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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l 22. 2024

이사벨 아옌덴의 <영혼의 집>

영화 <하우스 오브 스피리트>  1993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오촌 조카로 성이 같아서, 한때 한국에는 딸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서 살바도르 아옌데가 사망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자 베네수엘라로 망명했다고 한다. 1981년 외할아버지가 위독해지자 이 일을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며, 이듬해 '영혼의 집'이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하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주로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를 중점으로 한 소설을 집필했다.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영혼의 집>(The House Of The Spirits)은 포르투갈에서 제작된 빌 어거스트 감독의 1993년 드라마, 멜로/로맨스 영화이다. 메릴 스트립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베른트 아이힝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1]

“바라바스가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왔다.” 어린 클라라는 섬세한 필체로 이렇게 메모해 놓았다. 클라라는 이때부터 이미 중요한 일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 뒤 벙어리로 지낼 때에도 자질구레한 일까지 모두 기록해 두었다. 그렇지만 클라라도 오십 년 후에 자신의 노트가, 내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공포를 극복하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바라바스는 성(聖) 목요일에 도착했다. 바라바스는 똥오줌에 뒤범벅이 된 채 더러운 우리 안에 갇혀서 왔는데, 무기력하고 비참한 죄수처럼 넋 나간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큼지막한 두상과 골격의 크기로 미루어 장차 엄청난 거구로 자랄 것 같았다. 그날은 어린 클라라가 노트에 적어놓은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나른한 가을날이었다. 사건은 어린 클라라가 온 가족과 함께 참석한 성 세바스티안 교구의 정오 미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어났다.         (P11-12)     


마르코스는 자신의 여정과 인상을 기록한 다양한 여행 일지뿐만 아니라, 수집한 지도와 이야기책, 모험담, 심지어 동화책까지 갖고 있었다. 그는 책들을 궤짝 속에 넣어 뒤뜰 제일 구석에 있는 창고 안에 보관해 두었다. 그 책들은 반세기 후에 실수로 화형대에서 모두 불살라질 때까지 그 집안 후손들이 꿈을 키워주었다. 

그런데 그런 마르코스 외삼촌이 마지막 여행에서 관에 안치된 채 돌아왔다. 그는 원인 불명의 아프리카 전염병에 걸려 양피지처럼 누렇고 쭈글쭈글해진 채 죽어갔다. 그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는, 누나의 간호와 쿠에바스 의사의 의술이 자신의 건강과 젊음을 회복시켜 줄 거라 기대하며 본국을 향해 출발했지만 육십 일간의 긴 항해를 끝내 견디지 못했다. 사향 냄새가 나는 여인들과 숨겨진 보물들이 나타나는 환각에 시달리며 신열로 몸이 망가져 과야킬 위도 선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P40-41)   

 

바라바스가 마르코스 외삼촌의 유품과 함께 섞여서 오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은 클라라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순간이 되었을 수도 있다. 클라라는 안뜰에서 벌어지는 왁자지껄한 대소동은 무시한 채, 본능에 이끌려 우리가 버려져 있던 구석으로 곧바로 향했다. 그 안에 바라바스가 있었다. 바라바스는 정확히 무슨 색깔이라 말할 수 없는 살가죽을 뒤집어쓴 뼈 뭉치에 불과했다. 병균에 감염된 피부에 한쪽 눈은 감겨 있고, 다른 쪽 눈은 눈곱이 떡이 져 있었으며, 거기에다 자기가 싸놓은 배설물을 뒤집어쓴 채 송장처럼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런 흉측한 몰골에도, 클라라는 그 짐승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강아지다!”

클라라가 소리 질렀다. 

그러고 나서 클라라는 그 짐승을 책임지기로 했다.                 (P42)   

  

로사의 시신을 보고 나서, 쿠에바스 박사는 로사가 죽은 것이 흔한 열병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사인에서 연유했음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집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릇 안에 손을 집어넣어 보기도 하고, 밀가루 자루와 설탕 봉투를 뜯어보기도 하고, 말린 과일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기도 했다. 박사가 지나간 자리는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모두 난장판이 되었다. 박사는 로사의 서랍을 남김없이 뒤지고, 하인들도 일일이 대질 심문했다. 그러고는 유모가 정신을 쏙 빼놓을 때까지 물어보고 또 물어본 끝에 마침내 로사의 죽음이 토속주 병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는 당장 조사에 임했다. 박사는 자기가 의심쩍게 생각하는 점을 일절 발설하지 않았지만, 술병은 실험실로 가지고 갔다. 세 시간 후 그가 돌아왔을 때는 발그스레 혈색 좋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창백하게 변해서, 그 끔찍스러운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 계속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박사는 세베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더니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저 술 안에는 황소 한 마리도 때려잡을 만한 독이 들어 있습니다.”

쿠에바스 박사가 세베로를 붙잡고 다짜고짜로 얘기했다. 

“하지만 정말 그 독 때문에 로사가 죽었는지는 시체 부검을 해봐야 알겠습니다.”            (P57)  

   

당시 그 나라에는 정치적 암살이란 없었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독살은 천하디천한 매춘부나 사용하는 치졸한 방법이었다. 심지어 치정에 얽힌 범죄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해결했기 때문에 독살은 식민지 시대 이후로는 쓰이지 않던 방법이었다. 그 사건으로 항의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세베로가 어떻게 손쓰기도 전에 야당의 회보에 기사화되어 실리기까지 했다. 소수 집권 계급을 은근히 범인으로 몰면서, 세베로 델 바예가 자신의 사회적 계급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그런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은 술병과 관련된 단서를 추적하려 애썼지만, 알아낸 거라고는 그 병의 출처가 메추리로 속을 채운 구운 통돼지의 출처와 일치하지 않으며, 남부 유권자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문제의 그 술병은 통돼지 구이가 배달되었던 바로 그날 같은 시각에 델 바예 저택의 부엌 뒷문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요리사는 그 술병도 같이 딸려온 선물이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경찰의 열성적인 노력도, 세베로가 직접 고용한 사립 탐정의 수사도 암살자의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하였고, 결국에는 유예된 복수의 그림자가 다음 몇 세대에 걸쳐 계속 드리워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델 바예 가문의 운명을 결정짓는 파란만장하고 잔인한 수많은 사건들의 서막이었다.                      (P65-66)     


