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양철북> 1988년
[1]
모든 도적과 살인범과 방화범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는, 도적질과 살인과 방화를 하면서도 착실한 직업을 가질 기회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다. 노력을 했던 우연이건 간에 많은 자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P32)
나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 이처럼 허름한 상자 같은 방에 앉아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자랐다. 나중에 학교에 가게 되자 그녀는 인형을 버리고 유리알이나 다채로운 빛깔의 깃털을 가지고 놀게 되었으며,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란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했다고 한다. (P33)
이 자리에서 당장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마해 두고자 한다. 나는 태어났을 때 이미 정신적 성장이 완결되어 있어서, 나중에는 단지 그것을 확인하기만 하면 될 뿐인 그러한 총명한 갓난아기였다. 태아였을 때에는 외부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였으며, 양수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구 밑에서 양친의 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새어나오는 최초의 말들에 비판적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의 귀는 영민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그것은 작고, 꾸부러지고, 착 달라붙어 있음에도 귀여운 귀라고 불렸다. 어쨌든 나의 귀는 최초의 인상으로 부어지는 부호들이면서 그 후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들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에 새겨두었다. 더군다나 귀로 들은 것을 아주 자그마한 두뇌로써 즉시에 평가하였고, 들은 것 모두를 충분히 음미한 끝에, 이것저것은 실행하고 다른 것은 과감하게 내버리겠다고 결정했다. (P62)
그러므로 나는 전구 아래에서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다만 나에게 약속된 저 양철북만이 당시 태아의 머리 위치로 되돌아가려는 나의 욕구가 강력하게 표출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P65)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 그 어떤 소설이 한 권의 앨범이 가지는 서사적인 폭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일요일마다 하늘 위에서 부지런한 아마추어 사진사가 되어 놀랍도록 간편하게 우리들의 스냅 사진을 찍어 노출이 잘 된 것이나 서투르게 된 것이나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앨범에 갖다 붙이시는 사랑스런 하느님이시여, 내가 너무도 즐거움에 빠진 나머지 지나치게 오랫동안 하나하나의 사진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아주시고 이 앨범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벗어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오스카가 혼돈에 미혹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저는 그들 사진에 원래의 실물을 결부시키려는 유혹이 너무도 강하옵니다. (P67)
언젠가 우리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특히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 중의 하나는 벌거벗은 인간을 그의 생애동안 찍었던, 틀에 끼운 사진과 함께 한 공간에 가두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지옥은 참아낼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나쁜 사진은 상상되기만 할 뿐 찍히지는 않을 것이고, 설령 찍힌다 할지라도 현상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68)
나는 당시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매우 우울한 기분이어서 여행이나 하려고 여권을 신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로마와 나폴리 그리고 최소한 파리까지를 포함하는 여행다운 여행을 할 만큼의 충분한 돈이 없었다. 하지만 돈이 없는 것이 오히려 기뻤다. 왜냐하면 의기소침한 기분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더 서글플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68)
