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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06. 2024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43년

어떤 사람도 그 혼자서는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가, 본토의 일부이니.

흙 한 덩이가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곶(岬)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존 던     

[1]

“사람은 누구든지 진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 거요. 난 여기서 살지만 작전 수행은 세고비아 너머에서 하고 있소.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소동을 일으킨다면 놈들이 이 산에서 우리를 쫓아 내고 말 거요. 우리가 이 산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여기서 아무 짓도 하지 않기 때문이오. 이게 바로 여우의 원칙이라는 거지.”     (P31)    

 

곰곰이 생각해 보면 뛰어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쾌활했다. 쾌활한 편이 훨씬 나았고, 또한 그것은 어떤 일의 징표 같았다. 마치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벌써 불멸을 맛보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건 복잡한 문제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인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봐, 자꾸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너마저 남지 않게 될지도 몰라. 이젠 그런 생각은 집어치워. 이 구식 친구야. 이 구닥다리 동지야. 지금 넌 다리 폭파원이 아닌가. 사색가가 아니란 말이다. 아, 배가 고파 죽겠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파블로한테 먹을 게 많았으면 좋겠는데.           (P41-42)     


“이 지방을 잘 알아요?”

“아니, 사실은 잘 몰라. 하지만 난 배우는 게 빠른 편이지. 좋은 지도가 있겠다, 능숙한 안내인도 있으니까.”

“이 영감님 말이죠. 아주 좋은 영감님이에요.” 그녀가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다.” 안셀모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제야 로버트 조던은 자기와 이 여자가 단둘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또 이렇게까지 목소리가 달라져서 그녀를 바라보기가 어색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페인어로 말하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필요한 두 가지 규칙이 있다. 하나는 남자들에게 담배를 권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두 규칙 중 두 번째 규칙을 깨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 규칙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 아주 많이 있는데, 왜 그런 일가지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P55-56)  

    

“영감님도 집시의 피가 섞였나요?”

“천만의 말씀. 하지만 난 집시들을 무척이나 많이 봐 왔지. 내전이 있고부터는 더더욱 말이야. 이 산속에도 많이 있어. 그 사람들은 자기네 동족이 아닌 인간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입으론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무어인과 같군요.”

“그렇지.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집시들에겐 여러 규칙이 있어. 이번 전쟁에서 많은 집시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나빠졌거든.”

“그들은 이 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지 몰라요.”

“그렇지. 놈들이 아는 것이라곤 그저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과 옛날처럼 또다시 사람을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영감님은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있습니까?” 로버트 조던이 어둠이 주는 편안함과 그날 하루를 같이 보냈다는 친밀감에서 안셀모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있었지. 몇 번인가 있었어. 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지는 않았어. 내 생각에는 사람을 죽인다는 건 죄악이거든. 비록 상대가 우리가 꼭 죽여야만 하는 파시스트일지라도 말이야. 사람과 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인간을 짐승의 형제라고 생각하는 집시들의 미신을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정말이지 난 사람을 죽이는 건 어떤 경우든 반대야.”

“그래도 영감님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리고 또 앞으로도 죽일 테고. 하지만 만약 목숨이 붙어 있다면 앞으로는 아무도 해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 그러면 언젠가 내 죄를 용서받게 될 테지.”          (P84-85)    

 

“그럼 영감님에게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이 없다는 건가요?”

“없어! 정말 없어. 만약 이 세상에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하느님이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아 온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겠어? 그놈들이나 하느님을 믿으라지.”

“그들도 하느님을 주장하고 있죠.”

“신앙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확실히 하느님이 없는 것이 섭섭해.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

“그렇다면 사람을 죽인 죄를 용서해 주는 것도 영감 자신이겠군요.”

“난 그렇게 믿어. 당신이 그런 식으로 분명히 말해 주니,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하느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사람을 죽이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건 내게는 굉장히 중대한 일이거든. 피할 길이 없을 때엔 사람을 죽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난 파블로 같은 족속은 아니야.” 안셀모가 말했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사람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건 태곳적부터 변치 않는 진리죠.”

