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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12. 2024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영화 <백야행> 2010년

영화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1]

지난 3월에 구마모토 미나마타병에 대한 판결이 있었고, 니가타 미나마타병, 욧카이치 시 대기오염, 이타이이타이병까지 4대 공해 재판의 결심이 있었다. 모두 원고인 환자 측이 승소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공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자신들이 평소에 자주 먹는 생선이 수은이나 PCB에 오염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오징어는 괜찮으려나, 사사가키는 신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징어를 굽는 철판은 두 장의 철판을 경첩으로 이어 놓은 모양이다. 한쪽 철판에 밀가루와 계란 반죽을 입힌 오징어를 올려놓고, 그것을 다른 쪽 철판으로 덮어 누르며 열을 가하는 식이다. 오징어 굽는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P11)    

 

피해자의 이름은 기리하라 요스케. 전당포 ‘기리하라’의 주인이다. 가게 겸 자택은 사건 현장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피해자의 아내 야에코가 신원을 확인하자 사체는 곧바로 반출되었다. 사사가키도 감식반원들을 도와 들것에 사체를 실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피해자가 밥을 먹은 후였나.......”

사사가키가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옆에 있던 고가 형사가 되묻는다. 

“이거 말이야.”

사사가키가 가리킨 것은 피해자의 벨트였다. 

“이거 보라고. 벨트 구멍이 평소와 두 개나 차이가 나잖아.”                (P20)     


여점원이 그에게 가르쳐 준 가게의 위치는 오에니시 6번지였다. 수사관이 당장 그 가게에 가서 확인한바, 아닌 게 아니라 금요일 저녁때 기리하라 요스케로 추정되는 인물이 들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알라모드 푸딩을 네 개 샀다. 그러나 그 후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를 만나러 가는데 푸딩 네 개를 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기리하라가 간 곳에는 틀림없이 여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수사관들은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마침내 한 여자의 이름이 수사 선상에 떠올랐다. 니시모토 후미요라는 여자였다. ‘기리하라’의 장부에 이름이 실려 있었고 주소는 오에니시 7번지였다. 

사사가키와 고가는 니시모토 후미요의 집을 찾았다. 

양철판과 자투리 목재를 적당히 얽어 놓은 듯한 집이 닥지닥지 어지럽게 들어선 동네에 ‘요시다 하이츠’라는 연립 주택이 있었다. 연기에 그을린 것처럼 거무칙칙한 회색 벽에는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보였다. 뱀이 기어 다닌 것처럼 시멘트를 덧바른 곳은 심하게 갈라진 부분일 것이다. 

니시모토 후미요의 집은 103호, 이웃 건물과 간격이 없어서 1층에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통로에는 녹슨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P51)    

 

데라사키가 죽은 곳은 한신 고속도로 오사카모리구치 구간이었다. 커브 길에서 제대로 돌지 못하고 벽에 충돌한 것이다. 전형적인 졸음운전이었다. 

이때 그의 라이트맨에는 대량의 비누와 세제가 실려 있었다. 화장실 휴지에 이어 세제까지도 사재기 소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고객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수량을 확보하려던 데라사키가 한숨도 자지 않고 돌아다녔다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 

사사가키를 비롯한 수사관들은 데라사키의 방을 수색했다. 기리하라 요스케를 살해한 사실을 암시하는 물증을 찾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헛수고일 게 뻔했다. 어떤 단서가 발견되더라도 범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수사관 하나가 라이트밴 사물함에서 중대한 단서를 발견했다. 길쭉한 직육면체 모양의 던힐 라이터였다. 기리하라 요스케의 주머니에서 비슷한 라이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수사관들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라이터에서 기리하라 요스케의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느 누구의 지문도 나오지 않았다. 말끔히 닦아 냈기 때문인 듯했다. 

기리하라 야에코에게도 문제의 라이터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같은 라이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니시모토 후미요를 경찰서로 불러 다시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형사들은 초조하고 답답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자백을 끌어내고자 안달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라이트밴에서 발견된 라이터가 기리하라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이걸 데라사키가 갖고 있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당신이 피해자의 주머니에서 꺼내 데라사키에게 주었든지, 데라사키가 자기 손으로 꺼내 가졌든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대체 어느 쪽이야. 어?”

수사관은 라이터를 보이며 니시모토 후미요를 추궁했다. 

그러나 니시모토 후미요는 끝까지 부인했다. 그녀의 태도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데라사키의 죽음을 알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그녀의 태도에 주저하는 기색이란 없었다. 

뭔가 잘못됐어. 우리가 엉뚱한 길로 빠져든 거야. 옆에서 취조 내용을 들으면서 사사가키는 생각했다.                          (P99-101)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다가와의 눈이 안쪽 다다미방에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을 포착했다. 여자는 엷은 노란색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으로 다다미 위에 누워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니시모토 후미요가 틀림없는 듯했다. 

뭐야, 집에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이상한 냄새를 감지했다. 

“가스다, 위험해!”

뒤따라 들어오려는 유키호를 제지하면서 그는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리고 바로 옆의 조리대로 눈을 돌렸다. 가스레인지의 스위치가 점화에 맞춰져 있고 레인지 위에는 냄비가 얹혀 있었다. 그러나 레인지 불꽃은 타오르지 않았다. 

