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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02. 2024

호리 다쓰오의 <바람이 분다>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2013년

<바람이 분다>는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호리 다쓰오(堀 辰雄)의 순애소설이다. 폐결핵에 걸린 약혼녀를 산 속 요양소에서 정성껏 돌보는 한 남성의 순애보적인 이야기가 간략한 문체로 가슴 아리게 전해지는 이 소설은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쓰인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미야자키 감독은 "'바람이 불다'는 내 작품 중에 가장 많이 히노마루(일장기)가 나온 작품이다. 작품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말미에는 모든 히노마루가 떨어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한편 지브리 스튜디오의 신작이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벼랑위의 포뇨'후 5년 만에 신작 '바람이 분다'는 비행기 설계자 호리코시 지로의 사랑과 비행기에 대한 열정을 담은 작품이다.

호리코시 지로는 제로 전투기를 만든 실존 인물로, 미쓰비시내연제조(현 미쓰비시 중공업)에 입사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대표적 전투기인 제로 파이터(제로센)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바람이 분다'는 그의 반생을 유족의 동의 하에 호리코시 지로의 반생에 호리 다쓰오의 동명 소설 '바람 불다'의 사랑이야기를 접목해 새롭게 만들어진 작품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가을을 맞이한 숲은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게 바뀌어 있었다. 우수수 잎을 떨군 나무들 사이로 인적이 끊긴 별장의 테라스가 성큼 가까이 보였다. 균류의 축축한 냄새가 낙엽 냄새와 뒤섞여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계절의 변화가, 너와 헤어진 뒤 나도 모르는 사이 이토록 흘러 버린 시간이라는 것이, 내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음속 어딘가에 너와의 헤어짐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확신 따위 때문인지, 이런 시간의 흐름까지도 내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인지, 나는 잠시 후 분명히 깨닫게 될 이러한 것들을 이때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십여분 뒤, 숲이 하나 끝나더니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멀리 지평선까지도 바라다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이 나타났다. 나는 그 속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 벌써 잎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한 한 그루의 자작나무 그늘에 몸을 누였다. 그 여름의 날들, 그림 그리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늘 내가 지금처럼 누워있던 그곳이었다. 그대는 거의 항상 소나기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지평선 언저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 모를 먼 산맥과 일렁이는 억새의 새하얀 이삭 끝이 뚜렷이 구분되어 그 윤곽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 산맥의 모습까지 송두리째 각인시킬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그사이 내 의식 속에는 이제껏 내 안에 숨어 있던, 자연이 나를 위해 정해 둔 것을 이제야 비로소 발견했다는 확신이 점차 또렷이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 (P12-13)   

  

이렇게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에도 세쓰코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피곤해서라기보다는 어딘가에 마음을 빼앗긴 듯한 모습으로 내게 줄곧 기대어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야만 이 꽃향기 피어나려 하는 우리의 삶이 잠시나마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듯이. 이따금 울타리 저편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마치 억눌려 있던 호흡이 터져 나오듯 불어와 우리 앞의 수풀을 스치며 그 잎을 살랑거리게 하고는 거기에 그녀와 나만을 오롯이 남겨 둔 채 지나가곤 했다. (P22)   

  

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서 당신에게 왠지 미안해요….

그렇게 몸이 약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더욱더 사랑스럽게 여긴다는 걸 어찌해서 모르는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걸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아무리 안좋아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 왠지 갑자기 살고 싶어졌어요….

당신으로 인해서….. (P22-23)   

  

그곳에 가면 정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겠지. 하지만 인생이란 네가 늘 그래 왔듯 모든 것을 그저 다 내맡겨 버리면 돼. 그러다 보면 미처 바라지도 못했던 것들까지 우리에게 주어질지도 모르잖아. (P26)  

   

그사이 계절은 그때까지 조금 더디게 흐르던 것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봄과 여름이 거의 동시에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매일 아침 휘파람새와 뻐구기 울음소리가 우리를 깨워 주었다. 주변 숲이 발산하던 싱그러운 푸름은 요양원을 거의 온종일 사방에서 에워싸며 병실 안까지 시원한 푸른색으로 물들여 놓곤 했다. 그 무렵에는 아침에 산속에서 피어올라 어딘가로 향하던 하얀 구름들 조차 저녁이 되면 원래의 산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우리가 함께한 처음 며칠 동안, 내가 세쓰코의 머리맡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지지 않고 보냈던 그 무렵의 일들을 떠올리려 하면, 그날이 그날 같아서인지, 단숨함이 가진 어떤 매력 때문인지,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이었는지를 구분하기 힘들어 질 때가 있다.