“그야 그렇지 전쟁이라면 죽여야만 하지.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이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 걸 생각하지.”                   (P86)     

로버트 조던은 그에게 컵을 내밀었다. 물을 섞어 지금은 우유 빛깔이 도는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집시가 한 모금 이상은 마시지 않길 바랐다. 이제 아주 조금밖에는 남지 않았고, 이 한 잔은 그에게는 석간 신문과도, 카페에서 보내던 그 옛날의 여러 밤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달의 이맘때가 되면 언제나 향기롭게 꽃이 피던 밤나무, 시내 변두리의 넓은 거리를 천천히 달리던 큰 말들, 서점, 간이매점, 화랑, 몽수리 공원, 스타드 버펄로, 뷔트 쇼몽 공원, 개런티 보증신탁회사, 시테 섬, 고풍스러운 푸아요 호텔,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저녁을 보낼 수 있는 모든 것과도 맞먹을 만한 것이었다. 혀끝이 짜릿짜릿하고 머리와 배 속이 후끈해지며 생각이 달라지는 이 우유 빛깔의 액체를 맛보던 한때 그가 즐겼고 이제는 잊어버린 모든 것이 마법처럼 되살아났다.

집시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컵을 돌려주었다. “아니스 향내는 나지만 쓸개처럼 지독히 쓰군요. 이런 약을 먹느니 차라리 앓는 게 낫겠소.” 그가 말했다. 

“그건 쑥이야. 이건 진짜 압생트인데 이 술 속에 쑥이 들어 있거든. 흔히 사람들은 골치가 빠개지는 것 같다고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그저 생각이 바뀔 뿐이지. 한 번에 두서너 방울씩 천천히 이 속에 물을 부어야만 해. 하지만 난 그걸 물속에다 한꺼번에 쏟아 넣었지.” 로버트 조던이 그에게 말했다.                    (P103-104)      


“나를 돈 로베르토라고 부르지 마요.”

“아, 농담이야. 여기서는 농담으로 돈 파블로라고 하거든. 농담으로 세뇨리타 마리아라고 하듯이.”

“그런 농담은 싫어요. 이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진지하게 날 ‘동지’라고 불러 줘야 마땅하죠. 농담하는 동안 부패가 시작되는 법이니까.”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당신은 정치에 대해선 무척 교조적이군.” 마누라가 그를 놀려대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 농담하는 일이 없나?”

“물론 있죠. 농담을 썩 좋아합니다만, 사람을 부를 때 농담을 하진 않습니다. 이름이란 마치 깃발과 같은 거니까요.”

“난 깃발을 보고도 얼마든지 농담할 수 있어. 무슨 깃발이든지 간에.” 마누라가 깔깔 웃었다. “나만큼 무엇이든지 농담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노란색과 황금색으로 된 옛날 깃발을 우리는 고름과 피라고 불렀지. 자색이 더 들어간 공화국 깃발은 피와 고름과 과망산염이라 부르고. 그게 곧 농담이란 거지.”

“이 분은 공산주의자예요. 공산주의자들은 모두가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에요.” 마리아가 말했다.

“당신, 공산주의자야?” 마누라가 물었다.

“아뇨, 난 반파시스트입니다.”                    (P130-131)    

 

“당신은 다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폭파할 필요가 있지. 그건 나도 알아.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소. 하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거고, 다른 하나는 꼭 승리하는 거죠. 그런데 승리하려면 다리를 꼭 없애야 하고.”

“파블로가 그렇게 영리하다면 왜 그것을 모를까?”

“워낙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있고 싶은 거요. 자신의 약한 의지의 소용돌이 속에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은 거지. 하지만 강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거든요. 부득이 바꿔야 한다면, 그 사람은 똑똑하게 바꿀 거요. 에스 무이 비보.(아직 팔팔하니까.)”

“그렇다면 저 젊은이가 그를 죽이지 않은 게 결국 잘한 짓이었군.”

“케 바.(물론.) 집시가 어젯밤 나더러 그를 죽여 버리라고 하더군. 그 집시 녀석은 짐승 같은 놈이요.”

“자네도 짐승이지! 하지만 머리만큼은 좋거든.” 필라르가 대꾸했다. 

