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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l 26. 2024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

영화 <핑거스미스>  2005년

2005년 BBC에서 3부작으로 제작되었다. 주연은 샐리 호킨스, 일레인 캐시디.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제작을 맡아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2016년에 개봉했다. 시대적인 배경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로 변경됐고 수 포지션의 남숙희 역은 김태리, 젠틀먼 포지션의 후지와라 백작 역은 하정우, 모드 포지션의 히데코 역은 김민희가 맡았다.      

이 소설의 제목인 <핑거스미스>는 소매치기를 뜻하는 19세기 영국의 속어이자, 수가 사기를 치기 위해 사용한 이름 수전 스미스(우리가 외우기 쉽고, 또 그들이 추적하기 어려운)와 각운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 소설로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이다. 1860년대의 런던 뒷골목과 시골 대저택, 상류사회, 정신병원, 외설물 전문 서점 등을 배경으로 한 주인공 수와 모드의 사랑이야기이자 스릴러 소설. 소설의 제목인 핑거스미스는 도둑을 뜻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은어이자 주인공인 수의 직업이기도 하다.  

   

[1부-수전의 시점]

낸시가 결국은 살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랜 뒤 <올리버 트위스트>를 두 번째로 보았을 때였다. 그때 플로라는 잘나가는 핑거스미스였다. 플로라는 시시한 서리 극장 대신 웨스트엔드에 있는 극장과 홀 등을 일터로 택했다. 플로라에게는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유령처럼 헤치고 다닐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나를 데리고 일을 하러 가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플로라도 석스비 부인을 너무나 무서워했다.

플로라는 불쌍하게도 결국 숙녀가 차고 있던 팔찌를 훔치다가 현장에서 잡혔고, 절도죄로 유배되었다.                (P17)     


“쟤가 수전 트린더야.” 그런 내 모습을 보면 누군가 속삭이곤 했다. “쟤 어머니도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했어. 쟤, 용감하지 않니?”

나는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았다.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사실 나는 전혀 용감하지 않았다. 이제는 누가 그걸 안다고 한들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일에 대해 용감해지려면 우선 측은하다는 느낌부터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측은한 느낌이 들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그렇게 죽은 건 안된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이상, 죽은 이유가 아이를 목 졸라 죽이는 식의 사악한 죄가 아니라 접시에 목숨 건 구두쇠를 살해한 것처럼 용기 있는 일 때문이었다는 점에 나는 기뻐했다. 어머니가 나를 고아로 만든 것은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애들 중엔 어머니가 주정뱅이거나 미치광이인 경우도 있었고, 서로 싫어해 절대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쪽도 있었다.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가 죽은 쪽이 더 좋았다!

차라리 석스비 부인 쪽이 더 좋았다. 월등히 좋았다. 석스비 부인은 나를 맡아 달라고 한 달치 비용을 받았다. 그리고 17년이나 나를 키우고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부인은 나를 공립 구빈원에 보낼 수도 있었다. 외풍 심한 아이용 침대에서 울게 내버려 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인은 나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겼고, 혹시라도 경찰에 잡힐까 봐 도둑질하는 곳에는 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기 침대에서 같이 자게 했다. 식초로 내 머리털을 윤내 주었다. 보석이나 받을 취급이었다.             (P24-25) 

    

“멋진 이름이 우리를 망칠 수도 있어. 이 일은 생사가 걸린 작업이야. 우리는 네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이름이,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을 이름이 필요해. 우리가 필요한 이름은.......” 젠틀먼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추적할 수 없어야 해. 동시에 우리가 외우기 쉽고 말이야..... 브라운은 어때? 네 드레스와 어울리잖아. 아니면, 그래. 이거 좋겠다. 스미스, 수전 스미스.” 젠틀먼이 빙긋 웃었다. “어쨌든 너도 스미스의 일종이잖아. 이거 말이야.”

