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 1957년
<설국>(1965)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건너편 자리에서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島村)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눈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처녀는 창문 가득 몸을 내밀어 멀리 외치듯,
“역장님, 역장님--”
등을 들고 천천히 눈을 밟으며 온 남자는, 목도리로 콧등까지 감싸고 귀는 모자에 달린 털가죽을 내려 덮고 있었다.
벌써 저렇게 추워졌나 하고 시마무라가 밖을 내다보니, 철도의 관사(官舍)인 듯한 가건물이 산기슭에 을씨년스럽게 흩어져 있을 뿐, 하얀 눈 빛은 거기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P7-8)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차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P10)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 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P12)
애당초 오직 이 여자를 원하고 있었음에도 여느 때처럼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았다고 분명히 깨닫자, 시마무라는 자신이 싫어지는 한편 여자가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삼나무숲 그늘에서 그를 부른 이후, 여자는 어딘가 탁 트인 듯 서늘한 모습이었다.
가늘고 높은 코가 약간 쓸쓸해 보이긴 해도 그 아래 조그맣게 오므린 입술은 실로 아름다운 거머리가 움직이듯 매끄럽게 펴졌다 줄었다 했다. 다물고 있을 때조차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어 만약 주름이 있거나 색이 나쁘면 불결하게 보일 텐데 그렇진 않고, 촉촉하게 윤기가 돌았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지도 처지지도 않아 일부러 곧게 그린 듯한 눈은 뭔가 어색한 감이 있지만 짧은 털이 가득 돋아난 흘러내리는 눈썹이 이를 알맞게 감싸 주고 있었다. 다소 콧날이 오똑한 둥근 얼굴은 그저 평범한 윤곽이지만 마치 순백의 도자기에 엷은 분홍빛 붓을 살짝 갖다 댄 듯한 살결에다, 목덜미도 아직 가냘퍼, 미인이라기보다는 우선 깨끗했다.
접대부로도 나간 적 있는 여자치고는 약간 새가슴이었다. (P30-31)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번 더 목소리에 침을 주려는 순간, 눈(雪)이 울릴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P38-39)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 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머언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시마무라가 다가온 것을 알고 여자는 난간에 가슴을 대고 푹 엎드렸다. 그것은 연약하기보다 이런 밤을 배경으로 이보다 더 완고한 것은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마무라는 또 시작인가 싶었다.
그러나 산들이 검은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셈인지 온통 영롱한 흰 눈으로 뒤덮인 듯 보였다. 그러자 산들이 투명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늘과 산은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P40-41)
“당신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오직 한 사람 아냐? 가장 오래된 일기에 맨 먼저 써놓은 그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지 않는 법이 어디 있나? 그 사람 목숨의 맨 마지막 장에 당신을 쓰러 가는 거야.”
“싫어요,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이 말이 차가운 박정함으로도, 너무나 뜨거운 애정으로도 들리기에 시마무라는 망설였다.
“일기 따윈 이제 쓸 수 없어요, 태워버릴 거야.”하고 고마코가 중얼거리는 사이, 왠지 뺨이 붉어졌다. (P74)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엷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 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개울을 따라 이윽고 너른 벌판으로 나오자, 신기하게 깍아지른 정상으로부터 완만하고 아름다운 사선(斜線)이 멀리 산기슭가지 뻗어내린 능선 위에 달이 떠올랐다. 들판 끝, 단 하나의 볼거리인 그 산의 온전한 모습을 엷게 노을진 하늘이 짙은 남빛으로 선명하게 그려냈다. 달은 아직 흐릿하여 겨울밤의 차고 깨끗한 느낌은 없었다.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하늘이었다. 산자락에 펼쳐진 들판이 거침없이 좌우로 드넓게 뻗어나가 강가에 거의 닿을 만한 지점에 새하얀 수력발전소 같은 건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량한 겨울 차창 밖에서 어슴푸레 저물어갔다. (P75-76)
삼나무에서 푸드득 날아오르는 저녁바람 속 까마귀가 크도다, 하는 노래가 있지만, 여기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삼나무숲 앞에는 오늘도 잠자리떼가 흐르고 있다. 저녁이 깊어지면서 잠자리들의 흐름도 다급하게 속력을 내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출발 전 역 매점에서 새로 나온 이 지역의 산 안내서를 사왔다. 그것을 눈에 띄는 대로 읽고 있자니, 이 방에서 내다보이는 국경의 산들 중 어느 한 정상 부근에는 아름다운 못과 늪을 잇는 오솔길이 있어 일대의 습지에서 다양한 고산식물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고추잠자리가 무심히 노닐다가 모자나 사람 손, 때로는 안경테에까지 날아와 앉아, 그 한가로움이 도시의 잠자리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씌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잠자리떼는 뭔가에 쫓기고 있는 듯 보인다. 날이 저물수록 거무스름해지는 삼나무숲 빛깔에 제 모습이 사라질까 초조해하는 것 같다.