아니, 그런 엇비슷한 일상을 반복하는 동안 우리가 시간이라는 것에서조차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듣나. 그리고 그렇게 시간에서 벗어나 있던 날들의 일상생활은 그 어떤 사소한 부분조차 그전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내 곁에서 희미한 온기를 지닌 채 그윽한 향을 풍기는 존재, 조금 빠른 그 호흡, 내 손을 잡고 있는 그 보드라운 손, 그 미소, 그리고 도 이따금씩 나누는 평범한 대화, 만약 이러한 것들을 지워 버린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은 단순한 날들이었지만, 우리의 삶이란 것이 본디 그 요소라고 해 봤자 사실 이 정도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토록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가 그러한 것들을 이 여인과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당시 일어나 유일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녀에게서 가끔 열이 나는 정도였다. 그것은 그녀의 몸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좀먹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날에는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일상의 매력을, 더욱 세심하게, 더욱 천천히, 마치 몰래 훔친 금단의 과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맛보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딘가 죽음의 맛이 나는 삶의 행복을 이때 오히려 한층 더 온전히 지켜 낼 수 있었다. (P37-18)     

그렇게 환자 옆에서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가 내게 있어서도 일종의 수면에 가까운 행위였다. 나는 잠들어 있는 동안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그녀의 호흡 변화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또렷이 느끼곤 했다. 그녀의 심장 고동가지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P42)     


인간의 마음을 크게 동요시키는 사건이란 것은 막상 그것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오히려 마치 남의 일처럼 보이는 법이다. (P53)     


언제 죽음의 잠자리가 될지 모르는 침대에서 이렇게 그녀와 함께 즐기듯 맛보고 있는 삶의 쾌락, 그야말로 우리를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리라 믿고 있는 바로 그것, 그것은 과연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찰나적인 것, 훨씬 변덕스러운 것은 아닐까? (P58)   

  

나는 새벽부터 어디를 어떻게 걷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생각에 몸을 내맡긴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정처 없는 발길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맑은 가을 공기 속에 갑자기 작은 요양원의 전경이 시야에 가까이 들어온 순간, 마치 갑자기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난 사람마냥 그 건물 안에서 많은 환자 속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보내던 내 모습이 생각나며 그러한 생활이 얼마나 기묘한 것인지를, 비로소 그곳을 벗어나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창작욕이 점점 거세지는 것을 느끼며 우리의 그런 기묘한 하루하루를 더할 나위 없이 애달프면서도 정적인 이야기로 빚어내고 있었다. (P61-62)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만족하고 있는 게 당신 눈에는 안 보이나요?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나는 단 한 번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만약 당신이 내 곁에 없었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됐을까요?.......아까만 해도 그래요. 당신이 없는 동안 처음에는 그래도 당신이 늦게 돌아오면 올수록 돌아왔을 때 얼마나 그 기쁨이 더할까 하면서 힘든 걸 꾹 참고 있었는데, 돌아올 시간을 훌쩍 지나도 당신이 오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정말 불안 했어요. 그러자 항상 당신과 함께 있던 이 방조차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고 두려워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구요…..하지만 그러다가 당신이 언젠가 내게 해 줬던 말을 떠올리니니까 기분이 아주 조금 차분해지는 거예요.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죠. 지금의 우리 삶에 대해 아주 먼 훗날 다시 떠올려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라고…. (P66)   

  

밤이 되면 어디선가 날아온 나방들이 굳게 닫힌 창문 유리를 향해 돌진해 온다. 그리고 그 타격으로 상처를 입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추구하며 죽을 힘을 다해 유리에 구멍을 내려 한다. 내가 성가신 마음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그래도 한동안은 미친 듯 파닥이다가 어느덧 조금씩 날갯짓을 멈추고 어딘가에 꼼작도 하지 않고 붙어 버린다. 그리고 이튿날이면 창가에서 썩은 낙엽처럼 뒹구는 죽은 나방을 어김없이 발견하곤 한다.

오늘 밤도 그런 나방 한 마리가 기어이 방 안으로 날아들더니 아까부터 내 옆에 조명 주위를 미친 듯이 파닥거리며 빙글빙글 맴돌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상태로 움직임이 없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문득 깨닫기라도 한 듯 퍼뜩 다시 날아오른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또다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 위에 떨어진다.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나방을 쫓기는커녕 사뭇 무관심하게 종이 위에서 나방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 둘 뿐이다.  (P88)

     

“이런 아름다운 하늘은 이렇게 바람 부는 추운 날이 아니면 볼 수가 없지요.” 신부가 짐짓 지나가듯 말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바람 부는 추운 날이 아니면....” 그의 말을 그대로 곱씹어 보니 신부가 방금 전 아무 생각 없이 한 그 말이 묘하게 심금을 울리는 느낌이었다.....  (P105)   

  

12월 24일

마을 처녀 집에 초대를 받아 밤에는 그곳에서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겨울에야 인적없는 산골 마을일 뿐이지만 여름이 되면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동네라 그런지 평범한 집에서도 크리스마스 행사 비슷한 것을 지내며 보내는 모양이었다.