페룰라는 어머니의 병을 핑계로 청혼자를 두 명이나 물리쳤다. 이런 사실을 그녀가 입 밖에 낸 적은 없었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페룰라 역시 동생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뚱하고 거친 데가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과 여자라는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 성질을 누르고 제동을 걸며 살아야 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보인 나머지 성녀라는 명성까지 얻을 정도였다. 병든 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보살필 뿐만 아니라 아버지마저 빚더미만 남겨놓은 채 돌아가신 상황에서 하나뿐인 남동생을 키웠기 때문에 페룰라는 모든 사람들의 귀감으로 인용되었다. 페룰라는 에스테반이 어렸을 때는 그를 몹시 사랑했다. 동생과 함께 자고, 목욕시키고, 함께 산책 나가고,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삯바느질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버는 돈으로는 생활도 제대로 꾸려 나가기가 어려워 에스테반이 공증인 사무실에 취직했을 때에는 분노와 무력감으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페룰라는 지금 어머니를 보살피는 정성으로 에스테반을 보살피고 시중을 들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생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보이지 않는 그물을 쳐서 동생을 옭아매었다. 에스테반이 돈으로는 갚을 수 없는 누나의 은혜에 평생 빚진 마음으로 살도록 만들었다.                       (P83)


이 구질구질한 놈들한테는 세게 나가야 해. 그래야만 제대로 알아듣거든. 물렁하게 나갔다가는 존경이고 나발이고 없어! 물론 내가 가끔 그 사람들한테 심하게 군 적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아. 하지만 언제나 공정했어. 나는 그 사람들한테 모든 걸 다 가르쳐주었어. 심지어 먹는 법까지 가르쳐줬다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뒀으면 빵밖에 먹지 못했을 거야. 내가 조금이라도 감시를 늦추면 그 사람들은 돼지한테 우유랑 계란을 먹인단 말이야. 제 엉덩이도 닦을 줄 모르는데 투표권은 무슨 얼어 죽을 투표권이야! 자기들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정치를 어떻게 안단 말이야? 이 사람들은 북쪽 지방의 광부들처럼 빨갱이들한테나 표를 던질 위인들이야. 광물 값이 그 어느 때보다 치솟은 상태인데, 이럴 때 광부들이 파업이니 뭐니 하면서 나라를 온통 뒤숭숭하게 만들어놓았어. 내가 북쪽에 있었다면 군대를 투입시켜 총탄을 퍼부어 단번에 그 못된 버릇을 말끔히 고쳐주었을 텐데. 불행히도 이쪽 나라들에서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게 유일한 약이야. 여기는 유럽이 아니야.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강한 정부, 강한 농장주야, 우리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잖아. 그것보다 명백한 사실은 없지.

여기서 제대로 일할 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어.                 (P120-121) 

    

선거 날에는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군대가 민주화 과정을 책임지고 지켜주었다. 모두 평화로웠으며, 평소보다 훨씬 더 화창하고 활기가 넘치는 봄날이었다. 

“있는 독재자를 전복시키고 또 다른 독재자를 앉히기 위해 계속 혁명만 하느라 허송세월하는 인디오와 흑인이 넘치는 남미 대륙에서는 우리 나라가 하나의 표본이지. 우리 나라는 달라! 진짜 제대로 된 공화국이란 말이야! 우리에게는 시민의 자부심이 있어. 이 나라에서는 보수당이 깨끗하고 공정하게 선거에서 승리하지. 그래서 질서를 바로잡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군인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 양키들이 원자재를 모조리 싸 짊어지고 떠나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이웃의 독재 국가들과는 다르다고.”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클럽 식당에서 잔을 들고 건배하면서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이렇게 말했다.                  (P130)     

그 시절, 클라라는 공기의 정령과 물의 정령, 대지의 정령들과 함께 환상 속에 푹 빠져 살았다. 클라라는 너무 행복해서 구 년 동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클라라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는 틀렸다고 마음을 비웠을 때, 클라라는 생일날 초콜릿 케이크에 꽂힌 열아홉 개의 촛불을 불어서 끄고 난 후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갇혀 있던 터라 마치 조율되지 않은 악기와 같은 투박한 소리가 났다. 

“난 곧 결혼할 거예요.”

클라라가 말했다. 

“누구랑?”

아빠가 물었다. 

“로사 언니의 약혼자랑요.”

클라라가 대답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식구들은 클라라가 구 년 만에 처음으로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기적은 집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며, 집 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식구들끼리 서로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전했고, 그 소문은 온 도시로 퍼져 나갔다. 식구들이 쿠에바스 박사에게 진찰을 요구했지만 박사는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클라라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모두 들떠서 난리법석을 피웠기 때문에 정작 클라라가 한 말은 가족들 모두 그냥 잊어버렸다. 그랬다가 두 달 후에 로사의 장례식 이후 보지 못했던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클라라에게 청혼하러 나타났을 때에서야 비로소 클라라가 한 말을 기억해 냈다.               (P150-151)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클라라는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져 자신의 내면세계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뱃속의 아기와 끊임없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에스테반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트루에바 가문의 이름을 대대로 물려줄 아들을 원했다.

“이 애는 딸이고 이름은 블랑카예요.”

클라라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리던 날부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클라라의 말대로 되었다.                (P181)     

클라라가 얘기하는 선동적인 이야기들은 모두 미친 사람의 이야기 같았다. 

