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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13. 2024

저지 코신스키의 <정원사 챈스의 외출>

영화 <찬스Being There>  1979년

영화 <찬스Being There>는 할 애슈비가 연출하고, 피터 셀러스와 셜리 맥클레인이 주연을 맡아 1979년에 개봉했다.     

일요일이었다. 챈스는 정원에 있었다. 그는 녹색 호스를 잡고 이 샛길 저 샛길 천천히 누볐다. 그는 호스 물줄기를 신중히 지켜보며 정원의 풀과 꽃과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적셨다. 아주 부드럽게, 식물도 사람과 같았다. 살아가고, 병을 이겨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으려면 그들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했다. 

그러면서도 식물은 사람과 달랐다. 식물은 자신에 대해 생각할 줄도, 자신을 알 줄도 모른다. 식물에게는 자기 얼굴을 알아 볼 거울도 없고, 고의를 행할 의사도 없다. 식물은 그저 자라기만 한다. 따라서 식물의 생장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식물은 사고를 하지도, 꿈을 꾸지도 않으므로.

정원 안은 안전하고 무사했다. 정원은 높다란 붉은 벽돌담으로 거리와 격리되어 있었다. 거기서 담은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지나가는 차 소리도 담을 넘어 이곳의 고요를 깨지 못했다. 챈스도 거리 따윈 관심 없었다. 집과 정원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본 적이 없었지만 담 너머의 삶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르신이 거처하는 곳은 집의 앞쪽이었다. 거기도 담이나 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챈스는 거기서 누가 사는지 죽는지 모르고 살았다. 정원에 면한 1층 뒤편에는 하녀가 살았다. 홀 건너편에 챈스의 방과 욕실이 있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있었다. 

챈스가 정원을 좋아하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느 때든 좁다란 샛길이나 덤불과 나무 사이에 있다 보면, 앞으로 가고 있는지 뒤로 가고 있는지, 아까 지난 곳보다 여기가 앞인지 뒤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이리저리 떠돌 수 있었다. 그저 자라는 식물처럼, 그만의 시간 속에서 움직였고, 그것만이 중요했다.                  (P11-13)     

그때는 TV도 없었다. 홀은 대형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꼬마 때 모습과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어르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도 어르신의 머리는 백발이었고, 두 손은 구겨놓은 것처럼 쭈글쭈글했다. 어르신은 숨을 무겁게 몰아쉬었고, 말을 하다가 자주 멈췄다. 

챈스는 방들을 지나 걸었다. 방들은 공허했다. 창문에는 커튼이 무겁게 드리워 있었고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는 낡은 리넨 침대보를 덮어쓴 거대한 가구들과 베일을 걸친 거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르신이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이 그의 기억 속에 단단하 뿌리처럼 박혀 있었다. 챈스는 고아였다. 챈스를 아이 적에 이 집에 데려와 거두어준 사람이 바로 어르신이었다. 챈스의 엄마는 챈스를 낳고 죽었다. 아무도, 심지어 어르신조차도, 누가 그의 아버지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만, 챈스는 결국 글을 깨치지 못했다. 남들이 그에게 하는 말이나 그의 주변에서 떠드는 말들도 대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정원에서 일할 운명이었다. 그는 거기서 초목과 화초를 돌봤고, 그것들은 거기서 평화롭게 자랐다. 그도 정원의 초목 중 하나와 같았다. 그는 말이 없었고, 해를 향해 가슴을 열었고, 비가 오면 무겁게 젖었다. 그의 이름이 챈스인 것도 우연히, 어쩌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에겐 가족이 없었다.                     (P16-17)  

   

시간이 흘렀다. 챈스가 TV를 보고 있는데 위층에서 낑낑 용을 쓰는 소리들이 들렸다. 남자들이 어르신의 시신을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챈스는 방을 나와 홀 앞의 큼직한 조각상 뒤에 몸을 숨기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르신이 갔다. 이제 누군가가 앞으로 이 집은 어떻게 될지, 새 하녀와 챈스는 또 어떻게 될지 결정을 내려주어야 했다. TV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온갖 종류의 변화들이 일어났다--친척들과 은행 관계자들과 변호사들과 업자들이 떼로 몰려와 벌여놓는 변화들.

