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처녀 자살소동> 1999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 커스틴 던스트 주연의 영화 '처녀 자살 소동'의 원작 소설. 20여 년 전, 평범한 마을에서 기묘한 사건이 일어난다. 리즈번가 10대 소녀 다섯 명이 모두 자살하고 만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단순히 '우리'라고만 지칭되는 불특정 다수의 동네 소년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성적 호기심이 풍부한 이 소년들은 저마다 리즈번 자매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 어른이 된 이들이 리즈번 자매들의 자살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조사에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날 아침은 리즈번가(家)에 남은 마지막 달이 자살할 차례였다 —이번엔 메리였고, 테리즈처럼 수면제를 삼켰다— 집에 도착한 두 구급 요원은 이젠 칼이 들어 있는 서랍이며 가스 오븐, 밧줄을 맬만한 지하실의 들보가 어디 있는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훤히 알고 있었다. 구급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전과 다름없이, 우리가 보기에는 갑갑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는데, 뚱보 요원은 그러고도 숨이 턱에 차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놈들아, 이건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니야. 원래 이 정도 속도로 움직이는 거라고.” 그는 무거운 인공호흡기와 제세동기(除細動器)를 들고 기괴하게 자라난 덤불과 화산이 분출하는 듯한 잔디밭은 지나갔는데, 그곳은 13개월 전 사건이 시작될 때만 해도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곳이었다.
시작은 열세 살밖에 안 된 막내 세실리아가 했다. 그 애는 스토아 철학자처럼 목욕을 하다 손목을 그었다. 사람들이 분홍빛 물에 둥둥 떠 있는 그 애를 발견했을 때, 노란 두 눈은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조그만 몸에서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물씬 풍겼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온해 보였던지 구급 요원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한 걸음도 더 내딛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리즈번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드는 바람에 방 안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욕실 매트 위에는 피가 고여 있었고, 변기 안에서는 리즈번 씨의 면도칼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따뜻한 물 속에 있으면 출혈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구급요원들은 세실리아를 물에서 끌어내 팔에 지혈대를 댔다. 젖은 머리카락이 등 위로 흘러 내렸고 손발은 이미 파래져 있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막 봉긋해지기 시작한 젖가슴 위에 모은 두 손을 벌리자 코팅된 성모마리아 그림의 모습을 드러냈다. (P9-10)
리즈번 자매들은 열세 살(세실리아), 열네 살(럭스), 열다섯 살(보니), 열여섯 살(메리), 그리고 열일곱 살(테리즈)이었다. 그 애들은 키가 작았고, 청바지를 입으면 엉덩이가 볼록 튀어나왔으며, 동그스름한 뺨은 마치 등(背)처럼 보드라웠다. 지나가다 그 애들을 한 번씩 훔쳐볼 때면, 마치 우리가 그동안 베일 쓴 여자들만 봐 온 것처럼 그 애들이 정숙하지 못하게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서 리즈번 부부가 그렇게 예쁜 애들을 낳았는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리즈번 씨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는데, 늘 비쩍 마른 소년이 허옇게 센 자기 머리를 보고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 목소리 톤이 높아서, 나중에 럭스가 자살 소동으로 병원에 실려 가던 날 그가 어떻게 울었는지 조 라슨이 얘기해 주었을 때 우리는 계집애 같은 그의 울음소리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P14)
그로부터 얼마 후 광고계에 투신하기 위해 학교를 떠난 펄프 선생님은 그날 우드하우스 부인이 했던 말 중 일부를 기억했다. “슬픔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라고 말했지. ‘하지만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지요.’ 내가 이 말을 기억하는 건 나중에 다이어트 제품 광고에서 써먹었기 때문이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체중이 느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너희들도 아마 봤을 거다. (P123)
리즈번 자매들의 수다에 놀라서 사내 녀석들은 처음엔 입도 뻥긋 못했다. 그들이 그렇게나 말이 많고, 그렇게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세상의 풍경에 대해 그렇게 많은 손가락질을 해 댈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간헐적으로 엿보는 사이사이에도, 그들은 계속 살아가고 있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성장했으며 철저한 검열을 거친 가족 서가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섭렵했던 것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나 학교에서의 관찰을 통해 데이트 예절까지 꿰뚫고 있어서,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 가는 방법이라든가 어색한 침묵을 깨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데이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은 솜이 삐져나온 것 같은 모양의 올림머리나 겉으로 다 드러나 보이는 머리핀에서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리즈번 부인은 딸들에게 외모를 꾸미는 법을 일러 준 적도 없었고, 집에서는 여성 잡지도 못 보게 했다. (<코스모폴리탄>에 실린 앙케트 중 “당신은 오르가슴을 여러 번 느끼시는 편입니까?”라는 질문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P146-147)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니?”
“누가 그래?”
