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북과 남North & South> 2004년
BBC에서 2004년도에 방영된 드라마이다.
〈남과 북〉의 여주인공 마거릿은 남부의 시골 교구 목사의 딸이지만 아버지가 신앙적 갈등으로 목사직을 그만두면서 북부의 도시 밀턴(맨체스터가 모델이다)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아버지로부터 교습을 받는 사업가 손턴을 만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부정적인 첫인상을 갖는다. 아직 전통적인 신분의식을 갖고 있던 마거릿은 상인이나 사업가를 혐오했는데 그들은 벼락부자가 된 하층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손턴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아버지가 빚과 불명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열네 살 때부터 절약과 노동으로 가장 노릇을 대신했고, 그런 모습이 투자자의 눈에 띄어 유망한 사업가가 된 인물이었다. 손턴에게 마거릿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오만한 아가씨로 비쳤다.
소설의 서사는 마치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처럼 두 사람의 ‘오만과 편견’이 해소되고 사랑을 확인하면서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화해가 계급적인 화해의 뜻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마거릿은 노동자 부녀와 만나면서 이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되고, 처음에 노동자들의 요구에 냉혹하게 맞섰던 손턴도 노동자들과의 대치 상황에서 자기 대신 돌을 맞고 쓰러진 마거릿의 희생에 감동을 받아 차츰 그들의 현실에 공감하게 된다.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많은 유산을 상속받은 마거릿이 손턴이 사업가로서 재기하게끔 도와주는 결말은 개스켈이 상상한 산업자본주의의 유토피아가 어떤 것인가를 엿보게 한다.
위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밀턴에 정착했고 얼마 동안은 연기와 안개를 견뎌야만 했다. 실은 두꺼운 안개처럼 불확실한 재정 형편 때문에 그들에게 다른 모든 삶은 막혀버린 것 같았다. 불과 어제 헤일 씨는 이사와 헤스턴에서 보름간의 체류에 들어간 지출을 합산하면서 대경실색했고, 여유자금으로 갖고 있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이 그 비용으로 거의 빠져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맙소사! 이곳에 그들이 있었고, 이곳에 그들은 남아야 했다. (P104)
밀턴에서는 사내애를 훌륭한 장사꾼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이유가 충분해 보이는 이 통념에 따라 사내애는 일찌감치 붙잡혀 공장이나 사무실 혹은 창고 생활을 익혀야 했다. 사내애가 스코틀랜드의 대학 정도만 다녀도 돌아와서 상업에 종사할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18세나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갔다면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따라서 대부분의 제조업자는 아들들의 기운과 활력이 전부 장사에 집중되기를 바라면서, 14세나 15세에 제조업의 자양분을 섭취하게 했고 문학이나 고상한 교양 쪽으로 나는 싹은 가차 없이 쳐냈다. 그렇긴 해도 세상 물정을 좀 깨우친 부모들도 있었고, 일부 젊은이들도 자신들의 부족한 점이 무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이 있어서 그러한 결점을 고쳐보려고 애썼다. 아니, 꽤 많은 사람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니라 장년의 남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벌써 배웠어야 할 것을 늦게라도 배울 정도로 엄중한 지혜를 갖고 있었다. 손턴 씨는 아마 헤일 씨가 가르치는 교습생 중 가장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 가장 촉망받는 문하생이었다. (P108)
그녀는 이유도 모른 채 분명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 한두 명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문제는 늘 이것이었다. 어떻게든 이런 예외자들의 고통을 최대한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가? 그게 아니라 승리자의 행진을 따라갈 수 없는 무기력자들은 붐비는 개선 행렬 속에서 승리자가 지나가는 길 밖으로 조심스럽게 옮겨지는 게 아니라 대신 아무렇게나 짓밟혀왔던 건 아닌가? (P109)
그날 이후로 밀턴은 그녀에게 좀더 밝은 곳이 됐다. 그녀가 밀턴이라는 도시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으스스하니 맑은, 긴 봄날 때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간이 흘러가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밀턴에서 인간에 대한 흥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P116)
손턴 씨는 미간을 모았고 방 안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디며 이렇게 말했다.
(가벼운 헛웃음과 함께) “어머니,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는군요. 딱 한 번 봤을 때 헤일 양은 제게 업신여김이 잔뜩 묻어나는 오만한 태도로 예의를 차렸습니다. 마치 자기는 여왕이고 전 씻지도 않는 미천한 아랫것이나 된다는 듯 저와는 아주 거리를 두더라는 말입니다. 마음 놓으십시오, 어머니.”
“무슨 소리! 마음이 놓이지도 않고 맘에 들지도 않는구나. 교회를 떠난 목사의 딸 주제에 널 무시했다니 대단하구나! 나라면 그 건방진 사람들 그 누구 때문에라도 옷을 차려입는 따위 짓은 하지 않겠다.” 그는 방을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P122)
‘내 아들을 무시하다니! 아랫것처럼 대했다고! 흥! 내 아들 같은 남자를 어디서 만날 수나 있다고! 사내에다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 고상하고 심지 강한 아이를. 어머니라서가 아니야. 난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 장님이 아니란 말이야. 난 패니가 어떤 앤지, 존이 어떤 앤지를 알아. 존을 무시하다니. 그 처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P122-123)
“과장이 아닙니다.” 손턴 씨가 대답했다. “명백한 사실입니다. 제가 생활의 필수품으로부터 이다지도 장대한 사고를 탄생시킨 고장 —아니 지역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사람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걱정이라고는 없는 편안하고 느긋한 일상을 보내며 상류사회라고 부르는 남부의 유서 깊은 집에서 윤택하고 따분하게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고생하면서 —아니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면서— 피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우린 어쩌면 벌꿀에 파묻혀서 날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잘못 알고 계세요.” 마거릿이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남부에 대한 비방에 자극을 받아 애정 어린 방어에 나섰는데, 그러느라 그녀의 뺨은 달아올랐고 눈에는 분을 못 이긴 눈물이 맺혔다. “남부에 대해 전혀 모르시잖아요. 만약 남부가 이런 멋진 발명품들이 밀려나오는 데 필요불가결해 보이는, 장사의 도박 정신에서 비롯되는 모험이나 발전이 적다고 한다면 —흥분할 거리가 적다고는 말 못 하겠네요— 그런 곳에는 고통 또한 적습니다. 여기선 쥐어짜는 슬픔과 걱정 때문에 땅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거리를 오고 가는 게 보여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증오에 찬 사람들이지요. 그럼 남부는요, 남부에도 나름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한테는 여기서 보게 되는, 부당함을 느끼는 침울한 얼굴에서 나타나는 그런 끔찍한 표정은 없습니다. 손턴 씨는 남부를 모르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많은 말을 쏟아낸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작정한 듯 침묵에 들어갔다.
“헤일 양도 북부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는 자신의 말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정말 상한 걸 보자 더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그녀는 입을 열면 사무치는 그리움에 불안정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를 내게 만들 것 같은, 저 멀리 햄프셔에 두고 온 정든 여러 장소를 갈망하면서 단호하게 침묵을 지켰다.
“어쨌든 손턴 씨는 밀턴이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남부보다 더 매캐하고 더러운 도시라는 건 인정하실 거예요.”라고 마거릿은 말했다. (P128-130)
“베시, 죽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젊고 건강한 사람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듯 마거릿 역시 삶에 매달리면서 죽음을 겁냈기 때문이다.
