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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05. 202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

애니메이션 <보물섬>  1978년

실사 영화 <보물섬>(1950)

소년 짐 호킨스는 해적 빌리 본즈로부터 보물섬의 지도를 손에 넣게 되어 지주 트렐로니, 의사 리브지와 함께 보물섬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항해 중이던 어느 날 짐은 사과 통 속에 숨어 있다가 함께 배에 탄 주방장 키다리 존 실버가 보물을 노리고 승무원으로 가장한 해적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애니메이션 <보물섬>은, 데자키 오사무 사단인 스기노 아키오, 오오하시 마나부, 코바야시 시치로, 타카하시 히로카타는 이 작품에서도 모였다. 데자키 오사무를 상징하는 화면 분할이나 빛을 생생히 표현하는 '투과광 기법', 강한 필치의 그림으로 정지 장면을 강조하는 '하모니 기법' 이 대단히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연출면에서도 퀄리티가 대단히 높은 작품이다.     

대지주인 트렐로니 씨와 의사인 리브지 선생님을 비롯해 함께했던 다른 모든 신사분들이 내게 보물섬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섬의 위치만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써보면 어떻겠냐고 권해 왔다. 섬의 위치를 빼자는 건 단지 아직 가져오지 못한 보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기 17**년, 이제 나는 펜을 들어 아버지가 <벤보우 제독 여관>을 운영하던 날로, 구릿빛 얼굴에 칼자국이 난 그 늙은 뱃사람이 처음으로 우리 여관에 들어서던 그날로 돌아간다.

그자가 여관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던 때가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그자의 뒤로는 선원용 궤짝이 실린 두 바퀴 손수레가 따라왔다. 그자는 키가 크고 건장했으며, 피부는 개암색이었고, 타르를 발라 땋은 머리는 더러운 파란 외투의 등 뒤로 늘어뜨렸고, 투박한 두 손은 흉터투성이였고, 시커먼 손톱들은 부러져 있었으며, 한쪽 뺨을 가로질러 히끄무레한 칼자국이 지저분하게 나 있었다. 그자는 포구를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더니 오래된 뱃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시시때때로 불러 대던 바로 그 노래를.

죽은 자의 궤짝 위엔 열다섯 사람.

얼씨구 좋다. 럼주가 한 병!                       (P17-18)    

 

선장은 럼에 잔뜩 취해 탁자에 두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다 선장이 갑자기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노래를 목청껏 부르기 시작했다. 

죽은 자의 궤짝 위엔 열다섯 사람.

얼씨구 좋다. 럼주가 한 병! 

나머지는 술과 악마가 다 해치웠다네.

얼씨구 좋다, 럼주가 한 병!

처음에 나는 <죽은 자의 궤짝>이 이층 앞방에 둔 선장의 커다란 상자라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은 외다리 뱃사람과 뒤섞여 악몽에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선장의 노래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P23-24)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장님 사내가 외치며 일행이 굼뜨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네댓 명이 즉시 명령에 따랐고, 둘은 무시무시한 장님 거지와 함께 거리에 남았다. 잠깐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깜짝 놀라는 비명과 함께 <빌이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장님 사내는 부하들이 꾸물거린다고 다시 욕을 퍼부어 댔다.

“놈의 몸을 뒤져 봐. 이 뺀질이 놈들아. 몇 놈은 위로 올라가 궤짝을 찾아.” 장님이 외쳤다. 

놈들이 우리 집의 낡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걸음 소리가 들렸다. 집 전체가 흔들거리는 게 눈에 선했다. 곧이어 또다시 놀라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그러더니 선장 방의 창문이 거칠게 열리며 쨍그랑 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사내 하나가 창밖 달빛 아래로 머리와 어깨를 내밀고 그 아래 길에 있는 장님 거지에게 말했다. 

사내가 외쳤다. “퓨, 한발 늦었습니다. 누군가 이미 궤짝을 샅샅이 뒤지고 갔습니다.”