“당신이나 나나 머리는 좋지. 하지만 재능이 있는 건 역시 파블로요!”

“하지만 그 사람을 참아 내기가 어려워. 자넨 그 사람이 얼마나 못쓰게 망가졌는지 몰라서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재능이 있어. 이봐요, 필라르 아주머니, 전쟁을 일으키려면 두뇌만 있으면 돼요.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재능과 물자가 필요한 법이라고.”

“잘 생각해 볼게. 자, 이제 그만 떠나야겠어. 벌써 늦었어.” 필라르가 말하고 나서 소리 높여 외쳤다. “영국 양반! 잉글레스 양반! 자, 어서 떠납시다! 어서 가자고!”          (P188-189)    

 

“바야돌리드에서 투우를 본 적 있어요?” 호아킨이 물었다.

“응, 9월 축제 때.”

“거기가 바로 내 고향이죠. 참 아름다운 마을인데, 이번 내전으로 부에나 헨테(선량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호아킨은 이렇게 말하고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놈들이 우리 아버지를 총살했어요. 어머니, 매부, 그리고 이번에 누님까지도.”

“짐승 같은 놈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이런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입 밖에 내는 것을 얼마나 많이 지켜보았던가? 부모니 형제니 자매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게 너무 가슴 아파서 눈물이 글썽하고 목이 메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죽은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기억해 낼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지금 이 젊은이처럼 말했다. 고향 마을의 이름이 입에 오르면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듣는 사람은 언제나 “짐승 같은 놈들.”하고 내뱉었다.                (P259)       

그래, 그건 우리가 배울 교훈의 일부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일이 끝난 뒤에는 훌륭한 교훈이 되겠지. 사람들이 이 전쟁에 귀를 기울인다면 배울 것이 얼마든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은 확실히 그랬어. 그는 다행히도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스페인에서 십 년쯤 살았다. 사람이란 주로 언어 때문에 상대방을 신용했다.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관용구를 섞어 가며 이야기할 줄 알고, 여러 지방의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 신용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충실한 것은 결국 자기 마을에 대해서 뿐이었다. 물론 첫째가 스페인이고 다음은 자기 민족, 그다음이 자기 지방, 그리고 자기 마을, 가족, 그리고 맨 마지막이 자기 직업이다. 만약 스페인어를 알면 스페인 사람은 처음부터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고, 더군다나 그의 지방에 대해 알면 더더욱 좋아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마을과 직업을 알고 있다면 외국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대접을 받는다. 그는 스페인어를 사용해도 조금도 외국인 같다는 느낌이 없었고, 그들도 실제로 대개는 그를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배신할 때는 얘기가 달라지지만 말이다.

물론 그들은 배신한다. 이따금 배신하지만, 그들은 누구든 배신한다.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배신한다. 셋이 모이면 둘은 한 패가 되어 나머지 한 사람을 배신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두 사람끼리 서로 배신하기 시작할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결론을 이끌어 낼 만큼 자주 그런 경우를 접하게 된다.                 (P261-262)     

  

“당신은 몸매가 참 예뻐.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몸일 거야.” 그가 말했다.

“그저 어리고 여워었을 뿐인데요.”

“천만에 그렇지 않아. 아름다운 몸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지. 어떤 사람 몸에는 있고, 어떤 사람 몸에는 없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한테는 그런 마력이 있거든.”

“당신을 위한 거죠.” 그녀가 대답했다.                (P309) 

     

넌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잘 알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간 거야. 조금이라도 승리할 기회를 얻기 위해 바로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또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일과 맞서 싸우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 만약 성공을 거두고 싶다면, 네가 전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군대를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그가 좋아하는 이 사람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틀림없이 파블로는 가장 영리한 사람이지. 그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순식간에 알아챘어. 그의 마누라는 이 일에 찬성했고, 지금도 그렇지. 그러나 이 일이 정말로 어떤 위험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고는 점점 압도당하더니 이제는 벌써 꽤 많이 영향을 받고 있어. 엘소르도 영감도 즉각 그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실행할 의지는 있지만 너, 로버트 조던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그 역시 그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지는 않아.

