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4번가의 연인> 1987년
84번가의 연인(84 Charing Cross Road)은 영국에서 제작된 데이빗 휴 존스 감독의 1987년 드라마, 멜로/로맨스 영화이다. 앤 밴크로프트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제프리 헬먼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소설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편지글이다. 영국의 한 헌책방과 주고받은 한 다발의 편지인데, 이 헌책방이 문을 닫을 때까지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들이 편지를 통해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헌책방 관리인 프랭크 도엘은 1968년 12월에, 그리고 헬렌 한프는 1997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뉴욕에 사는 가난한 여류 작가와 런런의 중고서적상이 바다를 건너 꽃피운 우정의 편지들...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 가을날 채링크로스가의 헌책방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든다. 조금 까다로운 듯 쌀쌀맞지만 속마음은 더없이 따듯한 여자와 무뚝뚝하지만 우직하고 속 깊은 남자. 두사람이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편지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95번가 이스트 14번지
1950년 9월 25일
그는 6달러 가격에 뉴먼의 대학 초판을 구해놓고, 능청맞게 묻는도다. 관심이 있느냐고.
친애하는 프랭크:
예, 원하죠. 초판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 책의 초판이라면요!
휴, 세상에.
벌써 눈앞에 아른거려요.
옥스퍼드 시선도 보내주세요. 제가 뭔가를 어느 다른 곳에서 찾았을까 궁금해하실 것 없어요. 이제 더는 다른 곳을 두리번거리지 않으니까요. 이 타자기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도 깔끔하고 아름다운 책을 구할 수 있는데, 뭐하러 저 17번가까지 내려가 그 더럽고 못난 책들을 사겠어요? 여기 이 자리에서는 런던이 17번가보다 훨씬 가깝답니다. (P31)
95번가 이스트 14번지
뉴욕시
1951년 4월 16일
채링크로스 가 84번지의 친구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책, 고맙습니다. 책장 전체가 금테두리로 된 책은 가져 보지 못했어요. 이 책이 제 생일에 도착했다는 사실, 믿어지세요?
여러분이 좀 덜 조심하여 카드를 쓰는 대신 속표지에다 글을 남기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행여나 책의 가치가 떨어질세라 노심초사하는, 서적상의 본분이 거기서 발휘된 거겠죠? 현재의 소유자에게는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을 텐데 말이에요(그리고 미래의 소유자에게도 그랬을 거예요.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그리고 서명은 왜들 안 하셨어요? 저는 프랭크가 못하게 한 거라고 봐요. 십중팔구 내가 프랭크 본인 이외의 다른 사람한테 연애 편지 하는 것도 못마땅해할 테고요. (일본과 독일의 재건 사업에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면서 영국은 굶주리도록 놔두는 이 믿지 못할 우방) 미국에서 여러분께 인사 보냅니다. 언젠가, 사정이 허락한다면, 제가 직접 건너가 내 나라가 지은 죄를 저 개인적으로라도 사과하겠습니다(그리고 귀국할 때면 내 개인적인 사과에 대하여 이 나라가 저한테 사죄를 해야 할 겁니다).
이 아름다운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술과 담뱃재로 더럽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저 같은 사람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고상한 책입니다.
여러분의 벗
헬렌 한프 (P50-51)
런던, 뒷골목
1951년 9월 10일
소중한 친구야--
디킨스 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고색창연한 멋쟁이 서점이더구나. 직접 와서 보면 너도 완전히 넋을 잃을 거야.
외부에 진열대가 있길래 우선 발길을 멈추고 이것저것 들쳐보면서 구경꾼 태세를 갖추고 나서 방랑을 시작했지. 안은 어둑어둑해서 눈에 보이기 전에 냄새가 먼저 손님을 반기더구나. 참 기분 좋은 냄새야.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먼지와 곰팡이와 세월의 냄새에, 바닥과 벽의 나무 냄새가 얽히고설킨 냄새라고 하면 될까....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탁상용 등이 놓인 책상이 하나 있고, 한 남자가 앉아 있어. 나이는 쉰 정도에 코만 보이는 남잔데, 고개를 들고 ‘안녕하십니까?’ 하는 것이 북부 억양이었지. 내가 그냥 구경하는 거라고 하니까 그러라고 하시더구나. (P52)
앨러리가 대본당 250달러로 인상됐어. 6월까지 계속된다면 나도 영국행을 감행하여 나의 친애하는 서점을 직접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한테 그럴 배짱만 있다면 말이야. 5,000킬로미터라는 안전한 거리가 있기에 그 난폭하기 짝이 없는 편지들을 써보낸 건데, 어느 날 거기에 들어가더라도 십중팔구는 내가 누군지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나와버릴 것 같아.