다가와는 숨을 멈춘 채 가스 밸브를 잠그고 조리대 위의 창문을 활짝 연 후 안쪽 방으로 향했다. 앉은뱅이 상 옆에 쓰러져 있는 후미요를 힐끔 보고 창문을 연 후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머릿속으로 찌릿찌릿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니시모토 후미요 쪽을 돌아보았다. 후미요의 얼굴은 엷은 청보라색이었다. 피부에서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늦었군, 하고 직감했다. 

방 한구석에 검은색 전화기가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119로 걸어야 하나, 아니면 110으로 걸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병을 앓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주검 외에는 시신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엄마, 죽었나요?”

현관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P108-109)   

  

“사실은 나, 양녀야,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 집에 왔어. 아까 그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야.”      

단단히 마음먹고 털어놓는 기색은 아니었다. 유키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아, 그렇구나.”

“오에에 살았다는 것도 사실이고 가난했다는 것도 사실이야. 아빠가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엄마가 이상하게 죽었다는 것도 사실이야. 내가 6학년 때였어.”

“이상하게 죽었다는 건.......”

“가스 중독, 사고사였어. 그런데 자살한 게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그랬구나........”

에리코는 뭐라 대꾸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운데 정작 유키호는 중요한 사실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친구에게 괜한 신경을 쓰게 하지 않으려는 그녀다운 배려일지 몰랐다.                       (P126-127)     

“이상한 소문?”   

“부인이 범인 아닐까 하는 소문.”

“부인?”

“기리하라 엄마 말이야. 가게 직원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는데 남편이 방해가 되니까 그러지 않았을까 한 거지.”

후미히코 말에 따르면 기리하라의 집은 전당포를 했고, 가게 직원은 그 전당포에서 일했던 남자를 가리킨다고 했다. 

그런데 유이치로서는 친구의 입을 통해 그런 얘기를 들어봐야 텔레비전 드라마 줄거리 같기만 하지 조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게 직원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말도 영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유이치는 다음 얘기를 재촉했다. 

“꽤 오랫동안 그런 소문이 나돌았어. 하지만 별다른 증거가 없다 보니까 결국은 흐지부지돼 버렸지. 나도 거의 잊고 있었고, 그런데 이 사진 말이야.”

후미히코가 아까 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기 좀 봐, 뒤에 찍힌 게 러브호텔이야. 이 두 사람, 틀림없이 여기서 나왔을 거라고.”

“이 사진이 있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걸 몰라서 물어? 기리하라 엄마가 가게 직원과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잖아. 그러니까 남편을 죽일 만한 동기가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이 사진을 기리하라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 거야.”

후미히코는 도서관에서 책을 곧잘 빌려 읽는다. 동기 따위의 말이 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도 그 덕분일 것이다. 

“그래도 기리하라로서는 자기 엄마를 의심할 수 없잖아. 안 그래?”

유이치가 말했다. 

“물론 그 기분이야 알지. 하지만 아무리 싫은 일이라도 반드시 분명히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야.”

후미히코는 유달리 열변을 토한 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 사진에 찍힌 여자가 기리하라의 엄마라는 걸 어떻게든 증명할 거야. 그럼 저 녀석도 모른 척할 수 없겠지. 이 사진을 경찰에게 가져가면 반드시 수사가 재개될 거라고, 나, 그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형사와 아는 사이거든. 그 아저씨에게 이 사진을 보여 줄 거야.”

“그 사건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데?”

유이치는 의아해서 물었다. 후미히코가 사진을 집어넣으면서 눈을 치켜뜨고 그를 보았다. 

“사체를 발견한 사람이 내 동생이었어.”                 (P140-142)     

사건으로부터 나흘이 지난 토요일. 에리코는 유키호와 함께 후지무라 미야코를 문병하러 그녀의 집을 찾았다. 유키호가 제안한 일이었다. 

둘은 거실에서 기다렸지만 미야코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엄마가 나와서 미야코가 아직은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가 심각한가요?”

에리코가 물었다. 

“상처는 그다지.....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말이야.”

미야코의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범인은 밝혀졌나요? 경찰이 저희한테도 이것저것 묻던데요.”

이번에는 유키호가 물었다. 미야코의 엄마는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나 봐. 너희들에게도 폐를 끼친 것 같구나.”             (P170)   


사건과 관련해 도모히코를 만나러 온 사람은 형사뿐이 아니었다. 

형사가 찾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 교문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머리를 뒤로 바짝 넘긴 중년 남자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소노무라 도모히코 군 맞지?”

남자가 물었다. 

“네, 그런데요.”

도모히코가 대답하자 남자가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그 손에 들린 명함에는 하나오카 이쿠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모히코는 자신의 얼굴이 심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긴장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시간 좀 있니?”

표준어에 가까운 말투를 쓰는 남자의 목소리는 배 속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저음이었다. 

네, 하고 도모히코는 대답했다. 

“그럼 우리, 차 안에서 얘기하지.”

남자가 도로 옆에 세워 둔 은회색 차를 가리켰다. 

“미나미 서 형사들이 자네를 찾아갔을 텐데.”

