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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07. 2024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화 <프라하의 봄> 1989년

[1부 가벼움과 무거움]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프랑스 역사의 자부심도 덜할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피투성이 세월조차도 그저 말뿐, 새털보다 가벼운 이론과 토론에 불과해서 누구에게도 겁을 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등장을 반복하여 프랑스 사람의 머리를 자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얼마 전 나는 기막힌 감정의 불꽃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 사진 몇 장을 보곤 감격했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전쟁 통에서 보냈다. 내 가족 중 몇몇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이, 되돌아갈 수 없는 내 인생과 한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줬던 히틀러의 사진에 비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한 히틀러와의 화해는 영원한 회귀란 없다는 데에 근거한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하고 심각한 도덕적 변태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용서되며, 따라서 모든 것이 냉소적으로 허용되기 때문이다.                  (P9-11)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 —어둠, 두꺼운 것— 찬 것, 존재 — 비존재와 같이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P12-13)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 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17)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하면 안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P21)     

사실이었다. 국민들의 행복한 도취는 점령후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체코 정치인들은 잡범처럼 소련군에게 끌려갔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보헤미아의 도시는 손으로 그린 포스터로 온통 뒤덮였다. 포스터에는 냉소적 글귀, 서시, 시구절, 브레즈네프와 그의 군대 캐리커처가 자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그의 군대를 일자무식한 광대 집단이라고 조롱하는 포스터였다. 그러나 어떤 축제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동안 소련은 체코 정치인을 모스크바로 납치하여 타협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둡체크는 이 타협안을 가지고 프라하로 돌아와 라디오 방송에서 연설문을 낭독했다. 구금 생활 엿새 동안 너무나 쇠약해진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다가 말을 더듬었다. 그는 중간 중간 거의 삼십 초가량이나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의 타협안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해 마지않던 학살과 시베리아 집단 유배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부터 국가를 구해내기는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헤미아는 정복자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알렉산드르 둡체프처럼 영원히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하고,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일상적 모욕 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P47-48)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P49)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는 미래로부터 존재의 감미로운 가벼움이 그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월요일, 그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중압감에 짓눌리는 듯했다. 수천 톤이나 나가는 소련 탱크의 무게도 이 중압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               (P57)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Der schwer gefasste Entschluss”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es muss sein!”)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새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벤의 해설가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니면 그럴 만한 개연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신념에 어느 정도 동조한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다.                (P60)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P61)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룩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          (P63-64)    

 

그는 그녀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다. 이렇듯 치명적 결정은 칠 년 전 외과 과장에게 좌골 신경통이 없었더라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우연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 우연의 화신인 그 여자가 지금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항상 그랬듯 토마시는 위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테레자의 호흡이 한두 번인가 가벼운 코 고는 소리로 변했다. 토마시는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         (P64-65)    

  

[2부 영혼과 육체]

한때 인간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규칙적인 박동 소리를 듣고 놀라 기겁을 하며 이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육체처럼 낯설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물이 자신과 일체를 이룬다고 인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육체는 껍데기고, 그 안에서 뭔가가 보고, 듣고, 두려워하고, 생각하고, 놀라는 것이다. 이 무엇, 남아 있는 잔금, 육체로부터 추론된 것, 이것이 영혼이다.                 (P71)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P72)  

   

테레자에게 책이란 은밀한 동지애를 확인하는 암호였다. 그녀를 둘러싼 저속한 세계에 대항하는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뿐이었다. 특히 소설들, 그녀는 필딩에서 도마스 만까지 무더기로 소설을 읽었다. 책은 그녀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의 도피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 지었다.          (P85)     

 

그런데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보다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P87)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P88)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베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안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과 죽음의 테마, 사랑의 탄생과 결부되어 잊을 수 없는 이 테마가 그 음울한 아름다움으로 절망의 순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예컨대 브론스키, 안나, 플랫폼, 죽음의 만남이나 혹은 베토벤, 토마시, 테레자, 코냑 잔의 만남 같은 것)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처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P92-93)  

   

독학자와 학교에 다닌 사람의 다른 점은 지식 폭이 아니라 생명력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의 정도 차이다.              (P98)   

  

끊임없이 ‘신분 상승’을 원하는 자는 어느 날엔가 느낄 현기증을 감수해야만 한다. 현기증이란 무엇인가?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튼튼한 난간을 갖춘 전망대에서 우리는 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일까?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현기증은 우리 발 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나중에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P106)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P114)  