“그건 있어?” 퓨가 으르렁대듯 외쳤다. 

“돈은 있습니다.”

장님은 돈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며 욕을 했다. 

“내가 말하는 건 플린트의 지도야.” 장님이 외쳤다. 

“그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어이, 거기 아래에 있는 놈들, 빌한테는 없어?” 장님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그 말에 다른 자가, 아마도 아래층에서 선장의 시체를 뒤지던 자가, 여관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군가 이미 뒤졌습니다.” 그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님 퓨가 외쳤다. “여관 놈들 짓이야. 그 아이야. 그 자식 눈알을 파버렸어야 하는데! 방금 전까지도 여기에 있었던 게 분명해. 문을 열려고 하니까 빗장이 걸려 있더라고. 모두 흩어져서 놈들을 찾아.”                    (P57-58)     


서류는 봉인용 고리로 곳곳이 봉해져 있었다. 내가 선장의 주머니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 고리와 같은 것인 듯했다.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레 봉인을 열자 섬을 그린 지도가 툭 하고 떨어졌다. 지도에는 위도, 경도, 수심, 언덕, 만, 후미의 이름들, 그리고 해안까지 배를 안전하게 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세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섬은 길이가 구 마일, 폭이 오 마일이었고, 뚱뚱한 용이 서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육지로 오목하게 둘러싸여 배를 대기 좋은 항구가 두 개 있었는데, 중앙에는 <망원경>이라고 적힌 언덕이 있었다. 지도에는 나중 날짜와 함께 추가된 내용도 있었는데, 특히 붉은 잉크로 친 X표 세 개가 눈에 띄었다. X표 둘은 섬의 북쪽 지역에, 하나는 남서쪽 지역에 쳐져 있었다. 그런데 남서쪽 X표 옆에는 같은 붉은 잉크이기는 하지만 선장의 비뚤비뚤한 글자체와는 아주 다르게 작고 산뜻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많은 보물이 여기에 있다.”

뒷면에는 같은 필체로 다음과 같은 정보가 덧붙여져 있었다. 

키 큰 나무, 망원경의 어깨 북북동의 북으로 일 포인트

해골 섬 동남동보다 동

십 피트

은괴는 북쪽 은폐 장소에 있다. 동쪽 작은 언덕 비탈,

그곳을 마주하는 검은 바위에서 남쪽으로 열 길 떨어진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무기는 북쪽 후미 곶의 북쪽 끝, 동쪽에서

사분의 일 포인트 북쪽의 모래언덕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J.F.                                (P71-72)     

대지주의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출항 채비를 마쳤고, 어느 것 하나 처음 계획대로 진행된 게 없었다. 심지어 나를 자기 옆에 꼭 붙어 있게 하겠다던 리브지 선생님의 계획마저 그랬다. 리브지 선생님은 자기 대신 진료를 맡을 의사를 구하러 런던에 가야 했다. 대지주는 브리스톨에서 바쁘게 일을 보았다. 나는 사냥터지기인 레드루스 할아버지에게 맡겨져 대지주의 저택에서 거의 죄수처럼 갇혀 살았지만, 항해에 대한 환상, 낯선 섬과 모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나는 몇 시간이고 계속해 지도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고, 결국 지도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줄줄 꿰게 되었다. 나는 가정부 방의 벽난로 옆에 앉아 온갖 방향에서 상상 속의 그 섬으로 접근해 갔다. 섬을 샅샅이 탐험하고 <망원경>이라는 이름의 높은 산을 천 번은 오르고, 그 정상에서 매번 다채롭게 변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 어떤 때는 섬에 잔뜩 사는 야만인들과 용감히 싸움을 벌였고, 어떤 때는 우글거리는 맹수들에 쫓겼지만, 그 어떤 상상 속에도 우리가 실제 모험에서 겪은 기묘하고 참혹한 사건과 같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P77-78)   

  

키잡이가 말했다. “바비큐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젊었을 때 공부도 많이 했고, 마음만 먹는다면 책에 나오는 것처럼 멋지게 말할 수도 있어. 키다리 존에 비하면 사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한번은 키다리 존이 네 명과 드잡이를 벌였는데, 놈들 머리를 박살 내놓더라니까. 그것도 맨손으로.”

