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의 <질풍론도>

영화 <질풍론도> 2016년

by 노용헌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시리즈, <백은의 잭>, <화이트 러시>, <눈보라 체이스>, <연애의 행방>중 <질풍론도>는 은색의 광활한 설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공의 생물병기를 쫓는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 어떠한 백신도 통하지 않는 초미립자 탄저균이 비밀리에 배양되고, 그중 일부가 도난당해 장소를 알 수 없는 설산에 묻힌다. 그러나 범인은 우연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숨겨둔 장소는 미궁에 빠진다. 기온이 섭씨 10도 이상으로 오르면 보관 용기는 깨지고 대재앙이 벌어진다. 협상은 불가능하고 대재앙을 막기 위해선 이 생물병기를 찾아야 하지만 단서는 나무에 걸린 테디 베어를 찍은 사진 한 장뿐이다. 주인공 구리바야시 가즈유키는 생물병기를 수거하기 위해 스노보드 마니아인 중학생 아들과 함께 일본 내의 설산을 뒤지기 시작하며 쫓고 쫓기는 사투를 벌인다.

영화 질풍론도 03.jpg

장갑 낀 손가락 끝으로 신중하게 번호를 눌렀다. 잠금 상태가 풀리는 녹색 등이 켜진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내부는 몇 갠가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 보관된 병원체는 한 종류뿐이다.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구리바야시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본 구리바야시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 있어야 할 다섯 개의 용기가 세 개밖에 없다. 즉, 두 개가 사라진 것이다.

발밑을 보았다. 혹시 누군가가 떨어뜨려 깨진 게 아닌가 해서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냉동고 속을 꼼꼼히 조사했지만, 어디에도 없다.

문을 닫고 뒷걸음질 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없다. 지난주 금요일. 마지막으로 이곳을 나간 것은 구리바야시였다. 그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캐비닛 속과 시험기구 속 등을 조사했다. 설마 싶긴 했지만, 누군가가 꺼낸 채 넣지 않았을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다.

그러나 용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누군가가 훔쳐갔다. (P28-29)


도고는 끄덕이며 옆에 있던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화면을 구리바야시 쪽으로 돌렸다.

“이걸 보게.”

화면에는 한 통의 메일이 보였다. 보게, 라고 했으니 읽어도 된다. 구리바야시는 메일의 내용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다이호대학 의과대학 연구소 소장 도고 마사오미에게

당신에게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린다.

연구소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두 개가 없어졌을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군가에게 확인을 시켜보도록. 당신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제일 좋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실물은 내 손에 있으니. 모든 것을 한 개의 상자에 옮겼다. 알겠지만, 총량은 200그램이다. 다만 내가 소지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어딘가에 보관하기로 했다. 첨부한 사진을 보면 어떻게 처치했는지 알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용기는 원통형의 얇은 유리제품으로 빙점 아래까지 얼린 에보나이트제 마개로 뚜껑을 덮었다. 내 계산으로는 기온이 섭씨 10도 이상이 되면 에보나이트의 팽창으로 유리 상자는 파손될 것이다.

사진의 장소가 어디인지 당신은 짐작도 못할 테지. 하지만 발견할 때를 위한 표식으로 옆에 있는 나무에 발신기를 달아두었다. 첨부 사진에 찍힌 것이 그것이다. 방향 탐지 수신기를 사용하면 300미터 이내에서 발신기를 발견할 수 있다. 즉,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을 해결하면 된다.

첫째, 사진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찾아낸다.

둘째, 발신기 주파수에 맞는 방향 탐지 수신기를 입수한다.

그러나 둘 다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들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리라 예상한다.

그래서 거래를 제안한다. 내 요구에 따라준다면 사진 장소를 밝히고, 수신기도 주겠다.

그 요구란 단도직업적으로 말해 돈이다. 3억 엔을 준비해라. (P30-31)


“짐작이 가는 인간은 한 명밖에 없어, 자네도 그렇지?”

“구즈하라...... 인가요.”

도고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마도.”