그렇다면 넌 너 자신에게 일어날 문제가 아니라, 파블로의 마누라와 그 아가씨와 지금 네 머리에 떠오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래도 좋다. 하지만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들한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네가 이곳에 나타나기 전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또 어떤 일을 겪었던가?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 넌 그들에게 전투 중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책임도 없어. 명령은 너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골츠한테서 나온 것이니까. 그렇다면 골츠란 도대체 누구인가? 훌륭한 장군이지. 이제까지 밑에서 일해 본 사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군이야. 하지만 그 명령이 어떠한 사태를 일으킬지 빤히 알면서도,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비록 당이요 군대인 골츠가 내린 명령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다. 그 명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실행해 보는 것 밖에는 없어. 실행해 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누군가 명령을 받았을 때 그것을 수행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명령이 내려졌을 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느냐 말이야.                   (P311-313)    

  

그에게는 이 전쟁이 끝나면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가 이 전쟁에서 싸우는 것은 이 전쟁이 자기가 사랑하는 나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고, 공화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이며, 또 만약 이 전쟁에서 진다면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삶이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공산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곳 스페인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훌륭한 기율, 가장 건전하고 가장 진지한 기율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전쟁동안 그들이 통제를 받아들인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가 존경할 만한 계획과 기율을 지닌 유일한 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적 견해는 어떠한가?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정치적 견해도 갖고 있지 않지, 하고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돼. 그렇다면 이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것인가? 귀국하여 전처럼 스페인어를 가르치며 먹고살 것이고, 또 실화를 책으로 쓸 작정이거든. 꼭 그렇게 할 거야. 그리 힘든 일은 아닐 테지.                 (P314)  

   

편견이란 참 우스운 것이다. 편견을 갖자면 자신이 절대로 옳다고 확신할 필요가 있다. 자제(自制)만큼 확실성과 정당성을 만들어 내는 것도 없다. 그렇다면 자제란 이단의 적인 셈이다.     (P316)   

   

하지만 이제까지 오랫동안 참 이상한 생활만 해왔구나. 빌어먹을, 이상한 생활이 아니고 뭐냔 말이냐. 스페인은 네 일이요 직업이었으니 스페인에 머무는 것도 자연스럽고 건전한 일이거든. 몇 해 여름을 토목 공사며, 삼림에서의 도로 건설이나 공원 일로 화약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니 뭔가를 파괴하는 일도 건전하고 정상적인 일이지. 언제나 조금 서둘러 대기야 하지만 건전한 일이야.

일단 네가 폭파의 개념을 문젯거리로 받아들이면, 그건 오직 문젯거리일 뿐이지. 하지만 네가 정말로 그걸 수월하게 받아들여도 거기에 수반되는 그리 좋지 않은 일들이 수없이 많았지. 폭파를 성공적인 암살의 상황과 비슷하게 보려는 시도는 늘 있었거든, 거창한 말을 사용하면 좀 더 변명이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넌 너무 섣불리 덤벼들었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네 체험을 속속들이 글로 써버린다면 그런 것쯤은 자취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말 거야,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일단 네가 글로 쓴다면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될 거다. 네가 그것을 쓴다면 훌륭한 책이 될 거야. 다른 책보다 훨씬 좋은 책이 될 거야.        (P318-319)     

만약 지금의 상황이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 상황이 좋다고 말해야 하는 법은 없었어. 내가 이제껏 느껴 온 것을 지금 느낄 수 있을지는 몰랐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도 말이야. 나는 전 생애를 걸고라도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넌, 그렇게 할 거야, 하고 다른 쪽의 그가 말했다. 넌 그렇게 할 거야. 넌 지금 그것을 갖고 있고, 그것은 너의 전 생애가 아니더냐. 지금 말이야. 지금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어제라는 것도 없고, 내일이라는 것도 없지.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그것을 안다는 말이냐?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야. 만약 그 현재가 이틀뿐이라면, 그 이틀이 네 모든 인생이며, 그 속의 모든 것은 그 비율로 존재하거든. 이게 네가 이틀 동안에 일생을 보내는 방법이야. 그리고 만약 네가 불평은 집어치우고,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만 바라지 않는다면, 넌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훌륭한 삶이란 성서에서 말하는 그 기간으로 잴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을 누리고, 맡은 일이나 해. 그러면 넌 긴 인생을, 그것도 아주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최근 즐거운 삶을 누리지 않았던가? 뭘 그리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이런 일이라는 게 그런 거지,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이르고, 그런 생각에 아주 만족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네가 배운 것이 아니라 네가 만난 사람들이지. 이렇게 농담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그는 마리아한테로 돌아갔다.            (P326-327)  