하지만 이날이 다 지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챈스는 저녁을 간단히 먹고, TV쇼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P23-24)     

프랭클린 씨가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도통 모를 일이네요, 챈스 씨.” 그는 들여다보는 서류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선생님 성함이 저희 기록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요. 고인과 한 번이라도 거래가 있었던 사람들 중에 챈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챈스 씨, 선생님이 이 댁에 고용되어 있다는게 틀림없는 사실인가요?”

챈스는 아무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여기서 평생 정원사로 일했어요. 평생 집 뒤에 있는 정원에서 일 했어요. 아이 적부터 일했어요, 그때는 나무들도 작았고, 산울타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정원을 한번 보세요.”

프랭클린 씨가 재빨리 챈스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 집에 입주해서 일하는 정원사가 있었다는 언급은 여기 일언반구도 없어요. 저희 법률사무소가 저와 헤이스 양을 고인의 유산 집행인으로 선임했습니다. 고인의 모든 자산과 물품에 대한 법적 권리는 저희에게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변호사는 말했다. “챈스 씨가 이곳에 고용 상태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분명한 건, 과거 40년간 이 집에 남자가 고용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겁니다. 전문 정원사십니까?”

“나는 정원사예요.” 챈스가 말했다.                    (P28-29)  

   

그는 비명을 지르며 후진하는 자동차의 트렁크를 주먹으로 탕탕 두들겼다. 리무진이 급히 후진을 멈췄다. 챈스의 오른쪽 다리만 범퍼 위에 올라가 있고, 왼쪽 다리는 여전히 차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땀이 온몸을 적셨다. 

리무진 운전사가 황급히 차에서 뛰어내렸다. 제복 차림에 모자를 손에 벗어 든 흑인이었다. 기사는 몇 마디 우물대다가 챈스의 다리가 자동차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그는 도로 차로 뛰어가 차를 앞으로 조금 뺐다. 챈스의 종아리가 빠졌다. 챈스는 두 발로 서보려 하다가 그만 보도 가장자리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즉시 리무진의 뒷문이 열리더니 호리호리한 여자가 내렸다. 여자가 챈스 위로 몸을 굽혔다. 

“어떡하죠? 많이 다치셨나요?”

챈스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TV에서 이렇게 생긴 여자들을 많이 보았다. 

“다리만 좀.” 챈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리가 좀 으스러진 것 같아요.”

“하나님 맙소사!” 여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실례지만 제가 볼 수 있게 바지를 좀 올려보시겠어요?”

챈스는 왼쪽 바지를 당겨 올렸다. 종아리 가운데가 벌써 검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뼈가 부러진 건 아니어야 할 텐데.” 여자가 말했다. “뭐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요. 저희 기사는 지금껏 한 번도 사고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괜찮습니다.” 챈스가 말했다. “이제 좀 나아진 것 같아요.”

“저희 남편이 병석에 있어서, 저희 집에 의사와 간호가사 여러 명 묵고 있어요. 제 생각에 선생님을 당장 저희 집으로 모셔가는 게 최선일 것 같아요. 물론 선생님이 주치의한테 가고 싶으시다면 그래야 하겠지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저희 집 의사가 봐도 될까요?”

“저는 상관없어요.”

“그럼 가요.” 여자가 말했다. “의사가 보고 병원에 가라고 하면 그때는 바로 병원으로 모실게요.”

챈스는 여자가 내민 팔에 의지해서 리무진에 올랐다.                (P44-45)  

   

“적당한 장소를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선생님.” 챈스가 말했다. “적당한 장소, 간섭 없이 일하고 계절과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정원은 쉽게 얻을 수 없어요. 그런 기회들이 지금껏 많이 남아 있을 리 없죠. TV에서는......." 챈스는 말이 막혔다. 그러다 할 말이 생각났다. ”정원을 본 적이 없어요. 숲과 정글과 때로 나무 한두 그루는 봤어요. 하지만 제가 가꿀 수 있고, 제가 심은 것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정원은.......“ 챈스는 문득 슬퍼졌다. 