운전석에 앉자 하나오카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자네에 대해 알려 준 사람은 나야. 그 사람 수첩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거든.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이지.”           (P255-256) 

    

“뭐라 그랬더라. 벌써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다가와는 잠시 관자놀이 부근을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아, 그래. 니시모토 부인이 감기약을 먹었다고 했어.”

“감기약요? 그게 어때서요?”

“정상적인 분량이 아니었던 거지. 빈 봉지로 미루어 한꺼번에 보통의 다섯 배 이상을 먹은 흔적이 있다는 거야. 부검으로 증명됐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아.”

“다섯 배 이상....... 그건 좀 심하군요.”

“그러니까 경찰이 잠들기 위해서 먹지 않았을까 의심한 거지. 가스를 틀어 놓은 채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는 방법이 있잖아. 수면제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대신 감기약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했던 거야.”

“수면제 대신........ 이라고요.”

“술을 꽤 마신 흔적도 있었다고 했지. 아마, 빈 정종병이 쓰레기통에 들어 있었다더라고. 그 부인, 평소에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니까 그 역시 잠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              (P312) 

유키호가 프로그램을 훔쳤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확신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고려해 본 적도 없다. 

물론 유키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날 스포츠 가방에서 테이프를 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몰래 1층으로 가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훔쳐 내는 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들키지 않으려면 두 시간 내에 프로그램을 복사한 다음 테이프를 도로 가방에 넣어 두어야 한다. 물론 설비가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집에 컴퓨터가 있을 리 없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복사본을 만드는 것은 노래 테이프를 복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가 범인이라..........., 공상만으로도 재미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사하루는 헤벌쩍 웃었다.                  (P323)     


“사교댄스 같은 건 시대에 뒤떨어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춤을 출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네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는 않아.”

가즈나리는 고개를 저으면서 부정했다. 

“그래요, 왜요?”

“선택받은 사람들이 사교댄스를 배우는 게 아니라, 기회가 왔을 때 춤을 추고자 하는 사람이 선택받는 거야.”

“아, 그렇군요.........”

가와시마 에리코는 마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신자처럼 감탄과 선망이 뒤섞인 시선으로 가즈나리를 올려다보았다. 

“대단하네요.”

“대단하다니, 뭐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요. 선택받은 사람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춤을 추는 사람이 선택받는 거라는 말.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해요.”                    (P345)     


더없이 비참한 사건이었지만 한 가지 구원은 있었다. 실로 기묘한 일이지만 그녀의 처녀성이 망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벌거벗은 무참한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이 범인의 목적이었던 듯했다. 

부모님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칫 소란을 일으켰다가 소문이 어떻게 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사건이 알려지면 모두들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고 여길 터였다. 

에리코는 중학 시절에 있었던 한 사건이 떠올랐다. 동급생이 집에 돌아가던 도중에 습격당했고, 하반신이 드러난 그녀를 발견한 사람은 에리코 자신과 유키호였다.

피해자인 후지무라 미야코의 엄마는 에리코와 유키호에게 말했었다. 옷은 벗겨졌지만 몸은 더렵혀지지 않았다고.

당시에는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같은 일을 당하고 보니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도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기운 차려. 내가 도와줄게.”

유키호는 그렇게 말하고 에리코의 손을 꼭 잡았다.                 (P393-394)

특별한 기계 장치도 없이 어떻게 패턴을 해독했을까. 어느 날 기리하라가 그 방법을 실제로 보여 줬다. 그것은 그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그가 준비한 것은 고운 자석 분말이었다. 그는 그것을 카드의 자기 테이프 부분에 뿌렸다. 다음 순간 도모히코는 어, 하고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자기 테이프 위에 가느다란 줄무늬가 드러났던 것이다. 

“결국은 모스 부호랑 같은 거야.”

기리하라가 말했다. 

“비밀 번호를 알고 있는 카드에 이런 작업을 해 본 결과 패턴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됐어. 그럼 반대로, 비밀 번호를 모르더라도 패턴만 만들어지면 해독할 수 있다 이거지.”

“그러니까 줍거나 훔친 현금 카드도 이렇게 자석 분말을 뿌리면.......”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 이런.......”

도모히코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기리하라가 오랜만에 정말로 유쾌하게 웃었다. 

“웃기는 얘기지. 이런 게 뭐가 안전하다는 건지. 은행에서는 통장과 도장을 반드시 따로 보관하라고 하는데, 현금 카드는 금고랑 열쇠가 같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P410-411)    

 

“이걸 현금 카드라고 하자. 이 카드를 기계에 넣으면 기계는 자기 테이프에 기록돼 있는 각종 정보를 읽어들이겠지. 그중에는 계좌 번호와 비밀 번호도 있고, 당연한 얘기지만 기계는 카드를 넣은 사람이 카드 소유자 본인인지 아닌지는 몰라. 그러니 그걸 판단하기 위해 비밀 번호를 누르라는 거지. 자기 테이프에 기록돼 있는 번호와 같은 숫자가 입력되면 의심하지 않고 돈을 뱉어 내. 그렇다면 아무것도 기록돼 있지 않은 백지 상태의 자기 테이프를 가져와서 거기에 계좌 번호 등 필요한 사항을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적당한 비밀 번호를 입력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거지.”  

