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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27. 2024

스티븐 킹의 <미저리>

영화 <미저리>  1991년

199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When Harry met Sally)〉, 〈어퓨 굿 맨(A Few Good Men)〉의 감독 로브 라이너가 연출했다. 〈미저리〉는 히치콕의 〈사이코〉처럼 치밀한 심리묘사를 통한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공포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히치콕의 〈사이코〉 등이 이와 유사한 플롯으로 구성한 영화다.   

  

[애니]

고통이 그러했듯 그 소리는 때때로 사라졌고, 그러고 나면 그 자리에는 오직 안개뿐이었다. 그는 어둠을 기억했다. 안개가 있기 전에는 단단한 어둠이 있었다. 그가 나아지고 있다는 뜻일까? (안개 자욱한 혼돈의 밤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그 빛은 보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이러쿵저러쿵 주저리주저리? 어둠 속에서도 소리가 들렸던가? 그는 이 질문들 중 어느 것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이치에 맞는 질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고통은 소리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고통은 태양의 동쪽과 그의 귀 남쪽에 있었다.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인 듯한 긴 시간 동안(그리고 고통과 폭풍에 뒤덮인 안개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물이었던 때부터) 그 소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고 싶었지만, 여름철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득 채운 고통에 젖은 안개 속에서는 스스로 죽고 싶어 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P15-16)    

 

반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말뚝과 현재의 상황을 연관 지을 수 있었다. 깨달음이 마치 손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고통은 바닷물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기억 속에 각인된 꿈의 교훈이었다. 고통은 단지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일뿐, 말뚝과 같았다. 때로는 덮여 있었고 때로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항상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고통이 짙고 단단한 회색 구름에 가려 그를 괴롭히지 않을 때, 바보스럽게도 그는 감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속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다시 드러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고통은 두 개의 말뚝이었고, 마음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기 오래전부터 그의 일부는 그 부서진 말뚝들이 곧 그의 부서진 두 다리를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입술에 말라붙은 침 찌꺼기를 깨뜨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책을 들고 있는 여자에게 “여긴 어딥니까?”라고 힘겨운 목소리를 내뱉는 순간이 오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렸다. 여자가 들고 있는 책을 쓴 작가의 이름은 폴 셸던이었다. 놀랄 것도 없이 그는 그게 자기 이름임을 알아차렸다. 

“콜로라도 주의 사이드와인더예요.” 그가 마침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자 여자가 말했다. “내 이름은 애니 윌크스예요. 그리고 나는........”

“나도 알아요. 당신이 바로 나의 넘버원 팬이죠.”

“맞아요.” 그녀가 말했다.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바로 나예요.”                            (P19-20)   

  

얼마후 경계심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애니가 먹여주는 약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강력한 코데인 성분을 기반으로 만든 진통제로서 노브릴이라고 불렀다. 애니가 환자용 간이변기로 폴의 용변을 처리하는 일이 어쩌다 한번 드물게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섭취하던 음식물의 성분이 순전히 수분과 젤라틴뿐인 탓도 있었지만(처음에 구름 속에 사로잡혀 있을 당시에는 애니가 정맥 주사를 사용해 영양분을 공급했다.) 노브릴이 약을 복용한 환자에게 변비를 유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부작용. 오히려 더 심각한 부작용은 민감한 환자에게 일어나는 호흡 장애였다. 폴은 거의 18년간 줄기차게 담배를 피워 댔어도 특별히 민감한 체질이 아니었지만, 호흡이 적어도 한 번은 정지했다. (기억은 못하지만 안개 속에 머물 당시에는 수차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바로 애니가 직접 입으로 인공호흡을 해 주던 때였다. 수차례 일어났던 일들 중 겨우 한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폴은 나중에 애니가 우발적인 약물 과다 투여로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게 아니었을까 하고 의구심을 품었다. 애니는 자신이 하는 일에 믿음을 가졌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알지는 못했다. 그것은 폴이 애니를 두려워하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했다. 

먹구름에서 벗어난 지 열흘 쯤 지났을 무렵, 폴은 거의 동시에 세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애니 윌크스는 노브릴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모든 종류의 약을 엄청나게 가지고 있었다.) 둘째, 폴은 노브릴에 중독되고 말았다. 셋째, 애니 윌크스는 위험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                    (P24-25)     


폴은 기억을 떠올렸다. 

‘맞아, 예보관들이 폭풍이 진로를 바꿀 거라고 그랬지. 그래서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차를 몰았던 거고.’

다리를 움직여 봤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고, 폴은 신음했다. 

“그러지 마요, 폴. 만약 당신 다리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너무 아파서 입을 다물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약을 줄 수도 없어요. 벌써 너무 많이 줘 버렸으니까.”

‘왜 나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는 겁니까?’

묻고 싶은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지만, 폴은 과연 그것이 자신과 애니가 모두 풀고 싶어 하는 의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어쨌든 간에.

“사료 가게에 들렀을 때, 토니 로버츠가 폭풍이 닥치기 전에 집에 가고 싶으면 빨리 서두르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난......  ”

“이곳은 사이드와인더 마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겁니까?”

