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

영화 <인간 야수> 1938년

by 노용헌

발소리가 들렸다. 루보는 얼른 달려가 문을 빠끔히 열어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에서 신문을 파는 옆방 여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그는 찬장 위에 놓인 조그만 보석 상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 상자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세브린이 자신의 유모였던 빅투아르 아줌마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 조그만 상자를 보기만 해도 그 자신의 결혼생활이 파노라마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랐다. 벌써 삼 년 전 일이었다. 남프랑스의 플라상에서 마차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특무상사로 군복무를 마치고 오랫동안 망트 역에서 여객과 화물 수송 담당으로 근무하다가 바랑탱 역의 책임수송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처음 만난 게 그곳이었지. 당시 그녀는 그랑모랭 법원자의 딸인 베르트 아가씨와 함께 두앵빌에서 그곳 바랑탱 역으로 와 기차를 타곤 했다. 세브린 오브리는 평생 그랑모랭 집안에서 일하다 죽은 일개 정원사의 딸이었다. 그런데 법원장이 대부와 후견인을 자처해 그녀를 자신의 친딸과 동무로 지내게 하고 루앙의 기숙학교에도 둘 다 같이 보낼만큼 애지중지한데다 그녀 자신도 용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루보는 나름 촌티를 벗은 노동자로서 그녀가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그저 먼발치에서 그녀를 갈구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렸을 뿐이다. 그때가 내 삶에서 유일하게 소설 같았던 시절이지. 그는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기에 그녀가 무일푼이었더라도 결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마침내 용기를 냈을 때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당시 서부철도회사의 고위 임원이었던 법원장은 만 프랑의 지참금과 함께 세브린을 아내로 준 것 말고도 그에게 망외의 특전을 베풀어주었다. 그렇게 루보는 결혼 다음날 당장 르아브르 역의 부역장 자리로 승진한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었더라도 인사고과 점수가 높았을지 모른다.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시간을 엄수했으며 정직한데다 고지식하긴 해도 매우 올곧았던 그의 그러한 모든 뛰어난 자질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구애가 지체 없이 받아들여지고 그가 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에 수긍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이 아내 덕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내는 너무 사랑스럽다.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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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요.... 꼬맹이였을 때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그분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모두들 혼비백산해서 달아났죠. 그분 달 베르트마저도요. 베르트는 허구헌 날 무엇인가를 잘못했다고 벌벌 떨었어요. 그런데 난 말이죠. 그분이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렸어요. 그분은 지나가다가 내가 고개를 들고 미소 짓고 있는 걸 보고는 내 뺨을 톡 건드렸지요..... 나중에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도 베르트가 아버지에게 뭔가 부탁할 게 있을 때는 항상 내게 시켰지요. 나는 똑바로 말했어요. 시선을 내리깔지도 않고요. 그리고 그분의 시선이 내 살갗에 박히는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분이라면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 아! 그래요, 생각나요, 생각나! 눈을 감으면 그곳 저택 정원의 덤불숲, 복도, 방, 그 어느 것 하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없어요.”

그녀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발갛게 상기된 얼굴 위로 옛날 일들이, 그녀가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는 일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잠시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그렇게 있었다. 그 떨림은 마치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안면 경련처럼 그녀의 한쪽 입가를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렸다.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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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흐느낌이 그의 목구멍을 찢어놓았다.

“아! 이런 망할.... 아! 이런 망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절대로, 절대로! 너무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런 망할 화냥년 같으니라고! 왜 나랑 결혼했지?..... 넌 그렇게 날 속여먹은 게 얼마나 더러운 짓인 줄 알기나 해? 감옥에 처넣어 마땅한 도둑년들도 그처럼 양심에 거리낄 짓은 하지 않아.... 그러니까 넌 날 깔본 거야. 넌 날 사랑하지 않았지?...... 그래! 넌 왜 나와 결혼했지?”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몸을 움축거렸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인들 그 이유를 제대로 알겠는가? 그와 결혼하면서 그녀는 행복했다. 그 사람과 관계를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으니까. 인생에서는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이 많은 법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니까. 그렇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만일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자기는 결코 그의 아내가 되는 데 동의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이다. (P40)

자크는 잰걸음으로 좁은 마당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만나는 공간 한가운데 식당과 거실을 겸한 넓은 부엌이 있는데 거기에 파지 고모가, 자크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러온 여자가 다리를 낡은 숄로 감싼 채 홀로 식탁 옆 밀짚 방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랑티에 집안 여자로 그의 아버지와 사촌지간이며 그의 대모를 섰고, 그의 부모가 파리로 훌쩍 달아나버렸을 때 여섯 살인 그를 거두어 키웠다. 자크는 그렇게 플라상에서 자라 거기서 직업기술학교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파지 고모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 자신이 제 앞길을 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녀 덕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오를레앙 철도회사에서 이 년을 근무한 후 서부철도회사의 일등기관사가 되었을 때 대모를 수소문해서 찾아냈는데, 그녀는 마자르라는 이름의 건널목지기와 재혼해 첫 남편 사이에서 난 딸자식 둘을 데리고 크루아드모프라는 이 궁벽한 오지에서 유배된 것처럼 살고 있었다. 소싯적에는 키도 크고 건장했으며 얼굴도 예뻤던 파지 고모는 이제 겨우 마흔 다섯 살인데도 비쩍 마르고 누렇게 떠서 끊임없는 경련에 몸을 떨어대는 예순 살 노파처럼 변했다. (P59-60)

파지는 두 눈을 창문에 고정시킨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갈피를 잡기에는 너무도 불분명해서 어떻게든 요약을 해보려 했다.

