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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l 29. 2024

데이비드 미첼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2012년

여섯 가지의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태평양 항해길에 오른 선량한 미국인,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방탕한 생활로 곤경에 빠진 귀족 청년, 핵발전소 건설에 숨겨진 거대 음모를 파헤치는 젊은 여기자, 돈 뜯으러 온 불한당들에게 쫓기다가 강제로 요양원에 갇히게 된 늙은 출판업자,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죽는 날까지 착취당하도록 만들어진 복제인간, 모든 문명이 파괴된 머나먼 미래에서 자신의 섬과 가족을 지키려는 한 청년.... 

    

2013년 1월 9일에 개봉한 사이언스 픽션 영화. 주연 배우들은 톰 행크스, 휴고 위빙, 할리 베리, 휴 그랜트, 짐 스터지스, 벤 위쇼, 배두나. 원작 소설처럼 6개의 스토리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2144년의 '네오 서울'을 배경을 펼쳐지는 복제인간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배두나가 캐스팅되었다. 배두나는 이중 5번째 스토리 주인공인 손미-451 역으로 나온다. 6가지 스토리를 관통하는 주제는 같지만 장르가 다 다르다. 첫번째는 역사물, 두번째는 퀴어 멜로 드라마, 세번째는 정치 스릴러, 네번째는 코미디 드라마, 다섯번째는 사이버펑크, 그리고 여섯번째는 말 그대로 혹성탈출 풍의 조난물+포스트-포스트 아포칼립스 SF이다.    

 

[애덤 어윙의 태평양 일지]-19세기 남태평양 뉴질랜드에서 고향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선량한 공증인 애덤 어윙의 이야기(1849년 태평양)

인디언 마을 너머 황향한 바닷가에서, 최근에 생긴 발자국을 우연히 발견했다. 썩어가는 해조류며 바다 코코넛, 대나무 사이를 헤치고 자취를 따라가니, 그 발자국의 주인공인 백인이 나타났다. 그는 깔끔하게 빗은 턱수염과 지나치게 큰 비버 모자를 뽐내며, 바짓단과 선원용 모직 상의를 걷어붙이고 고운 재 같은 모래를 찻숟가락으로 파내고 있었다. 그 일에 얼마나 몰두했던지, 십여 미터 앞까지 가서 인사를 건넸을 때에야 그는 비로소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런던 귀족들을 주 고객으로 삼았던 외과의사 헨리 구스 박사와 안면을 텄다. 그는 영국인이었다. 그러나 그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세상 어딘가에 고립된 둥지나, 너무 멀어서 영국인이 발을 들이지 않을 섬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제껏 본 지도에는 없었다.                 (1권, P11)     


고백하건대, 나는 채찍이 내리칠 때마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매를 맞던 야만인이 축 늘어뜨렸던 고개를 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순간 불가사의하게도 정답게 알은 체를 하는 것이었다! 마치 연극배우가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를 로열 석에서 발견하고 관객 모르게 알은체를 하는 것 같았다. 문신을 한 ‘원주민’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꺼지라는 표시로 연옥으로 된 자기 단검을 슬쩍 내보였다. 나는 죄수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물어보았다. 헨리가 나를 팔로 감쌌다. “갑시다. 애덤. 현명한 사람은 고기를 문 야수를 건드리지 않는 법이오.”                   (1권, P17)     


나는 대학살이 벌어질 동안 왜 백인들이 마오리 족을 막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에반스 씨는 더 이상 자고 있지 않았고, 내가 생각했듯이 귀가 먹지도 않았다. “피에 미쳐 날뛰는 마오리 족 전사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습니까. 어윙 씨?”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피에 굶주린 상어 떼는 보신 적이 있겠지요?”

그렇다고 대답했다.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어가 들끓는 얕은 물에서 송아지가 피를 뚝뚝 흘리며 뒹굴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가에서 떨어져 있어야 할까요, 상어의 턱을 막아야 할까요?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 우리 문앞까지 온 몇몇 사람들은 도와주었지요. 우리 양치기 바나바스가 그런 경우였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날 밤 밖으로 나갔다면 뼈도 못 추렸을 겁니다. 잊지 마세요. 그 당시 채텀 섬에 있던 백인은 쉰 명도 채 안 되었습니다. 마오리 족은 구백 명이나 되었고요. 어윙 씨, 마오리 족은 파커하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를 멸시합니다.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도덕적 가르침을 끌어내야 할까? 주님께서는 평화를 사랑하신다지만, 이웃도 우리와 같은 양심을 갖고 있을 때에만 평화가 중요한 미덕이 된다.          (1권, P30)   

  

사람마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도 다 제각각이다. 가끔씩 불완전한 환영 속에 숨은 진짜 진실이 얼핏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서로 다른 의견이 난무하는 가시투성이 늪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버린다.         (1권, P32)     

헨리는 나에게 경고한다. “흑인한테 약간 호의를 베푸는 것과 그를 죽을 때까지 떠맡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요! 어윙. 인종 간의 우정은 절대 충성스러운 사냥개와 주인 사이의 애정을 뛰어넘을 수 없소.”

밤에 내 주치의와 나는 쉬러 가기 전에 갑판 산책을 즐긴다. 공기가 한결 서늘해져 숨쉬기가 편하다. 누구라도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도깨비불과 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별들의 미시시피 강을 보면 눈이 멀 것이다. 어젯밤에는 선원들이 앞갑판에 모여 미신을 구실 삼아 금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투아 사건’ 이후로 ‘퀼콕 씨’에 대한 경멸은 사라졌다.) 벤트네일이 아무리 음탕한 호색한이라도 도망갈 만큼 상스러운 매음굴에 관한 노래를 열 곡 불렀다. 헨리는 자진해서 열한번째 노래를 불러(부정한 메리 오헤어리에 관한 노래였다) 분위기를 훨씬 더 음란하게 만들었다. 라파엘이 그 다음 순서로 억지로 내몰렸다. 그는 다듬어지지 않았으나 소박하고 진실된 목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오, 셰넌도어, 그대 그리워라

만세, 그대 일렁이는 강이여

오, 셰넌도어, 나 그대를 속이지 않겠네

드넓은 미주리 강을 건너갈 거라네

오, 셰넌도어, 나 그대의 딸을 사랑하네

강 건너 그곳을 사랑하네

배가 마음껏 떠가네, 바람이 불어오네     

돛 줄이 팽팽해지고 시트가 나부끼네

미주리여, 그대 위대한 강이여

우리 중간 돛이 펄럭일 때까지 그 강에 맞서려네

오, 셰넌도어, 나 그대를 결코 떠나지 않으려네

나 죽는 날까지,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리.                   (1권, P66-67)     


"그렇습니다. 선장, 바로 그 말입니다. 자연의 법칙과 진보는 하나로 움직입니다. 우리 세기는 인류의 각 부족들이 자신들의 인종적 특색에 각인된 예언들을 성취하는 모습을 목도할 것입니다. 우월한 종족은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야만인들을 자연의 이치에 따라 적정 숫자까지 줄일 것입니다. 불쾌한 장면들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지성과 용기를 갖춘 사람들은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모든 종족이 신의 문명의 사다리에서 자기 위치를 알고 받아들일 때, 영광스러운 질서가 찾아올 것입니다. 베들레헴 만에 다가오는 여명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습니다.“          (2권, P402-403)   

  

최근에 겪은 모험 덕에 나는 철학자가 되었다. 특히 밤이 되어 시냇물이 서두르지 않고 영겁의 세월에 걸쳐 큰 바위를 갈아 자갈로 만드는 소리만 들려올 때는 더욱 그렇다. 내 생각도 그렇게 흘러간다. 학자들은 역사의 움직임을 인식하고, 이러한 움직임을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공식화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은 반대로 흐른다. 즉 역사는 어떠한 법칙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결과만 있을 뿐이다.