“아.........!”

“그렇게 만들어진 카드는 물론 진짜 카드와는 내용이 달라. 비밀 번호가 다르니까. 하지만 기계는 그걸 판정할 능력이 없어. 기계가 확인하는 것은 자기 테이프에 기록된 번호와 인간이 누르는 번호가 일치하느냐 하는 것뿐이니까.”

“그럼 실제로 존재하는 계좌 번호만 알면.......”

“얼마든지 현금 카드를 위조할 수 있다는 얘기지. 가짜지만 돈은 틀림없이 인출할 수 있는.”

기리하라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도모히코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리하라의 말이 결코 꿈 같은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가짜 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P412-413) 

    

그 와중에도 한 가지. 그의 관심을 끄는 기사가 있긴 했다. 도청에 관한 것이었다. 

작년에서 올해에 걸쳐 공산당원의 전화가 경찰에 의해 도청당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안 경찰의 행태 등에 관해 각처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마코토의 관심은 그런 정치적인 부분에 있지 않았다. 도청이 발각되기까지의 경위가 마음에 걸렸다. 

전화의 잡음이 늘고 수화 음량이 작아져서 전화 소유자가 통신 회사에 조사를 의뢰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문득 자기 집은 괜찮은 걸까 생각했다. 그의 전화도 기사에 쓰여 있는 것과 똑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의 전화를 도청해서 이득을 볼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마코토가 신문을 접었을 때였다. 프런트 직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미사와 씨를 기다리고 계신가요?”

“네, 그런데요.”

마코토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었다. 

“실은 방금 전화가 왔습니다. 예약을 취소하시겠다고요.”

“취소라고요?”

마코토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어디 있답니까?”

“그런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하신 분은 남자였습니다.”

“남자요?”                  (P518-519)    

 

“그 골프 게임은 전국적으로 약 만 개가 팔렸지만, 우리가 만든 건 그중 절반뿐이고 나머지는 다른 회사에서 판매한 거야.”

“그럼 인베이더 때처럼 여러 회사가 베껴서 팔았다는 거네.”

“얘기가 좀 달라. 인베이더 때는 먼저 한 회사에서 만들어 팔다가 붐이 일자 다른 회사들도 복제해서 팔기 시작한 거였지. 그런데 골프 게임은 메가비트 엔터프라이즈라는 대형 메이커에서 발매된 것과 거의 동시에 해적판이 나돌기 시작했거든.”

“뭐라고?”

히로에가 구운 가지를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같은 시기에 똑같은 게임이 출시되다니........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

“그런 일이 우연히 생길 수는 없지. 누군가 사전에 프로그램을 입수해서 베꼈다고 봐야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도모히코 씨가 만든 건 오리지널이야, 아니면 해적판이야?”

히로에가 눈을 살짝 치켜뜨고 도모히코를 보았다. 

“그야 말할 필요도 없지.”

“그래, 그렇겠지.”

“어떤 루트를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네시로 일당이 게임의 개발 단계에서 프로그램과 설계도를 입수한 거였어. 그런데 프로그램이 불완전하니까 우리에게 완성해 달라고 했던 거지.”

“용케 지금까지 문제가 안 됐네.”

“문제가 안 되기는, 메가비트 사에서 눈이 벌게 가지고 해적판의 출처를 조사했다던데. 뭐, 하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했어. 상당히 복잡한 루트를 통해서 유통시켰나 봐.”

그 유통 루트라는 건 단적으로 말해 폭력 조직이 개입된 것이지만 히로에에게 거기까지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도모히코 씨나 기리하라 씨에게 불똥이 튈 걱정은 없는 거야?”

히로에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만일 경찰에 불려 가는 일이 생긴다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뗄 수밖에 없어. 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P54-541)   

  

'MUGEN'의 1985년 영업은 12월 31일 오후 6시에 종료되었다. 대청소를 한 후 도모히코는 기리하라, 히로에와 함께 조촐하게 건배했다. 히로에가 내년의 포부를 물었다. 

“게임기를 넘어서는 컴퓨터 게임을 만들고 싶어.”

도모히코가 그렇게 대답했다. 

기리하라의 대답은 이랬다. 

“낮에 바깥을 걸어 다니고 싶다.”

그 대답에 히로에는 초등학생 같다면서 웃었다. 

“기리하라 씨. 그 정도로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거야?”

“내 인생이 백야를 걷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백야라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기리하라는 하이네켄 맥주를 들이킨 후 도모히코와 히로에를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결혼 안 해?”

“결혼?”

도모히코는 하마터면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P571)

[2]

최근에 급격하게 발달한 컴퓨터 분야에서는 컴퓨터의 기능을 좀 더 인간의 두뇌에 가깝게 만들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타인과 스쳐 지나갈 때 상대와의 거리를 측정하며 걷지 않는다. 그때까지의 경험과 직감 등을 통해 걷는 속도와 방향을 ‘적당히’ 조절할 뿐이다. 그처럼 유연성 있는 사고력과 판단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이 바로 인공 지능이다. 