   

그녀의 많은 사진은 각종 외국 신문에 실렸다. 탱크, 위협적인 주먹, 파괴된 건물, 피묻은 삼색기에 덮인 시체들, 긴 장대에 체코 기를 달아 흔들며 오토바이로 탱크 주위를 빠르게 맴도는 젊은이들, 성적으로 굶주린 불쌍한 소련 군인 눈앞에서 행인에게 키스를 퍼붓는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차림 소녀들의 사진이 실렸다. 거듭 말하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비극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도 그 이상한 도취감을 이해하지 못할 증오의 축제이기도 했다.          (P121)      

침공 후 일곱째 날이었고, 그 당시 저항세력으로 대변인으로 변한 한 일간지 편집실에서 그녀는 그 연설을 들었다. 그 방에서 둡체크의 연설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증오했다. 그가 양보했던 타협안 때문에 그를 원망했고 그의 모욕 때문에 모욕감을 느꼈으며 그의 나약함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지금 취리히에서 그 순간을 생각하니 그녀는 둡체크에 대해 더 이상 어떤 경멸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약함이라는 단어도 더 이상 비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둡체크처럼 체격이 운동선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자기보다 우세한 위력을 대하면 항상 나약해지는 법이다. 당시에는 참을 수 없었고 역겨웠던 그 나약함, 또한 자신의 나라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 그 나약함에 그녀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가 약한 사람들의 편, 약한 사람들의 진영, 약한 사람들이 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녀는 그들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고 연설 중에 연신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P129-130)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프라하에서도 그녀가 토마시에게 의지하고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단지 심리적 의지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모든 면에서 그에게 의지하며 산다. 만약 그로부터 버림받는다면 그녀는 여기서 무엇이 될까? 그녀는 일생 동안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할까?

그녀는 그들의 만남이 처음부터 오류에 근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날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안나 카레니나]는 토마시를 속이기 위해 그녀가 사용했던 가짜 신분증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하던 중 삼십 초쯤 말을 멈추었던 둡체크 갔았고, 말을 더듬고 숨을 돌리고 말을 잇지 못했던 그녀의 조국과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 줄 알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를 주기에는 너무 약해졌을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약자다.       (P132-133)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배신, 우린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배신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녀는 미술 대학에 등록은 했지만 피카소처럼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것을 의무적으로 그려야 했고, 미대에서는 공산주의 국가 우두머리의 초상화를 만들어 냈다. 공산주의는 사랑(그 시대에는 청교도적 분위기 일색이었다.)과 피카소를 금지하는 또 다른 아버지, 한결같이 가혹하고 완고한 아버지였기에 아버지를 배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구는 충족되지 못했다. 그녀가 프라하 출신의 싸구려 배우와 결혼한 이유는 오로지 그가 기인이라는 평판을 받았고 두 아버지가 그를 마땅치 않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었다. 다음 날 매장을 하고 프라하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전보를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슬픔에 겨운 나머지 자살한 것이었다.

그녀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아버지가 화병의 장미를 그리고 피카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토록 잘못된 일이었을까? 열네 살짜리 자기 딸이 임신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그토록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을까? 부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조롱거리가 될 수 있을까?

그녀는 다시 배신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자기 자신의 배신을 배신하기.

그녀는 남편에게 (기인이라기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주정뱅이로만 보이는) 그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B를 위해 A를 배신했는데, 다시 B를 배신한다 해서 이 배신이 A와의 화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혼한 여자 예술가의 삶은 배신당한 그녀 부모의 삶과는 닮지 않았다. 첫 번째 배신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배신은 그 연쇄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들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먼 곳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P156-157)     

  

프란츠가 말했다. “유럽의 아름다움에는 항상 의도성이 깃들었지. 항상 미학적 의도와 장기적 안목을 지닌 계획이 있었어. 이 계획에 따라 고딕 성당 혹은 르네상스 도시를 세우려면 수세기가 걸렸지. 뉴욕의 아름다움은 그 뿌리가 아주 달라. 비의도적인 아름다움이지. 종유동굴처럼 인간의 의도 없이 태어난 거야. 흉측한 형태가 어떤 계획도 없이 우연히 다른 형태들과 뒤섞이며 그 뒤섞임 속에서 불쑥 마술적 시의 광채를 발산하는 거지.”

