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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l 19. 2024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

영화 <자개단추>  2015년

영화는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칠레에서 물은 가장 긴 경계선이다. 인류의 지성과 역사를 품은 대양, 그 안에는 아픈 식민주의와 지금도 흐르는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칠레 감독 파트리시오 구스만은 칠레의 초자연적인 풍경과 함께 파타고니아 원주민들의 목소리, 칠레에 도착한 첫 번째 영국 선원들의 목소리, 칠레 정치범들의 목소리 등을 담아냈다. 감독은 전작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처럼 현대 칠레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서로 연결하고, 자연 이미지를 이용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구성한다.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다. 내 자신과는 평화롭게 지냈는데, 그저 묵묵히 평화를 누렸건만. 그런데 느닷없이 이 일 저 일 떠올랐다. 그놈의 늙다리 청년 탓이다. 나는 평화로웠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화롭지 않다. 몇 가지는 분명히 밝혀 줘야겠다. 그래서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 덜덜 떨리기는 해도 고상한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기억을 낱낱이 더듬어 보련다. 내 자신을 정다오하해 줄 행동들을 찾아서. 그놈의 늙다리 청년이 내게 일부러 흠집을 내려고 불과 하룻밤 사이에 퍼뜨린 말을 뒤엎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리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게 들리고, 오직 그분만이 침묵을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니까. 그러니 침묵에도 아주 주의해야 한다. 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나의 침묵은 티 하나 없다. 다들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특히 하느님이 분명히 아셨으면 좋겠다. 나머지 사람들이야 무슨 상관이람. 하느님은 상관있으시지만. 내가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가끔씩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선 깜짝 놀란다니까.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잠들고, 내 자신과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 내 이름마저 잊어버리니, 원. 내 이름은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이고 칠레인이다.           (P9-10)     

당시 내 생각이 그랬는지, 아니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 인생이란 우리를 최후의 진실, 유일한 진실로 이끌어 가는 오류의 연속이다.              (P11)   

   

나는 작은 새처럼 천진난만하게 그에게, 문학비평가가 되고 싶고, 그가 열어 놓은 길을 가고 싶고, 책 읽은 감상을 큰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이 세상 제일가는 소망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페어웰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고(손이 너무 무거워서 철제 장갑을 낀 것 같았다) 내 눈을 바라보며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야만인들의 나라에서 그 길은 장미꽃 길이 아닐세. 지주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 문학은 별종이고 읽을 줄 안다는 것은 별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P12-13)     


페어웰이 내게 네루다가 어땠는지 물었다. 어떻다니요, 최고의 시인이죠. 내가 답했다. 잠시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페어웰이 두어 발자국 다가서는 바람에 달빛에 비친 그리스 신 같은 그의 늙은 얼굴이 보였다. 내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페어웰이 내 허리를 잠시 잡았다. 이탈리아 시인들의 밤, 야코포네의 밤, 습작생들의 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자네 이탈리아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 보았나? 나는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신학교 시절 자코미노, 피에트로 그리고 본베신의 시를 언뜻 본 적이 있노라고. 그러자 페어웰의 손이 곡괭이에 두 동강 난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허리에서 철수했다. 미소는 얼굴에서 철수하지 않았지만, 그럼 소르델로는? 무슨 소르델로 말씀이신가요? 음유 시인 말일세. 소르델 혹은 소르델로라고 부르는,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달을 보시게나, 페어웰이 말했다. 나는 달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렇게 말고. 뒤돌아서 쳐다보게. 나는 뒤로 돌아섰다. 등 뒤에서 페어웰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르델로, 어느 소르델로냐고? 베로나와 트레비소에서 각각 리카르도와 에첼리노와 술을 마신 소르델로. 어느 소르델로냐고?, (그때 페어웰의 손이 다시 내 허리를 누르는 거야!) 라몬 베렌게르와 앙주의 샤를 1세와 말을 달리던 이. 소르델로. 그는 겁이 없었다네, 없었다네, 없었다네. 나는 차라리 계속 달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겁이 났던 기억이 난다. 엉덩이에 갖다 댄 페어웰의 손 때문에 겁에 질린 건 아니지만. 그의 손도, 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바람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달이 뜬 밤도, 점잖지 못한 탱고를 연이어 흘리는 축음기도, 네루다와 그의 부인과 애제자의 목소리도 겁나지 않았다. 다른 것 때문이었는데, 그 순간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요, 카르멘 성모여?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소르델로, 어느 소르델로냐고? 등 뒤에서 페어웰이 낭랑하게 반복했다. 단테가 노래한 소르델로, 파운드가 노래한 소르델로, <명예에 대한 교훈>을 쓴 소르델로, 블라카츠의 죽음을 애도한 <비가>를 쓴 소르델로.        (P24-26) 

    

