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래쉬> 1996년
제임스 발라드는 20세기 영국 작가 중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1930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진주만 공격 이후 포로수용소에 머물다가 1946년 영국으로 송환됐다. 그 경험을 살려 내놓은 <태양의 제국>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또 그의 대표적인 소설 <크래시>는 파격적인 소재로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으며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6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을 당시, 선정적이고 외설적인 내용으로 다시 한번 논쟁의 화두에 오르기도 했으나,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어제, 본은 자신이 낸 마지막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우리가 알고 지내는 동안 본은 여러 차례 충돌 사고를 자행하며 죽음을 예행 연습해왔건만, 이번엔 유일무이한 진짜 사고였다. 여배우가 탄 리무진을 들이박으려고 질주하던 중, 그의 차는 런던 공항 고가도로의 난간을 넘어 여행객을 잔뜩 실은 공항버스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한 시간쯤 후 경찰 검식관들의 틈을 비집고 현장에 가보니, 단체 관광객의 일그러진 사체들은 태양이 피를 홀린 듯 인조가죽 시트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자기 기사의 팔을 붙들고 번쩍거리는 구급차 라이트 밑에 외로이 서 있었다. 본은 오래전부터 테일러와 같이 죽기를 바랐었다. 내가 본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자, 여배우는 목 언저리로 장갑 낀 손을 갖다댔다.
혹시 테일러는 본의 모습에서 그가 그녀를 위해 구상한 죽음의 공식을 보았을까? 죽기 마지막 몇 주 전까지 본은 오로지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어느 문장원 총재의 헌신적 도움을 받아 기획한 흉터들의 즉위식이었다. 쉐퍼튼에 있는 그의 아파트 벽면은 온통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테일러가 런던에 있는 호텔을 나설 때마다 본이 매일 아침 줌 렌즈를 들고 북향 고속도로 위를 지나가는 육교나 스튜디오에 있는 주차 빌딩 지붕에서 찍은 것들이었다, 나는 내키진 않았지만 본을 위해 회사 복사기로 테일러의 무릎과 손, 허벅지 안쪽 속살과 입술 왼쪽 꼬리 사진을 확대한 다음, 마치 사형 집행 영장을 교부하듯 본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의 아파트에서 본이 테일러의 신체 부위를 성형 수술 교본에 나온 기괴한 흉터 사진과 맞춰 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9-10)
본은 흉터가 발산하는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에 대해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계기판은 피로 물들고 좌석벨트는 똥칠로 범벅이 되고, 뇌 조직이 터져서 엉망이 된 선바이저와 같은 도착된 모습에서 성욕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본은 사고 차량을 보면 언제나 달아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펜더가 복잡하게 찌그러진 기하학적 모습에서, 라디에이터 그릴이 예상치 못하게 뒤틀린 모습에서, 마치 기계 펠라티오라는 정해진 행위를 하듯 계기판이 그로테스크하게 돌출되어 운전자의 가랑이 사이로 뚫고 들어간 모습에서 전율을 느꼈다. 한 인간의 은밀한 시간과 공간은 칼과 젖빛 유리가 거미줄처럼 뒤얽혀 영원히 굳어버렸다. (P15~16)
여자는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난 얼굴을 특이하게 찡그리며 관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표정을 대놓고 지었다. 아무튼 오직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이렇게 몸을 틀어 나를 향해 벌린 두 다리가 만나는 비범한 접합점이었다. 내 가슴 속에 남은 건 그 자세가 지닌 섹슈얼리티라기보다 우리와 관련된 사고가 양식화되고, 그 속에 의례화된 극단적 고통과 폭력이었다. 예전에 딱 한 번 봤던 어느 크리스마스 연극에서처럼 정신지체 소녀가 과장된 피루에트 동작을 하는 것만 같았다. (P29~30)
“완전히 박살 났어. 경찰이 끌고 가서 역 뒤에 있는 보관소에 갖다 놓았어.”
“당신, 가 봤어?”
“경위가 나더러 확인해 달라더라. 그런 차에서 사람이 안 죽고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나 봐.”
아내는 담배를 껐다.
“상대편 남자가 안됐어. 헬런 해밀턴 박사의 남편 말이야.”
