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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30. 2024

요시모토 바나나의 <막다른 골목의 추억>

영화 <막다른 골목의 추억> 2019년

요시모토 바나나가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소설집 『막다른 골목의 추억』. 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맞닥뜨린 다섯 명의 여자가 그 ‘막다른 골목’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그린 다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대학 동창인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과 재회의 순간을 다룬 《유령의 집》, 독극물 테러를 당한 여성의 후일담 《엄마!》, 어린 시절 동네 친구와의 안타까운 추억을 담은 《따뜻하지 않아》, 5년간 짝사랑한 여성의 심경을 다룬 《도모 짱의 행복》, 약혼자와의 이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묘한 여행을 그린 《막다른 골목의 추억》을 만날 수 있다. 담담하게 시작된 짝사랑의 아픔에서부터 예치기 못한 사고로 알게 된 생의 진실까지,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전환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따뜻한 위로를 선사한다. 영화 <막다른 골목의 추억>(デッドエンドの思い出)은 2019년에 개봉한 대한민국 & 일본의 합작 영화이다.     

[유령의 집]

맥주도, 둘이서 작은 병으로 딱 하나 주문했지. 참 귀여운 할머니 할아버지였어. 뭐랄까, 차분하고 검소한 모습인데, 두 사람에게는 두 사람만의 소박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은 오랜 세월 쌓여 온 것이고, 그것만 지키면서도 삶이 계속되는, 그런 느낌이었어. 딱히 즐거워 보이는 건 아닌데도 보는 쪽은 안심이 되고 행복한 기분이랄까.            (P24)  

     

겨울의 구름 낀 하늘은 얼마나 의뭉스러운지 모르겠다. 두꺼운 구름과 잿빛 하늘과 휘익 부는 바람. 모든 것이 사람과 살을 맞대게 하기 위한 설정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영원히 계속되는 잿빛 속에서, 방 안에만 마냥 있고 싶다. 방 안에서, 누구든 타인과 한없는 육욕 속에 편안히 있고 싶은, 거기밖에는 쉴 곳이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재료를 사 들고, 그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의 끔찍한 방에 나는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조금도 으스스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왠지 방이 점점 엷고 투명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공기는 싸늘하고 맑고, 창밖으로는 역시 저멀리까지 두껍게 겹쳐진 잿빛 구름이 보였다.   (P35) 

       

서로가 서로의 미래를 배려해 연락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딱 한 번 이와쿠라에게서 메일이 왔다. 근황을 알리는 글 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쪽에서는 전혀 인기가 없네.’

그 말쿠하며 뚱딴지같은 느낌에 그의 모든 것이 떠올라,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제나 무료해 보였던 이와쿠라의 실루엣과, 함께 올려다보았던 하늘의 색깔, 손과 손가락 놀림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무언가가 살짝 어긋났다면 좋은 느낌으로 사귀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다시 만나는 일조차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P48-49)    

  

이거였어.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이 줄곧 들었지.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는 알았을 테지만 설마 이것일 줄은 몰랐어. 너무도 외로워서,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야. 내 혼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안의 빛과 바깥에서 쏟아지는 아름답고 투명한 빛, 그리고 둘 사이에 피어난 빛이 모두 하나가 되어 미래를 비추고 있었다.    (P56)   

  

[엄마!]

나 하나쯤, 이 세상에 있어도 그리 큰 공간은 차지하지 않는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 사라져도 모두들 마침내는 그 부재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풍경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상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란 형태를 쏙 도려냈을 뿐인 세상인데, 왜 그런지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가령 짧은 기간이었어도, 등장인물들이 언젠가는 시간의 저편으로 모두 사라져버린다 해도, 그 공간은 아주 소중한 것처럼 빛나 보인다.

마치 나무와 햇빛과 길 가다 마주친 고양이처럼, 사랑스러워보인다.

그 사실에 나는 화들짝 놀라, 몇 번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몸이 있고, 여기에 존재하고, 하늘을 보고 있는 나, 내가 있는 공간.