랜드 씨가 식탁 너머로 몸을 굽혔다. 

“말씀 한번 잘했소. 가디너 씨, 촌시라고 불러도 되겠지? 정원사라! 진정한 비즈니스맨을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더 완벽한 말이 있을까! 맨손의 노동으로 자갈밭을 열매 맺는 땅으로 바꾸는 사람! 척박한 땅에 이마에서 흐르는 땀으로 물을 주고, 자신의 가족과 지역사회에 가치 있는 장소를 창조하는 사람! 그래요, 촌시, 기막힌 비유였소! 생산적인 비즈니스맨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포도밭에서 힘써 일하는 일꾼이오!”

챈스는 랜드 씨의 열렬한 반응에 마음이 놓였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P58)   

  

챈스는 스튜디오의 배경에 묻혀 이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카메라들과 청중을 마주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그대로 자기 자신을 맡겨버렸다.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고, 거기 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서 제거된 기분이었다. 카메라들이 그의 몸을 훑고, 그의 동작을 낱낱이 녹화해 그 이미지들을 세상에 수없이 흩어져 있는 TV화면들 속으로 --방으로, 자동차로, 배로, 비행기로, 거실로, 침실로-- 소리 없이 던져주고 있었다. 그가 평생 만날 수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결코 만나지 못할 사람들까지 모두, 그를 보게 됐다. TV로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하기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를 알겠는가? TV는 오직 사람들의 외관만 비출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몸에서 계속 이미지들을 벗겨낼 뿐이었다. 급기야 그들이 시청자의 눈이라는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릴 때까지 계속, 카메라의 무감한 삼중 렌즈들이 권총 주둥이처럼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챈스는 이 카메라들 앞에서 수백만 명의 진짜 사람들을 위한 그저 하나의 이미지가 됐다. 챈스의 생각은 방송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진짜 사람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챈스에게도 시청자들은 그저 그의 생각이 투영된 이미지들로만 존재했다. 챈스도 그들이 얼마나 진짜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들을 만난 적도 없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도 알 도리가 없으므로.

챈스의 귀에 진행자의 말이 들어왔다.                 (P89-90)   

  

“나는 글을 못 써요.” 

스티글러가 웃기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그러시겠죠--하지만 요즘 제대로 글 쓰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출판사 최고의 에디터들과 자료조사원을 붙여 드리죠. 저도 우리 집 애들한테 간단한 엽서 한 장도 못 써요. 다 그렇죠 뭐.” 

“나는 읽지도 못해요.”

“물론 그러시겠죠!” 스티글러가 외쳤다. “요즘 누가 읽을 시간이 있나요? 그저 다들 훑어보고, 말로 때우고, 듣고, 볼 뿐이죠. 가디너 씨, 출판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 출판업은 딱히 꽃피는 정원이 아니랍니다.”

“그럼 어떤 정원인가요?” 챈스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음, 과거에 어떤 정원이었든 지금은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자라고, 여전히 확장하고 있죠. 하지만 너무 많은 책들이 잡다하게 나와요. 거기다 불황에, 경기침체에, 구직난까지.....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더는 책이 팔리지 않아요. 하지만 선생님 정도 키의 나무라면 아직 넉넉히 땅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럼요, 제 눈엔 아이돌런 출판사 로고 아래 활짝 꽃피운 촌시 가디너 나무가 보입니다! 우리 생각과 우리 금액을 대략 적어서 짤막한 편지 한 통 띄워드리죠. 아직 랜드 씨 댁에 계시죠?”

“네, 맞아요.”                        (P141-142)  

   

카르파토프는 머뭇대며 말했다. “대사 동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백악관에서도 우리가 가디너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려 혈안이 됐다고 합니다. 그건 가디너의 정치적 비중이 역대급이라는 뜻입니다.”

스크라피노프는 카르파토프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뒤를 이리저리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가 특수부에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요. 가디너에 대한 사실들.”