우리는 지난 번 영화를 볼 때 찍은 사진을 언제나 들고 다녔다. 그래야만 비교의 기회가 마련되는 법이다. 그리고 비교의 기회가 생기게 되면 자연히 즐거움을 더하기 위해서, 라인란트 식으로 말하자면 기분을 내기 위해서 두 잔, 석 잔, 넉 잔의 맥주를 거듭 주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에 잠겨 있는 인간이 자신의 여권용 사진을 가지고서 자신의 슬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슬픔은 이미 그 자체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와 클레프의 슬픔은 그 무엇에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으며, 거의 자유분방한 바로 그 비객관성으로 인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의 슬픔에 관여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사진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연속적으로 찍은 스냅 사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수동적이고 중성화된 모습으로 —이 점이 더욱 중요하다—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70-71)
전후에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징집이 해제된 남자들은 안심한 듯한 눈빛이 역력하다. 여자들은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할 줄 알며 당연하게도 진실한 표정을 짓고, 미소를 지을 때조차도 오랫동안 배워 익힌 고뇌를 감추지 않는다. 우수(憂愁)는 여자들, 스무 살의 여자들에게 잘 어울렸다. 그녀들에게는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반쯤 기대어 있거나 간에 검은 머리카락을 관자놀이에 붙인 채 마돈나와 창녀가 결합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P73-74)
이 사진을 보면 나는 그것, 즉 북을 가지고 있다. 톱니 모양으로 빨간색, 흰색으로 칠한 새 북이 바로 내 배 앞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의기양양하고 엄숙한 얼굴을 한 채 북채를 양철북 위에서 교차시키고 있다. 나는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있다.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다. 머리털은 멋을 내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머리 위에서 브러시처럼 빳빳하게 서 있다. 푸른 두 눈은 각각 추종자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한 권력에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나는 당시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데 성공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그것을 버릴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말하기도 하고 결심하기도 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정치가나 식료품상은 되지 않겠다, 라고 말이다. 오히려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이 상태로 머물렀고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몸의 크기도 복장도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작은 사람들과 큰 사람들, 작은 해협과 큰 해협, 소문자 abc와 대문자 ABC, 꼬마 한스와 카를 대제, 다윗과 골리앗, 난쟁이와 거인, 세상은 이러한 대립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나 세 살짜리이고, 난쟁이이며, 엄지손가락만한 꼬마이고, 자라지 않는 난쟁이로 머물렀다. 그것은 대소(大小)의 교리와 같은 구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72센티미터의 이른바 성인이 되어, 거울 앞에 서서 손수 면도를 하고 있는 나의 아버지라고 칭하는 사나이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긴 채 장사꾼이 되어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마체라트의 소망에 따라 식료품 가게를 맡는다는 것은 스물한 살의 오스카가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돈상자를 들고 짤랑거리지 않기 위해 나는 북에 매달렸고, 세 번째 생일날 이후 단 1센티미터도 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세 살짜리 어린애 그대로 머물렀지만, 세 배나 현명한 어린애였다. 즉 모든 어른보다 키는 작으나 그들을 능가하였고, 자신의 그림자를 어른의 그림자로 재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들이 백발이 될 때까지 발육이라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반해, 나는 안으로도, 밖으로도 모두 완전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어른들이 간신히, 때로는 고통을 겪으면서 경험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했다. 또한 얼마쯤이나 성장했는가를 다만 확인하고 싶어서 수선을 떨면서 해마다 좀 더 큰 신을 신고 긴 바지를 입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에서 오스카도 발육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얼마쯤은 성장하여 —그것은 반드시 나를 위해서는 아니다— 결국은 구세주의 신장(身長)을 획득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 어떤 어른이 영원히 세 살에 머무르는 양철북 연주자 오스카에 대해서 눈길을 주고 귀를 기울여줄 것인가? (P83-85)