구리바야시는 다시 메일을 읽어보았다. 구즈하라의 홀쭉한 얼굴, 가는 눈, 그리고 얇은 입술이 뇌리에 떠올랐다.

메일에 첨부한 두 장의 사진을 보았다. 한 장은 원통형 용기를 눈 속에 묻기 전에 찍은 사진,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나무에 걸린 테디 베어를 찍은 사진이었다. 테디 베어가 메일에서 얘기한 발신기일 것이다.

보낸 사람 이름이 ‘K-55'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도둑맞은 용기의 내용물 명칭이기도 했다. 무서운 병원균인 탄저균의 일종이다. 게다가 보통 병원균과 달라 특수한 가공처리가 되어 있다.

탄저병은 옛날부터 알려진 병이다. 보통은 가축이나 야생동물이 탄저균에 오염된 풀이나 토양을 섭취하여 감염된다. 인간 감염은 그런 동물이나 그 고기, 모피에 접촉한 경우에 일어난다. 균의 침입경로에 따른 발병 유형에 따라 피부 탄저병, 장(腸) 탄저병, 폐 탄저병 세 가지로 나뉜다. 다만 인간에서 인간으로 감염되는 일은 없다. (P32-33)


물론 이것은 중대한 법률 위반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사람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병원체를 보유한 자는 병원체 종류와 보유 목적을 의무적으로 나라에 신고해야 한다. 다이호대학 의과대학 연구소도 탄저균 보유 사실을 신고했다. 다만 백신 개발이 주목적이며, 말할 것도 없이 생물학 무기 개발은 그 목적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정을 알게 된 도고는 그 자리에서 구즈하라를 해고했다. 또한, 사용하지 않고 있던 생물 안전 등급 4인 실험실을 가동하여 ‘K-55'를 그쪽으로 옮겼다.

물론 구즈하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테러리스트들로부터 완벽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병기 수준의 세균을 만들어서, 그것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듣자 하니 학장의 자택에까지 찾아가서 부당해고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장이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P35)

“아마 구즈하라 씨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차 밖에 나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 발연통이 뒹굴고 있었는데요. 그걸 내려놓으려던 순간에 뒤에서 달려온 트럭에 치였다고 합니다.”

“어째서 차 밖에?”

구리바야시가 물었다.

“구즈하라 씨의 차를 조사해보니 엔진의 팬벨트가 끊겼다군요. 아마 그래서 엔진이 파열했나 봅니다. 차를 갓길에 세운 뒤 구조 요청을 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에서는 종종 이런 사고가 생깁니다. 바로 이 병원으로 데리고 왔지만, 머잖아 사망이 확인되었습니다. 면허증을 보고 신원은 바로 판명됐습니다만, 가족의 연락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소지하고 있던 스마트폰도 박살이 나서 누구한테 알려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었죠. 그래서 차에 남은 소지품을 조사해보았더니 다이호대학의 봉투가 발견돼서 혹시 관계자가 아닌가하고 문의를 해보았던 것입니다.” (P42)


점장에게 의논해보자, 하고 다나카가 말했다.

점장은 야마노라는 백발의 남성이다. 슈토는 별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지만, 스키 경력 40년의 베테랑으로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 유명 산들을 거의 활주했다고 한다.

야마노는 사진을 보더니 “너도밤나무네”라고 먼저 말했다.

“해발고도는 1,000미터에서 1,5000미터쯤. 군마에도 없는건 아니지만, 역시 니가타나 나가노겠군. 눈은 가벼울 것 같네. 멀리서 바람에 날리는 걸로 봐서, 멋진 파우더야. 나는 나가노가 아닌가 싶다.”

슈토는 놀랐다. 몇 장의 사진만으로 그렇게까지 알아내다니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을까요?”

야마노는 사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돔 더 큰 특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지형을 알 수 있는 무언가가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그러다 한 장의 사진을 바라보다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이 사진 위쪽에 아주 조금이지만, 멀리 능선이 찍혀 있어. 이것이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본 적 있으세요?”

“아니, 난 몰라. 여기저기 다니긴 하지만, 산 모양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전문가라면.”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산악인이요?”