나는 어째서 네가 그 잡화상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구나. 그 사람은 ‘간 간 콩’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간 땅-콩’이라고 한 거야. 사실 ‘간 땅콩’이 유일하게 사리에 맞는 이름이라고 봐야지. 땅콩은 땅에서 자라지? 따라서 땅콩인 거고, 그걸 땅에서 따다가 갈면 간 땅콩이 되는데, 이게 땅콩 버터보다 훨씬 적확한 이름이 아니겠어? 다만 네가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XXX
어원학자 아가씨
h. 한프 (P71)
95번가 이스트 14번지
1952년 2월 9일
나무늘보 씨:
당신이 뭐든 읽을 것을 보내주기 전에 여기서 썩어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당장 브렌타노 서점으로 달려가 제가 원하는 것이 무어라도 있는지 찾아볼랍니다.
저한테 보내주지 않고 있는 도서 목록에 윌턴의 생애를 추가하셔도 돼요.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사는 것은 제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에요. 입어보지 않고 옷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죠. 하지만 여기 도서관의 윌턴의 생애는 대출이 안 된답니다.
구경은 할 수가 있죠. 42번지 분관에 있어요. 그러나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는 거예요! 거기 여직원이 놀란 얼굴로 그러더라구요. 밥도 여기서 먹어라. 그러고 나서 커피 한 잔 없이, 담배 한 대 없이, 아니 공기도 없이, 여기 315호실에 앉아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라, 이거죠.
상관없어요. Q가 충분히 인용을 해줬기 때문에 제가 좋아할 책이라는 걸 알아요. 그 사람이 좋아한 것은 저도 다 좋더라고요. 소설만 빼고요. 저는 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사람들, 일어나지 않은 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하루 종일 뭐하세요? 혹, 서점 뒤켠에 앉아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계시는지? 누군가한테 책 한 권 팔아보는 건 어때요?
당신의 한프 양.
(친구라면 저를 헬렌이라고 부른답니다)
추신. 따님들하고 노라에게, 별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순절 선물로 나일론 양말을 받게 될 거라고 전해주세요. (P73-74)
마크스 & Co. 중고서적
채링크로스 가 84번지
런던 W.C.2
헬렌 한프 양
미국
뉴욕주 뉴욕시 28
95번가 이스트 14번지
1952년 2월 14일
친애하는 헬린,
이제 당신 호칭에서 ‘양’을 빼버릴 때가 되었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쌀쌀맞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가 보내는 모든 편지의 사본이 사무용 서류철로 묶이는 까닭에 공식적인 호칭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는 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에 사본도 없겠지요.
오늘 정오에 마술처럼 나타난 나일론 양말을 보고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한참을 어리둥절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점심을 먹고 돌아와 보니 ‘헬렌 한프로부터’라는 쪽지와 함께 제 책상 위에 나일론 양말이 있더라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또 언제 온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딸아이들은 아주 신이 났고, 직접 당신에게 편지를 쓸 작정인 것 같습니다.
유감스러운 소식이 있습니다. 한동안 몸져누워 있던 우리 친구 조지 마틴 씨가 지난주 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 우리 서점에서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분이었습니다. 친구를 이렇게 잃은 데 더하여 국왕까지 급작스레 서거하니, 여기는 지금 온통 애도의 공기에 젖어 있습니다.
당신의 수많은 자상한 선물에 과연 보답할 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영국 여행을 결심하신다면, 머물고 싶은 한 언제까지나 쓰실 수 있는 침대가 오크필드 코트 37호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모두의 기원을 담아
프랭크 도엘 (P75-76)
뉴욕시
95번가 이스트 14번지
친애하는 프랭크:
원래는 낚시의 명수가 도착한 날 편지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냥 고맙다는 인사 편지요. 목판화만으로도 이 책 값의 열배 이상 가치는 되겠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브로드웨이 영화표 한 장 값에, 또는 충치 하나 뗌질하는 비용의 50분의 1 값에 평생 소유할 수 있다니, 세상 참 이상하지요?
뭐, 그 책들이 제 가치만큼 가격이 나간다면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겠지만요!
마침내 제가 (소설을 싫어하는 이 제가) 제인 오스틴에 착수하여 오만과 편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소식에 즐거워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제 책으로 하나 구해주실 때까지 도서관에 돌려주지 않으렵니다.