“아! 정말 멋진 발명품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빠르지, 한층 더 똑똑해졌지…… 하지만 한번 야만적인 짐승은 영원히 야만적인 짐승일 뿐이야. 훨씬 더 나은 기계를 발명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야만적인 짐승들은 그 밑에 어쨌든 여전히 존재할 텐데.”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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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기차가 자기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거센 폭풍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집은 광포한 바람에 휩싸여 뒤흔들렸다. 르아브르로 가는 그 기차는 다음날인 일요일에 한 선박이 성대한 진수식을 치를 예정이어서 초만원이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지만, 불이 밝혀진 차창 안으로 승객들의 옆얼굴이 차곡차곡 줄지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칸마다 만원이었다. 그 행렬은 연속으로 이어지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객차 구르는 소리, 기관차 기적 소리, 전신 장치 소리, 신호기 타종 소리 등이 얽힌 와중에 군중, 또 군중, 끊임없는 군중!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몸뚱어리 같았다. 머리는 파리에 두고 등뼈는 선로 위에 죽 늘어뜨렸으며 다리와 팔들은 르아브르와 여타의 정거장이 있는 도시들에 둔 상태로 지선들을 따라 사지를 활짝 벌린 채 대지를 가로질러 누워 있는 하나의 거인. 그것이 지나간다, 그것이 지나간다, 기계가, 의기양양하게, 수학적인 정밀성으로 무장하고서, 선로 양옆에 감춰져 있지만 항상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인간적인 것들은, 불멸의 정념과 불멸의 범죄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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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다리가 꺾인 자크는 선롯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풀숲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경련을 일으키듯 들썩거리면서 흐느꼈다. 오, 맙소사! 다 나은 줄 알았던 그 병이 다시 도진 겁니까? 그녀를 죽이려 하다니! 여자를 죽이려고, 여자를 죽이려고 하다니! 그의 젊은 혈기 저 밑바닥에서 욕망의 열기가 미친 듯이 치솟으면서 이런 소리가 그의 귓전을 맴돌았다. 다른 남자들은 성적 욕망이 일면 여자를 소유하기를 꿈꾸는데, 그는 여자를 죽이고 싶은 생각에 미쳐버리는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 살을 본 순간, 따뜻하고 하얀 그 목을 본 순간, 가위를 집어들고 그녀의 살 속 깊숙이 가위를 찔러넣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반항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천만에! 그것은 쾌락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만일 지금 이렇게 풀숲에 매여 있는 처지가 아니라면 당장 그리로 내달려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그녀를, 오, 맙소사! 어릴 때부터 자라는 걸 죽 지켜본 그 플로르를, 방금 전 나를 그토록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던 그 야성의 아이를 말이다! 그의 손가락들이 뒤틀리면서 땅속을 파헤쳤고, 오열이 그의 목구멍을 짓찢고 큼직한 절망으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내가 무엇이 다르지? 청소년 시절, 저 아랫녘 플라상에서 자랄 때부터 그는 그렇게 자문했다. 그의 어머니 제르베즈는, 이것은 사실인데, 열여섯 살도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그를 낳았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인 것이, 그는 둘째에 불과했고 그녀가 첫째인 클로드를 가진 것은 그녀의 나이 겨우 열네 살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그의 형제 중 어느 누구도, 그러니까 첫째인 클로드도, 나중에 태어난 셋째 에티엔도, 어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조무래기 건달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나쁜 피를 물려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인 고약한 랑티에는 심성이 못돼서 아내 제르베즈의 눈물깨나 뺀 위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의 형과 동생도 고백만 하지 않았을 뿐 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특히 그의 형은 화가가 되겠다고 자기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던지, 사람들은 그가 천재성 때문에 반쯤 미쳐버렸다고들 수군거렸다. 그의 가족은 거의 정상이 아니었다. 많은 식구가 나름대로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순간순간 자기에게도 그것이, 그 유전적인 결함이 있음을 느꼈다. 딱히 건강 상태가 나빠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발작에 대한 염려와 수치심만으로도 몸이 비쩍 말랐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존재에 뜻하지 않은 균형 상실, 그러니까 균열이나 구멍 같은 것이 생긴다는 것인데, 그 경우 모든 것을 왜곡하는 일종의 심각한 몽환에 빠지면서 그 구멍을 통해 그 자신의 자아가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근육에, 미쳐 날뛰는 그 짐승에게 복종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극미량의 알코올에도 자신이 미쳐버린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단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술을 마셨던 그의 아버지 대, 할아버지 대, 그 술주정뱅이 가계로부터 자신이 나쁜 피를, 서서히 진행되는 중독성을, 여자를 잡아먹는 늑대 무리에 자신을 끌어넣어 깊은 숲속으로 몰고 가는 야만성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P84-86)

자크는 혼자 남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생명을 잃고 무너져버린 그 몸뚱이를 지켜보았다. 땅바닥에 비치는 랜턴 빛이 희미해서 윤곽이 불분명해 보였다. 그의 내면에서는 조금 전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던 심적인 동요와 지금 여기 그를 붙들고 있는 끔찍한 매혹이 급기야 가슴을 날카롭게 후비는 생각으로, 그의 전 존재에서 솟구치는 생각으로 비화되었다. 다른 사람은, 스치듯 보았지만 손에 칼을 든 그 사내는 감행을 했는데! 다른 사람은 자기 욕망의 끝까지 갔는데, 다른 사람은 살인을 했는데! 아! 그는 비겁하지 않았어. 바라는 것을 얻고야 말았어. 칼을 꽂았어! 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십 년 전부터 날 괴롭혀왔잖아! 온몸에 열이 오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과 그 다른 사람에 대한 찬탄이 밀려들었다. 특히 그것을 바라다보고 싶은 욕구, 칼에 찔려 하나의 생명체에서 순식간에 이렇게 인간 누더기가 되어버린 망가진 꼭두각시, 흐물흐물한 넝마가 되어버린 그것을 질리도록 눈에 쑤셔넣고 싶은 가시지 않는 갈증이 몰려왔다. 내가 꿈꾸기만 한 것을 다른 사람은 실행에 옮긴 거야.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야. 만일 나도 죽인다면 내가 죽인 그것이 이렇게 땅에 널브러져 있겠지.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이 비극적인 죽음을 목도하자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 근질거리는 욕망이 마치 정욕처럼 증폭되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무서운 것과 친해져버리는 어린아이처럼 한 걸음 떼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나도 하고 말 거야. 이번에는 내가 감행할 차례야! (P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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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는 자리를 떴다. 도중에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랜턴에서 둥그렇게 퍼져나간 노란 불빛 속으로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시체의 굽은 등이 검게 보였다. 뿌옇게 안개 낀 하늘에서 아까보다 더 심한 한기가 메마른 구릉들이 이어진 그 을씨년스러운 황야 위로 내려앉았다. 기차가 몇 대 더 지나갔다. 그중 하나는 파리로 가는 기차였는데 매우 길었다. 기차들은 하나같이 그 무지막지한 기계의 힘을 과시하며 서로 엇갈려 먼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어떤 이에게 무참히 살해된, 목이 절반 넘게 잘린 그 남자의 머리가 거기 있다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무심하게 스쳐지나가면서. (P102)