베시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쪽이 나처럼 살았다면, 나처럼 살아온 삶에 지쳐서 ‘어쩌면 이런 삶이 50~60년 계속될 거야’라는 생각을 간혹 해봤다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60년 세월이 매년 이렇게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가고 천년만년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이 째깍째깍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서 어지럽고 멍해지고 메스꺼워진다면 —오, 불쌍한 것! 정말이지. 의사가 내년 겨울은 못 볼지도 모르겠다고 말해준다면 그쪽도 그걸 다행으로 여기고도 남았을 거예요.” (P140-141)
“불쌍한 것, 가련한 것. 널 신경 쓰게 하기는 싫다. 정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진실을 외쳐야 한다. 이 세상이 전혀 알 수도 없는 것에 신경 쓰면서 지척의 무질서는 하나도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둔 채 잘못되어가는 걸 보게 되면, 어휴 종교 이야기일랑 관두고 목전에 닥친 일이나 붙잡는 게 나을 성싶다. 그게 내 믿음이야. 간단하고 멀리 갈 필요도 없고 힘들지도 않지.” (P143-144)
이게 만약 끝이라면, 내가 태어났던 이유가 이렇게 일하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라면, 좀 그만하고 편안하게 좀 살자고 소리칠 때까지 기계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때리는 이런 비참한 데서 솜털 그득한 폐를 안고 병드는 것이라면, 엄만 죽었고 내가 엄말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엄마에게 다시는 말할 수도 없는데, 만약 이게 내 인생 끝이고 내 눈에서 눈물 닦아줄 신이 안 계신다면 어떡해요. 세상에, 불쌍해서 어쩌지! 불쌍해! (P159-160)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그 무렵부터 제대로 힘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엄마 돌아가시고 바로 소면(梳綿)실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폐에 쌓이는 보풀 때문에 폐병에 걸려버렸죠.”
“보풀?” 마거릿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보풀요.” 베시가 반복했다. “소면 작업할 때 면화에서 날리는 아주 작은 건데, 온통 뽀얀 먼지처럼 사방에 가득 차요. 그게 폐 주위를 싸고 돌면서 폐를 조여버린대요. 어쨌든 많은 사람이 소면실에서 작업하다가 기침하고 각혈하면서 말라가요. 보풀 때문에 폐병에 걸려버린 거죠.”
“어쩔 수 없는 건가요?” 마거릿이 물었다.
“몰라요. 어떤 사람들은 소면실 한쪽에 바람을 일으키는 환풍기가 있어서 먼지가 해결된대요. 근데 그 환풍기가 엄청나게 —아마 5~6백 파운드 정도— 비싼데 수익이 하나도 생기지 않아 그런 거 설치하려는 업주들은 몇 명 없어요. 게다가 그거 있는 데서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어요. 오랫동안 보풀 삼키는 데 익숙해져서 환풍기 때문에 그걸 먹지 못하면 배가 엄청 고파진다고, 그래서 그런 데서 일해야 한다면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업주들과 인부들 사이에 환풍기는 끝난 얘기예요. 그래도 난 우리 공장에도 환풍기가 있었으면 했어요.” (P160-161)
“난 다시는 헬스턴을 보지 못하겠구나, 마거릿.” 이렇게 말하는 헤일 부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마거릿은 대답할 수 없었다. 헤일 부인은 말을 이었다. “그곳에 있을 땐 마냥 떠나고만 싶었지. 다른 곳이 더 좋아보였지. 이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게 되는구나. 내가 벌을 받는 거야.” (P202-203)
“그쪽 남부에서 어떻게 하는지는 개뿔도 모르오. 그쪽 사람들은 패기라고는 없는, 착취당하는 노동자 무리라고 합디다.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라고들 그러고. 굶주림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학대당하는지를 모른다고들 하더이다. 근데 여긴 그렇지 않소. 우린 우리가 언제 학대당하고 있고 언제 그것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야 하는지를 안단 말이오. 우린 그냥 베틀에서 손 떼고 ‘당신네 업주들이 우릴 굶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릴 짓밟지는 못해!’라고 말해버립니다. 제기랄 이번엔 어림없소!”
“남부에서 살면 좋겠어요.” 베시가 말했다.
“거기도 문제는 많아요.” 마거릿이 말했다. “어디나 견뎌내야 하는 고통은 있는 법이에요. 감당해야 하는 육체적 노동은 고된데, 먹을거리가 별로 없으니 힘을 못 내요.”
“하지만 바깥이잖아요.” 베시가 말했다. “그러니 끝없는 소음이나 메스꺼운 열기 같은 건 없죠.”
“거기도 어떨 땐 폭우가 오고 또 어떨 땐 혹한이 찾아와요. 젊은 사람은 견뎌내지만 노인은 류머티즘에 시달리고, 나이보다 일찍 등이 굽거나 몸이 쇠약해지죠. 그래도 똑같은 조건으로 일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구빈원 신세를 질 테니가요.”
“난 그쪽이 남부만큼 좋은 덴 없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건 맞아요.” 마거릿은 자신이 말려든 걸 깨닫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베시, 난 다만 세상만사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베시가 여기 북부를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부의 나쁜 점도 알아야 공평하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남부에는 파업 같은 건 한 번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잖소?” 니컬러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네!” 마거릿이 말했다. “분별이 지나쳐서 그런가 봐요.”
“내 생각에는,” 말을 하면서 그가 재를 아주 거칠게 털어내는 바람에 파이프가 깨졌다. “그 사람들은 분별이 지나친 게 아니라 패기가 모자란 거요.”
“어머, 아빠!” 베시가 말했다. “파업해서 얻은 게 뭐가 있어요? 첫 파업 때 엄마가 돌아가셨던 걸 생각해보세요. 우리 모두가 얼마나 쫄쫄 굶어야 했는지. 아빠가 제일 고생했죠. 그렇지만 많은 인부가 예전 임금을 받으며 매주 일터로 돌아갔고, 결국은 일이 있는 데로 다들 돌아갔잖아요.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은 그 뒤 구걸하는 신세가 됐죠.”
“그래!” 하고 그가 말했다. “그때 그 파업은 아주 형편없었어. 파업 주동자들이 멍청이들 아니면 엉터리 작자들이었지. 이번엔 다를 테니 두고 봐라.” (P209-211)
“그래요, 베시.” 마거릿이 말했다. “파업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베시가 과장한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몸이 아프니까 베시는 어쩌면 한쪽만 보는 건지도 몰라요. 다른 쪽, 좀더 밝은 쪽도 있단 말이죠.”
“그런 말 하는 거 당연해요. 그쪽은 평생을 유쾌하고 평화로운 데서 살았으니, 부족하거나 걱정되거나 나쁜 거에 대해선 알 리가 없죠.”
“그런 식으로,” 마거릿의 뺨이 붉어졌고 눈은 물기로 반짝거렸다. “판단하는 건 조심하도록 해요. 엄마한테 가볼게요. 위중해요. 너무 위중해서 심한 통증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죽음밖에 없어요. 근데 난 엄마의 실제 병세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시는 아빠와 얘기할 때는 명랑한 표정을 지어야 해요. 아빤 이런 사실을 천천히 아셔야 하거든요.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도와줄 유일한 사람, 곁에만 있어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엄마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누명을 쓰고 있는 중인데, 만약 오빠가 죽어가는 엄마를 보러 온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예요. 이건 베시한테만 말하는 거예요. 아무도 알면 안 돼요. 밀턴, 아니 이 나라 안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걱정이 없다고요? 잘 차려입고 다니면서 충분하게 먹는다고 해서 근심을 모른다고요? 아, 베시, 주님은 공평하셔서 우리의 운명은 주님이 잘 나눠주셨어요. 그래도 우리의 영혼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죠.”
“미안해요.” 베시가 한껏 기세가 꺾여 대답했다. (P216)
베시는 흔들의자를 멈추고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부에는 저런 사람들이 많은 걸까. 뭐랄까, 마치 시골 공기 같아. 가라앉은 기분이 산뜻해져. 상상 속의 천사같이 구김 없고 흔들림 없는 저 얼굴에 그런 슬픔이 있다는 걸 그 누가 알았을까? 그녀가 죄를 짓는다는 건 상상이 안 돼. 우린 모두 죄짓게 되어 있는걸. 난 정말 그녀가 좋아. 근데 아빠도 역시 좋아해. 메리까지도. 그 애가 눈에 띌 만큼 들떠 있는 걸 보는 건 드문 일인데.’ (P218)
“어머니.” 그는 걷다가 멈추더니 용기를 내어 진심을 말했다. “헤일 양을 맘에 들어 하시면 좋겠습니다.”