무엇이 결과를 가져오는가?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이다.

무엇이 행동을 가져오는가? 믿음이다.

믿음은 정신과 정신의 거울이라 할 세계의 상(像)이자 전쟁터이다. 인류가 종족들로 이루어진 사다리이고, 대결이 벌어지는 콜로세움이고, 착취이자 짐승 같은 욕망이라고 믿는다면, 이러한 인류가 정말로 출현하고, 역사에 호로스, 보어하브, 구스 같은 인간들이 득세하게 된다. 행운이 계속 우리 편에 있는 한, 돈과 특권을 지니고 행운을 누리는 당신과 나는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이 좀 찔린 들 그게 뭐 대수인가? 우리 종족, 우리 무기, 우리 전통과 유산의 지배를 왜 약화시킨단 말인가? 왜 ‘자연의’(아, 얼마나 교활한 단어인지!) 질서에 맞선단 말인가?

왜냐고? 그 이유는 바로 이렇다. 사정이 좋을 때는 순전히 약육강식이 판치는 세계라도 지탱해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뒤에 처진 자부터 잡아먹히다보면, 결국에는 제일 선두에 선 자가 맨 꼴찌가 되는 날이 온다. 한 개인의 경우를 보자면 이기심은 영혼을 추하게 만든다. 인류 전체로 보자면 이기심은 멸종을 가져온다.

우리 본성 안에 이러한 무질서와 혼돈이 새겨져 있는가?

인류가 약육강식의 세계를 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고아들이 쿠쿠이나무를 함께 타고 놀 듯 다양한 종족과 신념이 평화롭게 이 세상을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지도자들이 정의로워야 하고 폭력을 막아야 하고 권력은 책임을 져야 하고 땅과 바다의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러한 세계가 출현할 것이다. 나는 헛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세계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기는 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먼 길에 부푼 장군이 휘두른 검 하나에 다 날아갈 수도 있다.

잭슨이 물려받을까 두려운 세계가 아니라, 잭슨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계를 만드는데 평생을 바친다는 것, 이야말로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면 노예폐지운동의 대의에 몸을 바칠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의 몸이 된 노예에게 내 생명을 빚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디서부터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2권, P434-435)

[제델헴에서 온 편지]-1930년대 벨기에의 고성에서 펼쳐지는 방탕하지만 천재적인 젊은 작곡가 로버트 프로비셔의 이야기(1936년 캠브리지

그을음에 찌든 빅토리아 역 구석 다방에 숨어서 꿈속의 도자기 가게에서 들은 음악을 악보에 옮겨보려 애썼지만, 한 소절 겨우 옮기고는 끝이었네.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톰 브루어의 품속으로라도 되돌아가련만. 비참한 인간 군상, 이가 다 썩은 노동자들이 내 주위에서 근거 없는 낙관주의에 가득 차 앵무새처럼 떠들어대고 있네. 바카라로 지새웠던 저주받을 하룻밤이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이렇게까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바꿔놓았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나지. 저 상점 점원들. 마부들, 상인들도 보잘것없은 자기네 매트리스 속에 나보다 반 크라운 삼 펜스 정도는 더 꿍쳐두었을 걸세. 명색이 종교계 거물의 아드님이라는 나보다 나을 거란 말일세. 골목길을 둘러보아도 그렇지. 베토벤의 알레그로 삼십이분음표처럼 이리저리 부딪치며 지나가는 가엾은 무명대필 작가들을 보게나. 그들이 두려웠느냐고? 천만에, 내가 저들중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두려웠네. 오줌 눌 요강 하나 없는 신세라면 교육이니 교양이니 재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1권, P73)     


“그럼, 요카스타, 빌렘 부인더러 피노 루주 1908년산을 가져오라고 해요!” 우리는 바커스 신과 뮤즈 여신들에게 건배를 하고, 유니콘의 피처럼 진한 포도주를 마셨다네. 육백여 병의 포도주가 있는 에어스의 지하 저장실은 벨기에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지, 말이 나온 김에 그 얘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야겠네. 그 저장실은 전쟁 중에 독일군 장교들이 제델헴을 본부로 썼는데도 약탈당하지 않고 무사했다네. 가족들이 예테보리로 도피하기 직전 헨드릭의 아버지가 저장실 입구에 가벽을 세워둔 덕분이었지, 서재며 그 밖에 엄청나게 많은 갖가지 보물도 나무상자 속에 잘 봉해져서 그곳에서 전쟁을 났다네(예전에는 수도원의 지하 납골실이었다지). 프러시아인들이 휴전 조약을 맺기 전에 건물을 이 잡듯 뒤졌지만, 지하 저장실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더군.

작업은 매일 점점 나아지고 있네. 에어스와 나는 그의 용태가 그럭저럭 괜찮으면 매일 아침 아홉시에 음악실에서 만난다네. 나는 피아노에 앉고, 에어스는 긴 의자에 앉아 질 나쁜 터키 담배를 피우지. 우리는 작업 절차를 세 가지로 정했다네. ‘수정’--그는 나에게 전날 아침 한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보게 하네, 나는 콧노래를 부르거나, 노래를 하거나, 악기로 연주를 하지. 그러면 에어스가 악보를 고쳐준다네. ‘재구성’은 내가 옛날 악보와 공책, 악곡들을 뒤져 에어스가 희미하게 기억해내고 되살리고 싶어하는 악절이나 카덴차를 찾는 것일세. 개중에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쓰인 것도 있다네. 대단한 조사 작업이지. ‘구성’이 가장 고된 작업이라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십육문음표. B-G, 온음표. A 플랫--네박자로 계속 치게, 아니, 여섯-- 사분음표! F-샵--아니 아니 아니 아니 F-샵이라니까-- 그리고...... B! 타-타티-타티-타!”이런 식으로 계속 쏟아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한다네. (이젠 거장께서 적어도 음표는 불러주신다네.) 아니면, 그가 더 시적인 기분에 잠겨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네. “자, 프로비셔, 클라리넷은 첩이야. 비올라는 묘지의 주목나무고, 클라비코드는 달일세. 그리고...... A 단조 화음인 열여섯번째 소절로 동풍이 불어오는 거야.”              (1권, P98-99)     

에바는 위험한 카드에 돈을 건 거야. 남자는 낯선 사람 귀에까지 들리게 해서 모두를 감동시키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네. “에바, 자신과 친구들이 똑같은 것을 생각해볼 것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시대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란다.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하는데도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몰락한단다.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제국도 똑같은 이유로 무너지는 법이지.” 나는 이 수다쟁이 철학자를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네. 에바 같은 소녀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라고? 에바의 행동 또한 나를 얼떨떨하게 만들었다네. 배주대낮에, 그것도 자기가 사는 도시에서 무슨 짓인가! 정녕 신세를 망치고 싶은가? 그녀도 로제티 같은 자유주의적인 여성 참정권자 부류였단 말인가? 나는 안전하게 거리를 두고 그들 뒤를 밟아 부유한 동네의 한 대저택까지 갔다네. 남자는 거리를 한 번 교활하게 휙 둘러보고 나서 자물쇠에 열쇠를 꽂았네. 나는 재빨리 마구간으로 몸을 숨겼지.              (1권, P125)     


제델헴은 온통 떠들썩하네. 배관이 늙은 숙모들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네.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네. 팔아버지는 제멋대로였지만 그분의 명석함은 아버지 세대가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네. 언젠가 그분께서 나에게 샴의 절을 새긴 애퀴틴트 판화를 보여주셨다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백 년 전 부처의 제자들이 그곳에서 설교를 한 이후로, 도둑, 왕, 폭군, 그 나라의 군주 할 것 없이 모두 그곳을 대리석 탑과 향기로운 수목원, 금박 입힌 돔으로 꾸미고, 호화로운 벽화로 둥근 천장을 장식하고, 불상의 눈에는 에메랄드를 박았다네. 마침내 그 절이 극락정토에 맞먹을 수준이 되면, 그날 인류는 비로소 목적을 성취하고 시간은 종말을 맞는다네.