    

난 사람 죽이는 일은 맡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어, 하고 안셀모는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고 나면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엄청나게 속죄해야 할 거야. 만약 전쟁 뒤에 종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어떤 형식이든 살인 행위의 죄를 씻어 내는 공적인 속죄 행위가 있어야 할 거야. 그러지 않고선 진실하고 인도적인 삶의 기반을 갖추지 못할 거야. 살인이 필요하다는 건 나도 알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행위를 범한다는 건 인간으로서 아주 나쁜 일이야. 이번 전쟁이 끝나서 우리가 승리하게 되면, 우리 모두의 죄를 씻어 줄 어떤 종류의 속죄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해.               (P377)   

  

확실히 게일로드는 교육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장소였다. 그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이 모두 현실적으로 실행되었는가를 이곳에서 배웠다. 그 무렵 난 막 인생 수업을 시작했을 뿐이었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얼마나 오랫동안 수업을 계속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게일로드야말로 훌륭하고 건전하고, 그에게는 꼭 필요한 곳이었다. 그가 온갖 어리석은 일을 믿고 있던 초기 무렵에 그곳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온갖 기만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많이 알게 되었다. 또 게일로드에서 배운 것은 그가 옳다고 믿는 일을 더욱 확신하게 해주었다.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는지가 아니라, 일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행되는지 알고 싶었다. 전쟁 중에는 언제나 거짓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리스테르와 모데스토와 엘 캄페시노가 말하는 진실은 거짓말이나 전설보다 훨씬 그럴 듯 했다. 그들도 언젠가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게 될테지만, 그때까지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게일로드 같은 곳이 있다는 것이 그는 기뻤다.       (P440)

      

그 두 곳에서 난 십자군에 참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십자군이라는 말은 너무 남용되어 본래 뜻을 잃어버렸지만 그 말 말고는 다른 적당한 말을 찾아낼 수가 없지. 관료주의와 비능률과 당파 싸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낀 감정은 처음 성찬에 참석했을 때 기대했다가 느끼지 못한 그런 감정과 비슷한 것이었거든. 온 세계에서 압박받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에 헌신한다는 감정이었지. 종교적인 경험과 마찬가지로 말로 하기 곤란하고 쑥스럽지만 바흐의 음악을 들었을 때,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레온 대성당 안에서 거대한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우러러보았을 때, 또는 프라도 박물관에서 만테냐와 그레코와 브뤼헬의 명화를 보았을 때 느끼는 것처럼 진솔한 감정이었어. 전적으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뭔가에 역할을 맡겨 주고, 또 그 일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과 완벽한 형제애를 느끼게 해주는 감정이었지. 이제껏 전혀 느껴 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것을 경험했지. 그래서 그것에 엄청난 의미와 이유를 부여한 나머지 이제 자신의 죽음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게 됐거든. 죽음이란 다만 의무를 이행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고마운 일은 이런 감정, 이런 필요성에 대해 네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지. 이제 넌 싸울 수가 있는 거야.        (P448-449) 

      

그 해 여름과 가을을 이 세계의 모든 빈민을 위해 싸웠고, 모든 압제에 맞서 싸웠으며, 네가 믿고 있는 모든 것, 네가 교육받은 새로운 세계를 위해 싸웠어.            (P451)   

  

그렇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는 책을 쓸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잘 알고 있는 일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것에 관해서만 쓸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다루려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문필가가 되어야 할 거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전쟁에서 그가 알게 된 것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P473) 

       

[2]

