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까마귀]
<사진집단 현장> 동아리방에서는 여름방학때 진행할 집단 작업 주제에 대한 논의와 학습이 이루어졌다. 학습의 주제는 사회과학 서적이나, 사진의 이론에 관한 주제에 대한 것이다. 5월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이번 주 주제였다. 다음달 5.18 민주화운동 10주기를 맞아 광주에 집단으로 작업할 기록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동아리 회원들의 10여명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매번 중요한 문제였다. 이론이 우선인지, 실천이 우선인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졌다. “그런데 사진은 언제 찍을 건가요?” “공부만 하다가 한 학기가 다 지나갔어요.” “사진의 미학공부도 해야 하고, 발터 벤야민이 어떻고, 롤랑 바르트가 어떻고, 수잔 손택이 어떻고, 하다가 정작 내가 어떤 사진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00 출판사에서 나온 사진 이야기는 번역서였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한사람이 번역한 것이 아니라 대학원생 여러명이 쪼개서 번역했다고 했다. 번역이 잘 못되었거나, 이해도가 없는 사람이 번역해서 그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았다. 이론을 한다는 것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우물은 깊어만 가고, 정작 깊어진 우물 속을 들여다보면 두레박의 끝은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줄을 당기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 학생운동도 마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민민투(民民鬪)다 자민투(自民鬪)다, NLPD논쟁은 사실 사진학과 학생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공산(公算)이 컸다. 운동가로 나서야 하는 것인지, 사진가로 나서야 하는 것인지. 사진가가 사진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되묻곤 했다. 영수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인철은 그래도 이론과 실천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의 몸과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이성과 감성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즈음 해방광장에서 모인 학생들은 정문 앞으로 몰려갔다. 해방광장의 바닥에는 찢겨진 성조기 바닥그림이 있었다. 성조기를 밟으며, “무엇이 두려우라? 출정하여라,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광주출정가를 부르면서. 정문으로 향하는 진입로에는 양 옆에 은행나무가 멋들어지게 줄지어 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면 절경이었다. 진입로를 노랗게 물들인 양탄자가 깔린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맨 선두에서 화염병을 던지고, 전경(전투경찰)들은 입구를 봉쇄하여 검은 헬멧에 검은 방패로 인간 차벽을 만들어 놓고 있다. 뒷열은 청자켓에 오토바이 헬멧을 쓴 이들이 곤봉(몽둥이)을 들고 있고, 최루탄을 쏠 준비를 하고 있다. 과열된 상황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순간,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사과탄’ ‘페퍼포그’ ‘지랄탄(다연발탄)’이 등장한다. CS가스는 순식간에 하얀 연기로 덮여 있다. 그렇게 새까만 까마귀 같은 물건(최루탄, 일명 지랄탄)은 하얀 연기를 내뿜는다. 당시 페퍼포그(Pepper Fogger) 한 대가 발사할 수 있는 수는 초당 20개 정도였으며, 4연발을 했다손 치더라도 20 X 4 = 80개 정도의 지랄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덮고 내 앞에서 하얗게 매운 연기를 뿜었다. 콜록콜록 기침과 함께 눈물 콧물 다 흘리게 된다. 치약으로 눈 밑에 발라본 듯 소용이 없다. “저기 전경 중에 우리 친구 광한이가 있을지 몰라요.” 그 후로 지금도 최루탄은 물대포로 바뀌었고, 물대포의 성분도, 까나리액젓을 섞어놓은 것인지 매콤하고, 그 냄새는 아직도 하얀 기억으로 기억되곤 한다. 검은 색과 하얀 색. 기억은 아마도 컬러가 아니고 흑백이다. 순흑색과 순백색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험(靈驗)함이 있다. 동굴에서 나온 인간은 완전히 검은 세상에서도 사물을 볼 수 없고, 완전히 밝은 하얀 세상에서도 눈이 부셔 볼 수 없다. 흑과 백이 적절히 있을 때에만 인지할 수 있다. 흑과 백은 세상을 여태껏 나누고 있었다. 학보사에 있던 인철은 시위를 기록하기 위해 있었다. 시위대의 선두나 후미를 찍기 위해서 종횡무진이었다. 시위의 양상은 대열이 길수록 선두와 후미의 상황은 다르다. 사진가가 서있는 곳은 단편적이다. 전체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시위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전체 그림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깊숙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멀리서 조망할 때가 더 눈에 확 들어올 수도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부분적이고, 단편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광한이의 눈에 들어온 인철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했다. 졸업한 일간지 사진기자 선배들은 시위현장에 방독면을 준비해서 촬영을 했지만 학생인 인철은 무방비로 노출된 맨 얼굴이기 때문이다. 종군사진가들이 전쟁에서 총도 없이 무방비상태로 카메라가 무기삼아 들고 있는 것처럼, 적에게는 표적의 대상일 것이다. 안성 교정 하늘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물론 까마귀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 다른 모든 짐승과 마찬가지로, 나는 까마귀가 나무 위에 모여 떠들어대며 뭔가 일을 꾸미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 길은 없다. 뭔가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까마귀 스스로도 그 계획이 뭔지 알고 있을까. 모르겠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지상에서 인간들이 세우는 빌어먹을 계획 따위보다 젠장, 백만 배는 더 의미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렇지 않다면? 뭔가 특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수많은 것과 마찬가지라면? 어쩌면 그냥 유전적인 특성일지도, 아니면 말고. 까마귀가 이 세상을 관장한다면 어떨까. 쓰레기 같은 세상의 재탕밖에 안 될까? 무엇보다 까마귀는 실용적인 동물이다. 비행 방법도, 대화법도, 심지어 색깔도, 온통 검은색, 오로지 검은색. 어쩌면 나는 까마귀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따금 나는 이미 내가 까마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 몇 달째 간간이 그런 생각을 해왔다. 안 될 게 뭐 있지? 여자 몸에 갇혀 사는 남자도 있고, 남자 몸에 갇혀 사는 여자도 있는데, 내가 이 몸속에 갇힌 까마귀가 되지 못할 거 없잖아? 그래, 이 몸에서 나를 꺼내줄 수 있는 의사가 어디 있을까? 어디를 가야 내가 나일 수 있는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 누구한테 의논해야 하지?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해야 내가 빠져나올 빌어먹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까마귀다. 난 안다. 안다고!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