에어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 절은 바로 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일반 대중, 노예들, 농부들, 보병들은 절에 간 판석의 갈라진 틈에 존재하지. 그들은 하도 무식해서 자기들이 무식하다는 것조차 몰라. 위대한 정치가, 과학자, 예술가들. 무엇보다도 시대를 막론하고 작곡가들은 그렇지 않아. 그들은 문명의 건설자이며 석공이고 사제들이지. 에어스는 문명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해. 내 고용주의 가장 절실한 소망, 아니 유일한 소망은 뾰족탑을 건설해서 진보의 계승자들이 천 년이 지난 후 그 탑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게 하는 거야. “봐, 저기 비비언 에어스다!”

불멸에 대한 이러한 동경이 얼마나 저속한지, 얼마나 허망한지, 얼마니 기만적인지. 작곡가들은 동굴에 그림을 휘갈겨 그리는 자들에 지나지 않아. 음악을 작곡하는 건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 때문일 뿐이야. 그 짓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늑대와 눈보라가 곧 목을 죄어올 테니까 그러는 것뿐이야.                      (1권, P134-135)     

또다시 전쟁이 터진다고 저렇게 확신을 갖고 말하다니?

“또다른 전쟁은 언제나 터집니다. 로버트, 전쟁은 절대 완전히 종식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느냐? 권력을 향한 의지이지요. 인간 본성의 핵심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폭력의 위협, 폭력에 대한 공포 또는 실제 폭력은 이 가공할 의지의 도구일 뿐입니다. 침실, 부엌, 공장, 노동조합, 국경선, 어디에서나 권력에 대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말을 잘 듣고 새겨두세요. 국가는 인간의 본성을 어마어마한 비율로 부풀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증명이 끝난 문제인데, 국가들은 폭력으로 쓰인 법을 보유한 존재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겁니다. 로버트, 전쟁은 인류의 영원한 두 동반자 중 하나랍니다.”                 (2권, P331)   

  

돈트는 조네베커 묘지에서는 어땠느냐고 물었네. 나는 대답하지 않았네. 여기저기 다치고 피투성이가 된 꿩이 내 눈앞을 휙 지나갔네. 돈트에게 전쟁 동안 어디에서 지냈느냐 물어보았지. “아, 아시다시피 사업을 했지요.” 브리쥬에서? 나는 깜짝 놀라 물었네. 독일 군에 점령 치하에서 벨기에인 다이아몬드 상인이 사업을 잘 꾸려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거든. “맙소사, 아닙니다. 요하넷버그에 있었답니다. 처와 함께 전쟁 기간 내내 나가 있었지요.” 나는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다고 찬사를 보냈네. 그는 겸손하게 설명했네. “전쟁은 예고없이 터지지 않는답니다. 처음에는 지평선 위 작은 불꽃들로 시작되지요. 그러다가 전쟁이 다가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처음에 피어오른 연기를 놓치지 않고 떠날 준비를 하지요. 에어스와 요카스타처럼 말입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음 전쟁의 규모가 아주 엄청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디에도 괜찮은 레스토랑이 말짱하게 남지 않을 겁니다.”

또다시 전쟁이 터진다고 저렇게 확신을 갖고 말하다니?

“또다른 전쟁은 언제나 터집니다. 로버트, 전쟁은 절대 완전히 종식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느냐? 권력을 향한 의지이지요. 인간 본성의 핵심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폭력의 위협, 폭력에 대한 공포 또는 실제 폭력은 이 가공할 의지의 도구일 뿐입니다. 침실, 부엌, 공장, 노동조합, 국경선, 어디에서나 권력에 대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내 말을 잘 듣고 새겨두세요. 국가는 인간의 본성을 어마어마한 비율로 부풀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증명이 끝난 문제인데, 국가들은 폭력으로 쓰인 법을 보유한 존재들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겁니다. 로버트, 전쟁은 인류의 영원한 두 동반자 중 하나랍니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뭐냐고 물었네.

“다이아몬드지요.” 피로 얼룩진 앞치마를 두른 도살업자가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가자,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네. 이제 암탉을 주춧돌에서 꾀어오는 것이 문제였네.

국제연명은? 국가들은 전쟁 말고도 당연히 법도 알고 있지 않나? 외교도 있잖은가?

돈트가 대답했네. “오, 외교 말이군요. 외교의 역할은 전쟁이 엎질러놓은 찌꺼기를 닦아내고, 전쟁의 결과를 정당화하고, 강한 나라에는 더 약한 나라에게 자기 뜻을 관철할 수단을 제공하고, 더 강한 상대에게는 함대와 군대와 군대를 아끼게 해주는 것이지요. 직업 외교관과 구제불능의 바보 천치, 여자들이나 외교가 장기적으로 전쟁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지요.”

나는 돈트의 귀류법적 관점에 따르자면 과학이 훨씬 더 끔찍한 전쟁 수단을 고안해내어 마침내 인류의 파괴하는 힘이 창조하는 힘을 넘어서고 우리 문명은 자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논박했네. 돈트는 냉소로 나의 반론을 수긍했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권력을 향한 의지, 우리의 과학, 그리고 우리를 원숭이에서 야만인으로, 근대인으로 끌어올려준 바로 그 능력이 금세기가 끝나기 전에 호모사피엔스를 싹쓸이해버릴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살아서 그 광경을 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당신의 운 좋은 아들이나. 정말 근사한 교향곡의 크레센도를 방불케 하지 않습니까?”                (2권, P330-332)   

     

내가 스물다섯번째 생일을 맞지 못할 줄 알고 있었네. 이번만은 내가 한 발 빨랐지. 실연당한 자들, 울부짖으며 도움을 청하는 자들, 자살을 나쁘게 평하는 감상적인 비극 작가들은 아마추어 지휘자처럼 자살을 향해 성급하게 달려가는 바보 천치들이야. 진짜 자살은 완벽한 통제 아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한발 한발 목표를 향해 다가가는 행위라네. 사람들은 거만하게 지껄이지. “자살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아버지 같은 직업 종교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살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겁한 공격이라 하지. 얼간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허울 좋은 주장을 펼쳐, 비난의 손가락질을 피하기 위해서, 정신력이 강한 척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분노를 발산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만큼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겁함은 자살과 아무 관계가 없어. 자살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거든. 일본인들의 생각이 옳아. 정말로 이기적인 행동은 단지 가족과 친구, 적들이 양심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참을 수 없는 생존을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일세. 무관한 타인들에게 크로테스크한 장면을 목도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망쳐놓는 것이야말로 이기적인 짓이지. 그러니까 총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고 피를 흡수하도록 수건 여러 장을 겹쳐 두꺼운 터번을 만들어 욕조에서 결행할 걸세. 그래야 카펫에 얼룩이 남지 않을 테니까. 어젯밤 지배인의 사무실 문 밑으로 그가 오늘 아침 여덟시에 발견할 수 있도록, 그에게 나의 존재 상태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편지를 넣어놓았네.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하녀가 기절초풍하는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지. 보게나, 난 이렇게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생각한다네.            (2권, P372)  