“좀 돼요.”                    (P29)  

   

폴은 표류했다. 바닷물이 밀려왔고, 그 위를 표류했다. 한동안 다른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나더니 잠잠해졌다. 가끔씩 시계 종소리가 들려서 종소리가 몇 번이나 나는지 세 보려고 했지만 세는 도중에 의식을 놓쳐 버리기 일쑤였다. 

‘정맥 주사, 링거 튜브를 연결해서! 팔뚝에 있는 바늘 자국은 그래서 생긴 거예요.’

폴은 팔꿈치를 세워 몸을 일으키고 전등을 향해 손을 내저었고, 결국 전등을 켜는 데 성공했다. 팔을 살펴보니 팔꿈치 안쪽이 자주색과 황토색이 섞인 희미한 자국들로 뒤덮여 있었다. 멍 자국마다 검은 피가 말라붙은 구멍이 박혀 있었다. 

폴은 다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는 혹독한 한겨울에 로키 산맥 대분수령 근처에서 머릿속이 비정상인 여자와 함께 있었다. 애니는 그가 혼수상태였을 때 정맥 주사로 영양분을 공급한 여자였고, 분명히 한도 끝도 없이 약물을 투여했을 여자였으며, 그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여자였다. 

이 모든 사실이 중요했지만 폴은 마침내 좀더 중요한 사실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닷물이 다시 빠져나가고 있었다. 위층에 있는 자명종 시계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은 울리지 않을테지만, 그로서는 약 먹을 시간이 됐음을 자명종이 알려 주길 기다릴 때가 된 것이다. 

애니는 미쳤지만, 그에게는 애니가 필요했다. 

‘젠장, 정말 엄청난 곤경에 빠졌는데.’

폴은 다시 천장만 멍하니 쳐다보았고, 또다시 이마 위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P45-46) 

    

“내가 성질이 좀 있어요.” 애니가 말했다. 

“미안해요.” 폴이 메말라 버린 목구멍을 쥐어짜 내 간신히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애니의 얼굴에 뭉쳐 있던 긴장이 다시 풀어졌고,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벽을 보았다. 폴은 애니가 또다시 의식을 잃고 멍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멍해지는 대신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육중한 몸뚱이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미저리 시리즈를 쓸 때는 그런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잖아요.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그런 말을 전혀 쓰지 않았으니까. 그런 말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나는 짐승 같은 시대에는 짐승 같은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짐승 같은 옛 시절이 지금보다 더 나았어요. 폴, 당신은 ‘미저리’ 시리즈에만 전념해야 해요.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당신의 넘버원 팬으로서.”

애니는 문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P49)    

 

애니는 ‘미저리’를 좋아했다. 미저리는 애니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애니는 욕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차량 절도나 일삼는 빈민촌 출신 스페인계 미국인 꼬마 새끼는 좋아하지 않았다. 

폴은 얼마 전에 했던 생각을 기억해 냈다. ‘네가 원한다면 내 원고를 찢어서 종이배를 접는다고 해도 난 상관 안 해. 그러니........ 제발........’

또다시 분노와 수치심이 들끓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다리가 뻐근하게 쑤셔 왔다. 그렇다. 작품, 작품에 대한 자부심, 작품 그 자체에 귀한 가치........ 고통이 심해지기만 하면 그 모든 가치들이 검은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사실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작가라고 여기며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살아온 그를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폴로 하여금 애니를 너무 끔찍해서 도망쳐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끔 했고, 애니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P60)     


“애니, 1871년에는 여성들이 출산 중에 사망하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미저리는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와 그녀의 아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겁니다. 미저리의 숭고한 정신은 언제까지나......”   

“나한테는 그녀의 정신 따위 필요 없어!”

애니는 소리치고 나서 손톱을 세워 그를 향해 흔들어 댔다. 눈알을 뽑아 버릴 듯한 기세였다. 

“나는 그녀를 원해! 네가 그녀를 죽였어! 네가 그녀를 살해했어!”그러더니 두 손을 주먹 쥐고 폴의 머리 양 옆으로 하나씩 피스톤처럼 내리쳤다. 주먹이 베개 깊숙이 내리꽂혔고 폴은 헝겊 인형처럼 튀어 올랐다. 다리가 고통으로 불타올랐다. 폴은 비명을 토해 냈다. 

“나는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어!”

애니의 몸이 굳어 버렸다. 양미간이 좁아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균열이 드러나는 바로 그 표정으로 폴을 쳐다보았다. 애니가 따끔하게 비꼬는 투로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지. 그럼 폴 셸던 네가 안 그랬으면, 누가 죽인건데?”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미저리는 그냥 죽은 거야.”                   (P69-70)     


애니는 유령과 마주한 채 타자기를 나무 판 위에 올려놓았고, 그 옆에다가 코러스블 본드 용지 꾸러미를(그 종이는 원고들이 한데 섞였을 때 글씨가 번지기 때문에 폴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종이인데도) 올려놓았다. 장애인을 위한 집필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때?”