예심판사는 자신으로서는 무모하게 덤비지 않는 것이 상책이며, 사전 승인 없이는 어떠한 것도 감행하지 말아야 처신에 이롭겠다는 것을 간파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무처장 역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본부 차원에서 수사관들을 가동시켰다는 확신을 안고 루앙으로 돌아갔다. 세상이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필요한 경우 그 진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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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가 여전히 자기를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확인하고 매우 기뻤다. 어찌 보면 그녀가 방금 전에 한 일은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행위였다. 그녀 자신의 몸을 허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로 그가 정말로 자신의 몸을 요구하더라도 그녀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이제 절대로 풀 수 없는 끈에 한데 묶인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이제 말할 테면 해보라고 다그친 것이다. 그녀가 그의 것이 되었듯이 그는 그녀의 것이 되었다. 고백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앞으로 날 힘들게 하지 마요, 당신은 나를 믿지요?”

“그래요, 당신을 믿어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무슨 이유로 내가 그녀에게 그런 끔직한 일을 아무런 여과 없이 이야기하라고 강요한단 말인가? 나중에 그녀 자신이 필요성을 느끼면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다.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속내를 토해놓고는 평안을 찾는 그 방식이 무한한 애정의 표현과 함께 그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았다. 이 여자는 연보랏빛이 감도는 온순한 푸른 눈만큼이나 참 순진하고 연약하구나! 그에게 그녀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항상 남자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천생 여자로 비쳤다. 무엇보다 그가 황홀한 기분이 든 것은 서로 손을 맞잡고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데도 그 자신이 예의 그 불안감을, 그러니까 여자 곁에서 그 여자의 육체를 범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사로잡혔던 그 끔직한 전율을 이번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들의 경우, 그들의 육체를 접할 때마다 어김없이 아귀 들린 것처럼 그들을 물어뜯어 무참히 살해하고 싶은 저주스러운 욕구에 사로잡혀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이다. 나는 과연 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절대로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알다시피 나는 당신의 친구이고 당신은 나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나는 당신의 일을 알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될 거예요...... 내 말 알겠어요? 나는 전적으로 당신 거예요. 당신 마음대로 해도 돼요.”

그는 자신의 수염에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아침이었다면 그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원초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몸에 전율을 거의 일지 않고 회복기의 나른함이 느껴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는, 이제는 확실해진 그 생각이 그녀를 다르게, 대단하게, 예외적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단순히 옆에서 도와준 정도가 아니라 직접 찔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그렇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그녀가 성녀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불러일으킨 두려운 욕망도 잊게 하는,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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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검댕으로 시커멓고, 먼지 낀 높은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뿌옇게 흐려진 거대한 기관차 차고 안에는 여러 대의 기관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자크의 기관차는 선로 맨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차량 기지의 회부가 방금 전 기관차 화구에 석탄을 밀어넣었는지 시뻘건 탄각(炭殼)들이 기관차 아래 불씨 수거 고랑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2축 4동륜의 급행열차 기관차로, 강철 연결봉으로 피스톤과 연결된, 날렵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바퀴들과 말의 가슴팍처럼 떡 벌어진 전면부와 길쭉하고 강인한 동체 등 전체적으로 거대하고 늘씬하게 빠진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한편, 예의 그 완벽한 정확성과 엄밀성으로 상징되는 금속 물체의 압도적인 아름다움, 다시 말해 정교하게 작용하는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서부철도회사의 다른 기관차들처럼 그 기관차도 고유번호 말고 별칭으로 정거장 이름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콩탕탱 지방의 리종이라는 역 이름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자크는 자기 기관차에 대한 애정의 표현으로 그 이름을 여자 이름인 것처럼 라리종으로 바꾸고 여간 다정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사 년 전 그 기관차를 처음 운행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기 기관차를 여자를 대하듯 사랑했다. 다른 기관차들도 여럿 몰아본 적이 있었는데 온순한 것, 버티는 것, 용맹한 것, 게으른 것 등 제각각이었다. 그는 기관차마다 특성이 있으며, 몸매 좋고 돈 많은 여자들을 두고 흔히들 말하듯이 많은 기관차들도 제 이름값을 못한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기관차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로 그 기관차가 마음씨 고운 여자처럼 매우 드문 자질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크의 기관차는 얌전하고 온순해서 시동도 쉬이 걸렸으며 증기압이 좋아서 운행 속도가 일정하고 꾸준했다. 남들은 그의 기관차가 쉽게 구동하는 것을 두고 바튀 테두리 덧씌움 처리가 탁월하며, 특히 증기실 슬라이드 밸브를 완벽하게 조정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연료를 적게 쓰고도 증기압이 높은 것을 두고도 구리관의 품질과 보일러의 기막힌 배치에 그 이유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다른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기관차들은 똑같이 제작되고 똑같이 숙련된 솜씨로 조립되었어도 그런 뛰어난 성능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기관차에는 영혼이, 제작 과정의 미스터리가, 단조鍛造 단계에서 우연히 금속에 부여된 무엇인가가, 조립공의 손이 부품에 불어넣은 무엇인가가, 그러니까 기계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고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깃들어 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P226-227)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는 잘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과거를 실토한 후 그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살인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나서부터 지금 이런 안정된 정신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정말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로서는 만약 자기가 그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기가 살 수 없는 지경에 몰렸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속에 질투의 불길이 사그라진 지금, 그 불길로 입은 견딜 수 없는 화상도 다 아물고 마치 그의 심장의 피가 그자가 흘린 모든 피를 받아 뻑뻑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무력감에 휩싸인 지금은, 그토록 화급했던 살인의 불가피성도 더 이상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는 정말 살인을 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이었나 하고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무슨 후회 같은 것은 아니었고 기껏해야 환멸 같은 것, 그러니까 사람들이 절대 고백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러놓고는 나중에, 그런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데도 그냥 그렇게 하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때 과연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종종 궁리하게 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렇게도 떠벌이었던 그가 긴 침묵과 막연한 숙고에 빠지는 일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더 침울한 모습으로 깨어났다. 이즈음 그는 식사 후에 아내와 계속 대면하고 싶지 않아 날마다 역사 지붕 위로 올라가 용마루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이 일과였다. 거기서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맞으며 아련한 몽상에 몸을 맡긴 채 파이프 담배를 물고서 도시 저편 수평선 너머로 대양을 향해 나아가다가 사라지는 여객선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P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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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내 사랑, 날 가져, 날 지켜줘, 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게.”