젠틀먼은 손을 내리고 손바닥을 뒤집은 뒤, 가운뎃손가락을 구부렸다. 이 표시는, 그리고 젠틀먼이 뜻하는 단어는 핑거스미스였다. 도둑을 뜻하는 버러의 은어였다. 우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P63)  

   

나는 잠시 기다렸다가 문으로 다가가 발로 문을 차 닫았다. 그리고 벽난로 앞으로 가 손을 녹였다. 랜드 스트리트를 떠나 온 뒤로 충분히 몸이 따뜻했던 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모드가 보았던 거울을 보며 일어나 얼굴과 주근깨 난 두 뺨과 이를 들여다보았다. 혀를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손을 문지르며 낄낄댔다. 모드는 젠틀먼이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젠틀먼에게 완전히 빠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벌써 3천 파운드를 잘 포장한 뒤 내 것이라고 써 붙여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구속복을 든 의사가 정신병원 정문에서 모드를 기다리며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모드를 만난 뒤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웃었던 것도 다소 억지스러웠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드가 나가고 나자 집은 전보다 더 어둡고 조용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벽난로에서 재가 떨어지는 소리, 유리창이 흔들리고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창으로 다가갔다. 외풍이 지독했다. 외풍을 막기 위해 창문턱에 자그마한 빨간 모래주머니를 놓아두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모래주머니는 모두 젖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모래주머니에 손을 대어 보니 손가락에 녹색이 묻어났다. 나는 그곳에서 몸을 떨며 바깥 경치를 보았다. 이런 것도 경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바깥에는 평범한 풀밭과 나무뿐이었다. 검은 새 몇 마리가 잔디에서 벌레를 찍어 내고 있었다. 어느 쪽이 런던일까 궁금해졌다.                     (P108-109)   

  

나는 모드의 운명을 알고 있었지만(아주 잘 알았고, 그렇게 되도록 돕고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모드의 운명을 다소는 이야기나 연극 속 등장인물의 운명처럼 느꼈던 것 같다. 모드의 세계는 너무나 기묘하고 조용해서, 정상적인 세상이 엄청나게 거친 곳으로 느껴지게 했다. 다시 말해, 속임수가 있는 평범한 세상, 내가 돼지머리 고기와 플립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 석스비 부인과 존 브룸이 젠틀먼이 훔친 돈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생각하며 키득거리는 그러한 세상을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어 보이게 했다. 하지만 모드의 고립된 세계에선 평범한 세계가 너무나 동떨어진 곳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보니, 그러한 거침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처음에 나는 <젠틀먼이 오면 이렇게 해야지>라든가 <일단 젠틀먼이 모드를 정신 병원에 집어 넣으면 난 저렇게 해야지>라는 따위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중얼댄 뒤 모드를 보면, 모드가 어찌나 순진하고 착하던지 그러한 생각은 사라져 버리고 결국 머리를 빗기거나 드레스 허리끈을 제대로 펴주는 걸로 끝나곤 했다. 미안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혹은, 당시에는 그렇게 많이 미안하진 않았다. 단지 한꺼번에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드의 앞날에 대해 생각하며 끔찍한 기분이 들기보다는 모드에게 상냥하게 대하면서 모드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물론, 모드는 달랐다. 모드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조용히 생각헤 잠기곤 했다. 그럴 때면 표정이 바뀌곤 했다. 밤에 모드 옆에 누워 있으면, 모드 머릿속에서 생각이 바뀌고 또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모드가 따뜻해지는 걸, 어쩌면 얼굴을 붉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드가 젠틀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얼마나 빨리 돌아올 것인지 따져 보는 것을, 젠틀먼이 자기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젠틀먼 역시 모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드는 절대로 젠틀먼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다. 모드는 젠틀먼의 유모로 일한 것으로 되어 있는 나이 든 내 이모에 대해 한두 번인가 안부를 물어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드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모에 대해 말하다 보면 석스비 부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이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P143-144)  

   

