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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20. 2024

애니 프루의 <시핑뉴스>

영화 <쉬핑 뉴스The Shipping News>  2002년

영화 <쉬핑 뉴스>(The Shipping News)는 미국에서 제작된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2001년 드라마 영화이다. 퓰리처상 픽션 부문의 상을 받은 애니 프루의 동명의 책 <The Shipping News>에 기반을 둔다. 케빈 스페이시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롭 코원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가 거친 직업들: 자동판매기용 사탕 배달원, 편의점 야간 근무 점원, 삼류 신문기자. 그리고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에 사별하고 슬픔과 좌절된 사랑을 가슴 가득 안은 채 그의 조상들을 낳은 바위섬, 그동안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생각도 안 했던 뉴펀들랜드를 향해 인생의 뱃머리를 돌렸다.

물의 땅. 그러나 코일은 물을 무서워했고 수영도 못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죽을힘을 다해 매달리는 그를 수영장으로, 개울로, 호수로, 바다로 던져 넣었다. 그래서 그는 소금물과 물풀의 맛을 안다.

아버지는 개헤엄을 배우는 데 실패한 막내아들의 모습에서 마치 악성 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듯 다른 실패들이 증식하는 것을 보았다. 말을 똑똑히 하는 것도 실패, 바른 자세로 앉는 것도 실패,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실패, 태도도 실패, 야망도 능력도 실패, 사실상 모든 것이 실패. 그것은 아버지 자신의 실패였다.            (P12)    

 

편치가 코일을 다시 부른 건 말수 적은 코일이 주위 사람들을 말하도록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건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기술이었다. 그의 경청하는 자세가, 아부 섞인 끄덕거림이 사람들에게서 의견과 회고, 이론, 추측, 설명, 개요와 해설을 끌어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그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러다가 다시 해고, 세차원, 복직.

해고, 택시 기사, 복직.

그는 카운티 내 지역들을 돌아다니며 하수위원회, 도로위원회의 논쟁을 듣고 다리 보수 예산에 관한 기사를 썼다. 지역 당국의 작은 결정들이 그에겐 심오하고 중대한 일처럼 여겨졌다. 인간의 저열함을 가르쳐주는 신문기자라는 직업. 문명의 부식된 본질을 드러내는 그 직업에서 코일은 질서 있는 진보라는 자기만의 환상을 만들어갔다. 와해와 질시의 분위기 속에서 합리적인 타협을 꿈꾸었다.        (P24)     

그에게는 트레일러 안을 돌아다니며 소리 내어 자문하는 습관이 생겼다. “누가 알아?” 그가 말했다. “누가 아냐고.”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날에 어떤 일이 닥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모로 세워진 상태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동전은 앞면으로도, 뒷면으로도 넘어질 수 있으니까.           (P27)     

“제발 좀 어른답게 굴어!” 페틀이 말했다. 그녀는 커피잔을 식탁에 두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코일은 고통이란 모름지기 속으로 조용히 삭여야 한다고 믿었고, 그게 상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밝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사랑의 시험, 고통이 클수록 사랑의 증거는 확실해진다. 지금 이 고통을 참으면 결국 좋은 날이 오리라. 언젠가는 반드시.

그러나 상황은 금속 상자의 여섯 면처럼 그를 옥죄어왔다.          (P35)  

   

“아내를 탓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녀가 사랑에 굶주렸던 거라고 생각해요. 늘 사랑에 허기졌던 거지요.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던 거예요.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녀가 한 일들은 잠시나마 그녀를 안심시켜줬죠. 전 그녀에게 늘 부족한 존재였어요.”

조카는 그런 뻔한 속임수를 믿는단 말인가? 고모는 기가 막혔다. ‘사랑에 굶주린 페틀’은 조카 자신의 창조물인 듯했다. 고모는 사진 속 페틀의 냉담한 눈과 요염한 포즈만 봐도 하이힐 신은 잡년임을 알 수 있었다. 사진 옆에는 코일이 물잔에 꽂아놓은 장미 한 송이가 있었다.       (P44)   

  

“어젯밤 히틀러의 배에 대한 문의 전화를 네 통이나 받았어. 독자들도 좋아하고, 내 아내도 좋아하고. 나도 직접 그 배를 구경하러 부두로 내려갔는데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구경하고 있더군. 물론 자넨 배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 그러니까 계속하게. 내가 원하는 기사가 바로 그런 거야. 이제부터 칼럼을 한 편 맡아, 알겠나? 해운 소식란에 항구에 들어온 배를 소개하는 칼럼을 쓰라고. 알았지? 매주 한 편씩이야. 킬릭클로 항구만이 아니라 해안을 오르내리면서 칼럼에 낼 만한 배를 찾아봐. 정기 여객선이든 유람선이든 상관없어. 당장 자네 컴퓨터를 주문해주지. 나가서 터트 카드한테 좀 보잔다고 하고.”