“좋아 보이는데.”

폴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거짓말을 완벽하리만치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던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뭘 쓰면 좋을까? 특별히 생각해 둔 거라도 있어?”

“아아, 폴!”

애니가 몸을 돌려 마주보며 얘기했다. 붉게 물든 얼굴 속에서 눈빛이 현란하게 춤추고 있었다. 

“나는 생각 같은 거 안 해. 그냥 딱 보면 척 아는 거야! 너는 이 타자기로 새로운 소설을 쓸 거야! 폴 셸던 최고의 소설! <돌아온 미저리>!”                 (P117-118)  

   

폴은 침실로 돌아갈 생각으로 휠체어 방향을 바꾸려고 바퀴를 잡았다가, 자신이 거실 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거실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기를 놔두는 곳이고 또.....

안개 자욱한 초원 위에 불길이 솟구치듯, 마음속에서 빛이 퍼져 나왔다. 

‘여보세요. 사이드와인더 경찰서 말짱 꽝 경관입니다.’

‘내 말 좀 들어 주세요. 말짱 꽝 경관님. 가만히 듣기만 하고 제 말을 끊지 마세요. 얼마나 통화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합니다. 내 이름은 폴 셸던이에요. 애니 윌크스의 집에서 전화하는 겁니다. 적어도 2주일 동안 그 여자가 나를 이곳에 가둬 놓았어요. 어쩌면 한 달일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지금........’

;애니 윌크스라고!‘

‘어서 나를 구해 줘요. 앰뷸런스도 보내 주고요. 그리고 제발 그 여자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여기로......’

“그 여자가 돌아오기 전에.”

폴이 비탄에 잠겨 말했다.                  (P162-163)    

 

애니가 방을 나가자마자 폴은 손을 등 뒤로 돌려 상자들을 꺼내 하나씩 차례로 침대 매트리스 밑에 집어넣었다. 방 안을 채운 얇은 막들이 두꺼워지면서 회색은 끊임없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상자들을 될 수 있는 한 제일 깊숙이 집어넣어.’

폴은 무턱대고 생각했다. 

‘확실하게 해야 해. 그래서 애니가 침대 시트를 갈 때 시트를 잡아당겼는데 상자까지 딸려서 같이 나오지 않게. 상자를 네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깊숙이..... 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상자까지 매트리스 밑에 집어넣고 나서 폴은 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W들이 술 취한 듯 흔들거니며 춤추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폴은 생각했다. 

‘아프리카.’

‘나는 이제 깨끗이 씻어내야 해.’

‘오, 나는 너무나 큰 곤경에 빠져 버렸어.’

‘흔적.’

‘내가 집 안에다 흔적을 남겼던가? 내가......’

폴 셸던은 의식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열네 시간이 지나 있었고, 밖에는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P180)     

[미저리]

애니는 폴 옆에 있는 작은 탁자 위에 타자된 원고 세 쪽을 내려 놓았고, 폴은 그녀가 원고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기다렸다. 결과가 궁금했지만 불안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사실 미저리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 어찌나 쉽던지 폴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미저리의 세계는 진부한 멜로 드라마의 세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폴이 예상했던 만큼 싫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사실 오래도록 사용했던 슬리퍼를 신는 것처럼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애니가 의견을 말했을 때 폴이 명백하고 심각한 충격에 빠져 입을 벌린 채 어리둥절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건 옳지 않아.”

“넌...... 너는 내 원고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른 미저리 시리즈는 그토록 좋아하면서, 어떻게 이 원고를 싫어한단 말인가? 지금 쓴 원고는 매우 ‘미저리’다운 내용이었고 전작들의 모습을 거의 똑같이 그려 내고 있었다.                  (P187-188)     


‘미저리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눈은 빛나고, 입술은 마법의 단어를 읊조리며 오 이런 너는 바보같이 머릿속에 똥만 들어냐 이 따위로 형편없이 글을 쓰면 안 되잖아!!!’ 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미완성 원고들이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지도 않았다. 고통을 회피하고자, 저녁 식사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대처하고자 그저 원고 용지를 꾸역꾸역 채워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그저 듣기 좋은 거짓말일 뿐이었다. 사실 그 쓰레기 원고를 쓰는 과정은 최악이었다. 폴은 사기를 쳤고, 스스로 사기 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니는 너를 단번에 꿰뚫어 봤잖냐. 이 머리에 똥만 들어 있는 놈아.’