“왜냐?” 그녀는 열렬하면서도 다정한 아들의 태도에 놀라서 물었다. “설마 그 처녀와 결혼이라도 꿈꾸는 건 아닐 테고? 한 푼 가진 것 없는 처녀와 말이다.”
“헤일 양이 허락지 않을 겁니다.” 그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벨 씨가 너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줬다고 하기에 그걸 칭찬했더니, 내 면전에 대고 웃더구나. 아주 솔직하게 말하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너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말이야. 근데 금방 기분이 아주 상해버렸어. 생각하는 게 마치...... 아니, 그만하련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서 넌 안중에도 없다는 네 말이 맞았어. 방자하기도 하지! 내 아들보다 더 괜찮은 남자를 어디서 찾겠다고!” (P225)
논쟁이 붙었고 반대 의견이 활발하게 맞섰다. 손턴 씨에게로 화살이 향하자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의견이 아주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피력됐기 때문에 반대자들조차 설복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거릿은 이 만찬의 주최자를 다시 보게 됐다. 저택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내객들의 접대자로서 그의 태도는 아주 솔직했지만 그러면서도 소박하고 겸손한 데가 있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엄이 풍겼다. 마거릿은 그가 저렇게 돋보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자기 집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는 늘 어떤 분위기, 즉 자신이 올바로 평가받지 못한다고 예단할 태세로 보이는, 그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더 잘 이해시키려고 하지는 않는 듯한 그런 종류의 짜증 섞인 화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이제 동료들 사이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했다. 그는 그들에게 여러 방면에서 커다란 힘을 행사하는 권력자로 간주됐다. 그에게는 힘이 있었고 그는 그걸 알았다. 이 확고부동함 때문에 그의 목소리와 태도에는 과묵함이 묻어나왔고, 마거릿은 이런 것들을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었다. (P256)
“‘신사’라는 말에 손턴 씨가 말한 ‘참된 인간’도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더 많은 걸 함축할 테지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한테는 인간이 신사보다 더 고귀하고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거릿이 물었다. “우리가 분명 용어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나 봐요.”
“‘신사’는 타인과의 관계만을 설명할 뿐인 용어입니다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 사람을 말할 때는 그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의 삶, 시간, 영겁과 관련짓는다 이 말입니다. 조난자 로빈슨 크루소나 평생을 지하 감옥에 유폐됐던 죄수, 아니 파트모스 섬에 유배됐던 성 요한마저 ‘인간’으로 말할 때 가장 잘 설명되는 인내, 용기,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전 ‘신사다운’이라는 말이 좀 싫증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당치 않게, 그리고 빈번하게, 의미가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왜곡된 채 쓰이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소박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라는 명사와 ‘인간다운’이라는 형용사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전 ‘신사’라는 말을 이 시대의 은어로 분류하고픈 감응을 느낍니다.” (P258-259)
그녀는 차라리 더나가는 시간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와달라고, 그래서 자신의 손아귀에 있을 때 조금도 그 귀중함을 몰랐던 것을 돌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삶이란 얼마나 헛된 쇼인지! 얼마나 허울뿐이고, 순간적이고, 덧없는 것인지! 마치 이 땅의 흔들림과 충격을 아래고 하고 높이 솟아 있는 공중의 종탑으로부터 이런 종소리가 계속 울리는 것 같았다. ‘모든 건 그림자다! 모든 건 지나간다! 모두 지나가고 없다!’ 더 행복했던 과거의 수많은 아침처럼 상쾌하고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자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거릿은 끔찍했던 지난밤이 마치 꿈인 양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날 밤 역시 그림자였다. 그날 밤 역시 지나가버리고 없었다. (P269)
“손턴 씨,” 마거릿이 자신의 신념을 전하려는 듯 온몸을 떨며 이렇게 말했다. “겁쟁이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내려가세요. 내려가서 남자답게 저 사람들과 맞서세요. 그래서 불쌍한 이방인들을 지키세요. 손턴 씨가 구슬려서 이리로 데려온 사람들이잖아요. 여기 인부들에게는, 인간에게 대하듯 부드럽게 말하세요. 군인들이 와서 미쳐버린 저 불쌍한 사람들을 죽이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저들 속에 그런 불쌍한 사람이 하나 있어요. 용기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손턴 씨에게 고귀함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밖으로 나가 저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말하세요.” (P279)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군중 가운데 상당수는 고작 소년들이었다. 잔인하고 생각없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잔인한 그런 소년들이었다. 일부는 장년들이었다. 굶어 비쩍 마른 늑대처럼 사냥감을 앞에 두고 날뛰고 있었다. 그게 어떤 건지 마거릿은 알았다. 이들은 바우처와 같은 처지였다. 집에서는 굶주린 아이들이 아버지의 임금 투쟁이 결국은 성공하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아이들 입에 들어갈 빵을 빼앗으러 아일랜드 인부들이 유입됐다는 사실을 알고 이토록 들끓어 올랐던 것이다. 마거릿은 이 모든 걸 알았다. 그녀는 바우처의 얼굴에서 암울한 절망과 끝 간 데 없는 분노를 읽었다. (P280)
“제발 그만둬요! 이런 폭력으로 여러분의 대의명분을 손상시키지 말아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모르고 있어요.” 그녀는 또렷하게 자기 말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뾰족한 자갈돌 하나가 날아오더니 그녀의 이마와 뺨을 긁었고, 그녀의 눈앞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일었다. 그녀는 손턴 씨의 어깨 위에 죽은 사람처럼 기댔다. 그러자 그가 팔을 벌려 즉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잘했군!” 그가 말했다. “당신들은 선량한 이방인을 쫓아내려고 왔어. 당신들은 수백 명이서 남자 하나를 덮치려 했어. 그래서 한 여자가 당신들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성을 찾아달라는 말을 하려고 당신들 앞에 섰는데, 당신들의 그 비열한 분노가 이제는 그 여자에게로 향했어. 잘했군!” 그가 말하는 동안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은 떡 벌린 채 무아지경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던 자신들의 정신을 확 들게 만든 한 줄기 검붉은 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도망쳐 나갔다. 군중 사이로 후퇴의 움직임이 일었다. 한 목소리만 이렇게 말했다.
“그 돌은 당신을 겨냥했던 거요. 근데 당신은 여자 뒤로 숨어버렸어!”
손턴 씨는 분노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었다.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마거릿은 의식이 돌아왔지만 흐릿하니 멍한 상태였다. (P283-284)
그녀가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어찌나 생생하게 느껴졌는지 그는 고통 속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마거릿, 나의 마거릿! 당신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거요! 죽은 듯이 거기 누워 있는 당신은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이오! 아아, 마거릿, 마거릿!’
그는 그녀 옆에서 무릎을 꿇고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차라리 신음처럼 주절거리고 있다가, 어머니가 들어오자 부끄러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 눈에는 다른 것보다도 다만 아들이 평소보다 더 창백하고 더 엄숙해 보일 뿐이었다. (P285)
그녀가 어떻게 달려 내려왔고, 어떻게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던가를 떠올리자 그는 전신의 피가 고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자기를 구해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때 그는 그녀를 밀치고 거칠게 말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스스로 짊어지려고 하는 불필요한 위험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일랜드 인부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두려움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하려고 했으나,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온몸의 신경이 떨려서 그들이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P286)
“헤일 양 아니었으면 제가 어찌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여자에게서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렇게 무기력해졌다는 말이냐?” 손턴 부인이 냉소를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그는 얼굴이 붉어졌다. “저를 겨냥했던 —철저한 적개심으로 날렸던 그 공격들을 몸소 받아내는 여성은 몇 안 됐을 겁니다.”
“사랑에 빠진 처자라면 엄청난 일을 하겠지.” 손턴 부인이 짧게 대답했다.
“어머니!”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가만히 서 있었는데, 흥분이 되는지 몸을 들썩였다.
