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레즈 데케루> 2014년
권태와 허위뿐인 결혼 생활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독살하려는 테레즈라는 여성의 내력과 심리를 상세히 묘사하는 소설로,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테레즈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이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스물한 살 때 보르도 중죄재판소에서 목격한 독설 사건을 토대로 <테레즈 데케루>를 집필했다. 남편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회부된 작고 가냘픈 여인과 증인의 증언, 물증인 위조된 독극물 처방전은 실제 사건에서 빌려온 소재이다.
테레즈, 많은 사람들이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 할 것이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너를 염탐하고, 네가 가는 길목에서 너를 붙잡고, 너의 가면을 벗기던 나는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소년이었던 나는, 숨 막히는 고등법원에서 너를 보았었다. 방청석의 한껏 치장한 여인들보다는 덜 잔인한 변호사들의 손아귀에 맡겨졌던, 작고 창백한 네 얼굴과 꽉 다문 너의 입술을 기억한다. 그 후 너는 시골의 어느 거실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남편과 늙은 부모의 간섭에 지쳐 넋이 나간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P23)
내가 나의 다른 어떤 주인공보다도 끔찍한 창조물을 생각해 냈다는 데 많은 이들이 놀랄 것이다. 미덕으로 넘쳐 나고 ‘관대한’ 존재에 대해서는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관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깃거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땅에 파묻힌 마음과 진창에 빠진 육체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테레즈, 나는 고통이 너를 주님 앞으로 이끌어가기를 바랐어야 했다. 그리고 네가 로쿠스타 성녀에 버금가는 여인이기를 오랫동안 바라왔었다. 하지만 고통받는 영혼의 타락과 속죄를 믿는 사람들조차도 너를 신성모독으로 비난했으리라.
이제 너를 떠나보내는 이 길 위에서, 나는 적어도 네가 혼자가 아니기를 희망해본다. (P24)
자유롭다는 것...... 그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베르나르 곁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그에게 마음속까지 전부 내보이는 것, 어두운 마음 한 곳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바로 오늘부터 숨기고 있던 것을 모조리 밝은 곳으로 꺼내자, 이런 결심을 한 테레즈는 기쁨에 휩싸였다. 아르줄루즈에 도착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준비할’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그녀의 독실한 친구 안 드 라 트라브가 행복하던 방학의 토요일마다 되풀이하던 말이었다. 내 시누이 안, 사랑스럽고 순진한 이여, 이 사건에서 네가 차지하는 비중이란! 가장 순수한 존재들은 매일 밤낮 그들이 어떤 일에 연루되고 있는지를, 그들의 어린아이 같은 종종걸음 아래로 독을 품은 싹이 트고 있는 사실을 모른다. (P38)
‘그녀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어디서부터 고백할 것인가? 욕망, 결심,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의 뒤엉킨 타래를 과연 몇 마디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 자신의 범죄를 아는 다른 모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백하는 거지? 나는 내 죄가 뭔지 몰라. 사람들이 내게 씌우려던 범죄는 내가 원치 않았던 거야. 내가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내 안에서, 그리고 내 밖에서 맹렬히 치밀던 이 힘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난 전혀 몰랐어. 그 힘이 나아가면서 파괴한 것을 보며 스스로도 공포를 느꼈었어.’ (P39)
‘그는 이해 못할지도 몰라. 처음부터 전부 다 다시 시작해야만 해....’ 우리 행동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 운명을 떼어내 버리고자 할 때, 우리의 운명은 뿌리가 너무 깊어 완전히 뽑아버릴 수 없는 식물과 비슷하다. 그녀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그러나 어린 시절 그 자체가 하나의 끝이요, 종착지인 것을. (P42)
어쩌면 결혼을 통해 지배욕이나 재산 욕심보다는 피난처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결혼으로 몰아붙인 것은 공포감이 아니었을까? 실리적인 소녀이자 가정적인 딸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최종 자리를 찾는 것을 서둘렀었다. 그녀는 뭔지 모를 위험에 대항해 안정을 찾고자 했다. 약혼 시절만큼 그녀가 이성적으로 보였던 때도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뿌리를 박고, ‘자기 자리를 잡았’으며 관습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구원했다. (P56)
이탈리아 호숫가로 갔던 신혼여행 동안 그녀는 많이 고통스러웠던가? 아니, 아니다. 그녀는 ‘속마음 감추기’ 게임을 했었다. 약혼자는 쉽게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니었다. 거짓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해도, 육체의 거짓말에는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욕망, 기쁨, 만족에서 오는 피곤함을 가장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테레즈는 몸으로 가식을 부릴 줄 알았고, 이로 인한 쓰디쓴 쾌락을 맛보았다. 남자에게 강제로 안기는 쾌감 섞인 미지의 세계. 그녀는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어쩌면 자기도 이 세계에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행복? 빗속에 파묻힌 풍경을 앞에 두고 햇빛 속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테레즈는 쾌락을 발견했다. (P61)