어쨌든 나는 북을 치기 시작한 첫날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징후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추락 사고는 —그것이 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진상이 채 드러나기도 전에— 이미 어른들에 의해 분명하게 해명되었다. 모두들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집의 꼬마 오스카는 세 살 생일 때 지하실의 층계에서 떨어졌다. 다친 곳은 아무데도 없다. 다만 전혀 자라지를 않는다, 라고. (P89)
어린이의 양철북을 쳐서 나와 어른들 사이에 필요한 거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지하실 층계에서의 추락 직후에 생겨났다. 하지만 이와 거의 동시에 소리를 고음으로 유지하고 진동시키면서 노래하고, 혹은 외치면서 노래 부를 수 있는 커다란 목소리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고막을 멍하게 하는 나의 북을 감히 아무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만일 북을 빼앗기라도 하면 나는 소리를 질렀고, 내가 소리를 지르면 값비싼 것들이 박살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래로 유리를 부술 수가 있었다. 나의 고함은 꽃병을 깨뜨렸다. 나의 노래는 유리창을 부수어 바람이 제멋대로 드나들게 했다. 나의 목소리는 순결하면서도 가차없는 다이아몬드와 같아서 유리 찬장을 잘랐고, 순진함을 잃지 않으면서 유리 찬장 깊숙이 들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선사받은 엷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고상하면서도 조화를 보이는 유리컵에 폭력을 가했다. (P90)
이따금 광적인 착란에 빠져 어둡고도 분별없는 혐오감을 과시하는 아이들처럼, 내가 유리나 유리 제품만 보면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증오를 드러내는 유치한 파괴욕에 사로잡혀 있다고 취급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천부당만부당한 것이었다. 장난질이나 일삼는 자만이 함부로 파괴하는 법이다. 나는 결코 장난치지 않았다. 나는 북을 공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소리로 말할 것 같으면, 소리를 내는 것은 오직 정당방위 때문이었다. 나의 북 공부의 존립 여부가 위협을 받을 때만, 나의 성대를 목적 달성을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P92)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가 관여하면 폭력 행위가 일어나는 법이다. (P108)
많은 그림들이 들어 있는 두꺼운 책 ‘라스푸틴과 여인들’은 모두 그레트헨의 서가에 속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주저한 후에 –빨리 마음을 정하기에는 너무 선택의 여지가 적었다- 무엇을 잡았는지도 모른채 다만 소위 말하는 내면의 소리에 순종하여 우선 라스푸틴을, 그리고 다음에 괴테를 골랐다. 어쨌든 이 둘을 선택한 것이 나의 인생, 최소한 애써 북을 떨쳐버리려고 했던 나의 인생을 결정짓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P133)
“오스카, 경험 있는 동료의 말을 믿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결코 관객이 될 수 없어. 우리 같은 사람은 무대로, 연기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돼. 우리 같은 사람은 관객들 앞에서 재주를 보이고, 흥행에 맞추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쪽 사람들에게 유린당하고 말지. 저쪽 사람들은 우리를 학대하는 것을 즐거워한단 말이야.” (P172)
이미 모든 것이 역사가 되었고, 아직까지 뜨거워지는 일은 있다 하더라도 곧 차가운 쇠로 굳어져 버리는 오늘날, 나는 정신 병원의 개인 환자로서 연단 밑에 숨어 북을 치던 때의 일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 군중 집회를 여섯 차롄가 일곱 차례 망쳐버리고, 세 차례인가 네 차례 행진과 분열식을 내 북으로 흩뜨려놓았다고 해서 나를 저항의 용사로 보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저항이란 말은 널리 유행이 되었다. 사람들은 저항 정신, 저항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심지어 저항을 내면화할 수 있다고들 말하기도 한다. 일컬어 국내 망명이라고 말이다. 전쟁 동안 침실의 등화관제를 소홀히 하여 방공 감시원으로부터 벌금형에 처해졌던 것을 내세우며 지금 저항의 용사, 저항의 사나이로 자칭하고 있는 저 완고한 신사분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P187-188)