침묵이 흐른다. 늙다리 청년은 대답이 없다. 멀리서 원숭이 떼가 한꺼번에 지랄 발광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모포에서 한 손을 빼내어 강물에 담그고 이를 노 삼아 침대 방향을 힘겹게 튼다. 인도식 천장 선풍기처럼 네 손가락을 움직여서, 침대가 방향을 틀자 밀림, 본류와 지류들, 이제 회색빛에서 탈피한 눈부시게 푸른 하늘, 바람에 휩쓸려 가는 아이들처럼 내달리는 아주 작고 아스라한 구름 두 점만 보인다. 원숭이들의 수다는 사라졌다. 정말 좋군, 정말 조용해. 정말 평화로워. 또 다른 푸른 하늘을 떠올리기 적당한 평화, 바람에 휩쓸려 서쪽에서 동쪽으로 내달리는 또 다른 작은 구름들을 떠올리기 적당한 평화, 그리고 내 영혼에 일어나는 권태. 노란 거리와 푸른 하늘. 그에 순응하여 도심으로 접근하면 거리는 그 공격적인 노란 색깔을 잃어 가고 보도가 가지런히 깔려 있는 회색빛 거리로 변해 간다. 그 회색빛 바닥을 조금만 파내면 노란색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 점이 내 영혼에 낙담과 권태를 불러일으켰다. 낙담이 권태로 변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다들 알고 있지만 노란 거리와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뿌리 깊은 권태의 시절이 분명히 있었고, 그 시절에 시인으로서의 나의 활동이 중단되었다. 아니 시인으로서의 나의 활동이 위태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글쓰기는 계속했지만, 욕설과 저주, 아니 그 이상의 것으로 가득한 시들이라서 날이 새자마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찢어발기고 싶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야 그런 유별남을 영예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는 했지만, 내가 쓴 그 시들의 최종적 의미, 아니 내가 최종적 의미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 나를 하루 종일 당혹감과 충격에 빠뜨렸다. 그리고 그 당혹감과 충격이 권태와 낙담과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태와 낙담은 너무나 컸다. 당혹감과 충격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전반적인 권태와 낙담 상태의 한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상처 속에 상처가 난 것처럼.                 (P71-73) 

    

그리하여 나는 바깥출입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제일 좋은 세상은 아니라도 <가능한 세상>, <실제> 세상에 있다는 막연한 느낌으로 산티아고 공기를 호흡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내 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에는, 내가 쓴 것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시집이지만, 나와 독자들의 자유에 기여하기 위해서 출간했다. 그리고 수업과 강연도 재개하고,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다른 책도 한 권 냈다. 마침내 내가 세계의 공항을 누비는 시절이 도래했다. 세련된 유럽인들과 진중한(게다가 피곤에 절은 듯한) 미국인들 사이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이탈리아와 독일과 프랑스와 영국의 멋쟁이 신사들 사이를 누볐다. 그들 사이를 나는, 신의 존재를 느낀 듯 갑자기 열리는 자동문 때문에 혹은 에어컨 바람 때문에 휘날리는 사제복 차림으로 다녔다. 펄럭이는 내 소박한 사제복을 보면서 모두들 말했다. 저기 세바스티안 신부가 가네, 정열적이고 그 빛나는 칠레인 우루티아 신부 말이야. 세계를 누비고 난 후에는 늘 그렇듯이 칠레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 <빛나는 칠레인>이 아닐 테니까. 신문에 서평과 평론도 계속 썼다. 무심한 독자들이야 문화에 대한 내 차별화된 태도를 거의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리스인과 로마인, 프로방스인, 돌체 스틸 노보로 된 작품들을, 스페인과 프랑스와 영국의 고전을 읽으라고, 휘트먼과 파운드와 엘리엇, 네루다와 보르헤스와 바예호, 위고를 읽으라고, 제발 톨스토이를 읽으라고, 더 많은 문화!, 더 많은 문화! 하고 소리 높여 요구하고 심지어 애걸하는 평론들이었다. 문화의 불모지에서 잘난 척 날뛰고, 때로는 처절한 비명으로 변하는 내 아우성은 내 글의 표면을 집게손가락 끝으로 후벼 팔 줄 아는 사람들, 많지는 않으나 내게는 충분한 그런 사람들에게만 들릴 뿐이었다.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고 계속되었다. 마치 알갱이마다 미세하게 풍경을 그려 넣은 쌀알 목걸이 같은 삶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목걸이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목걸이를 벗어 눈에 가까이 대고 알갱이마다 담겨 있는 풍경을 해독할 충분한 인내심이나 용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쌀알 미니어처가 살쾡이나 독수리의 눈을 요하는 측면도 있고, 그 풍경들이 관(棺), 공동묘지 조감도, 인적없는 도시, 심연과 정상(頂上), 존재의 하찮음과 그 존재의 우스꽝스러운 의지,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하는 사람들, 칠레의 상상력을 순회 항해하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방불케 하는 권태 등의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주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우리는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었고, 권태를 느꼈다. 지식인들이란, 밤이고 낮이고 책만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밤이고 낮이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앞을 못보는 티탄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칠레 문인과 예술가들은 가능하면 쾌적한 장소에서 똑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주로 정치적 성격이라기보다 개인적 성격의 문제들 때문에 많은 친구들이 칠레를 떠나 버렸다는 무시할 수 없는 상황 말고도 통금이 문제였다. 밤 10시에 다 문을 닫아 버리니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다들 알고 있듯이 밤이란 만남을 가지고, 속을 털어놓고,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대화를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거늘.                (P125-127)    