나는 문 위에 걸린 시계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아내가 빨리 돌아가면 좋으려만, 죽은 남자를 가짜로 안쓰러워하는 모습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것은 그저 도덕 훈련을 하다가 튀어나온 연습용 변명에 불과했다. 젊은 간호사들의 무뚝뚝한 태도도 바로 그렇게 애석해하는 팬터마임에 불과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죽은 남자를 생각하며 그의 죽음이 그의 아내와 가족에 미칠 영향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던 마지막 순간을 생각했다. 즐거운 가족극에서 튕겨져 나와 아코디언처럼 짜부라진 차에서 사망하기까지 고통과 폭력이 난무하던 광란의 1/1000초. 이 느낌은 죽은 남자와 나의 관계 속에, 내 가슴과 다리의 상처라는 현실 속에, 내 몸과 차량 내장의 잊히지 않을 충격 속에 존재했다. 반면 캐서린의 거짓 슬픔은 그저 양식화된 몸짓에 불과했다. (P45)
그 후 며칠간, 나는 스튜디오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여러 대 빌렸다. 미제 컨버터블에서부터 고성능 스포츠 세단, 이탈리아 꼬마 자동차까지 매번 다양한 차를 골랐다. 두 여자 모두 내가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기를 바랐다. 처음에 캐서린과 레나타를 자극할 의도로 시작한 이 아이러니한 행동은 곧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사고 현장을 잠깐씩 돌아보다 보니 사망한 남자의 망령이 다시금 어른거렸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일로 내가 어떻게 죽게 될지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빌린 차를 몰고 사고 현장까지 갔다 올 때마다 각기 다르게 죽은 사망자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다양한 상처를 입은 모습까지 눈앞에 떠올랐다. (P71)
공항 주차장 옥상에서 본을 본 이후, 나는 시종일관 그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가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치 감시자처럼 내 생활 반경을 맴돌며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웨스턴 애비뉴의 추월 차선을 달리며 룸미러로 고가도로 난간과 고층 주차 건물을 살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미 혼란스러운 추적에 본을 끼워준 셈이었다. 복잡한 고가도로 차선 위에 멈춰 서 있으니, 공항버스의 알루미늄 차체가 하늘을 가렸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꽉 막힌 고속도로 노면을 바라보는 동안, 캐서린은 우리의 첫 번째 저녁 술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이 광활한 금속 풍경을 여는 열쇠가 이렇게 끝없이 변화하는 교통 패턴 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P80)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곧추 세우고 가만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헬런이 부서진 컨버터블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내 차 보닛을 쳐다보면서도 이 차가 그녀의 남편을 죽인 바로 그 차라는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뻥 뚫린 앞유리를 통해 말라붙은 남편의 피딱지로 범벅돼 일그러진 운전석에 앉은 나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강렬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한 손을 슬그머니 한 쪽 뺨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부서진 내 차를 살폈다. 세게 들이받힌 라디에이터 그릴에서부터 내가 쥐고 있는 높게 솟은 핸들까지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그러더니 여러 증상을 앓아 고생하는 환자를 참을성 있게 검진하는 의사의 시선으로 나를 재빨리 살폈다.
그녀는 으스러진 트럭 쪽으로 걸어갔다. 또 다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특이한 자태를 한 여자의 다리였다. 마치 줄지어 늘어서 있는 부서진 차들에 내보이듯, 넓은 치골이 자리 잡은 허벅지 안쪽이 바깥쪽으로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경찰서 보관소에 들르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우리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반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다른 감정들이 덧씌워졌다. 측은함, 성욕, 심지어 나 말고 그녀가 알았던 죽은 남자에 대해 알 수 없는 질투심까지 느껴졌다.
내가 차 앞에 오일로 얼룩진 아스팔트 위에 서 있자, 헬렌이 되돌아왔다. 그녀는 파손된 차들을 가리켰다.