‘불쌍한 베르나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쁠 건 없어. 욕망이란 우리를 우리와 다른 괴물로 변하게 만드는 존재인걸. 그의 흥분 상태만큼 우리가 느끼는 교감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것도 없지. 나는 쾌락으로 빠져들어 가는 그를 늘 지켜보았어. 이 미치광이가, 이 간질 환자가 아주 작은 행동으로도 나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지친 상태였지. 절정의 끝자락에서 거의 항상 그는 갑자기 고독감을 느끼곤 했지. 격렬함에 맥이 풀리자 하던 걸 멈췄어. 그러고는 현실로 돌아와 이를 악물고 싸늘하게 버려진 채로 누워 있었던 바닷가에서의 나를 다시 보았지.’ (P62-63)
안이 보낸 단 한 통의 편지, 안은 글 쓰는 것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편지에는 테레즈 마음에 안 드는 문장이 단 한 줄도 없었다. 편지에는 실제로 느끼는 감정보다는 그 편지를 기쁜 마음으로 읽기 위해 우리가 느껴야하는 감정이 담겨 있는 법이다. 안은 아베제도 집안의 아들이 온 이래로 빌메자에 갈 수 없다고 불평했다. 고사리 숲에 있는 그의 긴 의자를 멀리서 봤다고 했다. 그녀는 폐결핵 환자를 무서워했다. (P63)
“두더지처럼 신중한 우리 가족들이 어찌나 우스운지! 보이는 결점을 두려워하는 거나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결함에 무관심한 거나 마찬가지죠..... 당신도 늘 ‘비밀스러운 병’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안그래요?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병이야말로 그런 비밀스러운 병이 아닌가요? 가족들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않죠. 우리 가족들은 자기네 오점을 숨기고 묻어버리는 데 마음이 너무 잘 맞아요. 하인들이 없었다면 아무도 모르겠죠. 다행히도 하인들이 있기에.....”
“당신 말에 대답 안 하리다. 당신이 일단 말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야. 그나마 나와 함께 있으면 불행 중 다행인 거지. 당신이 이걸 즐긴다는 걸 알아. 하지만 집에 가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은 당신도 알겠지. 우리 집안에서는 가족들을 화제로 농담하지는 않는다고.”
가족이라! 테레즈는 담뱃불이 꺼지게 내버려 두었다.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한 채, 수많은 인간 철창이 쳐진 새장을 상상해 보았다. 눈과 귀로 둘러싸여 있는 새장, 테레즈는 그곳에서 꼼짝 않고 웅크려 앉아 팔로 다리를 감싼 채 무릎을 턱까지 당기고 죽기만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P72-73)
비옥한 밭에 심긴 소나무는 빨리 성장한다. 하지만 나무 중심이 너무 빨리 썩게 되고, 한창 자랄 때에 나무를 벨 수 밖에 없다. (P89)
이 젊은 청년의 탐욕, 한 인간 존재가 보여주는 지성이 내게는 너무나 낯설게 보였기에 나는 그의 말을 자르지도 않고 듣고 있었지. 그래, 확실히 난 그에게 현혹되었어. 그것도 너무나 쉽게! 난 그에게 현혹되었어. 멀리서 양 떼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리는 발소리, 방울소리, 목동의 외침소리를 기억해. 청년에게 우리가 이 산장에 함께 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거라고 말했지. 나는 양 떼가 지나갈 때까지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가 말해 주기를 바랐어. 우리가 나란히 앉아서 공범이 공유하는 즐거움을, 이 침묵을 즐기고 싶었지. (P100)
위험하게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신을 찾아다니거나 신을 찾아내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일단 신을 찾아낸 사람은 신의 영역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죠. (P101)
“생각해 보세요. 이 거대하고 균일한 얼음 표면 아래에 모든 영혼이 갇혀 있습니다. 가끔 금이 가 시커먼 물이 드러나지요. 그러면 누군가 싸우다 사라지고 그 틈이 메워져 새로운 표면이 형성됩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각자의 운명이 특별한 겁니다. 그러나 모두 다 자신의 우울한 운명에 순종해야 한답니다. 물론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죠. 바로 거기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고, 가족들은 침묵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고장 사람들이 말하듯 ‘입을 다무는’ 것이죠.” (P106)
“진정한 내가 된다고요? 진정한 자신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P107)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라면 이성과 논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법이지! (P111)
힘들게 지어낸 그녀의 이야기는 전부 무너져 버렸다. 애써 준비한 고백이건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된다. 말하지 않는 이유조차 댈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가장 쉬운 방법은 입을 다물거나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리라. 그녀가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 밤은 여느 밤처럼 지나갈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태양이 뜰 것이다. 그녀는 어떤 일이 닥쳐도 빠져나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 무관심보다,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그녀 본연의 존재로부터 그녀를 떼어놓는 이 완전한 초연함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 삶 속의 죽음. 그녀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맛볼 수 있는 최대한의 죽음을 맛보고 있었다. (P130-131)
