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비션 온 스크린: 세잔-포트레이츠 오브 어 라이프> 2018년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은 실제로 졸라가 교류했던 파리의 화가들의 모습이 구현되어 있다. 여기서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목로주점 제르베즈의 아들)는 폴 세잔으로 대변되는 인물로 그림에 몰두해 있는 화가이다. 폴 세잔과 에밀 졸라는 중학교 시절 단짝이었고, 예술가는 공통된 길을 걸었기 때문에 서로의 열정에 공감과 찬사를 보내며 자랐다. 하지만 세잔은 졸라의 소설 <작품>으로 인해 졸라와 절교하였다. 세잔은 자신을 모델로 한 이 소설의 주인공 ‘클로드’가 자살한다는 것을 보고, 졸라가 자신을 클로드와 같은 인생의 실패자로 여기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젊은 아가씨는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더운 온실의 열기 때문에 이불을 걷어내고 있었다. 잠 못 이루는 고통스러운 밤을 지낸 뒤, 그녀는 이제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알몸 위에는 그림자 하나 어른거리지 않았다. 더위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동안 속옷의 어깨끈이 풀어진 듯, 왼쪽 소매가 흘러내려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고운 비단결 같은 황금빛 살결, 그야말로 봄의 육체였다. 수액으로 부풀어 올라 빳빳해진 두 개의 작은 젖무덤 위에는 옅은 빛깔의 장밋빛 봉오리 두 개가 봉긋 솟아 있었다. 오른팔을 목뒤로 젖히고 잠이 덜 깬 얼굴을 뒤로 돌린 채, 방치된 그녀의 경탄할 만한 곡선 안에서 젖가슴이 아무런 조심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반면, 풀어진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외투처럼 육체를 감싸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놀라워라........”
그것은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위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포즈마저도 같았다. 약간은 마르고 어린 아이처럼 호리호리한, 그러면서도 그토록 신선하고 유연한 젊음을 지닌 육체! 게다가 이미 성숙한 가슴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어젯밤에는 저 가슴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기에 내가 눈치 채지 못했을까? 이것은 정말 대단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클로드는 종종 걸음으로 단숨에 파스텔 상자와 커다란 종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낮은 의자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두 무릎 위에 마분지를 펼쳐 놓고 깊은 행복감에 잠겨 그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념들과 육체적 호기심, 격렬하게 싸우던 욕망은 결국 예술가로서의 경탄, 그리고 아름다운 색조와 잘 맞물린 육체에 대한 열광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미 젊은 아가씨의 존재를 잊은 채, 은은한 호박 빛 어깨를 환히 비추는 눈같이 흰 가슴에 매혹되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의 겸손이 자연을 앞에 대하고 있는 그를 위축시켰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매우 신중하고 주의 깊은, 공손한 어린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한 15분 정도를 계속 바라보다가 이따금씩 눈을 깜빡이며 멈추곤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재빨리 하던 일을 계속했다. 행여 그녀가 깨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P21-22)
“피에르!” 그가 소리쳤다. “벌써 왔어?”
피에르 상도즈는 스물두 살의 청년으로 클로드와는 어릴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 짙은 갈색 머리에 둥글고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 각진 코에 온화한 눈매를 지닌 그는 표정에 생기가 있었고 턱수염이 목 언저리를 따라 나고 있었다.
“점심을 좀 일찍 먹었거든.” 그는 대답했다. “그래서 자네에게 포즈를 취해 주려고..... 아! 맙소사! 벌써 시작을 했군!”
그러고는 그림 앞에 가 서더니 대뜸 말했다.
“아니! 자네, 여자를 바꾸었네.”
긴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꼼짝 않고 서서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5미터, 3미터 크기의 캔버스로 전체적으로 색이 칠해져 있었으나 몇몇 부분들은 밑그림을 겨우 면한 정도였다. 이 밑그림은 한눈에 보아도 난폭하기 짝이 없었고 색채는 타오르듯 생생했다. 담장처럼 빽빽하게 둘러쳐진 초록빛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만 왼편 숲 속으로 나 있는 어두운 오솔길은 저 멀리 한 점의 빛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유월의 초목들 사이로 펼쳐진 풀밭 위에, 벌거벗은 한 여인이 한쪽 팔을 베고 가슴을 부풀리며 누워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 어디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눈꺼풀을 내리고 있었다. 금빛 햇살이 그녀의 벗은 몸을 가득 적시고 있었고, 그림 뒤편에는 갈색과 금발 머리의 키 작은 두 여인이 역시 벗은 채로 웃으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초록빛 나뭇잎들 가운데서 두 여인의 살결이 아름답게 두드러졌다. 그런데 화가는 전경에 검은 색의 대비를 넣을 필요를 느끼고 그 자리에 단순히 벨벳 윗도리를 입은 신사를 그려 넣었다. 신사는 등을 돌리고 앉아 풀을 짚고 왼손을 내보일 뿐이었다. (P45-46)
클로드가 파리를 떠나 자기가 태어난 프로방스 지방의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은 아홉 살 때였다. 세탁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부지런한 여자였다. 하지만 게으름뱅이였던 아버지가 그녀를 버렸고, 그 후 고운 피부와 금발 머리를 가진 그녀에게 반해 사랑에 빠진 사람 좋은 노동자와 재혼했다. 그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늘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때 한 노신사가 나타나 클로드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클로드를 학교에 보내 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클로드의 부모는 기꺼이 그것을 수락했다. 본래 마음씨는 좋았지만 괴짜였던 이 노인은 그림 애호가로, 클로드가 어린 시절 서투르게 그린 인물화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설득에 감화된 클로드는 7년 동안 프랑스 남부에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기숙사에 있다가 나중에는 후견인의 집에서 통학했다. 어느 날 아침, 클로드는 침대 위에 쓰러진 급사한 노인을 발견했다. 노인은 죽기 전에 1천 프랑의 연금을 이 젊은이에게 양도하며, 클로드가 스물다섯 살이 되는 해에 그 재산을 처분할 권리를 준다는 유서를 주었다. 이미 화가가 될 꿈에 불타고 있었던 그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러 볼 시도도 하지 않고 즉시 학교를 나와 친구 상도즈가 앞서 와 있던 파리로 달려왔다. (P48-49)
“.... 모두가 싸구려 초상화나 그리는 환쟁이들뿐이야. 명성을 얻기 위해 무식한 대중에게 아부하는 바보들이거나 교활한 놈들 뿐이지! 부르주아들의 뺨을 신나게 한번 갈겨 줄 녀석 하나 없으니!....... 자! 선조인 앵그르를 보자. 자네는 그가 달걀 흰자위 같이 끈끈한 그림으로 나를 얼마나 역겹게 하는지 잘 알고 있지? 그건 사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정말 굉장한 인물이며 훌륭하다는 점을 인정하네. 그래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이룰 만한 배짱을 지녔기 때문이야. 그리고 기막한 그림 하나를 그렸어. 그래서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바보까지도 앵그르를 아는 것처럼 믿고 있지..... 앵그르 후에, 자네도 알다시피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이 두 사람밖에 없어. 그 나머지는 모두 사기꾼들이야. 그렇지 않아? 들라크루아는 나이는 들었지만 위풍당당한 낭만파의 거장이야! 그는 그야말로 색채를 불타오르게 만든 마술사였어. 거기에 넘쳐흐르는 힘은 어떻고! 만약 그를 가만히 놓아두었더라면 파리의 벽 전부를 칠했을 거야. 그의 팔레트는 언제나 펄펄 끓었지. 나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환상일 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어. 그래도 할 수 없지! 파리 미술학교를 불태우기 위해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에 쿠르베가 등장했지. 그는 견실한 노동자이며, 세기의 가장 진실한 화가였어. 그는 전적으로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어느 얼간이 한 명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어. 그들은 울부짖었지. 아무렴! 그들은 ‘신성 모독’과 ‘사실주의’를 큰 소리로 외쳐 댔어. 비록 쿠르베의 사실주의가 주제에만 국한된 것인데도 말이야. 아직까지도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옛 스승들의 시각과 다르지 않아. 그리고 기법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작품들의 기법을 답습하고 반복하고 있을 뿐이야. 들라크루아, 쿠르베 이 두 사람 모두는 자기들이 나타나야 할 적시에 나타나 앞을 향해 나아갔어. 그런데 이제는, 아! 이제는........”