타자기가 더럽게 건방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 그럼 이제 뭘 어떻게 할 건데?’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은, 게다가 서둘러서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날 아침 폴은 애니의 기분을 살펴보지 않았다. 자기 책을 시작부터 망친 데 대한 불쾌한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 애니가 야구 방망이로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거나 맹독성 마약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먹으라고 들이밀지 않은 것은 폴이 생각하기에 정말 행운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애니의 독특한 관점에서는 그 정도 비판적 반응은 언제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만일 살아서 그곳을 나간다면 크리스토퍼 헤일에게 편지라도 쓸 것 같았다. 헤일은 <뉴욕 타임스>에서 서평을 쓰는 사람이었다.           (P203-204) 

    

폴은 이미 제7장의 9쪽까지를 완성해 놓았다. 제프리와 래미지 부인이 가까스로 미저리를 무덤 속에서 꺼내 놓고 보니, 미저리는 그들이 누군지도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 장면을 계속 쓰고 있는데 애니가 방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폴은 꿈속에서 나오려니 아쉬웠지만 타자치는 일을 멈췄다. 

애니는 치마 옆에 폴이 제6장까지 쓴 원고를 들고 있었다. 초고를 다 읽는 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이 21쪽짜리 원고뭉치를 다시 들고 나타난 것은 한 시간이나 흐른 뒤였다. 폴은 애니의 얼굴이 약간 수척해진 데 흥미를 느끼며 계속 쳐다보았다. 

“어땠어? 이번 원고는 공정했어?”

“응.”

이것이 필연적인 결론이라는 듯 애니가 넋 나간 얼굴로 말했다. 폴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공정해. 그리고 멋져. 흥미진진해. 하지만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해! 이제까지 나온 미저리 시리즈하고는 달라. 그 불쌍한 소녀의 흙을 파던 손가락 끝이 까져 있었다니.......”

애니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 나서 말을 반복했다. 

“이제까지 나온 미저리 시리즈하고는 달라.”                  (P245)   

  

애니의 집 찻길 앞에서 녹아내리는 눈밭 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 5분 동안 일렁거렸다. 한 번은 애니가 언성을 높이더니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 가며 호통 치는 소리가 들렸다. 폴에게는 길고 지루한 5분이었다. 어깨가 쑤셨다. 쑤시는 어깨를 풀어 주려고 움직여 보려 했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애니가 손에 수갑을 채운 뒤 아예 침대 쇠틀에다 묶어 버렸던 것이다. 

그중 최악은 입에 물린 걸레였다. 가구 광택제 악취가 머리를 아프게 했고, 차츰 토할 것만 같았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조절하려 애타게 정신을 집중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마을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아마도 겨울 내내 검은 정장 구두 위에다 고무 덧신을 껴 신을 것 같은 나이 지긋한 시골 공무원이 애니와 떠드는 동안, 토사물에 기관지가 막혀 질식해 죽을 수는 없었다. 

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을 때 그들이 다시 시야에 나타났다. 이제 애니는 종이를 들고 그 목장 아저씨를 뒤따라가면서 등에 삿대질을 했고, 입에서 빈 말 풍선들이 뿜어져 나왔다. 목장아저씨는 뒤돌아보지 않을 듯싶었다. 넋이 살짝 나간 얼굴이었다. 오직 그의 입술만이 안 보일 정도로 너무 꽉 다물어져 있어서 감정을 드러냈다. 분노? 어쩌면, 혐오? 그렇다. 혐오였을 것이다.                  (P254-255)   

  

그때 소리가 났다.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지만, 한 번만으로도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철썩 때리는 소리였다. 지독하게 세게 때리는 소리. 잠긴 문을 사이에 두고 폴은 이쪽에 갇혀 있고 애니는 저쪽에 가 있었지만, 굳이 셜록 홈즈가 되지 않더라도 애니가 자기 몸을 때렸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소리로 봐서 정통으로 세게 맞은 듯했다. 폴은 애니가 입술을 잡아당겨 안 쪽의 연약한 분홍색 속살을 짧은 손톱으로 찢어 버리는 광경을 떠올렸다. 

첫 번째 미저리 소설을 쓸 당시 많은 장면이 런던 베들렘 정신병원을 무대로 했기 때문에, 자료 조사를 위해 정신 질환에 관한 메모를 작성하던 일이 불현 듯 떠올랐다. (미저리는 그녀를 미친 듯이 질투하는 악녀의 음모로 그 정신 병원에 감금당했다.) 폴은 그때 메모에 이렇게 적었다. 

‘조울증 환자가 우울한 상태로 깊이 빠져들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징후 중 하나는 자기 학대 행위이다. 손바닥으로 치기, 주먹질하기, 쥐어뜯기, 담뱃불로 지지기 등등.’

갑자기 너무나 무서워졌다.                    (P283)     


애니는 억센 손으로 쥐를 움켜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쥐덫 스프링을 잡아 뺐다. 쥐가 손 안에서 꿈틀거리며 머리를 마구 비틀어 손을 물려고 했다. 찍찍거리는 가녀린 울음소리가 소름 끼쳤다. 폴은 움찔거리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쥐 심장 뛰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우리랑 똑같아. 폴,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야. 우리는 스스로 아주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쥐덫에 걸린 쥐만큼이나 아는 게 없어. 등이 부러진 쥐가 살고 싶어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것 좀 봐.”