“비슷한데 사진작가야. 설산 사진만 찍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한테 물어보자.” (P66-67)

영화 질풍론도 02.jpg

“너도밤나무 코스 제2 로맨스 리프트, 그렇지?”

야마노가 옆에서 말했다.

다나카가 끄덕였다. “접근성이 나빠서 이용객이 적은 데다 노령화가 심했다고 하더군요.”

“3년 전이라면 아직 이 지도에 실려 있을 거야.”

스즈키가 스키장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있다!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은 옆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샤토였다.

“여기 있어요. 너도밤나무 코스 제2 로맨스 리프트라고 쓰여 있어요.”

“이걸 보니 리프트는 북쪽으로 내려가는 언덕을 따라 만들어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스즈키는 슈토를 보았다.

“사진의 시각과 그림자의 방향이 완전히 일치해.” (P71)

“아니, 속도가 너무 빨라서, 리프트가 이렇게 빨랐던가.”

“고속 리프트니까. 지금은 대부분 이런 거야.”

“그렇구나, 발전했구나.”

구리바야시는 리프트 위에서 스키장을 둘러왔다. 컬러풀한 스키복으로 몸을 감싼 스키어와 스노보더들이 넓은 겔렌데를 마음껏 활강하고 있다.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다들 상급자처럼 보이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는 온통 은빛 세상이고, 나는 아들과 둘이서 공중에 떠 있다. 일주일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환상적인 기분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다. 내게는 중대한 임무가 있다, 하고 구리바야시는 정신을 바짝 가다듬었다.

리프트 내리는 곳이 가까워지니 또 조금 긴장이 됐다. 표시가 있는 곳에서 일어서자 스키는 그대로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왓, 앗앗앗.” (P95)

최근 몇 년 어느 스키장에나 활주 금지구역에 침입하는 스키어나 스노보더가 늘고 있다. 이유는 단순해서 비압설 경사면을 타는 것이 유행이기 때문이다. 스노보드는 원래 그런 경사면을 미끄러지는 데 적합하고, 스키에서도 폭이 넓은 플레이트가 개발되어서 그 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활주 금지를 시키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 위험하다. 나무에 추돌해서 크게 다치기도 하고,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눈사태를 만나 하마터면 눈에 파묻힐 뻔한 일조차 있다.

그래서 스키장 측에서도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정규 코스 안에 비압설 구역을 늘리거나 가이드를 붙인 백컨트리 투어를 기획했다. 하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줄지 않는다. 어쩌면 규칙 위반을 하는 게 그들에게는 쾌감이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연락이 온 위치에 가까이 갔다. 네즈는 조금 속도를 늦추고, 전방을 자세히 보면서 코스를 나아갔다. 이윽고 코스 구석에 놓인 스키 플레이트와 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스노모빌을 세웠다. 바로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코스 밖으로 나간 흔적이 점점이 이어졌다.

네즈는 신중하게 발자국을 더듬어갔다. 그러자 푸른색 스키복을 입은 남성이 눈 속에 축 늘어져 있는게 보였다.

“괜찮습니까?”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남성이 고개를 비틀어 돌아보았다. 살짝 움직이는 것도 상당히 고통스러워했다. 안경을 끼고 있다. 고글을 머리 위로 올린 것은 아마 렌즈가 부예졌기 때문일 것이다. 눈 속에서 몸부림치면 이내 땀이 흐른다.

“나갈 수가 없습니다. 움직이려고 하면 할수록 빠지기만 해요.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P105-106)

영화 질풍론도 04.jpg

“엉? 뭐?”

겐타는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무에 못이 박혀 있고, 기묘한 것이 걸려 있었다.

“어라? 어째서 이런 곳에......”

그것은 작은 테디 베어였다. 얼핏 보기에도 비교적 새것이다.

“뭐라고 생각해?”

다카노가 물었다.

글쎄, 겐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어. 분실물은 아닌 것 같네.”

“여기서 누가 죽은 걸까. 교통사고 났을 때. 현장에 꽃 같은 것 갖다놓잖아.”