그는 입을 다물고, 효과를 판단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 잠시 동안 그림이 주는 느낌을 음미했다. 그리고 다시 하던 말을 계속했다.
“이제는 다른 것이 필요해..... 아! 그게 뭐냐고?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만약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아주 강한 사람이 되겠지. 그래 어쩌면 그 일을 할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몰라. 그러나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위대한 낭만주의 장식화가 들라크루아가 흔들리고 무너진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또 쿠르베의 검은색 그림들도 벌써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아틀리에의 갑갑함과 곰팡이의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어. 자네도 동감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필요한 것은 태양인 것 같아. 실내가 아닌 자연광을 받고 있는 대기. 밝고 젊은 그림, 진짜 빛 속에서 움직이는 사물과 사람들이 필요할지도 몰라.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것이 우리가 그려야 할 그림일 거야. 우리 시대에 우리의 눈이 바라보고 만들어 내야 하는 그림은 그런 것이어야 할 거야.” (P65-67)
오후 네 시였다. 아름다운 하루가 태양의 찬란한 가루 속에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마들렌 교회가, 또 왼쪽으로는 의사당까지 건물들의 선이 저 멀리까지 줄지어 서 있어 하늘에 닿을 듯이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튈르리 공원은 키가 큰 마로니에들의 둥근 꼭대기로 겹겹이 둘러져 있었다. 또한 양쪽 인도의 두 녹색 경계선 사이에 샹젤리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아득히 높이 올라가고 있었고, 그 끝에 무한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개선문이 보였다. 두 줄기 강물과도 같은 사람들의 물결과 수레들의 생생한 소용돌이, 그리고 멀어지는 마차들의 파도가 거기에 흐르고 있었다. 프레임의 반사와 램프 유리의 반짝임이 흰 거품이 이는 듯했다. 저 아래에, 거대한 인도와 호수처럼 넓은 차도의 끝에 있는 광장은 사방에서 오가는 수레바퀴들의 번쩍임과 검은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끊임없는 물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분수에서는 이러한 삶의 열기를 식혀 주는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클로드는 전율하며 외쳤다.
“아! 파리....... 이건 우리 꺼야. 이걸 잡기만 하면 돼.”
네 사람 모두 열정에 몸을 떨었고,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이 길의 꼭대기에 서서 이미 영광을 들이마신게 아닐까? 파리는 바로 그들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차지하고 싶었다. (P119)
아! 매주 그들은 산책을 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석양의 경치를 감상하였던가! 부둣가에서 맛볼 수 있는 생동하는 즐거움, 즉 센강에서 펼쳐지는 삶의 모습, 물의 흐름에 따라 춤추는 빛의 반사, 온실처럼 따뜻한 가게의 아늑함, 곡물 가게에 꽂아 놓은 꽃병, 또 귀가 따가운 새 가게의 새장 등, 강가를 영원히 늙지 않는 도시로 만들어 주는 이 모든 소리와 색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태양은 줄곧 그들을 따라왔다. 그들이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석양의 이글거리는 불꽃은 집들의 어두운 선 위로 그들의 왼쪽을 붉게 물들여 주었다. 그들이 노트르담교를 지나치면서 넓은 강물을 눈앞에 대하자마자, 마치 태양은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 멀리 지붕들 위로 곡선을 그리며 차차 기울기 시작했다. 몇 세기를 거쳐 존속해 온 어떤 울창한 숲에서도, 또 어떤 산위의 길이나 어떤 들판의 초원 위에서도 학사원의 둥근 지붕 뒤에서 지는 해보다 더 장엄한 광경을 보여 줄 수는 절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영광 안에 잠드는 파리였다. 그들이 산책을 하는 도중 불길은 곳곳에서 그 모습을 달리하였는데, 새로 활활 타오르는 큰불이 이 영광스러운 불꽃의 왕관에다 새로운 불씨를 더해 주곤 하였다. 소나기가 막 지나가고 난 어느 날 저녁, 비 온 뒤에 다시 떠오른 태양은 구름 전체에 불을 붙여 놓았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파란색과 분홍색의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불타는 물방울밖에는 없었다. 또한 맑은 날에는 불의 공같이 생긴 태양이 고요한 사파이어 빛깔의 호수 안으로 장엄하게 내려왔다. 한순간 학사원의 검은 둥근 지붕은 마치 이지러지는 달처럼 한 귀퉁이가 잘려 나갔다. 이어 불덩이는 보랏빛을 띤 채 핏빛으로 변한 호수 깊숙이 풍덩 빠졌다. 2월이 되어 태양은 커브를 늘여 곧장 센강 속에 떨어졌는데, 센강은 빨갛게 달구어진 쇠의 접근으로 수평선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효과, 가장 멋있는 장면의 변화는 흐린 저녁에만 연출되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산호초에 부딪히는 유황빛의 바다를 보기도 했고, 궁전들이나 탑들, 또는 흘러내리는 용암의 격류에 무너져 내리는 불타오르는 건축물의 더미를 보기는 했다. 어떤 때는 이미 사라져 수증기의 장막 뒤에서 잠들었던 태양이 갑자기 이 성채를 너무도 강한 빛으로 비치는 바람에 섬광 같은 것이 마치 황금 화살이 날아가는 것같이 하늘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눈에 띌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다. 이어 석양이 찾아왔고, 그들은 각자 눈 안에 마지막 장관을 담은 채 헤어졌다. 그들은 이 당당한 파리가 그들이 아무리 맛보아도 다 맛볼 수 없는 기쁨의 공모자와 같이 생각되어 오래된 돌길을 함께 걷는 산책을 언제까지나 계속했다. (P172-173)
“자네들 저 위에서 내려오는 길인가?”