“언제는 남편이 제 여편네한테 손찌검하지 않았나요? 제 여편네를 때리지 않으면 그건 제 여편네한테 관심이 없거나 진짜 남자가 아니라서 그런 거예요. 언제는 남자가 일한 거랑 땅에서 난 농작물, 닭이 낳은 것들을 함께 나눠 가졌나요?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야지요. 그리고 어떻게 여자랑 남자랑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나요? 여자는 그 두 쪽도 없이 사타구니가 찢겨져서 태어났는데. 그렇지 않나요. 주인 마님?”

여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클라라는 난감했다. 여자들은 자기네들끼리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이빨이 다 빠진 입과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으로 부끄러운 듯 킥킥거렸다. 햇볕에 그을리고 힘든 삶을 사느라 고생에 찌든 얼굴이었다. 그들은 만일 자기네가 클라라의 말대로 실천하려는 생각만이라도 했다가는 남편한테 흠씬 두들겨 맞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페룰라의 얘기에 따르면 그건 맞아도 싼 짓이었다. 얼마 후 그 예배 모임의 후반부에 대해 알게 되자 에스테반은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클라라에게 화를 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클라라도 그 악명 높은 에스테반의 성질을 직접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에스테반은 거실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가구들을 쾅쾅 두드리면서 실성한 사람처럼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만일 클라라가 장모의 선례를 따르려 한다면 진짜 사내가 어떤 건지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소리쳤다.                   (P189) 

    

블랑카가 발치 아래에서 놀고 있는 가운데 모라 세 자매를 맞이했다. 그들은 눈길을 주고받는 순간 서로 알아보고는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서 평생 지속될, 그리고 그들의 예언이 사실이라면 저세상에서도 계속될 강한 영적 관계가 시작되었다. 

모라 자매는 심령술과 초자연적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날개 달린 희미한 영매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찍은 사진 덕분에 그들은 영혼이 물리적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유일하게 제시한 사람이 되었다. 영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사진을 현상하면서 생긴 얼룩이나 사진사의 속임수라고 했다. 비법을 전수받은 사람들끼리만 가능한 신비한 경로를 통해 그들은 클라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클라라와 텔레파시로 접촉하자마자 그들은 자기네가 같은 별나라에 사는 한 자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222)     


클라라는 금요 모임에도 블랑카를 참석시켰고, 딸이 혼령들이나 비밀 단체 회원들, 자기가 후원하는 가난한 예술가들과도 잘 어울리도록 했다. 자기가 벙어리로 지냈던 시절에 엄마와 늘 함께 다녔던 것처럼, 클라라도 선물과 구호품을 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갈 때는 항상 블랑카를 데리고 다녔다. 

“얘야, 이건 양심의 가책을 덜 받으려고 하는 거란다.”

클라라가 블랑카에게 설명했다. 

“그렇지만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단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불우 이웃돕기가 아니라 정의야.”

이 점이 클라라가 남편과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에스테반과 심하게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정의라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나눠 갖는 게 정의라고? 게으름뱅이가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하고 똑같아? 멍청한 놈들이 똑똑한 사람들하고 똑같아? 짐승도 그렇지는 않아! 그건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야, 강자와 약자의 문제지. 모두가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데에는 나도 동의해.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예 노력조차 하지 않아! 손만 뻗어서 구걸하는 쪽이 훨씬 편하니까! 나는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고 믿어. 그 덕분에 내가 바라던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었지. 난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어. 치사한 짓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 누구든지 다 나처럼 될 수 있어. 나는 가난하고 불행한 공증인의 보조원으로 끝날 팔자였어. 그 때문에 나는 그 볼셰비키 사상인지 뭔지를 우리 집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어. 사람들이 원하면 당신이 빈민가에서 자선 사업을 하든 말든 난 상관 안 해! 그건 좋은 일이야. 여자들의 성격 형성에 아주 좋은 일이지. 그렇지만 페드로 테르세로 가르시아. 그놈의 어리석은 생각을 우리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건 꿈도 꾸지 마! 난 절대 용납할 수 없어!”              (P241-242)     


“페룰라 형님, 우리가 형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식구들 뒤치다꺼리할 때는 더욱 형님이 그리웠어요. 내가 집안일에는 형편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사내 녀석들은 끔찍하지만 블랑카는 예쁘게 컸어요. 그리고 트레스 마리아스에 형님이 손수 심은 수국들이 아름답게 자랐어요. 어떤 꽃들은 푸른색을 띠어요. 그런 색깔이 나도록 내가 비료에다 구리 동전을 섞어 넣었거든요. 자연의 신비지요. 그 꽃을 꺾어 꽃병에 꽂을 때마다 형님 생각이 났지만, 수국이 피지 않을 때도 늘 형님 생각을 했어요. 페룰라 형님, 난 항상 형님을 생각했어요. 실은 형님이 떠난 이후로 형님만큼 저를 끔찍이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클라라는 페룰라를 단장시키는 일을 마치고 나서도 한참동안 페룰라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그녀의 몸을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남은 장례 절차를 위해 남편과 안토니오 신부를 불렀다. 그들은 비스킷 통 안에서 지난 몇 년동안 에스테반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낸 돈 봉투를 발견했다. 그렇지만 돈 봉투들은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클라라는 페룰라가 그렇게 하기를 바랄 거라 확신하며 그 돈을 자선 활동에 쓰라고 신부에게 건네주었다.            (P266)     


“얘야, 교회는 우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좌익이었다.”         (P270)  

   