집시 녀석, 하고 그는 생각을 이어갔다. 정말 쓸모없는 녀석이야. 정치적으로 깨우친 것도 없고, 기율도 전혀 없어. 저런 녀석에게는 뭐 하나 믿을 구석이 없다니까. 하지만 녀석도 내일은 쓸데가 있겠지. 내일은 쓸모가 있을 거야. 전쟁 중에 집시를 만나다니 참 이상도 하지. 그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처럼 이 일에서 제외됐어야 하는데. 아니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복무 부적합 판정자들처럼 말이지. 그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하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도 이 전쟁에서 제외되지는 않았어. 누구 하나 제외된 사람이 없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이 전쟁에 참가했으니까. 그렇다. 이 전쟁은 이 게으른 부대에까지 찾아온 거야. 그래서 녀석들까지 전쟁에 말려든 거지.              (P57-58)

     

“그가 소문처럼 그렇게 영리한가요?”

“그 이상이지.”

“하지만 여기선 별로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던데.”

“코모 케 노?(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능력이 없었다면 녀석은 아마 어젯밤에 골로 갔을걸. 잉글레스 양반, 당신은 정치니 유격전이니 하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소. 정치나 유격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오래 살아남는 거요. 어젯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봐요. 당신한테나 나한테나 그렇게까지 모욕을 당하고도 말이야.”                 (P71)     


“내 말 들어 봐요, 친구. 격식을 갖추지 못한 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건 시간이죠. 내일도 싸움을 해야 하니까. 나 개인한테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오. 하지만 마리아와 내게는 이 짧은 시간에 두 사람의 삶을 아낌없이 살아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하루 낮과 밤으론 너무 짧지.” 아구스틴이 맞장구쳤다.

“그렇죠. 하지만 어제가 있었고, 그저께 밤이 있었고, 또 어젯밤이 있었어요.”         (P85)     


난 민중을 믿고, 민중이 바라는 대로 자치(自治)를 할 권리가 있다고 믿어, 하지만 넌 살인행위가 옳다고 믿어선 안 돼, 하고 그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불가피하게 살인 행위를 해야 하더라도, 옳은 일이라고 믿어서는 안 돼.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모든 일이 그릇되고 말거야.      (P106)    

 

넌 ‘자유’, ‘평등’. ‘박애’를 믿지.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신봉하고. 그러니 필요 이상의 변증법으로 자신을 속이지마. 변증법 같은 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일 뿐 너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넌 그저 착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그걸 알아 둬야 할뿐이지. 넌 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정말 많은 일을 유보해 버렸지. 만약 이 전쟁에 패배한다면 그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거야.

하지만 전쟁만 끝난다면 너도 네가 믿지 않는 것들을 내버릴 수 있어. 네가 믿지 않는 것도 산더미같이 많지만, 믿는 것도 산더미같이 많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있어. 사람을 사랑하는 데 결코 자신을 속이지 마.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보통 사람들 누구에게나 오는 행운이 아니야. 너도 전에는 한 번도 얻지 못했다가 이제야 겨우 얻었지 않은가. 마리아와 함께 누리는 게 비록 오늘 하루와 내일의 일부밖에 지속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해도, 그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거든.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세상에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지. 하지만 확실히 말해두지만, 사랑이라는 건 정말 존재하고, 넌 지금 그걸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비록 네가 내일 죽는다 해도 넌 행복한 사나이인 거야.    (P108)      


영감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에서 죽었는지 알고 있다 해도 위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일을 겪는 바로 그 순간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영향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과부가 된 여자가 아내에게 사랑받던 다른 남편들 역시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든 그렇지 않든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P121)     