“아닙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클로드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낙선전 이야기를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도 학사원 회원이기는 하지만 동료들과는 달리 이 모든 일을 매우 재미있어했다. 기존 화가들에 대한 변함없는 불만 속에 <탕부르> 같은 시시한 신문이 주도한 캠페인이 주동이 된 개혁에 대한 빗발치는 항의와 요구가 드디어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황제가 낙선전을 제안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침묵하는 몽상가에 의한 예술의 쿠데타라고나 할까. 이 사건은 마치 개구리가 들끓는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가 일으키는 효과처럼 모든 사람을 당황시켰고 큰 소동이 벌어졌다.
“아니,” 그는 말을 계속했다. “자네들은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분개하는지 모를 걸세! 게다가 나를 어찌나 경계한다고. 내가 있을 땐 입을 다물고 말도 하지 않는다네! 사실 이 모든 분노는 그 끔찍한 사실주의자들을 향해 일어나는 것이겠지. 그들은 사실주의자들에게 철저하게 신전의 문을 닫으니까. 그러니까 황제가 그들에 대한 심판을 대중에게 맡겨 버린 거네. 마침내 그들이 승리한 것이지..... 아! 나는 자네를 같은 젊은이들의 생명력을 잘 알고 있어. 그 가치는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지!”
그는 땅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듯한 모든 젊음을 포옹하는 듯이 두 팔을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P198-199)
“야외, 그것이 그렇게 웃긴다, 이거지!”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 “그들이 다 원하고 있잖아, 야외를, 야외파를! 그렇지 않아? 과거엔 우리들끼리만 그 말을 썼지. 한두 명을 빼곤 아무도 그 말을 몰랐잖아. 그런데 이제 세상에 다 알려졌어. 다른 사람들도 아닌 바로 그들이 이 유파를 만든 거네......... 오! 이젠 나도 알 것 같아. 그래, 야외파라고 해 두자!” (P229)
어느 날, 상도즈는 클로드와 단둘이 섬에 가 나란히 누워 먼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의 큰 야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큰 소리로 고백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언론계란 전쟁터와 똑같아. 살아남아야 하고, 또 살기 위해선 싸워야 하거든..... 그리고 신문을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또 그것에 종사하는 것을 얼마나 혐오하든, 그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힘이고, 그 힘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손에 쥐어 있는 확실한 무기라네. 내가 지금은 할 수 없이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나도 여기서 늙고 싶진 않아. 아! 아니! 난 내가 할 일을 찾았어. 그래, 내가 하고 싶어 하던 일을 말이야. 나는 그 일을 하다 죽을 거야. 아마 한 번 빠져들면 그 일에서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하겠지.”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 속에서 나뭇잎들조차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상도즈는 도중에 말을 끊어 가며 더욱 느릿느릿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지 않겠어? 인간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것, 즉 형이상학적인 꼭두각시가 아니라 환경에 지배되고 신체의 모든 기관의 작용으로 움직이는 생리적인 인간을 연구하는 것..... 인간의 뇌가 가장 고상한 기관이라는 핑계 아래 이제껏 뇌만을 배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야? 인간의 사고, 아! 맙소사! 이 사고도 전체 신체 기관의 산물일 뿐이지. 어디 뇌 혼자 생각하게 해 보라지. 배가 아프면 그 고상한 뇌가 어떻게 되는지 보란 말이야!.... 아니야! 다 우스운 짓거리야. 철학도 과학도 이미 지나갔네. 이제 우린 실증주의자이며, 진화론자야. 그런데도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문학적 마네킹이나 지키고 있고, 순수한 이성의 흩어진 머리칼이나 다듬고 있으니! 심리학자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나 늘어놓고 있고, 그런데 생리학도 심리학도 단독으로는 사실 아무 의미가 없네. 그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모든 기능을 총체적으로 만들어주는 기구일 뿐이지. 아! 공식은 바로 거기에 있고, 근대적 혁명의 근거가 되는 것도 바로 이것이야. 필연적으로 사회의 낡은 개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새로운 토양 안에서 새로운 예술이 몸을 틀며 나올 수밖에 없다네. 그래, 이제 봐. 다가올 과학과 민주주의의 새 세기를 위한 문학이 싹트는 것을 보게 될 테니!”
그의 외침은 위로 올라가 광활한 하늘로 사라졌다. 줄지어 선 버드나무 사이로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강물만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는 친구에게로 몸을 돌려, 얼굴을 바짝 대고 말했다.
“그래서 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찾았다네. 아! 뭐 대단한 것은 아니고, 아주 작은 것이면 돼. 비록 우리가 천년만년을 살 것 같이 생각해도 결국은 한평생을 살다가 가는 것뿐인데, 한 인간의 인생을 보여 주는 거면 충분하네. 난 한 가족을 그릴 걸세. 그 가족의 일원을 각각 관찰하는 거지.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또 그들 서로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결국 소규모로 떼어 낸 인간, 그 인간이 진화하고 행동하는 양식을 그려 보이는 거네. 그러는 한편 그 인물들을 한정된 역사적 시기에 위치시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환경과 상황이 제공되어 역사성이 가미되는 거야..... 알겠나? 두고 봐, 나는 이 책들을 총서로 만들 생각인데, 열다섯 권에서 스무 권 정도 될 걸세. 각각의 이야기가 완벽한 틀을 가지면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어. 일을 하다가 내가 쓰러지는 일만 없다면, 아마 이 총서는 내가 노후에 살 집 정도는 마련해 주지 않을까!”
그는 다시 벌렁 누워, 팔을 풀밭까지 뻗쳐 땅속으로 들어가려는 동작으로 웃으며 농담을 했다.
“아! 인자한 대지여,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며 생명의 유일한 원천이여, 나를 그대의 품 안에 받아 주오! 우주의 영혼이 순환하고 있는 그대는 영원하고 불멸일지니, 그대의 생명력이 돌멩이에까지 침투되어 수목들과 우리 모두를 같은 자연의 위대한 동포가 되게 만들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그대 안에서 사라지고 싶다. 나는 나의 손발 아래에서 그대를 느낀다. 그대를 껴안으며 나의 살은 타오른다. 그대만이 나의 작품의 원동력이고,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만물이 모든 생명의 입김을 받아 생동하는 거대한 방주다!”