쥐를 움켜잡은 손이 주먹이 되었다. 눈은 계속 흐리멍텅한 상태로 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폴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애니의 팔 안쪽에서 힘줄이 불룩 솟아 나오자 갑자기 쥐의 입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흘러나왔다. 폴은 쥐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고, 두꺼운 손가락이 쥐의 몸통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손가락 첫째 마디가 몸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총기가 사라진 작은 생물체의 눈이 부풀어 올랐다.                  (P288-289)    

 

유태인 대학살에서 할아버지와 고모를 잃은 번스타인에게 폴이 말했다. 독일에 살던 유태인들이, 유럽 다른 데도 아니고 특별히 독일에 살던 유태인들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왜 해외로 도피하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은 대체로 바보가 아니었고, 대다수가 독일 사회에서 직접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독일에 그대로 머물렀을까?

번스타인의 대답은 폴에게 하찮고 잔인하며 이해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들 대부분이 피아노를 갖고 있었어. 우리 유태인에게 피아노는 꼭 필요한 생활의 일부야. 피아노를 가지고 있으면, 이사를 결심하기가 힘들지.”

이제 폴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렴.’ 처음에는 부러진 다리와 으스러진 골반이 폴의 피아노였다. 나중에는 가엾게도 소설이 피아노가 되어 버렸다. 미친 소리로 들릴 테지만, 폴은 피아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재밌기까지 했다. 부러진 뼈나 약을 탓하기는 쉬웠지만(너무나 쉬웠지만) 사실 가장 비난을 들어야 할 대상은 소설이었다. 회복기의 단순한 일상 속에 빈둥거리며 보낸 나날들과 소설. 그런 것들 가운데서도 따분하고 엿 같은 소설이 폴의 피아노였던 것이다. 웃음 천국에서 돌아왔을 때 폴이 탈출하고 없으면, 애니가 어떻게 할까? 원고를 태울까?                  (P296-297)     


“너한테 수술 전 주사를 놓기 전에 침대 매트리스 밑을 좀 조사해 봤지. 약이 나올 줄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식칼은 완전히 충격이었어. 정신이 없어서 그만 손을 베일 뻔했다니까. 하지만 넌 식칼을 매트리스 밑에 숨겨 둔 사람이 네가 아니라고 잡아뗄 거지, 그렇지?”

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이 마치 고장 나 버린 유원지 놀이기구처럼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며 갈래갈래 흩어지는 듯했다. 

‘수술 전?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수술 전 주사?’

폴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애니는 벽에서 식칼을 뽑아내 그의 성기를 잘라 버릴 작정이었다. 

“아니지. 너는 그런 곳에다 식칼을 놔둘 사람이 아니야. 너는 약을 구하러 한 번 나갔고, 먹을 것을 구하러 한 번 나갔고, 물을 구하러 한 번 나갔어. 이 식칼은 분명히....... 혼자서 저절로 두둥실 떠올라 이 방까지 날아와서는, 매트리스 밑으로 숨어 들어갔을 거야. 그래. 일이 그렇게 된 거로구나!” 애니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수술 전? 오 하느님, 애니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집어치워! 다 집어치우라고, 자식아! 몇 번이냐니까?”              (P373)  

  

애니가 몸을 숙였다. 몸을 폈을 때는 한 손에 바깥 창고에서 쓰던 도끼를, 다른 한 손에는 용접 작업에 쓰는 프로판 가스 불대를 들고 있었다. 도끼날이 번뜩였다. 불대 옆면에는 번츠 오 매틱 상표가 붙어 있었다. 애니는 다시 몸을 숙여 검은 유리병 하나와 성냥 상자를 꺼내 놓았다. 검은 유리병에 종이 라벨이 붙어 있었다. 라벨에는 ‘소독약 베타딘’이라고 쓰여 있었다. 

폴은 이 물건들, 이 단어들, 이 이름들을 결코 잊지 못했다. 

“애니, 안 돼! 애니, 나 여기 계속 있을게! 도망 안 갈 거야!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갈게! 그러니까 제발! 오 하느님 제발 날 자르지 마!”               (P376)  

[폴]

폴은 죽지도 잠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애니가 그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나서 한동안은 고통이 없었다. 그는 육체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영혼을 느꼈고, 의식이 표류하면서 순전히 생각으로만 똘똘 뭉친 풍선이 육체와 연결된 끈에 매달려 떠다니는 듯했다. 

‘이런 젠장, 왜 자꾸 신경이 쓰이지?’

애니가 도끼로 다리를 절단한 후로 폴에게는 늘 고통과 권태. 그리고 가끔씩 그 두 가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리석은 신과 소설을 쓰는데 매달리는 일이 전부였다.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아. 폴, 여기에는 한 가지 주제가 있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요소가 있어. 그 요소란 모든 것의 본질이지. 너는 그게 무엇인지 알겠니?’