모든 선원이 실버를 존경했고, 심지어 복종하기까지 했다. 실버는 선원 각자에 맞춰 대화하는 법을 알았고, 각자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 내게는 언제나 친절했으며, 취사장에서 나를 보면 늘 반갑게 맞이했다. 취사장은 새로 산 핀처럼 반짝였으며, 접시들은 윤이 반짝반짝 나도록 닦아 걸려 있었고, 한쪽 구석 새장에는 앵무새가 있었다. 

“어서 와, 호킨스.” 실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와서 존과 이야기나 나누자고. 네가 제일 반가워, 인마, 앉아라. 새로운 소식이 있어. 여기는 플린트 선장이야. 유명한 해적 이름을 따 내 앵무새 이름을 플린트 선장이라고 부르지. 플린트 선장께서 우리 항해가 성공할 거라고 했어, 그랬지, 선장>”

그러면 앵무새는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라고 숨이 넘어가도록 빠르게 재잘거리다가 존이 손수건을 던져 새장을 덮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실버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제 저 새는 아마 이백 살은 되었을 거야. 호킨스, 앵무새는 거의 영원히 살다시피 해. 그리고 누가 저 새보다 더 끔찍한 걸 봤다면 그건 필시 악마일거야. 저놈은 잉글랜드와 함께 항해를 했어. 대해적 잉글랜드 선장과 함께 말이야.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말리바르, 수리남, 프로비던스, 포르토벨로 같은 곳을 가봤지, 또 보물선을 인양하는 곳에도 있었어. 그래서 <여덟 냥 은화>라는 단어를 배운 거야. 놀랄 일도 아니지. 여덟 냥짜리 은화가 무려 삼십오만 개나 있었거든! 또 고아 앞바다에서 인도 제국 총독이 탄 배를 습격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어. 겉모습은 꼭 어린 새끼 같아 보일 거야. 하지만 화약 냄새를 아는 새야, 그렇지 선장?”

“항로 변경 준비.” 앵무새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P105-106)   

  

실버가 말했다. “아니, 내가 아니야. 플린트가 선장이었어. 나는 조타수였어. 그때도 목발을 짚었고, 다리는 포격전에서 잃었고, 퓨 영감도 그때 눈을 잃었어. 솜씨 좋은 의사였어. 내 다리를 자른 자 말이야. 대학도 나왔고, 라틴어도 양동이로 퍼담을 정도로 많이 알았고, 어쨌든 그랬어. 하지만 그 양반도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코르소 성에서 개처럼 매달려 햇볕에 널리는 신세가 되었지. 다른 놈들이란 로버츠의 부하들을 말하는 건데, 그게 모두 배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일어난 거야. 원래는 로열 포춘 호인가 그랬거든,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원래 배엔 한번 붙인 이름을 절대로 바꾸면 안 되는 거야. 카산드라 호를 봐. 잉글랜드가 인도 총독을 잡은 뒤 우리 모두 말라바에서 무사히 돌아왔잖아. 플린트의 옛날 월러스 호도 마찬가지고. 나는 피로 얼룩진 그 배가 금을 하도 많이 실어서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던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아하!”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배에서 가장 젊은 선원이었는데, 감탄해 마지않는 목소리였다. “플린트 선장은 해적 중의 해적이었죠!”                  (P110)     


이 지독한 악당이 내게 늘 해오던 것과 똑같은 사탕발림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걸 들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과 통을 박차고 나가 실버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실버는 누가 엿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계속 지껄였다. 