그러나 농담같이 시작한 이 기원은 시적 과장이 증폭되면서 마치 열렬한 종교적인 외침같이 끝을 맺으며 시인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러자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지평선을 포용하는 듯한 동작으로 격렬하게 외쳤다.
“이렇게 거대한 영혼이 있는데, 우리 각자에게 따로 영혼이 있다는 말이 얼마나 어리석어!”
클로드는 풀 속에 파묻혀 꼼짝도 않고 있다가, 얼마간의 침묵이 다시 흐른 후 결론을 맺었다.
“그렇고말고! 자네가 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거야! ...... 그러나 그러다가 자네가 무너질까 봐 걱정이군.” (P274-277)
그는 몸을 떨었다. 지평선에서 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겨울의 파리가 다시 한번 밝게 불타올랐다. 거기에서 친구들이 애쓰며 고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없으면 그들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그 없이는 일할 힘도, 자부심도 없을 테니 어서 가서 그들의 대장이 되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환상에 시달리며 어서 파리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 한편에,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거부감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와 그곳에 가는 것을 굳게 막고 있었다. 그것은 용감한 사람들의 몸을 떨게 만드는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행복과 숙명 간의 암투였을까? (P285-286)
그는 두 손을 떨었다. 창조의 고뇌 안에 그의 전신이 떨려 왔다. 그는 팔레트를 내려놓고, 허공을 치는 듯하더니 다시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이미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 화단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원로의 대가는 두 사람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놀라겠지만, 내가 코 하나라도 제대로 그릴 줄 아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아..... 매번 그림을 그릴 때마다 나는 아직도 초보 시절처럼 떨린다네. 심장이 두근거리고, 고민으로 입술이 마르고,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히곤 하지. 아! 이보게 젊은이들, 자네들은 이 공포가 뭔지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짐작도 못한다네. 왜냐하면 자네들이야 한 작품을 망쳐도, 더 나은 작품을 만들면 될 테니까! 어느 누구도 자네들을 야단치지 않잖아. 그러나 어느 정도 지위에 도달한 우리로서는 우리에게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네. 후퇴나 쇠약함이 허용되지 않는 거지. 그랬다간 공동묘지 속으로 전락해 버리는 꼴이 되거든. 자, 유명인사여, 대 예술가여, 지혜를 짜내고 피를 불태우게나. 그래서 자네들은 높이 올라가겠지. 더 높이, 더 높이. 만약 자네가 올라간 정상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것도 가능한 한 길게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으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겠지. 그러나 후퇴를 한번 맛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러면 그때는 자신에게 제동을 걸 수밖에 없다네. 자네의 재능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되고, 불후의 대작을 창조하는 힘이 상실되었다는 고뇌에 사로잡혀서, 더 이상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는 자책에 정신을 잃고 말지.”
봉그랑의 우렁찬 목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우레와 같은 외침을 내었다. 그의 커다란 얼굴은 고뇌의 빛을 띠었다. 감정이 억제할 수 없이 격렬해진 그는 이리저리 서성이며 말을 계속했다.
“나는 지금까지 자네들에게 여러 번 말해 왔지. 언제나 데뷔할 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기쁨은 저 산꼭대기에 도달할 때 있는 것이 아니고 올라가는 자체, 앞뒤 생각없이 오르는 데 있다고. 그렇지만 자네들은 그걸 몰라. 알 리가 없을 거야. 스스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자, 생각해 보게! 자네들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꿈꾸지 않는가! 끝없는 몽상의 시기야. 튼튼한 두 다리를 가졌으니, 험한 길도 짧게 느껴지겠지. 열광을 갈망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최초의 작은 성공에도 무상의 환희를 맛볼 거야. 게다가 야망의 목표 달성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향연이지! 그리고 똑바로 쏜살같이 돌진하는 거네! 그런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네. 그 정상을 유지한다는 문제 말이야. 그래서 고뇌가 시작되는 거네. 꿈이 실현되었다는 도취의 순간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도취의 밑바닥에서 쓰라린 고뇌를 느끼며 지금까지의 고투가 가차없게 느껴지게 되는 순간이 와. 이미 탐색해야 할 미지의 것도 없고, 새로운 감동을 느끼는 일도 없어. 자부심도 한순간의 평판과 함께 사라지고 말아. 자신이 많은 대작을 만든 것을 알면서도 그것들로부터 이미 생생한 만족감이 솟구쳐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게 돼. 이 순간부터는 지평선이 공허해지고 어떤 새로운 희망도 자네에게 손짓하지 않게 되어 죽는 수밖에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끝맺고 싶지 않다는 희망에 사로잡혀서, 사랑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처럼 창조에 집착하는 걸세. 비틀비틀, 천박하게 말이야..... 아! 자기의 마지막 걸작 앞에서 목매달아 죽을 수 있는 용기와 자부심이 있어야 할 텐데!”
그는 등을 쭉 펴고, 아틀리에의 높은 천장이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너무도 감정이 복받쳐서 두 눈에 눈물이 괼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림 앞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으며 누군가 격려해 주기를 원하는 학생같이 근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자네 마음에 드는가? 난 그런 자신이 안 생겨. 나의 불행은 내가 비평을 너무 심하게 하거나 아니면 너무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면 쉽게 그것에 열광하다가 그게 잘 되지 않으면 이제는 자신을 책망하는 거야. 저 샹부바르 놈처럼 아무것도 안 보는 철면피가 되든지, 아니면 아주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림을 그리지 말든지. 솔직히 말해 보게, 자네, 이 작은 그림이 마음에 들어?” (P308-310)
그러나 상도즈는 책상 앞에 앉아 오전에 쓰다 만 집필 중인 책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10월에 출판한 총서의 첫 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 불쌍한 그의 책은 뭇매를 맞고 있었다! 그의 책에 퍼부어진 저주는 마치 사형장에 묶인 사형수에게 가해지는 참수형이나 사형집행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는 웃어넘겼고, 자기가 갈 방향을 알고 있는 확고한 일꾼의 침착함으로 오히려 결심을 더 굳히고 있었다. 다만, 그는 사무실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의 의도는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자기에게 진흙을 끼얹는 기사를 휘갈겨 쓰는 작자들의 무식함에 놀라워했다. 생물학적인 인간에 대한 그의 새로운 연구, 환경에 돌려진 막강한 역할, 영원히 창조를 계속하는 광활한 자연, 결국은 동물의 삶에서부터 다른 삶에 이르기까지 더 높고 더 낮은 것도 없고, 더 아름답고 더 추한 것도 없는 총괄적이고 보편적인 삶, 이 모든 것이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가 쓰는 언어의 대담함, 모든 것이 말해져야 하고 때로는 혐오스러운 말도 빨갛게 달구어진 다리미처럼 필요할 때가 있으며, 말이란 그 내적인 힘이 충만해지면 저절로 나오는 것이라는 믿음. 특히 그의 성적 행위의 묘사나 감추어 둔 수치스러운 마음에서 끄집어내어 영광스럽게 백주대로에 드러낸 세계의 시작과 종말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화를 내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만은 그를 이해하고 그의 지저분함을 욕할 것이 아니라 대담함에 화를 내길 바랐다.