물론, 그것은 미저리였다. 미저리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요소였고, 참된 본질이든 거짓된 본질이든 간에, 그것은 너무나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미저리(Misery)'는 보통 명사로서 고통을, 일반적으로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의미했다. 그런 단어가 적당한 소설에 인용되면서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성 방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확실히 길고 끝을 알 수 없는 구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곧 대단원을 맞을 참이었다. 미저리는 폴의 인생에서 마지막 4개월(어쩌면 5개월)을 관통하여 흘러왔다. 그렇다. 수많은 미저리가 있었고, 미저리의 날이 밝았다가 미저리의 날이 저물어 갔다. 확실히 너무나도 단순한 인생이었고, 확실히........                 (P398)  

   

폴은 집필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마침내 애니를 설득할 수 있었다...... 구름 속에서 그를 매혹시켰던 특출한 형상들이 자꾸만 따라다녔고, 그 형상에 딱 떨어지는 말들도 함께 따라다녔다. 직접 글로 적어 놓기 전까지 그것들이 방황하는 망령처럼 괴롭힐 것 같았다. 

그리고 애니는, 그때는 폴을 믿지 않았지만 집필을 재개하는 것은 허락했다. 폴이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니의 ‘알고 싶어’ 때문이었다. 

처음에 폴은 고통 속에 짧은 시간 동안만 글을 쓸 수 있었다. 15분 정도. 이야기가 강렬하게 끌어당길 때는 30분 정도.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고통의 연속이었다.            (P407)     


구원받을 기회가 바로 눈앞에 왔다. 폴은 창문을 부수고, 개 같은 년이 그의 혓바닥에 채워 놓은 개떡 같은 자물쇠를 부수고, 소리 지르기만 하면 될 터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애니한테서 날 좀 구해 줘요! 여신한테서 날 좀 구해 줘요!’

그와 동시에 폴의 다른 목소리가 소리 질렀다. 

‘애니, 나는 착하게 굴 거야! 소리 지르지 않을 거야! 여신님을 위해 착하게 굴 거야! 나는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더 이상 남은 몸뚱이를 절단당하기는 싫단 말이야!’

폴은 알고 있었을까? 이미 예전부터 애니가 그를 얼마나 심하게 협박했는지. 애니가 그의 본질적인 자아에, 영혼을 움직이는 간과 허파 같은 중요한 부분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내 놨는지 그가 정말 알았던 것일까? 끊임없는 공포 속에 갇혀 있음은 알았지만, 예전에는 당연한 줄로만 여기고 단단히 소유했던 자신만의 고유한 주체성이 그때까지 얼마나 많이 지워져 나갔는지도 알았던 것일까?                   (P432-433)    

 

“여깁니다! 살려 주세요! 저 여자를 조심해요! 저 여잔 미쳤어요!” 

경찰이 폴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가슴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사진인 듯한 물체를 꺼냈다. 사진임이 확실한 그 물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찻길에서 걸어 나와 폴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순간 그는 누구라도 알아들을 만한, 폴도 똑똑히 알아들은 네 마디 말을 내뱉었다. 그 다음에는 발음이 불분명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런 염병할! 그 소설가잖아!”

폴은 시선을 경찰에게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그때 폴은 주술에 사로잡힌 듯한 진정한 공포를 맛보았다. 애니가 여신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만마 켄타우루스가 기괴한 모습의 여자로 변신한 듯 반은 여자, 반은 론보이 잔디 깎이 차가 합쳐진 모습이었다.                  (P435-436)  

   

경찰이 권총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애니가 잔디 깎이 차의 방향을 살짝 틀어 경찰이 뻗은 손과 팔뚝을 깔아뭉갰다. 론보이의 잔디 배출구에서 피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경찰 제복을 입은 젊은이가 비명을 질렀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잔디 깎이 칼날이 권총과 맞부딪치면서 철커덩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러자 애니가 잔디 깎이 차를 옆으로 돌려 회전했는데,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이 폴을 응시했다. 폴은 애니가 보낸 순간적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느꼈다. 시작은 그 경찰, 다음 차례는 바로 폴이었다.               (P441) 

    

“너 미저리를 또다시 죽이려는 건 아니지, 그치, 폴?”   

폴이 배시시 웃었다. 

“애니, 만일 내가 정말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건데? 날 죽일래? 난 하나도 안 무서워. 미저리한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잘 모르지만, 나한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아....... 그리고 너한테 벌어질 일도. 나는 원고 끝에 ‘끝’이라고 쓸 테고, 너는 원고를 읽을 테고, 그러고 나면 네가 마지막으로 ‘끝’을 쓸 테지. 맞지? 물론 네가 쓰는 건 우리들의 ‘끝’이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야.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현실은 절대 허구보다 불확실한 것이 아니야. 대부분의 경우에 현실에서는 일이 어떻게 끝날지 정확하게 알 수 있어.”

“하지만.......”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 80퍼센트 정도는 확실해. 정말로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난다면, 아마 너는 좋아할 거야.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해도 종이 위에 직접 쓰기 전에는 자세한 부분은 알 수가 없을 거야. 그렇지?”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너 옛날에 그레이하운드 버스 회사 광고 생각나니? ‘그곳에 가기만 해도 기쁨이 넘칩니다.’”

