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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23. 2024

로맹 가리의 <하늘의 뿌리>

영화 <루츠 오브 헤븐The Roots of Heaven> 1958년

인간의 존엄을 철저히 짓밟는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모렐은 출감 뒤 곧바로 아프리카로 가서 코끼리 보호 운동에 뛰어든다. 그에게는 코끼리가 수용소 생활 당시 절망속에 굴복하지 않도록 도와준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외쳤죠. 러시아 남자라고?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러시아 남자를 사랑할 수 있지? 그럴 때면 그녀는 약간 기분이 상해서 어깨를 으쓱하곤 했죠. 당연히, 사랑을 하면서 국적을 고려했던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동포들은 그녀를 무척이나 비난했죠. 이웃들은 길에서 만나도 그녀를 빤히 보며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지나쳤지요. 용기 있는 사람들은 혼자 있는 그녀를 만나면 큰소리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죠. 이를테면 군대 선봉에 서서 그녀를 짓밟고 지나간 사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P27)     


나는 코끼리를 잡지 않아요. 코끼리들과 함께 살 뿐이오. 코끼리를 쫓고 연구하느라 몇 달씩 보내곤 하지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끼리를 보고 감탄하죠. 사실 난 코끼리가 될 수만 있다면 무엇이건 내놓을 거요. 좀 전에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난 독일 사람에 대해 특별히 나쁜 감정이 없어요. 내가 싫어하는 건 훨씬 광범위한 것입니다. (P54)  

   

원주민들에게는 적어도 구실이 있다. 그들 식량에 단백질이 모자란다는 구실이다. 그들은 먹기 위해 코끼리를 사냥한다. 코끼리가 그들에게는 고기인 것이다. 그러니 코끼리를 보호하려면 먼저 아프리카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야 한다. 이는 자연보호를 위한 모든 캠페인의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백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스포츠'로 사냥을 한다. 총질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부드러운 갈색 눈에는 그 어떤 말보다 분명한 비탄의 표현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첫마디에 곧 명료하게 이해했다. 이 사람에게도 고독이 문제라는 것을. (P57)     


(...) 한 친구가 독방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 떠올린 생각인데, 폭과 길이가 각각 일 미터 오십 센티미터에 일 미터 십 센티미터인 독방이었죠. 그 친구는 감방 벽 때문에 질식할 것처럼 느껴지면 자유로운 코끼리 떼를 상상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매일 아침 독일군들은 그 친구가 기운이 생생해서 농담을 하고 있는 걸 보곤 했죠. 그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지요. 독방에서 나오면서 그는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었죠. 우리는 감방에서 더 견디지 못할 상태가 괴면 아프리카의 확 트인 공간을 돌진하는 이 거대한 동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러자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그 노력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었죠. 홀로 남아 기진맥진한 채 우리는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었으며, 눈을 감은 채 지나는 길마다 모든 걸 쓸어버리는 그 무엇도 멈춰 세울 수 없는 우리의 코끼리를 보았죠.  (P60-61)     

공산주의자들의 공훈을 부인할 수는 없소. 인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공훈 말이오.... 서양에는 문명이 있을지 몰라도 공산주의자들은 진실을 가지고 있소. 비인간적인 방식을 운운하며 그들을 비난하지는 마시오. 그들한테는 모든 게 인간적이니까. 우리는 동물학상 모두 거대한 하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하오! (P73)     


그리고 그가 마음 깊이 느끼고 있는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하다 보면 그 의미가 달라져버려 그것을 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말을 하면서 자기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생각만으로 충분한지, 생각이 단순히 모색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참된 시각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닌지, 인간의 뇌 속에 아직 사용되지 않고 있는 신경이 있어서 언젠가 이 생각들을 무한한 비전의 영역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P80)     


파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정치적 테러라는 보고를 받고 싶었던 모양일세. 내가 보고서 내용을 견지하니까 그들은 정말 빈정거리는 어조로 내게 대꾸하더군, 만일 이 사건이 조직적인 행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난 용서 받을 여지가 없을 거라고 말일세. 정말이지 그들은 내가 단지 차드에서 마우마우 테러 집단을 길러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내 책임을 다 못했다고 질책하는 것 같았네. 결국 그 사람들은 식민지 정책이 반란 폭동이나 학살에 이르지 않는 한 성공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어떤 의미로는 그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P86)     


인간이란 종은 살기 위해 공간과, 땅과, 그리고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공기와조차도 갈등 상황에 놓였다. 경작지는 점차 산림을 침범하고 도로는 큰 짐승 떼의 평화를 좀먹어 들어간다. 찬란한 자연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P92)     