사람이란 장신구 앞에서는 으레 까다로워지며, 끝없는 환형(環形) 목걸이를 정신없이 들여다보느라고 오랫동안 서성거리게 되는 법이다. 이때 사람들은 시간을 분(分)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주의 수명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주 목걸이는 인간의 목보다 오래가며, 손목은 야위지만 팔찌는 야위지 않고, 무덤 속에서는 손가락이 없는 반지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쇼윈도 안의 보석을 들여다보는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허세를 부리는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보석을 걸치기에 너무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다. (P198-199)
기적을 원한다면 기다릴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처음에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나 충분히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만인의 눈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주여>라는 성서의 말씀을 반복하면서 눈길을 목표물로 향한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기도대 위의 오스카에게는 실망만 더해 갔다. 물론 그는 주님에게 모든 종류의 기회를 주었다. 아직 솜씨가 미숙할지도 모르는 예수에게 시작을 결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쳐다보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기도 했다. 하지만 세 번째의 사도신경이 끝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다. (P218-219)
“우리들만한 크기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외적인 성장 없이 인간다움을 지속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의무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지요!” (P265)
도대체 갑작스럽게 끝난다면 그들은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된단 말인가. 그리고 끝이 났을 때, 그들은 재빨리 희망에 찬 하나의 시작을 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끝은 언제나 시작이며 또한 모든 결정적인 끝에서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씌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희망에 찬 끝맺음과 함께 언제나 새로이 시작하게 될 것이다. (P317)
모든 전쟁 놀이라는 것이 어느 날 소위 비상 시기를 맞이하게 되면 끝장이 나고 보다 넓은 평원에서 벌거벗은 현실로 변형되듯이, 이 전쟁 놀이도 끝장을 볼 날이 오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P331)
나는 하염없이 얀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기다리는 것을 이미 단념했으면서도 그 단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같은 장소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얼마간 오랫동안 기다리다보면 배우는 바가 있게 되는 법이다. 오래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는 사람은 다가올 만남의 세부적인 장면까지 상상하게 되므로, 기다리는 사람이 깜짝 놀라게 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얀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다가 이제까지 모든 서약을 위반하면서 다시 한 대의 전차를 기다려보다가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오스카를 뒤쪽에서 붙잡았다. 한 어른이 그의 눈을 가렸던 것이다. (P335-336)
[2]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또 한 사람, 세 번째의 교사가 있었다. 오스카에게 세상을 열어보이고, 오스카를 오늘날의 오스카로 만든 것은 그 사람 몫이었다. 이 오스카라는 인물을 나타내기에는 더 나은 표현을 찾을 수 없으니, 당분간 그를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독자 여러분 중에서 눈치깨나 있는 분은 이미 알아차리셨겠지만, 세 번째 교사란 바로 나의 교사이면서 스승인 베브라, 오이겐 왕자의 직계이며 루이 14세 가문 출신인 난쟁이 광대 배우 베브라를 말한다. 그리고 내가 베브라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물론 그의 옆에 나란히 있는 그 부인, 즉 위대한 몽유병자이자 영원한 미녀인 로스비타 라구나를 포함한다. (P12-13)