“이런 일을 겪고도 사람들이 차를 쳐다나 볼 수 있을까요? 운전은 고사하고요.”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P85-86)
20분 후, 나는 본의 링컨 뒤에 내 차를 세워 놓고 앉아 있었다. 뇌진탕을 일으킨 시그레이브가 구조되어 주차장을 가로질러갔다. 사고 재연은 실패로 끝났다. 근시가 있는 투우사가 황소의 뿔을 향해 곧장 돌진하듯, 시그레이브의 차는 미끄러지는 트럭에 들이받힌 후 완충 장치에
쑤셔 박혔다. 시그레이브는 50미터 정도 트럭에 끌려가다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승용차에 세게 들이받혔다. 무방비 상태에서 벌어진 충돌 사고로 나와 헬런은 물론, 관중 전체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본은 동요하지 않았다. 놀란 스턴트맨들이 차에서 내려 시그레이브를 운전석에서 끌어내자, 그제야 본은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더니 손을 휘저으며 명령하듯 헬런을 불러냈다. 나는 까맣게 탄 재 사이로 그녀를 뒤따라갔지만, 본은 본체만체하고 헬런을 호위하며 기계공과 측극이 모여 있는 틈을 뚫고 들어갔다. (P106)
다음 사진은 여자가 차에서 구조되는 장면이었다. 흰 스커트에 피가 홍건했다. 여자는 피바다가 된 운전석에서 그녀를 끌어내는 소방관의 팔에 멍하니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양의 피가 담긴 세례반에 세례를 받는 미국 남부의 정신 나간 광신도처럼 보였다. 모자를 벗은 경찰관은 들것의 한쪽 자루를 손에 쥐고, 사각턱으로 그녀의 왼쪽 허벅지 한쪽을 밀어젖혔다. 그 사이로 거무스름한 여자의 사타구니가 보였다.
몇 장을 더 넘기자 폐차장 마당에 놓인 폐차를 찍은 사진도 있었고, 운전석과 조수석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확대해 놓은 사진도 보였다. 본은 이런 사진들 속에서 등장했다. 그가 바이런 같은 포즈로 차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꽉 끼는 청바지를 입어서 큼지막한 성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P121)
연속으로 찍은 사진은 나의 기록용이라기보다 본의 기록용으로, 피사체보다는 사진사의 배경과 그가 하는 일을 훨씬 더 많이 보여주었다. 내가 누워 있던 병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줌 렌즈로 찍은 사진과 당시 내가 붕대를 휘감고 있던 사진을 제외하고 사진의 배경은 모두 자동차였다. 차는 공항 주변의 고속도로를 따라 달렸고, 정체된 고가도로 위에서 있었으며, 막다른 골목과 공원의 으슥한 길에 주차되어 있었다. 본은 경찰서 보관소에서부터 공항 로비까지, 고층 주차 건물에서부터 헬런의 집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이렇게 거칠게 인화된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내가 자동차 안이나 혹은 그 근처에서 내 인생을 전부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본은 나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보인 건 마흔 살먹은 TV광고 프로듀서의 행동이 아니라, 익명의 개인과 차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 작용이었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셀룰로스 페인트가 발린 차체와 인조가죽 시트를 가리고 있는 그의 몸의 변천사와 계기판 다이얼을 배경으로 윤곽을 드러낸 그의 얼굴에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이런 기록용 사진에서의 중심 테마는 내가 부상에서 회복되던 시기에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맺은 관계였다. 자동차와 테크놀러지라는 배경이 다리를 놓아준 아내, 레나타, 헬런과 맺은 성관계였다. 내가 흉터가 난 몸뚱이를 질질 끌고 사고를 당한 이후 처음으로 성관계를 갖자, 본은 나의 불안한 성관계를 생생한 사진 속에 이렇게 고착시켜 놓았다. (P124-125)
“저거 보여, 본? 저기 고속으로 연쇄 충돌 사고를 낸 차 보이나? 굉장히 멋진 전복 사고를 낸 차도 있고, 보기 드물게 정면충돌한 차도 있지. 난 저런 걸 꿈꾸고 있어. 당신도 온통 저런 걸 꿈꾸고 있잖아, 본.” (P126~127)
본은 손에 든 전단 꾸러미를 툭툭 건드리며 내게 관심을 돌렸다.
“가서 가지고 올 수 있을 만큼 다 들고 오게. 발라드. 이거 다 저 사람들한테 나눠줄 거야. ‘운전자 사출에 관한 메커니즘’, ‘충돌 충격에서 인간 얼굴의 내구력’에 관한 내용이지.”
엔지니어가 마지막으로 테스트 차에서 손을 떼자, 본은 이제 감상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도로 연구 시험소에서 하는 교통사고 시뮬레이션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이지. 이런 실험을 이용한다면 맨스필드와 카뮈가 당한 교통사고도 재연할 수 있을 거야. 아마 케네디 사고도 할 수 있겠지.”
“사고를 줄이려고 저러는 거지. 늘리려고 저러는 게 아니죠.”
“그건 관점의 차이겠지.”