그녀는 아들이 평소 때와 달리 자제심을 잃는 걸 보자 약간 움찔했다. 그녀는 자기가 어떤 감정을 건드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그 감정에 들어 있던 격렬함이었다. 분노였나? 그의 눈이 이글거렸고 몸이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숨이 거칠고 가빠졌다. 그건 기쁨과 분노, 자부심, 기분 좋은 놀라움, 긴가민가한 설렘이 뒤섞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모습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왜 그러는지 원인을 완전히 알 수도 없고 같이 느낄 수도 없는 강렬한 감정이 드러날 때면 늘 이렇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P294-295)
“사랑하는 어머니!” (그래도 사랑은 이기적이어서, 손턴 부인의 가슴에 서서히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그는 금방 자신의 희망과 두려움을 되풀이했다.) “헤일 양이 절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압니다. 전 그녀 발밑에 엎드릴 겁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천 번에 한 번, 아니 백만 번에 한 번 오는 기회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겁낼 것 없다!” 그녀는 좀처럼 터뜨리지 않는 어머니로서의 감정, 묵살당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질투의 고통을 아들이 조금도 알아주지 않자 굴욕감을 억누르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라.”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사랑이라고 한다면 헤일 양이 널 얻을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존심 때문에 헤일 양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게야. 걱정 마라, 얘야.” 그녀가 아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키스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위엄을 잃지 않은 채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손턴 부인은 방에 들어서자 문을 잠그고 앉은 뒤 그녀답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P299)
‘소동을 싫어하는 내가,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자제력이 부족하다고 치부했던 내가,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아래로 내려가서 기어이 그 아수라장에 몸을 던졌어. 무슨 효과가 있었나? 나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은 물러났을 거야.’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성급한 결론이라는 균형 잡힌 판단이 금세 생겼다. “아니, 어쩌면 물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 효과가 있었어. 하지만 무슨 생각에 사로잡혔기에 그 사람이 마치 힘없는 아이라도 되는 양 보호하려고 했던 것일까! 세상에!” 그녀는 두 손을 꼭 맞잡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식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했으니, 사람들은 필시 내가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을 거야. 내가 사랑에..... 그것도 그 사람과!” 그녀의 창백한 두 뺨이 갑자기 불길처럼 뜨거워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열기를 가라앉히자 그녀의 손바닥은 뜨거운 눈물로 축축해져 있었다.
“세상에, 내 위신이 어디까지 떨어졌기에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할까! 누구 다른 사람을 위해서였다면 난 그렇게 용감하지 못했을 거야. 손턴 씨는 내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어. 어쩌면 난 그 사람이 싫은지도 모르지. 두 쪽 다 공정한 경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 더 초조하게 만들었어. 그리고 난 어떤 게 공정한 경기인지 볼 수 있었지. 그건 공정하지 않았어. (...) 난 또다시 그럴 거야. 누구든 나에 대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지. 내가 그렇게 끼어들어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잔인하고 성난 폭동을 하나 막았으니 여자로서 할 일을 한 거야. 숙녀의 자존심을 모욕하려면 얼마든지 하라지. 난 신 앞에 떳떳하게 걸어 갈 수 있어!” (P300-301)
손턴 씨는 문을 등지고 창가에 서 있었다. 거리에 있는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온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사실 그때는 조마조마하게 느껴졌던, 자신의 목을 감아들던 그녀 팔의 감촉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를 보호하려고 매달리던 그녀를 떠올리면 모든 결심, 모든 자제력이 마치 불 앞의 양초처럼 녹아 없어지면서 온몸이 떨렸다. 그는 전날 그녀가 그랬을 때처럼 그녀가 자기 품속으로 포근히 안겨오길 말없이 염원하며, 두 팔을 뻗어 그녀를 맞겠다고 앞으로 나서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다신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심장이 막 요동쳤다. 그렇게도 강한 남자이지만 그는 그녀에게 해야 할 말, 그리고 그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에 대한 생각으로 떨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얼굴이 발개져서 마치 안식처를 찾아들 듯 자신의 품 안으로 파닥이며 뛰어들지 모른다. 그는 한순간 그녀가 그럴 거라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가, 다음 순간 그녀의 맹렬한 거절이 두려워졌는데, 그 생각은 떠올리기도 싫은 치명적인 그림자로 자신의 앞날을 시들게 만들었다. (P305-306)
그는 그녀의 냉정한 태도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제 생명을 당신께 빚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요, 웃으십시오, 과장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리하여 그 삶이 가치를 얻기 때문입니다. 아아, 헤일 양!” 그가 소리를 죽이고 열정이 가득 묻어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그녀는 그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생각하면 제 삶이 가치를 얻습니다. 그래서 향후 제 삶이 기쁘다고 생각할 때마다 전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삶의 즐거움, 이 세상에서 내 일을 하면서 갖는 정직한 자부심, 존재에 대한 이 명철한 감각, 이 모든 게 헤일 양 덕분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기쁨이 배가 되고, 자부심은 빛을 발하고, 존재 의식은 더 선명해져서 결국 제 삶을 누군가에게 빚진다는 것이 고통인지 기쁨인지 모를 정도가 됩니다. 아니, 헤일 양, 들으셔야 합니다.” 그는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작정하고 그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누군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빚진다는 것 말입니다. 이전에 그 어떤 남자도 그 어떤 여자를 이렇게까지는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그녀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는 싸늘한 그녀의 어조에 분개하며 손을 놓아버렸다. 비록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말은 더듬거리며 나왔지만 그 말은 얼음처럼 냉정했다. “손턴 씨의 말투에 너무 놀랐어요. 불경스러워요. 미안하지만 그게 제가 받은 첫 느낌입니다. 손턴 씨가 설명했던 감정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안 그럴지도 모르지요. 전 손턴 씨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뿐 아니라 엄마가 주무시는 중이니 조용히 말해야 해요. 하지만 전 손턴 씨의 전반적인 태도에 불쾌한 기분입니다.”