내 기억이 옳다면, 친척과도 같은 이 두 사람을 만난 것은 나의 불쌍한 어머니가 죽은 직후였다. 우리들은 카페 사계절에서 함께 모카를 마셨다. 그리고 나서 각자의 길을 갔다. 약간이긴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베브라는 그 말투에서 짐작해 보건데, 제국 선전성에 접근하여 괴벨스 씨와 괴링 씨의 밀실(밀실)에 출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 탈선의 경위를 구구하게 설명하고 변명하면서, 중세에 궁정 광대들이 차지하던 영향력있는 위치를 내게 설명해 주었고, 스페인 화가들이 그린 그림의 복제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서 그는 어려운 시대라는 말을 하면서 약자는 당분간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된다고 말했다. 남몰래 피어나는 저항이라는 말도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그 당시에 사용하던 말로 <국내 망명>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오스카의 길과 베브라의 길은 엇갈리게 되었던 것이다. (P13-14)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는 스물한 살이다, 오스카야. 너는 자랄 것인가 말 것인가? 너는 고아다. 너는 결국은 자라야 한다. 너의 불쌍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너는 이미 절반은 고아였다. 이미 그때에 너는 결심했어야 했다. 그러고나서 그들이 너의 추정상의 아버지인 얀 브론스키를 땅껍질 바로 아래에 눕혔다. 그리하여 너는 추정상의 완전한 고아가 되어, 자스페라고 불리는 이 모래밭 위에 서서 살짝 녹이 슨 탄피를 쥐고 있었다......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 그들은 너의 두 번째 추정상의 아버지인 마체라트를 위하여 구멍을 파고 있다. 네가 아는 한, 이제 추정상의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너는 왜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두 개의 푸른 유리병으로 곡예를 하고 있느냐? 도대체 누구에게 물어보기라도 하겠다는 심사인가?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 의문시하는 저 말라 비틀어진 소나무를 향해서인가? (P172)
마리아는 울면서도 여전히 가톨릭식으로 정성어린 기도를 하고 있었다. 파인골트 씨는 아직도 갈리치아를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복잡한 계산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쿠르트는 지치긴 했지만 끈질기게 삽질을 하고 있었다. 묘지의 담 위에는 여전히 재잘거리고 있는 러시아 소년 두 명이 걸터앉아 있었다. 하일란트 노인은 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스페 묘지의 모래를 마가린 상자로 만든 판자 위에 퍼붓고 있었다. 비텔로라는 단어의 세 자모가 아직 모래에 덮이지 않고 보이고 있었을 때, 오스카가 목에 건 양철을 벗겼다. 그리고 이제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가 아니라 「자라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관 위에다 북을 던졌다. 거기에는 이미 모래가 충분히 덮여 있어서 덜커덩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북채도 잇따라서 던졌다. 북채는 모래 속에 꽂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것은 먼지떨이 시대 이래로 내가 사용하던 북이었다. 전선 극장의 예비품 중의 하나였으며, 베브라가 내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스승은 나의 이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까? 예수도 그 양철을 두들겼었다. 상자처럼 네모나고 커다란 마마 자국이 있는 러시아 병사도 그것을 두들겼었다. 그 북의 수명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긴 했다. 하지만 모래 한 삽이 북 표면에 떨어지자 북은 그래도 소리를 냈다. 두번재 삽에도 약간 소리를 냈다. 세번째에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고, 다만 희게 래커칠한 양철만을 약간 드러내었다. 마침내 그 부분마저도 다른 모래 부분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계속해서 모래가 쏟아졌다. 내 북 위에는 모래가 불어나고 쌓이고 성장했다 ㅡ 그러자 나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심하게 코피가 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P176-177)
안나 콜야이체크는 이렇게 한탄하면서 자세를 가다듬은 후 성장 중인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그러면서 깊이 생각한 견해를 밝혔다. “오스카야, 카슈바이인은 늘 이렇게 당해 왔단다. 언제나 머리를 두들겨 맞았지. 너희들만은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가면 좋겠는데. 할머니는 남겠지만 말이야. 카슈바이인에게 이주란 없는 거야. 언제까지나 고향에 머물러 살면서 다른 자들에게 두들겨 맞기 위해 머리를 내밀어야 하지. 여하튼 우리는 진짜 폴란드인도 아니고 진짜 독일인도 아니다. 카슈바이인은 독일인도 폴란드인도 되지 못하는 거야. 이들은 언제나 까다롭게 생각한단 말이야!”
나의 할머니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석유병과 인조 벌꿀과 소독제를 그 네 벌의 치마 밑에다 넣었다. 더없이 격렬한 군사적, 정치적, 세계사적인 사건을 거쳐왔음에도 그 치마는 감자 빛깔을 여전히 잃지 않았다. (P195)