“어떤 결말을 염두에 두고 있든 간에, 소설은 이제 거의 다 끝나 가는 거지, 그치?”

“그래.” 폴이 말했다. 

“거의 다 끝났어.”                           (P468-469)    

 

진실이란? 폴이 끝까지 숨기려 했던 진실이란, 바로 그가 ‘인기 작가(폴이 생각하기에 그 단어는 ’저질 작가‘보다 한 단계, 아주 조금 차이 나는 한 단계 위일 뿐이었다)’라서 그의 작품을 갈수록 냉대하던 평단의 반응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는 사실이다. 그런 반응은 진정한 작품을 쓸 여건을 만들고자 어쩔 수 없이 조잡한 연애 소설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을 뿐인 순수 문학 작가(‘빰빠라빰!’) 라는 그 자신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았다. 폴이 미저리를 싫어했던가? 정말로? 만약 그랬다면, 미저리의 세계로 몰입해 들어가는 일이 어쩌면 그리도 편안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니, 편안하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한 손에는 좋은 책을, 나머지 한 손에는 차가운 맥주를 들고 따뜻한 목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마냥 행복했다. 아마도 폴이 싫어했던 단 한 가지는 책 표지에 나온 미저리의 얼굴이 작가 사진에 나온 그의 얼굴보다 돋보였고, 평론가들은 그런 그를 젊은 노먼 메일러나 젊은 존 치버로, 말하자면 거장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가 쓴 ‘순수 문학 소설’이 차츰 자기주장만을 앞세운 일종의 절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날 좀 봐! 내가 쓴 이 소설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란 말이다! 이놈들아! 이 작품은 다양한 시각을 담고 있어! 이 작품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씌어졌어! 이것이 바로 나의 진정한 작품이다. 이 썩을 놈들아! 나를 무시하지 마! 감히 거들먹거리지 마. 이 개새끼들아! 감히 내 진정한 작품을 무시하지 마! 감히 그랬다간, 내가.........’

‘뭐? 어쩔 건데? 그 사람들 발을 잘라 버릴래? 그 사람들 엄지 손가락을 썰어 버릴래?’         (P479-480)     


기름에 흠뻑 젖은 종이 더미 위로 퉁퉁 부은 폴의 오른손이 어슬렁거렸고,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이 불붙은 성냥개비를 잡고 있었다. 

애니는 수건으로 감싼 샴페인 병을 들고 문간에 섰다. 애니의 입이 쩍 벌어졌다가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폴?” 애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소설을 다 완성했어. 정말 훌륭한 작품이야, 애니, 네 말이 옳았어. 미저리 시리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고, 잡종이든 아니든 간에 아마도 내가 이제까지 쓴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일 거야. 이제 나는 이 작품으로 살짝 장난을 쳐 볼 생각이야. 아주 재미있는 장난이지. 다 너한테서 배운 거야.”

“폴, 안 돼!”

애니가 소리 질렀다. 목소리는 고통과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애니가 손을 앞으로 뻗자 기댈 곳 없는 샴페인 병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 충돌한 병이 어뢰처럼 폭발했다. 거품 묻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러지......”

“이렇게 멋진 소설을 못 읽게 되다니 정말 안됐구나.”

폴이 애니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수개월 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환하게 빛나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가식적인 겸손은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이 소설은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해. 애니, 정말이지 위대한 작품이야.”

종이 성냥이 폴의 손가락 끝을 잠시 달구다 흔들거렸다. 폴은 성냥을 떨어뜨렸다. 잠시 동안 성냥불이 맥없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소름 끼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곧이어 ‘후룩!’ 소리와 함께 표제 쪽 위로 연한 푸른 불꽃이 퍼져 나갔다. 불꽃은 종이 더미 바깥쪽 가장자리를 따라 흥건히 고인 찐득거리는  기름을 먹어치우고 옆면을 훑으며 순식간에 달려 내려왔고, 강렬한 노란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애니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어이구, 세상에, 안 돼! 미저리는 안 돼! 미저리는 안 돼! 그녀는 죽으면 안 돼! 안 돼! 안 돼!”

애니의 얼굴이 치솟은 불길 때문에 아른아른 빛났다. 폴이 애니를 향해 고함질렀다. 

“축하 케이크에 촛불 켜니까 소원 빌고 싶니, 애니? 이 염병할 괴물 년아, 소원 빌고 싶어?”

“오, 하느님, 오, 폴, 너 지금 무슨 짓이야?”

애니가 팔을 쭉 뻗어 휘저으며 비틀비틀 다가왔다. 종이 뭉치들은 단순히 불타는 정도가 아니었다. 불덩어리가 되어 맹렬히 타올랐다. 칙칙한 회색이던 로열 타자기 몸체가 까맣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P524-525)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움직이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지랄 맞게 난잡한 이야기이다.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대화가 오갈 때마다 흉한 꼴을 당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고상하고 인간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까? 현실을 소설처럼 깔끔하게 장으로 나누기라도 하란 말인가?