테리즈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비가 오나 보려고 한 손을 내밀었다. “세실리아는 좀 이상한 애였지만 우린 달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린 그저 살고 싶을 뿐이야. 사람들이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P155-156)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대통령에게 측은함을 느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얘기가 실제 상황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P264)
우리가 얘기를 나눈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 동네의 쇠락이 리즈번 자매들이 자살하고 난 뒤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애들을 욕했지만 조류가 서서히 바뀌면서 그 애들을 희생양이 아닌 선각자로 여기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애들이 자살한 개인적 이유, 스트레스 장애니 신경전달물질 결핍이니 하는 것들은 점점 잊어버리고, 대신 그 애들의 죽음을 퇴락을 예견한 선견지명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여 나간 느릅나무와 가혹한 햇빛, 자동차 산업의 지속적인 쇠퇴에서도 리즈번 자매들의 혜안을 보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변화를 알아챈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서로 부딪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으니 쓸어 내야 할 낙엽도, 태워야 할 낙엽 더미도 없었다. 겨울에는 눈도 내리지 않았다. 훔쳐볼 리즈번 자매들도 없었다. 물론 이따금 우리의 (지금 생각하니, 리즈번 자매들이 현명하게도 절대 보지 않으려 했던 장소인) 우울한 여생 속을 비척비척.
리즈번 자매들 때문에 자살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훗날 아는 사람 중 누군가가 —개중에는 그 일이 있기 전날 책을 빌려 간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 생을 끝낼 때면, 우리는 그들이 거추장스러운 부츠를 벗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모래언덕 위에 위치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가족 소유의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곤 했다.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캐러필리스 할머니가 그리스어로 구름에 써 놓은 불행의 징조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인생길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눈으로 바라보거나 고개를 움찔움찔 하면서,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혹은 용감해지게 만드는 어떤 비밀을 풀어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항상 리즈번 자매들이 있었다. 그 애들은 죽어 가는 숲 때문에, 정원용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마시려고 수면에 올라왔다가 프로펠러에 사지가 잘려 나간 바다소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피라미드보다도 더 높이 쌓인 폐타이어를 보고 목숨을 끊었으며, 우리가 절대로 될 수 없었던 그네들의 연인을 찾지 못한 것 깨문에 목숨을 끊었다. 결국 리즈번 자매들을 갈가리 찢어 놓은 수많은 고통은 그들이 오랜 고민 끝에, 오점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어른들이 물려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P285-287)
“그것은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읽힌 문제였다.” 학문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리즈번 자매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내기 위해 쓴 마지막 논문에 호니커 박사는 이렇게 적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자살은 러시안 룰렛과도 같다. 총알은 오직 한 개의 약실에만 들어 있다. 리즈번 자매들의 경우에는 모든 약실에 총알이 들어 있었다. 부모의 학대라는 총알, 유전적 성향이라는 총알, 시대적 병리라는 총알, 피할 수 없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총알. 나머지 두 개의 총알에는 딱히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약실이 비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을 뒤쫓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 자살의 본질은 슬픔이나 수수께끼가 아닌 단순한 이기심이었다. 그 애들은 신에게 맡겨 두는 편이 더 나았을 결정을 자신들의 손으로 내렸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큰 힘을 갖고 있었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두해 있었으며, 지나치게 몽상적 이었고, 지나치게 맹목적이었다. 그들이 떠난 뒤에 남은 것은 모든 자연적인 죽음을 압도하는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사실들을 나열한 시시하기 짝이 없는 목록이었다. 째깍대는 벽시계, 대낮에도 컴컴한 방,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소녀의 괘씸함. 다른 모든 것에는 깜깜했지만 고통, 개인적인 상처, 잃어버린 꿈에 대해서 는 백발백중 번뜩였던 그녀의 뇌. 광활한 빙원을 가로지르듯 서서히 멀어져서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그만 팔을 흔드는 검은 점이되어 버린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들보 위로 던져진 밧줄, 긴 생명선 울 가진 손바닥 위로 떨어뜨려진 수면제, 열어젖혀진 창문 밸브가 열린 오븐 등등. 리즈번 자매들은 우리도 그들의 광기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발자국을 뒤쫓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 지를 생각한 결과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서 동맥을 끊은 존재의 공허감, 그 공허함과 적막함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마룻바닥에 찍힌 흙발 자국. 발밑에서 걷어차인 트렁크에 남은 그들의 흔적 속에 주둥이를 처박고 냄새를 맡아야만 했 다. 그들이 자살한 방들의 공기를 영원토록 들이마셔야 했다. 결국 그들이 몇 살이었는지, 그들이 여자였는지 같은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력 거리는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P289-291)
이 같은 한 가정의 몰락과 다섯 생명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대체 누구의 잘못이며 책임이고, 그 원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책임을 운운하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부모란 사람들은 딸들이 줄줄이 자살할 때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역자는 작가가 결론이나마 시원하게 내려 주실 내심 기대했었나 보다.
그러나 잘나가는 신세대 미국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그런 모든 의문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이제는 중년이 된 소년들의 입을 빌어 다섯 소녀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애도하는 데서 그치고 있을 뿐이다.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