 

그러나 역사, 진정한 역사는 나만 알고 있다. 그 역사는 단순하고 잔인하고 진실해서 우리를 웃게 만들 것이다. 웃다가 죽을 지경으로 몰아 넣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울 줄만 안다. 우리가 신념을 가지고 하는 유일한 일은 우는 일이다.            (P128)     


신의 손길에서 버림받은 이 나라에서는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 교양이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고 사랑받게 처신한다.             (P130)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마리아 카날레스는 남편이 지하실에서 하는 일을 버젓이 알면서도 왜 손님들을 집에 끌어들인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야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지하실에 심문할 객(客)을 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그날 밤 손님 하나가 길을 잃었을 때 그 가련한 남자를 발견하게 된 걸까? 답은 간단했다. 습관은 모든 조심스러움을 무디게 하고 일상은 모든 끔찍함을 누그러뜨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당시 왜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 손님도 겁을 먹었고, 다른 사람들도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겁을 먹지 않았다. 뭔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자애로이 감추어 버린 것을 무엇 때문에 들쑤신단 말인가? 나중에 지미는 미국에서 투옥되었다. 그는 말문을 열었다. 그의 진술은 칠레의 여러 장군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와 증인 특별 보호 프로그램 적용 대상이 되었다. 칠레의 장군들이 마피아 보스라도 되나! 칠레의 장군들이 거북한 증인들을 침묵시키려고 미국 중서부의 작은 마을까지 촉수를 뻗칠 수 있으리라는 건가! 마리아 카날레스는 혼자가 되었다. 모든 친구, 즐겁게 그녀의 문학 모임에 갔던 모든 이가 다 등을 돌렸다.        (P147-148)   

  

이윽고 그녀는 저택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지는 마리아 카날레스의 소유가 아니었는지, 진짜 주인들, 20년 이상 망명생활을 한 유대인들이 그녀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는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돈이 없어서, 재판에서 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계획은 집을 다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짓는 것이었다. 제 집에 얽힌 기억은 하나도 남지 않을 거예요. 마리아 카날레스가 말했다. 나는 측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그게 더 나을 거라고, 아직 젊지 않느냐고, 사법적으로 얽혀 있는 기소는 없지 않느냐고, 다른 곳에서 자식들과 새로 시작하라고. 제 문학 경력은요?, 그녀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필명이나 가명이나 애칭을 사용하시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녀는 내게 모욕을 당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하실을 보고 싶으신가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의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참고 자리에 앉아 몇 번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몇 달 뒤면 이제 보지 못할 텐데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 크기나 뜨듯한 호흡으로 미루어 내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을 부술 겁니다. 지하실을 허물 거예요. 이곳에서 지미의 부하가 스페인인 유네스코 직원을 죽였죠. 이곳에서 지미가 세실리아 산체스 포블레테를 죽였어요. 가끔 아이들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전기가 잠깐씩 나가곤 했어요. 비명 소리는 전혀 들린 적이 없고, 전기만 갑자기 나갔다가 조금 후 다시 들어오곤 했어요. 지하실을 보러 가고 싶으신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전에 조국의 문인들과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이 모이던 응접실을 몇 발자국 걸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가겠습니다. 마리아, 가봐야 해요.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P151-152)     


진실이 차츰차츰 시신처럼 떠오른다. 바닷속 깊은 곳에서 혹은 낭떠러지 밑에서 떠오르는 시신. 떠오르는 늙다리 청년의 검은 윤곽이 보인다. 그의 흐느적거리는 윤곽. 마치 볼모지 혹성의 언덕을 오르는 듯 떠오르는 그의 윤곽. 문득 병마의 그늘 아래 있는 내게 그의 사나운 얼굴, 그의 상냥한 얼굴이 보인다. 나는 묻는다. 내가 바로 늙다리 청년인가? 아무도 듣지 않는데 소리 높여 외치는 늙다리 청년이 나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큰 공포가 아닌가? 그러니까 그 가련한 늙다리 청년이 바로 나란 말인가? 그러자 내가 존경하던 얼굴들, 내가 사랑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경멸하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내가 보호해 준 얼굴들, 내가 공격한 얼굴들, 내가 방어하던 얼굴들, 내가 헛되이 찾고자 한 얼굴들이.

그 후 지랄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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