해설자는 관람객에게 정숙을 요구했다. 충돌 실험이 이제 곧 벌어질 것이다. 본은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몽롱한 상태에서 쌍안경을 들고 뭔가를 훔쳐보며 변태짓을 하는 환자처럼 굴기 시작했다. (P152-153)
그는 자동차에 기내고 있는 테일러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연필통에서 연필을 꺼내 여배우의 겨드랑이와 젖가슴골에 음영을 칠했다. 그는 얼이 빠진 상태로 사진을 보느라 재떨이 한쪽 끝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축축한 냄새가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항문 점액과 엔진 냉각수가 뒤섞인 냄새였다. 그는 연필로 사진에 굵은 홈을 파기 시작했다. 점점 거칠게 손을 놀려 음영진 부분을 후벼 파더니 연필심이 부러지는 손간, 마침내 마분지 뒷면까지 구멍이 뚫렸다. 그는 자동차 내장 이곳저곳에 표시했고, 핸들 조립 부위와 계기판의 불쑥 튀어나온 부위를 찔러댔다.
“본!”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의 몸은 오르가슴을 향해 떨리고 있었다. (P182)
반면, 본은 이 사고에 관심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카메라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인도교를 따라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무작정 걸어갔다. 캐서린은 그가 마지막 여섯 계단을 남기고 훌쩍 뛰어 넘어 지친 경찰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본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내 시선은 피하면서 내 팔을 꽉 붙들고는 흉터가 있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런 모습에 놀라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나는 우리 셋은 이미 이 충돌 사고를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 삶 속에 원기가 도는 가능성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몸과 본의 몸에 난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흉터는 우리가 첫 번째 성교를 행할 때 손이 놓일 위치이며, 우리 뒤에서 벌어진 충돌 사고에서 생존한 이들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어루만질 위치이자, 그들 미래의 성적 가능성을 위한 접촉 지점이었다. (P192)
저 멀리서 비추는 헤드라이트가 창문 위로 쏟아져 내린 비눗물에 굴절되어 들어와, 반짝거리는 빛으로 두 사람의 몸을 에워쌌다. 미래에서 온 반금속체 인간 두 명이 크롬으로 된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철골조에 매달린 엔진이 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롤러가 링컨의 보닛 위를 오가면서 앞유리를 으르렁대며 문지르자, 비눗물은 거품 소용돌이로 변신했다. 수천 개의 거품 방울이 창문에서 터졌다. 롤러가 차 지붕과 차 문을 두드리고, 본은 시트에서 엉덩이가 거의 떨어질 정도로 자신의 골반을 위로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캐서린은 어색한 손짓으로 본의 음경 위에 자신의 외음부를 고정시켰다. 롤러가 다시 차체를 어루만지며 미끄러져 내려가자, 아내와 본도 동시에 앞뒤로 요동쳤다. 본은 둘이서 하나의 구체球體를 만들려는 듯, 손으로 여자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가 절정에 달하자, 캐서린의 헐떡거리는 신음소리는 세차장 기계 소음에 묻히고 말았다. (P216~217)
나를 감싸고 있는 자동차 내장은 마술사가 휴식을 취하는 정자처럼 빛났다. 차 내부에서 빛나는 광채는 내가 눈을 돌릴 때마다 어두워지기도 하고 밝아지기도 했다. 계기판 다이얼은 빛을 내는 바늘과 숫자로 내 피부에 생명력을 주었다. 계기판 차양, 대시보드 패널의 빗면, 라디오와 재떨이의 철재 문턱이 제단 뒤에 걸린 그림처럼 내 주위에서 빛났다. 마치 가장 똑똑한 기계가 양식화된 포옹을 하듯 자동차 내장의 기하학적 모습이 내 몸으로 다가왔다.
폐차장에는 버려진 차들이 방패처럼 늘어서 마냥 변하는 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시간이란 바람이 가로질러 불어오듯, 자동차의 윤곽이 바뀌었다. 길게 늘어선 녹슨 크롬이 뜨겁게 달궈진 공기 속으로 새어 나갔다. 멀쩡한 셀룰로스 페인트 도장면은 폐차장을 뒤덮은 왕관 모양의 빛 속에 피를 줄줄 흘렸다. 삐쭉 솟은 찌그러진 철, 삼각형으로 잘게 부서져 내린 유리 파편은 이 초라한 풀밭에 버려져 몇 년간 읽지 않고 내버려둔 신호이자, 본과 내가 서로 팔을 두른 채 망막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전기 폭풍의 중심에 앉아 있을 때 해석한 암호였다.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