사비나가 말했다. “비의도적인 아름다움. 물론 그래.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실수에 의한 아름다움이라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아름다움이 잠깐이나마 존재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실수 때문이지. 실수에 의한 아름다움이란 미의 역사에서 마지막 단계야.”

그녀는 정말 성공적이었던 그녀의 첫 번째 그림을 떠올렸다. 실수로 붉은 물감이 흘러내렸던 그림. 그렇다. 그녀의 작품들은 실수의 아름다움 위에 구축된 것이고 뉴욕이야말로 그녀 그림의 은밀하고 진정한 조국이었다.                (P170-171)    

    

보헤미아의 공동묘지는 정원과 비슷하다. 무덤은 잔디와 생생한 빛깔 꽃들에 덮여 있고, 초라한 비석들은 짙푸른 나뭇잎 속에 숨어 있다. 저녁나절 공동묘지는 불켜진 자그마한 초로 가득 차서 죽은 자들이 유치한 무도회를 여는 것만 같다. 그렇다. 유치한 무도회였다. 죽은 자들은 아이들처럼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 삶이 잔인했기에 공동묘지에는 항상 평화가 감돌았다. 심지어 전쟁 동안, 히틀러 시절, 스탈린 시절, 모든 점령 기간 중에도. 그녀는 울적해질 때면 자동차를 타고 프라하를 멀리 벗어나 그녀가 좋아하는 공동묘지를 산책했다. 푸르스름한 언덕빼기에 있는 시골 공동묘지는 요람처럼 아름다웠다.                 (P174)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을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프란츠는 모든 거짓의 원천이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과 공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은 별개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그는 아무것도 비밀이 아니며 모든 시선에 열린 ‘유리 집’ 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던 앙드레 브르통의 구절을 즐겨 인용했다.                (P186-187)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이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비나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이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P201-202)      

 

[4부 영혼과 육체]

이상한 것은, 우리들은 눈만 뜨면 상스러운 말을 내뱉지만, 존경받는 유명 인사가 말끝마다 시팔이라고 하는 것을 라디오에서 얼핏이라도 듣는다면 왠지 모르게 조금은 실망한다는 점이다.              (P215) 

      

테레자는 파괴된 시청을 바라보았고, 이 광경에 불현 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의 폐허를 과시하고, 자신의 추함에 자부심을 갖고 소매를 걷어 흉하게 잘려 나간 손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보아 달라고 강요하는 그 변태적 욕구. 그녀가 십여 년 전 빠져나온 어머니의 세계가 다시 그녀를 찾아와 사방으로부터 그녀를 옥죄어 오는 듯, 근래 들어 모든 것에서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침 식사를 하다가, 어머니가 가족에게 자기의 일기를 읽어 주며 폭소를 터뜨렸던 일을 그녀가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포도주를 마시며 친구와 나누었던 대화가 라디오로 공개되었다는 것은 오로지 이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이 집단수용소로 바뀌었다고.

테레자는 그녀가 가족과 어떻게 살았는지 표현하기 위해서 거의 유년기부터 이 단어를 사용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밤낮으로 서로 뒤엉켜 사는 세계였다. 잔인성과 폭력은 이 세계의 부수적(전혀 필연적이 않은) 측면에 불과했다. 집단수용소, 그것은 사생활의 완전한 청산이었다. 친구와 술을 마시며 토론할 때 자기 집에서조차도 (그것이 치명적 실수였음에 틀림없다!) 안전하지 못했던 프로하즈카는 집단수용소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 집에 살던 시절의 테레자는 수용소에서 지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수용소란 아주 예외적인 것, 놀랄만한 것도 아닌 뭔가가 주어진 조건, 뭔가 근본적인 것,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있으며 온 힘을 다해 극도로 긴장했을 때만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것임을 그녀는 알았다.               (P222)

      

사랑이 탄생하는 순간은 이런 것과 유사하리라는 것을 테레자는 알았다. 여자는 분노에 찬 영혼을 부르는 목소리에 저항하지 않는다. 남자는 자기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혼의 여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토마시는 결코 사랑의 함정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고, 테레자는 매시간 매분마다 그를 위해 몸을 떨 수밖에 없다.                (P263)          

“테레자, 경찰에겐 여러 가지 임무가 있지요. 첫 번째 임무는 고전적인 겁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엿듣고 상부에 보고하는 겁니다. 두 번재 임무는 위협입니다. 자기들이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하면서 우리에게 겁을 주는 거죠. 당신을 괴롭혔던 자가 추구한 것이 바로 이런 거죠. 세 번째는 우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하는 겁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국가 전복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요. 그러면 오히려 세인의 공감만 자아내기 때문이죠. 그들은 우리 호주머니에서 마약을 찾아내거나 우리가 열두 살짜리 아이를 강간했다는 증거를 찾으려 듭니다. 그리고 그런 증언을 할 여자 아이를 백발백중 찾아내거든요.”