“어찌 그런 말을!” 그가 소리쳤다. “불쾌하게 하다니요! 저야말로 정말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요!” 그녀가 다시 근엄한 태도로 말했다. “불쾌해요.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손턴 씨는 어제 제 행동이.....” 또다시 짙은 홍조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부끄러움보다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손턴 씨와 저 사이의 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일에 고마움을 표하러 오실 수도 있어요. 신사라면 그 일을 다르게 받아들였을 거예요. 그래요, 신사라면,” 그녀는 신사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이전에 그와 주고받았던 대화를 인용하여 그 말을 반복했다. “어떤 여성이든, 여성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호 본능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힘없이 폭력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한 사람을 감싸려고 나설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출된 그 신사는 감사 인사를 표해서는 안 되는 것이군요.” 그가 빈정거리는 어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전 인간입니다. 전 감정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권리에 제가 양보했어요. 다만 전 손턴 씨가 그걸 고집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말을 하는 것뿐이에요.” 그녀가 도도한 태도로 대답했다. “하지만 손턴 씨는 제가 단순히 여성적인 본능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여기서 (오랫동안 흘리지 않으려고 맹렬히 버티면서 눌렀던) 눈물이 그녀의 눈에 솟구쳤고, 이 때문에 그녀는 목이 메고 말았다. “제가 당신, 당신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아니, 그게 누구였든지, 거기 모여 있던 불쌍하고 애처로운 사람들 중 그 누가 됐든지 간에, 전 그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 겁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헤일 양. 당신이 연민을 느끼는 대상들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이 행했던 참으로 숭고한 행동은 단지 내재되어 있던 당신의 중압감(그렇습니다. 저도 업주이지만 억압받았는지 모릅니다)이었다는 것을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경멸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당신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녀는 테이블에 몸을 지탱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가 잔인하다는 생각과 —사실 그는 잔인했다— 그에 대한 분노로 힘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신은 편견이 있는 데다 공정하지 못하군요.” (P308-310)
“한마디만 더 하지요. 헤일 양은 마치 제 사랑을 받는 것이 큰 오점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니, 제가 씻어내더라도 그 오점은 씻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비록 씻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씻어내지 않겠습니다. 제 평생에 한 여인을 이토록 사랑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너무 바쁜 삶을 살아야 했기에 생각은 항상 여러 가지 다른 일로 몰두해 있었지요. 이제 저는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과도한 표현에 너무 겁먹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겁먹지 않아요.” 그녀는 몸을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이토록 무례했던 적은 처음이고, 그 누구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손턴 씨는 제 아버지께 매우 친절하셨어요.” 그녀는 어조를 완전히 바꾸어 최대한 여성스러운 부드러움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서로를 화나게 하지 않도록 해요. 부탁해요!” (P310-311)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 그녀는 자문했다. ‘한 번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난 교양 있게 행동했어. 그렇다고 억지로 무심함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어. 사실 나 자신이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 태도는 분명 진실을 보여주었어. 어제는 전부 그가 착각했던 걸 거야. 하지만 그건 그의 실수지 내 실수가 아니야. 필요하다면 난 또 그럴 거야. 비록 이렇게 부끄럽고 골치 아픈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야.’ (P311-312)
그녀는 그가 자신의 내적 의지를 꼼짝 못하게 했다는 것이 더 싫었다. 비웃으며 밀어내는데도 감히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그녀는 좀더 강한 어조로 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신랄하고 단호한 말들이 물밀 듯 생각났지만, 이제는 입 밖에 내어봐야 늦은 뒤였다. 그와의 면담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마치 악몽의 공포 같았다. 일어나서 눈을 비비고 경직된 웃음을 입술에 억지로 지어봐도 그것은 그 방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공포가 거기 있었다. 거기, 방 한구석에서 끔찍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한 채 몸을 웅크리고 뜻 모를 말을 주절거리면서, 우리가 감히 그것의 존재에 대해 누군가에게 속삭이는지 아닌지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감히 그럴 용기가 없다. 얼마나 불쌍한 겁쟁이들인가! (P314-315)
그는 마거릿이 밉다고 혼잣말을 했지만, 미움을 표현하는 말을 빚어낼 때마저도 마구 날뛰는 날카로운 사랑의 감정이 흐릿하니 먹구름 낀 감정에 번개가 내려치듯 팍하고 꽂혔다. 그는 고통을 끌어안으면서 가장 큰 위안을 찾았다. 그녀가 아무리 자기를 경멸하고 비난하고 거만하게 내려다봐도 자신의 사랑은 한 치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때 들던 감정이 그에게는 가장 큰 위안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그를 변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또 이렇게 비참한 육체적 고통을 견뎌낼 것이다. (P328-329)
그녀는 어떨 때는 참으로 용감했고, 또 어떨 때는 무척 겁을 냈다. 부드럽기 그지없다가도 어떨 땐 아주 도도하고 당당했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완전히 잊어버릴 요량으로 그녀를 봤던 때를 모두 곰곰이 돌이켜보았다. 그가 본 것은 매번 다른 드레스에 다른 태도일 때의 그녀였고, 어떨 때가 가장 그녀다웠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녀는 참으로 당당해 보였다. 어제 위험에 처한 자기를 구해주었으니 자신에게 최소한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쏘아보던 눈빛이라니!
만약 손턴 씨가, 스스로도 스무 번 넘게 인정했다시피, 아침에 바보였다고 한다면, 그는 오후에도 똑같이 바보였다. 6펜스짜리 승합마차를 타고 떠난 여정에서 그가 받은 보상은 이런 것이었다. 즉 마거릿 같은 사람은 있지도 않고, 절대 있을 수도 없으며, 그녀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결코 사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녀는 —아니!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절대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는 걸 막지는 못할 것이라는 더욱더 생생한 확신이었다. (P330)
“어머니!” 그가 얼른 어머니를 저지했다. “헤일 양을 욕하는 건 참기 힘듭니다. 좀 참아주십시오, 제발! 전 지금 상심으로 쓰러질 지경입니다. 헤일 양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런데 난 헤일 양이 싫구나.” 손턴 부인이 적의가 담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일 양이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았을 때 난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건 혼잣말로 되뇌었듯 그녀는 널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널 이다지도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미워하련다. 그래 존, 네 상처를 내게 숨겨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널 낳은 어머니이니 네 슬픔은 내 고통이야. 설사 네가 헤일 양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난 증오한다.”
“그러시면 어머니 때문에 제가 그녀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니 제가 그 균형을 맞춰야지요. 하지만 왜 사랑이니 증오니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겁니까? 헤일 양은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거면 넘칩니다. 이 얘긴 다시는 꺼내지 않도록 하지요. 그게 저를 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말 진심이다. 그 처녀와 그 처녀에게 속한 거라면 모두 원래의 자리로 몽땅 다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구나.” (P334-335)
그는 갑자기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너무 힘이 없어서 생각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생각은 그녀를 향해 헤맬 것이고, 그러면 그 장면들 —어제 자신이 그녀에게 당했던 거부의 몸짓과 거절 의사가 아니라, 그 전날의 모습들과 움직임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는 복잡한 거리를 따라 사람들 사이를 감고 돌며 기계적으로 걸어갔지만, 그녀가 자기에게 매달려 있던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심장이 자기 심장과 맞대어 고동치던 그 30분의 시간이 다시 한 번 와주기를 갈망하는 상사병에 걸려 있었던 까닭에 그는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P337-338)
두 사람이 시신 옆에 섰다.
“메리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아빠 술 드시지 못하게 하라’는 거였어요.”
“이 앤 이제 그런 걸로 속상해하질 못해.” 그가 중얼거렸다. “이젠 그 무엇도 내 딸아일 마음 아프게 하지 못한단 말이지.” 그런 다음 그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통곡으로 변했고, 그가 말을 계속했다. “우린 싸워서 적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화해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지.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굶주릴 때도 있어. 하지만 그 어떤 괴로움도 내 딸은 이제 더 이상 느낄 수가 없구나. 내 딸은 제 몫을 했어. 처음엔 죽도록 일하고 나중에 병이 들어 개처럼 살았어. 그러더니 살아 있는 동안 기쁜 순간이 뭔지도 모른 채 죽어버렸어. 아아, 이보슈, 그 애가 뭐라고 했든 지금은 알지 못할 테니 난 한잔 걸치고 슬픔을 좀 달래야겠소.” (P350-351)
“...... 그렇게 비참하게 살고서 저기 죽어 있는 제 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다음 제게 단 하나 남은 위안을 선생님이 어떻게 부인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신이 있어서, 그 신이 제 여식의 생명을 정했다는 위안 말입니다. 제 딸이 또 다른 삶을 살 거라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앉았고 무자비하게 타오르는 불길에 대고 말하듯 계속 말을 이었다. “전 제 딸이 지독한 병과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독한 걱정거리로 고통을 겪으며 살았던 이 삶 말고는 그 어떤 삶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모두 일련의 가능성이었다는 듯, 한 줄기 바람에 바뀔 수도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많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제 입으로 직접 말해본 적은 없습니다. 감히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말에 웃어주었을는지는 몰라도, 그런 뒤 저는 정말로 신이 있다면 제 말을 듣는지 보려고 주위를 휙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외로이 남은 저는 의문과 회의를 품은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으렵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조용하고 변함없는 단 하나, 이유가 있든 없든 저는 그것에 매달리렵니다. 다른 소리는 다 행복한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겁니다.” (P361-362)