“무슨 소리! 아니야, 내 사랑, 당신이 주인이야, 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야.” (P268)

자크와 세브린이 그렇게 지낸 지 벌써 사 개월이 지났다. 그들의 정열은 갈수록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들 둘 다 정말로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상태, 서로 어루만지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첫사랑의 그 두근거리는 순결함을 간직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헌신에 더 덕을 보았다고 공을 돌리는 이른바 순종(順從) 싸움이라는 것이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저주스러운 자신의 유전 질환이 고쳐졌다고 생각했고, 그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와 육체관계를 맺고 나서부터 살인에 관한 생각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던 것이다. 육욕의 충족이 살해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준 것일까? 정욕을 채우는 것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이라는 짐승의 저 어두운 밑바닥에서는 서로 비기는 것일까? 그는 너무도 무지했기에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으며, 공포의 문을 엿보고 싶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품에 안겼을 때 가끔씩 그녀가 저질렀다던 그 일, 그녀가 바티뇰 공원의 벤치에서 눈빛으로 고백했던 그 살인이 문득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더 세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반면 그녀는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욕구 때문에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그녀가 자신을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는 그녀가 자신의 비밀 때문에 터질 듯 부풀어오르고 숨가빠한다는 것을, 그녀가 오로지 자신을 숨막히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벗어버리고 가벼워지기 위해 그의 몸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의 허리께에서 시작된 격심한 전율이 그녀의 입술을 통해 모호하게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를 타고 올라와 사랑에 달뜬 그녀의 목젖을 들썩이게 하는 것이 보였다. 절정에 올라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재빨리 키스로 그녀의 입을 막고 고백을 봉쇄했다. 무엇 때문에 그들 사이에 그 낯모를 존재가 끼어들게 만든단 말인가? 그 존재가 그들의 행복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는 어떤 위험을 감지했다. 그녀와 함께 잠잠히 가라앉아 있는 그 피비린내나는 이야기를 들쑤셔 떠오르게 만든다는 생각만 해도 전율이 엄습했다. 어쩌면 그녀도 그의 심중을 알아차렸는지 몰랐다. 그녀는 오로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그런 사랑의 피조물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그를 부여안고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면 상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미친 듯한 욕정이 다시 그들을 휘몰아쳤고, 때때로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혼절해 있기도 했다. (P272-273)

자크는 일찍이 이런 강추위를 뚫고 달려본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눈발이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찔러대는 통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두 손은 이미 떨어져나가고 없는 것 같았다. 추위로 손끝이 마비되어 무감각해져버린 것인데,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에 조그만 역전기 핸들을 쥐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소스라쳤다. 기적을 울리기 위해 손잡이를 당기려고 팔꿈치를 들어올리려 했을 때도 어깨에 매달린 팔이 시체의 팔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요동치는 기관차에 내장이 다 빠져나올 정도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두 다리로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머릿속까지 얼얼하게 만드는 추위와 함께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가 느끼는 공포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자신이 운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불분명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기계적인 동작으로 핸들을 돌리고 있었으며 압력계의 눈금이 떨어지는 것도 무감각하게 쳐다보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전에 들은 적이 있는 환각 현상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기 저것은 쓰러진 나무가 선로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덤불 숲 위로 붉은 깃발이 펄럭이지 않던가? 으르렁거리는 바퀴 소리 사이로 정차를 지시하는 기폭 장치가 연방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그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멈춰야 한다고 계속 주억거렸지만 정작 그럴 의지가 마음속에 또렷이 일지는 않았다. 얼마 동안 이러한 위기가 그를 괴롭혔다. 그러다가 갑자기 궤짝 위에 쓰러져 자고 있는 페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 역시 추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진 것이겠지만, 그만 불같이 화가 치밀면서 온몸이 다시 뜨거워졌다. (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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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는 진작부터 세브린에게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모습, 티 없이 맑고 푸른 눈을 가진 온순하고 수동적인 여인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묵직한 투구를 쓴 것처럼 검은 머리가 무성한 그녀는 나날이 열정적으로 성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품안에서 그녀가, 그랑모랭과 맺은 노욕이 강요한 관계를 통해서도, 루보와 맺은 난폭한 부부 관계를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었던, 오랫동안 그녀를 짓눌러온 그 차가운 처녀성을 떨쳐버리고 조금씩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그저 온순하기만 했던 정겨운 존재가 지금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을 내주며 그렇게 경험한 쾌락을 통해 자기 자신을 뜨겁게 되찾고 있었다. 그녀는 격정적인 열락의 상태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관능을 일깨워준 이 남자에게 숭배의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 남자를 이렇게 마음대로 품을 수 있다는 것, 신음 소리 하나라도 빠져나갈세라 그렇게 이를 앙다물며 쾌감을 느끼고 나서 바로 두 팔로 그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형언하기 어려운 커다란 행복이었다. (P336)