우리는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비밀이었고 비열한 비밀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이었다. 지금에 와서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은 누구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사기꾼은 누구인지 정리해 보려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P165)     


그러나 모드의 운명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모드는 급류에 휩쓸려 가는 어린 가지와도 같았다. 모드는 우유와도 같았다. 너무나 창백하고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단순했다. 모드는 망쳐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내가 온 것에서는 그 누구도 운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모드의 운이 나쁘다 할지라도, 그게 나까지 운이 나빠야 한다는 뜻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이미 말했던 것처럼, 비록 모드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모드를 구하기 위해 노력할 정도로 많이 미안하지는 않았다. 나는 모드에게 진실을 말할 생각도 없었고, 젠틀먼이 악당임을 폭로할 생각도 없었으며, 우리 계획을 망쳐 우리 몫을 날려 버릴 뭔가를 해볼 생각도 절대 없었다. 나는 모드에게 젠틀먼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게 했다. 젠틀먼이 친절하다고 믿게 했다. 부드럽다고 믿게 했다. 나는 모드가 젠틀먼을 좋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틀먼이 모드를 속여 결혼한 뒤 몸을 망치고 정신 병원에 가둘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나는 모드가 야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백해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손가락 끝으로 아픈 이마를 문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모드는 자신이 지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좋았을 터라고, 브라이어에 있는 그 어떤 집이라도 괜찮으니 삼촌 집만 아닌 데서 살았다면 좋았을 터라고, 젠틀먼이 어떤 사람이라도 좋으니 다만 자신이 결혼해야 하는 남자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터라고 바라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것이 싫었지만 외면해 버렸다. 나는 생각했다. <방법이 없어. 이건 저 사람들 일이라고.>

하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모드에 대한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게 <모드는 내게 아무런 존재도 아니야>라고 말을 하면 할수록, 모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날이 밝은 동안엔 내내 모드와 함께 앉아 있거나 걸었으며, 내가 모드를 끌어가고 있는 운명 때문에 모드를 만지거나 시선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날이 지면 나는 모드의 한숨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밤새도록 담요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모드가 자기 삼촌에게 가 있는 동안, 나는 모드를 느낄 수 있었다. 눈먼 사기꾼은 촉감으로 자신이 만지는 것이 금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처럼, 나는 집 벽을 통해 모드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둘 사이에 실이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모드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실이 나를 모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건 흡사...........

<그건 흡사 내가 모드를 사랑한다는 말 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P202-203)  

   

교회는 단단한 석조 건물이었고, 달이 비치고 있었음에도 상당히 검게 보였다. 내부에는 백도제가 발려 있었지만 색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제단과 신도석 주변에 촛불이 몇 개 켜져 있었고, 촛불 주위로 나방이 몇 마리 날아다녔으며, 밀랍에 빠져 죽은 녀석도 몇 마리 보였다. 우리는 좌석에 앉는 대신 곧장 제단으로 갔고, 목사는 성서를 들고 우리 앞에 섰다. 목사는 성서를 펼치고 눈을 끔벅였다. 목사는 어물어물 성서를 읽어 나갔다. 크림 부인이 말처럼 거칠게 숨을 쉬었다. 나는 가느다랗고 흰 루나리아 가지를 들고 제단 앞에 섰고, 자기 가지를 꽉 쥐고 젠틀먼 옆에 서 있는 모드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드에게 키스했었다. 모드 옆에 누워 있었다. 모드의 몸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진주라고 불렀다. 모드는 석스비 부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보다도 내게 친절했다. 그리고 내가 모드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생각뿐이었을 때, 모드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했다.