“난 우리가 싸워서 지켜 온 모든 것들을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해. 자유와 존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일할 권리, 굶지 않을 권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해. 우리가 방어한 마드리드를 사랑하듯, 죽어간 내 동지들을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해. 정말 많은 동지가 죽었지. 정말, 정말 많은 동지들이. 당신은 얼마나 많은 동지가 죽었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할거야. 하지만 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아니, 그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정말로 사랑해, 토끼.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뭔가 말하고 싶기 때문이야. 아내가 있어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아내로서 당신이 있으니까 행복해.”                 (P185)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자 그는 그녀가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을 뜬 채 그녀가 깨지 않도록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녀가 얘기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낱낱이 그려 보고 증오심을 느꼈고, 아침이 되면 놈들을 죽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어느 것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개인적인 문제와 분리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고 놈들에게 가혹한 짓을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교육이 부족해서 그밖에 다른 좋은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놈들은 일부러, 계획적으로 그런 짓을 했거든. 그 짓을 한 놈들은 그들의 교육이 낳은 최후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이야. 놈들이야말로 스페인 기사도의 꽃이지. 스페인 사람들이란 정말 대단해. 코르테스, 피사로, 메넨데스 데 아빌라로부터 엔리케 리스테르를 거쳐 파블로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개자식들 아닌가. 그리고 또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인가. 이 세상에 이만큼 훌륭한 민족, 이만큼 나쁜 민족도 없을 거야. 또 이만큼 친절하고 이만큼 잔인한 민족도 없을 거야. 도대체 누가 이 민족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아니야. 만약 이해한다면 모든 걸 용서해야 하기 때문이거든. 이해한다는 것은 곧 용서한다는 것이지. 아니, 그렇진 않아. 용서라는 건 이제까지 과장되어 왔어. 용서란 건 기독교적인 사상인데, 스페인은 기독교 국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교회 안에서도 그들 특유의 우상숭배가 있어. 오트라 비르헨 마스(또하나의 다른 성모님) 말이지. 놈들이 적의 처녀들을 농락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일 거야. 그건 확실히 그들, 특히 스페인 종교를 광신하는 사람들일 경우에 일반 민중보다 훨씬 뿌리깊은 것이었지. 교회는 정부와 결탁해 있었고, 정부는 언제나 부패해 있었으므로 민중은 교회에서 이탈해 버렸어. 이 나라야말로 종교개혁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유일한 나라였거든. 그들은 이제 이단 심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거야.              (P196-198)     

생각해 보면 우린 정말 살기 힘든 시대에 태어났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 시대도 지금보다는 살기 쉬었을 거야. 인간은 어차피 고통과 싸우게 태어났으니 고생이 없을 수는 없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아. 하지만 이제는 어려운 결심을 해야 할 때야. 파시스트 놈들이 공격을 해 왔으니까 우린 결심을 한 거지. 우리는 살기 위해 싸우고 있어. 하지만 아까 그 나무에 손수건을 비끄러매었다가 낮에 다시 가서 알을 찾고, 그 알을 암탉에게 품게 해 닭장에서 꿩 새끼를 키우고 싶구나. 그렇게 사소하고 평범한 것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내게는 집도 없고 집이 없으니 안마당도 없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네게는 내일 싸우러 갈 형제가 하나 있을 뿐 가족도 없어. 바람과 태양과 공복을 느끼는 창자가 있을 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그런데 이제는 바람도 거의 없고, 태양도 없구나. 있는 것이라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수류탄 네 개뿐인데, 그것도 던질 때밖에는 쓸데가 없지. 등에 카빈총을 메고는 있지만 이것도 남에게 총질할 때만 소용이 있어. 하지만 전달해야 할 보고서가 한 통 있잖아. 그리고 땅에 깔길 배설물을 잔뜩 배 속에 넣고 있을 뿐이야, 하고 그는 어둠 속에서 히죽 웃었다. 또 넌 그것에 오줌 칠을 할 수도 있어.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죄다 남에게 줄 것뿐이구나. 넌 철학의 천재요 불행한 인간이로구나, 하고 그는 혼자서 생각하고 또 한 번 씁쓸하게 웃었다.                (P220)   

    

오늘 하루는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날 중 하루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많은 날은 오늘 네가 하는 일에 따라 결정되거든. 올해는 뭐든지 그런 식이었지.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어. 이 전쟁 내내 그 모양이었어. 넌 이른 아침부터 거만을 떨고 있구나,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지켜봐.                  (P331-332)     

  

이제 이 일은 모두 끝났어,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넌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그 일에 대해서도 속죄하려고 할지도 몰라. 하지만 어젯밤 산을 넘어 돌아오는 길에 바라던 것을 이제 이루지 않았는가. 지금 전투 중에 있고, 이제 아무런 문제도 없어. 오늘 아침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괜찮아.