스크랴빈의 <백열의 시>의 메아리, 스트라빈스키의 잊힌 발자국, 더 광기 어린 드뷔시의 변위음이 뒤섞여 있지만, 실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도 모른다네. 눈을 뜬 채 꾼 꿈이랄까.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더라도 이 작품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걸세. 내가 뻔뻔한 인간이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못하군.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는 내 삶을 송두리째 차지해버렸고, 내 삶 그 자체일세. 이제 나는 다 타버린 불꽃이야. 하지만 적어도 한 번은 확 타올랐다네.

인간들은 음란해. 수십 년을 두고 걸쭉한 즙을 짜내는 튜브 덩어리가 되어 더는 제구실을 못할 때까지 방울방울 떨어지느니, 차라리 음악이 되겠네.             (2권, P374)     


나는 다시 브뤼주에 와서 다시 에바와 사랑에 빠졌다가 나올 것이고, 자네는 이 편지를 다시 읽을 것이고, 태양은 다시 점점 차가워질 것이네. 축음기판처럼 돌아가는 니체랄까. 그것이 끝나면 영겁의 세월 속에서 예전 것이 다시 반복될 걸세.

시간은 이 안식 속으로 침투하지 못해. 우리는 오래도록 죽은 채로 있지는 않는다네. 일단 루거가 나를 보내주면, 눈 깜짝할 새에 다음 차례의 삶이 나에게로 올 걸세. 지금부터 십삼 년 후 우리는 다시 그리샴에서 만날 것이고, 십 년 후면 바로 이 방에서 똑같은 총을 잡고 똑같은 편지를 쓰게 될 것이고, 나의 결심은 내 머리 여럿 달린 육중주처럼 완벽할 것일세. 이런 우아한 필연성이 나를 위로해주네. 

슬픈 일이도다.  

로버트 프로비셔                      (2권, P375)    

 

[반감기첫 번째 루이자 레이 미스터리]-1970년대 미국에서 핵발전소에 숨겨진 거대 음모를 파헤치는 여기자 루이자 레이의 모험담(1973년 샌프란시스코)

루이자 레이는 옆집 발코니에서 쾅 하는 소리를 들었다. “누구세요?” 아무도 없었다. 속이 영 거북한 것이 아무래도 아까 마신 토닉 워터가 올라올 것 같았다. 신선한 바람을 쐴 것이 아니라 화장실에 가야 해. 그러나 도로 파티장을 뚫고 지나갈 여유가 없었다. 어쨌든 시간이 없어. 그녀는 건물 옆쪽 아래로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한 번, 두 번, 기름투성이 치킨이 보였다. 세 번, 그녀는 눈가를 훔쳤다. 네가 지금까지 한 짓 중에서 세 번째로 지저분한 짓이야. 그녀는 입가를 닦아내고 그물창 뒤의 화분에 나머지를 뱉었다. 넌 네 인생을 낭비하고 있어. 루이자는 휴지로 입을 닦고 핸드백에서 박하를 찾았다. 집에 가서 이번만은 네가 써야 할 그 시시껄렁한 삼백 단어나 궁리해. 어쨌거나 사람들은 삽화만 볼 테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죽 바지를 입고, 벗은 상체에 얼룩무늬 조끼를 걸친 남자가 발코니로 들어왔다. 금빛 수염은 공들여 다듬었고, 월장석과 옥으로 만든 앙크 십자가를 목에 둘렀다. “루이자 아! 이야!”

루이자는 혹시 그가, 자기가 토한 냄새를 맡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마약에 취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리처드.”

“별 구경이라도 하려고 나왔나? 좋아. 빅스가 헤로인을 이백사십 그램 가져왔던데. 내가 인터뷰에서 말했던가? 나 요즘은 ‘강가’라는 이름을 써. 마하라지 아자가 그러는데, ‘리처드’는 내 내적 자아와 맞지 않는대.”

“그게 누군데?”                       (1권, P147)     

조지프 네이피어는 생각에 잠겼다. 진짜 기적은 과학자 열두 명 중 열한 명한테 아홉 달에 걸친 조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깡그리 잊게 만든 것이지. 한 스크린에 바로 이 과학자들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무대 위를 오가는 모습이 비쳤다. 그리말디가 말한 대로, 누구든 양심 어딘가에 정지 스위치가 숨어 있는 법이야. 네이피어의 생각은 계속하여 이 집단 기억상실을 이루어낸 면담에서 오갔던 잊지 못할 대화들로 흘러갔다. “프랭클린 박사, 우리끼리 얘기인데, 펜타곤의 변호사들이 반짝반짝한 새 보안법을 한번 제대로 써먹어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는군요. 내부고발자는 이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자리라면 어디든 블랙리스트에 모두 오를 거요.”

수위가 무대 위의 줄에 의자를 한 개 더 갖다놓고 있다.

“선택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모지스 박사. 소련의 기술이 우리를 앞서가는 꼴을 보고 싶다면, 이 보고서를 당신네 사회참여과학자연합에 넘기고 모스크바로 날아가 훈장을 받으시오. 하지만 CIA가 당신한테 이 말을 전해주라더군요. 비행기표는 왕복으로 끊으실 필요 없다고 말이오.”                     (1권, P168)   

  

빌 스모크는 루퍼스 식스스미스가 호텔 방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 분간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욕조 가에 앉아 장갑을 낀 채 주먹을 쥐었다. 어떤 약물, 어떤 종교적 경험도 한 인간을 시체로 바꿔놓는 것만큼 마음을 깊숙이 움직이지는 못하지. 하지만 머리를 써야 해. 훈련과 전문지식이 없으면 전기 의자로 직행하기 십상이지. 킬러는 호주머니에 든 크루거란드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그 동전을 꼭 품에 지니고 다녔다. 스모크는 미신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미신이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행운의 부적을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비극이요,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큼직한 고깃덩이일 뿐이고, 내 고객에게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지. 난 고객 뜻대로 움직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 내가 아니라도 직업별 전화번호부에서 나 다음 순서에 있는 해결사가 해치울 거야. 총 주인이나 총을 만든 사람을 비난해야지. 총을 탓하면 안 되지. 빌 스모크는 자물쇠 소리를 들었다. 숨을 쉬어봐. 미리 먹어둔 약 덕분에 온몸의 감각이 끔찍하리만치 또렷해졌다. 식스스미스가 <제트비행기를 타고 떠나간다네>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침실로 들어갈 때, 살인청부업자는 분명코 자신보다 느리게 뛰는 희생자의 심장 고동 소리까지 느낄 수 있었다.                      (1권, P183-184)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기 전 작곡된 로망스가 스피노자 광장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잃어버린 화음’ 음반 가게와 6번가 가득 흘러넘쳤다. 이 햇볕에 그을린 도시 사람 치고는 창백한 얼굴에 성장을 한 남자가 전화기에 대고 질문을 거듭하고 있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요....... 로버트 프로비셔........ 사실 저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실제 음반은 접해보지 못했지만......... 프로비셔는 신동이었죠. 막 뜨려던 참에 죽었어요...... 좀 봅시다. 희귀 음반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샌프란시스코의 판매상한테서 받은 목록이 있어요...... 프랑크, 피츠로이, 프로비셔...... 어디 보자, 짤막한 주석이라도 없나...... 오백 장만 찍었군요...... 네덜란드에서 전쟁 전이네요....... 이러니 당연히 귀할 수밖에 없지...... 판매상한테 50년대에 아세테이트로 찍은 카피본이 있어요...... 지금은 없어진 프랑스 회사에서 찍었군요.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는 음반을 손에 넣은 사람마다 파멸로 몰아넣는 게 틀림없어요......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한 달 전에는 갖고 있다고 했지만, 음질은 보장할 수 없어요.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데, 값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여기 나와 있군요...... 백이십 달러........ 거기에 우리 수수료를 십 퍼센트 더하면....... 좋습니다. 성함을 불러주세요...... 레이 뭐라고요? 오, 레-이 양이라고요. 죄송합니다 보통은 계약금을 받습니다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정직한 분이실 것 같네요. 이삼 일 걸릴 겁니다. 천만에요.”