그런 모드가 이제 결혼하려는 참이었고, 죽도록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곧 그 누구도 다시는 모드를 사랑하지 않을 터였다.              (P232-233)     

     

[2부-모드의 시점]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리버스 씨가 말을 잇는다. “저는 당신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얻어 낼 생각을 하고 브라이어에 왔습니다. 제 말은, 삼촌 집에서 당신을 유혹해 내어 당신 재산을 확보한 다음, 아마도 그 다음엔 당신을 버린다는 거지요. 저는 만난 지 10분 만에 당신이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알게 되었고 제가 목적을 절대 달성할 수 없을 거란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당신을 유혹하려 든다면 그게 당신에 대한 모욕이 될 거란 점도 이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또 다른 종류의 포로로 만들려 하다니요. 그렇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당신을 자유롭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내가 말한다. “만약 제가 자유로워지길 바라지 않는다면요?”

리버스 씨가 간단하게 대답한다. “전 당신이 자유를 갈망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붉어진 뺨 때문에 리버스 씨에게 내 감정을 들킬 것 같아 겁이 난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애쓴다. 내가 말한다. “잊으시지요. 제가 무얼 갈망하든 여기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삼촌의 책들이 책장에서 뛰쳐나가길 갈망해도 아무 소용없듯 말이에요. 삼촌은 저도 그 책들처럼 만들어 놓았답니다.”               (P333)     


<넌 나를 삼켜 버리려고 브라이어에 온 거야.> 내가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나는 수전이 그래 주길 바란다. 수전이 그래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스스로 내 인생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내 인생을 쉽게 내던진다. 등불 심지가 심지 주위에 유리를 더럽히려 연기를 내뿜는 것과, 혹은 거미가 벌벌 떠는 나방을 꽁꽁 묶으려 은실을 내뿜는 것과 비슷하다. 수전 주위로 자리 잡고 꽉 조여 가는 실을 상상한다. 수전은 전혀 모르고 있다. 너무 늦은 뒤에야 붙잡힌 것을 알게 될 터이고, 그 다음에야 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어떻게 수전을 나로 만들어 놓았는지 알게 될 터이다. 수전은 지금으로선 그저 피곤하고 불안하고 지루할 뿐이다. 나는 정원을 거닐러 나가며 수전을 데려가고, 수전은 느릿느릿 뒤를 따른다. 우리는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수전이 멍한 시선으로 하품을 하고 눈을 문지른다. 수전은 손톱을 깨문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끼고 그만둔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선 그 끝을 씹는다.                (P368)    

 

리처드는 계속 나와 시선을 맞춘다. 리처드가 나를 골랐고 내게서 공감을 쓸어냈고 브라이어에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나를 빼내 주려 한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 즉 더는 삼촌의 질녀가 아니게 될 것이다. 만약 리처드가 지금 내게 보여 주는 표정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어둡고 무시무시한 어떤 흥분의 소용돌이 없이도 마주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 감정이 어찌나 강하게 느껴지는지 거의 메스꺼울 지경이다. 나는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뻣뻣한 웃음이다.

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가 연인에게 웃음 짓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더욱 뻣뻣해지고 목구멍에까지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는 수의 눈을, 그리고 리처드의 눈을 피한다. 리처드는 나가다가 수를 자기 쪽으로 부르고, 둘은 문가에 서서 잠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리처드가 주화 한 닢을 수의 손바닥에 얹어 준다. 주화가 노랗게 번쩍이는 걸 보고 안다. 리처드는 자기 손으로 수의 손가락을 주먹 쥐여 준다. 수의 분홍색 손바닥에서 리처드의 손톱이 더욱 갈색으로 보인다. 수는 다시 한 번 어색하게 무릎 굽혀 인사한다.                   (P389)    

 

내 눈을 마주할 때면, 수의 눈에는 베일이 드리워져 있고 아무 죄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리처드의 눈과 마주하게 되면 갑자기 둘 사이에 지식과 이해가 오가는 것이 보인다. 나는 수를 바라볼 수가 없다.