테레자는 기술자를 떠올렸다. 그자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고 이용해 먹기 위해 함정에 빠뜨려야만 하고, 그런 다음 그들을 이용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함정을 파고, 그렇게 계속해서 점차 전 국민을 밀고자 조직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P268-269)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선이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테레자는 자기 앞에 이 선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는 시선만이 그녀에게 위안이 될 뿐이었다.          (P271)   

     

[5부 가벼움과 무거움]

중부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오로지 범죄자들의 창조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진리를 어둠 속에 은폐하고 있다.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이 길을 용감하게 지켜 왔다. 훗날 이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은 살인자였다는 것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러나 누구나 공산주의를 비난했다. 이 나라의 불행(가난하고 파산한 이 나라)과 독립의 상실(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인 나라)과 합법적 살인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당신들이오!

이런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대답했다.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 거야!

따라서 논의 초점은 이 문제로 귀결된다. 그들이 몰랐다는 것이 사실인가? 혹은 그저 모르는 척한 것일까?

토마시는 이 논쟁의 추이를 지켜보며 (다른 천만 체코인들처럼) 공산주의자들 중에는 그렇게 까맣게 모르지만은 않았던 사람들도 필경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적어도 그곳에서 벌어졌던 가공할 만한 사건, 혁명 후 소련에서 끊임없이 벌어졌던 일에 대해 듣기는 했을 거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950년대 초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선고가 언도되기를 요구했던 체코 검사가 실은 러시아 비밀경찰과 정부에 기만당했다고 해 두자. 그러나 그 기소가 허무맹랑하고, 피고가 결백하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 지금, 검사가 자신의 마음만은 순수했다고 강변하며 가슴을 칠 수 있을까. 나는 양심에 한 점의 가책도 없어, 난 몰랐단 말이야, 그렇다고 믿었어! “난 몰랐어! 그렇다고 믿었어.”라는 그 말 속에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P287-288)    

  

“자네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나?”

그는 알고 있었다. 저울 양쪽에 무언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그의 명예(그가 썼던 것을 부정하지 말라고 요구하는)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그가 삶의 의미라고 습관적으로 생각했던 것(학자이자 의사인 그의 직업)이 있었다.

과장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썼던 것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중세 시대의 관행일세. 철회한다는 것이 뭔가? 현대에 와서 사상은 철회할 수 없고 그에 반박만 할 수 있지. 이 친구야, 사상을 철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그냥 말뿐, 형식에 불과한 마술 같은 건데 자네는 왜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나는 도대체 알 수 없군. 공포로 통치되는 사회에서는 어떤 선언이건 약속이 될 수 없어. 폭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쥐어짜 낸 선언일 테니까 제 정신인 사람에게는 그런 걸 못 본 척, 못 들은 척할 의무가 있는 셈이지. 이 친구야, 나를 위해, 그리고 자네 환자를 위해 자네는 직장에 남아야만 하네.”

“과장님 말씀이 분명히 맞을 겁니다.”

토마시는 불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과장은 그의 생각을 짐작해 보려고 애쓰며 물었다.

“나는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 두렵습니다.”               (P292)  

    

토마시는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들어 본 지 오래된지라 키작은 배불뚝이 남자의 말을 아주 경청했으며, 이자가 놀랍게도 외과의사로서 승승장구하던 그의 전력을 상세히 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첨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토마시는 내무부 남자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허영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겸손한 사람을 마주하면, 그가 하는 말이 몽땅 사실이 아니며,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매순간 확신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마련이다. 믿지 않기 위해서는 (단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계속해서 철저하게) 엄청난 노력뿐만 아니라 훈련, 그러니까 잦은 경찰의 신문을 받았던 경험이 필요하다. 토마시에게 부족했던 것은 바로 그런 훈련이었다.         (P301-302)  

    

내 생각에 토마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공격적이고 장중하고 엄격한 “es muss sein!”에 짜증이 났고, 그의 가슴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정신에 따라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깊은 욕망이 있었다. 그가 단숨에 첫 번째 부인과 그의 아들을 더 이상 보지 않기로 작정하는 데에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와 인연을 끊겠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하자. 이런 것이 그에게 무거운 의무처럼 “es muss sein!”으로 고착되고자 하는 것을 밀쳐 버렸던 급작스럽고 비이성적인 태도와 뭐가 다를 게 있겠는가?

