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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l 25. 2024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

영화 <철도원>  1999년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1999년 일본 영화. 작중 철도원은 '폽포야'라고 읽으며, 이것은 기차의 기적 소리를 뜻하는 의성어에 ~や를 붙여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나타낸 것으로, 철도원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통상적인 한자 음독은 테츠도인(てつどういん)이다. 이 영화가 유명해지자, 일본 학생들의 국어 시험 답안지에 종종 오답이 나왔다고 한다.   

  

“쳇, 멋깨나 부리네. 사진까지 찍고 난리칠 게 뭐 있다고. 안 그래요, 역장님?”

젊은 기관사는 눈 덮인 평원을 가르며 내달리는 특급을 흘깃 돌아보다 조수석에 선 센지(仙次)를 올려다보았다. 

“세상 모르는 소릴세. 요새 기하 12가 그야말로 문화재급인거 모르나? 이거 한번 보겠다고 일부러 먼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

“근데 왜 이 노선을 없앤대요?”

“이 사람아, 그거야 수송 밀도니 채산이니, 그런 문제 아니겠나.”

어련하시겠어요. 기관사는 엄지손가락을 어깨 위로 쳐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달랑 한 칸 달린 객차에 승객 하나 없이 초록색 좌석들만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비요로 중앙역 역장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왜 못 해?”

“역장님, 호로마이 선이 언제 수송 밀도니 뭐니 따져가며 운행했나요? 저도 벌써 사 년짼데, 고등학교 방학 때면 항상 이랬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왜 새삼스럽게 노선을 폐지한다고 하느냐구요.”

“난들 알겠나, 그런 걸. 지금까지 이렇게 버틴 것만 해도 과거의 실적을 크게 쳐준 거였지. 자네도 호로마이 출신이면 옛날에 이 노선이 얼마나 굉장했는지는 알고 있지?”

종착역인 호로마이는 메이지 시대부터 훗카이도(北海道) 제일의 탄광촌으로 기세를 떨쳤었다. 21.6 킬로미터에 이르는 연선(沿線)에 여섯 개의 역이 있었고, 늠름하게 본선을 차지한 데고이치가 석탄을 가득 싣고 쉴 새 없이 왕복하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아침과 저녁, 고등학생 등하교 전용 단행 기차가 왕복할 뿐이고 중간에 지나치는 역에는 타고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마지막 광산이 채탄을 중지한 게 벌써 십 년 전이었다.                (P10-11)   

  

“고마우이, 안줏감까지 얌전히 챙겼구먼. 마누라 죽고는 정월도 그저 오면 오나부다 가면 가나부다 했는데.”  

“자네 마누라, 이제 몇 년 됐지?”

“몇 년이라고 할 것도 없네. 겨우 재작년이지, 어째 한 십 년은 된 것 같기도 하네만.”

“자네, 적적하겠어.”

“여긴 다 그런 할아범하고 할머니들인데 뭘, 나만 그런가, 자, 불 끄고 안으로 들어가지.”

술자리를 벌이기 전에 말해두어야 할 게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오토마츠, 나, 내년 봄에 역 빌딩으로 발령날 것 같네.”

“그래? 그거 잘됐네.”

“그래서 자네도 비요로로 나왔으면 싶어서, 십이층 건물에다 유리 엘리베이터가 달렸다네, 도쿄의 큰 백화점하고 철도 회사가 공동 출자를 해서 짓는다는데, 어떤가? 거기 윗사람에게 나도 조금은 말발이나 내밀 만한데 말이야.”

“무리한 말발 내밀 것 없네.”

말을 잘못했는가 싶어 센지는 입을 다물었다.

“고맙기는 하지만, 난 됐어.”

“왜?”

“글세, 난 겁이 나서 에스컬레이터도 못 타. 같이 철도원 생활이야 했지만, 비요로 중앙역 역장 자리까지 오른 자네하고 난 한참 다르지.”

“자넨 기계에 강하잖아.”                    (P19)    

 

"저...... 무서워요. 같이 좀 가주세요, 아저씨.“

“그럼, 그래야지, 같이 가주고말고,”

소녀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를 하고는 오토마츠의 손을 쥐었다. 

“무서울 게 뭐 있냐. 봐라. 하나도 안 무섭다. 이렇게 환한데?”

자그마한 손을 꼭 쥐자 오토마츠는 불현 듯 서글퍼졌다. 어쩐지 엊저녁의 동생이라는 아이도. 그리고 언니라는 이 아이도, 죽은 유키코인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걸핏하면 마음이 울적해지는 건 이제 철도원 생활도 석 달만 지나면 끝난다는 허전함 때문일까.