“그건 아닌 것 같아. 이 스키장에서 그런 일이 있다면 난리가 났을 테고, 순찰도 더 엄격해졌을 거야.”

“그것도 그러네.......”

유키는 석연찮다는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겐타는 팔을 뻗어 테디 베어를 내렸다. 자세히 보니 꽤 고급품 같다.

스키복 주머니를 열고 거기에 찔러 넣었다.

앗, 유키가 낮게 소리를 질렀다.

“가져가려고?”

에헤헤, 겐타는 수줍게 웃었다.

“역시 안 될까?”

“안 되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도 원래 이곳으로는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잖아.”

“하지만 멋대로 갖고 가는 것은 옳지 않아.”

“그럼 누구한테 말하고 가져가면 되는 거야.”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지만 멋대로 가져가서 나중에 성가신 일이 생기는 것도 싫지 않냐?”

“으음.........”

겐타는 주머니에서 테디 베어를 꺼냈다. 그에게는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다. 이걸 주면 기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산 것을 선물하는 것은 쑥스럽지만, 이거라면 가볍게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숲 속에서 주웠는데 너 줄게, 라고 하면 된다.

그러나 친구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유키는 진지하고 신경질적이다. 원래는 이렇게 활주 금지 구역을 타는 것도 찜찜해하지만, 마지못해 겐타와 어울려주고 있다.

알았어, 하고 테디 베어를 나무에 다시 걸어놓았다. (P119-120)

할 수 없이 수신기를 배낭에 넣고, 비스듬히 활강하여 코스로 돌아왔다.

“이상하네. 눈에 띄는 곳은 한차례 다 돌았는데.”

“한 번 더 돌아볼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보자.”

“알았어.”

그렇게 대답한 뒤 치아키가 네즈 옆으로 다가와, 귓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뭔데?”

“저쪽 보지 말고 들어. 지금 우리보다 5미터 정도 위에 회색 스키복을 입은 스키어가 있는데, 아까부터 줄곧 우리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 같아.”

“뭐?”

엉겁결에 돌아볼 뻔했지만, 직전에 참았다.

“확실해?”

“아마 틀림없어. 우리가 코스 밖에서 돌아왔을 때,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로 근처에 있어.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뭐 하는 놈일까?” (P190-191)

“백신 얘기는 숨기면 되잖아요? 어디까지나 테디 베어를 찾는 것이 목적인 게임으로 하는 거예요. 발견한 사람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는 거죠. 그래서 테디 베어를 어디서 찾았는지 넌지시 묻는 거예요. 이거 굿 아이디어 같은데, 아, 그렇지만 선물은 구리바야시 씨가 자비로 부탁드려요.”

치아키가 말했다.

“자비? 그건 뭐. 좋습니다만......”

구리바야시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어 손가락 끝으로 눈썹 옆을 긁적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백신 얘기는 숨기면 되지. 일단은 테디 베어를 찾도록 하자. 그리고 장소를 물어보는 거야. 오호,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그렇죠?”

“아냐, 역시 안 되겠어.”

그렇게 말한 것은 네즈다.

“어째서? 구리바야시 씨도 수긍을 했는데?”

“생각해봐, 왜 우리가 대신 찾기로 했지? 일반인이 활주 금지 구역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잖아. 많은 사람들이 코스 밖으로 나가 봐. 언제 어디서 눈사태가 발생할지 모르고, 부상자가 나올 우려도 있어. 무엇보다 스키장에서 허가를 내리지 않을 거야.”

“쳇,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더니만.”

치아키는 토라진 듯이 턱을 괴었다.

“이 산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고, 더 정확한 위치를 추정해볼까 싶습니다. 물론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보려고 합니다. 괜찮겠죠?”

네즈의 제안을 듣고 구리바야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후우 하고 숨을 토하며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로서는 무조건 맡길 수밖에 없어서......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P210-211)

“뭐가 멍청이야, 들킨 것이? 시내에서 미행하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단 말이야.”