쇨세르, 아직도 우리가 주변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생명의 표현을 파괴하고 있는데 어떻게 발전이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P94)    

 

정말이지 우리는 이용가치나 효용이 없고, 이따금씩 모습을 살짝 드러내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이 살아있는 자유, 이 자연을 이젠 존중할 능력이 없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자유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겠군요.... 사람은 구두 밑창이나 재봉틀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보존해야만 합니다. 가끔 피신할 수 있는 여백을, 보호구역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문명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직 유용성을 따지는 문명이란 궁극적으로 극단까지, 즉 강제수용소까지 치달을 것입니다. 여백을 남겨두어야 하지요. (P95)     

그러나 신문기자들은 계속해서 그를 둘러쌌다. 모렐이 반기를 들기 전에 지사님께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늘 거절당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이 사건이 세상에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대중의 동정은 모렐 편, 코끼리 편으로 기울지 당국 편으로는 기울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해마다 삼만 마리의 코끼리를 죽인다는 것, 그것이 모두 당구공과 페이퍼 나이프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 사실입니까? 현재 금렵 지구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P101)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긴 노력 가운데 이룩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영국에서는 그랬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일종의 기본적인 예의가 있다고 깊이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어쩌면 흘러간 시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며, 비천한 현실의 무게가 머지않아 우리를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거라는 사실도 기꺼이 인정합니다.  (P111)  

   

"그제야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나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의 신화에 어울리는 사내를 발견하게 되기라고 기대하며 그를 맞으러 나갔지요. 그리고 그의 단순함과 작은 키, 약간 거친 그의 얼굴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함이란 사람들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천지성에 끊임없이 말하는 모든 민중의 영웅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그를 전혀 다르게 보고 있어요. …" (P161)      


-- 가엾은 모렐. 그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인간들과 더불어 인간적인 이상을 옹호하려고 하는 그 모순을 해결한 사람은 지금껏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P186)    

  

그러면 드 생드니 씨, (왜 그녀가 내 이름 앞에 '드'라는 말을 붙였는지 모르겠더군요) 어떤 사람이 당신들에게, 당신들의 잔인성에, 당신들 얼굴에, 당신들 목소리에, 당신들 손에 질렸다고 해서 당신은 그 사람이 미쳤다고 보세요? 그 사람이 당신들, 당신네 학자, 당신네 경찰, 당신네 기관총과 더는 조금도 닮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신병원에 가둬야 합니까? 요즈음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다만 그 사람들은 그가 하는 행동을 할 용기가 없을 뿐이죠. 너무 비겁하거나 너무 지쳤거나 너무 냉소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이를 이해합니다. 아주 잘 이해하지요. 그 사람들은 그들의 사무실로, 수용소로, 군대로, 공장으로 가서 복종해야 하는 걸 지긋지긋해하지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이를 생각하고 미소 짓지요. 나처럼 말이에요. (P190)  

    

(...) 독일 수용소에 있을 때 레지스탕스 대원들 사이에서 로베르라고 불리던 친구가 하나 있었소. 내가 여태껏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친구였지요. (...)

그는 항상 쾌활했소. 매사에 바닥까지 갔다가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 그런 사람만이 갖는 쾌활함이었소. 용기가 사라지고 주위에 온통 슬픈 얼굴을 하고 있고, 어깨가 축 처진 놈들만 보일 때, 그에게로 가면 항상 용기를 되살려주는 무언가가 있었소. 예를 들면 어느 날, 그는 여자에게 한쪽 팔을 내준 사람 모양을 하고 블록으로 들어왔소. 우리는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소. 좌절해서 의기소침하고 지저분한 꼴을 하고 말이오. 좀 기운이 남아 있는 자들은 투덜거리고 징징대며 큰 소리로 욕을 해대고 있었소. 로베르는 우리의 어리둥절한 눈초리를 받으며 계속 상상의 여인에게 팔을 내준 채 막사 안을 가로질러 가더니, 그 여자에게 침대 위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소. (...)

그는 때때로 여자의 턱을 만지작거리거나 손에다 입을 맞추기도 하고 또 귀에다 뭔가 속삭이다가는 그녀 앞으로 곰처럼 예의바르게 몸을 기울이기도 했소. (...)

좋아, 미리 알려두겠어 오늘부터 규칙을 바꾼다. 먼저, 우는 소리를 그만둬라. 숙녀 앞에서 남자답게 행동하도록 해라. ‘남자답게’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정하고 품위 있게 보이려는 노력을 해다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손봐주겠다. 이 숙녀분은 악취 나는 이런 데선 단 하루도 못 견딜 게다. 게다가 우린 프랑스인이다. 예의 바르고 점잖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이 여자 앞에서 존경심을 내보이지 않는 놈, 예를 들어 숙녀가 있는 자리에서 방귀를 뀐다든지 하는 놈은 내가 상대하겠다. (...)