이는 물론, 수가 많은 것을 알기는 하지만 수의 지식은 날조된 지식이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가 그러한 지식을 감추면서 느끼는 만족이 내겐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수는 자기가 우리 계획의 중심이라는 것을, 우리 계획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른다. 수는 내가 계획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수는 리처드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는 의심조차 않는다. 리처드가 몰래 자기에게 와서 웃음 짓거나 얼굴을 찡그린 뒤에 나에게 와서 진심으로 웃음 짓고 찡그린다고 생각도 하지 않는다.              (P394)

     

리처드 때문에 나는 내 감정을 알게 된 것이다. 리처드가 나를 수에게로 데려가고, 우리는 집으로 걸어가고, 수는 내 망토를 벗겨 주고 신발을 벗겨 준다. 마침내 수의 뺨이 발그레해진다. 수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찡그리고 얼굴 앞에서 손을 가볍게 내젓는다....... 수의 행동은 그게 다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불끈거린다. 그 함몰 혹은 추락, 그 안엔 너무나 큰 공포가, 너무나 큰 암흑이 있고, 나는 그것을 공포 혹은 광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수가 돌아서서 기지개 켜고 방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본다. 내가 그토록 탐욕스럽게 그리고 오랫동안 주시해 왔던, 거칠 것 없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지켜본다. 이런 게 욕망인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모른다니 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욕망이 좀 더 작고 좀 더 단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맛이 입에 한정된 것이듯, 시력이 눈에 한정된 것이듯, 욕망도 욕망의 기관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에 걸린 것처럼, 이러한 느낌이 자꾸만 들면서 내 안에 머무른다. 피부처럼 나를 덮어 감싼다. 

수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리처드가 이미 나의 욕망에 이름을 붙였고, 그 욕망이 나를 색칠하거나 표시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삼촌 그림에서 입술과 음부와 발가벗고 채찍질당한 사진가 새빨간 색으로 표시되어 있듯이, 나를 진홍색으로 표시해 둔 게 분명하다. 나는 그날 밤 수 앞에서 옷을 벗기가 두렵다. 수 옆에 눕기가 두렵다. 잠들기가 두렵다. 수의 꿈을 꿀까 봐 두렵다. 꿈속에서 내가 돌아누워 수를 만질까 두렵다..........           (P415)     


“당신을 증오해요.”

“그럼 자신을 증오하십시오. 당신과 나, 우리는 닮은꼴이니까요. 당신 생각보다도 훨씬 더 닮았습니다. 당신은 우리 심장 근육이 꼬일 때로 꼬여 있어 이 세상이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세상은 우릴 비웃습니다. 그 점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사랑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천을 짜면 더러운 물이 나오듯 경멸에서는 부를 짜낼 수 있지요. 이게 진실이란 걸 당신은 압니다. 저와 비슷한 사람이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죠. 절 증오하고, 당신 자신을 증오하십시오.”

최소한 내 뺨 위에 얹힌 리처드의 손은 따뜻하다. 나는 눈을 감는다.             (P455)


“석스비 부인이 한 말들을 이해하겠지, 모드?” 리처드가 내 손가락 사이로 보려 애쓰며 말한다. “한 아기가 다른 아기가 되었어. 네 어머니는 네 어머니가 아니고, 네 삼촌도 네 삼촌이 아니야. 네 인생은 네가 살아야 했던 인생이 아니라, 수가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어. 그리고 수는 네 인생을.....”

사람은 죽을 대가 되면 눈앞에 자기 인생이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 리처드가 말하는 동안, 나는 나의 인생을 본다. 정신 병원, 내가 지녔던 나무 막대기, 브라이어에서 입었던 아름다운 드레스를, 구슬이 달린 줄, 안경을 벗은 삼촌의 눈, 책들, 책들...... 인생이 깜빡이며 지나가다 사라지고, 진흙탕에 빠진 동전의 반짝임처럼 사라지고 어쩔 수 없어진다. 나는 몸을 떨고 리처드는 한숨을 쉰다. 석스비 부인이 고개를 젓고 혀를 찬다. 그러나 내가 저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자, 둘 다 뒤로 물러선다. 나는 저들 생각처럼 울고 있지 않다. 나는 웃고 있고, 끔찍한 웃음에 사로잡혀 있고, 내 표정이 무시무시해 보이는 게 분명하다.                    (P505)     