“알아, 그런 건,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너, 매일 같은 옷 입고 쫓아다니고 있지? 그러니 의심받는 게 당연하다는 거야. 옷을 몇 벌 준비해놓고 자주 갈아입으면 좋았을 것을. 대여도 할 수 있을 텐데.”

오리구치는 할 말이 없었다. 듣고 보니 그랬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뻔하잖아. 구리바야시가 있는 곳을 파악해둬. 목적한 물건을 찾으면 구조요원들은 반드시 구리바야시에게로 갈 거니까. 승부는 그다음부터야.”

“가로채란 얘기야? 그렇게 쉽지 않을 텐데.”

“쉽지 않으면 너는 목을 맬 수밖에 없지.”

농담조도 아니고, 냉담하고 거침없이 말했다. 친동생한테 뱉은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머리를 써. 괜찮아. 중간에 가로채지 않아도. 보물이 구리바야시 손에 넘어간 뒤 천천히 빼앗는 방법도 있으니까.” (P216)

동생의 눈으로 봐도 기묘하다고 느낀 일 중 하나로, 중학교 시절, 마나미가 자신의 시험 점수를 조작했던 적이 있었다. 시험 치던 날, 귀가한 그녀는 오리구치 앞에서 문제지를 펴놓고 자신의 해답을 채점했다. 교과서도 참고서도 전혀 보지 않고, 그녀의 말로는 사실은 정답 같은 건 전부 알고 있는데 일부러 몇 개 틀렸다고 했다.

“백 점 맞아서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저 질투를 받거나 아니면 귀찮게 학급임원 일을 떠맡을 뿐이지. 적당히 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마나미는 ‘능력 있는 독수리는 발톱을 숨긴다’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지금 직장에 들어간 뒤로는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봤자. 그걸 반드시 평가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심부름센터 사람처럼 이용당하다, 닳고 해져서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기에 십상이라고 곧잘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말이야. 일확천금을 노리려면 어딘가에서 한탕 승부를 걸 수밖에 없어. 그때가 올 때까지 가만히 수더분하게 기다려야 해. 느려 터지고 둔해서 경계할 필요가 없는 인간. 주위 사람에게는 그런 식으로 보이며, 숨죽이고 있는 거야. 그러면 분명 기회는 와. 중요한 것은 그때 절대 주저하거나 정에 얽매이지 말 것.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선 안 돼.”

이 대사는 마나미에게 몇 번이나 들었다. 사람은 제각각이구나, 하고 오리구치는 생각했다. 자기 같으면 누나 정도의 재능이 있다면 사업에 그 능력을 살릴 것이다. 발톱을 감추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능력을 세상에 어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누나가 이번에 드디어 움직였다. 확실한 것은 가르쳐주지 않지만,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노릴 기회가 왔다고 했다. (P217-218)

영화 질풍론도 05.jpg

안테나 끝이 한 사람의 스키어에게 향했을 때, 발광 다이오드 점등 수가 늘어났다. 이 스키어란 분홍색 스키복을 입은 여자아이이다.

3인 가족은 네즈와 치아키 아래로 경쾌하게 활강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발광 다이오드 점등 수는 줄다가 이윽고 제로가 되었다.

“어째서 이렇지? 이것도 혼선?”

“아냐, 수신기가 확실하게 반응했어. 혼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럼 뭐지?”

“저 여자아이가 전파를 발하는 것을 갖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것이 테디 베어에 장치된 발신기와 같은 주파수이거나, 혹은......”

입술을 핥은 뒤, 네즈는 말을 이었다.

“저 아이가 테디 베어를 갖고 있거나.”

“저 아이가.......”

“부모로 보이는 어른 둘과 함께였잖아. 그들이 숲 속에서 테디 베어를 발견해서 그걸 딸에게 주었다는 가정은 충분히 할 수 있어.”

네즈의 얘기를 들은 치아키는 느닷없이 안전 바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어이! 뭐 하는 거야.”

“쫓아가야지.” (P248-249)

네즈는 손을 뻗어 안에 든 것을 찾았다. 갈색 테디 베어!

“그게 왜요?”