가장 두려운 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절규하는 듯한 소리였다. 거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것 같은 소리가 허공을 공포로 가득 채우며 한없이 길게 들려왔다. 클라라가 블랑카의 이름을 외치면서 집 쪽으로 기어가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땅이 요동을 치며 뒤흔들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클라라는 농부들이 공포에 질린 채 집에서 뛰쳐나와, 하늘을 향해 애원하며 서로 부둥켜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이들을 잡아끌고, 발로 개를 걷어차고, 늙은 부모를 밀면서 땅속에서부터 튀어나온 것 같은 벽돌과 기와가 무너지면서 나는 엄청난 굉음 속에서 보잘것없는 가재도구나마 건지려고 발을 동동거리며 다녔다.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집이 달걀 껍데기 갈라지듯 두 쪽이 나는 순간 문지방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집이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에스테반은 그냥 돌무더기 아래에 깔려버렸다. 클라라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그쪽으로 기어갔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첫 진동은 거의 일 분간 계속되었는데, 지진이 흔한 그 나라에서도 기록된 것 중에 가장 강한 지진이었다.                      (P278-279)     

“전부 정치하는 놈들 잘못이야! 새로 나온 그 사회주의 후보 같은 빌어먹을 정치가들 때문이라고. 녀석은 배짱도 좋게 자기 패거리랑 기차를 타고 남쪽에서 북쪽까지 전국을 순회하면서 볼셰비키 사상인지 뭔지를 떠들며 순진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지. 하지만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차에서 내리기만 했다 하면 우리가 그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우리는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 이 근방의 지주치고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누가 됐든지 이곳에 와서 정직하게 일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게을러빠진 놈들이 우리와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돼. 우리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돈을 투자할 줄 알고, 위험을 감수하고, 또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들이야. 다시 말해서 땅은 열심히 일한 사람의 거라는 얘기는 다 그놈들이 제 발등 찧는 얘기야. 왜냐하면 여기서 유일하게 일할 줄 아는 사람은 나 하나거든. 예수조차도 우리의 노동의 대가를 게으른 자들과 나누어 가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런데 감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페드로 테르세로 같은 놈이 내 땅에서 그런 막말을 하다니! 내가 그놈의 머리에 총구멍을 내지 않은 것은 그 녀석 아비를 생각해서여! 또 그 녀석 할아버지가 내 목숨을 구해 줬기 때문이지! 만일 그 녀석이 이 근처를 얼씬거리다 나한테 걸리는 날이면 그놈의 대갈통을 단방에 날려버리겠다고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지.” 

에스테반이 씩씩거렸다. 

클라라는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릇을 식탁에 갖다 놓고, 또 치우면서 곁눈질로 딸의 동태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콩 수프가 남은 그릇을 치우다가 남편의 장광설의 끝말을 듣게 되었다. 

“에스테반, 당신이 세상이 변하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페드로 테르세로 가르시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트레스 마리아스에 새로운 사상을 전했을 거예요.” 

클라라가 말했다.                       (P296-297)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농장 주변에서 친칠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친칠라들이 곡식을 먹어치울까 봐 총으로 사냥한 적은 있지만 그런 보잘것없는 짐승으로 여성 코트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장 드 사티니 백작은 자본과 노동력은 물론 위험 부담까지 모두 책임지면서도, 이익은 정확히 50대 50으로 나눠 가질 수 있는 동업자를 찾았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절대 모험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프랑스 백작이 워낙 우아하고 영리해서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스테반은 친칠라 사업의 전망을 타진하면서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다.                   (P317)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백작의 귀족적인 허세보다는 친칠라 사업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툭하면 감기에 걸려 설사하며 죽는 빌어먹을 암탉이나 1리터의 우유를 만들기 위해 1헥타르의 풀과 비타민 한 상자를 먹어치우고 사방을 똥과 파리로 들끓게 하는 암소나 키우며 수년간 헛수고를 하는 대신, 왜 진작 친칠라 가죽을 벗겨 무두질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그게 의아할 뿐이었다. 반면에 클라라와 페드로 세군도 가르시아는 친칠라에 대한 에스테반의 흥분에 공감하지 않았다. 클라라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껍질을 벗기기 위해 동물을 키운다는 게 끔찍했으며, 페드로 세군도는 쥐새끼들을 기른다는 얘기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P319)     


페드로 테르세로가 반격했다. 

“우리가 어느 쪽에 투표하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 그들이 이겨왔으니까.”

“그들은 투표용지까지 바꿔치기하잖아요.”

농민들의 모임에 앉아 있던 블랑카가 말했다. 

“이번에는 달라.”

페드로 테르세로가 말했다. 

“투표장을 감시하고, 그들이 투표함을 밀봉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 당에서도 사람이 나갈 거예요.”

그러나 농부들은 페드로 테르세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 구전으로 떠도는 불온 가요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결국에는 여우가 암탉을 잡아먹게 될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열렬한 연설로 엄청난 수의 군중을 휘어잡은 카리스마 넘치는 사회당의 새 후보인 근시의 의사를 실은 기차가 도착했을 때 농부들은 역에서 지주들이 엽총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철저히 감시하는 가운데 그를 보았다. 농부들은 존경 가득한 마음으로 후보가 하는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는 했지만, 무서워서 그를 반기는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단지 쇠꼬챙이와 몽둥이로 무장한 날품팔이들만 몇 명 무리를 지어 몰려와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그들은 고정된 일자리도 없고, 가족도 주인도 없이 시골을 떠도는 유랑자들이기 때문에 잃을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P334)     


그 후로 며칠 동안 아만다는 신열에 시달렸다. 하이메가 놀라서 꼼짝도 안 하고 아만다의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클라라도 아만다를 돌보았다. 클라라는 니콜라스가 조심스럽게 아만다의 안부를 물어보면서도, 직접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다. 반면에 하이메는 아만다와 함께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을 아만다에게 빌려주고, 전에는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지만 미친 사람처럼 혼자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집 안을 돌아다니고, 심지어는 목요일의 사회주의자 모임도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아만다는 한동안 트루에바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미겔은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서 트루에바 가문에서 알바가 태어나던 날 벽장 속에 숨어서 출산을 목격하게 되었다. 미겔은 산모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다른 여자들이 산모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돌아다니는 가운데, 핏덩어리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던 웅장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섬뜩한 광경을 평생 잊지 못했다.                       (P422)     