“쳇!” 그는 말을 계속했다. “내 생각엔 악당보다 바보가 더 많은 것 같아. 그들이 내게 화를 내는 것은 단어의 사용이라든가 비유, 문체의 특성 같은 형식 때문이야. 그래, 그들은 문학을 증오하고 있지. 부르주아들은 문학이 싫어 죽는다니까!”
그는 슬픔에 잠겨 침묵을 지켰다.
“멋있어!” 말이 없던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행복한 사람이네. 자넨 일을 하잖아. 자네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잖아!”
상도즈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난 일을 할 거고, 마지막까지 밀고 나갈 거야. 하지만 자네가 알까? 내가 얼마나 슬퍼 절망에 싸여 이 말을 하는지! 저 바보들은 지금 나를 오만하다고 하는 것 아니겠어! 나는 꿈속에서까지 내 작품의 불안전함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그리고 나는 그 전날 쓴 내 작품을 절대로 다시 읽지 않네. 왜냐하면 그랬다간 그것이 너무도 끔찍해서 계속 써 나갈 용기를 잃고 말 테니까! 맞아, 나는 일을 하고 있다네! 아마 난 네가 살아 있는 한 일을 하겠지. 난 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행복한가?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난 행복해 본 적이 없어. 결국 추락이 있을 뿐이야!” (P323-325)
그는 예전의 유파가 와해된 이 시기야말로 용감한 화가가 독창적이고 솔직한 색조를 사용하며 등장한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미 어제의 양식은 흔들리고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제자 없이 죽었고, 쿠르베의 뒤에는 몇 명의 서툰 모방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걸작 역시 미술관에 걸려 세월의 때가 묻은 채, 한 시대의 예술을 증언할 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에게서 벗어나서 새로운 양식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야외파의 영향을 받아서 최근의 그림들에는 밝은 햇빛이나 맑은 새벽 등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낙선전에서 그렇게 조소를 받던 금빛으로 빛나던 작품들이 화가들에게 암암리에 영향을 끼쳐 그들의 팔레트는 점차 밝은 색으로 채워져 갔다. 아직까지도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화단에 동요가 일고 변화가 선포되어 해가 갈수록 살롱전에서도 그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흉내를 내는 무력한 무리들이나 좋은 손재주만으로도 소심하고도 교활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무리들 한가운데로 한 사람의 대가가 나타나서 금세기가 갈망하고 있는 절대적 진리인 완전무결하고도 힘 있는 양식을 대담하게 밝히고 실현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신의 재능을 항상 의심해 오던 클로드는 파리에 온 이후 초창기의 열정과 희망 속에서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용기를 잃고 자신감을 되찾기 위하여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절망적인 고뇌의 발작을 다시 겪지 않았다. 그의 몸은 타오르는 열정으로 단단해졌고, 고심하여 맺은 열매를 출산하기 위해 몸을 푸는 예술가의 맹목적인 끈질김으로 그림을 그렸다. 오랫동안 전원에서 쉬다 온 그는 보다 신선한 시각을 갖게 되었고, 창작의 희열을 맛보았다. 그는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용이함과 균형 감각을 찾으며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 예전에는 헛수고로 끝나던 노력이 급기야 결실을 맺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벤느쿠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가 그린 노래하는 듯한 밝고 경쾌한 색조의 그림을 보고 친구들은 경탄했다.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칭찬했고, 독자적인 색조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그를 당대의 1인자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이 자연의 전정한 빛을 담고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고, 반사하는 빛의 유화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깔이 잘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3년 동안 클로드는 실패에 굴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무되면서 투쟁해 나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을 관철해 나갔고, 확고한 신념을 갖고 전진했다. (P347-348)
작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시테 섬 앞으로 갔다. 중간 정도의 화폭에 한 장소의 정경을 그려 보아도 좋지 않을까? 다만, 이상한 질투와 함께 수줍음 비슷한 감정이 생 페르교 아래에 가지 못하게 했다. 그에게 이제 그 장소는 성지가 되었고, 비록 죽었을지언정 대작의 순결까지 짓밟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 니콜라 항구의 상류에 있는 제방 끝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번만큼은 직접 자연을 보고 그렸다. 사이즈가 큰 작품을 그릴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이번만은 그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소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들의 공분을 사서 낙선의 운명을 걸었다. 화가들 사이에서는 술주정뱅이가 빗자루로 그린 그림 같다는 평판이었다. 게다가 그가 입선하기 위해 미술학교의 환심을 사 보려고 작품을 양보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화가는 깊은 상처를 받고 분노로 울부짖었다. 그는 작품이 되돌아오자,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 불태워 버렸다. 이번 그림은 그냥 칼로 찢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았고, 그렇게 없애 버리고 나서야 속이 풀렸다. (P400-401)
클로드의 생활은 아주 비참해졌다. 계획 없는 살림을 꾸려 나가며 점점 더 궁핍해졌다. 2천 프랑의 연금이 한 푼도 남지 않게 되자,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가난이 덮쳐 왔다. 크리스틴은 일거리를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심지어 바느질도 할 줄 몰랐다. 그녀는 무기력한 손을 보고 비탄에 잠겼으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녀가 받은 교육에 화가 났다. 만약 그녀의 생활이 더 궁핍해진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녀 노릇밖에 없었다. 파리 사람들의 조롱 속에 클로드의 그림은 전혀 팔리질 않았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작품을 출품하여 따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무지갯빛이 총망라된 알록달록한 그의 그림을 보고 아주 즐거워하며 그를 아마추어의 수준으로 여기기에까지 이르렀다. (P425)
이렇게 우정이 소실된 가운데 상도즈만이 투를라크로 오는 길을 알고 있는 친구였다. 그는 자기의 대자인 쟈크와 가련한 크리스틴을 만나러 찾아오곤 했다. 이런 비참한 속에서도 크리스틴의 정열적인 얼굴은 그를 감동시켰고, 언젠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고 싶어 했던 사랑에 굶주린 여자에 근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는 클로드가 발판을 잃고 예술적 광기의 밑바닥으로 침몰하는 것을 보면서 동지적 예술가로서 형제와 같은 정이 커갔다. 처음에 그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보다 친구를 더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그는 자신의 재능을 친구의 아래에 두면서 클로드를 한 시대의 예술을 혁신할 수 있는 대가의 열로 높이 떠받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천재의 파산에 비통한 동정의 마음이 들었고, 무능으로 인한 끔찍한 고뇌를 보고 쓰리고 가혹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도대체 예술에서 어디까지가 광기일까?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실패가 상도즈의 눈물을 자아냈다. 그림에서도, 또 문학에서도 그것이 가던 길을 이탈하게 되면 이탈하는 만큼, 또 예술가가 기이하고도 눈물 젖은 노력을 기울이며 기울이는 만큼, 그의 마음은 동정에 사로잡혔고, 그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작품으로 세상 사람들의 경탄을 받고 싶어 하는 꿈의 광란 안에 경건하게 침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P439-440)
“글쎄, 어떨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혼자 살다가 죽어가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을까? 예술가의 영광 같은 건, 마치 오늘날 어린애들도 우습게 여기는 교리문답처럼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거 아닐까! 신을 믿지도 않는 우리가 그러면서 불멸을 믿다니.... 아! 비참한 일이야!”