와타나베가 물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스키장으로 다시 돌아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즈는 와타나베를 향해 말했다.

“옛?”

와타나베는 깜짝 놀라서 눈이 커다래졌다.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제발.”

네즈는 머리를 숙였다.

“뭐, 뭐, 뭐, 뭐라고요? 얻은 거라고요?”

전화로 네즈의 얘기를 듣고 구리바야시는 엉겁결에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오른쪽 다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야야야야야야야야.”

소리가 컸던 탓인지 주위 사람들이 일제히 주목했다. 구리바야시는 지팡이 대신 쓰던 스키 폴을 짚고 가게 입구로 향하면서 전화를 계속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테디 베어를 얻었다니 누구한테요?”

“그러니까 생판 모르는 스키어한테요. 그제 따님이 스키를 탈 때 그 인물과 부딪혔다고 합니다. 상대는 사과를 하고 주머니에서 테디 베어를 꺼내 사과의 선물이라며 주었다는군요.”

“부딪혔다.......”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아침, 그 가족이 그런 얘길 했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 후에 구리바야시가 수신기 스위치를 켰을 때, 반응이 있었다. 여자아이가 옷 주머니에 테디 베어를 넣어둔 채 스키장으로 향하는 도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겁니까? 그 상대 스키어는?”

가게를 나오면서 구리바야시는 물었다. (P284-285)

체크무늬 스키복을 입은 남성이었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다. 겐타의 아버지보다는 조금 아래일까. 선글라스를 끼고 줄무늬 니트 모자를 쓰고 있다.

예, 하고 겐타가 대답하자, “혹시 테디 베어를 찾은 친구?” 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데요.”

그러자 남성은 장갑을 낀 손으로 짝 손뼉을 쳤다.

“그렇구나, 너구나, 이야, 만나서 다행이다.”

“‘활강’으로 오라고 들었는데요.”

“그래, 그래, 맞아, 그런데 너 큰일을 저질렀구나.”

“데디 베어 말인가요?”

“물론 그렇지, 그것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어.”

“죄송합니다.”

뭐가 뭔지 몰랐지만, 일단 사과했다. 속으로는 투덜거렸다. 뭐야, 야마자키 계집애. 야단맞는 일은 없다고 했으면서......

“뭐, 그건 됐다. 일단 안내를 해줄래?” (P303)

네즈 씨, 하고 유키가 부르며 달려왔다. 한 그루의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 나무 같아요.”

“어떻게 알아?”

“여기 보세요.”

나무줄기를 가리켰다. 얼굴 높이쯤 되는 위치다.

“못이 있잖아요. 여기에 테디 베어가 걸려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정말로 못이 박혀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얼른 그 아래를 파보았다. 그랬더니 다른 장소와는 명백히 감촉이 달랐다. 의도적으로 눈을 다져놓았다.

이윽고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눈을 치워보니 가루가 든 유리 용기였다.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내려서 안에서 백신 수납 용기를 꺼냈다. 구리바야시에게 받은 것이다. 잠금쇠를 벗기고 금속제 뚜껑을 열자, 플라스틱제 뚜껑이 또 나왔다. 그것도 열어서 유리 용기를 안에 담았다. 완충재가 들어 있어서 다소의 충격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이중 뚜껑을 닫고, 옳지, 하고 네즈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을 때였다. 위에서 누군가가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기척이 났다. 보니, 두 명의 스키어가 다가오는 참이었다. 한 사람은 자그마한 몸집에 갈색 옷을 입었다. 다른 한 사람은 체크무니의 대여 스키복이다. 그리고 머리에는 취향도 독특한 줄무늬 모자를 쓰고 있다. (P316-317)


“뭐 하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지금 가르쳐주지.”

남자는 스키 플레이트를 벗고, 스키 폴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곤혹스러운 듯이 서 있는 소년의 등을 냅다 떠밀었다. 소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야!”

네즈가 소리쳤다.

남자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걸 보고 네즈는 깜짝 놀랐다. 칼이었다.

소년의 목덜미에 칼끝이 닿았다.

“자, 어떡할래?”

남자가 물었다.

