)
바로 그 순간 --대질 심문에서 특히 결정적인 순간이었지만, 우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고등법원 판사 코라스는 피고에게 다가가 태연히 말했다.
“잠깐, 자네는 자네가 저자에게 이야기했다고 했지?”
“네.”
그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숨을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저자가 그걸 역이용하고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판사가 말을 다시 이었다.
“저자가 법정에 들어왔을 때, 자네는 말하지 않았나.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고.”
장내가 삽시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놀라서 수군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피고는 처음으로 실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 실수가 치명적인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진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고등법원 판사 코라스는 주의 깊고 통찰력 있는, 소위 우거진 잡목림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길들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방금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 만 것이다. (P213-214)
“네, 맞습니다. 저는 마르탱을 전쟁터에서 알았습니다. 그는 제게 자기 아내와 아들 그리고 자기 집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저를 마르탱으로 착각했습니다. 저에게 큰 소리로 “잘 지냈나, 마르탱”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저로 하여금 엉뚱한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의 자리에 내가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마르탱에 관한 정보를 두루 찾아 살폈습니다. 저는 진즉에 마르탱이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P219)
“아르노와 저는 함께 잘 지냈어요. 마르탱은 제게 소홀했고, 저를 버려둔 채 떠났어요. 아르노는 진정한 남편이 그러하듯 저를 소중하게 대해주었어요. 저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했을 때, 우리는 판사님들께 직접 물어보기로 마음먹었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마르탱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합법적인 부부로 인정받았을 거예요. 그다음에는 아무도 더 이상 쑥덕대지 않았을 테고요.” (P229-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