[3부-수전의 시점]

나는 천천히 거울 속의 숙녀에게로 다가가 경악 속에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까 숙녀의 말처럼 나는 미치광이같이 보였다. 머리털은 아직도 머리에 꿰매어져 있었지만 머리털이 자라거나 꿰맨 게 빠지면서 더부룩해져 있었다. 얼굴은 희었지만 여기저기 기미와 긁힌 자국과 희미해져 가는 멍으로 얼룩덜룩했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눈이 부어 있었고, 목은 막대기 같았다. 체크무늬 드레스는 빨래 자루처럼 몸에 걸려 있었다. 목 깃 아래로 모드의 오래된 장갑이 더러워진 하얀색 손가락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장갑을 심장 옆에 넣어 두고 있었다. 새끼 염소 가죽 위로 내 잇자국이 보였다.

아마도 1분 정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석스비 부인이 머리를 감기고 빗질하고 반짝거리게 해주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날 자기 침대에 눕히기 전, 춥지 말라고 미리 침대를 데워 주던 일을 생각했다. 고기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은 나 먹으라고 따로 떼어놓던 일, 이가 날카로워지자 부드럽게 갈아 주던 일, 팔다리가 곧게 자라고 있는지 어루만지며 확인하던 일 등을 생각했다. 같이 살던 내내 부인이 나를 얼마나 곁이 끼고 안전하게 지켜 주었는지를 기억했다. 내가 브라이어에 간 것은 돈을 벌어 부인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내 돈은 사라져 버렸다. 모드 릴 리가 내 재산을 훔치고 자기 것을 내게 넘겼다. 여기 있기로 되어 있던 것은 모드였다. 모드는 나를 자기로 만들고, 반면 자신은 세상에 나가 마음대로 살면서 거울마다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령 드레스를 맞추고, 모자 가게에서, 혹은 극장에서, 혹은 춤추러 간 홀에서..... 거울에 비친 모드는 내가 되지 못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명랑하고, 자부심 넘치고, 자유롭고.......

분노가 치밀었던 듯하다.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 눈빛을 보았고 내 얼굴에 내가 놀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마침내 당직 간호사가 깨어나 다가오더니 주먹을 날렸다.

“그만해, 허영심 덩어리 아가씨.” 간호사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네 발꿈치도 바라볼 가치가 있다고 말해 주지. 그럼 함께 볼까.” 간호사는 돌고 있는 줄 가운데로 나를 떠밀었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 치마단과 장화와 앞에 가는 숙녀의 장화를 바라보며 걸었다. 무엇이라도, 응접실 창문에 시선을 들어 내 미친 눈빛을 다시 보지 않게만 해준다면 무엇이라도 바라보며 걸었다.                (P647-648)   

  

그 시절 내 이름은 수전 트린더였다. 이제 그 시절은 모두 끝이 났다.

경찰은 데인티를 제외한 우리 모두를 연행했다. 그리고 증거물과 돈과 장물을 찾아 랜트 스트리트 집의 부엌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우리는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다. 모두 서로 다른 감옥에 가둔 뒤 매일 찾아와 같은 질문을 했다.

“살해당한 남자와는 어떤 관계였지?”

나는 젠틀먼이 석스비 부인의 친구였다고 말했다.

“랜트 스트리트에 산 지는 오래되었나?”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고 대답했다.

“살인이 있던 날 밤 무엇을 보았지?”

