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선셋 리미티드> 2013년
백은 교수다. 일반인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가르침을 통해서 돈을 벌지만, 그는 가족을 여의고 친밀한 친구 따윈 없는 존재다.
흑은 목사다. 사실 흑은 목사가 되기 이전에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결국 누군가와의 싸움으로 인해 목숨이 왔다 갔다한 상황이 되자, 그는 난생 처음으로 빛을 보았고, 이내 신을 믿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게토의 어느 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흑 말했잖소. 내가 이런 게 아니라고. 오늘 아침에 일하러 나갈 때만 해도 선생은 내 계획에 있지도 않았어. 그런데 지금 여기 이렇게 와 있잖소.
백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일어나는 모든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흑 음 흠. 그런 건 아니다.
백 그래요. 그런 건 아니지요.
흑 그럼 이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백 아무런 의미가 없다니까요. 누구나 우연히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에 어떤 사람은 곤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흑 음 흠.
백 어쨌든. 생면부지는 늘 잘 챙기면서 정작 자기가 챙겨야 할 사람은 보살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지요.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아요.
흑 내가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네.
백 나야 모르지요. 댁이 그런 사람인가요? (P8)
백 내가 믿었던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한다고 믿는 척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요. 서구 문명은 결국 연기가 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굴뚝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내가 얼이 빠져 그걸 알지 못한 겁니다. 지금은 압니다만. (P29)
흑 그 사람한테 편지나 그런 걸 남기지도 않았고? 선생이 그 기차를 타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말이야.
백 그래요.
흑 최고의 친구인데?
백 그 사람은 내 최고의 친구가 아닙니다.
흑 방금 우리가 그렇게 딱 결론내린 줄 알았는데.
백 방금 댁 혼자 그렇게 딱 결론 내렸지요.
흑 선생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그 사람한테 말한 적도 없고?
백 없습니다.
흑 젠장, 교수 선생.
백 내가 왜 말해야 합니까?
흑 나야 모르지. 어쩌면 그 사람이 최고의 친구니까?
백 말했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가깝지 않다고.
흑 그렇게 가깝지 않다.
백 그래요.
흑 그 사람은 최고의 친구인데 다만 선생에게 그렇게 가깝지 않을 뿐이야.
백 뭐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흑 죽은 것 같은 시답잖은 얘기로 성가시게 하고 싶을 만큼 가깝지는 않은 거지. (P31-32)
백 우리는 이런 곤경에서 태어난 겁니다. 고통과 인간 운명은 같은 말입니다. 그 둘은 서로를 설명해 주지요.
흑 우린 지금 고통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냐. 행복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지.
백 아니 괴로우면 행복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흑 왜 없어? (P54)
백 댁이 거기에서 동의하지 않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흑 어쩌면 원죄라는 개념. 이브가 사과를 먹어서 그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해졌다는 거. 나는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대체로 처음에는 선하다고 생각해. 악은 각자가 자초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대부분은 갖지 말아야 할 것을 원하는 데서 생기는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내가 여기 앉아서 나 스스로 이단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 선생한테 이단자가 되지 말라고 설득하려고 하면서 말이야.
백 댁은 이단인가요?
흑 나를 골탕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는군. 교수 선생.
백 아니, 그렇지 않아요. 댁은 이단입니까?
흑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만큼만 그렇지.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도 사실은 그렇거든. 나는 의심하는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질문은 하지.
백 무슨 차이가 있지요?
흑 글쎄, 질문을 하는 사람은 진실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의심하는 사람은 진실 같은 건 없다는 얘길 듣고 싶어하고.
백 (성경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것을 다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흑 그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심지어 이걸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아는 것도 필요 없을지 모르겠군. 이 책에 적힌 진실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도 씌어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래전에 씌어졌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씌어질 거라고. 설사 이 책이 모조리 불타버린다해도 말이오. 예수가 뭐라 말했더라? 나는 예수가 한마디도 지어낸 게 없다고 생각해.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이 책은 무지하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야. 완전한 사람은 이런 게 전혀 필요 없겠지. 게다가 이 책을 읽어보면 여기에는 올바른 길보다 잘못된 길에 관한 얘기가 훨씬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요. 자, 왜 그럴까?