노라와 시종 분들께 안부를 전하며
HH (P83)
뉴욕시
95번가 이스트 14번지
1952년 12월 12일
‘채링크로스 가 84번지, 그녀의 벗들’에게:
애서가의 명시선이 포장지를 빠져 나왔습니다. 금박찍기 가죽 장정에 금테 두른 책 마구리, 단박에 제 장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꼽혔습니다. 물론 뉴먼 초판을 포함해서요, 워낙 새것처럼 원래 상태 그대로라서 누구 다른 사람이 읽은 적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가장 애교 넘치는 부분에서 자꾸만 펼쳐지는 것이 마치 전 주인의 유령이 내가 읽어본 적 없는 것을 짚어주는 듯 하답니다. 가령 트리스트럼 샌디가 자기 부친의 남다른 서재를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 서재에는 ‘큰 코를 주제로 해서 쓰인 모든 책과 논문이 있다’는 거예요(프랭크! 트리스트럼 샌디를 찾아줘요!).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으로는 불공평하다고 봐요. 제가 보낸 것은 일주일이면 싹 먹어치우고 설날이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제가 받은 것은 죽는 날까지 간직했다가 누군가 그것을 아껴줄 이에게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잖아요. 저는 앞으로 태어날 애서가들을 위하여 최고의 구절들마다 연필로 살그머니 표시를 남겨둘 생각이에요.
모두에게 감사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헬렌 (P90-91)
마크스 & Co. 중고서적
채링크로스 가 84번지
런던 W.C.2
헬렌 한프 양
미국
뉴욕주 뉴욕시 28
72번가 이스트 305번지
1957년 5월 3일
친애하는 헬린,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세요. 지난 편지에서 요청한 세 권이 일제히 당신한테 가고 있습니다. 1주일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묻지 말아요. 그저 마크스 서점의 서비스라고만 생각해줘요. 부족한 5달러 청구서를 여기에 동봉합니다.
며칠 전에 당신 친구 두 사람이 들렀더군요.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아주 매력 넘치는 젊은 부부였어요. 애석하게도 시간이 없어서 담배 한 대 피우고는 바로 떠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면서요.
올해는 어느 해보다 미국 방문객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는 가슴에 고향과 이름을 적은 커다란 명찰을 가슴에 붙이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수백 명의 변호사 무리도 있고요. 다들 여행이 즐거운 표정이던데, 그러니 당신도 내년에는 꼭 와야 해요.
우리 모두의 축원을 담아
프랭크 (P108-109)
헬렌 한프, 뉴욕주 뉴욕시 21 72번가 이스트 305번지
1961년 3월 10일
친애하는 프랭키 --
10달러를 동봉하니, 부디, 부디, 무사히 받으시길.... 제대로 도착해야 할 텐데요. 요즈음 들어오는 게 많지는 않지만 루이는 완불을 바라네요. 그이는 법정의 빈털터리들한테 이골이 난지라 270년이 지나서 다시 또 빈털터리가 사는 집으로 오고 싶지 않대요.
어젯밤에 당신 생각을 했어요. 하퍼스의 편집자가 저녁 식사차 여기 왔었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다가 제가 랜더의 ‘이솝과 로도피스’를 ‘명예의 전당’ 주인공으로 극화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제가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나요? 새러 처칠이 천진난만한 눈동자의 로도피스를 연기했지요. 어느 일요일 오후에 방송을 탔는데, 방송되기 두 시간 전에 <뉴욕타임스>의 일요일 서평란을 펼쳤다가 3쪽에서 폴리 애들러의 책 ‘집은 가정이 아니다’에 관한 평을 읽었어요. 전부가 매음굴에 관한 글이고, 제목 밑에 그리스 소녀의 두상 조각 사진이 실려 있고 이런 설명이 붙어 있어요. ‘로도피스,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창녀.’ 랜더는 이 점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지요. 학자라면 랜더의 로도피스가 사포의 남동생을 알거지로 만들어버린 그 로도피스라는 사실을 알겠지만, 저는 학자도 아닌 데다가 어느 해 겨울 절치부심하며 그리스어 어미를 암기한 것이 전부지만, 그나마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이 일화를 얘기하는데 진(저와 일하는 편집자예요)이 묻는 거예요. “랜더가 누구예요?” 제가 어찌나 흥분해서 설명을 했는지 진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도중에 제 말을 끊는 것이 아니겠어요.
“당신과, 당신의 그 오래된 영국 책들이란!”
어떤지 아시겠지요, 프랭키? 살아 있는 사람 중 저를 이해하는 사람은 당신뿐이랍니다.
XX
hh
추신: 진은 중국인이에요. (P130-131)
1969년 4월 11일
친애하는 캐서린 --
책장을 정리하다가 사방에 책으로 둘러싸여 앉아 순풍에 돛단 여행을 기원하며 몇 자 끼적입니다. 브라이언과 런던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길 빌어요. 브라이언이 전화로 ‘여비만 있다면 우리랑 같이 가시겠어요?’ 그러는데, 하마터면 울음이 터질 뻔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대로가 나을지도, 너무나 긴 세월 꿈꿔온 여행이죠. 단지 그곳 거리를 보고 싶어서 영국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들은 자기네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러 영국에 간다고. 제가, 나는 영국 문학 속의 영국을 찾으러 영국에 가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더군요. “그렇다면 거기 있어요.”
어쩌면 그럴 테고, 또 어쩌면 아닐 테죠. 주위를 둘러보니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요. 여기에 있다는 것.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헬렌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