하지만 여기서 나는 늘 머뭇거렸다. 모드가 칼을 집는 모습을 본 것도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가끔은 모드가 칼을 휘두르는 걸 본 기억까지도 나는 듯했다. 탁자 위를 만지는 모드를 보았던 것은 안다. 칼날이 번득이는 것도 보았다. 젠틀먼이 비틀거리기 시작할 때 모드가 뒤로 물러났던 것도 안다. 그러나 석스비 부인도 거기에 있었고 누구보다도 빨리 움직였다. 그리고 휙 하고 휘두르며 번쩍였던 손이 <부인의> 손이었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마침내 나는 간단한 진실을 말했다. 뭘 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내 말은 중요치 않았다. 경찰들은 존 브롬의 말을 들었고, 석스비 부인 자신의 자백도 받았던 것이다. 경찰에게 나는 필요치 않았다. 연행된 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석방되었다.

다른 이들은 좀 더 오래 잡혀 있었다.                    (P758-759) 

    

다들 감옥 정문의 옥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대가 세워지고, 밧줄이 이미 걸려 있었다. 남자 하나가 교수대의 발판을 검사하며 주위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남자를 보고 있자 마음이 거의 가라앉으면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석스비 부인이 마지막으로 내게 부탁했던 것을 떠올렸다. 자기를 지켜봐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부인이 견뎌 내야 할 것에 비하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다...... 이제 남자가 손에 밧줄을 쥐고 길이를 점검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려고 좀 더 목을 뽑아댔다.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마지막까지 지켜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해낼 거야>, <해낼 거야>. 부인도 내 어머니를 위해 그렇게 해주었잖아. 나도 부인을 위해 해내겠어. 이제 <이 일> 말고 부인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겠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시계가 천천히 규칙적으로 열 시를 알렸다. 밧줄을 쥐고 있던 남자가 교수대에서 내려오고, 감옥 층계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고, 감옥 목사가 옥상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간수장이 나타났다.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나는 창을 등지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통해 그다음 벌어진 일들을 알았다. 시계가 울리고 목사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야유하고 고함치기 시작했다. 교수형 집행인을 향한 것이었다. 물 위로 기름이 퍼져 나가듯 군중 사이로 야유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이 들렸다. 고함이 더욱 커지자, 나는 교수형 집행인이 무슨 신호를 보냈거나 절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 소리가 다시 들리고 이번엔 좀 더 빠르게, 전율이나 오싹함이 퍼지듯, 온 거리로 퍼져 나갔다. 외침이 들렸다. “모자를 벗으시오!” 그리고 무시무시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외침이 섞여 들렸다. 석스비 부인이 도착한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부인을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 모든 낯선 사람들이 부인의 모습을 보려 애쓰고 있었다. 저 모든 낯선 사람들이 부인의 모습이 어떤지 보려고 두 눈이 빠져라 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속이 점점 더 메스꺼워졌지만 아직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할 수가 없었다. 돌아설 수도,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얼굴에서 뗄 수가 없었다. 귀를 기울이는 게 고작이었다. 웃음소리가 수군거리는 소리와 조용히 하라는 외침으로 바뀌었다. 목사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용히 하라는 소리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온 거리가 내 심장 소리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아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아멘 소리가 거리에 울리는 중에, 군중의 다른 쪽, 즉 감옥에서 가장 가까워 가장 잘 보이는 쪽의 사람들이 침묵을 깨고 불안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신음 또는 욕설에 가까운 소리로 바뀌어 갔다...... 부인이 교수대로 끌려 나왔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부인의 손을 묶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부인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한순간, 딱 한순간, 말로 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 완전한 그리고 끔찍한 정적의 순간이 이어졌다. 아기들이 울음을 멈추고, 숨이 멎고, 심장과 벌어진 입에 손이 올라가고, 맥박이 느려지고,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리가> 없어, 그렇게 <하진> 않을 거야, 그러지 <못할> 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 너무나 곧, 너무나 빠르게, 교수대의 발판이 덜컹거리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밧줄이 휙 풀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마치 어떤 거대한 손에 모두가 공유하는 배를 얻어맞은 것처럼 동시에 헐떡이며 신음했다.