점원은 해야 할 일을 메모하고 레코드 바늘을 다시 <흰 소녀여 어찌하여 우는가>가 시작되는 부분 위로 들어 반짝이는 검은 비닐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유대 양치기 소년들이 별빛이 쏟아지는 이베리아 언덕에서 수금을 뜯는 모습을 상상했다.              (1권, P195-196)    

 

한 시간 후 루이자는 헤스터 판 잔트의 개에게 사과 속을 먹이고 있었다.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사방 벽을 채운 판 잔트의 사무실은 그렐시의 어지러운 사무실과는 대조적으로 깔끔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거의 다 마쳤다. “회사와 운동가 간의 갈등은 기면병과 기억의 갈등과도 같아요. 회사 쪽에는 돈과 권력, 영향력이 있어요.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대중의 분노지요. 그 분노가 유카 댐을 막고, 닉슨을 내쫓고, 베트남에서의 잔학 행위를 부분적으로나마 중단시켰어요. 하지만 분노를 만들어내고 다루기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첫째로, 정밀한 조사가 필요해요. 둘째로는 널리 알릴 수 있어야 하고요. 이것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대중의 분노를 어느 정도 폭발시킬 수 있죠. 어느 단계에서는 방해공작이 들어올 수 있어요. 알베르토 그리말디는 위원회를 열고 거짓 정보를 퍼뜨려서 진실을 묻어버리거나, 조사자들을 협박하여 조사를 막을 수 있어요. 교육을 왜곡하고, 방송국을 장악하고, 유명 작가들에게 ‘접대비’를 지불하거나 아예 미디어를 매수해서 알리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 <워싱턴 포스트>뿐 아니라, 모든 언론은 민주주의가 내전을 수행하는 장소지요.”                     (1권, P202-203)     


그리말디는 권력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상의 청중에게 연설을 했다.

“‘권력’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과학자도 있고, 건설업계의 거물이나 여론 주도자도 있죠. 하지만 내 제트기가 라구아르디아에서 이륙해 부에나스예르바스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 정도면 여러분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거물, 선거로 뽑힌 관료, 판사, 이런 분들을 자리에서 떨어뜨리려면 시간이 좀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결국 몰락하는 건 다 마찬가지지요.” 그리말디는 한눈을 파느라 에너지부 장관의 얘기를 놓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괜찮았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이 하인이나 가축처럼 살다 죽는 데 반해,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타인을 지배할 권리를 얻는 것일까요? 그 답은 성 삼위일체에 있습니다. 첫째는 신이 내린 카리스마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이 재능이 꽃을 피우도록 갈고닦아야지요. 인간의 표토가 재능으로 비옥하다 해도, 갈고닦지 않으면 만 개의 씨를 뿌려봤자 단 한 개의 꽃만 필 것입니다.” 그리말디는 페이 리가 골칫덩어리 루이자 레이를 스피로 에그뉴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쪽으로 안내하여 데려가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 기자는 사진보다 실물이 나았다. 그래서 식스스미스를 사로잡았군. 그는 빌 스모크와 눈을 맞추었다. “셋째는 권력욕이지요. 이것은 인간의 다양한 운명 근저에 자기 잡은 수수께끼입니다. 동료 인간들 대다수가 권력을 잃거나, 잘못 다루거나, 혹은 피하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하도록 몰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중독일까요? 부일까요? 생존? 자연의 선택? 저는 이것은 전부 그럴싸한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결과일 뿐,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유일한 답은 이것입니다. ‘왜’란 없다. 우리가 타고난 천성이다. ‘누가’와 ‘무엇이’는 ‘왜’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에너지부 장관이 자기 농담에 자기가 신이 나서 몸을 흔들어댔다. 그리말디는 이를 악물고 낄낄거렸다. “죽이는 재담꾼이로군요, 톰. 정말 죽여준다니까.”               (1권, P211-212)   

  

네이피어는 혀뿌리가 아파왔다. “바로 그때 모든 일이 벌어진 거요. 한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공터 건너편에서 나에게 돌격했소. 나는 그를 쏘았지. 빗나갔소. 내 인생에서 가장 운 좋게 빗나간 총알이었소.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지. 루이자, 내가 당신 아버지를 쏘았다면 당신은 이 자리에 없을 테니까 말이오. 레스터 레이는 달려가면서 내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소. 그리고 트럭 뒤편에서 밑으로 던져져 내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물체를 발로 찼소. 다음 순간 눈이 멀 정도로 밝은 섬광이 나를 덮쳤고, 굉음이 고막을 찢었소.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내 엉덩이를 파고들었소. 나는 반쯤 의식을 잃은 채 들것을 든 사람들이 나를 구급차로 실어 나를 때까지 쓰러진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소.”

루이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권, P261-262)   

  

루이자와 하비에르의 발자국 소리가 층계참에 울렸다. 하비에르는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층들이 나선형의 소라 껍데기 무늬처럼 뒤로 멀어졌다. 하비에르는 현기증이 몰려와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위를 올려다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누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볼 거예요?”

루이자가 가방을 걸머멨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르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요? 그러니까, 누나가 이층에서 공산당 스파이한테 납치당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쳐요. 그러면 누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까지 내려가면 되죠.”

“하지만 스파이가 누구든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을 납치하기로 마음먹고 엘리베이터를 부른다면? 미래를 피하려고 한 일이 오히려 모든 일을 촉발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게 된다면 어떡할 거야?”

“만약 백화점 꼭대기에서 16번가 끝까지 내다보듯이 미래를 볼수 있다면. 그건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에요. 만약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뜻이죠.”

“그래. 하지만 16번가 끝에 있는 것은 네가 한 행동의 결과가 아니야. 네가 가서 건물이든 뭐든 날려버리지 않는 한, 그건 입안자, 권축가, 설계자가 이미 만들어놓은 것일 뿐이지.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이 네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럼 답은 뭐예요?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2권, P265)  

   

“지나ᅟ갼주에 전화드렸는데요. 제 이름은 레이, 루이자 레이에요. 로버트 프로비셔라는 사람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 음반을 찾아줄 수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잠시 잊고 있었어요. 이 음반도 사야겠네요. 꼭 가져야겠어요. 어떤 기분인지 아실 테죠. 이건 무슨 곡인가요?”