멀리서 빛나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운, 나의 한 번뿐인 이 몸에 깃든 생명을.          (P106-107)   

   

마치 새장에서 자라던 새가 어쩌다 새장을 벗어난 것처럼, 그 사건을 계기로 그때 나도 모르게 나는 내가 아는 세계 바깥쪽에 있었다.                         (P126)    

     

“사실은 다른 형태로 같이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왜 그랬는지 관계가 순조롭지 못했던 사람들. 아빠와 엄마, 옛날 애인, 헤어진 친구들, 어쩌면 거기에는 야마조에씨와의 인연도 포함되어있을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나와 그 사람들 관계는 도저히 원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멀리 있는 깊고 깊은 세계, 어느 맑은 물가에서 우리는 미소를 주고받으며 다만 서로에게 다정다감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 꼭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P127)    

  

[따뜻하지 않아]

나는 한 5년 전부터 주로 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리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사물이나 사건의 안쪽 깊은 곳까지 보려고 유념하고 있다.

사물이나 사건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려는 것과 자기만의 해석을 가미하며 보는 것은 아주 다르다. 나름의 해석, 혐오감, 감상 등 많은 것들이 잇달아 끓어오르지만, 최대한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서 점점 깊이 들어간다.

그러면 언젠가는 마지막 풍경에 도달한다. 무슨 수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그 사건의 마지막 풍경이다.

거기까지 가면 공기도 고요해지고 모든 것이 투명해진다. 기분은 왠지 불안해진다. 그러나 감상은 의외로 떠오르지 않는다.

혼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어떤 이도 언제 어디선가 같은 기분으로 이 풍경을 보았다는 것만은 알고 있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전혀 모른다. 다만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느낄 뿐.   (P131)      

어렸을 때 읽은 그림책에서, 멀리 보이는 불빛이란 언제나 따뜻함의 상징이었다.

산에서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불빛을 보거나, 홀로 이리저리 헤매다 사람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사람들 얘기 소리와 불빛에 향수를 느끼는, 그런 식이었다.

물론 그 후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고, 끔찍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는 이야기도 무척 많다. 하지만 불빛을 보았을 때의 그 기분은 보편적이다. 만국에 공통된, 영원한 따스함인 것이다.      (P135)

      

[도모 짱의 행복]

도모 짱은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부모, 키우는 잉코와 스킨답서스, 러브 로망 영화 등,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예쁜 원이 되어 주위에 존재하는 것이, 도모 짱이 생각하는 인생이었다.           (P162) 

      

‘왜 하필 나야?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오늘도 온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몸이 찢어질 듯한 심정으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 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도모 짱의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게 해 주지도 않았고, 도모 짱이 강간을 당할 때도 하늘에서 벼락을 치든 어떻게든 해서 멈춰 주지 않았고, 도모 짱이 병원 정원에서 홀로 울 때도, 불쑥 나타나 어깨를 안아 주지 않았다. 

미사와 씨와 도모 짱이 순조롭게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훗카이도에 같이 갈지도 모르고, 미사와 씨가 도모 짱의 빈약한 가슴과 검은 젖꼭지를 보고서 실망할지도 모른다. 또는 그 신비함에 한없이 이끌려 두 사람이 결혼할지도 모른다. 결혼했다고 해서 도모 짱이 영원히 행복할지는 알 수 없다. 미사와 씨 역시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젊은 여자 때문에 집을 나갈지도 모른다.

아무튼 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라 부르기에는 아주 하찮은 힘밖에 없는 눈길이, 언제든 도모 짱을 보고 있었다. 뜨거운 애정도 눈물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다만 투명하게, 도모 짱을 향하고, 도모 짱이 소중한 것을 차근차근 모아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비서의 유혹에 서서히 넘어가는 아버지를 보고서 깊은 상처를 받아 밤중에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는 도모 짱의 아픈 가슴을, 웅크린 등을, 어렸을 때는 같이 놀았던 장소에서 소꿉친구의 욕망에 짓이겨진 도모 짱이 느꼈던, 딱딱하고 반갑지 않은 땅의 감촉을, 그 후 혼자 걸어 돌아오는 도모 짱의 처량하고도 멍한 얼굴을.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고독했던 밤의 어둠 속에서도, 도모 짱은 뭔지 모를 것에 안겨 있었다. 벨벳 같은 밤의 빛,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 별의 반짝임, 벌레 소리, 그런 것들에.