[2]

결혼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블랑카는 젖먹이였을 때부터 아버지가 화만 났다 하면 비이성적으로 노발대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가 임신도 하고, 페드로 테르세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을 정한 것이다. 하지만 장 드 사티니와의 결합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잠자리는 절대 같이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블랑카는 처음에는 임신 때문에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대고, 나중에는 어떻게든 다른 이유를 찾아내 그와의 육체적 결합을 미룰 수 있는 핑곗거리란 핑곗거리는 모두 갖다 댈 작정이었다. 새끼양 가죽 구두를 신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기꺼이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나선 백작과 같은 남편을 상대하는 게 에스테반 트루에바와 같은 아버지와 맞서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리라 자신했다. 블랑카는 둘 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나마 덜 나빠 보이는 쪽으로 선택한 것이다.                     (P8)    

 

장은 일단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자, 신부의 고고학적 열정에서 살아남은 것은 뭐가됐든지 파내기 위해 인디오들로 이루어진 탐사 팀을 몇 개 조직했다. 

세월이 흘러 고색창연하게 푸른빛을 띤 멋진 토기들이 인디오의 보따리와 라마의 안장 속에 숨겨져 집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토기들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마련한 방들이 금세 가득 찼다. 블랑카는 토기들이 방마다 가득 쌓여가는 것을 보며, 그 신기한 생김생김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블랑카는 최면에 걸린 듯 토기들을 손에 들고 만져보았으며, 알지도 못하는 먼 곳으로 보내기 위해 짚과 종이로 쌀 때는 마음이 울적해지기까지 했다. 블랑카에게는 토기들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자기가 만드는 성탄 인형들은 그 토기들과 한 지붕 아래에 있을 자격도 없어 보였다. 다른 무엇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작업장 만드는 일을 포기했던 것이다. 

인디오 유물은 그 나라의 역사적 유산이기 때문에 이 발굴 사업은 완전히 비밀에 부쳐졌다.             (P22)     

알바는 다리가 먼저 나왔는데, 그것은 길운의 표시였다. 클라라는 알바의 등을 살펴, 진정한 행복을 타고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별 모양의 얼룩을 찾아냈다. 

“이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 이 아이는 운도 좋고 행복할 거야. 그리고 피부도 좋을 거다. 그건 유전이니까. 나도 이 나이에 아직 주름살 하나 없잖니. 게다가 나는 여드름 난 적도 없단다.”

아이가 태어난 지 이틀 후에 클라라가 단언했다. 이미 별들이 다 알아서 알바에게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에게 따로 인생 준비를 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알바의 별자리는 사자자리였다.                 (P33)  

   

니콜라스는 자기가 석탄 위에서 맨발로 걸어 다닐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그가 시범을 보이려 할 때마다 클라라가 천식 발작을 일으켜 그만두어야 했다. 니콜라스는 항상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아시아식 비유를 들어 얘기했다. 그는 영혼의 본질적인 문제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보였다. 가정 생활의 물질주의는 자기를 잘 먹이고 잘 입히는 일에 끈질기게 집착하는 엄마와 누나의 지나친 보호만큼이나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알바가 신나서 쫓아다니는 것도 귀찮았다. 알바는 강아지처럼 니콜라스 외삼촌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물구나무 서는 법과 살갗에 핀 꽂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니콜라스는 혹독한 겨울이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벌거벗고 지냈다. 그는 삼 분간 숨을 쉬지 않고서도 견딜 수 있었으며, 누가 언제 청하든 간에 얼른 그 묘기를 보여주었는데,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하이메는 니콜라스가 정상인이 마시는 공기의 절반밖에 마시지 않는데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공기가 공짜인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P51-52)

     

수녀들이 다운 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을 챙겨서 하얀 날개 같은 옷을 펄럭거리며 떠나고 나면 블랑카는 딸을 꼭 껴안고 딸의 얼굴을 온통 키스로 뒤덮으면서 알바가 정상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알바는 정상인 것이 하늘이 준 큰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성장하게 되었다. 알바는 그 문제를 외할머니와 토론하기도 했다. 

“거의 집집마다 바보나 미친 사람이 한 명씩은 있단다. 얘야.”

외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눈을 떼면 바늘을 놀릴 줄 몰라 뜨개질에 열중하면서 손녀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을 무슨 집안 망신쯤이라 생각해서 늘 숨기려 하기 때문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거다. 손님들이 와도 볼 수 없도록 아주 깊숙한 골방에다가 가둬놓기 일쑤지. 하지만 사실, 그 아이들도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외할머니,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알바가 대답했다. 

“없지, 우리 집안에서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골고루 미쳐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미치광이가 나오기 힘들지.”

클라라 외할머니와의 대화는 늘 그런 식으로 이어졌다.                  (P66-67)  

   

알바는 클라라 외할머니가 모퉁이 큰 집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클라라가 죽은 뒤 그 집에서 꽃이나 방랑벽 있는 친구들, 장난기 많던 혼령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모퉁이 큰 집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69-70)     


알바는 외할아버지가 우는 걸 보고는 그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 아이는 외할아버지의 눈물을 보고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알바가 그 집안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고통을 극복하는 극기 훈련을 받은 덕분이기도 했고, 또 외할머니가 가끔 죽음의 상황과 의식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해 준 덕분이기도 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한단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일 뿐, 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죽음은 탄생과 같은 거야. 그냥 옮겨가는 것일 뿐이지.”                 (P82)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세력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물의 마술적인 측면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마르크스주의는 무신론적이고, 실질적이며, 기능적인 교리입니다. 여기서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P111)