설사 그 책에서 두 배로 강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해도, 제가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면 전혀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책장에 있는 라틴어 책에는 진실이 담겨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 말들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그건 제게 횡설수설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만약 선생님이, 아니 학식 있고 인내심 있는 다른 사람이 제게 와서 그 말들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제가 좀 우둔하고, 어째서 이 일 때문에 저 일이 일어나는지 잊어먹어도 분통을 터뜨리지 않겠다고 한다면 글쎄요, 저도 그 책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못할지도 모르지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될 거라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전 주물 공장에서 철판이 잘려 나오듯 진실이란 게 말쑥하고 군더더기 없는 말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같은 뼈라도 모든 사람 목으로 다 내려가는 건 아니지요. 어떤 사람한테선 목구멍 여기서 걸리고, 다른 사람한테서는 저기서 걸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에서 소화시킬 때는 어떤 사람한테는 너무 억셀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한테는 너무 연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진실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구상하는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게다가 그 진실이라는 알약을 주는 방식도 좀 부드러워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불쌍한 병자들이 그 약을 자신들의 얼굴에다 뱉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자, 햄퍼가 처음엔 제 따귀를 올려붙이더니 그 다음엔 커다란 알약을 줍디다. 그러고는 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 약이 제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게 이치라는군요.“ (P366)
노조가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우릴 이렇게 만든 건 업주들이오. 지금 세대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자들의 아버지들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소. 그자들의 아버지들이 휴식이고 뭐고 없이 우리의 아버지들을 죽도록 일을 시켰지. 우리 역시 마찬가지요! 목사님! 어머니가 이런 성경 구절을 읽어주었던 것 같습니다.‘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우리 아버지들이 그랬습니다. 고통스런 억압이 있던 그 당시에 노조가 시작됐던 겁니다. 필요에 의해서였지요. 제 생각에는 지금도 그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또 다가올 미래의 부당함에 맞서는 겁니다. 그건 전쟁과도 같을 겁니다. 전쟁과 더불어 범죄가 될 수도 있겠지만 부당함을 그대로 두는 게 더 큰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의 목적 아래 모두가 결집하는 거지요. 혹여 일부가 겁쟁이이거나 바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뭉쳐야 힘이 되는 대행진에 같이 나와서 참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P370-371)
신도인 마거릿, 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그녀의 아버지 비(非)신도인 히긴스, 이 세 사람이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이 일로 상처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371)
손턴 씨는 차라리 마거릿이 엄마 잃은 슬픔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사랑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희열을 느끼려는 이기적인 속셈을 품고 있었다. 축 늘어진 아이가 따뜻한 엄마 품에 꼭 안겨서 모든 걸 엄마에게 의지할 때 엄마의 가슴을 관통하는 묘한 환희와 유사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마거릿이 결사적으로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제멋대로 빠져 있었을— 이런 달콤한 환상은 아웃우두 역 근처에서 보았던 장면에 대한 기억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처참하게 무너졌다!’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녀가 아주 익숙한 신뢰감을 보이며 같이 서 있던 그 잘생긴 젊은이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그 기억이 고통스럽게 관통하며 지나갔기 때문에 급기야 그는 고통을 덜어보려고 두 손을 꽉 그러쥐었다. 아주 야심한 밤에, 집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이 아니던가! 얼마 전까지 완벽했던 마거릿의 지고지순한 여성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소생하려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 노력을 멈춘 순간 그의 믿음은 주저앉았고 힘을 잃었으며, 온갖 무모한 상상이 마치 꿈처럼 머릿속을 휘저으며 꼬리를 물고 쫓아다녔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그를 괴롭히는 확증은 이 말이었다. 이런 슬픔 속에서도 ‘그녀는 예상외로 잘 견뎠다.’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바라볼 희망이 있었다. 천성적으로 밝은 그녀이지만, 그 희망이라는 게 어찌나 밝은지 막 엄마를 잃은 딸의 암울한 시간을 밝혀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그는 그녀 안에 어떤 능력들이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만약 사랑의 힘으로 그녀의 사랑을 되찾을 자격이 있는 남자라면 그녀의 영혼은 찬란한 햇빛 속을 걸어갈 것이다. 상중(喪中)이라고 해도 그녀는 마음 편히 그의 연민에 기댈 것이다. 그의 연민이라니! 누구의 연민? 다른 남자의 연민. 이 다른 남자는 딕슨의 대답을 듣는 손턴 씨의 파리하니 심각한 얼굴을 한층 더 핏기 없이 경직시키기에 충분했다.
(...)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고통을 준 사람이 보고 싶었다. 비록 마거릿이 보여주던 다정하고 친밀하던 태도와 자기를 따라 내려왔던 그 상황들을 생각할 때는 더러 그녀가 밉기도 했지만, 그는 그녀가 다시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고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중심에 더 가까워지면서 부득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돌 수밖에 없었다. (P428-430)
신앙심을 저버린 대가로 이처럼 신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마음은 가지지 않아도 됐을 테고 손턴 씨의 눈에 경멸스럽고 타락한 존재로 보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생각에 이르자 슬프고 몸이 떨렸다. 그녀는 지금 그의 경멸감을 신의 불쾌감과 같은 크기로 느끼고 있었다. 왜 그는 그녀의 상상 속에 이다지도 끈질기게 출몰하는 것일까? 무슨 이유에서일까?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생각에 신경을 쓰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녀가 신의 노여움을 샀다는 생각을 품었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신은 모두 다 알고 있었고 뉘우치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으며 미래의 도움 요청을 들을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손턴 씨였다 —그녀는 왜 몸을 떨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을까? 얼마나 강렬한 감정이 마침내 그녀를 엄습했던 걸까? (P455)
그녀는 아침에, 자신에 대한 추가 조사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손턴 씨가 검시관에게 더 자세한 내용을 묻는 수고를 하며넛 보여주었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만큼 손턴 씨에 대해서 자신이 배은망덕하다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아아! 그녀는 고마워했다. 그녀는 겁쟁이였고 거짓말쟁이였으며,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자신의 비겁함과 허위성을 보여주었지만, 은혜를 모르지는 않았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자신을 경멸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느낌이 왔다. 손턴 씨의 경멸감에는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경멸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그를 덜 존경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생각하자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런 감정이 드는 걸 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우울한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P459-460)
“도시 생활이 이런 거네요.”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급히 서두르는 북새통 같은 주위의 모든 것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요. 그뿐인가요. 우울증과 걱정이 생기고도 남을 만한 이런 답답한 집에 갇혀 사는 건 어떻고요.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들까지도 바깥에서 엄청 많이 생활하잖아요. 겨울에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사람들은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시골 사람들 중 일부는 마치 운명론자들처럼 생각이나 비판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잖니.”
“맞아요. 저도 알아요. 도시나 시골이나 제각기 나름대로의 시련과 유혹이 있는 것 같아요. 도시 사람에게 묵묵하게 참아내는 생활이 힘든 만큼,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활동적이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를 감당해 내는 생활이 힘들어요. 두 쪽 다 어떤 종류든 미래를 성취하기가 힘든 것만은 분명해요. 한쪽은 바로 주변의 현실이 아주 생생하고 분주하게 돌아가기 때문이고, 또 다른 쪽은 시골의 삶이, 계획하고 자제하면서 바라는 걸 얻는 짜릿한 기쁨 따위를 모르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동물의 생존 감각을 한껏 즐기라고 유혹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전력투구해야 하는 삶이나, 현실에 바보같이 안분지족하는 삶이나 결과는 모두 똑같은 거지. 그렇지만 저 애처로운 바우처 부인을 어쩌누! 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도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부인에게서 손 놔버리면 안 될 것 같아요. 그 노력이 부질없다고 해도 말예요. 아, 아빠! 세상이 참 살기 힘들어요!” (P480-481)
제 탓이에요. 그런 생각을 품게 된 건 제가 그런 식으로 말했기 때문이죠. 히긴스 씨 앞에서 그런 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에요. 히긴스 씨는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지 못해요. 그게 어떤 건지를 몰라요. 지루한 일상은 녹과 같이 스스로를 조금씩 부식시키고 말 거예요. 평생을 거기서 산 사람들은 고인 물속에 푹 잠겨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어요. 그쪽 사람들은 더운 김이 솟아나는 벌판 위에서 매일매일 크나큰 고독과 싸워가며 일을 해요. 말 섞을 사람도 없어요. 아니 구부린 채 땅만 보고 있는 그 불쌍한 고개를 한 번 들지도 못해요. 힘든 가래질로 머리는 무뎌지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노역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죽여요. 일이 끝나고 나면 그들은 깊이 생각할 필요 없는 사소한 것조차 생각하거나 상상해보길 싫어합니다. 완전히 나가떨어질 정도로 지쳐서 집에 돌아가요. 불쌍한 사람들이지 뭐예요! 먹을 것과 휴식밖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요. 시골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어떻게 친해볼 수도 없어요. 좋든 나쁘든 도시에서는 어딜 가나 숨 쉬는 공기만큼 흔한 게 친구잖아요. 그건 몰라도 많은 사람 가운데 히긴스 씨가 그런 육체 노동자들의 삶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건 알아요. 그들에게 휴식인 것이 히긴스 씨에게는 끝없는 조바심이 될 거예요.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니컬러스, 부탁이에요. (P488)
맙소사! 북부나 남부나 나름대로 괴로움이 있구먼. 거긴 확실한 일자리에 꾸준히 일해도 굶어 죽을 정도의 임금이고, 반대로 여긴 석 달은 잘 벌어도 다음 석 달은 땡전 한 푼 벌지 못하니. 확실히 세상은 뒤죽박죽이라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할 수가 없소. 세상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흔히들 말하듯이 보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오? (P489)
“마거릿, 네가 드디어 손턴 군을 바로 평가하는 것 같구나.” 마거릿의 아버지가 그녀의 귀를 쥐며 말했다.