“부자 신사란 그런 거야. 거칠게 살고, 교수형을 당할 위험도 마다 않으며 먹고 마시는 건 꼭 싸움닭 같아. 하지만 일단 항해가 끝나면 주머니에 수백 파딩이 아니라 수백 파운드를 챙기게 되지. 하지만 그 돈 대부분을 럼주와 방탕한 생활로 날려. 그리고 셔츠 바람으로 다시 바다에 나가는 거야.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아. 나는 돈을 모두 모아 두지. 그것도 한군데가 아니라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하는 식으로 맡겨 둬. 믿을 수 없는 세상이잖아. 난 이제 쉰이야. 이번 항해를 마치고 돌아가면 나는 진정한 신사가 될 거야. 신사로 살 시간도 충분해. 아, 하지만 난 그동안 편하게 살아왔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았고, 잘 자고, 잘 먹고 지냈어. 바다에 있을 때만 빼면 말이야. 그리고 내가 처음에 뭘로 시작했는 줄 알아? 일반 선원이었어. 바로 자네처럼!”                    (P111-112)     

실버가 외쳤다. “언제까지냐고! 어이쿠 두야! 정 알고 싶다면 그게 언제까지인지 알려 주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야. 일류 선원인 스몰렛 선장이 우리를 위해 이 망할 놈의 배를 몰고 있어. 더구나 대지주와 의사는 지도를 가지고 있지. 난 지도가 어디 있는지 몰라. 그렇지? 너도 모를 거고. 그렇다면 대지주와 의사가 물건을 찾아 배에 싣게 하잔 말이야. 그러면 그때부터 기회를 노리자고. 내가 너희 같은 망나니를 믿을 수만 있다면, 스몰렛 선장이 우리를 싣고 돌아오는 길에 일을 벌일 거야.”

“우리 모두 뱃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젊은 딕이 말했다. 실버가 쏘아붙였다. “일반 선원이라는 말이겠지. 자네 말은, 우리도 항로를 따라 배를 몰 수는 있어. 하지만 그 항로를 누가 정하지? 대체로 우리 신사 양반들은 그 일을 놓고 의견이 갈리지. 내 생각은, 적어도 무역풍이 부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스몰렛 선장에게 배를 맡기자는 거야, 그러면 항로를 잘못 잡을 일도 없고, 물 한 숟가락으로 하루를 버텨야 할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너희가 어떤 놈들인지 난 잘 알아. 그러니 물건을 배에 싣자마자 바로 섬에서 일을 끝내자고,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너희들은 술이 곤드레만드레가 되기 전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거야. 포복절도할 일이야. 이런 놈들과 항해를 해야 하다니, 속이 다 메슥거려!”             (P114-115)   

  

스몰렛 씨가 입을 열었다. “첫째, 우리는 계속 가야 합니다.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가는 놈들이 당장 들고일어날 겁니다. 두 번째로,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적어도 보물을 찾을 때까지는요, 셋째, 아직 믿을 만한 선원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일은 터질 겁니다. 그러니 제 제안은 이렇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놈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날을 잡아 선수를 칩시다. 제 생각에 선주님과 같이 온 하인들은 믿을 수 있을 듯합니다만, 어떻습니까, 트렐로니 씨?”

“나만큼이나 믿을 수 있소.” 대지주가 단호히 말했다. 

선장이 숫자를 셌다. “그러면 셋, 우리까지 일곱이군요. 여기 호킨스까지 포함해서요. 자, 선원들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아마 트렐로니가 뽑은 사람들은 괜찮을 겁니다. 실버를 만나기 전에 직접 뽑았으니까요.”

대지주가 답했다. “그렇지 않소. 핸즈도 내가 직접 뽑았소.”

“핸즈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장이 덧붙였다. 

대지주가 갑자기 소리쳤다. “게다가 놈들 모두 영국인들인걸 생각하면! 선장, 마음 같아서는 이 배를 확 폭파시켜 버리고 싶소이다.”