상도즈는 황혼녘의 우수에 잠겨, 그가 인간 세상으로부터 느끼는 자신의 고뇌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음! 자네는 아마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겠지! 일이 잘 돌아가기 시작한 나는, 소위 부르주아들이 말하는 식으로 얘기하자면 책도 출판했고, 어느 정도 돈도 벌었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게 참 참기 어려워.... 내가 여러 번 자네한테 얘기했지만, 자넨 믿지 않았지. 왜냐면 죽을 고생을 해서 그림을 그려도 세상의 눈에 띄지 않는 자네에게 행복이란 어쨌든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칭찬을 받든 비난을 받든, 어쨌든 대중의 눈에 띄는 것일 테니까, 아! 설령 자네가 다음 살롱전에 입선해서 세상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자네가 다른 그림들을 그리게 된다고 하자. 그때 자네는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할까..... 들어 봐, 일이 나의 생활 전부를 점령하고 말았어. 그것은 점점 내 어머니, 내 아내, 내가 사랑하는 모두를 앗아 갔어. 마치 머릿속에 들어온 세균처럼 말이야. 그것은 내 뇌를 갉아 먹고, 몸통을 점령하고, 팔다리에까지 퍼져서, 끝내 몸 전체를 잡아먹고 말아.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 일이란 놈이 나를 손아귀에 쥐고서 나를 책상에 못 박지. 심호흡할 틈도 주지 않아. 그리고 식탁까지 나를 따라와서는, 난 말없이 빵을 씹으면서도 작품 속 대사들을 함께 씹고 있어. 외출을 해도 따라오고, 저녁 먹을 때 그릇에까지 들어와 있어. 나와 함께 베갯머리에서 잠도 자. 너무나 가혹한 건, 일단 일을 시작하면 그걸 멈출 힘이 내게 없다는 거야. 잠의 밑바닥까지 그놈이 굼실대고 있으니까 말이야. 일 이외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어머니 방에 올라가 어머니를 안아드리긴 하지만, 너무도 건성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에 한 10분 후에 그 방을 나와서는 정말 내가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야. 불쌍한 내 처에겐 남편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손을 잡고 있을 때조차도 난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가끔 내가 가족을 매일 슬프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가슴을 쥐어짜는 슬픈 생각에 후회하기도 해. 왜냐면 결혼 생활에서 행복이란 게 오직 선의와 정직, 쾌활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괴물이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어! 곧 나는 몽유병자처럼 글 쓰는 일로 돌아오고, 나의 고정관념 때문에 그것 외에는 무관심하고, 무뚝뚝하게 되고 말아. 오전 중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라치면 그래도 낫지만, 그게 잘 안 되면 엄청나게 비참해지는 거야! 나를 태워버리는 일이라는 놈에 의해 집안 전체가 웃고, 울고 하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내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전에 내가 가난했을 때에는 시골에서의 휴식과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기도 했었지. 이젠 내가 그것을 하려고 하면 가능하긴 한데, 이미 벌여놓은 일이 날 꼼짝 못하게 못 박아 두네. 아침에 해 뜰 때 산보도 못하고, 친구 집을 방문할 수도 없어. 한번 미친 듯이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는 거야! 내 의지까지 소실되어서 습관에 끌려 다니고, 세상의 문을 굳게 닫고 열쇠를 창으로 던져 버린 꼴이야..... 아무것도 없이 나의 둥지에 남아 있는 건 일과 나, 둘뿐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그놈이 날 갉아먹는 거야. 다 갉아먹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아무것도!”
그는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침묵이 한층 짙어진 어둠 속에 펼쳐졌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괴롭게 말하기 시작했다. (P447-449)
“이런 비참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만족할 수 있고, 무언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아! 나는 어떻게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담배를 피운다든가, 만족한 듯이 수염을 어루만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 확실히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 같네. 그들에게 창작이란 쉽고 즐거운 위안거리에 불과하고, 아무런 열정도 없이 쉽게 일을 시작했다가 쉽게 그만두곤 하지. 그들은 글 두 줄을 쓰면서, 그게 유래없는 명문이라고 기뻐하며 자화자찬을 해대는데, 난 어떠냔 말이야! 내 경우는 엄청난 난산을 거쳐야 하고, 그래서 태어난 아이는 쳐다보기도 무섭네. 사람이 일체의 의혹을 갖지 않은 채 자신에 찰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사생아라도 자기의 피가 섞인 자식이라면 비평 전신도 상식도 잃고, 다른 사람의 말을 맹렬히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연해질 뿐이야. 맙소사! 책이란 놈은 추악하기 그지없어! 요리와 마찬가지로 지저분하게 조리된 걸 사랑할 순 없거든. 나에게 세상의 모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네. 그것이 날르 불편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되어 줘. 세상에는 공격을 받으면 항복하고 마는 사람들과 공감을 얻으려고 급급한 사람들이 있네. 단순한 자연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면, 여자들 중에는 남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고 마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런데 비난은 건강에 좋은 거야. 인기가 없다는 건 사람을 튼튼하게 하는 학교란 말일세. 바보들의 조소 이상으로 사람을 유연하고 강하게 해 주는 건 없거든. 한 작품에 자기의 모든 삶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네. 즉 즉각적인 정당한 보상, 성실한 평가 따위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그 어떤 기대도 없이, 오직 피부 아래에서 심장이 뛰듯이 아무런 욕심 없이 일을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으면 족한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세상의 인정을 받으리라는 환상으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죽게 되겠지... 아! 내가 얼마나 그들의 욕설을 견디어 왔는지, 그들에게 알려 주고 싶네! 단, 문제는 나야, 이 나라는 인간이 나를 괴롭혀서, 단 1분도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게 유감일 뿐이야. 맙소사!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날부터 얼마나 무서운 날들의 연속이었는지! 처음 소설을 쓸 때는 내 재능을 보이겠다는 희망이 있었어. 그런데 이미 나는 형편없이 되고 말았네. 매일 해나가는 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지금 쓰고 있는 책을 앞의 작품보다 못하다고 단죄하게 되고, 그 어떤 쪽도, 글도 단어도, 심지어 구두점까지도 그 추악함으로 나를 괴롭혀 와. 그래도 어쨌든 써 대고, 끝을 맺지. 아! 끝을 맺고 나면 그제서야 한숨 돌리는 거야! 그래도 자기의 성과에 황홀해져서 취하는 사람들의 기쁨 따위와는 거리가 멀고, 등뼈가 휘도록 무거운 짐을 욕을 하며 내던지는 인부들과 같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림 같은 일이 다시 시작되고, 또 영원히 반복되는 걸세.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이 재능을 갖지 못한 것에 지치고, 산같이 쌓여 있는 책들 가운데 좀 더 나은 작품을 단 하나도 남기지 못한 데에 화가 나서, 자신에게 분노하며 죽게 될 걸세. 그리고 죽으면서 내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해서 무섭게 자문하겠지. 이것이 잘한 짓일까? 내가 오른쪽으로 갔을 때, 사실은 왼쪽으로 가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마도 나의 최후의 마지막 말, 최후의 헐떡임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바람이 되겠지.....”