밤 9시경. 마을을 나와서 하얀 눈이 어슴푸레한 빛을 발하는 골짜기로 돌아왔다. 마지막 고목림에 들어서니 길옆에 눈을 뒤집어쓴 채 한데 엉켜 있는 마른 덤불 위로 어디선가부터 작고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어디서 이런 빛이 비치고 있는 거지, 하고 이상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여기저기 별장이 자리잡은 그 좁은 골짜기 저 위쪽, 분명 내 오두막으로 보이는 집 한 채가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저런 골짜기 위에서 혼자 살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며 나는 골짜기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태 오두막에서 나는 불빛이 이렇게 숲 아래까지 비추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것 봐....”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이것 봐, 여기도 저기도, 골짜기를 온통 뒤덮을 정도로 눈 위에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모든 빛이 내 오두막에 밝힌 등불에서 나오고 있어....”

오두막에 겨우 당도한 나는 베란다로 나가 이 불빛이 과연 어느 부분까지 밝히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불빛은 오두막 주변만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줌밖에 안 되는 빛도 오두막에서 멀어지면서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결국 골짜기를 밝히는 눈빛과 하나가 되어 버렸다.

“뭐야, 그렇게 밝아 보이던 빛이 여기서 보니 겨우 이 정도였다니.”

맥없이 혼잣말을 되뇌이면서도 멍하니 빛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빛 그림자가 꼭 내 삶과도 같구나. 내 삶이 발하는 빛 따위 기껏해야 요만큼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 오두막의 등불처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어. 그리고 그 빛들이 내 의식 따위는 의식하지 않은 채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내가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이런 뜻하지 못했던 생각은 나를 어슴푸레한 눈빛에 물든 싸늘한 베란다에 오랫동안 서 있게 했다.   (P108-110)     

참으로 고요한 밤이다. 오늘 밤도 마음속에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나는 남들보다 딱히 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것 같아. 그런 행복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예전에는 우리를 꽤나 힘들게 했지만,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하면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야. 오히려 요즘의 내가 행복에 훨씬 가까운 상태인지도 모르지. 뭐 구태여 말하자면 요즘의 내 마음은 그때와 비슷하면서 그때보다 살짝 슬픈 정도. 그렇다고 해서 전혀 즐겁지 않은 것만도 아니야…..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이 내가 되도록 세상과 담을 쌓고 홀로 지내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기력한 내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말이지 다 네 덕분이야. 그런데도 세쓰코, 나는 여태까지 내가 이렇게 고독하게 사는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어차피 내가 좋다고 이러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아.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역시 너 때문에 이러는 것이면서도 그것이 고스란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내가 나한테는 과분한 너의 사랑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일까? 그 정도로 너는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나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렇게 밖에 나오자, 이 골짜기와 등을 맞대고 있는 산 저편에서 자꾸만 바람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무척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그렇게 멀리서 들리는 바람 소리를 듣기 위해 일부러 베란다로 나온 것처럼 귀 기울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 골짜기의 모든 것이 처음에는 그저 하얀 눈에 물들어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이더니, 한동안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이 풍경이 점점 눈에 익은 것인 것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내 기억으로 그 사이사이를 메꾼 것인지 몰라도, 어느샌가 선 하나하나, 형태 하나하나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토록 그 모든 것이 내게 친숙해진, 사람들이 행복의 골짜기라 일컫는 이곳. 그래, 과연 이렇게 정 붙이고 살다 보니 나도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이 골짜기를 불러도 될 것 같다….. 골짜기 건너편이 저렇게나 바람에 술렁거리는데 이곳만큼은 참으로 고요하기 그지없구나. 뭐 이따금씩 오두막 바로 뒤편에서 무언가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분명 저 멀리서 불어 오는 바람에 바싹 마른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부대끼며 내는 소리리라. 때때로 그 바람의 끝자락 같은 것이 내 발치에서도 낙엽 위에 다른 낙엽을 두어 장 살포시 포개 놓고 있다…. (P110-112)  

   

그야말로 ‘음산한 죽음의 시대’였던 전쟁의 시기에 어찌 보면 필사적이고, 어찌 보면 부질없어 보이기만 한 ‘삶’에 대한 긍정.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비롯한, 막연한 불안이나 허무, 고뇌,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내적 갈등 등을 감당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많은 일본의 근현대 문학가들과 호리가 다른 점은 바로 이런 점일지도 모르겠다.  (작품해설,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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