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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20. 2024

피넬로피 피츠제럴드의 <북샵>

영화 <북샵>  2017년

<북샵>(The Bookshop)은 2017년 공개된 드라마 영화이다. 퍼넬러피 피츠제럴드의 1978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잉글랜드 서퍽주 하드버러에 서점을 여는 과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에밀리 모티머, 퍼트리샤 클라크슨, 빌 나이 등이 출연한다. 제32회 고야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수상하였다. 

    

“...마을 분들은 올드하우스가 어떤 용도로 쓰이길 바라죠? 왜 7년 가까이 관리도 하지 않고 방치했나요? 그 이유는 뭐죠? 건물 지붕은 이미 절반즘 무너져 내렸고, 안에는 까마귀가 둥지를 튼 데다 쥐들이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어요. 그렇게 방치할 바에는 마을 사람들이 책을 구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 마을의 문화발전에 공헌하시고 싶습니까?”

키블이 존경과 연민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 정도까지 거창하지는 않아요. 물론 문화는 중요한 거죠. 하지만 적자를 보면서까지 서점을 운영할 생각은 없어요. 셰익스피어도 비영리적으로 글을 쓰지 않았잖아요.”             (P15)        

  

“그린 부인, 잠깐 이 녀석의 혀를 손으로 꽉 잡아주겠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부인은 겁 없는 사람이니까 가능할 거요.”

“제가 겁 없는 사람인지 어떻게 아시죠?”

“서점을 연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졌더군요. 용기는 없고 겁만 있으면 그런 무모한 도전은 절대로 못하지요.”            (P22)       

   

가맛 부인은 올드하우스 문제가 자기 의도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는 플로렌스가 자기 말을 순순히 따를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말씨와 태도만 고분고분 할 뿐이었다. 하지만 가맛 부인은 머지않아 플로렌스가 뜻을 굽힐 거라고 생각하고는 마일로가 또 한 차례 권하는 샴페인을 받아 들었다.       (P51)     

     

플로렌스는 인간 세상은 절멸시키는 자와 절멸당하는 자로 나뉘어 있고, 언제나 절멸시키는 자가 우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안 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플로렌스는 울적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플로렌스는 더 이상 무너져내릴 수 없었다.             (P63)   

       

‘보이지 않는 존재’는 마을 사람들 같은 ‘보이는 존재’만큼이나 쓸데없는 참견을 좋아했고, 플로렌스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아무리 래퍼나 마을 사람들이 방해 공작을 펴도 반드시 서점을 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P66)      

    

“다들 제가 올드하우스를 나갈 거라고 생각하나 보네요. 확실히 말할게요. 제집은 올드하우스뿐이에요. 낡은 건물이지만 제게는 하나밖에 없는 집이라고요.”        (P68-69)          


“언니가 한 명 더 있지 않니?”

“그 언니는 집에서 마거릿과 피터랑 노는 걸 좋아해요. 둘 다 어리거든요. 제 동생들이고요. 그딴 이름을 붙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런다고 마거릿 공주나 그 연인 피터 타운센드 공군 대령 같은 인물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요.”(P100)    

 

플로렌스는 매일 아침 서점 문을 열 때마다 행운과 적당한 기회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기핑 씨네 채소밭처럼 말끔히 정돈된 책들은 언제라도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P135)     

“크리스틴, 왜 그래? 무슨 일이냐고?”

크리스틴이 다가오자 플로렌스가 다그쳐 물었다. 크리스틴의 얼굴은 가맛 부인보다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윈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스테드에서 사는 가맛 부인 있잖아요. 그 사람이 새치기를 하려고 했어요. 게다가 다른 사람 책을 함부로 집어서 들춰도 봤고요. 마치 자기 책인 것처럼요. 그것도 모자라 분홍색 대출 카드를 마구 흩트려놨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규칙대로 했죠. 가맛 부인의 손가락 관절을 이걸로 냅다 때렸어요.”

크리스틴은 학교에서 쓰는 도널드 덕이 그려진 기다란 자를 들고 있었다.

(...)

플로렌스가 곧바로 서점을 뛰쳐나가서 가맛 부인에게 사과했다면 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그보다 먼저 크리스틴을 위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손님 말대로 그녀는 어린 크리스틴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겼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하지만 그 독을 없애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크리스틴에게 더 많은 일과 권한을 주는 것이었다.                (P146-147)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는 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다 저를 위해서 그러는 거겠죠.”

“댁을 위해서라고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브런디시 씨는 묵직한 티스푼으로 테이블을 탁 소리 나게 내리쳤다.

“가맛 부인은 거기에다 예술 센터를 열고 싶어 하더군요. 대체 예술에 무슨 센터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여자는 댁을 내쫓을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분이 그렇게 생각해도 제가 당장 피해를 입는 건 없습니다.”

“댁은 압력과 권력을 혼동하고 있군요. 가맛 부인은 탄탄한 연줄에 유력한 인물을 많이 알고 있는 권력자입니다. 자, 이 말을 들으니까 경계해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은 들지 않나요?”