로사와 클라라를 내 무덤에 안치시킨 이후로 나는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조만간에 우리 세 사람은 어머니와 유모, 페룰라 누나 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곳에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페룰라 누나가 나를 용서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때 나는 내가 이렇게 오래 살게 될 거라고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야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클라라의 침실은 열쇠로 잠가놓았다. 내가 원할 때마다 클라라의 영혼을 만나고 싶고, 또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 놓여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안에 못 들어가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노인들의 질병인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헐렁해진 슬리퍼를 신고, 감상적인 이유로 그때까지도 계속 입고 있던 성직자들이나 입는 낡은 잠옷을 걸치고서 다 산 노인처럼 운명을 저주하면서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새벽 햇살이 모습을 드러낼 때면 다시 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나는 아침 식사 시간에 말끔히 면도하고 나서 풀먹인 와이셔츠와 상복을 입고 아무 말 없이 나타났다. 나는 손녀딸과 함께 신문을 읽고, 사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하고, 우편물들을 처리한 후 나머지 낮 시간은 밖에 나가서 보냈다. 촉매제 역할을 해주던 클라라도 없는데 자식들과의 말다툼을 참아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집에서 식사하지 않았다. 

단 둘밖에 없는 친구들이 내 영혼의 슬픔을 덜어주려고 애썼다.                   (P122-123)     


미겔은 혁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폭력적인 체제에는 폭력적인 혁명으로 맞대응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알바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싶었다. 알바는 외할아버지의 연설이나 외할아버지와 하이메 외삼촌의 싸움, 끝도 없는 선거 운동에 넌더리가 나 있었다. 알바가 참가했던 유일한 정치 활동은 별다른 명분 없이 다른 학생들에게 휩쓸려 미국 대사관에 돌을 던지러 갔을 때였다. 그 일로 알바는 학교에서 일주일간 정학을 당했으며, 외할아버지는 또다시 심장 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정치를 비껴갈 수가 없었다. 그해에 대학에 들어간 다른 모든 젊은이들처럼 알바도 밤늦게까지 카페에 모여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토론하고, 서로에게 사상의 열정을 전하는 일에 매료되어 있었다.                     (P133)     


어쨌든 알바는 집에 전화를 걸어 자기는 마지막 승리의 순간이 오거나 죽음이 올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있을 거라고 알렸다. 그러나 그 말은 알바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들렸다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블랑카의 손에서 수화기를 낚아챈 다음 알바에게 너무나 익숙한 성난 어조로 어젯밤 외박한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한 시간 내에 집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알바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며, 설사 나갈 수 있다 하더라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네가 빨갱이들과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소리 질렀다. 그렇지만 이내 목소리를 부드럽게 가다듬고, 제발 경찰이 안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오라며 알바에게 간청했다. 그는 정부가 그렇게 학생들을 무한정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 만한 위치에 있었다. 

“좋은 말 해서 나오지 않으면 기동대를 투입시켜서 몽둥이로 너희들을 몰아낼 거다!”

트루에바 상원의원이 말을 맺었다.                   (P136-137)    

 

미겔은 알바가 트루에바 상원의원의 손녀딸이라는 사실에 실망과 분노를 느꼈지만, 그들이 처음 만났던 카페테리아 근처 복도에서 알바가 길 잃은 영혼처럼 헤매 다니는 모습을 두 번째로 보고는 그 실망과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외할아버지의 사상을 그 손녀딸에게 책임지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곧 그들은 다시 서로 꼭 껴안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열정적인 키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미겔의 하숙방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그곳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초라한 하숙집으로, 남의 생활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중년 부부가 주인이었다. 그들은 미겔이 알바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갈 때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알바로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것도 힘든 마당에 미겔과 만나는 기쁨을 깨는 그런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는 것도 여간 큰 고역이 아니었다. 알바는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을 강구해 보고 싶었지만, 미겔의 하숙집에 가기 싫은 것과 같은 이유로 호텔에서 만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알고 있는 부르주아 중에서도 가장 문제아야.”

미겔이 웃었다.                    (P149-150)     


하이메는 오랜 투쟁 끝에 결국에는 사회당이 이길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민중이 자신들의 욕구와 힘을 의식하게 됨으로써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그러면 알바는 오직 무장 투쟁을 통해서만 부르주아를 물리칠 수 있다는 미겔의 말을 되풀이했다. 하이메는 어떤 형태의 극단주의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게릴라전은 무력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전제 정치하에서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며, 보통 선거를 통해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정도에서 벗어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런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외삼촌! 외삼촌이 너무 순진한 거야!”

알바가 대답했다. 

“그들은 결코 삼촌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이기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알바는 미겔의 관점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미겔의 말에 따르면, 세상은 급속도로 변하기 때문에 그들이 뒤로 처지기 십상이며, 폭력 없이 좋은 말로 해서는 절대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민중을 교육시키고 조직하는 힘겨운 과정을 통해 역사가 더디게 흘러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증명한다고 했다. 외삼촌과 조카는 그렇게 끝없이 논쟁을 펼치며 현란한 수사학적 공방을 펼치다가 마침내는 서로 노려보며 쇠심줄보다 더 고집불통이라고 상대방을 비난하기 일쑤였다.               (P157)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 대통령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지.”  

그가 비탄에 젖은 동지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새 대통령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생각은 아직 아무도 하지 못할 때였다. 새 대통령의 적들은 그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과 같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를 파멸시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생각한 방법이었다. 다음 날, 축제 분위기로 들뜬 군중을 두려워할 염려가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그는 은신처를 떠나 도시 외곽에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비밀 점심 회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별장에서 트루에바 상원의원은 다른 정치가들과 군인들, 그리고 새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전략을 짜기 위해 미국 정보부에서 파견한 미국인들과 함께 자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보타주를 ‘경제적 불안정화’라고 명명했다.             (P173)    

 

루이사 모라가 모퉁이 큰 집의 벨을 누른 날, 트루에바 상원의원은 서재에서 회계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라 세 자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사람이었다. 몸은 쪼그라들었지만 방랑하는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으며, 영적인 힘은 여전히 확고부동했다. 에스테반은 클라라가 죽은 이후로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플루트 같은 매혹적인 목소리와 세월이 흐르면서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멀리서부터 느낄 수 있는 야생 오랑캐꽃 향기로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올 때 날개 달린 클라라도 함께 들어왔으며, 클라라는 며칠간 자신을 보지 못했던 남편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방 안을 떠돌아 다녔다. 