도모 짱의 깊은 내면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모 짱은 언제나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P168-169)       

[막다른 골목의 추억]

궁지에 바짝 몰린 듯한 기분에서 아직 헤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밖에 없잖아. 지금에서 눈을 돌리면 슬퍼질 거야.’하고서 절박하게 보내는 요즘의 나날은 어째서인지, 아니 그래서 더욱 기묘하게 행복했다. 나 스스로도 그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뭘 봐도 슬프게 보이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반 죽은 것처럼 분명하지 않았던 날들에 비하면 처절한 슬픔으로 지내 온 이 세계가 무척이나 선명하게 보였다.

“난 말이지.... 난, 자유로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 어딜 가든 뭘 하든 상관없지만, 기분이 아주 맑을 때, 그런 때, 몸속에서 힘이 솟으면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실제로 어딜 가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 힘히 솟는 그 느낌이 행복이야.”

니시야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니시야마의 매끄러운 몸 선과 사람을 알게 모르게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그 특별한 힘은 그가 자유롭기 위해 애쓰는 데서 나오는 거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은 알 수 있다. 설정은 최악이었지만, 그때 나는 최고의 행복 속에 있었다는 것을.

그날의 그 시간을 상자에 담아 평생의 보물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그때의 설정이나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자비할 정도로 무관하게, 행복은 불쑥 찾아온다. 어떤 상황에 있든, 누구와 있든.

다만 예측은 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다음 순간에 찾아올지도 모르고, 줄곧 기다려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파도와 날씨의 변화처럼 아무도 그것은 알 수 없다. 기적은 누구에게나 고루,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나는 그 사실만을 몰랐던 것이다.                 (P176-178)   

    

나는 늘 가족의 애정이라는 축복 속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엄마와 나와 여동생은 세 자매처럼, 엄마가 취미 삼아 아침과 점심 때만 하는, 부담은 없고 분위기는 좋은 샌드위치 가게를 꾸려 왔고, 회사원인 아버지는 성실하고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어디 한군데 나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P195)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무기로 삼아야지. 이미 갖고 있는 거니까. 너는 돌아가서, 또 언젠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행복하게 결혼하고, 어머니 아버지와 틈틈이 교류도 하고, 여동생과도 사이좋게 지내면서, 네가 있는 자리에서 큰 원을 만들어 나가면 되는 거야. 너에게는 그럴 힘이 있고 그게 너의 인생이니까. 누구에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상대가 너의 인생에서 뛰쳐나갔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그렇게 말해 주니까 마음이 가벼워지네. 내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뻔했는데, 그래도 난 나의 행복을 그런 데 두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는 않을 테고, 그러니까 돌아가서 다시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맞아, 이런 상태에서 세상으로 나가려 생각한다면 그건 오만이야. 세상에는 사람 각자의 수만큼 절망의 한계가 있는 걸. 나나 너의 불행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많은 것들이 있고, 만일 그런 일을 당하면 우리는 그대로 엎어져서 바로 죽을 거야. 그러니까 우린 그나마 행복하고 편안한 거야. 그렇지만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P202-203) 

      

니시야마와 함께 있기만 해도, 어째서인지 방이 훈훈해지고, 사랑을 듬뿍 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니시야마에게 좀 더 가까이 있으면 틀림없이 운수 형통할 것이다, 인생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하며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임을 잘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별일 아니라도 니시야마와 얘기를 나눈 후에는 외로움이 싹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도 따스해지고 기분도 밝아졌다. 앞으로의 인생에 멋진 일이 아주 많을 거라는 기분마저 들었다. 게다가 그것은 들뜬 기분이 아니라 무척 고요하고 여유로운 물결이었다.