그러고서 강둑에 등을 기대고 누워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누르고 입술이 파래지고 두 눈을 꼭 감고 헐떡이며 숨을 쉬고 있는 페르난도를 바라보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는 빨리 숨을 거뒀으면 좋겠는걸. 아니, 난 오늘 전투를 위해 필요한 것을 이루면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더 이상은 바라지 않겠어. 알겠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어떤 것도 말이지. 내가 바라는 것을 준다면, 그 나머지 모든 일은 분수에 맡기겠어.

그는 저 멀리 산길에서 들려오는 전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말 오늘은 굉장한 날이군. 오늘이 어떤 날인지 명심해 둬야 하겠는걸.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아무런 자랑스러움도 흥분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저 고요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손에 철사 고리를 만들어 쥐고, 손목에 다른 고리를 걸고 표석 뒤쪽 도로의 자갈에 무릎을 꿇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지금, 그는 쓸쓸하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느낌마저 들지 않았다. 한 손에 쥐고 있는 철사와 한 몸이었고, 다리와 한 몸이었으며, 잉글레스 사람이 장치한 폭약과 한 몸일 뿐이었다. 또 아직도 다리 밑에서 작업하고 있는 잉글레스 사람과 한 몸이며, 모든 전투와 공화국과도 한 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런 흥분도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고요할 뿐 햇볕이 쭈그리고 있는 그의 목덜미와 어깨에 내리쬐고 있었다. 눈을 들면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과 개울 저쪽에 솟아있는 산비탈이 보였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외롭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P350-351)    

   

다리를 폭파한 뒤 얼굴을 파묻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곳에서 안셀모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느낀 분노와 공허감과 증오심의 불길이 아직도 그의 몸속에 타오르고 있었다. 조던의 가슴속에는 비애감에서 오는 절망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은 군인으로 계속 남아 있기 위해 그 비애감을 증오심으로 바꾸게 마련이다. 이제 일단 그 일이 끝나자 그는 외롭고 쓸쓸하고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앞에 보이는 사람마다 증오심을 느꼈던 것이다.            (P358)      

 

나는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을 위해 지난 일 년 간 싸워왔지. 만약 우리가 여기서 승리를 거두면 우린 어디서나 승리를 거두게 될거야. 이 세계는 아름다운 곳이고, 그것을 위해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지. 그래서 이 세계를 떠나기 싫은 거야. 이렇게 훌륭한 삶을 보낼 수 있었으니 넌 행운아였어,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삶처럼 그렇게 길지는 못했어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훌륭한 삶을 보낼 수 있었지. 이런 행운을 얻고도 설마 불평할 생각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배운 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제기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정신없이 그것이 그것을 배우고 있군. 카르코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 사람은 지금 마드리드에 있겠지. 바로 저 산맥을 넘어 평야 건너편에. 잿빛 바위와 솔밭과 히스와 가시금작화 숲을 빠져나가 노란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가면 바로 그 도시가 하얗고 아름답게 솟아있지. 그곳은 필라르가 들려준 도살장에서 짐승의 피를 마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처럼 현실적이지. 진실한 것이 하나만 있다는 법은 없어. 모두가 진실인 거야. 아군의 것이건 적의 것이건 비행기는 하나같이 아름답거든. 빌어먹을 비행기들, 하고 그는 생각했다.                   (P395)    

   

이런 상황을 나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종교가 있는 인간일까, 아니면 그저 정면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일까? 죽음이란 그런 인간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겠지만, 우리 역시 무서울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죽음에서 나쁜 점이란 무엇인가를 놓친다는 것뿐이야. 죽음은 오래 시간을 끌거나 고통이 너무 심해서 본인에게 곤욕을 줄 때만 나쁜 거지. 그런 점에서는 넌 아주 운이 좋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넌 조금도 그런 것을 겪을 필요가 없잖아.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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