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슬픈 카페의 노래> 1991년
<슬픈 카페의 노래>는 1951년 발표된 이후 많은 미국과 유럽 전체에서 사랑을 받아 1991년 사이먼 캘로우 감독,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키스 캐러딘 주연으로 미국에서 영화화가 되었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 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어밀리어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멀리 어두운 들판 너머로 연인과 사랑을 나누러 가는 흑인의 구성진 노랫가락이라도 들리면 딱 좋을 그런 밤이었다. 아니면 조용히 앉아서 기타를 치거나, 아무 생각없이 그냥 혼자 앉아 쉬어도 좋을 법한 밤이었다. 거리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지만, 미스 어밀리어의 가게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현관 입구에는 다섯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명, 스텀피 맥페일은 불그스레한 얼굴에 섬세한 보랏빛 기운이 도는 아주 작은 손을 가진 공장장이었다. 계단 맨 위에는 작업복 차림의 쌍둥이 레이니 형제가 있었는데, 둘다 똑같이 깡마른 데다가 행동이 느렸고, 은발에다 잠에 취한 듯한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맨 아래 계단 가장 자리에 앉아 있는 헨리 메이시는 인사성 밝고 예의 바르지만 유난히 겁이 많고 수줍음을 잘 탔다. 미스 어밀리어는 커다란 장화를 신은 발을 포갠 채, 열려 있는 문 한쪽에 기대서서 무심히 주워 든 밧줄의 매듭을 끈기있게 풀고 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꽤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P14-15)
직조기와 저녁 도시락, 잠자리, 그리고 다시 직조기. 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방적공이 어느 일요일에 그 술을 조금 마시고는 늪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그 꽃을 올려놓고 황금빛의 정교한 꽃받침을 살펴볼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고통처럼 날카로운 향수가 일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눈을 들어 1월 한밤중의 하늘에서 차갑고도 신비로운 광휘를 보고는 문득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지독한 공포로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 어밀리어의 술을 마시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을 느낄 수도,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이 경험들이 보여 주는 것은 진실이다. 그 술을 마시면 영혼이 따뜻해지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P23)
어밀리어가 서 있는 자리에는 난로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비치고 있어서 그녀의 기다랗고 거무튀튀한 얼굴이 다소 밝아 보였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고통, 당혹감, 그러면서도 불확실한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평상시처럼 그렇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지도 않았고, 종종 침을 삼키기도 했다. 피부는 창백해진 듯했고,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큰 손에서는 진땀이 나는 듯했다. 그날 밤 그녀의 표정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 눈은 피안을 향하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P45)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반드시 결혼반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젊은 남자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 아이,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어서도 20년 전 어느 날 오후, 치호 거리에서 스쳤던 한 낯선 소녀를 가슴에 간직 한 채 계속해서 그녀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목사가 타락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 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 가는 데에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것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P50-51)
자, 이게 바로 오래전 어밀리어의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기괴한 사건을 두고 오랫동안 찧고 까불고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에 드러난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P65)
그 침대는 너무 높아서 밑에 나무로 만든 2단짜리 발판이 놓여 있었다. 전에 이 방을 쓰던 주인들이 이 발판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의 꼽추 라이먼은 밤마다 그것을 끌어내고는 보란 듯이 딛고 올라섰다. 그 발판 옆에는 눈에 안 띄게 적당히 치워놓은 분홍색 장미 무늬의 사기 요강이 놓여 있었다. (P67)
그런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이 그렇듯 모든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으레 값을 치러야 하고, 오직 돈으로만 살 수 있다. 목화 gs 포나 당밀 2파운드 값에 대해서는 따져 볼 필요도 없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아무런 값도 매겨져 있지 않다.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고, 값을 치르지 않고 얻어진 것이다. 그러면 삶의 가격은 얼마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때때로 삶이란 전혀 가지 없거나 만약 있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내가 처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결국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P102)
겨울이 닥쳐와서 날씨가 다시 추워졌고, 공장의 마지막 교대가 끝나기도 전에 날은 깜깜해졌다. 아이들은 모두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고, 여자들은 불 앞에서 치마 뒷자락을 들어 올려 꿈결같이 따뜻하게 몸을 데웠다. 비가 온 뒷면 진흙 길은 바큇자국이 난 그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었고, 집집마다 창문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깜빡거렸으며 복숭아나무들은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했다. (P103)
마을 사람들은 이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 그런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미스 어밀리어의 카페에 오기 전에 세수를 했고 카페에 들어올 때는 정중하게 문지방에 신발을 문질러 흙을 털었다. 카페에 앉아 있는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쓰라린 생각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P105)
이는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 한 번이라도 같이 살아보고 난 후에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다, 난롯불만 타고 있는 방에서 갑자기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멈출 때 느껴지는 정적과 텅 빈 집안에 너울거리는 그림자- 이런 혼자라는 공포와 마주하기 보단 차라리 철천지 원수를 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15)
언젠가는 죽을 열두 명의 인간
포크스폴스 도로는 마을에서 4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이 일하고 있다. 이 도로는 자갈을 여러 겹 깔아 포장한 길인데 주(州)에서는 도로의 울퉁불퉁한 면을 고르게 하고 위험한 곳은 넓히기로 한 것이다. 죄수들은 열두 명으로, 전부 흑백으로 줄무늬가 쳐진 죄수복을 입고 발목마다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총을 든 간수가 한 명 있는데 그는 너무나 뚫어져라 죄수들을 감시하는지라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죄수들은 동이 트면 교도소 호송차에 실려와 떼 지어 내렸다가는 8월의 잿빛 황혼이 드리워질 때 다시 짐승 몰이 하듯 몰려 차에 실려가버린다. 그곳에서는 온종일 진흙땅을 파는 곡괭이 소리, 강렬한 햇빛, 그리고 땀 냄새가 있다. 그리고 그곳엔 매일 노래가 있다. 누군가 침울한 목소리로 콧노래 비슷하게 한 소절을 시작하면, 마치 질문에 대답하듯 얼마 후 다른 목소리가 어울리고 곧이어 모든 죄수들이 합창을 한다. 노랫소리는 눈부신 황금빛 햇살 속에서 더욱더 우울하게 들리고 그 가락에는 슬픔과 즐거움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그 소리들이 열두 명의 죄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또는 드넓은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다. 이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고 희열과 공포로 몸서리치게 한다. 그러다가 서서히 노랫소리가 잦아들어 한 가닥 외로운 선율만 남게 되면 다시 침묵 속에 거친 숨소리와 태양, 그리고 곡괭이 소리만 남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죄수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단지 이 지방 출신의 흑인 일곱 명과 백인 청년 다섯 명, 언젠가는 죽을 운명인 열두 명의 인간일 뿐이다. 함께 묶여 있는 열두 명의 인간들. (P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