점원이 수갑을 채우라는 듯이 손목을 내밀었다. “로버트 프로비셔의 <클라우드 아틀라스 육중주>입니다. 음반이 긁힌 데가 없는지 확인하느라 틀었어요. 아, 거짓말입니다.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어서 틀었지 뭡니까. 딜리어스하고 꼭 같지는 않지요? 왜 음반 회사들이 이런 보석 같은 음반에 돈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이건 범죄행위나 다름없어요. 다행히도 손님의 음반은 갓 찍어낸 듯 흠잡을 데 없는 상태입니다.”

“내가 이 곳을 전에 어디에서 들었더라?”                  (2권, P277)


선글라스를 쓰고 챙 넓은 모자를 쓴 페이 리가 은행 시계와 자기 시계를 맞추어보았다. 오전 한낮의 열기에 에어컨도 맥을 못 추었다. 그녀는 얼굴과 팔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 부채질을 하며 최근의 전개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조 네이피어, 어수룩해 보이지만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영리한 자야. 언제 절을 하고 물러나야 할지를 알지. 빌 스모크가 일을 제대로 처리했다면 지금 곧 루이자 레이가 여기 나타날 것이다. 빌 스모크, 영리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멍청한 작자지. 남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충성스럽지 않아. 돈 때문에 일하지 않는 자들은 더 미천한 인간들을 얼마나 손쉽게 돈으로 살 수 있는지 잊어버린다니까.          (2권, P295)     


다른 우편물은 매건 식스스미스가 루이자의 청에 따라 보낸 항공우편이었다. 꾸러미 속에는 로버트 프로비셔가 친구 루퍼스 식스스미스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 여덟 통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누렇게 변색된 봉투 중 1931년 10월 10일자 소인이 찍힌 봉투를 꺼내어 코에 가까이 갖다 대고 냄새를 들이마셨다. 사십사 년 동안 이 종이 속에 잠들어 있다가 지금 내 폐 속에서, 내 핏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제델헴 성의 분자일까, 로버트 프로비셔의 손에 묻어 있던 분자일까?

그 누가 알랴?                 (2권, P320)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 떨리는 시련]-21세기 초 인생 최고의 대박과 함께 찾아온 위기 때문에 피난처를 찾아 도망치는 티머시 캐번디시의 시련(2012년 런던)

어둠 속에서 잠을 깨니 입이 강력 접착제로 붙인 듯 갑갑했다. 뜬금없이 위대한 기번이 역사를 일컬어 “인류의 범죄와 우행. 불행에 관한 기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한 말이 퍼뜩 떠올랐다. 티머시 캐번디시가 지상에서 보낸 시간도 그 아홉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나는 해묵은 논쟁거리들과 다시 씨름을 하고, 아예 존재한 적도 없었던 논쟁들과도 싸웠다. 높은 창문으로 희미하게 새벽 동이 터올 때까지 담배를 피웠다. 아래턱을 면도했다. 초췌한 얼굴의 얼스터 여인이 아래층에서 타거나 얼었거나 둘 중 하나인 토스트를 일회용 용기에 든 립스틱 같은 색깔의 잼과 소금도 안 든 버터와 함께 내놓았다. 제이크 발로코프스키가 노르망디에 대해 남긴 명언이 생각났다. 먹을 만한 것이 있는 콘월.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어제 중단된 여행에 대해 환불을 받으려니 또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여드름투성이 매표 담당은 킹스크로스 역의 매표원 못지않게 말이 안 통하는 벽창호였다. 회사에서 똑같은 줄기세포로 매표원들을 배양해내는가보다. 혈압이 최고치를 갱신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어제 차표는 무효라는 겁니까? 빌어먹을 기차가 고장난 게 내 잘못이냐고!”              (1권, P271)    

 

그대의 미래를 보라, 젊은 날의 캐번디시여. 네가 회원 가입 신청을 하지 않는다 해도, 노인 족속이 너를 요구할 것이다. 너의 현재는 세상과 보조를 맞추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자꾸만 삐끗하면서 너의 피부는 늘어지고, 뼈는 휘고, 머리카락과 기억은 삭아가고, 피부는 광택을 잃다 못해 실룩거리는 신체기관들과 푸른곰팡이 치즈 같은 혈관들이 비쳐 보일 지경일 것이다. 주말과 학교가 쉬는 날을 피해 낮에나 겨우 밖에 나갈 엄두를 낼 것이다. 말도 너를 버리고 떠나서, 네가 어느 족속에 속한 사람인지를 숨기려 해도 말을 할 때마다 드러나버릴 것이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간선도로에서, 슈퍼마켓 통로에서, 산 자들은 쉴 새 없이 너를 추월할 것이다. 우아한 여인들은 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매장 감시원 역시 너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외판원도 계단용 리프트나 사기성 보험을 팔려는 이 말고는 너를 본척만척할 것이다. 오로지 아기나 고양이, 약물중독자나 네 존재를 알아줄 것이다. 그러니 네게 남은 날을 야금야금 낭비하지 말라. 거울 앞에 서서 자기 몸을 바라보며 보름 동안 빌어먹을 찬장 속에 갇혔던 ET의 모습을 떠올릴 날이 네가 두려워했던 것보다 더 빨리 올 것이다.             (1권, P291-292)     

"캐번디시 씨?“ 얼구이 흐린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른다. 

“어슐러?”

여자가 뚫어져라 쳐다본다. “부인 이름이 어슐러였나요. 캐번디시 씨?” 저 여자 말을 믿으면 안 된다. “아니에요, 저는 저드 부인이예요. 당신은 뇌졸중 발작을 일으켰어요. 캐번디시 씨. 아시겠어요? 가벼운 발작이었어요.”

언제 발작을 일으켰소? 나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애--재--바--” 이런 말이 새어나왔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게 다 뒤죽박죽된 듯 혼란스러운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업워드 박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치료가 엄청난 진전을 보이고 있대요. 우리한테는 전혀 무서운 병이 아니지요!” 발작이라고? 내가 발작을 일으켰다고? 마고 로커도 발작을 일으켰었는데, 마고 로커?

당신들 전부 다 대체 누구야? 기억아, 이 빌어먹을 늙은 놈아.             (2권, P191) 

    

“아, 일단 한번 노인 무리에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이 당신이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답니다.” 베로니카는 등나무 의자에 앉아 모자를 고쳐 썼다. “우리는....... 그러니까 예순이 넘은 사람은 누구든지 말이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두 가지 범죄를 저지르고 있어요. 하나는 민첩성이 떨어진다는 거죠. 우리는 운전도 너무 느리게 하고, 걸음도 너무 느리고, 말도 너무 느려요. 세상은 독재자, 변태, 마약상 등등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주지만, 느려 터진 사람들은 못 참아줘요. 우리의 두 번재 범죄는 보통 사람들에게 메멘토 모리가 된다는 거죠. 세상은 우리가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무 일도 없다고 잡아 뗄 수 있답니다.”