물론 의학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 “es muss sein!”은 내면적 필연성이었던 반면, 그때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 개입한 외부적 “es muss sein!”과 관련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결 어려웠다. 내면의 명령은 더욱 강렬하고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외과의사는 사물의 표면을 열고 그 안에 숨은 것을 들여다 본다. 토마시에게 “es muss sein!”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고 싶은 생각을 불러 일으킨 것은 아마도 이런 욕망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                       (P317)     

그는 그 무수한 여자에게서 무엇을 추구했던 것일까? 여자들의 무엇이 그토록 그를 끌어당겼을까? 육체적 사랑이란 똑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이 아닐까?

천만에, 거기에는 상상하지 못하는 몇 퍼센트의 부분이 항상 남게 마련이다. 잘 차려입은 여자를 보면 그는 저 여자가 다 벗으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할 수 있지만(이 대목에서 그의 의사 체험이 연인 체험을 보완하였다.) 개념의 근사치와 현실의 정확성 사이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조그만 격차가 잔존하며, 바로 이런 격차가 그를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부분을 추구하는 것은 나체의 발견에 멈추지 않고 그 이상까지 진행된다. 저 여자는 옷을 벗으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성행위를 하면서 어떤 말을 할까? 신음소리는 어떤 음정일까? 쾌락의 순간에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주름살이 새겨질까?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토마시는 의료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 십 년 동안 오로지 인간의 뇌만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자아’를 포착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히틀러와 아인슈타인 사이나 브레즈네프와 솔제니친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성이 훨씬 많았다.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들 간에는 100만 분의 1의 상이점과 99만 9999의 유사점이 있다.

토마시는 이 100만 분의 1을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혔으며, 그의 눈엔 이것이 바로 그의 여자 집착증이 지닌 의미였다. 그는 여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상상 못하는 부분, 달리 말해서 한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분 짓는 것이 이 100만 분의 1의 상이성에 사로잡힌 것이다.                    (P321-322)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P337)     


그는 (자신은 느끼지 못했겠지만 여전히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내 기사가 어떤 누구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외과의사 일을 하면서 적지 않은 생명을 구했지요.”

다시 대화가 끊겼다. 이때 아들이 끼어들었다. “사상 역시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토마시는 아들의 얼굴에서 자기 자신의 입을 보았고 자기 입이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눈에 띄게 힘들어 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기사에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타협 거부였어요. 지금 우리가 잃어 가는 능력, 선악을 명백히 구별하는 능력 같은 거죠. 사람들은 이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라요. 공산주의자들은 변명거리를 하나 찾았지요. 스탈린이 그들을 속였다는 겁니다. 살인자가 그의 어머니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욕구불만에 빠졌다고 변명하는 꼴이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불쑥 이렇게 말했지요. ‘거기에는 어떤 해명도 없었다.’라고. 그 누구의 영혼과 양심도 오이디푸스보다 결백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한 일을 보고는 스스로를 벌했어요.”

토마시는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기 위해 애를 쓰며 기자에게 신경을 집중하려고 했다. 그는 화가 났고 그들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모든 일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악의 경계는 끔찍할 정도로 모호하지요. 나는 누구의 징계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런 것은 전혀 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징계하는 것은 야만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아름다운 신화죠. 그러나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그는 뭔가 덧붙이려다가 그가 말하는 것이 어쩌면 녹음될지도 모른다는 데 문득 생각이 미쳤다. 그는 몇 세기 후 미래 역사가들이 자신을 인용하길 원하는 것 같은 야심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보다는 경찰이 인용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경찰이 그에게 요구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러한 기사에 대한 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이것을 자기 입을 통해 듣는 것이 그는 불쾌했다. 이 나라에서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어느 날 라디오로 방송될 수 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P350-351)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이 소설 첫머리에서 내게 드러났던 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P355)    

 

한 사람을 침묵으로 몰아넣으려 할 때 목청을 높이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렇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슨 이유로 신문들이 이 탄원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까? 언론은 (모두 국가에 의해 조작되니)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할 수도 있으며 아무도 모르게 지나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언론이 떠드는 것은 그것이 이 나라의 주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고, 그들은 이것을 새로운 탄압의 물꼬를 트고 정당화하는 데 써먹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서명해야 했는가 말아야 했는가?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목청 높여 자신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이 나았을까? 혹은 침묵해서 그 대가로 좀 더 느린 종말을 해야 했을까?