이제 나는 아주 잠시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뒤로 돌았고, 보았다..... 내가 본 것은 전혀, 절대로 석스비 부인이 아니었다. 코르셋과 드레스를 입히고 여자처럼 보이게 해놓은 재단사의 인형이었다. 생기 없는 팔이 달렸고, 짚을 채워 넣은 캔버스 천 부대 같은 머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울지 않았다. 침대로 가 누웠다. 사람들이 다시 숨을 쉬고 목소리를 되찾으면서, 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입을 놀리고, 아기를 안은 손에 힘을 풀고,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좀 더 많은 야유와 외침과 무시무시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결국엔 환호까지 들려왔다. 나는 전에도 교수형 장면들을 보면서 환호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번도 환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높아져 가는 저 <만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슬픔 속에서도 나는 깨달았다. <저 여자는 죽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그렇게 외치는 게 나을 터였다. 심장이 뛸 때마다 피보다도 더 빠르게 그런 생각이 머리로 솟구쳤다. <저 여자는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다.>              (P778-780)

     

“삼촌 책 같은 책을 쓰고 있구나!” 내가 말했다. 모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침울했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저런 종류의 책을!” 내가 말했다. “믿을 수 없어. 네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온갖 모습을 다 상상했지만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그리고 이제 여기에, 이렇게 큰 집에 완전히 홀로 처박혀 있는 너를 보게 되다니......!”

“난 혼자가 아니야.” 모드가 말했다. “말했잖아. 윌리엄 잉커와 그 사람 부인이 날 돌봐 주고 있어.”

“여기에 완전히 홀로 처박혀 <이딴 책들>이나 쓰고 있는 너를 보게 되다니......!”

다시 모드가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면 안 되지?” 모드가 말했다.

나는 답을 몰랐다. “옳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내가 말했다. “너 같은 여자아이가.....”

“나 같은? 나 같은 여자아이는 세상에 없어.”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모드 손의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돈이 벌려?”

모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모드가 말했다. “열심히 쓰면 살아가기엔 충분해.”

“그럼 넌..... 이 일이 좋아?”

모드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내가 이 방면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어......” 모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내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해서 내가 미워?” 모드가 말했다.

“미워.” 내가 말했다. “이미 널 미워할 만한 이유가 쉰 개는 있어. 단지......”

“<단지 널 사랑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무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모드가 아직도 당당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내가 과연..... 어쨌거나 내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모드는 내 표정에 쓰인 그 말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모드의 얼굴색이 바뀌고 시선이 차분해졌다. 모드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때문에 이마에 검은 얼룩이 더 많이 생겼다. 여전히 얼룩이 참기 어려웠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모드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엄지에 침을 묻혀 모드의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저 잉크와 모드의 하얀 살결만을 생각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나 모드는 내 손을 느끼더니 아주 조용히 있었다. 엄지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모드의 뺨으로 움직여 갔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손으로 모드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모드가 눈을 감았다. 뺨이 부드러웠다. 진주와는 달랐다. 진주보다 따뜻했다. 모드가 고개를 돌려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부드러웠다. 잉크 얼룩이 모드의 이마에 검게 남아 있었다. 결국엔 잉크일 뿐이란 생각을 했다.

모드에게 키스하자, 모드가 몸을 떨었다. 그러자 모드에게 키스해 모드가 몸을 떨게 하는 것이 어땠는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나 역시 몸이 떨려 왔다. 나는 얼마 전까지 아팠던 사람이었다. 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떨어져 섰다. 모드가 손을 가슴에 갖다 댔다. 아직까지 모드 손에 쥐여 있던 종이가 이제 바닥으로 펄럭이며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종이를 집어 종이에 생긴 주름을 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내가 주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모드가 말했다.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한 말들로 가득해....... 봐.”

모드가 등불을 집어 들었다. 방이 어두워지고, 비는 여전히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드는 나를 벽난롯가로 데려가 앉힌 뒤 옆에 앉았다. 모드의 비단 치마가 갑자기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모드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종이를 평평하게 폈다. 그리고 자기가 쓴 글자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 시작했다.                (P81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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