“베로니카의 부모님은 평생을 인텔리겐치아로 복역하셨지요.” 어니는 약간 자부심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면회시간에 여기 온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그 사람들은 늙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어떻게든 무마하려 해요. ‘마음을 젊게 가지면 늙지 않아요!’ 같은 하나마나한 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늘어놓는 이유가 뭐겠어요? 정말로 그 사람들이 속이고 싶어하는 상대가 누구겠어요? 우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요!”

어니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우리 노인네들은 현대의 나병환자라오. 그게 진실이야.”             (2권, P202)       

[손미~451의 오리즌]-디스토피아적인 근미래 한국에서 최하층으로 살아가다 지성을 얻고 변모하는 복제인간 손미의 이야기(2144년 서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역사가들은 미래에 당신의 협조에 감사할 겁니다. 손미~451. 지금은 우리 기록 관리자들이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감사한댔자 그리 대단치는 않겠지만, 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당신 요구를 끝까지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 계란 형태의 은빛 장치는 오리즌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얼굴 모습과 당신의 말을 전부 기록합니다. 작업이 끝나면, 오리즌은 증언부에 저장됩니다. 알아두실 것은 이것이 심문이나 재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관점에서 본 진실입니다. 

나에게는 다른 어떤 관점에서의 진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1권, P297)

     

‘순혈인간들이 아무리 그렇게 믿으려고 안간힘을 써도’라고요?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개인을 노예로 만든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복제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대량생산된 최신형 바퀴 여섯 개짜리 포드 자동차를 갖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모든 페브리컨트들은 같은 줄기세포에서 나왔다 하더라고 눈송이처럼 하나하나 독특합니다. 순혈인간들이 맨눈으로 이 차이를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1권, P304-305) 

     

좀더 일반적인 질문을 하기로 하죠. 그 당시 행복했습니까?

행복이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종업원들은 순혈인간들이 믿고 싶어하듯, 기업 관료제 사회에서 가장 행복한 계층입니다. 하지만 행복이 역경을 극복한다거나 내가 가치 있는 존재이고 뭔가를 달성했다는 감정 상태를 뜻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모든 네아 소 코프로스의 노예 중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입니다.         (1권, P308-309)  

    

나는 망설였습니다. 근무 종료 시간에 레스토랑 안을 돌아다닌 정도로는 별을 빼앗기지 않는다 해도, 미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얘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하지만 유나는 나를 그냥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 번이나 주저하며 무릎을 꿇자, 결국 유나는 나를 억지로 끌어넣었습니다. 문이 내 등 뒤에서 삐걱이며 닫혔습니다. 어둠에서는 먼지와 부패, 오래된 세제 냄새가 났습니다. 유나가 속삭였습니다. “자, 손미야, 이제 넌 비밀 속에 있어.”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갈랐습니다. 잊힌 물건들이 빼곡히 들어찬 좁은 창고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쌓아놓은 의자, 플라스틱 식물, 코트, 모자, 부채, 불에 탄 태양, 수많은 우산 등속이었습니다. 유나의 얼굴, 나의 눈, 빛 때문에 눈이 아팠습니다. “빛이 살아 있어?” 내가 물었습니다.

“빛은 생명이야.” 유나가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탁자 밑에 버려진 회중전등을 발견하고 우리 허브에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이 비밀의 방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1권, P314)     

범석은 순혈인간이 고양이에게 말을 걸 듯 나한테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을 재미있어했습니다. 나는 그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한테 민주주의라는 구멍에 처박은 머리 좀 쳐들라고 말해볼까. 손미야? 아니면, 이봐, 손미야, 내 이를 파란색으로 물들여볼까? 아니면 사파이어는 그냥 지나가는 유행일까? 그는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도 그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고요. 내가 하도 판에 박힌 대답만 되풀이하자, 범석은 나한테 ‘몰라요주인님~451’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1권, P350-351)    

   

메피 교수는 학생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알고 있었습니까?

예, 교수님은 유익한 강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배울 것이 많은’ 강의였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거슬릴 만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학생들은 그렇게 날 경멸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지배자들이 예외 없이 피지배자들이 지식을 얻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나는 감히 ‘반란’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고, 에둘러 말했습니다. “사회계층의 차이가 유전체학이나 타고난 탁월함 또는 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지식의 차이 때문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수님은 그 말은 전체 피라미드가 움직이는 모래 위에 서 있다는 뜻이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나는 이런 암시가 심각한 일탈행위로 단죄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메피 교수는 즐거운 기색이었습니다. “이걸 생각해봐. 패브리컨트들은 순혈인간들의 양심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아. 순혈인간들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속이 메스꺼워져, 그래서 거울을 비난하지.”

나는 순혈인간들이 언제쯤이면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날이 오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메피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건대 그런 날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오지 않아.”

나는 겨울에 넌더리가 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상황이 언제 올까요?”

교수는 골동품 지구본을 빙빙 돌렸습니다. “주안 박사의 강의는 내일도 계속될 거야.”    (1권, P372-373)      

나는 카약의 바닥에서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았어.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르듯 영혼은 기나긴 세월을 가로지른다지. 모양이나 색조나 크기는 다르다 해도, 구름은 여전히 구름이야. 영혼도 마찬가지지. 구름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아침이면 영혼이 어떤 이가 되어 있을지 누가 알겠니? 손미 님만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얼마만 한 크기에 어떤 모양인지 아시겠지. 그래, 구름의 모든 형상을 말이야.”            (2권, P122) 

     

작은 점 하나를 핀셋으로 집어내, 그것을 피부 조직 속에 박고 손가락 위에 피부 세포를 뿌렸습니다. 저렇게 미미해 보이는 점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 고객으로서 권리를 받기도 하고 비참한 노예 이하의 존재를 강요받기도 한다니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름은 표옥균이오.” 이식 전문가가 혜주에게 말하고, 어떤 소니든 문제없이 그의 이력을 다운로드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식 전문가는 나에게 몸을 돌려, 레이저 집게 한 쌍을 만들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레이저는 쇠도 자를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조직에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기 때문에, 약간 간지러운 느낌 정도만 들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 피하 조직에 있는 바코드 차례입니다.” 그는 내 목을 마취제로 닦아내고, 다음 단계는 좀 아프겠지만 칼날의 파장을 줄였으므로 바코드가 공기와 접촉해도 폭발하여 내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혜주가 중얼거렸습니다. 그는 내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이식 전문가가 응수했습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직접 고안한 겁니다.” 그는 특허를 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라면서, 혜주에게 피를 닦아낼 천을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톱날이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내 목을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혜주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막았습니다. 이식 전문가는 핀셋으로 손미~451의 바코드를 집어 보여주면서, 자기가 손수 주의 깊게 제거했다고 말했습니다.                  (2권, P137)     

모든 혁명은 일어나기 전까지는 터무니없는 환상입니다. 일단 일어나면 역사적 필연이 되지요.           (2권, P149)      