감기만 걸리지 않았더라면 유키코도 분명 이만큼 훌쩍 자라서 매일 밤 화장실 갈 때마다 아비의 단점을 깨워 앞장을 세웠으리라. 병원 하나 없는 마을에서 태어나, 문풍지 바람이 끊일 새 없는 사무실 곁 살림방에서 어린 것이 추위를 못 이긴 탓이었다. 자신의 직업이 아이를 죽인 거라는 생각이 들면 오토마츠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화장실 앞에서 소녀를 기다리는 동안 오토마츠는 멍하니 건너편 홈을 바라보았다.

십칠 년 전 눈 내리던 아침, 아내의 팔에 안긴 유키코를 저 홈에서 보냈다. 평소 하던 그대로 수신호를 하여 기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기차로 유키코는 싸여 갔던 모포에 말려 차디찬 몸이 되어 돌아왔다. 

“당신, 죽은 아이까지 깃발 흔들며 맞이해야 되겠어요?”

아내는 눈 쌓인 홈에 쪼그리고 앉아 죽은 유키코를 꼭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그때 뭐라고 대답했던가.

“그래도 내 일이 철도원인데 어쩌겠어. 내가 홈에서 깃발을 흔들지 않으면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누가 기하를 유도하겠어? 전철기(轉轍機)도 돌려야 하고, 학교가 파한 아이들도 다들 돌아올텐데.”

“다른 애들 얘긴 다 그만두세요. 당신 애가 돌아왔어요. 이 꼴로요. 유키코가 눈덩이처럼 얼어서 돌아왔다고요!”

아내가 그를 향해 큰소리로 대든 건 그때 단 한 번뿐이었다.              (P26-27)  

    

그날 호로마이에는 시간도 장소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큰눈이 졌다. 

낡은 역사는 소리도 빛도 없는 순백의 세계에 파묻혔다. 

소녀는 노(老)역장이 말하는 옛이야기를 하나하나 기이 감동하며 들어주었다. 오토마츠는 스스로도 자기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반세기분의 어리석은 푸념이며 자랑을 생각나는 대로 수다스럽게 주워섬겼다.

그런 얘기는 낡아빠진 제복 안섶 깊숙한 가슴속에 이를테면 기관차의 기름연기 냄새며 탄재의 꺼끌꺼끌한 감촉과 함께 진흙처럼 딱딱하게 응어리져 있던 기억이었다.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놓을 때마다 오토마츠의 마음은 확실하게 가벼워져갔다. 

특수 경기로 한창 흥청거리던 시절. 역사 안이 시체로 가득 찼던 탄광 사고. 기동대가 떼로 달려왔던 노동쟁의, 그리고 등불이 꺼지듯 하나씩 폐광되어가던 산들.

가장 괴로웠던 일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오토마츠는 딸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사토 오토마츠로서 가장 괴로웠던 일은 물론 딸의 죽음이고, 두 번째로는 아내의 죽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철도원으로서 오토마츠가 가장 슬픔에 잠겼던 건 매년 집단 취업으로 떠나가는 아이들을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일이었다. 

“...... 너보다 두세 살 어린 아이들이 울면서 마을을 떠나갔지. 그걸 보고 차마 나까지 울 수가 없었어. 모두 정신 차리고 똑바로 잘들 해야 한다. 그렇게 아이들 어깨를 두드려가며 웃어야 했던게 제일 괴로웠지. 저쪽 홈 끝에 서서 기차가 안 보일 때까지, 기적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경례를 하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 무렵 센지는 기관사였다. 집단 취업 기차에 탔을 때는 경례 대신 오래오래 경적을 울렸었다. 

철도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 대신 호루라기를 불고, 주먹 대신 깃발을 흔들고, 큰소리를 내지르는 대신 호령을 뽑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철도원의 괴로움이라면 아마도 그런 것일 것이다.                  (P38-39) 

    

전화가 울렸다. 오토마츠는 실내화를 발에 꿰고 사무실로 내려섰다. 

“여보세요. 아아, 엔묘지 화상이신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우. 손녀딸을 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소. 어찌나 영리하고 참한 아가씨인지, 지금 댁의 손녀딸이 밥까지 차려줘서 먹던 참이오.”

그러나 엔묘지 주지의 전화는 귀가가 늦은 손녀딸이 걱정되어 걸려온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요령부득의 말이 오고 간 끝에 화상은 올해 공양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오토마츠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어 어깨를 떨군 채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주지의 말소리가 귓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오토마츠, 자네 어떻게 된 거 아냐? 우리집엔 요시에고 누구고 자식들이라곤 코빼기도 안 비쳤어.”