이런 질문들에게 한 가지 해답만이 존재할까?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1618년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분개한 보헤미아 귀족은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담하게도 그의 전권 대사 중 두 명을 흐라친 성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렇게 해서 체코 국민 거의 전부를 몰살로 이끈 삼십 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체코인들에게는 용기보다 신중함이 필요했던가?

대답은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삼백이십 년 후인 1938년, 뮌헨 회의에 따라 세계는 그들의 나라를 히틀러에게 희생시킬 것을 결정했다. 그들은 숫자 면에서 그들보다 여덟 배 우세한 적군에 대항하여 싸움을 시도해야 했을까? 1618년과는 반대로 그들은 용기보다는 신중함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타협은 결과적으로 수십 년, 혹은 수세기 동안 국가로서의 그들 자유가 결정적으로 상실되는 것으로 결정난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초래했다. 그들에게 신중함보다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들이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

체코 역사가 반복될 수만 있다면, 매번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여 두 결과를 비교해 보는 것은 필경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런 실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추론은 그저 일련의 가설에 불과하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토마시는 다시 한 번 일종의 향수, 거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며 구부정한 키 큰 기자에 대해 생각했다. 이 남자는 역사가 밑그림이 아니라 완성된 그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영원회귀 속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듯 행동했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확신했고 그것이 편협한 정신의 징후가 아니라 미덕의 표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토마시와는 다른 역사 속에서 살고 있었다. 밑그림이 아닌 (혹은 그런 의식이 없는) 역사 속에서.       (P356-358)    

얼마 후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고, 나는 앞 장의 뜻을 밝히기 위해 이를 언급하고자 한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지구(1번 행성, 미체험 행성)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다.               (P359-360)    

  

러시아의 군대가 토마시의 나라를 침공한 이래 오 년 동안 프라하는 무척 변했다. 토마시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친구들 중 반은 이민을 갔고, 남았던 반은 죽었다. 그것은 어느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을 사실이다. 소련 침공 이후의 세월은 매장의 시기였다. 사망률이 이렇게 놓았던 적이 없었다. 얀 프로하즈카처럼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경우(따지고 보면 아주 드문) 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가 그의 사적인 대화를 녹음하여 매일 방송하기 시작한 지 보름 후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 꽤 오래전부터 그의 몸속에서 소리 내지 않고 잠들어 있던 암이 장미꽃처럼 활짝 피었던 것이다. 수술은 경찰 입회하에 이루어졌고, 이 소설가가 살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경찰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가 아내의 품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죽음은 직접적으로 박해받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찾아왔다. 나라 전체를 사로잡은 절망이 영혼으로 스며들어 육체를 장악하여 쓰러뜨린 것이다. 온갖 명예를 주면서, 새로운 지도자 곁에 공개적으로 나서라고 강요했던 정부의 호의를 필사적으로 뿌리쳤던 사람도 몇몇 있었다. 공산당의 사랑을 뿌리치고 죽었던 시인 프라티쉐크 흐루빈이다. 문화부장관으로부터 사력을 다해 도망치려 했지만 장관은 그의 관까지 따라왔다. 그는 무덤 앞에서 소련연방공화국에 대한 시인의 사랑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어쩌면 그는 이런 황당무계한 말을 퍼부어 시인을 벌떡 일어나게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계는 너무 추해서 누구도 죽은 자 사이에서 부활하기를 원치 않았다.            (P368-369)     

 

만약 흥분이 창조주가 재미 삼아 즐기는 기계 장치라면, 사랑이란 오로지 우리의 권능에만 속한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창조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 그것은 우리의 자유다. 사랑은 “es muss sein!”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사랑이 창조주가 심심풀이 삼아 상상해 낸 섹스의 시계 장치와는 다른 것일지라도, 어쨌거나 사랑은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에 반응하듯 거대한 시계추와 연결되어 있다.