“엑스퍼트 시스템은 인공 지능의 용도 중 하나로, 전문가를 대신하게 하려는 것이지. 소위 전문가라든가 엑스퍼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단순히 지식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분야에서 다양한 노하우를 가졌잖아. 그것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축해서 초보자라도 그 시스템만 있으면 전문가처럼 판단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엑스퍼트 시스템이야. 현 단계에서 실용화된 것은 의료 엑스퍼트 시스템과 경영 진단 엑스퍼트 시스템 같은 것이 있지.”

나리타는 거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이해하겠어?” 라고 야마노에게 물었다.           (P11)  

   

마코토는 윗도리를 벗고 소파체 앉아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버튼을 눌렀다. 몇 초 후, 32인치 대형 화면에 찌부러진 열차 차량이 비쳤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영상이다. 지난달 중국 상하이 교외에서 발생한 열차 정면충돌 사고 장면이었다. 이어서 영상은 그 후의 경과를 전했다. 사고를 당한 열차에는 사립고치 학예 고등학교 수학여행단 193명이 타고 있었고, 그중 인솔 교사 한 명과 학생 26명이 사망했다. 

희생자의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중국 사이에 교섭이 계속되고 있으나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리포터는 전했다.                  (P16)   

  

의뢰인의 이름은 다카미야 유키호라고 했다. 여배우 뺨치리만큼 얼굴이 예쁜 여자다. 다만 그 표정은 다른 의뢰인들과 다름없이 어두웠다. 

“그러니까 남편 쪽에서 먼저 이혼하자고 했단 말이죠.”

“네.”

“그런데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냥 당신과는 같이 살 수 없다고만 할 뿐?”

“네.”

“뭔가 짚이는 건 없나요?”

이 질문에 의뢰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 같아요. 저......... 그 여자에 대해 알아봤어요.”

그녀는 샤넬 핸드백에서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사진에는 다양한 장소에서 밀회를 즐기는 남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머리에 7대 3 가르마를 낸, 착실한 회사원 같아 보이는 남자와 쇼트커트의 젊은 여자는 둘 다 무척 행복해 보였다. 

“이 여자에 대해 남편에게 물어봤나요?”

“아니요. 아직, 일단 상담부터 받아 보려고요.”

“그럼 당신은 헤어질 의사가 있는 건가요?”

“네, 더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 여자와 사귄 다음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데, 때로 폭력을...... 술에 취했을 때지만요.”                  (P75-76)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마에다는 시대가 확실히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스컴은 연일 거품 경제의 종언을 전하고 있었다. 주식이나 땅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도 앞으로는 그 꿈이 거품처럼 꺼지는 것을 보고 안색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이 나라도 조금은 조용해질지 모르겠다고 이마에다는 기대하고 있었다. 조금은 조용해질지 모르겠다고 이마에다는 기대하고 있었다. 고흐의 그림을 50억 엔 이상 주고 사다니,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는 증거다. 

다만 젊은 여성들이 사치하고 멋 부리는 건 별 변화가 없는 모양이라고 그는 로비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예전에는 골프 하면 남자들의 놀이였다. 그것도 어느 정도 지위를 쌓은 성인 남자들의 스포츠였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젊은 여자들에게 골프장을 완전히 점거당한 꼴이 됐다고들 한다. 실제로 이 연습장도 순번을 기다리는 골퍼의 절반은 여자였다.           (P82-83)    

 

전화를 끊은 이마에다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노즈카 가즈나리는 독신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외도 조사를 의뢰할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설사 연인의 외도를 감지했다해도 그걸 남의 힘을 빌려 확인할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골프 연습장에서 다카미야 마코토와 우연히 만난 날, 다카미야의 아내가 된 지즈루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시노즈카 가즈나리였다. 그날 그들은 셋이서 식사를 하려고 골프 연습장에서 만난 모양이었다. 물론 이마에다는 그 식사 자리에까지 끼지는 않았지만 연습장 로비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면서 세 사람과 잠시 대화를 나눴다. 시노즈카와도 그때 명함을 교환했다. 

그 후 이마에다는 골프 연습장에서 시노즈카와 두 번 정도 마주쳤다.              (P108)     


“이혼의 원인은 지즈루 씨인가요?”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노즈카는 입술 끝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이마에다는 팔짱을 끼고서 3년 전 일을 회상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조사를 마무리한 직푸에 다카미야가 아내와 헤어진 모양이다. 

“그런데 다카미야 씨의 전처가 이번에는 시노즈카 씨의 사촌 형과 교제하고 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우연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시노즈카 씨와 전혀 상관없이 사촌 형과 다카미야 씨의 전처가 만나서 사귀기 시작한 건가요?”

“아니요,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가 두 사람을 만나게 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이죠?”

“제가 사촌 형을 그녀의 가게로 데려갔거든요.”

“가게라면?”

“미나미아오야마에 있는 부티크입니다.”                  (P116-117)    

 

다카미야는 가라사와 유키호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말을 하고 났을 때 가와시마 에리코의 표정을 이마에다는 똑똑히 기억했다. 분명 엄청난 후회가 밀려오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이마에다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그럼 가리사와 유키호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나요?’ 라는 질문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몇 개의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후, 숨을 내쉬며 시노즈카가 아이스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절반 정도를 마셨다. 카랑,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짚이는 일이 없습니다. 그녀에게 고백을 받은 적도 없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은 기억도 없어요. 기껏해야 밸런타인데이에 으레 주는 초콜릿 정도 받은 게 전부인데 그것도 남자 부원 전원에게 준 거였어요.”