먼 산은 석양을 받아, 봉우리에서부터 단풍져 내리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훨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 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P94-95)
“싫은걸.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게로군.”
“그래요.”하고 고마코는 방긋 웃음을 띠며 끄덕이더니 그 미소에 갑자기 불이 붙은 양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모르게 그의 손가락을 쥔 손에도 힘을 주며,
“벽장 속에 숨어 있었어요. 하녀가 전혀 눈치 채질 못해요.”
“도대체 언제부터 숨어 있었지?”
“방금. 하녀가 불을 가져왔을 때죠.”
그러고는 다시 생각나 웃음이 그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득 귓불까지 빨개지자, 이를 얼버무리듯 이불 바락을 쥐고 흔들며,
“일어나요, 일어나세요.”
“추워.” 하고 시마무라는 이불을 끌어안은 채, “여관 사람들은 벌써 일어났나?”
“몰라요. 뒷문으로 왔어요.”
“뒷문으로?”
“삼나무 숲을 헤치며 올라왔죠.”
“그런 길이 있나?”
“길은 없지만 가까워요.” (P100)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P134)
눈 속에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베 짜는 여인들이 생활은 그들이 완성시킨 지지미처럼 산뜻하고 밝지는 못했다. 마을 인상으로 충분히 그렇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지미에 관해 쓴 옛날 책에도 당나라 진도옥(秦稻玉)의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직녀를 고용해서까지 옷감을 짜는 집이 없었던 것은 한 필의 지지미를 짜는 데 워낙 많은 품이 들어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그토록 고생한 무명의 장인(匠人)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아름다운 지지미만 남았다. 여름에 서늘한 감촉을 주는, 시마무라 같은 이들의 사치스런 옷으로 변했다.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 시마무라에게는 문든 신기하게 여겨졌다. 온 마음을 바친 사랑의 흔적은 그 어느 때고 미지의 장소에서 사람을 감동시키고야 마는 것일까? 시마무라는 강가 아래에서 거리로 나왔다. (P135-136)
다리 저편에 저물어가는 산은 이미 하얗다.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옛 책에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시마무라가 아침 이부자리에서 단풍객의 우타이를 들은 그날, 첫눈이 내렸다. 올해도 벌써 바다와 산이 울렸을까. 시마무라는 혼자 여행을 다니며 온천에서 고마코와 줄곧 만나는 사이, 청각이 묘하게 예민해졌는지 바다와 산이 울리는 소리를 그저 연상만 해도 그 먼 울림이 귓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P137)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곳으로 몸이 둥실 따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P142-143)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고마코가 시마무라의 손을 잡았다. 시마무라는 돌아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줄곧 불을 지켜보는 고마코의 약간 상기된 진지한 얼굴에 불길의 호흡이 일렁거렸다. 시마무라의 가슴에 격한 감정이 복받쳐왔다. 고마코의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목은 길게 빼고 있었다. 거기로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갈 듯, 시마무라는 손가락 끝이 떨렸다. 시마무라의 손도 따스했으나 고마코의 손은 더 뜨거웠다. 왠지 시마무라는 이별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P148-149)
요코는 하늘을 보며 떨어졌다. 한쪽 무릎 약간 위까지 옷자락이 올라가 있었다. 땅에 부딪고도 장딴지에 경련이 일었을 뿐, 그저 실신한 모습이었다. 시마무라는 왠지 죽음은 떠올리지 않았으나, 요코의 내부에서 생명이 변형되는 순간임을 느꼈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요코는 그 찌르듯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몇 해 전인가.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러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시마무라는 다시 가슴이 떨렸다. 일시에 고카토와 함께한 시간들이 환히 비쳐진 것 같았다. 뭔가 애절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 (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