아 좋다. 이 사람과 같이 있기만 해도, 딱히 내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공원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있고, 모두가 그 아래에서 휴식을 얻지만,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게 그란 존재를 기리자. 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부담 없이 만나고 이미 거기에 있고 안심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이었다.          (P204)   

  

가족, 일, 친구, 약혼자 등등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그 끔찍한 쪽 색채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빙빙 휘감긴 거미집 같은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미줄이 많을수록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없고, 잘하면 아래가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생을 끝낼 수도 있다.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가능하면 그 아래 깊이를 모르기를.’ 이라는,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나보다 더 크게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내가 이곳에서 깊이 떨어지지 않기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인간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서로 힘을 보태 가며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거기까지 생각이 확대되었을 때, 나는 어째서인지, 인도의 길모퉁이에서 개똥과 함께 사는 사람, 닥치는 대로 대출을 받고는 한밤중에 도망친 사람, 누군가가 술을 끊지 못해 붕괴된 가정, 짜증스러워 자식을 학대한 싱글맘, 사이 나쁜 시어머니를 죽여 버린 며느리, 그런 얘기들이 그저 무겁고 싫고 흉측하기만 하다고는 생각지 않게 되었다.

‘막다른 골목’이라는 이름의 가게 2층에서, 나는 ‘이번 일은 잘된 건지도 몰라, 나 따위가 느끼는 것은 포근한 구름 위에서 가느다란 구멍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아래인지 아닌지도 이제는 모르겠어. 그래도 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해.’ 라고 풋내기 학생처럼 절실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파악하고 싶어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세계인 것이다.                 (P210-211)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었기에 부담이 없었어, 하고 나는 벌써부터 이곳에서 지낸 날들을 그리워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있으면서, 일해 봐야 한 푼도 받을 수 없지만, 니시야마가 나를 지켜 주었고, 귀찮아지면 언제든 2층에 올라가 잘 수 있었다. 하염없는 생각이 끊이는 일도 없었고, 화장을 짙게 해도 누구 하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고,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도 별말이 없었다. 그리고 낮에 잠시 거리로 나가면, 곧바로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혼자였기 때문에 책을 읽어도 글자가 유독 마음에 스미고, 슬픔으로 감성이 풍부해져 계절의 변화도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투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을 나는 오랜만에 만끽했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는 나, 낙담하고 절망하는 것은 어차피 놀이였다. 

나는 내가 의외로 돈에 치사하고, 심보가 고약하고, 역시 멍청이고 마음만 좋고 세상 물정에 둔하다는 것도 알았다. 

이곳에서 지낸 며칠..... 유리잔 속으로 푹 꺼진 것처럼, 슬픈 필터를 통해서만 보았던 풍경은 내 마음에 꼭꼭 새겨져 앞으로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서, 마치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때처럼 기분이 후련하다. (P213)     

차는 엄청나게 키 큰 은행나무가 줄지은 곳에 섰다.

풍경이 장관이었다. 은행나무가 한없이 줄지어 있고,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땅에 수북하게 쌓여 있고, 사방이 온통 금색이었다. 햇살을 받아 온 사방이 빛나, 마치 노란 눈이 내린 것처럼, 수북한 낙엽의 산이 포근한 느낌으로 길을 뒤덮고, 끝없이 이어졌다.

“굉장하다. 정말 아름다워.”

나는 말했다.

“꼭 눈이 내린 것 같지.”

니시야마가 말했다.

(……)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말도 아무것도 없고, 빛과 노란색과 빛을 받은 낙엽의 좋은 냄새만 있었다.

나는 그러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P221-223)    

  

그날들은,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던 내게 신이 덮어 준 포근한 담요처럼, 어쩌다 우연히 찾아온 것이었다.

카레를 만들다, 먹다 남은 요구르트와 스파이스, 사과 같은 것까지 넣다 보니, 그리고 양파의 양을 평소보다 좀 많게 했더니, 정말 백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카레로 완성된 경우처럼,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의 행복이었다.

그렇다는 걸 알기에 애달프고 고마움도 한결 더했다.

“정말 고마웠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정말 즐거웠고. 고마워. 평생 감사할게. 평생 잊지 않을게.”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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