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란> 2001년
구류를 열흘이나 먹이며 판사가 망치를 탕 내리칠 때는 이거 일이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하고 마음을 졸였지만, 결국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형사나 검사의 설교보다는, 자기 없는 사이에 찾아온 계절의 가르침이 더 몸에 사무쳤다.
마흔이 되면 손을 씻어야지, 하긴 이십대가 저물 무렵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었지만, 바텐더 생활에서 발을 뺀 뒤에는 정해진 수순을 밟듯이 심부름 센터로, 포르노 숍과 게임방 전무 노릇으로 그럭저럭 팔 년 세월이 흘렀다. 수순대로 하자면 다음에는 호객꾼이나 바의 매니저가 될 터이지만,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성격이 무던한 대신 배짱이 두둑하지 못한 그에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체질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저물 녘의 가부키 거리는 찜통 더위였다. 고로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자마자 가죽 점퍼부터 벗었다. 사십이라는 나이에 어우리는 중후한 호객꾼으로 변신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오랜 세월 마치 제 살처럼 입고 다니던 점퍼에 바지 차림으로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신뢰할 만한 차림새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 매일 그런 차림으로 살아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싫었지만, 우선 무엇보다 돈을 처바르다시피 해야 할 것이었다. (P52)
“네 마누라께서 돌아가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고로는 한동안 머뭇거렸다.
“잘 생각해봐, 임마, 네 마누라라고, 마누라.”
“......... 아, 그거!”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형사가 네 마누라라고 하는 건 다름 아니라 작년 여름에 잘 아는 야쿠자의 부탁을 받고 호적을 빌려주었던, 돈벌이하러 온 외국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오늘 아침 치바(千葉) 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게 뭐라더라.......”
형사는 미간을 좁히며 수첩을 펼쳐들었다.
“파이란(白蘭)이랬지. 참 기막히게 이쁜 이름 아니냐. 그 파이란이라는 여자가 병으로 죽었다고, 시신을 거두러 와달라더라. 제기랄. 경찰이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 몰라. 이상! 똑똑히 전했으니깐, 지금 당장 가봐.”
형사는 관할서의 전화번호와 담당자 이름을 메모지에 적어 건네더니 주변을 피하듯 등을 돌렸다.
“그게 그러니까...... 제가 가야 하는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위장결혼인지 뭔지 그런 건 난 모르겠다. 아무튼 난 전할 말 다 전했어. 네 똥구멍이야 네놈이 닦아야지, 임마.” (P54)
사다케 흥업(佐竹興業)은 야쿠자 모 대조직의 말단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백오십여 개나 된다는 이 분야 조직 사무실 중에서는 후발 팀이었다.
조직이고 나발이고 없을 정도로 이권이 뒤얽히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균형을 유지해가는 가부키 거리의 조직 판도에 후발 조직이 고개를 들이밀 틈새는 없었다. 그런데도 거품 경기 뒤 끝에 간판을 올린 사다케가 열 명의 젊은 떼거지들을 거느리고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는 것은 본업인 수배(手配) 기술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수배란 말하자면 인재 파견업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인재라는 것은 물론 돈벌이 나온 외국인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고로도 요 몇 년 동안 사다케로부터 일자리를 알선받아 왔을 정도였다. 어찌 되었건 석방 인사도 할 겸 다음 일자리도 부탁할 겸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P55-56)
서류 틈새에서 물빛 봉투가 하나 떨어졌다. 겉봉에 달필의 한자로 ‘다카노 고로 님께’라고 써 있었다.
“아, 깜빡하고 있었다. 고로, 자네 잡혀가던 날 이 편지가 도착했었어. 러브 레터인지 유서인지, 뭐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냐. 여기 함께 넣어두지.”
사다케는 서류를 집어넣은 사각 봉투를 고로 앞에 밀어놓고, 은행띠도 뜯지 않은 돈다발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백만 엔이었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오십은 오늘까지의 수고비야. 나머지 오십은 병원비에 장례비, 좀 부족할지 모르지만 자네가 잘 알아서 써. 알겠지?”
고로가 사토시와 함께 사무실을 나설 때까지 사다케는 두 번 다시 웃지 않았다. (P59)
이력서를 펼쳤다. 1971년생.
“1971년생이면 몇 살이지.”
“그러니까, 제가 78년생이니까....... 스물넷이나 다섯, 그쯤 될 거예요.”
“괴상한 한자투성이라 아무것도 모르겠다. 상하이에서 일본어 학원을 다닌 모양이네, 일본말을 할 줄 알더냐?”
“예, 꽤 잘했어요. 그 정도 하면 치바 촌구석까지 갈 것 없이 신주쿠에서도 돈 벌 수 있었는데, 그치만 몸이 너무 약했어요.”
“지병이 있었어?”