“모든 것을 느꼈지. 칼이 목에 박히는 충격, 오랫동안 경련하던 몸, 세 번의 딸꾹질 끝에 끊어진 목숨, 그리고 숨과 함께 멈춘, 격투중에 부서진 회중시계…… 오! 죽기 직전의 그 경련, 아직도 그 떨림이 내 사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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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칼을 보지 않기 위해 자크는 세브린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녀는 무척 고단했던지 어린아이처럼 새근새근 숨을 쉬며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져 어깨까지 흘러내린 모습이 마치 검은 베개를 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턱밑, 흘러내린 머리채 사이로 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우아한 우윳빛 목이 드러나 보였다. 그는 전혀 모르는 여인인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녀에 대한 욕망에 불타 어딜 가나 그녀를 떠올렸는데, 그녀의 모습은 심지어 기관차를 몰 때도 종종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심란하게 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정차 신호를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어떤 역을 지나치다가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란 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하얀 목을 보자 그는 느닷없이 치명적인 매혹에 온몸이 사로잡혔다. 아직은 두려움을 의식할 만큼 제어가 되는 상태이긴 했지만, 일어나서 식탁에 놓여 있는 칼을 갖고 돌아와 이 여자의 살에 손잡이만 남을 정도로 깊숙이 쑤셔박고 싶은 거역할 수 없는 욕구가 그의 내부에서 스멀스멀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살에 박히는 칼날의 둔중한 충격음이 귓전을 울렸고, 칼에 찔린 몸이 세 번에 걸쳐 들썩거리다가 숨이 끊어져 붉은 핏물을 뒤집어쓰고 뻣뻣하게 굳어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분투했지만 그는 매순간 고정관념에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의지력을 조금씩 상실해 본능의 충동에 무릎을 꿇기 직전의 한계상황에 내몰렸다. 모든 것이 혼미해졌다. 그의 손은 그가 아무리 엉덩이 밑에 감춰두려고 애를 써도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드디어 승리를 거두고 결박을 풀더니 밖으로 탈출했다. 그는 이제 자기가 더는 그 손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세브린을 계속 쳐다보면 그 손은 제 욕구를 채우려고 난폭하게 덤빌 거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히 깨닫고, 마지막 남은 기운을 쥐어짜내어 침대 바깥으로 몸을 날려 술 취한 사람처럼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는 마룻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거기에 널브러져 있던 세브린의 치마에 발이 엉키는 바람에 다시 넘어질 뻔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 허둥지둥 자신의 옷가지를 찾았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빨리 옷을 입고 칼을 챙긴 다음 밖으로 나가 길거리에서 아무 여자나 붙잡아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욕망이 너무도 광포하게 고문을 해대는 통에 누군가 한 여자를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바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세 번이나 거듭 확인한 뒤에야 자신이 이미 바지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두를 신는 데도 어려움이 많아 한없이 지체해야만 했다. 날이 이미 훤히 밝았지만 방안은 그에게 뿌연 다갈색 연기가 자욱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차디차고 몽롱한 새벽 기운에 모든 것이 잠겨 있었다. 그는 신열이 오르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마침내 옷을 다 챙겨 입고 칼을 집어들어 소매 안에 감춘 다음, 아무 여자나 하나 죽여버리겠다고, 복도에 나가 누구건 처음 마주치는 여자를 죽여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때 침대에서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길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들리자 그는 하얗게 질려서 식탁 옆에 못박힌 듯 꼼짝 않고 섰다. (P360-361)