이때부터 정말 기이한 일이 일어났소. 블록 K의 사기가 갑자기 몇 단계 뛰어 올랐던 것이오.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해지려는 노력이 있었지요. (...) 저마다 굴복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기에게 남아 있는 남성적인 면을 끌어내곤 했다오. (P252-255)     

 

그에게는 코끼리가 거대하고 강력한 자유, 우리 자유의 상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소,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해보시오. 그래도 이 사실을 완전히 밝힐 수는 없을 거요. 우스꽝스럽지만 성실한 그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그는 “자연의 찬란한 광채를 보호”하려는 것이오. 바로 자유를 말이오. (P267)  

    

이슬람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뿌리'라고 부르오. 멕시코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생의 나무'로, 모두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들어 아프도록 가슴을 두드린다오. 모렐 같은 고집쟁이들이 청원서며 투쟁 위원회, 보호 조합 등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려 애쓰는 어떤 보호 욕구 말이오. 그들은 가슴속에 깊이 묻힌 이 하늘의 뿌리들을 드러내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의 욕구, 자유 욕구, 또는 사랑의 욕구에 응하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요. (P273)      


저 사람들이 아직도 저러는 것은 사냥을 금지당한 대신 다른 걸 전혀 얻지 못했기 때문이야.... 아무것도 대체품으로 주지 않고서 과거와 단절시켜버리면 과거만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기 마련이지..... (P289)     

 

원칙적으로 나는 이데올로기를 안믿어. 대개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다 차지해 버리지. 게다가 코끼리란 크고 거추장스러워서 바쁠때는 아주 이용가치가 없어 보이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듯이,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코끼리따위는 개의치 않는 민족주의란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어리석은 바보짓거리 가운데 하나야. 인간은 그런 바보짓거리를 여럿 만들었지. (P374)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몹시 힘들게 고생을 해봐야 하는 법이오. (P381)

      

알고 있소. 모두들 코끼리를 끌어들이는 걸 교활하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코끼리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저마다 코끼리를 자기 자신에 맞는 것과 연결시킨다면, 난 그럼 된 거요. 나머지야 뭐, 그들이 공산주의자건, 티토주의자건, 민족주의자건, 아랍인이건, 체코 인이건 상관없소. 그런 건 난 관심 없소. 그들이 합의만 한다면 난 된 거요. 내가 옹호하는 것은 여자요. 난 여러국가들, 정당들, 여러 정치체제가 자리를 촘촘히 줄여서, 위협받아서는 안되는 것을 위해 자리를 남겨주었으면 하는 거요.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인 일을 하고 있지요. 자연의 가장 큰 자식들로부터 시작해서 자연보호를 하려는 거요. 그 이상 멀리서 찾아서는 안 되오. (P433-434)     


나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든 환영하는 바요. 아시겠지만 민족주의란.... 백인 사냥꾼이든 흑인 사냥꾼이든, 고대인이든 현대인이든 자연보호에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 모든 사람과 난 함께 할 거요. 인종, 계급 혹은 국가 따윈 난 무시하오.... (P435)     


다만 흑인들에겐 숭고한 변명이 있소. 그들은 허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있소. 그들에겐 고기가 필요하오.... 그래서 그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코끼리를 도살하는 것이오. 전문용어를 쓰자면, 단백질의 필요 때문이라는 거지요. 이 이야기의 교훈은? 그들이 코끼리를 존중하는 사치를 누릴 수 있으려면 충분한 단백질을 그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을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그들을 위해 해야 되오. 따지고 보면 나한테도 정치적인 계획이 있는 셈이오. 아프리카 흑인의 생활 수준을 향상 시킨다는 것. 이건 자동적으로 자연보호의 일부분을 이루지요. 그들에게 충분하게 먹을 것을 주고 나야 코끼리를 존중하는 게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거요. 배가 부르면 그들도 이해할 거요. 코끼리가 땅 위에 남아 있고,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코끼리들이 우리와 함께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사람이 굶어죽는 것부터 막아야 하오..... 이건 함께 가는 문제요. 존엄성의 문제요. 어떻소, 분명하지 않소? (P437)   

  

아프리카 인의 배가 부르게 될 때 그때는 어쩌면 코끼리의 미적 측면에서도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일반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기분 좋은 명상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자연은 그들에게 코끼리 배를 가르고, 거기다 이빨을 박고 물어뜯으라고, 멍멍해질 때까지 먹고 또 먹으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또 언제쯤 고기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P443)     

--당신은 고생대 초기에 최초로 물 밑의 진흙으로부터 나와, 없는 허파가 생기기를 기다리며 숨을 쉬면서 자유로운 대기 속에서 살기 시작한 선사시대의 파충류 동물을 기억하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요.