우리는 감시 위성이 없는 농장 길을 타고 부산의 북쪽 가장자리로 들어갔습니다. 혜주는 포드를 교외 서면동의 창고 앞에 세웠습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초량 광장 갤러리아까지 갔습니다. 그곳의 프렌차이즈는 왕십리 과수원에 있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패브리컨트 유모들이 자기들이 맡은 고위층 아이들 뒤를 정신없이 쫓아다녔습니다. 커플들이 정처 없이 헤매며 다른 커플들을 힐끔 거렸습니다. 회사가 후원하는 3D들이 서로 더 튀어 보이려고 경쟁했습니다. 더 낡은 뒤편 갤러리아에서 열린 구식 축제에서, 잡상인들이 손바닥만 한 진기한 물건들을 ‘평생의 친구’라며 팔았습니다. 이빨이 없는 악어, 원숭이 머리를 한 병아리, 병 속에 든 고래 따위였습니다. 혜주는 저런 것들은 집에 가져가면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서커스 단원들이 메가폰을 잡고 선전을 했습니다. “머리 둘 달린 정신분열증 환자를 구경하러 오십시오! 마담 마트료시카와 그 뱃속의 임산부 태아를 보십시오!” 네아소 코프로스의 전역에서 몰려온 순혈인간 선원들이 바에 앉아서 포주회사 직원의 감시를 받으며 접대부들과 희롱을 주고받았습니다. 피부가 가죽 같은 희말라야인들, 중국 한족, 피부가 희고 털이 많은 바이칼 호 출신 사람들, 턱수염이 난 우즈베키스탄인, 젓가락 같이 마른 알류트 족, 구릿빛 피부의 베트남 사람과 타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위안소의 AdV에서는 순혈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스러운 쾌락들을 다 만족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혜주가 말했습니다. “서울이 위원들의 조강지처라면 부산은 속옷을 입지 않은 정부인 셈이죠.”            (2권, P166-167)     


네 선언 중 다섯 번째에서 그 법이 어떻게 뒤집혔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족만큼이나 오래된 주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지가 있습니다. 무지는 공포를 낳습니다. 공포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폭력을 낳습니다. 폭력은 점점 더 큰 폭력을 불러오고, 마침내 가장 힘센 자가 뭐든 마음먹은 대로 하는 것이 유일한 법이 됩니다. 주체는 속아 사는 엄청난 노예 종족을 만들어 복종시키다가 깨끗이 절멸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2권, P178-179)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모든 문명이 파괴된 머나먼 미래 하와이에서 살아가는 양치기 자크리의 이야기(2321년 하와이)

이제 문명의 촛불은 다 타서 꺼져버렸는데, 이런 문제가 뭐가 중요하냐고? 글쎄, 나로서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 못하겠구나, 난 그저 내 영혼을 손미 님 손에 맡기고 다음 생에서는 내 영혼이 좋은 곳에서 태어나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할 밖에, 이번 생에서 손미 님이 내 영혼을 구해주었으니까. 네가 불기운에 꾸벅꾸벅 졸다 잠이 들지만 않는다면, 그 사연을 들려주마.                 (2권, P19)     


메로님이 대답했어. 배우려는 정신은 살이 있는 정신입니다. 어떤 종류의 지혜든, 낡은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수준이 높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참된 지혜입니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아부의 말 속에 화살이 숨겨져 있고, 이 교활한 첩자가 우리 무지를 이용해 본심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지. 그래서 난 다시 한번 이런 말로 처음 질문을 더 파고들었어. 하지만 당신네 프레션트 족한테는 더 훌륭하고 막강한 지혜가 있잖아요? 아, 그랬더니 교묘하게 비켜 가더군! 하와이의 부족들보다는 많이 알지만, 대멸망 이전의 옛 부족만은 못하지요. 봤지? 다 털어놓고 대답해주지는 않잖아?                (2권, P32)  

   

갑자기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슬로샤 나루터에서 있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어. 내가 코나 족을 끌고 가는 바람에 아빠가 살해당하고 애덤 형이 노예가 되었다는 얘기는 그때까지 아무한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는데, 왜 내 적에게 그런 숨겨놓았던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나도 모르겠어. 이야기를 다 끝내고서야 나는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그녀에게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나와 내 영혼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이용해서 내 목에 칼을 꽂을 수도 있고, 내 입에 재갈을 물릴 수도 있어요. 수다쟁이 할멈한테 가서 내가 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되지요. 할멈은 당신을 믿을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당신 말이라면 모두 믿고 있고, 또 내 영혼이 악마에게 홀렸다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으니 틀림없이 믿을 거예요. 이제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다면, 제발 지금 캣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나에게 주든가 말해주든가 해주세요. 아무에게도 절대 알리지 않을게요. 당신과 나 사이 일로 묻어두기로 맹세해요.          (2권, P58)     

내가 모르는 이상한 새가 어둠속에서 지저귀었어. 프레션트 족이 대답했지. 옛날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멸망을 불러왔어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옛날 사람들한테는 지혜가 있었잖아요!

그녀의 말이 기억나, 그래요, 옛날 사람들은 지혜로 병, 거리, 씨를 마음대로 다스리고 기적을 일상으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단 한가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허기만은 다스리지 못했어요. 그래요,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허기 말이에요.

더 많은 것을 원했다고요? 옛날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지 않았던가요. 내가 물었지.

오, 더 많은 기구, 더 많은 음식, 더 빠른 속도, 더 긴 수명, 더 편안한 삶, 더 많은 권력, 그런 것이었지요. 이 세상은 크지만 그런 허기를 다 채워줄 만큼 크지는 않았어요. 옛날 사람들은 그 허기 때문에 하늘을 쪼개고, 바다를 들끓게 하고, 미친 원자로 땅을 오염시켰어요. 썩은 씨를 뿌려서 새로운 역병이 생겨나고 아기들이 기형으로 태어났어요. 마침내 슬프게도 순식간에 세상이 야만스러운 족속의 손에 떨어지고 문명의 시대는 끝이 났어요. 고작 여기저기 몇몇 외진 곳곳에 그 흔적이 약간씩 남아서 꺼져가는 빛을 간신히 발하고 있을 뿐.

나는 메로님에게 왜 계곡에서는 한번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

메로님이 대답했어. 계곡 주민들은 인간의 허기가 문명을 낳았지만 또한 그 허기가 문명을 죽이기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먼 지역 부족들과도 같이 지내봐서 알아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믿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 말을 자기들의 삶도 진실도 다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말이라고 받아들인답니다.

그래, 아마도 그녀가 옳았을 거야.               (2권, P65-66)      

야만인은 당장 자기 욕망을 채워요. 배가 고프면 먹어요. 화가 나면 싸우죠. 여자가 필요하면 덮쳐요. 욕망이 그의 주인이에요. 욕망이 죽이라고 명령하면 죽여요. 육식동물처럼 말이에요.

맞아, 코나 족이 바로 그렇지.

문명인한테도 똑같은 욕망이 있지만, 그들은 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요. 먹을 것이 있으면 반만 먹고 반은 씨를 뿌릴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도 굶주리지 않겠지요. 화가 나면 멈춰서 왜 화가 나는지 생각해볼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는 화를 낼 일이 없어지겠지요. 존경받아야 할 누이와 딸이 주변에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형제들의 누이와 딸을 존중할 거예요. 그는 자기 욕망의 주인이에요. 의지가 “하지 마!”라고 명령하면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어. 문명을 갖는 것이 야만인이 되는 것보다 나을까?

잘 들어요, 야만인과 문명인은 부족이나 믿음이나 산의 경계에 따라 나눠지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이 문명과 야만, 두 가지를 동시에 다 갖고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신의 지혜를 갖고 있었지만 재칼 같은 야만성도 동시에 갖고 있었고, 바로 그 야만성이 대멸망을 불러온 거예요. 내가 만나본 야만인 중에는 가슴속에 아름다운 문명인의 마음이 고동치는 이도 있었어요. 어쩌면 코나 족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몰라요. 자기네 부족 전체를 좌우할 만큼 많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언젠가는 말이에요.              (2권,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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