세브린은 그가 변했다는 것을 진작 알아차렸다. 그가 진실을 알고 나서 자기 때문에 침울해졌다고 믿고 그녀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바르르 떠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며 자신의 키스를 피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가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닐까. 자신이 그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닐까 자문했다. 그녀는 고백 이후로 그 일에 대해 다시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와 그 비밀을 가슴 깊이 공유한 채 지금 그를 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속을 털어놓고 싶다는 오래전의 염원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둘이서 뜨겁게 불타올랐던 그 낯선 침대에서 돌연 무엇에 홀려 고백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다 말해버렸는지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그에게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어지자 그녀는 확실히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것은 끝없이 갈구하는 애욕이었고, 마침내 깨어난 여성이었으며, 오로지 애무만을 위해 태어난, 온몸이 애정 그 자체인, 그러나 모성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그런 피조물이었다. 그녀가 사는 이유는 오로지 자크뿐이었다. 그녀가 자크의 안으로 녹아들어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하는 게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 그녀가 품고 있는 단 하나의 꿈이 바로 그가 그녀 자신을 완전히 삼켜버려 그녀가 그의 몸의 일부가 되는 그런 바람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말할 수 없이 나긋나긋하고 말할 수 없이 순종적인 그녀는 오로지 그에게서만 쾌락을 느끼며 아침부터 밤까지 그의 무릎에 누워 고양이처럼 잠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끔찍한 참극에 대해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은, 자신은 본의 아니게 연루된 것이기에 스스로 생각해도 뜻밖이라는 심정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자신이 소녓적의 흠결을 깨끗이 씻고 순결함과 청순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미 먼 과거의 일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남편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남편에게 화를 낼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남자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강해질수록 남편에 대한 증오도 커져만 갔다. 지금 그 남자가 사정을 다 알게 된 이상, 그리고 그가 그녀의 죄를 사한 이상 그 남자야말로 그녀가 따르고 복종해야 할 사람, 그녀를 제 물건처럼 마음대로 다루어도 되는 사람, 그녀의 주인이었다. (P394-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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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세브린의 꿈은 바뀌었다. 루보가 사고로 죽는다. 그러면 자크와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단, 그와 결혼은 하고, 물론 크루아드모프라는 팔아서 전 재산을 현금화한다. 떠난 자리에는 어떠한 화근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렇게 고국을 등지는 것은 서로의 품에 안겨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다. 그곳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하나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전혀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고 믿어도 되리라. 여기서는 한 차례 실수를 했으니 거기서는 처음부터 다시 행복의 경험을 만들어나가리라. 그는 바로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나도 뭔가를 할 것이다. 재산이 모이고, 아마 아이들도 생길 것이다. 재산도 모이고, 아마 아이들도 생길 것이다.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일과 행복이 펼쳐질 것이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아침 침대에서든 낮에 수를 놓을 때든 이러한 상상에 빠져들어 그 상상을 수정하고 확장하고 행복이 가득한 세부 장면들을 끊임없이 덧붙여나가다가 마침내 환희와 복락이 충만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예전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던 그녀이지만 그즈음에는 대서양 횡단 여객선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러 가는 데 열성이었다. 그녀는 부두에 내려가 팔을 괴고서 여객선이 뿜어내는 연기가 먼바다의 아지랑이와 뒤섞여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러면 지켜보는 그녀에게 분열된 또다른 그녀가 자크와 함께 갑판 위에 나란히 나와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는데, 어느새 그들은 그렇게 프랑스에게 멀어져 꿈의 낙원으로 향하는 것이다. (P4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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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있느라 난롯불에 등이 화끈거리며 자크는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때까지 막연했던 생각 하나가 갑자기 너무도 날카롭게 버려지면서 바늘처럼 머리를 찌르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며 휙 돌아누웠다. 어린 시절부터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나인데, 그 강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스럽다못해 심신이 황폐해지기가지 한 나인데, 도대체 루보를 죽이지 못할 까닭이 무어란 말인가? 어쩌면 제물로 바치는 이 희생자 덕에 살해에 대한 욕망이 영원히 가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좋은 일만 하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덤으로 고질병에서 치유될지도 모른다. 치유가 되다니, 오, 세상에! 피끓는 그 전율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니, 배가 갈려 내장을 드러낸 암컷들을 목에 둘러멘 저 먼 옛날의 수컷이 그의 내면에서 사납게 고개를 쳐들지 않고도 세브린을 가질 수 있다니! 땀이 그를 흥건하게 적셨다. 칼을 움켜쥐고서 이전에 루보가 법원장을 찌르던 것처럼 루보의 목을 찌르는 자신의 모습이,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자신의 두 손을 흥건히 적실수록 득의양양하게 포만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자를 죽이리라. 그는 마음을 굳혔다. 그래야 병이 낫고, 사랑하는 아내가, 거금이 생기니까. 누군가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기어이 죽여야 한다면, 적어도 자신이 결행하는 일이 이해관계를 따져서건 논리적으로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죽여야 할 자는 바로 그자인 것이다. (P407-408)

그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인간이, 교육을 통해 길러진 힘이, 오랜 세월 서서히 전승되어 불멸의 금자탑으로 쌓인 사상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계율을 누대에 걸쳐 면면이 이어져온 젖줄을 빨면서 체득했다. 도덕관념으로 가득 채워진 그의 정련된 두뇌는 그가 살인을 합리화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진저리를 치며 살인을 배격했다. (P410)

지난주에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더 이상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도록, 그들이 더 이상 함께 그리로 가지 못하도록 그들을 죽여버리자는 생각이 망치질처럼 느닷없이 그녀의 머리를 후려치더니 깊이 박혀 떠날 줄 몰랐다. 곰곰이 따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죽여버리겠다는 야만적인 본능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시가 살에 박히면 그 가시를 뽑아냈다. 그럴 수 없으면 가시 박힌 손가락을 잘라낼 사람이었다. 그들을 죽이자, 그들이 눈에 띄는 즉시 죽이자. 그러기 위해서는 기차를 전복시켜야 한다. 선로 위에 엄청나게 큰 나무를 가져다놓든지 레일을 뽑아내든지 해야 한다. 아무튼 모든 것을 박살내고 모든 것을 순식간에 집어삼켜야 한다. 그는 분명 기차에서 사지를 쭉 뻗고 널브러질 테고, 그와 최대한 가까이 있으려고 변함없이 일등칸에 탑승했을 여자도 객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끊이지 않고 물밀 듯 쏟아져나올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들을 알기라도 하는가? 그러한 기차의 붕괴, 그러한 수많은 목숨의 희생이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강박이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단 하나의 파국, 눈물을 머금고 부풀어올라 거대해진 그녀의 심장을 흠뻑 적실 만큼 충분히 넓고 충분히 깊은 피의 바다, 인간 고통의 바다일 것이다.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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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억겁의 시간 같았지만 실은 십 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두 개의 거대한 돌덩이가 장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반질거리는 놋쇠의 번적이는 강철로 무장한 기관차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맑은 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속도로 미그러지듯 다가왔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이제 충돌을 막을 수 없다. 그렇게 기다림이 이어졌다.

날다시피 초소로 돌아온 미자르는 기차에 사태를 알려 멈추게 하려고 주먹 쥔 두 팔을 허공에 쳐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수레바퀴 소리와 말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놀라 집밖으로 뛰어나온 카뷔슈도 말들을 전진시키려고 역시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 플로르가 옆으로 몸을 던져 그를 붙잡았는데 누가 봐도 충돌에서 그를 구해내려는 동작으로 보였다. 카뷔슈는 그녀가 말들을 제어할 힘이 없었던 거라고, 말들이 그녀를 끌고 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절망적인 공포감에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탓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면 그녀는 고개만 쳐든 채 꿈적도 하지않고 불타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기관차의 가슴팍이 돌덩이에 막 닿으려는 순간, 아마도 1미터 정도의 간격이 남은 순간, 그 가늠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 그녀는 역전기 핸들을 붙잡고 있는 자크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고, 그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녀는 그 순간이 한량없이 길게 여겨졌다. (P44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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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얼어붙어 있던 미자르와 카뷔슈는 두 팔을 허공에 들어올린 자세로, 플로르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그 무시무시한 장면을 지켜보았다. 기차는 위로 솟구쳐올라 일곱 량의 차량이 서로 업고 업힌 상태가 되더니 이내 귀청을 찢는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쳐 지리멸렬하게 붕괴되었다. 앞의 세 량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고 뒤의 네 량은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낭자한 가운데 으스러진 지붕들과 부서진 바퀴들, 승강구 문들, 쇠사슬들, 완충기들 따위가 뒤죽박죽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산더미가 되어버렸다. 그전에 무엇보다도 기관차가 돌덩이에 부딪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귀청을 찢는 그 충격음은 숨넘어가는 비명 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라리종호는 석재 운반차를 타고 왼쪽으로 엎어져 만신창이가 된 밑바닥을 드러냈다. 돌덩이들은 마치 광산의 발파작업 때처럼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뛰었고, 다섯 마리 말 중 네 마리가 기관차 밑에 깔려 끌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기차 뒷부분은 차량 여섯 량은 피해를 입지 않고 탈선도 하지 않은채 멈춰 서 있었다.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는데, 그 단어들은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맥락을 잃은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P450-451)