“시노즈카 씨에게 준 초콜릿에만 특별한 감정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죠.”

“아닙니다. 절대 아닐 거예요.”                   (P189-190)   

  

“그 사건의 결과로 가라사와 유키호는 라이벌인 그 학생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연적을 밀어내기 위해 똑같은 일을 벌였다,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시노즈카가 이마에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려보았다는 표현이 맞을 법한 시선이었다. 

“공상이라 해도 별 재미는 없군요. 가와시마 씨와 그녀는 친구였어요.”

“가와시마 씨야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과연 가라사와 유키호 씨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의문이군요. 저는 말이죠, 중학 시절 사건도 그녀가 꾸민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딱 맞거든요.”

시노즈카가 얼굴 앞에서 오른 손바닥을 펼쳐 이마에다의 말을 막았다. 

“그만하시죠. 제가 원하는 건 사실뿐입니다.”                     (P191)   

  

“이마에다 씨죠?”

남자가 물었다. 역시 간사이 지방 억양이다. 

“이마에다 나오미 씨죠?”

“그런데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습니까?”배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저음이었다. 미간을 중심으로, 마치 조각칼로 새긴 듯한 주름이 사방으로 퍼져 있다. 그중 하나가 칼에 베였던 흉터라는 것을 이마에다는 알아차렸다. 

“실례지만 댁은 누구시죠?”

“사사가키라고 합니다. 오사카에서 왔습니다.”

“오사카에서 여기까지요?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일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하는데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두세 가지 질문에 답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다음에 다시 오십시오. 정말 급하거든요.”

“그렇게 급한데 찻집에서는 그토록 느긋하게 신문을 읽고 있었군요.”

남자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P210-211)    

 

사사가키는 이마에다의 얼굴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메모지 한 장을 뜯어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은 후 이마에다 앞에 놓았다. 

“기리하라 로지. 오사카 시 주오 구 니혼바시 2-X-X, 무한.”

“기리하라 료지........ 무한은 뭡니까?”

“기리하라가 운영하던 컴퓨터 가게 이름입니다.”

“아..........”

사사가키가 또 한 장의 메모를 적어 이마에다 앞에 놓았다. 사사가키 준조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곳으로 연락하라는 뜻일 것이다.            (P225-226)     


마스다가 가게에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이마에다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3년 전의 일들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도자이 전장 주식회사의 관계자라는 인물에게 의뢰받아 작성한 조사 보고서의 복사물이다. 

그 조사가 벽에 부딪친 최대의 원인은 메모릭스사 직원이었던 아키요시 유이치라는 인물의 정체를 끝내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명도 경력도 출신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아키요시의 정체를 알게 됐다. 사사가키 형사가 보여 준 사진 속의 남자 기리하라 료지가 바로 전에 이마에다가 그토록 그 정체를 찾아 헤매던 아키요시 유이치임에 틀림없었다. 

컴퓨터 가게를 했다는 경력도 아키요시에게 어울리는 것이고, 그가 오사카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시기도 아키요시가 메모릭스사에 입사한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처음에 이마에다는 단순한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 추적했던 인물의 정체가 몇 년 후 전혀 별개의 조사를 하는 중에 뜻하지 않게 밝혀지는 것도 오래도록 이런 일을 하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그는 그것이 당치 않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도자이 전장이 의뢰한 조사와 이번 조사가 실은 그 뿌리에서 연결돼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애당초 가라사와 유키호에 대한 조사를 시노즈카로부터 의뢰받게 된 계기는 골프 연습장에서 다카미야 마코토를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골프장에 가게 된 이유는 3년 전에 아키요시를 미행하다가 따라간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카미야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다카미야는 아키요시가 감시하던 미사와 지즈루라는 여자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카미야 마코토의 당시 아내는 바로 가라사와 유키호였다. 

사사가키 형사는 기리하라 료지라는 사람이 가라사와 유키호와 공생 관계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 노형사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틀림없이 어떤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마에다는 기리하라 료지와 가라사와 유키호가 실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가정하에 3년 전의 조사를 돌이켜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대답은 금방 나왔다. 당시 유키호의 남편은 도자이 전장 특허 라이선스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사내 기술 정보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기밀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230-231)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이 건물은 출입이 완전히 금지됐어. 그런데 그렇게 꺼림칙한 건물인데도 임차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1층 한쪽에서부터 공사가 시작됐어. 동시에 건물 외벽에도 비닐 시트가 덮였고, 공사가 끝나고 그 비닐 시트가 벗겨 보니 외벽에 저렇게 외설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아키요시는 웃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아까 맥줏집에서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수상쩍은 남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어, 그들은 보는 사람이 없는지 힐끔힐끔 살피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곤 했지. 그 건물에 뭐가 생긴 건지 처음에는 잘 몰랐어.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모르더군. 어른들도 가르쳐 주지 않고 말이야. 그러다가 한 아이가 정보를 가져왔어. 여자들이 몸을 파는 가게인 것 같다는 얘기였어. 만 엔만 내면 여자에게 무슨 짓이든, 건물 벽에 있는 그림과 같은 짓도 할 수 있다는 거야. 나는 믿을 수가 없었어. 당시 만 엔이면 큰돈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지.”