“잠깐, 난폭한 짓 하지 마.”

“협박이 아냐, 이 녀석을 살리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선글라스 탓에 남자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광기 어린 아우라가 감도는 것은 확실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칼로 찌를 우려가 충분히 있다.

“어이, 어때! 이 녀석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나?”

소년의 신음이 네즈의 귀에 들려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냐?”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일단은 갖고 있는 것을 거기 내려놔. 천천히 . 이상한 짓 하면 이놈의 목숨은 없는 줄 알아.”

네즈는 몸을 낮추어 수납용기를 눈 위에 내려놓았다. (P318-319)

“바보 같은 년.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서! 서라고! 이 도둑놈아!”

여자가 소리쳤다.

“시끄러워!”

오리구치는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도 쫓아오며 매달려서 왼손으로 스키 폴을 휘둘렀다. 그러나 오히려 그 폴을 잡혀버렸다.

“빌어먹을, 놔!”

“누가 놓을 줄 알고, 이 오디색아.”

여자가 무슨 소린지 모를 말을 지껄였다.

힘껏 밀었다 당겼다 하지만, 상대는 두 손으로 꽉 잡고서 도통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되레 오리구치 자신이 균형을 잃을 것 같았다.

결국 폴을 놓쳤다. 그랬더니 맙소사, 여자는 그 폴을 오리구치 쪽으로 휘둘렀다. 하마터면 얼굴을 맞을 뻔했다. 뭐 이런 난폭한 여자가 다 있나.

“뭐 하는 거야!”

소리쳤지만, 2타째가 날아왔다. 그것도 간신히 피했다.

상대는 오리구치의 왼쪽에 있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폴을 왼손으로 바꿔 들고 맞섰다. 눈 위를 미끄러지면서 칼싸움이 벌어졌다. 쟁그랑쟁그랑, 하는 금속음이 겔렌데에 울려 퍼졌다. 다른 스키어나 스노보더들이 무슨 일인가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끈질긴 여자였다. 도무지 물러설 기미가 없다. (P322-323)


“저, 그럼 가장 중요한 물건은?”

구리바야시가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하고 네즈는 배낭을 열었다. 식품용 밀폐용기가 들어 있었다. 그 남자는 여기다 백신을 넣을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수납용기가 들어 있다. 작은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자, 여기, 하고 구리바야시 쪽에 내밀 때였다. 뚜껑에 달려 있던 잠금쇠가 벗겨졌다. 탁하고 용기가 열리며 옆으로 누웠다. 급기야 플라스틱 제품의 중간 뚜껑까지 열렸다.

그 바람에 안에 들어 있던 유리용기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소리를 낼 틈도 없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은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하고 몹시 건조한 소리를 내며 유리가 깨졌다. 동시에 고운 가루가 날렸다. 네즈는 그 모습을 마치 느린 동작의 영상을 보듯이 목격했다.

순간, 전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멍하니 바닥에 흩어진 가루를 바라보았다.

아악!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은 구리바야시였다. 그는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다들 숨 쉬지 마세요! 숨 쉬면 안 돼요! 도망쳐요! 빨리 도망쳐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물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멍하니 그를 보고 있을 뿐이다.

“뭐 하는 겁니까. 빨리 도망치라니까요! 죽어요. 다들 죽는다고요! 슈토, 도망쳐! 빨리!”

구리바야시는 다리가 엉켜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P332-333)


“어째서 이런 게 대신 묻혀 있었던 걸까요.”

“누군가가 바꿔치기한 거네.”

치아키가 말했다.

“누가?”

“글쎄, 그 자리에 묻힌 것을 아는 사람일 거라 생각하지만.”

치아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야. 묻은 범인과 두 명의 소년. 그러나 범인은 죽었어.”

“갈색 스키복 소년일 리는 없어. 그 아이는 남자에게 속아서 안내를 해주었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잠시 실례합니다, 하고 네즈 뒤에서 소리가 다가왔다. 다카노 세이야가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주워 들었다.

왜요? 하고 네즈가 물었다.