백 모르겠는데요. 왜 그렇습니까?
흑 난 선생한테서 듣고 싶은데.
백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P66-67)
백 더 어두운 그림이 늘 정확한 그림이지요. 세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하소설을 읽는 겁니다.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든 달라질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요. (P108)
백 마저 들으세요. 나는 내 정신 상태가 어떤 염세적 세계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게 세계 자체라고 생각해요. 진화의 결과, 지능을 가진 생명은 어쩔 수 없이 궁극적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무용성입니다.
흑 음. 내가 제대로 이해하는 거라면 선생은 지금 멍청해 빠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두 자살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거로구만.
백 네.
흑 농담 따먹기 하는 게 아니고?
백 아니요. 농담 따먹기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자신의 삶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본다면. 꿈이나 환상 없이 본다면. 나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빨리 죽는 쪽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를 하나도 대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흑 젠장, 교수 선생.
백 (차갑게)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걸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봐요, 주위를 좀 둘러봐요. 보이지 않나요? 고통에 찬 사람들이 외치고 악을 쓰는 소리가 하느님의 귀에는 가장 기분좋은 소리일 게 분명합니다. 나는 이런 토론이 혐오스럽습니다. 애초에 존재를 믿지도 않는 것을 끝도 없이 욕하는 것 외에는 아무 낙이 없는 시골 무신론자가 떠드는 것 같잖습니까. 댁이 말하는 유대라는 건 고통의 유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만일 그 고통이 단지 되풀이되는 것일 분 아니라 정말로 집단적이기까지 하다면 세상은 순전히 그 고통의 무게 때문에라도 우주의 벽에서 떨어져나와, 앞으로 밤이 몇 번이나 더 찾아올지 몰라도, 그 얼마 남지 않은 밤들을 거치며 우그러들고 불타올라 재조차 남지 않게 될 겁니다. 정의? 우애? 영생? 맙소사, 이보세요. 나한테 죽음에 대비하게 해주는 종교를 보여줘봐요. 허무에 대비하게 해주는 종교를요. 그럼 그 교회에는 내가 나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댁의 교회는 더 많은 삶에만 대비하게 합니다. 꿈과 환상과 거짓에만,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P132-133)
백 진실은 그보다 더 심하죠.
흑 뭐가 그보다 더 심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
백 분노는 사실 좋은 시절에나 생기는 겁니다. 이제 그런 분노마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사실 내 눈에 보이는 형체들은 서서히 속이 비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거기에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모양만 있는 겁니다. 기차, 벽, 세상, 또는 사람. 사람이란 울부짖는 공허 속에 알 수 없는 몸짓을 하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하나의 물건이지요. 그 생명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에도, 내가 왜 그런 것들과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왜?
흑 젠장. (P135)
흑 그러지 마쇼, 교수 선생.
백 미안합니다. 댁은 착한 분이지만, 나는 가야겠습니다. 나는 댁의 이야기를 다 들었고 댁은 내 이야기를 들었고 이제 더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댁의 하느님은 한때는 무한한 가능성의 새벽에 서 있었을 게 분명한데 그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건 결국 이거네요. 그나마 이제 끝이 나고 있고요. 댁은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원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 용서는 원할지도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네요.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해요. 전에는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무(無)의 희망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희망에 매달리고 있고요. 자 이제 문을 열어주세요. 부탁합니다.
흑 그러지 마쇼.
백 문 열어요.
흑인이 사슬을 푼다. 사슬이 덜거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흑인이 문을 열고 교수는 퇴장한다. 흑인이 문간에 서서 복도를 바라보고 있다.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