입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아키요시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 

“순수했다고 해야 하나, 하기야 나는 그때 초등학생이었으니까.”

“초등학생이었다면 나도 충격을 받았을 거야.”

“난 충격 따위는 별로 받지 않았어. 다만 배웠을 뿐이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언지를 말이야.”

그는 별로 타들어 가지 않은 담배를 땅에 던지고 발로 짓뭉갰다. 

“쓸데없는 얘기를 했군.”

“그래서, 범인은 잡혔어?”

“범인?”

“살인 사건의 범인 말이야.”

“아아.”

아키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P332-333)  

   

“유키호가 후미요의 죽음을 바랐다는 겁니까?”

“후미요가 죽고 얼마 안 있다가 유키호는 가라사와 레이코의 수양딸이 됐어. 어쩌면 그 훨씬 전부터 그런 얘기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후미요는 거부했지만 유키호 자신은 수양딸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친엄마를 죽이겠어요?”

“유키호는 그런 짓을 태연하게 할 여자야. 그리고 엄마가 자살했다는 걸 숨겨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었지. 어쩌면 그녀에게는 그 이유가 더 컸을지도 몰라. 그건 바로 이미지 때문이야. 엄마가 사고로 죽었다고 하면 사람들의 동정을 끌수 있지만 자살했다고 하면 뭔가 있는 게 아니냐며 색안경을 끼고 보잖아. 앞날을 생각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뻔하지 않겠어?”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역시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네요.”

고가는 종업원을 불러 정종을 두 병 더 주문했다. 

“나도 그 당시에 곧바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건 아니야. 가라사와 유키호를 추적하다 보니 서서히 그런 생각이 굳어진 거지. 오호, 이거 맛있군. 뭐지, 이 튀김은?”         (P388-389)  

   

니시모토 유키호라는 소녀를 떠올리자 그녀가 배기관 속을 원숭이마냥 기어 다녔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아는 한 니시모토 유키호가 특별히 운동 능력이 뛰어난 소녀 같지는 않았다. 

역시 열한 살짜리 소녀를 살인범으로 지목한 건 자신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기쿠치 소년의 증언도 어린아이의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사사가키는 그렇게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배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여자아이가 그런 놀이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군요. 그 아이가 가라사와 유키호라면 더더군다나요.”

시노즈카 가즈나리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했다. 유키호의 성을 가라사와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옛날 버릇 때문이지 아니면 그녀가 자신과 같은 성이 됐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사사가키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완전히 벽에 부딪치고 말았죠.”

“하지만 결국 해답을 찾으신 거죠?”

“해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사가키는 두 개비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일단 초심으로 돌아가 봤습니다. 선입견을 전부 배제했죠. 그러자 지금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뭐죠?”

“간단합니다. 여자아이가 배기관 속을 통과하는 건 무리다. 즉 현장에서 배기관을 통해 탈출한 건 남자아이다, 라는 거죠.”

“남자아이........”

그 말의 의미를 음미하듯이 잠시 말이 없던 시노즈카 가즈나리가 물었다. 

“기리하라 료지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사가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얘깁니다.”                          (P438-439) 

    

노리코가 이마에다 탐정 사무실을 찾은 것은 지난 9월이었다. 그로부터 약 2주 전에 아키요시 유이치가 모습을 감췄다. 조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저 갑자기 사라졌다. 사고가 아니라는 것은 금세 알았다. 우편함에 집 열쇠가 담긴 봉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짐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애당초 많지도 않았고 귀중품이랄 만한 것도 없었다. 

아키요시가 이 집에 살았었다는 걸 증명해 주는 유일한 물건은 컴퓨터였다. 그러나 노리코는 컴퓨터를 다룰 줄 몰랐다. 고민 끝에 그녀는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를 집으로 불러, 수상하게 여길 걸 알면서도 그의 컴퓨터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프리 라이터로 일하는 친구는 컴퓨터 본체뿐 아니라 방치돼 있던 플로피 디스크들까지 살펴본 뒤 “안 되겠어, 노리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백지상태고 플로피 디스크 역시 텅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키요시를 찾아낼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노리코는 언젠가 그가 들고 온 빈 파일을 생각해 냈다. 그 파일 겉장에는 ‘이마에다 탐정 사무실’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P469)  

   

그러자 유키호는 그 커다란 눈으로 나쓰미를 똑바로 보았다. 

“있잖아. 나쓰미. 하루 중에는 태양이 떠 있을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잖아.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낮과 밤이 있어. 물론 실제 태양처럼 일출과 일몰이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건 아니지. 사람에 따라서는 늘 태양이 비치는 사람도 있어. 내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사람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그때껏 떠 있던 태양이 져 버리는 거야. 자신을 비추고 있던 빛이 사라지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지. 지금 나쓰미가 바로 그래.”

유키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이해가 갔다. 나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있잖아.”

유키호가 말을 이었다. 

“태양 아래서 산 적이 없어.”

“설마요.”

나쓰미가 웃었다. 