“이거 아버지가 가끔 마시던 비타민제 병인데요. 주방 선반에 놓여 있던 거예요.”

“뭐라고! 어째서 그런 일이.......”

다카노가 눈을 부릅떴다.

세이야는 시선을 구리바야시에게로 옮겼다.

“지금 그 병원균 얘기. 동생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나요?”

“예? 어,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구리바야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요? 잘 생각해보세요. 어딘가에서 말한 적이 없는지?”

“그럴 리는 없어요. 말한 것은 지금이 처음으로.......”

거기까지 말한 뒤. 구리바야시는 갑자기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아아아악, 하고 뒤집히는 소리를 냈다.

“왜 그러세요? 말했어요?” (P336-337)

신중한 손놀림으로 수납 용기를 닫은 뒤, 구리바야시는 자신의 눈도 감았다. 감개무량한 걸까. 눈을 뜬 뒤에는 휴우,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나서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물건이 틀림없는 거죠?”

네즈가 확인했다.

“틀림없습니다. 이제 두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옆에 놓여 있던 접착테이프로 수납 용기 뚜껑을 고정시켰다.

“슈토, 이걸 아이스박스에 넣어줘. 단열재는 들어 있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

슈토는 용기를 꺼내 발밑에 둔 냉장박스에 담았다. 그 안에는 보냉제 대신 냉동 프랑크 소시지가 잔뜩 들어 있었다.

“도쿄까지 어떻게 운반하실 건가요?”

네즈가 물었다.

“곧 부하가 도착할 예정입니다. 보냉 기능이 있는 상자를 갖고 올 테니, 거기 넣어 가지고 가겠습니다.” (P346)

그제야 유키가 얼굴을 들고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가 이타야마 중학교 학생들에게 복수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어.”

어머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리 없잖아. 유키, 이것만은 알아주렴. 자신이 불행하다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길 바라는 건 인간으로서 실격이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몫마저 행복해지길 바라야 해. 그러면 분명 그 행복이 넘쳐흘러 우리에게도 돌아올 테니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불행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들도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힘껏 행복을 만들어서 그 가엾은 사람들에게도 행복이 돌아가도록 애쓰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건 믿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노조미가 죽어서 괴롭지만, 이렇게 가게에 나오는 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즐겁길 바라기 때문이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알아주겠니?”

유키는 잠시 침묵했지만, 조그맣게 끄덕이고 알았어, 하고 대답했다. (P349-350)


“슈토, 어떻게 됐을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치아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글쎄,하고 네즈는 하이볼을 마셨다.

“구리바야시 씨를 설득했을까.”

“어떨까. 그렇지만 구리바야시 씨도 거절할 수 없지 않을까. 어쨌든 결정적인 증거를 잡혔으니까.”

치아키는 잔을 들고 쿡쿡 웃었다.

“놀라겠지.”

“그야 그렇지,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걸.”

네즈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구리바야시가 지팡이를 짚고 ‘활강’을 나간 뒤였다. 어째선지 슈토는 아직 가게에 남아 있었다. 치아키가 네즈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아이스박스 안을 가리켰다.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그 유리 용기가 들어 있어서였다. 네즈와 구리바야시가 말다툼을 하는 사이 슈토가 수납 용기에서 꺼낸 것 같다. 그걸 치아키는 옆에서 보고 있었다고 한다.

슈토는 어떻게든 아빠를 설득하고 싶다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이걸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혼쾌히 승낙했다. 책임지고 맡기로 약속했다.

그 위험한 생물병기는 현재 네즈의 방 냉장고 안에 있다.

줄무늬 남자가 갖고 있던 식품용 밀폐용기에 넣어서 비닐봉지로 몇 겹을 쌌다.

“데이트하는 건 아직 좀 나중이 될 것 같네.”

치아키는 어깨를 움츠렸다.

“우승 축하라는 명목도 있어.”

“좋아, 그걸로 가자.”

테이블에서 한 번 더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르쳐줘.”

“뭐?”

“오디색이 어떤 색이야?” (P366-367)

영화 질풍론도 01.jfif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비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