그러나 굳이 전할 필요도 없었다. 터트 카드는 유리 칸막이 너머로 둘의 이야기를 죄다 엿듣고 있었으니까. 코일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넛빔이 머리 위로 양손을 깍지 껴 흔들어 보였다. 그의 입에서 파이프가 춤을 췄다. 코일은 타자기에 종이를 끼웠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른여섯 살 먹도록 남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밖의 안개가 우유처럼 보였다.        (P217~218)  

   

그의 예리한 시선이 과거를 꿰뚫어보았다. 그는 철새떼 같은 인간 세대들과 유령선이 점점이 흩뿌려진 만과 다시 활기를 되찾은 마을과 생선 비늘로 반짝이는 그물이 드리운 심연의 바다를 보았다. 코일 일가가 세월로 악을 씻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 고모는 죽어 땅에 묻힐 것이고 코일과 웨이비는 늙어 꼬부라지고 딸들은 먼 도시로 떠나가리라. 헤리는 머리가 반백이 되어서도 나무 개와 색실에 환희를 느끼며 지붕 밑 다락방이나 계단 아래 작은 방에서 잠을 잘 것이다.

코일은 순수에 대한 감각을 되찾고 떨리는 균형 속에서 세상사를 이해했다.

세상 모든 일이 전조라는 껍질에 싸여 있는 듯했다.        (P290)  

   

“이제 와서야 깨달은 게 있어요.” 코일이 말했다. “페틀은 좋은 여자가 아니었어요. 어쩌면 그래서 그녀를 사랑했는지도 몰라요.”

“그래요.” 웨이비가 말했다. “헤럴드도 마찬가지예요. 난 그게 내 운명이라고 여겼죠. 상황이 악화될수록 점점 더 그렇게 여겼어요. 그게 다 내 운명이고 내 탓인 것 같았어요. 무슨 소린지 알죠?”

코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끄덕이며 마치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휘파람 부는 모양으로 씰룩거렸다. 미남 헤럴드와 매혹적인 페틀이 기억의 쥐구멍 속을 분주히 드나들었다.        (P445)  

   

코일은 딸에게 질질 끌려가며 웨이비의 눈길을,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아, 그만을 위한 눈길과 미소! 계단을 오르는데 문득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사랑은 돌아가면서 하나씩 꺼내 먹는 종합 사탕 봉지 속의 다양한 사탕 같은 것이고 우리는 사탕을 맛보듯 사랑도 이것저것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혀에 톡 쏘는 맛을 남기는 것, 밤의 향기를 일깨우는 것, 속이 쓸개처럼 쓴 것, 꿀과 독을 섞은 것, 금방 삼키게 되는 것, 그리고 평범한 눈깔사탕과 박하사탕 틈에 희귀한 것들도 섞여 있다. 독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것들 한두 알과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을 주는 것, 지금 그의 손은 그 평온과 부드러운 기쁨의 사탕을 집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P455)     


집에 돌아온 코일은 목욕을 했다.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코를 꼭 쥐고 물속으로 잠수하며 운명에 감사했다. 넛빔의 당밀 드럼통 대신 근사한 욕조를 쓸 수 있게 됐으니까.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다가 욕실문 뒤에 달린 전신 거울의 김을 닦아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정말 거구였다. 굵은 목, 거대한 턱, 짧고 억센 구릿빛 털이 박힌 두둑한 뺨. 누르스름한 주근깨. 우람한 어깨와 탄탄한 팔뚝, 늑대인간 같은 털복숭이 손. 불룩한 배까지 내려온 젖은 가슴털. 불그레한 음모의 숲에 둘러싸인, 뜨거운 목욕물에 선홍색으로 익은 큼직한 성기, 허벅지, 나무밑동 같은 다리, 그러나 그 모습은 뚱뚱하다기보다는 힘센 장사처럼 보였다. 코일은 자신이 육체적 성숙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중년이 머지않았지만 두렵진 않았다. 이제 못생긴 부분들을 헤아리기가 어려워졌다. 그건 어쩌면 헤아릴 수 없게 서로 뒤섞였거나 희미해져서 전체적인 모습으로 합쳐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겨드랑이가 터진 회색 잠옷을 걸치자 젖은 등짝에 옷이 달라붙었다. 다시금 환희가 스쳐갔다. 까닭도 없이.                 (P473)     

“잭 버깃이 피클 단지에서 벗어났다면, 목이 부러진 새가 날아갔다면, 또 어떤 일이 가능할까? 물이 빛보다 먼저 생겼을 수도 뜨거운 염소 피 속으로 다이아몬드가 깨질 수도, 화산이 차가운 불을 뿜어낼 수도, 바다 한 가운데에 숲이 나타날 수도, 게 위로 손만 가져가도 그 손 그림자에게 게가 잡힐 수도, 매듭 속에 바람이 갇힐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고통이나 불행이 없는 사랑도 가끔은 있으리라.”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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