“사장님이야말로 늘 태양이 가득하지 않아요?”

그러나 유키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눈에 진지함이 어려 있어 나쓰미도 웃음을 거뒀다. 

“내 위에 태양 따위는 없었어. 언제나 밤이었지. 하지만 어둡지는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환하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충분했어. 난 그 빛 덕분에 밤을 낮이라 생각하며 살 수 있었고, 이해하겠어? 애당초 내게 태양 같은 건 없었어. 그래서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없었지.”

“태양을 대신하는 게 뭐였는데요?”                        (P496-498)  

   

기리하라 료지의 혐의는 살인.

예의 선인장 화분에서 나온 유리 조각을 본 순간 사사가키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쓰우라가 실종될 당시의 복장이었다. 몇 사람이 “그는 초록색 렌즈의 래이밴 선글라스를 자주 끼고 다녔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사사가키는 고가에게 부탁해 유리 조각을 분석하도록 했다. 그의 직감이 옳았다. 그것은 래이밴 렌즈임에 틀림없었고, 거기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지문도 마쓰우라의 집에서 채취한 그의 지문과 매우 흡사했다. 그 일치율이 90퍼센트가 넘었다. 

왜 그 화분에 마쓰우라의 선글라스 조각이 들어 있었을까. 짐작컨대 선인장의 원래 주인인 가라사와 레이코가 화분에 흙을 담을 때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그 흙은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화분 전용 흙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면 자택 마당의 흙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가라사와 레이코의 집 마당을 파헤치려면 수색 영장이 필요했다. 그만한 근거로 영장을 청구할지 말지 판단하기란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결국 수사 1과장인 고가가 결단을 내렸다. 현재 가라사와가에 거주자가 없다는 사실이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사사가키는 나이 든 전직 형사의 집념을 믿어 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수색은 어제 실시됐다. 가라사와가의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바로 밑에 맨땅이 드러난 곳이 있었다. 수색 전문가들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곳부터 파기 시작했다. 

약 두 시간 후, 1구의 백골 사체가 발견됐다. 옷을 입지 않은 나신으로, 사후 7,8년이 경과된 것으로 보였다. 

현재 오사카 부경은 과학 수사 연구소의 힘을 빌려 사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적어도 마쓰우라 이사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P516-517)     

기리하라 요스케의 백만 엔은 니시모토 후미요에게 줄 거래 대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더러 애인이 되어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녀의 딸을 양녀로 삼게 해 주는 대가로 건네는 돈이었다. 그녀의 딸과 관계를 가져 본 기리하라 요스케는 어떻게든 그 아이를 자기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요스케가 돌아간 후 후미요는 공원에서 혼자 그네를 탔다고 했다. 그때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기리하라 요스케는 후미요와 얘기를 끝낸 후 도서관으로 갔다.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미소녀를 데리러 간 것이다. 

그 후의 경과를 사사가키는 머릿속에 확실하게 그릴 수 있다. 기리하라 요스케는 소녀를 데리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과연 저항했을까, 별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사가키는 추측한다. 요스케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네 엄마에게 백만 엔을 줬단 말이야.

그 먼지 가득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있다면.

료지가 그때 우연히 배기관 속에서 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집 2층에서 빠져나간 그는 도서관으로 갔을 것이다. 아마 그 전에도 그는 종종 그런 식으로 유키호를 만났을 것이다. 자신의 자랑인 종이 그림을 보여 주기도 하면서, 그 도서관만이 두 사람이 마음을 쉴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사건이 있었던 날 료지는 도서관 근처에서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아버지가 유키호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미행했다. 두 사람은 그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서 뭘 하는 것일까. 소년은 말할 수 없이 불안했다. 엿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결국 그는 배기관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 경악할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순간 소년에게 그의 아버지는 추악한 하나의 짐승에 불과했을 것이다. 슬픔과 증오가 소년을 지배했을 것이다 사사가키는 사체에 남아 있던 상처를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소년의 마음의 상처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후 료지는 유키호를 도망치게 했다. 문 안쪽에 벽돌을 쌓은 것은 사건이 발각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소년의 지혜였을 것이다. 그 후 그는 다시 배기관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배기관 속을 기어 다녔을지를 생각하면 사사가키는 가슴이 저려 온다. 

그 후 소년과 소녀 사이에 어떤 약속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약속이랄 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사사가키는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혼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그 결과 유키호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료지는 지금도 어두운 배기관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P525-527) 

    

사사가키는 료지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을 뒤집어 젖혔다. 그 순간 또 한 번 비명이 울렸다. 

기리하라의 가슴에 무언가 꽂혀 있었다. 피에 물들어 식별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사사가키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던 가위,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가위였다. 

구급차를, 이라고 누군가 외쳤다. 이어서 사람들이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사사가키는 알고 있었다. 사체란 그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져서 사사가키는 고개를 들었다. 유키호가 서 있었다. 그녀가 눈처럼 하얀 얼굴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남자는 누굽니까?”

사사가키가 그녀의 눈을 보며 물었다. 

유키호의 얼굴은 인형마냥 표정이 없었다. 그런 얼굴로 그녀가 대답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르바이트 생은 점장이 알아서 채용하니까요.”            (P5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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