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 더 프리티 호시즈> 2000년
코맥 매카시의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말과 총격전, 운명적 사랑 등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서부 장르 소설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그 형식을 띠고 있지만, 코맥 매카시 특유의 질감을 덧입혀져 그 전통성에서 살짝 벗어난 독특한 소설이다. 또한 한 소년의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미국인 할아버지의 장례식으로 시작하여, 주인공의 목장에서 일했던 한 맥시코인 노인의 장례식으로 끝이 난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주인공, 존의 미국에 대한 시각을 상징한다. 마지막 장면의 장례식은 존이 그토록 원했던 카우보이의 삶, 즉 서부개척시대의 끝을 암시한다. 영화 <올 더 프리티 호시즈All the Pretty Horses>는 빌리 밥 손턴이 각색하였고, 맷 데이먼과 페넬로페 크루스가 출연했다.
그가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와 똑같았다. 그들에게는 피가 있고 피에는 열기가 있다. 그의 모든 존경과 모든 사랑과 모든 취향은 뜨거운 심장을 향한 것이었고, 그것은 영원히 변함없을 것이다. (P13)
그들은 온종일 거의 아무 말도 않했다. 안장 앞쪽으로 조금 쏠려 앉은 소년의 아버지는 안장 머리 5센치미터 위에서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있었다. 부서질 듯 여원 몸은 옷 속에서 길을 잃었다. 움푹 들어간 두 눈은 저 앞의 세상이 변해 버렸다는 듯, 혹은 다른 곳에서 목격했던 것들로 인해 저 앞의 세상까지 의심스럽다는 듯 그 일대를 둘러보았다. 마치 다시는 그곳을 볼 수 없다는 듯이. 더 끔찍하게는 이제야 그곳을 보았다는 듯이. 예전이나 앞으로나 언제나 변함없을 듯이. 아버지보다 약간 앞쪽에 멈추어선 소년은 그 땅이 본디 자신의 땅이었으며 자신이 곧 그 땅이라는 듯, 더구나 악의나 불운으로 말이 없는 기묘한 땅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기필코 말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듯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올바른 세상이 되는 데 필요한 무언가가 혹은 자신이 세상에 올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찾기 위해 언제까지고 방랑할 것이며,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것임을 깨달을 것이고, 그 깨달음은 옳을 것이다. (P36-37)
이봐, 이 말은 꼭 해야겠어.
존 그래디가 몸을 숙여 침을 뱉었다. 그래, 해.
내가 멍청한 짓을 할 때는 늘 그 전에 내린 어떤 결정 때문이었어. 결정 자체가 잘못 되었던 건 아니야. 그냥 결정을 내렸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 그런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무슨 뜻인가 하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 기회라는 거야.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말이야.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 장담해. (P112)
잘생긴 말은 예쁜 여자나 마찬가지지. 쓸데없이 문제만 일으키거든. 남자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제대로 된 것 하나면 돼. (P125)
그들은 다음 날 하루 종일 구릉지를 넘어 서쪽으로 향했다. 훈제하여 반쯤 말린 사슴 고기를 잘라 먹은 탓에 기름과 검정투성이가 된 손을 말 등에 문질러 닦고 물병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그들은 주변 경치에 감탄했다. 폭풍이 부는 남쪽 수평선에는 뭉게구름의 기다란 검은 덩굴 같은 끄트머리에서 빗줄기가 늘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그날 밤 초원에 우뚝 솟은 바위에서 야영하는 동안, 한결같은 어둠이 깔린 수평선을 따라 번개가 번쩍이며 저 멀리 산맥을 조롱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평야를 가로지르다 바하다에 이르자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자신들은 바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마셨다. 산을 오를수록 추위가 더해가는 가운데 해 질 무렵 코르디예라(대산맥) 봉우리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로만 듣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짙은 보라색 안개 아래 푸른 대지가 펼쳐지고, 서쪽 하늘에서는 길게 줄지은 물새들이 해 지기 전에 서두르는 듯 뭉게구름 아래 드리운 새빨간 복도 같은 하늘을 달려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마치 불타는 바다 속을 달리는 열대어 같았고, 해안가 초원에는 바케로들이 황금 먼지 사이로 소 떼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P130)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의 생각은 말과 광활한 대지와 다시 말로 이어졌다. 한 번도 두 발로 선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영원히 그 영혼에 머무르고자 하는 메사의 야생마들. (P167)
그녀가 멕시코시티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북쪽 하늘에 층층이 쌓인 먹구름 아래 품위 있게 상체를 펴고서 말을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이었다. 앞으로 비스듬히 기운 모자의 끈이 턱 아래에 단단히 묶여 있고 검은 머릿결이 어깨 위로 이리저리 흩날리는데 뒤에서 번개가 검은 구름을 뚫고 조용히 내리쳤다.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후두둑 떨어지는데도 태연히 말을 몰며 갈대가 무성한 희끄무레한 호수와 목초지를 지나는 그녀를 빗줄기가 야생의 여름 풍경 속에 완전히 감싸 안았다. 진짜 말, 진짜 사람, 진짜 땅, 진짜 하늘인데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의 꿈이었다. (P185)
그녀는 그를 유심히 뜯어보았지만, 그 눈길에서 다정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거든. 흉터를 얻게 된 사연은 결코 잊을 수 없지. 안 그런가? (P189)
나한테는 조언을 해줄만한 사람이 없었다네. 하긴 누가 조언을 한다 해도 내가 듣지 않았을 테지만. 난 남자들의 세계에서 자랐네. 그래서 그 세계에서 잘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지. 그래도 그때 반항적으로 살았던 덕분에 다른 사람의 반항심을 아주 잘 알아볼 수 있게 되었네. 하지만 전통을 무너트려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 설령 있었다 해도 날 무너트리려는 전통에만 한정되어 있었지. 우리를 구속하는 힘의 존재는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네. 전통과 권위는 이제 결점으로 전락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없어. 조금도 말일세. (P190)
진실은 하나뿐입니다. 진실은 실제 일어난 일이지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P234)
내 말 잘 들어. 우릴 죽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 내 말 알겠어? 난 저놈들이 날 죽이게 만들거야. 난 절대 물러서지 않아. 우리를 죽이거나, 우리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야. 그 중간은 있을 수 없어. (P252)
페레스는 미소를 지었다. 가도 좋네. 내 말을 안 믿는 군. 돈도 마찬가지지. 미국인들은 이게 항상 문제야. 그네들은 더러운 돈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지. 하지만 돈에는 더럽고 깨끗하고가 없어. 멕시코인들은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 돈에 뭐하러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겠나? 돈이 좋은 것이라면 그건 무조건 좋은 것이야. 나쁜 돈은 없어. 멕시코인은 돈이 더러운지 깨끗한지 따위로 고민하지 않아. 그런 건 아주 비정상적이지. (P269)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힘겨운 삶을 사신 만큼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잘못 생각했군.