요양원에서 사람들이 테레즈의 행각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에게 알려 주었을 때 그의 냉철함을 칭송했지만, 그는 일부러 냉철하게 보이려 노력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존재들에게 진정으로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을 모르기에, 베르나르는 큰 위험에서 벗어난 후에 밀려드는 기쁨의 전율만을 느꼈을 뿐이다. (P139)
그녀는 이 집안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무너지게 될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녀를 괴물로 치부하는 그들이 옳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도 그들이 끔찍하게 보였다. 밖으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도록, 그들은 은근한 방법으로 그녀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이 강력한 ‘가족’이라는 기계가 나를 향해 돌진할 거야. 그것을 없애거나 그 사이에서 제때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야. 다른 이유를 탓할 필요도 없어. 그들이었으니까, 나였으니까 이렇게 된 거지. 2년이 채 안 되는 동안 나를 감추고, 체면을 세우고, 남을 속이기 위해 내가 했던 이 노력. (P146)
테레즈는 이미 떠난 고모에게 마음속으로 말한다. 살자,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시체처럼 살자. 저 너머를 보려고 애쓰지 말자. (P151)
테레즈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완전히 벌거벗은 메마른 대지를 좋아했다. 하지만 옷을 벗지 않으려는 듯 참나무에는 마른 잎새가 집요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아르즐루즈의 침묵이란 사실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가장 조용한 밤 시간에도 숲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한탄하고 불평하듯이 몸을 흔들다 잠이 들었다. 밤새 무한한 속삭임이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삶에는 미래가, 생각지도 못한 새벽이 올 것이다. 그 새벽은 사막처럼 고요해, 그녀의 수많은 수탉이 앙칼지게 울어대는 아르즐루즈의 기상 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여름이 오면 그녀는 한낮의 매미 소리와 밤의 귀뚜라미 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파리는 돌풍에 시달리는 소나무 숲이 아닌 위험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나무숲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사람 숲이었다. (P177-178)
“테레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는 이 여자의 시선을 한 번도 견뎌낸 적이 없었기에 눈길을 돌리고는 재빨리 말했다.
“알고 싶소..... 내가 싫어서 그랬던 거요? 내가 그렇게 끔찍했나?”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놀라기도 하고 짜증도 났다. 테레즈는 미소를 지으며 진지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베르나르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그녀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던졌을 바로 그 질문을....(중략)....
“베르나르, 이제는 작은 일로도 불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담뱃불을 밟아 끄는 나 자신, 소나무 그루 수나 수짓값 계산하기를 좋아하는 나 자신, 데케루 집안에 시집온 걸 자랑스러워하고, 랑드 지방의 좋은 가문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안락한 현실에 만족하는 나 자신, 그리고 이런 나 자신과 동시에 진정한 나 자신도 똑같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껴요. 아니, 아니죠. 하나의 모습을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킬 이유가 없어요.” (P185)
이 지방 또는 다른 지방, 소나무 또는 단풍나무, 바다 또는 평원,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좋아한들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피와 살이 있는 존재, 살아있는 존재 말고 그녀가 관심을 가질 대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돌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야. 강연도 박물관도 아니야.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것은 도시 속에서 동요하고 어떤 폭풍우보다도 더 강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살아 있는 숲이야. 어둠속에서 아르즐루즈의 소나무 숲이 내는 신음 소리 역시 인간적이기에 감동적이었던 거야.’ (P189-190)
테레즈는 술을 조금 마셨고 담배를 많이 피웠다. 그녀는 행복한 사람처럼 혼자 웃었다. 그녀는 정성스럽게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칠했다. 그러고는 길가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