--좋아요. 그런데 그 놈 역시 미쳤다오. 완전히 머리가 돌았지. 그 때문에 그렇게 애쓴 거지요. 그 놈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오. 이걸 잊어선 안되오. 그놈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있지도 못할 거요. 그놈은 아마 간이 부었을 거요. 우리도 시도를 해봐야 하오. 그게 진보라는 거요. 그놈처럼 여러 번 해보면 아마 우리는 결국 필요한 기관, 예를 들면 존엄이나 우애 같은 기관을 갖게 될 거요. 그런 기관은 정말 사진 찍을 만할 거요. 그걸 위해 나는 당신에게 필름을 남겨두라고 말한 거요. 혹시 모르잖소.....

--나는 항상 만일을 위해서 필름을 남겨 두지요. (P554-555)   

  

풍뎅이는 뒤로 나자빠져 발을 버둥거리며 몸을 뒤집으려고 힘겹게 애쓰고 있었다. 모렐은 발을 멈추고 발밑의 벌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즈음 그는 수용소에 있은 지 일 년째였고, 석 주 전부터 허기진 채 매일 여덟 시간씩 시멘트 부대를 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가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그는 어깨 위 짐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무릎을 굽히고 집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 벌레를 바로 놓아주었다. 

그는 짐을 내려놓을 곳까지 가는 도중에 다시 두 번을 더 그렇게 했다. 그의 뒤에서 걷고 있던 출판업자 르벨이 제일 먼저 무슨 일인지를 알았다.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자기 발밑에 떨어진 첫 번째 풍뎅이를 도왔다. 곧 피아니스트 로트시타인도 그렇게 했다. 그의 몸은 너무도 가냘퍼서 마치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닮으려는 것만 같았다. 이때부터 거의 모든 정치범들이 풍뎅이 구조에 나서게 되었고, 일반 죄수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들 곁을 지나가곤 했다. 그들에게 허락된 이십 분의 휴식 시간 동안 정치범들은 누구 하나 피로에 지쳐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때 같으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않아 꼼짝도 않고 호각 소리가 날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새로운 기운을 찾은 것 같아 보였다. 그들은 눈을 땅에 박고서 도와줄 풍뎅이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것은 오래 계속되지 못 했다. 그뤼버 중사가 그곳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자는 그저 짐승 같은 놈은 아니었다. 그는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전쟁 전에 슐래츠비히 홀스타인에서 교사로 일했다. 대번에 그는 무슨 일인지를 알아차렸다. 적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모든 걸 빼앗긴 제로 상태의 인간들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도전, 공공연한 신념 선언, 존엄성의 선포를 마주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즉각 사태를 파악하고, 새로운 세계의 건설자들에게 던져진 이 도전의 중대성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는 싸움에 뛰어들었다. 우선 죄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아직 무슨 영문이지 확실히 모르지만 일만 생기면 두들겨줄 준비가 되어 있던 감시병들도 그를 따랐다. 그들은 총 개머리와 장화 발로 골고루 후려쳤다. 그러나 그뤼버 중사는 그 시위자들의 마음을 적절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님을 곧 알아챘다. (P609-610)     

해방 후 수용소를 나온 모렐은 아프리카 차드로 가서 이번엔 진짜 코끼리를 보호하겠다고 나선다.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을 벗어난 그가 왜 또 코끼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거는 걸까.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히고, 또한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도 진단하고 있는 ‘수용소 밖 세상’은 수용소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자유’나 ‘인권’과 같은 정신적 가치들이 ‘거추장스럽고 낡아빠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오직 유용성만을 따져 발전에 방해가 되는 코끼리 따윈 말살하는, 그리하여 ‘강제수용소로까지 치달을’지도 모를 위험한 세상인 것이다. 밥콕 대령이나 생드니처럼, ‘존엄’과 ‘우애’ 같은 낡은 가치들에 집착하는 인물들은 ‘흘러간 시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며,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마지막 남은 개인들’이요, ‘서투르고 성가시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코끼리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모렐이 코끼리라는 이름으로 구하려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요, 인간의 존엄이다. 진보라는 허울 아래 학살되는 코끼리나, 뒤집혀서 버둥거리는 풍뎅이가 상징하는 것은 멸종 위기에 놓인 인간이며, 말살 위기에 놓인 인간의 존엄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렐이 수용소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세상을 상대로 벌이는 건 인간의 존엄을 구하기 위한 ‘명예 전쟁’이다.  (P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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