“에스테반, 좀 안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러 왔는데.”

루이사 모라가 팔걸이의자에 앉은 후 말했다. 

“아, 루이사! 안 좋은 소식은 지금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에스테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루이사는 자신이 별자리를 보고 알아낸 것을 에스테반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녀는 상원의원의 실용주의가 반발을 일으킬 경우를 대비해 자신이 사용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설명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난 열 달 동안 트루에바를 포함해서 정부와 야당의 주요 인사들의 점성도를 연구하며 지냈다고 말했다. 점성도들을 대조해 본 결과, 지금 이 역사적인 순간에 피와 고통과 죽음을 불러일으킬 무시무시한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예언이 나왔다고 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에스테반.”

루이사 모라가 결론지었다. 

“곧 끔찍한 시간이 닥칠 거예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당신은 승자의 편에 서겠지만, 승리는 당신에게 더 큰 고통과 외로움만 안겨줄 뿐이에요.”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서재의 평화를 깨뜨리고 괜히 이상한 예언으로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건방진 예언가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그렇지만 한쪽 구석에서 흘깃흘깃 자기를 훔쳐보고 있는 클라라 때문에 대놓고 그녀에게 나가라고 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당신도 어쩔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당신을 귀찮게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에스테반, 나는 알바 때문에 온 거예요. 알바의 외할머니가 알바에게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어서 왔어요.”

상원의원이 알바를 불렀다. 알바는 일곱 살 이후로 루이사 모라를 본 적이 없지만, 그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알바는 눈처럼 하얗고 연약한 뼈들이 부서질까 봐 살포시 그녀를 포옹하며, 그녀의 잊을 수 없는 향기를 한입 가득 들이마셨다. 

“너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전하러 왔단다. 얘야.”

루이사 모라가 알바를 보고 반가워서 흘린 눈물을 훔쳐내며 말했다. 

“죽음이 네 주변에 도사리고 있단다. 클라라 외할머니가 저세상에서부터 너를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영적인 보호자들도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달라고 네 외할머니가 나를 보냈단다. 너는 여행을 떠나는 게 현명할 것 같다. 바다를 건너가거라. 거기라면 안전할 거다.”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자 트루에바 상원의원이 인내심을 잃었다. 자신이 미친 늙은이를 상대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 달하고도 열하루 뒤에, 통행금지 시간인 한밤중에 알바가 잡혀가던 날, 에스테반은 루이사 모라의 예언을 떠올리게 되었다.             (P210-212)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산발적인 총소리가 드문드문 멀리서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대통령은 반란군 지도자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에게 가족과 함께 국외로 떠날 수 있도록 군 비행기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먼 나라로 망명을 떠나, 야밤 도주하듯 쫓겨난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노닥거리며 여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 잘못 봤소. 배신자들. 민중이 나를 이 자리에 앉힌 이상 나는 죽어서나 이곳을 나갈 것이오.”                 (P217)   

  

아만다가 설명했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아. 성당에서는 일곱 살 미만의 아이들에게 한 끼의 식사를 주기 위해 일주일에 여섯 번 자선 식당을 열고 있어. 물론 많이 부족하지. 한 아이가 렌즈콩이나 감자를 넣은 음식을 하루에 한끼 얻어먹을 수 있다면, 다섯 아이는 밖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하니. 아이들을 두루 다 먹일 수가 없어.”

알바는 클라라 외할머니가 빈민가에 가서 정의 대신 자비를 베풀고자 했던 그 옛날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자선을 베푸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좋지 않게 비쳤다. 알바는 쌀 한 봉지나 분유 한 통을 얻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갔을 때 처음에는 대놓고 싫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점점 자기를 피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블랑카가 알바를 도와주었다. 알바가 엄마의 식품 창고 열쇠를 얻어내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발트 해의 게와 스위스 초콜릿을 살 수 있는 상황에서 보통 밀가루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강낭콩을 쌓아두는 것은 아무 쓸데 없는 짓이라며 엄마를 설득했다. 그 물건으로 알바는 잠시나마 사제관의 부엌에 물건을 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알바에게는 그 기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P237)  

   

“사람들은 고작해야 빵과 서커스, 그리고 뭔가 숭배할 게 있으면 그만이야.”        (P241)  

   

“알바는 군인들의 행동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중간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극우 쪽보다는 좌파에 더 가까웠다. 알바는 나라가 왜 내전 상태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은 군인들의 작품으로, 그들이 받은 훈련의 결정체이자 그들 직업의 빛나는 훈장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군인들은 평화 시에는 빛을 발할 수가 없었다. 쿠데타는 군인들이 병영에서 받았던 훈련과 맹목적인 복종, 무기 사용법, 그리고 일단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고 나면 습득이 가능한 다른 기술들을 실제로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P243)   

  

중산층 대부분은 군사 쿠테타에 동조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법과 질서, 여자는 치마를 입고 남자는 짧은 머리를 하고 다니는 미풍양속으로의 복귀를 의미했다. 그러나 곧 그들은 높은 인플레와 일자리의 부족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월급으로는 먹을 것을 사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어느 집이든 슬픔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한 명씩은 꼭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군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거나 죽었거나 망명을 갔어도 예전처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지라고 말하지 못했다. 고문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문도 더는 부인하지 못했다. 

