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용의 처> 2009년
1947년 발표. 작품 속 ‘오타니’는 프랑스 시인 프랑수아 비용을 모티프로 한 인물이며 다자이의 분신으로 읽힌다. 전쟁 후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데카당을 표방하며 살아가는 오타니는 내면의 윤리성, 무너지는 가정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워 나갈 수밖에 없다. 반면 그의 아내 ‘삿짱’은 자신 앞에 닥친 험난한 현실을 딛고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지켜 내는 진취적 인간성을 발휘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 그리고 세부 묘사에 이 작품의 묘미가 있다. 다자이의 후기 단편들 가운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타니 씨는, 그날 밤은 얌전하게 술을 마시고, 계산은 아키장한테 시키고, 다시 뒷문으로 둘이 같이 돌아갔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야릇하게 조용하고 점잖은 오타니 씨의 거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사람 앞에 처음 나타날 때는, 그런 얌전한,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나나 봅니다. 그날 이후, 우리 가게는 오타니 씨에게 찍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쯤 지나서, 이번엔 오타니 씨 혼자 뒷문으로 들어왔는데, 느닷없이 백 엔짜리 지폐를 한 장 내밀더니, 와, 그때는 아직 백 엔이라고 하면 큰돈이었지요. 지금으로 따지면 자그만치 이삼천 엔, 그 이상 가는 큰돈이었습니다. 그걸 억지로, 제 손에 쥐어주면서, 부탁해요, 하고는, 배시시 웃는 겁니다. 아이구 벌써, 어지간히 마신 모양인데, 아무튼, 부인도 아시잖아요, 그렇게 술이 센 사람도 없습니다. 취했나 싶으면, 갑자기 진지하게, 이치에 맞는 말을 하질 않나, 아무리 퍼마셔도, 발걸음이 휘청거린다? 그런 걸 여태까지 한 번이라도 우리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사람 나이 서른이면 혈기가 한창이라, 술도 셀 나이지만, 그래도, 저 정도는 드뭅니다. 그날 밤도, 어디 다른 데서, 거하게 한잔 걸치고 온 모양인데, 또 우리 집에서, 소주를 내리 열 잔이나 마시면서, 이건 뭐 말도 거의 안 하고, 우리 부부가 뭐라고 말을 걸어도, 그냥 수줍다는 듯 웃기만 하다가, 예, 예, 하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뜬금없이, 몇 십니까? 하고 묻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거스름돈 드리지요, 하고 내가 말하니까, 아니, 괜찮아요. 하기에,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제가 세게 나갔더니, 싱긋 웃으며, 그럼 이다음까지 맡아 주세요, 또 오겠습니다, 하고 돌아갔는데, 부인, 우리가 그 양반한테 돈을 받은 건, 전무후무, 딱 그때 한 번뿐이고, 그 후로는 뭐, 어쩌구저쩌구 대충 둘러대면서, 3년 동안, 돈 한 푼 내지 않고, 우리 집 술을 거의 혼자서, 거덜을 내버렸으니, 기가 안 막히겠습니까?”
엉겁결에, 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까닭모를 웃음이, 문득 복받친 것입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사모님 쪽을 보았는데, 사모님도 고개를 숙이고 묘한 웃음을 짓습니다. 그리고, 사장님도, 별 수 있겠냐는 듯 억지로 웃습니다. (P182-183)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지도 없고, 역 쪽으로 걸어가서, 역 앞 노점에서 엿을 사, 아이에게 물려주고, 그리고,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기치죠지까지 가는 표를 사서 전철에 올라, 손잡이를 붙잡고 무심코 전철 천장에 매달린 포스터를 보는데, 남편의 이름이 있습니다. 잡지 광고인데, 남편은 그 잡지에 <프랑수아 비용>이라는 제목의 긴 논문을 발표한 모양입니다. 저는 그 프랑수아 비용이라는 제목과 남편의 이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쓰라린 눈물이 솟아나서, 포스터가 흐릿해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치죠지에 내려서, 정말 벌써 몇 년 만인지 이노카시라 공원으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연못가의 삼나무가, 전부 잘려나가서, 뭔가 앞으로 공사라도 시작할 땅처럼, 이상하게 휑하고 살벌한 느낌이라, 옛날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이를 등에서 내려, 연못가 다 망가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집에서 가지고 온 감자를 아이에게 먹였습니다. (P192-193)
그다음 날부터 제 삶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괜히 마음이 들뜨고 즐거워졌습니다. 당장 미용실에 가서, 머리도 손질했고, 화장품도 종류별로 갖추어놓았고, 기모노도 수선했고, 또, 사모님한테 하얀 새 버선을 두 켤레나 받아, 여태껏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괴로움이, 말끔히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랑 둘이 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서 아이를 들쳐없고, 나카노로 출근을 하는데, 섣달그뭄, 설날, 가게 대목이라, 동백나무집의, 삿짱, 이건 가게에서 통하는 제 이름인데, 그 삿짱은 매일,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주 바쁘답니다. 하루걸러 한 번 정도는 남편도 마시러 오는데, 계산은 제 앞으로 달아놓고, 또 연기처럼 사라졌다가, 밤늦게 나타나서 가게를 엿보며,
“안 가?”
하고 살짝 말하면, 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갈 준비를 시작하고, 함께 즐거운 귀갓길에 오르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왜,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은 걸까, 나는 지금 아주아주 행복해.”
“여자한테는, 행복이고 불행이고 없어.”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남자는, 어떤데?”
“남자한테는, 불행만 있지. 늘 공포와, 싸우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난. 그치만, 나,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동백나무집 사장님도, 사모님도, 아주 좋은 분이고.” (P202-203)
그날도 저는, 겉으로 보기에는, 역시나 변함없이, 아이를 등에 업고, 가게에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나카노 가게 봉당에서, 남편이, 술에 담긴 컵을 테이블 위에 놓고, 홀로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컵에 오전의 햇살이 비치어, 예쁘구나,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없어?”
남편은, 제 쪽을 돌아보더니,
“응, 영감탱이는 아직 물건 사러 가서 안 왔구, 여편네는, 방금 전까지 부엌에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
“어제는, 안 왔었지?”
“왔었지. 동백나무집 삿짱 얼굴을 안 보면 요즘 잠이 안 와서 말이야, 열 시 넘어서 들여다봤는데, 방금 전에 갔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자버렸지, 여기서. 비는 좍좍 내리지.”
“나도, 다음부터, 이 가게에서 계속 재워달라고 할까봐.”
“괜찮네, 그것도.”
“그렇게 해야겠어. 그 집에 마냥 세 들어 사는 것도, 의미 없잖아.”
남편은, 잠자코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리며,
“아이구야, 또 내 욕을 써놨네. 에피규리언 가짜 귀족이랜다. 이건 아니지. 신을 두려워하는 에피큐리언, 이라고 해야지. 삿짱, 이거 봐봐, 여기 나를,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써놨어. 아닌데, 내가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작년 말에 있잖아, 여기서 5천 엔 가지고 간 건, 삿짱하고 아이한테, 그 돈으로 오랜만에 멋진 설날을 지내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사람 같으니까, 그런 짓도 하는 거라구.”
저는 딱히 기쁠 것도 없이,
“사람 같지 않으면 어때, 우린, 살아 있기만 하면 돼.”
하고 말했습니다. (P20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