그런 것 같군요.
내 경험상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마음이 더 넓어지는 것은 아니더군.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P317)
불운을 견뎌 낸 이들은 특출해지는 법이니 불운을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힘으로 여겨야지, 불운 때문에 움츠러들었다가는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쓰라림 속에 묻혀 버리게 되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하는 모험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했어..... 그날 밤 나는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네. 나는 정말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불구나 불행을 견딜 만한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문했지. 진정 가치 있는 사람이라면 그 가치가 불확실한 운에 좌우될 리가 없다고, 가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야. 오래지 않아 내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네. 용기는 언제나 지속되는 법이며, 겁쟁이가 가장 먼저 버리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야. 자기 자신을 버리게 되면 남들을 배신하는 것도 쉬워지지. (P325)
그날 밤 여기 정원에서 구스타보는 커다란 부상이나 상실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강력한 유대감을 갖게 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았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유대감은 슬픔의 유대감이며, 가장 견고한 단체는 비통의 단체지. (P329)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지 두고 보세.
운명을 안 믿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녀는 손을 저었다.
안 믿는다는 건 아니네. 운명에게 지배받기를 거부했을 뿐이지. 운명이 법이라면 운명 역시 그 법에 종속되어 있는 것 아니겠나? 인간은 어디에라도 책임을 지우기 마련이야. 그것이 본성이지. (P333)
그는 예전에 아버지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겁에 질려서는 돈을 벌 수 없고, 걱정에 눌려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P341)
그는 밤이 되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벌판에서 잠을 잤다. 모닥불도 피우지 않았다. 고삐에 묶인 말이 풀 뜯는 소리와 공허함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누워, 둥근 반구를 따라 돌다 땅 끝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고통이란 형태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알을 갈 따스한 인간의 영혼을 찾아다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무엇으로 인해 사람이 그런 존재에게 무방비 상태가 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존재에게는 마음이 없으니 영혼의 한계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을 몰랐던 그는 영혼에 한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었다. (P353-354)
그는 알레한드라의 완만한 어깨선에서 처음 보았던 슬픔을 생각했다. 그 슬픔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는 철이 든 후 느껴 보지 못했던 깊은 고독감에 빠져 들었다. 이 세계를 사랑함에도 이 세계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세계의 아름다움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심장은 끔찍한 희생을 바탕으로 뛰는 것이며 세계의 고통과 아름다움은 각자 지분을 나눠 가지는데, 끔찍한 적자로 허덕이는 와중에 단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피를 바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385-386)
그는 텅 빈 식당 창가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신께서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시작할 때 삶의 진실을 모르게 하신 것은 정말 옳은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젊은이들은 아예 인생을 시작할 엄두도 못 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P388)
그는 마음을 진정하려는 듯, 혹은 땅을 축복하려는 듯, 혹은 늙든 젊든 부자든 가난하든 검든 희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세상을 늦추려는 듯 잠시 양손을 뻗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리 몸부림치든, 그 이름이 무엇이든.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세상은 달려갔다. (P410)
붉은 사막을 지나자 붉은 먼지가 피어올라 말의 다리를 맹렬히 공격해 댔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불며 저 앞의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불모의 땅인 만큼 소라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해질 녘 핏빛 태양 앞에 황소 한 마리가 제물로 바쳐져 고통당하고 있는 짐승처럼 먼지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핏빛 먼지가 태양을 온통 휘감았다. 그는 발꿈치로 말을 살짝 때려 앞으로 나아갔다. 태양이 그의 얼굴을 구리빛으로 물들이고 붉은 바람이 어둠의 땅을 건너 서쪽에서 불어오는데, 자그마한 사막의 새들이 마른 고사리 숲과 말과 기수 사이에서 재잘거렸다. 기다란 검은 그림자는 마치 세상의 유일한 존재의 그림자인 양 말을 바싹 뒤따랐다. 그러다 어두워지는 땅 속으로, 다가올 세상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P41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