마거릿은 이상하게 울컥한 마음이 들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남자라면, 그 사람한테 가서 우격다짐으로라도 반감을 표출케 하고,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이제 막 그의 진가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친구인 그를 잃게 되는 건 힘든 일일 테지. 엄마한테 그 사람이 얼마나 다정했었는데! 단지 엄마 때문에라도 그가 찾아와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적어도 내가 그 사람 눈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 (P492)
그를 고통에 빠뜨렸던 건, 자신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고, 그녀가 아무리 그 모든 결점을 갖고 있어도, 자신은 그녀가 다른 여성들보다 더 우월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녀가 이 다른 남자에게 너무 빠졌고, 그 결과 그 남자에 대한 애정에 이끌려 자신의 본성마저 저버릴 정도가 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에게 오점을 남긴 그 거짓말만 봐도 그녀가 딴 사람을 —구릿빛에 호리호리하고 품위 있는 데다 잘생긴 그 남자를— 그에 비하면 자신은 투박하고 고집스럽고 다부진 쪽이다 —얼마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통렬한 질투심의 고통 속에 밀어 넣었다. 그는 떠올렸다. 그 표정과 그 태도를! 그렇게 다정한 눈빛과 사랑이 담긴 관심을 위해서라면 그는 정말 그녀의 발밑에 온몸을 던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성난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던 그녀의 반사적 태도를 높이 샀던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제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 얼마나 다정하고 매혹적이던가를 봐버렸기 때문이다. 그 군중 가운데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던 그녀의 비수 같은 말 하나하나를 그는 떠올려보았다. 그는 유혈 사태를 피하려던 그녀의 바람을 군중과 함께 나누었지만 이 남자, 이 숨겨놓은 애인은 그녀의 바람을 그 누구하고도 나누지 않았다. 이 남자는 자태와 말, 맞잡은 손, 거짓말, 은폐까지 이 모든 걸 혼자 다 차지했다. (P494)
“알겠습니다.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온 건 사장님이 온정을 베푸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가씨의 생각이 틀렸고, 전 틀린 말을 들은 겁니다. 하지만 여자 말을 듣는 사람이 어디 저 혼자뿐이겠습니까.”
“다음에 만나거든 당신이나 내 시간을 허비시키는 일 말고 자기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게. 여자들이 이 세상 모든 문제의 발단이야. 가보게나.”
“친절하게 제 말을 들어주고 무엇보다 작별 인사까지 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손턴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마당을 빠져나가는 야위고 구부정한 체구에 짠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무거운 발걸음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던 남자의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와 이상스러우리만치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수위실까지 갔다.
“저 히긴스란 자가 날 만나겠다고 얼마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나?”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정문 밖에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쭉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 몇 신가?”
“이제 1시입니다.”
“다섯 시간이군.” 손턴 씨는 생각했다. ‘처음엔 기대로, 그다음엔 두려움으로 그저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긴 시간이지.’ (P511-512)
“사장님은 저보고 뻔뻔하다고, 거짓말쟁이라고, 그리고 말썽꾼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일리 있는 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걸핏하면 술에 빠져 살았으니까 말입니다. 저도 사장님을 독재자니, 고집쟁이니 인정머리 없는 업주라고 했습니다. 그게 사장님과 저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애들 때문입니다. 사장님, 우리가 함께 잘 지낼 수 있겠습니까?”
“글쎄!” 손턴 씨가 반쯤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함께 일하자는 말은 내가 꺼낸 게 아니네. 하지만 당신 말대로라면 한 가지는 안심이 되는군. 서로를 지금보다 더 나쁘게 여기진 못할 테니까 말이야.”
“맞습니다.” 히긴스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사장님을 만나고 온 뒤부터 사장님이 절 받아주지 않은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고 쭉 생각했습니다. 사장님같이 참기 힘든 사람은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 같은 놈한테 일은 일입니다. 그러니 가지요. 게다가 고맙습니다. 어렵게 하는 말입니다.” 그가 더욱 노골적으로 털어놓으면서 홱 몸을 돌려 처음으로 손턴 씨를 완전히 쳐다보았다.
“나 역시 어렵게 하는 제안이라네.” 손턴 씨가 히긴스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늦지 않도록 주의하게.” 그는 업주의 위치로 되돌아가서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장에 게으름뱅이는 용납하지 못하니까. 지각에 대한 벌금 조항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지. 말썽 일으키는 게 눈에 띄면 곧바로 자넨 해고야. 그러니 이제 자네 처지가 어떤지 파악됐겠지.”
“오늘 아침 제 머리를 말씀하셨지요. 전 아마 제 머리를 달고 가지 않을까 싶은데, 오히려 머리를 달지 않고 가는 게 더 낫겠습니까?”
“내 사업을 망치는 데 그 머리를 쓴다면 없는 게 낫지. 딴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붙여만 놓는다면 있는 게 낫겠지.”
“노동자의 권익이 끝나고 사주의 권익이 시작되는 지점을 결정하려면 제 머리가 많이 필요할 겁니다.”