그는 감정이 격해져서 말소리가 떨렸기 때문에, 잠깐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열정적으로 외쳤다. 그 외침 속에서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는 그의 서정성이 배어나왔다.
“아! 인생이여, 설령 내가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나는 이 일을 하며 살 것이고, 그러다 죽을 테다!” (P449-452)
상도즈는 그를 어두운 침묵으로부터 끌어내려고 자신의 팔로 클로드의 팔을 힘껏 잡아 끌고 갔다.
“제기랄! 자네를 이런 식으로 밀어 떨어뜨리다니. 그들이 아무리 나쁜 장소에 걸어도 자네 그림은 멋있어. 걸작이야! 응, 자네가 다른 그림을 출품하길 원했던 것은 잘 알아. 그럼 어때! 그거야 다음에 내면 되지..... 그런데 봐! 자네는 뽐낼 만해. 왜냐하면 올해 살롱의 진정한 승리자는 자네이니까. 자네를 약탈한 사람은 비단 파주롤뿐이 아니야. 이제는 모두가 자네를 흉내내고 있어. 저들은 자네의 <야외>를 보고 그토록 비웃더니만, 자네가 그들을 혁신시켰어. 자, 봐, 봐! 여기에도 저기에도, 온통 <야외>뿐이잖아!”
각 방을 지나며 그는 손으로 그림들을 가리켰다. 과연 현대 회화에 서서히 빛이 도입되면서 마침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예전에 타르로 조리를 한 것 같은 검은색 살롱전은 경쾌한 봄의 밝은 빛에 빛나는 살롱전으로 변했다. 이 밝아오는 새벽, 새로운 날은 다름 아닌 이전의 낙선 전람회에서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작품들은 점점 밝아져서 무한한 뉘앙스를 지닌 섬세한 빛으로 젊음을 되찾게 되었다. 이제는 도처에 푸르스름한 수법이 눈에 띄었고, 그것은 초상화나 큰 규모의 심각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장면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마치 단죄받은 교리가 어둠의 무리와 함께 사라지듯이 종래의 관습적인 주제가 전통적인 어두운 색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공상적인 작품은 매우 드물었다. 즉, 신화나 가톨릭 계통의 시체와 같은 누드화라든가, 신앙과는 관계없는 전설화, 생명이 없는 일화를 그린 그림들, 여러 세기에 걸쳐 사악하거나 우매한 사람들에 의해 소모되어 마멸된 미술학교의 골동품 같은 작품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종래의 수법을 버리지 못한 노(老)대가의 작품에까지 <야외>가 미친 영향은 현저하게 빛이 스며들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부터 점차 다가옴에 따라 그림이 벽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창을 낸 것 같았다. 곧 벽이 허물어지고 대자연이 들어올 것이 확실했다. 그만큼 균열은 컸고, 이 혈기와 젊음이 넘치는 전장에서 낡은 관습은 빛의 공습을 받아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아! 여보게, 자네의 역할은 정말 대단하네!” 상도즈는 계속하였다. “내일의 예술은 자네의 것이야. 자네가 이 모든 것을 만들었어.”
클로드는 악물고 있던 이를 겨우 풀더니 어둡고 거칠게 중얼거렸다.
“자기 자신도 만들 수 없는 주제에 다른 것을 만들다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자네도 알겠지만, 나에겐 너무 무거워. 그것이 내 숨통을 죄어와.”
이 한마디로 그는 스스로 도입한 수법을 실현할 재능이 없는 무력감, 사상의 씨를 뿌려도 영광을 수확할 수 없는 선구자의 고뇌, 그나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이 세기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걸작을 완성할 수 있기 전에 유행을 좇아 날림으로 그림을 그려치우는 자들이나 손재주가 있는 자들이 자기의 재능을 훔쳐가고, 자기를 뜯어먹은 후 새로운 예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 등 그의 생각을 모두 드러냈다.
상도즈는 아직 미래가 남아 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영광의 방을 지나갈 때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멈추어 세웠다.
“오! 저 초상화 앞에 있는 푸른 옷을 입은 부인을 봐! 살아 있는 사람이 그림에게 한 방 먹이는 게 아니고 뭐겠어! 예전에 우리가 흔히 보곤 하던 관중의 옷차람이나 회장 내의 분위기를 자네도 기억하지. 그때는 어떤 그림도 그런 비교를 견딜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자연에 필적하는 것들뿐이야. 나는 방금 저쪽의 노란 색조의 풍경화가 그 앞에 다가오는 여자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광경까지 보았어.”
그러나 클로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뇌에 몸을 떨었다.
“제발, 나가자. 나를 데리고 나가 줘..... 더 이상 못 견디겠어.” (P507-509)
“여보게, 난 말이야, 가끔 진땀이 나...... 자네, 혹시 이런 생각해 본 적 있나?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공정한 심판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네. 인간이란 현재 모욕받고 인정받지 못해도, 다가올 공정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위로받는 법인데, 마치 신앙심 깊은 사람이 모든 사람이 공정한 보상을 받는 내세를 굳게 믿음으로써 현재의 추악함을 견디듯이 말일세. 만약 가톨릭 신자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에게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미래의 세계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계속 속임수와 오해가 난무해서 우수한 작품보다 겉만 번지르르한 형편없는 작품을 더 좋아한다면!...... 아! 이게 무슨 기만인가! 그야말로 명성을 위해 일에 쫓기는 죄수 꼴이잖아! 하지만 충분히 가능해. 우리가 조금의 가치도 주지 않는 것에 세상은 찬사를 보내고 있어. 예를 들어 고전적인 교육은 전혀 왜곡된 사고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서, 그것에 적합한 쉬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천재로 보도록 해 주고 있잖아. 그런 사람들보다 몇몇 교양 있는 사람에게만 이해되는 자유로운 기질을 지니고 규격에 맞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더 좋아할 수 있는데도 말이네. 어쩌면 불멸이란 평범한 부르주아들에게만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지 못하는 동안, 우리 머리에 억지로 틀어박힌 그런 작품들에만 불멸이 해당될지도 모른단 말일세. 아니, 아니, 그렇게 말해선 안 되겠지. 난 그런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쳐! 과연 언젠가는 내가 인정받을 것이라는 환상이 없어도 계속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고, 세상의 욕설에도 두 발을 꿋꿋이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을까!”