“아주 난잡하지.” 폴이 쉬어터진 목소리로 말했다. “구차한 일들을 깨끗이 씻어 내려 힘쓰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막연히 생각하는 대로 지껄였다. 

샴페인 병은 시나리오에 들어 있지 않았지만, 애니의 무시무시한 생명력과 폴이 나중에 겪은 고통스러운 불안감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게다가 애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탈출할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게 집을 불태운다는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애니가 살아 있을까 봐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애니를 산 채로 불에 굽는 일쯤이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를 수 있었다. 

애니 때문에 망설인게 아니었다. 원고 때문이었다. 진짜 원고. 폴이 불태웠던 원고는 맨 위에 표제 쪽만 올려놓은 가짜였다. 쓰다가 망친 원고와 써 놓고 보니 맘에 안 들어 버리려던 원고들 사이사이에 빈 종이들을 끼워 넣은 가짜 원고일 뿐이었다. “돌아온 미저리”가 들어 있는 진짜 원고는 침대 밑에다 안전하게 놔 뒀고,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애니가 아직까지 살아 있지 않다면 거기 그대로 있겠지. 만약 아직도 살아 있다면, 아마도 애니가 읽고 있겠지만.’

‘그래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P538-539)

[여신]  

'신나게 놀던 시절이 끝나서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쓰지 않는 이유는 다 이런 거야. 정말이지 지랄 맞게 우울하거든. 애니는 내가 머리통에 빈 종이를 한 가득 쑤셔 넣고 원고에 불을 질렀을 때 깨끗이 죽었어야 했어. 나도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그때 우리는, 정말이지 애니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연속극 영화의 등장인물들 같았어. 어정쩡한 인물은 하나도 없고 오직 검든가 희든가. 좋은 놈이든가 나쁜 놈이든가 둘 중 하나였지. 나는 제프리였고 애니는 부르카 벌 여신이었어, 그런데 지금 이 꼴은......... 거 참. 빨리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할 텐데. 이렇게 바보 같은 꼴이나 당하면서 살고 있다니. 복도에 떨어뜨린 물건들은 신경 쓰지 말자, 건강을 위해 우선 술부터 퍼마시는 게 먼저고, 복도 청소는 그 다음이다. 우선 불량 벌이 되어라. 그러고 나서.......‘

폴은 멈춰 섰다. 아파트 안이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냄새가 났다. 폴이 잘 아는 냄새였다. 땟물과 분내가 조화된 지독한 냄새.

하얀 유령처럼 애니가 소파 뒤에서 일어섰다. 간호사복에 간호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손에는 도끼를 든 채 소리를 질러 댔다. 

“깨끗이 씻어 낼 시간이 왔다. 폴! 깨끗이 씻어 낼 시간이!”

폴은 비명을 질렀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도망치려 했다. 애니는 마치 새하얀 개구리처럼 꼴사납게 소파를 껑충 뛰어 넘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제복이 연신 부스럭대는 소리를 냈다. 폴은 애니가 휘두른 도끼가 자신의 목을 친 줄로만 알았다. 카펫 위로 쓰러져 피 냄새를 맡을 때까지는 정말로 그렇게만 생각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몸이 거의 반 토막으로 절단 나 있었다. 

“깨끗이 씻어 내자!”

애니가 소리를 지르자 폴의 오른손이 날아갔다. 

“깨끗이 씻어 내자!”

애니가 또 소리를 질렀고, 폴의 왼손이 날아갔다. 폴은 손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중에도 열려 있는 문으로 기어갔다. 놀랍게도 책이 아직 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리 씨네 식당에서 찰리와 점심을 함께하는 동안 머리 위의 스피커에서는 뮤잭 음악 방송에서 틀어주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찰리는 가제본된 책을 서류 봉투에 담아 빛나는 하얀 식탁보 위로 건네주었다. 

“애니 이제 이 책 읽어도 돼!”

폴은 소리 지르려 했지만 입에서 애니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머리가 댕강 날아올라 벽 쪽으로 굴러 갔다. 흐릿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머리 없이 무너지는 그의 몸뚱이와 그 위에 올라선 애니의 하얀 신발이었다. 

‘여신.’ 폴은 생각했다. 

그리고 죽었다.                    (P554-555)     


애니는 이 세상에 없었다. 애니는 절대 여신이 아니었고, 그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폴을 괴롭힌 미친 여자일 뿐이었다. 애니는 가까스로 입과 목에 박혀 있던 대부분의 종이를 꺼냈고, 폴이 약을 먹고 욕실에서 자는 동안 침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애니는 축사로 가서 쓰러졌다. 위크스와 맥나이트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어 있었지만 목이 막혀서 죽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 사인은 벽난로 선반에 부딪쳐서 생긴 두개골 파열이었고, 벽난로 선반에 부딪쳤던 것은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폴이 그토록 미워하던 바로 그 타자기가 애니를 죽여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연히 애니도 폴을 혼내 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도끼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경찰들이 돼지 미저리가 사는 우리 바깥쪽에서 애니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한 손에 전기톱을 붙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가 되었다.                    (P556-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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