꼼짝 않고 서 있던 플로르는 두려움을 머금은 그 증오 서린 시선을 접하고 파랗게 질렸다. 알지도 못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으로 내몰았으면서 정작 당사자인 둘은, 여자도 남자도 죽이지 못했다. 여자는 긁힌 데 한 곳 없이 멀쩡하게 빠져나왔고, 남자도 이제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그 외딴집에 단둘이서만 처박힐 수 있도록 내몬 꼴이 되어 둘이 더 밀착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만 것이다. 그들 둘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지내는 모습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회복되어 건강을 되찾고 여자는 간호하느라 뜬눈으로 지새운 밤들을 사랑하는 남자가 끊임없이 퍼붓는 애무로 보상받는 모습이, 그들 둘이 세상과 단절되어 완전한 자유를 구가하면서 대참사가 마련해준 그 밀월을 하염없이 즐기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엄청난 한기가 엄습하면서 그녀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사망자들을 바라다보았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P466)


플로르의 주검은 자정이 지나 지붕 낮은 그 조그만 집안, 자기 어머니의 주검 옆에 나란히 놓였다. 매트리스 하나를 바닥에 깔고 안치했는데, 두 주검 사이에 촛불 하나를 밝혀놓았다. 뒤틀린 입 때문에 기괴하게 웃는 듯 보이는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는 파지는 이제는 그 부릅뜬 눈으로 자기 딸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이 깊은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숨죽이며 뭔가 일을 벌이는 소리가 집 안팎 곳곳에서 들렸는데, 돈을 찾으려고 다시 온갖 곳을 뒤지기 시작한 미자르가 헐떡이며 용을 쓰는 소리였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차들이 서로 교행하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양방향 통행이 방금 전 완전히 복구된 것이다. 기차들은 그 온갖 참사와 온갖 범죄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자신들의 기계적인 전능함을 과시하며 냉혹하게 지나갈 뿐이었다. 저 군중 가운데 모르는 존재 몇이 선로 바닥에 떨어져 기차 바퀴에 깔려 으스러졌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즉시 시체들을 치우고 피를 깨끗이 닦아낸 다음 저 먼 목적지를 향해, 미래를 향해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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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섹스의 그 시커먼 구렁으로 통하는 문이고, 사랑은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며, 더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절멸시켜야 한다. (P512)

자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킁킁거리는 짐승의 소리, 식식거리는 멧돼지 소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는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그것은 자신의 거친 숨소리였다. 드디어! 드디어! 그는 흡족스러워 속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일을 해낸 것이다. 끝없이 시달렸던 욕망이 완전히 충족된 기분과 함께 미친 듯한 기쁨, 엄청난 쾌감이 몰려와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는 뜻밖에도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고, 수컷으로서의 자신의 지배력이 향상된 것을 경험했다. 여자를, 바로 여자를 죽인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여자를 소유하기를, 절멸시킬 정도로 완벽하게 소유하기를 바랐는데 드디어 그 꿈을 이룬 것이다. 그녀는 이제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날카로운 기억이, 다른 피살자의 기억이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소름 끼치던 그날 밤, 지금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목격했던 그랑모랭 법원장의 주검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우아한 육신은, 붉은 줄이 그어진 이 눈부시게 흰 육신은 그 주검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잔해, 부서진 꼭두각시 인형, 흐물흐물한 넝마에 지나지 않았는데, 단 한 번의 칼질이 생명체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 그게 이것이다. 나는 사람을 죽였고, 그 주검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다. 법원장의 주검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널브러져 있었지만 등에 바닥에 대고 누운 자세였고, 두 다리는 벌어지고 왼팔은 구부러져 옆구리에 걸쳐 있었으며 오른팔은 어깨에서 반쯤 탈골되어 뒤틀린 상태였다. 그날 밤 참혹하게 죽은 남자를 보고 마치 욕정처럼 근질거리는 살해의 욕망이 격화되어서 자신도 언젠가는 감행을 하겠노라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아! 비겁해지지 말자. 욕구를 채우자, 깊숙이 칼을 꽂자! 암암리에 그 다짐이 싹을 틔우고 그의 내면에서 쑥쑥 자라난 것이다. 지난 일 년간, 그는 이 필연적인 결과를 향한 걸음을 단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 여자의 목에서, 그녀의 키스에서 암암리에 진행되었던 그 작업이 완결된 것이다. 그렇게 두 살인은 서로 만났다. 한 살인은 다른 살인의 논리적인 귀결이 아니던가?