클로드는 괴로운 듯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씁쓸한 태도로 말을 던졌다.
“쳇! 미래가 무슨 상관이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린 여자 때문에 자살하는 얼간이들보다도 더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만약 지구가 마른 호두열매처럼 공중에서 깨진다고 해도, 우리의 작품은 먼지 하나도 보태지 못할걸.”
“맞아, 그건 그래.” 상도즈가 새하얗게 되어서 말했다. “허무를 채우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 그래서 가령 허무를 알았다고 해 보자.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이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할걸!” (P548-549)
그는 꼼짝 않고 서서 매우 의연하게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은 연기처럼 검게 그을리고, 서쪽에서 살을 에는 듯한 삭풍이 휘몰아치는 겨울밤이었다. 파리는 가스등만이 켜진 채로 잠들어 있었다. 가스등의 어른거리는 둥근 불빛이 멀어져 감에 따라 점점 작아져서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작은 별들 같았다. 우선, 바로 앞의 부두들을 따라 들어선 가스등의 행렬은 마치 휘황한 진주가 늘어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전경에 보이는 건물들의 정면과 왼쪽의 루브르 부두에 늘어선 집들, 오른쪽의 학사원의 두 날개가 밝게 빛났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기면 건조물들과 건물들의 뒤얽힌 거대한 덩이는 아주 먼 곳의 빛을 받아 더욱 깜깜해 보이는 암흑 속으로 점차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까지 아득하게 이어지는 강의 두 연안 사이로 다리들이 빛의 막대들처럼 나타났는데, 멀어져 가면서 간격이 좁아져 나중에는 가늘고 긴 반짝이는 띠들이 모여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센강 위로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펼쳐진 물이 생동하는 듯이 반짝거렸다. 부두에 늘어선 가스등 하나하나가 핵이 되어 길게 뻗친 혜성의 꼬리처럼 수면에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것들은 규칙적으로 좌우 대칭인 불의 부채 모양으로 넓게 펼쳐지면서 물 위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저 먼 곳의 것들은 다리 아래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불의 작은 점들만 보였다. 그러나 타오르는 혜성의 거대한 꼬리들은 아직 살아 있어서 그것들이 펼쳐짐에 따라 검은빛과 금빛의 비늘로 끊임없이 넘실거리며 움직여 물이 영원히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센강 전체가 그것으로 불이 붙었다. 마치 수면 아래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는 듯이, 불그스름한 유리와도 같은 물결 뒤로 신비하고 그윽한 마술이 벌어져 왈츠를 추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불길이 번지고 있는 위로, 별처럼 반짝이는 부두 위의 별 하나 없는 하늘에는 한 개의 붉은 먹구름이 떠 있었는데, 그것은 밤마다 잠자는 이 도시 꼭대기에 서서 도시를 덮는 화산 연기와도 같이 뜨거우면서도 빛을 발하는 구름이었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크리스틴은 몸이 덜덜 떨려 왔고,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한순간 발밑의 다리가 빙글빙글 돌면서 눈앞의 지평선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클로드가 움직인 것은 아닐까? 난간에 다리를 걸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아무것도 움직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똑같은 장소에 여전히 꼿꼿이 서서 어두워 보이지 않는 시테섬의 끝을 끈질기게 응시하고 있는 클로드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를 이 장소로 불러낸 것은 시테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둠의 밑바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눈앞의 두 개의 다리로, 밝게 빛나는 수면 위로 거무스름한 앙상한 골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 저쪽은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섬도 온데간데없었고, 만약 때때로 퐁네프 위를 늦은 시각까지 달리는 마차의 꺼진 석탄과도 같은 침침한 불길마저 없었더라면 섬의 위치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조폐국의 철책 부근에 켜져 있는 붉은 경계등이 수면에 피처럼 붉고 가는 줄을 만들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하고 음침한 것이 물 위에 떠 있었는데, 아마도 항해 중인 수송선인 듯했다. 그것은 불숙 모습을 드러내서는 반짝이는 흐름 속을 천천히 내려가다가 다시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곤 했다. 도대체 영광의 섬은 어디에 빠졌는가? 이 불타는 파도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는가? 그는 계속하여 정면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도도히 흘러가는 강에 차차 넋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광활한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심연과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고, 신비한 빛의 난무가 있었다. 그리고 물이 흘러가는 무겁고 슬픈 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죽을 정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크리스틴은 클로드가 무서운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돌연 느끼고 가슴이 철렁했다. 휘청거리며 팔을 뻗어 보았지만, 휘몰아치는 삭풍에 손이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클로드는 죽음의 감미로운 유혹과 싸우면서 똑바로 서 있었다. 그 후 다시 한 시간 동안,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마치 어떤 기적적인 힘에 의하여 그의 눈이 빛을 발하게 되어 섬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그는 여전히 시테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P579-582)
“미술학교나 언론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클로드에게 연구심이 부족하다고 계속 헐뜯으면서 게으르고 무식하다고 욕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하곤 합니다. 그가 게으르다고요, 기다 막혀서! 저는 그가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앉아서 작업을 하다가 지쳐서 정신을 잃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 전부를 걸고 작품에 열중하다가 거기에 미쳐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남자를 어떻게 게으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무식하다니,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어요! 저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사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영광을 가지려면 그전에 이미 수용된 지식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거든요. 들라크루아도 정확한 선을 그리지 못했으므로, 예술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 정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혈증의 모범생 바보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걷다가 덧붙여 말했다.
“그는 영웅적으로 일을 했, 머릿속이 과학으로 가득 차 열정적으로 관찰했고, 대가로서의 기질을 훌륭하게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죠.” (P610-611)
“그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봉그랑이 말했다. “흙속에서 잠들고 있는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우리들처럼 머리나 다리, 항상 어딘가에 결함이 있어 살지도 못할 불구인 아이를 만들어 내느라 애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는 편이 나은지도 몰라요.”
“그렇습니다. 살아가려면 자존심을 버리고 어느 정도 타협해서 속임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억지로 떠밀려서 소설들을 차례로 끝까지 내고는 있지만, 아무리 제가 애를 써도 그 작품이 불완전한 것 같고 가짜 같아, 제 스스로가 싫어질 때가 많습니다.” (P622-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