카르파토프는 뚱하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대사 동지.” 그가 입을 열었다. “그자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보고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대사의 손이 책상을 내리쳤다. 작은 조각상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카르파토프는 벌벌 떨며 몸을 굽혀 조각상을 집어서 다시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누구한테 약을 팔아!” 대사가 이를 갈았다. “나한테 그따위 속임수가 통할 것 같아? 난 인정 못 해! 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 가디너가 하필이면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고, 하필이면 이 나라는 소비에트의 그루지야가 아니라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국가 미합중국이라는 거, 알아, 몰라? 가디너 같은 사람들이 매일 수백만 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 자네 제정신이야? 내가 이 남자를 내 연설에 언급한 거, 알아, 몰라?”

스크라피노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카르파토프를 향해 몸을 숙였다. 

“나는 자네 부서 사람들과 달라. 나는 20세기 판 ‘망령들’을 믿지 않아. 미국 TV프로에 나오는 외계인들, 다른 행성에서 내려와 우리 속에 숨어 산다는 존재들도 믿지 않아. 자네한테 명령하네. 네 시간 내에 촌시 가디너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내 앞에 직접 대령하도록!”

카프파토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대사 집무실을 나왔다.             (P165-166)    

 

그룬만이 다시 전화했다. 

“대통령님.” 그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희의 애초 염려가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가디너의 출생, 부모, 가족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의심의 여지 없이 알 수 있으며 제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개인이나 단체와도 법적 문제로 얽힌 적이 없다는 겁니다. 개인조직, 국가조직, 연방보직, 기업, 정부기관 어디와도 연루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어떤 사고나 피해의 원인이 된 적도 없고, 랜드 씨 댁 차량에 당한 사고 외에는 어떤 교통사고에도, 당사자로서도 제3자로서도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입원한 적도, 보험에 가입한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인적 서류나 신분증명서도 가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동차 운전면허도 비행기 조종면허도 없고, 어떤 종류의 자격증도 그에게 발급된 적이 없습니다. 신용카드도, 수표책도, 명함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 그의 명의로 된 자산도 전혀 추적되지 않습니다..... 대통령님, 실은 저희가 뉴욕에서 그를 좀 염탐했는데, 전화로든 사담으로든 사업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거라고는 TV시청밖에 없습니다. 그의 방에는 TV가 항상 켜져 있고, 끊임없이 시끄러운 소리가........”

“뭐라고?” 대통령이 말을 끊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월터?”

“항상 TV를 본다고 했습니다. 모든 채널을요, 사실상 한시도 쉬지 않고요, 심지어 랜드 부인이...... 그와 함께 침실에 있을 때도......”

대통령은 그룬만의 말을 사납게 잘랐다.                (P174-175)     

챈스는 춤추는 남녀들을 헤치고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대연회장의 이미지들이 희미하고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뷔페의 다과 쟁반들, 울긋불긋한 꽃들, 밝은 빛깔의 술병들, 테이블 위에서 끝없이 줄지어 빛을 뿜는 유리잔들. 그의 눈에 EE가 들어왔다. 그녀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어떤 키 큰 장군과 포옹하고 있었다. 챈스는 카메라 플래시가 토하는 눈부신 불길 속을, 구름 속을 빠져나오듯 빠져나왔다. 그가 정원 밖에서 본 모든 것들의 이미지가 희미해져갔다. 

챈스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촌시 가디너의 시든 이미지를 보았다. 고여 있는 빗물 웅덩이에 던져 넣은 막대기가 그 이미지를 부쉈다. 그 자신의 이미지도 사라졌다. 

그는 홀을 가로질렀다. 열린 창문을 통해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챈스는 육중한 유리문을 밀어서 열고 정원으로 걸아나갔다. 새순이 가득 달린 탄탄한 가지들, 막 움튼 작은 꽃봉오리를 머리에 인 호리호리한 줄기들. 정원은 고요했고, 아직 휴식에 잠겨 있었다. 연기 가닥 같은 구름들이 지나가고 윤이 나는 달만 남았다. 가끔씩 나뭇가지들이 바스락대며 물방울들을 흩뿌렸다. 울창한 초목에 떨어진 산들바람이 축축한 잎들 아래로 파고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챈스의 뇌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평화만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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