오토마츠는 책상 위의 셀룰로이드 인형을 손에 들고 레이스가 누르스름해진 드레스를 손끝으로 가만가만 건드려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니..........?”  

매표구 유리창에 고개 숙인 소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너 어째서 거짓말을 했니?”

얼어붙은 창에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눈발이 흩어졌다. 

“무서워하실까 봐서....... 죄송해요.”

“내가 왜 무서워하겠니. 세상 어디에 제 딸을 무서워하는 아버지가 있겠니?”

“죄송해요, 아버지.”

오토마츠는 천장을 올려다보아도 막을 수 없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유키코....... 어제 저녁부터 차례차례 자라가는 모습을 이 아버지에게 보여준 게로구나. 저녁 참에는 책가방을 메고 아비 눈앞에서 차렷 해 보였지. 그리고 한밤중에는 좀더 자란 모습을, 그리고 이번에는 비요로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십칠 년간 성큼성큼 자라는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준 게로구나.......”

소녀의 목소리는 내려 쌓이는 눈발처럼 조용했다.

“왜냐면요, 아버지는 변변히 기쁜 일 한번 없으셨잖아요. 저까지 자식 노릇 한번 제대로 못하고 죽어버렸구요. 그래서......”

오토마츠는 셀룰로이드 큐피 인형을 가슴에 품었다. 

“이제 생각나는 구나, 이 인형. 네 어미가 울면서 네 관에 넣어주었던 것이지.”

“예, 제일 소중한 친구였어요. 아버지가 비요로에서 사다주셨지요? 어머니는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만들어주셨구요.”

“그까짓 게 뭐 대단하다고..... 아버지는 네가 죽었을 때도 플랫폼의 눈만 쓸어내고 있었단다. 이 책상에서 그냥 여객일지만 쓰고 있었어. 오늘 아무 이상 없다고.......”

“그야, 아버지는 철도원이시니까요. 아버지 직업이잖아요. 그런 거,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토마츠는 의자를 돌려 돌아보았다. 유키코는 솜 두른 빨간 겉옷의 어깨를 움찔하며 서글프게 웃었다. 

“유키코, 그래 잘 왔다. 어서 밥 먹자, 밥 먹고 목욕하고, 오늘은 이 아버지랑 함께 자자, 유키코, 정말 잘 왔다.”

오토마츠는 그날의 여객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적어넣었다.

이윽고 한밤중에 눈이 멈추었다. 호로마이 앞산에 은빛 보름달이 떠올랐다.      

“희야, 호로마이 선이 이렇게 붐비는 거 처음 봤네. 완전히 만원이에요, 만원.”

젊은 기관사는 차장 가방을 들고 홈을 걸으며 기하 12의 객차칸을 넘어다보았다. 

“그야 물론이지. 사십오 년을 근속한 호로마이 역장님이 돌아가셨어. 겉만 번드레 잘난 사람들 장례식하고는 다르지.”

“그건 그렇지요. 오토마츠 씨, 아니, 호로마이 역장님, 진짜 좋은 얼굴이셨어요. 저도 훗날 꼭 그렇게 가고 싶을 정도예요. 저기, 홈 끝의 눈더미에 손깃발을 꼭 쥐고 쓰러져 계시더라구요. 입에 호루라기까지 무신 채로요.”

“됐어. 이제 그 얘기는 그만 하게.”

센지는 운전대에 오르기 전에 홈 끝에 서서 눈을 꼭꼭 밟았다. 오토마츠가 이곳에 쓰러진 채 발견된 것은 쓸쓸한 정월 초하루를 함께 지내고 돌아간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첫차로 찾아갔던 러셀이 앞으로 엎드리듯 쓰러져 있는 시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P43-45)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는 철도원이다. 칙칙폭폭 뿌우-- 미련한 쇳소리를 지르며 강철 팔뚝을 흔들며 꿋꿋이 달리는 철도원이다. 인간처럼 눈물 따위는 흘릴 수 없지. 암, 센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터널에 들어서자 힘차게 달리는 바퀴 소리가 귀를 막았다. 

“역장님! 기하는 어쩌자고 이렇게 기막힌 소리로 운데요? 신칸센 경적 소리도, 혹토세이 경적 소리도 근사하지만 기하 경적 소리는요, 듣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나요! 어째서 그런지 저는 들으면 그냥 눈물이 나더라구요!”

“멀었다. 멀었어! 그 소리 듣고 눈물이 나면 아직도 진짜 철도원 되긴 멀었어!”

센지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할 때마다 등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기하의 경적을 있는 힘껏 울렸다.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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