“그치들 대개 병이 있어요. 에이즈는 아니지만, 다들 간장이 안 좋았죠. 바이러스성 간염이란 거요. 내놓고 의사를 찾아갈 처지가 못 되니까 그냥 방치했다가 곧장 간경변으로 발전하고, 젊은 만큼 아차 하는 사이에 죽어버리곤 해요. 젊은 사람이 병 진행이 더 빠르다는 거 아시죠? 그런데도 그치들 이상한 냄새 나는 볶은 약이니 한약 같은 걸 살짝 갖고 와서 그것만 먹으면 나을 거라고 아주 딱 믿어버리지요.”
“너, 잘 안다.”
“그야 장사니까요.”
사토시는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넥타이를 늘이고 제법 자랑스럽게 제 사업의 고생담을 늘어놓았다. 인재 파견업자에게 여자는 제일 귀한 상품이니까 건강 관리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고 했다.
“늦기 전에 의사한테 진찰 받으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병인데 말예요. 그치들, 불법 취업이 들통날까 봐 도통 병원에 안 가려고 떼를 써요. 보험카드가 없으니까 자기들이 지불해야 할 병원비도 만만치 않구요. 배에 물이 차서 손님이 꺼려할 때까지 그냥 참고 있어요. 그러다가 구급차에 실려갈 즈음이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지요.”
“이번에도 그런 경우야?” (P61-62)
“참내 원, 전생에 무슨 죄를 져서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을 당하는 건지 모르겠네. 얼굴을 본 적이 있기를 하나, 이름도 겨우 오늘에야 알았지. 생판 모르는 여자하고 결혼을 하는 거라면 또 이해를 하겠다. 결혼해서 호적에 올린 제 마누라를 모르고 있다니, 게다가 첫 대면이 시체라네. 이건 완전히 코디디다, 코미디.”
말해봐야 말짱 헛것인 넋두리를 해가며 서류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던 고로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야, 사토시, 이게 그 여자야?”
여권에 쓰는 작은 사진이었다.
“기가 막히죠? 데리고 갈 때 제 바로 옆에 앉았었는데 가슴이 다 두근거리더라구요. 실물은 이거하고는 비교도 안 돼요. 언제 꼭 한번 형님들 모르게 놀러 가야지 하고, 사나이 가슴에 굳은 결심을 했을 정도예요.”
칸 파이란, 여자의 이름이 풍기는 아름다운 울림이 음악처럼 고로의 귓전에 되살아났다. (P63)
아슬아슬한 순간에 고로는 자신의 말을 꿀꺽 되삼켰다...... 나는 오십만 엔 받고 내 호적을 팔아먹었다. 그런 여자, 본 적도 없다구. 그 여자는 바다가 뭔지도 모르는 중국 깡촌에서 이 먼 곳까지 와 가지고 야쿠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팔려다니다 빚에 옭매여 결국에는 의사 얼굴 한번 못 보고 죽어버렸다. 이게 변사가 아니라구? 이게 어디가 어떻게 확실하다는 거야. 잘 좀 생각해보란 말야, 이상한 일 아니냐구! (P72)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게 자신의 아내라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고로는 싸늘하게 굳어버린 얼굴을 안고 통곡했다.
간호사가 합장하고 나가자 사토시는 우물쭈물 고로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휴, 미치겠네. 진정하세요. 아저씨, 진짜 왜 이러는 거예요?”
자신이 왜 그러는지 고로도 알 수 없었다. 코흘리개 시절 이후로 울어본 기억이라고는 없는 그였다.
“불쌍한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마음이 쓰리다구요. 그치만, 이렇게 대성통곡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진짜 미치겠네, 아저씨, 혹시 죽은 사람한테 홀딱 반한 거 아니에요?”
알지도 못하는 이국 여자의 죽음이 왜 이렇게 서글픈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해서 견딜 수 없건만, 그 곁에 선 또하나의 자신은 주체할 길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P75)
“이제 됐어요, 고로 씨, 고마워요. 셰셰.”
발 밑에 홍자색 가지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니, 이러면 이제 함께 못 살잖니? 밥도 못 먹고 술도 못 마시고 안아주지도 못하잖니?”
꽃은 속삭이듯이 흔들렸다.
“고마워요. 고로 씨. 저, 이제 괜찮아요. 손님들 다 친절하지만 고로 씨가 제일 친절해요. 나하고 결혼해주었으니까요.”
고로는 꽃잎 위에 후두둑 눈물을 떨구었다. (P78)
“시끄러, 저리 가.”
“근데..... 아저씨,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제정신이다. 나는 아주 말짱해. 너희가 모두 제정신이 아니지.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전부 제정신들이 아니라구.”
어두운 밤을 담은 창에 콤비나트의 불빛이 다가왔다.
고향에 돌아가자. 결국 만나지 못한 동생의 색시를 형은 분명 따뜻하게 맞아주리라.
“돌아가자. 파이란, 다들 기다리니까, 응?”
고로는 그녀가 쓰다 남긴 립스틱으로 유골 상자에 다카노 파이란이라고 썼다.
“나는 당신처럼 한자를 잘 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날 업신여기면 안 돼.”
울면서 웃자니, 마른 뼈들이 무릎 위에서 달그락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