“자네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내 일은 여전히 저기 있다네. 그러니 그만 가겠네.” (P520-521)
그는 사랑이 뭔지 그때 알았다. 사랑은 자신이 버둥거리고 있는 활활 타오르는 격정의 불길 속 날카로운 고통, 지독한 경험이었으니! 하지만 이 위대한 정열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용광로를 지나서 더 의미 있고 더 인간적인, 평온한 중년을 향해 자신의 길을 헤쳐나가게 될 것이다. (P536)
“사실,” 그가 말했다. “그 사람이 날 상당히 헷갈리게 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업주였던,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업주의 티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 둘이 어떻게 한 몸으로 묶여 있는지는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입니다.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고 그 사람 여기도 자주 들릅니다. 그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업주가 아닌 한 인간으로 알게 되는 거지요.” (P540~541)
그러면 그녀는 밀턴을 떠올렸고, 그곳과 이곳의 대조적인 생활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거릿은 갈등하거나 애쓸 필요가 없는, 아무 일 없는 편안함에 질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듯 약에 취해, 주위에 차고 넘치는 풍족한 생활 너머에 있는 삶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런던에도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바로 그런 하인들이 자신들만의 지하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그런 세계의 희망과 두려움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상전이 원하는 게 있거나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그들을 찾을 때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마거릿의 마음과 생활 방식에는 뭔가 불만스러운 이상한 공백이 있었다. (P595-596)
이제 고통인지 쾌락인지 알 수가 없는 날카로운 느낌들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한 마일 한 마일 지날 때마다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하나하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가버린 날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에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이 길을 지나간 건 부모님과 함께 이곳을 떠났을 때였다. 떠나던 그날, 떠나던 그 계절은 음산했고 그녀 스스로도 절망스러운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때는 부모님이 옆에 있었다. 이제 그녀는 천애 고아였고, 부모님은 기이하게도 그녀 곁을 떠나 이 땅에서 흔적을 감추고 없었다. 햇살이 흘러넘치는 헬스턴의 길과, 굽이마다 서 있는 익숙한 나무가 예전과 똑같이 여름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자연은 그대로인 것 같았고, 변함없이 푸르렀다. (P615-616)
모두 변해 있었다. 약간씩이었지만 구석구석 변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가족 구성원들 안에서도 출가나 죽음 혹은 결혼, 아니면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생긴 자연적인 변동에 따른 변화가 있었는데, 이런 세월의 변화에 따라 우리는 어느새 유년시절에서 청춘으로 옮아가고, 그 뒤 장년기를 거쳐 나이가 들면서 과일처럼 완전히 익게 되고, 그 자리에 떨어져 조용한 대지의 품에 묻히는 것이다. (P628-629)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전에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이제 강한 확신으로 자리 잡은 어떤 생각, 손턴 씨는 더 이상 자신을 예전처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손턴 씨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어떤 해명도 자신에게 예전의 자리를 되돌려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의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자신의 화답이라면 아예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했고, 그 결심을 굳게 지켰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몸을 돌려 돌아보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들리면
제럴드 그리핀의 아름다운 이 시구처럼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 손턴 씨가 기꺼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자신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생각을 하는 동안 내내, 울컥하는 감정을 계속 꼭꼭 눌러 삼켰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떤 상상을 하든 자신의 본모습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건 뻔한 소리에 허황된 상상이었고, 그 상상은 그녀가 느끼는 회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 변했다는 느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 그리고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운 느낌에 마거릿은 무력감이 들었다. 아무것도 똑같지 않았다. 이렇게 구석구석 조금씩 변한 것이 그녀가 하나도 못 알아볼 정도로 완전히 변했을 경우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P637-638)
만약 세상이 그대로라면, 세상은 퇴보하고 썩고 말 거야. 변하는 게 터무니없지만 않다면 말이지.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변한 게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에서 물러나 보면, 내 주위의 모든 변화는 정당하고 필요한 거야.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하길 원한다면, 즉 희망적이고 진실한 마음을 갖길 원한다면, 환경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야 해. (P639)
지금 같은 어느 날 밤 그녀는 로맨스 소설에서 읽었던 적 있는 여주인공들처럼 용감하고 고상한 삶을, 두려움도 치욕도 없는 삶을 살겠노라고 혼자 맹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의지만 있다면 그런 삶이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의지뿐 아니라 간절한 기도가 함께해야 진정한 여주인공의 삶을 살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자신만 믿고 있다가 그녀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건 자신이 지은 죄의 당연한 결과이므로, 그 죄에 대한 모든 변명과 그런 죄에 이끌리게 된 유혹은 자신을 저 밑바닥까지 경멸하게 된 사람에게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 있어야 했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죄와 마주 보고 섰다. 그 죄의 진정한 실체를 자각했다. 거의 모든 인간이 모호한 행동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며 그 행위의 동기가 죄를 고귀하게 만든다던 벨 씨의 친절한 궤변은 그녀에게 한 번도 크게 와 닿았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모든 사정을 알았다면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처음 생각은 비겁하고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아니, 지금조차 벨 씨의 약속대로 손턴 씨의 눈에 자신의 정직성이 부분적으로나마 해명되어야 한다는 데 대한 조바심은, 이제 죽음을 통해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새로이 깨우친 마당에는 아주 사소해서 생각할 가치가 별로 없었다. 그녀는 비록 세상 모든 이가 속일 작정으로 말하거나 행하거나, 혹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해도, 비록 가장 소중한 이해관계가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고 가장 소중한 이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해도, 비록 자신에 대한 존경이나 경멸의 근거가 되는, 신 앞에 혼자 꼿꼿하게 서 있는 자신의 진실 혹은 거짓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자신이 영원히 진실을 말하고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P657-658)
밀턴에서는 굴뚝들이 여기를 뿜어냈고, 끊임없는 굉음과 함께 세찬 박동에 맞춰 어지럽게 돌아가는 기계들은 쉼 없이 허우적거렸다. 끝없이 돌아가는 나무와 쇠와 증기는 생각도 없고 목적도 없었다. 하지만 끈덕진 기계들의 단조로운 노동에 뒤지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칠 줄 모르는 끈기로 밀어붙이는 노동자들이었다. 생각과 목적을 갖고 있는 그들은 쫓아가느라 —무엇을?— 분주했고 쉴 틈이 없었다. 거리를 한가롭게 걸어가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무도 그냥 즐거움을 위해 걷고 있지는 않았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흥분이나 혹은 불안감에서 생긴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뉴스거리를 찾았고, 도매시장이나 거래소에서도 남자들은 일상생활에서처럼 이겨야겠다는 끝도 없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옆으로 밀쳐냈다. 도시 위로 음울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P668)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는 사력을 다해 불철주야 모든 위급 사태를 예견하고 그것에 대비했다. 그는 어느 때보다 더 조용하면서 집에서는 여자들에게 자상했다. 공장의 인부들에게는 별말을 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들도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인부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많은 경우 퉁명스럽고 단호했지만, 그 대답에는 이전에 지글지글 타오르던, 무슨 일이든 험한 말과 물어뜯는 듯한 비난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던 억눌린 반감이 아니라 자신들이 목격했던, 사장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었다. “사장님이 골치 아픈 일이 많은가 보이.” 어느 날 히긴스는 지시 사항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를 추궁하는 손턴 씨의 짧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렇게 말했다. (P672-673)
“아, 손턴 씨, 당신께 전 부족한 사람이에요!”
“부족하다니요! 스스로 쓸모없다고 느끼는 날 조롱하지 마십시오.”
잠시 후 그가 그녀의 손을 얼굴에서 부드럽게 떼고 이전에 그녀가 폭도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막아섰던 대로 그녀의 두 팔을 늘어뜨려보았다.
“기억나오, 내 사랑?”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얼마나 무례하게 그 사랑을 되돌려주었는지 말이오?”
“제가 얼마나 말을 잘못했는지는 기억나요. 그게 전부예요.”
“날 좀 봐요! 얼굴을 들어요. 보여줄 게 있소!” 그녀가 수줍음으로 붉어진 아름다운 얼굴을 천천히 그와 마주했다.
“이 장미를 알고 있소?” 그가 꽃잎 몇 장이 고이 간직되어 있던 수첩을 꺼냈다.
“아뇨!”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내가 당신께 드렸었나요?”
“아니, 천만에! 그러지 않았소. 아마 이와 비슷한 장미를 꽂았던 적은 있을지 모르오.”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것들을 보더니 살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헬스턴에서 가져온 것들이군요, 그렇죠? 꽃잎 가장자리의 굴곡이 깊은 걸 보니 알겠어요. 어머! 거기 갔었나요? 언제 갔었어요?”
“지금의 마거릿이 자라온 곳을 보고 싶었소. 참으로 힘든 시기였고 당신을 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희망도 전혀 없었는데 말이오. 르아브르에서 오는 길에 거길 갔었소.”
“그 꽃들은 제게 주셔야 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에서 그것들을 빼앗으려고 부드럽게 힘을 썼다.
“그러리다. 다만 값은 지불해야 하오.”
“쇼 이모께서는 어떻게 말씀드리죠?” 말없이 잠시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녀가 속삭였다.
“내가 말하리다.”
“아, 아니에요! 제가 고백해야 해요. 하지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뭐라고 말할지 알 것 같소. 내지르는 첫마디가 ‘그 사람이라고!’일 거요.”
“쉿!” 마거릿이 말했다. “안 그럼 저도 무시하는 듯한 당신 어머니 말투를 흉내 낼 거예요. ‘그 처녀 말이냐!’ 하시겠죠.” (P696-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