사치품을 파는 상점과 거대한 금융 회사, 이국적인 레스토랑과 수입상은 번창한 반면, 실업자들은 최저 임금을 받고서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공장 문밖에서 긴 행렬을 이루었다. 노동자들은 노예 신세로 전락했고, 농장 주인들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해직 수당을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조금만 반항해도 감옥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P245)   

  

알바와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곁에서, 스웨덴의 텔레비전 카메라맨들이 노벨상을 수여하는 추운 나라로 화면을 보내기 위해 취재하고 있었다. 거리 양쪽에 살벌하게 늘어서 있는 기관총들, 사람들의 얼굴, 꽃으로 뒤덮인 시인의 관, 공동묘지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는 시체 공시소 문 앞에 몰려들어 사망자 명단을 말없이 읽어 내려가는 여인들을 담은 무시무시한 장면을 촬영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으며, 대기는 금지된 슬로건들로 가득 차 후끈했다. 사람들은 총검을 들고 있는 군인들 앞에서 단합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고 외쳐댔다. 행렬이 어느 건설 현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연장을 내려놓고 헬멧을 벗어 예를 표하며 일렬로 늘어섰다. 재킷도 없이 소매 끝이 해어진 낡은 셔츠를 입고,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은 한 남자가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시인의 가장 혁명적인 시를 암송했다. 그 남자 옆에서 가고 있던 트루에바 상원의원은 놀라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공산주의자인 게 안타까울 뿐이다!”

상원의원이 손녀딸에게 말했다. 

“그렇게 훌륭한 시인 그런 불온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쿠테타가 일어나기 전에 죽었다면 국가적으로 성대하게 추모식이 치러졌을 텐데!”

“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던 것처럼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알았던 거예요. 외할아버지.”

알바가 대답했다.                 (P250-251)     


그렇게 몇 달이 흐르면서, 군부가 쿠데타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우익의 정치가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트루에바 상원의원에게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들은 별종이었다. 한 형제이기는 하지만, 시민들과는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종이었다.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그들의 경직된 명예 관념으로 보면 모두 반역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귀머거리와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그들이 정치가를 배제한 어마어마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는 에스테반이 블랑카와 알바와 함께 그 상황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독재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했던 군인들이 나라를 더욱더 혹독한 독재로 몰고 갔으며,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그 독재가 한 세기 동안 이어질지도 모른다며 한탄했다. 트루에바 상원의원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과오를 저질렀음을 시인했다. 그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인처럼 팔걸이의자에 몸을 맡기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권력을 잃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P252-253)    

 

그들이 알바를 에스테반 가르시아 앞으로 세 번째 끌고 갔을 때 알바는 좀 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바는 감방의 벽을 통해서 다른 죄수들을 심문하는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환상도 갖지 않았다. 이제는 사랑의 기쁨을 만끽했던 숲도 떠 올리지 않았다. 

“자, 알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 둘이 조용히 얘기를 할 거다. 네가 미겔이 어디에 있는지 얘기하면 빨리 끝낼 수 있어.”

가르시아가 말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

알바가 대답했다. 

“보아하니 나를 놀리고 있군, 알바.”

가르시아가 말했다.

“아주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여기서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

알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옷 벗어!”

가르시아가 확 바뀐 목소리로 말했다.

알바는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바가 발버둥치며 저항해도 바지를 끌어내리며 거칠게 옷을 벗겼다. 어린 시절. 정원에서 가르시아가 키스했을 때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나면서 알바를 증오심으로 들끓게 했다. 알바는 그에게 거세게 저항했다. 소리소리 지르며 울부짖었고, 오줌도 싸고, 먹은 것을 다 토해 내기도 했다. 마침내 그들도 알바를 때리다가 지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시간에 알바는 외할머니의 이해심 많은 친구인 혼령들에게 죽게 도와달라고 간곡히 빌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하는 알바의 부름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손 두 개가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손 네 개가 등에 따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스프링이 잔뜩 달린, 차갑고 딱딱한 금속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히고 가죽 끈으로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묻겠다. 알바, 미겔이 어디에 있지?”                  (P285-286)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정돈된 삶 한편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만방에 알려야 한다고 했다. 정상적인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과 자신들이 뗏목에 몸을 싣고 슬픔의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그 참상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행복에 겨운 그들의 세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두운 곳에는 방황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다.       (P294-295)    

 

나는 개집에 있었을 때 언젠가는 가르시아 대령을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당연히 복수받아 마땅한 사람들 모두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증오심마저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몇 주가 지나면서 증오심이 많이 희석되었고 날카롭고 또렷하던 면들도 많이 무뎌지고 뭉뚱그려졌다. 그 어느 것도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짜여진 운명에 상응하는 것이었으며, 에스테반 가르시아도 그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거칠고 삐뚤어진 부분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괜히 존재하는 것은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강가의 갈대밭에서 그의 할머니인 판차 가르시아를 넘어뜨렸을 때 또 다른 업의 고리가 연결된 것이었다. 그 후 강간당한 여자의 손자는 강간한 남자의 손녀에게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고, 아마도 사십 년쯤 후에는 내 손자가 가르시아의 손녀딸을 갈대밭 사이로 넘어뜨리고, 또 다른 고통과 피와 사랑의 역사가 앞으로도 몇 세기 동안 계속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개집에 있었을 때 나는 각기 정확한 자리를 지닌 퍼즐을 맞추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완성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조각들이 다 제자리를 찾고 나면, 각 부분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될 거라 확신했다. 조각 하나하나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가르시아 대령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때로 나는 이전에 모든 것을 경험했고, 이미 이 글을 썼던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은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의 노트를 고이 간직해 두었다. 기억은 부질없고, 인생은 너무 짧고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버려서 우리는 사건들 간의 관계를 제대로 관망하지 못한다고 내가 썼고, 그녀도 그렇게 썼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환상을 믿고 있다. 그러나 전 시대의 영혼들이 공간 속에 모두 뒤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모라 세 자매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건들이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클라라 외할머니는 사물들을 그 고유의 차원에서 보고, 부질없는 기억력을 비웃기 위해 노트에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P326-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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