“아니, 전혀요.”             (P162)   

       

“굳이 말하자면, 저는 옳고 그름에 댁만큼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지 않아요. 물론 <롤리타>는 읽었습니다. 좋은 작품이더군요. 하드버러 사람들에게 팔아도 될 겁니다. 작품을 충분히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요. 모든 걸 이해하면 정신이 나태해지기 마련입니다.”                (P163)    

      

“저는 스스로 뭔가를 결정할 때 시간을 충분히 들이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이 힘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얼 존경하는지 말씀드리지요. 신이나 동물도 가지고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인간이 지닌 미덕, 굳이 미덕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겠으나 아무튼 지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기이지요. 그린 부인, 댁은 용기가 아주 대단한 사람입니다.”

플로렌스는 오후의 누그러진 햇빛 가운데 앉아 홍차가 묻은 잔과 먹다 남은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바라보면서 고독한 영혼이 또 다른 고독한 영혼에게 말하는 이 시간과 브런디시 씨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묘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브런디시 씨의 말은 그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와 플로렌스에게 대답할 틈을 주듯 느릿느릿, 그리고 드문드문 이어졌다.            (P164-165)  

        

브런디시 씨는 서점이 잘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구태여 걱정 속에 파묻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으니까요.”

“정말 무서운 사고방식이군요.”

브런디시 씨가 들릴락 말락 나지막이 속삭였다.           (P166)       

   

좋은 책은 위대한 영혼에 흐르는 고귀한 혈액인 만큼 세대를 뛰어넘어 길이길이 전해지도록 방부 처리하여 소중히 보관해야 합니다. 당연히 책도 생활에 꼭 필요한 겁니다. 생활필수품이란 말입니다.(P174)     


플로렌스에게 용기가 있다면, 그것은 비상시든 평상시든 변함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가맛 장군이나 자신의 세계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바깥세상과 담쌓고 지내는 브런디시 씨와는 사뭇 다를 터였다. 말하자면 플로렌스의 용기는 살아남기 위한 강한 의지에 지나지 않았다.   (P175)   

  

위원회 측에서 인용한 상점법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14세에서 16세 사이의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법입니다. 크리스틴 기핑은 이제 11세입니다. 11세가 아니면 초등학교에 다닐 리가 없잖습니까.(P194)     

하지만 올드하우스는 책을 위한 공간이자 플로렌스의 집이었다. 플로렌스는 책과 함게 평생을 올드하우스에서 살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P199)     

     

“플로렌스 그린 씨를 내버려 두세요.”

브런디시 씨가 뜬금없이 말했다.

가맛 부인은 당황한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브런디시 씨는 이 마을의 발전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 물을 좀 더 유의미한 용도로 써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 대목에서 부인은 잘못 판단했다. 브런디시 씨 입장에서 마을의 발전과 전통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드버러는 브런디시 씨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에게 그렇듯 하드버러에 대해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된 것과 역사적 가치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둘이 같다면 저나 댁이나 지금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겠지요.”

(...)

브런디시 씨는 앞에 앉은 여자가 바보 아니면 악마일 거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제가 어떻게 도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도움 줄 생각이 아예 없다는 말이군요.”

바이올렛 가맛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브런디시 씨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곡하게 또는 솔직하게 말해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말해봐야 브런디시 씨에게 속내를 간파당할 게 뻔했다. 바이올렛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의 매력이 통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앞뒤 꽉 막힌 고지식한 노인일지라도 호의적인 미소를 보이면 태도가 달라질 터였다. 바이올렛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함께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때 태도가 변하지 않은 남자는 그때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남자도 그녀의 미소 앞에서는 한껏 부드러워졌다.

“브런디시 씨,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결국은 저한테 인정머리 없는 여자라고 말씀하신 거잖아요. 안 그런가요?”

브런디시 씨는 바이올렛 가맛이 ‘인정머리 없는 여자’인지 아닌지 따져보는 듯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보석을 쥐고 그 가치를 감정하는 사람 같았다.

“긍정도 수긍도 못하겠군요. 그런데 ‘인정머리 없다’는 말은 ‘정나미 떨어진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듭니다. 가맛 부인, 유감스럽게도 댁은 정나미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제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어요.”                 (P227-233)           

애도의 뜻을 나타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난 듯 장군의 말투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알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날 아침 그분이 저희 집에 찾아왔어요.”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나 보네요.”

“맞습니다. 바이올렛이 말하더군요. 브런디시 씨가 힘들게 방문한 이유는 예술 센터를 기획한 자기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구요. 저도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솔직히 그분이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보다 열두 살 많지만 어쨌든 훌륭한 분을 잃었습니다. 누구나 그분처럼 쓰러질 날이 있겠으나 정말 아깝습니다.”              (P237)   

       

플로렌스는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패배한 건 사실이지만 지칠 대로 지친 탓에 괴롭지도 않았다. 보상금을 받으면 은행 대출금을 갚고 새로운 건물을 찾았을 때 계약금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플로렌스는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브런디시 씨도 결국은 예술 센터를 신설하는 일에 찬성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보상금과 관련된 통지문을 읽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쓰렸다.              (P240)      

    

결국 플로렌스는 서점도 잃고 책도 잃었다. 남은 것은 그야말로 몸뿐이었다.    (P245)     

     

플로렌스는 10시 46분에 플린트마켓에서 리버풀스트리트 역을 향해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가 플랫폼을 빠져나갈 때 좌석에 앉은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결국 그녀가 10년 가까이 거주한 마을은 서점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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