토마시는 생각했다. 사랑과 섹스를 연관하는 것은 창조주의 가장 괴상한 발상 중 하나다.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멍청한 섹스로부터 사랑을 구해 내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머릿속 시계를 다른 식으로 조절하여 제비를 보고 흥분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이런 나른한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어지럽고 환상적인 공간인 잠의 문턱에서 그는 문득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 신비의 열쇠, 새로운 이상향, 파라다이스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제비를 보고 발기하고, 공격적이고 우매한 섹스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테레자를 사랑할 수 있는 세계.                   (P380-381)  

    

[6부 대장정]

저주와 특권이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것이라면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의 차이점은 없어질 테고, 신의 아들이 똥 때문에 심판받는다면 인간 존재는 그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던진 것은 의미가 사라진 세계의 무한한 가벼움 때문에 한심하게 치솟은 천칭 접시 위에 자기 몸을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나 똥을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 영토를 보다 동쪽으로 넓히기 위해 생명을 바친 독일인이나 조국 세력을 보다 먼 서쪽까지 뻗어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은 러시아인들, 그렇다. 이들은 멍청한 짓을 위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의미도 없고 보편적 결과도 낳지 못했다. 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었다.                 (P392-393)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저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우리의 직관과 체험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와 관련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 그 자체(어떻게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를 의심하는 사람과 주어진 존재에 아무런 존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 간의 견해차도 이와 마찬가지로 엄존한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최근에도 책 속에서 똥이라는 단어가 점선으로 대체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윤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P388-389)  

   

여러 사조가 공존하고 그들의 영향력이 서로를 제한하고 의무화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독창성을 보호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예기치 않은 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흐름 하나가 모든 권력을 쥐는 곳에서 사람들은 대번에 전체주의의 키치 왕국에 빠지게 된다.

내가 전체주의라고 표현한 까닭은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주의의 발현, (모든 부조화는 미소짓는 연대감의 얼굴에 내뱉은 가래침이기 때문이다.) 모든 회의주의, (사소한 제목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하는 자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삶, 그 자체를 의심하기 마련이다.) 아이러니, (키치의 왕국에서는 모든 것이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가족을 버린 어머니나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해서 “교미하여 번식하여라.” 라는 신성불가침한 슬로건을 위협하는 남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위 강제수용소는 전체주의적인 키치가 자신의 오물을 버리는 정화조라고 할 수 있다.                  (P406-407)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는 어떤 것일까? 신? 인류? 투쟁? 사랑? 남자? 여자?

여기에 대해선 각양각색의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각양각색의 키치도 있게 마련이다. 가톨릭 키치, 개신교 키치, 유대인 키치, 공산주의 키치, 파시스트 키치, 민주주의 키치, 페미니스트 키치, 유럽 키치, 미국 키치, 민족주의 키치, 국제주의 키치.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반쪽에 좌익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나머지 반쪽엔 우익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실제로 이 개념이 근거한 어떤 이론 원리에 따라 이 개념의 어느 한쪽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정치 운동은 합리적 태도에 근거하지 않고 표상, 이미지, 단어, 원형들에 근거하며 이런 것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정치적 키치를 형성한다.

프란츠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대장정이라는 개념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성향의 좌익 인사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정치적 키치였다. 대장정이란 멋진 전진, 장정이 대장정이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평등,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소비사회 거부인가 생산 증대인가? 단두대인가 사형제도 폐지인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좌익 인사를 좌익 인사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저런 이론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라도 대장정이라 불리는 키치 속에 통합하는 능력인 것이다.                    (P416-417)    

  

그가 했던 것도 구경거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구경거리를 제공하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인간이 구경거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게 선고된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침묵하는 권력(강 건너의 침묵하는 권력, 벽 속에 숨긴 조용한 도청 장치로 변신한 경찰)에 대항하는 그의 전투란 군대를 공격하는 연극 단원의 전투인 것이다.                   (P436)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에 귀환.

그리고 그 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P455)  

   

[7부 카레닌의 미소]

테레자는 태평하게 무릎을 베고 누운 카레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대충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자기와 비슷한 대상에게 잘 대해 준다는 것은 아무런 미덕도 아니다. 테레자는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토마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랑받는 여인으로 처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토마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어디까지 우리 감정, 우리 사랑이나 비—사랑, 우리 혹은 증오의 결과인지 또는 어디까지가 개인간 역학 관계에 의해 사전에 규정되었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 (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P469-470)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조차 강요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 한 쌍을 괴롭히는 질문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 나보다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나를 더 사랑할까?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도 모른다. 마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P482)   

   

카레인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동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테레자는 생각한다.                (P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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