이 빨치산은 —마체라트 씨가 굳이 나에게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많은 다른 사이비 빨치산들과는 달리 진짜 빨치산이었다고 한다. 마체라트 씨의 주장은 이렇다. 빨치산이란 결코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니며, 언제나 빨치산으로 남아 있으면서, 추락한 정부(政府)를 말 안장 위에 올려 놓는가 하면, 때로는 빨치산의 도움을 받아 말 안장 위의 정부를 떠밀어 추락시키기도 한다. 마체라트 씨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들이 결점을 서서히 극복하여 가는 완전무결한 빨치산이야말로 —나에게는 그 의미가 간신히 이해될 법도 하다— 정치를 지향하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재능있는 자들이다. 이 자들은 자신들이 금방 이룬 것을 곧바로 거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P208)
오늘날 온갖 훌륭한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경제 기적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을 희미하게 기억하면 할수록 더욱더 열광하여 주장한다. <그때는 통화 개혁 이전의 광기의 시대였다! 그 무렵에는 여전히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뱃속은 비었지만 극장 매표구 앞에 줄을 섰다. 감자 소줏잔을 나누는 즉석 술자리는 정말이지 전설이다. 샴페인과 코냑으로 축하하는 오늘날의 파티는 비할 바도 아닌 것이다.>
잃어버린 기회를 안타까워하는 낭만주의자들은 늘 이런 식으로 말한다. 사실이지 나도 그와 같이 탄식해야만 마땅하다. 쿠르드의 부싯돌이 샘솟아 올랐던 그 몇 년 동안을 생각해보자. 전쟁 중에 뒤쳐진 것을 회복하고 교양에 힘쓰려는 수많은 무리들의 서클에 나도 뒤질세라 참가하여 거의 무료로 교양을 쌓았던 것이다. 나는 성인(成人) 대학 코스에 참가하기도 하고, <다리 橋>라고 불리던 영국 문화 센터의 단골이 되는가 하면, 가톨릭 교도들과 신교도들과 더불어 집단적 과실이라는 문제를 놓고 토의하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런 생각이었다. 지금 변상을 끝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시대를 넘기고 다시 세상 형편이 좋아지기 시작할 때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P223)
이 모든 것들이 지난 일이 된 오늘날 나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전후의 열광이란 결국 열광에 지나지 않으며,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가 생생하고도 잔인하게 자행했던 그 모든 행위와 범죄들을 끊임없는 야옹 소리와 함께 역사로 돌려버리는 고양이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225)
지난 일이라는 말은 랑케스의 애용어이다. 그는 세계를 대개 현재와 과거의 일로 나누곤 했다. 그러나 퇴역 중위의 인식에 따르자면, 지나버린 일이란 없으며, 계산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중에 몇 번이든 반복하여 역사 앞에서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서 그는 이제 도라 7호의 내부를 시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P414-415)
그 성공을 본 나 오스카는 자신을 설득하여 콘서트 매니저인 되시 박사의 명함을 찾아보도록 했다. 그의 예술뿐만 아니라 나의 예술도 역시 빵을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전쟁 전에서부터 전쟁 동안에 걸쳐 세 살짜리 양철북 고수 오스카가 체험했던 것들을, 전쟁이 끝난 지금 양철북을 사용하여 다시 쨍그랑 소리를 내는 순금(純金)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P426)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서 오스카의 북 예술에 대한 언론들의 보도에 귀를 기울였다. 되시 박사가 테이프에 녹음해 와서 우리들 앞에서 틀어주었던 것이다. 베브라는 만족한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언론인들의 평판이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들은 나를 숭배하면서 나와 내 북이 치료 효과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기억력 감퇴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오스카니즘>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이것은 곧 유행어가 될 운명이었다. (P436)
더 이상 무얼 말하란 말인가. 전등 아래에서 태어나고, 세 살의 나이에 일부러 성장을 멈추고, 북을 얻고, 노래로 유리를 부수고, 바닐라 냄새를 맡고, 교회 안에서 기침을 하고, 루치에게 먹이를 주고, 개미를 관찰하고, 다시 성장을 결심하고, 북을 파묻고, 서방으로 가서 동족을 잃고, 석공 일을 배우고 모델일을 하고, 다시 양철북으로 되돌아가서 콘크리트 요새를 시찰하고, 돈을 벌고, 손가락을 보관하고, 손가락을 선사하고 웃으면서 도주하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고, 그후에 석방되어, 오늘 30회째 생일을 축하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검은 마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P488)
내 등 뒤에 있었던 마녀는 검은빛이었다.
이제 그녀는 나의 앞쪽에서도 다가온다, 검은빛으로.
말씀과 외투를 휘날린다, 검은빛으로.
검은 돈으로 지불한다, 검은빛으로.
아이들이 노래하든 말든 상관없이 다가온다.
검은 마녀는 있느냐? 있다있다있다! (P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