무엇인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와 바닥이 꺼지는 듯한 느낌에 자크는 주검을 앞에 두고 멍하니 잠겨 있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문이 박살나는 소리인가? 나를 체포하러 온 사람들인가? 그는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먹먹하고 괴괴한 정적만이 흐를 뿐이었다. 아! 그래, 기차가 또 지나갔군! 그런데 조금 있으면 아래층에서 문을 두드릴 그 남자는, 내가 죽이려던 그 남자는! 그는 그 남자를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이미 얼이 빠졌다고 생각했다. 무엇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사랑했던, 나를 열렬히 사랑했던 여자가 목이 베인 채 바닥에 누워 있다. 반면 그녀의 남편은, 그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직도 살아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 어둠 속을 걸어오고 있다. 교육의 산물인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장구한 세월을 거쳐 전승되고 획득된 인간성의 관념 때문에 수개월 동안 죽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그 남자를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 자신의 이익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원시의 숲에서 짐승처럼 서로가 서로를 덮치게 했던 그 살인의 충동에, 그 대물림된 폭력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사람은 합당한 이유에서 살인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람은 피와 신경의 충동 때문에, 옛날 옛적 서로 투쟁했던 기억의 잔존 때문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강해졌다는 기쁨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욕구를 채운 나른함만이 남았다. 그는 얼이 빠진 채 스스로 납득할 거리를 찾았지만 자신의 충족된 열정 밑바닥에서 경악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쓰라린 눈으로 자기에게 겁에 질린 질문을 던지는 불행한 여인의 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그 두 눈을 돌려놓고 싶었다. 그 순간 그는 또하나의 하얀 형체가 침대 발치에서 우뚝 일어서는 듯한 느낌을 갑작스레 받았다. 죽은 여자의 분신인가? 그 형체는 플로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녀는 사고 후 그가 고열에 시달릴 때 그의 앞에 나타난 일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복수에 성공해 승리를 거둔 것인지 모른다. 그는 불현 듯 두려움에 몸이 얼어붙으면서 지금 이 방에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다니 무슨 짓인가 하는 자문이 들었다. 그는 사람을 죽였고, 그 끔찍한 살해의 독배를 벌컥벌컥 배가 터지도록 들이켜고 대취해버린 것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을 밟고 한 번 비틀거리더니 냅다 내달리기 시작해 구르듯 계단을 내려가 작은 문을 비좁기라도 하다는 듯 현관의 큰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바깥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져 전속력으로 미친 듯이 달아나 몸을 감췄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선롯가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그 괴괴한 집은 그의 뒤에서 죽음처럼 내버려진 해 애석한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P514-517)

“오직 당신만이 제대로 파악했소.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진실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진실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오. 개개인의 이익도, 심지어 국가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말이오..... 계속 정진하시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신경쓰지 말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주시오.”

“법관의 의무가 말씀하신 것에 그대로 다 담겨 있습니다.” 드니제는 마무리 삼아 말하고 인사를 한 다음 활기찬 걸음걸이로 떠났다.

혼자가 되자 카미라모트는 우선 촛불을 켰다. 그리고 세브린의 편지를 보관해둔 서랍을 열고 편지를 꺼내들었다. 촛불이 높다랗게 타올랐다. 그는 편지를 펼쳐서 두 줄짜리 문장을 다시 읽으려고 했다. 그러자 예전에 자신의 마음을 애틋하게 뒤흔들어 놓았던 연보랏빛 푸른 눈의 그 우아한 범죄자가 문득 떠올랐다. 지금 그 여자는 죽고 없다. 그녀의 비극적인 모습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가 짊어지고 가야 했던 비밀을 그 누가 알랴? 그렇다. 분명히 진실입네 정의입네 하는 것들은 헛소리다! 그 매혹적이었던 미지의 여인과 관련해 그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그녀가 그를 스쳐지나갔던 그 찰나 같은 순간의 욕망, 그가 충족시키지 못한 그 욕망뿐이었다. 그가 촛불에 가까이 가져간 편지가 불타기 시작하자 그는 커다란 슬픔에, 불행의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처럼 손가락 사이로 바스러져 떨어지는 한 줌의 검은 재처럼 휩쓸려나가 소멸하는 것이 제정 체제의 정해진 운명이라면, 이 증거물을 인멸해봤자, 이 행동으로 양심에 가책의 짐을 지워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P546-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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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로 며칠이 지났다. 자크는 예전의 괴팍하고 거친 모습으로 되돌아가 동료들을 기피한 채 일에만 매달렸다. 의회에서 몇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 벌써 전초전 격으로 소규모 전투가 한 차례 벌어졌는데 출발이 좋았다는 평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군대 수송 때문에 철도원들은 파김치가 되었다. 정규 운행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예정에도 없는 임시 열차들이 끝없이 편성되는 바람에 대규모 연발착 사태가 초래되었다. 군부대의 집결에 박차를 가하느라 일급기관사들이 징집된 사정은 그다음 문제였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던 어느 날 저녁, 자크는 르아브르에서 자신이 평소에 몰던 급행열차 대신 병사들을 미어터지게 태운 도합 열여덟 량의 차량이 연결된 장대열차를 끌라는 명령을 받았다. (P563)

기관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터널을 막 빠져 나온 기차는 컴컴하고 텅 빈 벌판을 가로질러 쉬지 않고 내달렸다. 말로네 역이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는데,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아서 플랫폼에 서 있던 부역장은 벼락치는 소리에 휩쓸려가면서도 서로 먹고 먹히기를 거듭하고 그 두 사람을 보지도 못했다.

페쾨는 마지막 힘을 끌어내 자크를 집어던졌다. 자크는 허공에 붕뜬 느낌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순간적으로 페쾨의 목에 매달렸는데 워낙 세게 끌어안았는지라 페쾨도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딸려가고 말았다. 두 사람의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서로 뒤섞이며 아스라이 사라졌다. 기차에서 함께 떨어진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속도의 반작용으로 기차 바퀴 밑으로 빨려들어가 한 덩어리로 으스러지고 짓이겨졌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형제처럼 지내온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머리도, 다리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피범벅이 된 두 몸통만이 여전히 상대를 숨막히도록 꽉 끌어안고 있었다. (P568-569)


기관차가 도중에 산산조각 내버린 희생자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기관차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로 인해 뿌려진 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지 않은가? 운전자도 없이, 어둠 속 한가운데로, 마치 살육의 현장 한복판에 풀어놓은 눈멀고 귀먹은 한 마리 짐승처럼, 기관차는 이미 피곤에 절고 술에 취해 혼곤한 상태에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을 싣고, 그 총알받이들을 싣고, 달리고 달렸다. (P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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