선장이 말했다. “자, 여러분, 제가 말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게 별건 아닙니다. 당장은 답답하겠지만, 우선은 가만히 지켜보며 경계를 풀지 않고 감시를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남자로서 분통 터지는 일이란 걸 저도 압니다. 당장 한 방 먹이는 게 훨씬 더 속이 시원할 겁니다. 하지만 누가 우리 편인지 알기 전에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꾹 참고 때를 기다리자, 그게 제 생각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여기 있는 짐은 그 누구보다도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놈들은 짐을 의심하지 않고, 짐 또한 눈치가 빠른 아이니까요.”

“호킨스, 너만 믿는다.” 대지주도 한마디 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무척 낙담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면서 진짜로 내 덕분에 모두가 살아나게 된다. 어쨌든, 말로는 이러니저러니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논의를 해 보아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스물여섯 명 가운데 오직 일곱 명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은 아이였고, 따라서 어른들만 놓고 보자면 우리 편 여섯에 상대편 열아홉 명이었다.             (P126-129)     

그 순간 그 괴물은 내 앞을 빙 둘러 다시 나타났다. 나를 막으려는 심산인 듯했다. 나는 피곤했고, 설사 막 자고 일어났을 때만큼 기운이 넘쳤다 할지라도 달리기로 저런 상대를 따돌리려는 건 괜히 힘만 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괴물은 사슴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휙휙 뛰어다녔고, 사람처럼 두 다리로 뛰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거의 접다시피 한 자세로 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자는 사람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예전에 들었던 식인종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하마터면 도와달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비록 사나워 보이기는 해도 상대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실버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만히 선 채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면 어째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내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방비 상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속에서 다시 용기가 샘솟았고, 나는 섬 사나이를 향해 얼굴을 꼿꼿이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자는 그때까지 나무 뒤에 숨어 있었지만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내가 자기 쪽으로 움직이자마자 다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나를 맞이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머뭇거리더니 뒤로 물러섰고 다시 앞으로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애원이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아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그 모습에 어리둥절하면서 당황했다. 

나는 다시 한번 걸음을 멈췄다. 

“누구세요?” 내가 물었다. 

“벤 건.” 사내가 대답했다. 사내의 목소리는 녹슨 자물쇠 소리처럼 거칠고 듣기 거북했다. “가엾은 벤 건이야. 지난 삼년 동안 한 번도 사람과 말해 보지 못했어.”           (P148-149) 

    

선장은 앉아서 일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선장 알렉산더 스몰렛, 의사 데이비드 리브지, 목수 선원 에이브러햄 그레이, 선주 존 트렐로니, 선주의 하인이자 뭍사람인 존 헌터와 리처드 조이스, 이상이 반란에 참가하지 않은 전부임. 이들은 열흘을 버티기에도 빠듯한 보급품을 가지고 금일 보물섬에 상륙, 통나무집에 영국기를 달았다. 선주의 하인이자 뭍사람인 톰 레드루스는 반란자들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선실 사환 짐 호킨스는......

그 대목을 읽는 순간, 가엾은 짐 호킨스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그때 섬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우리를 부르는데요.” 망을 보던 헌터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 대지주님! 와, 헌터.” 하는 외침이 들렸다. 

문으로 달려가 보니 짐 호킨스가 건강하고 무사한 모습으로 말뚝 울타리를 넘어오고 있었다.           (P180-181)     


미풍은 우리를 멋지게 도와주었다. 우리는 바람을 업고 새처럼 수면을 미끄러져 갔는데, 해안을 휙휙 지나갈 때마다 풍경도 시시각각 달라졌다. 곧 우리는 고지대를 지나 키 작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는 저지대의 모래땅에 이르렀고, 거기도 금세 지나쳐 섬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바위 언덕 모퉁이를 돌았다.

나는 선장이라는 새로운 일에 몹시 마음이 들떠 있었고, 게다가 화창하고 맑은 날씨와 해안의 경치도 다채로워서 마음에 들었다. 이제 물도 충분했고, 맛있는 먹을거리도 많았다. 말뚝 울타리를 무단이탈해서 찜찜하던 마음도 내가 배를 정복했다는 생각에 편해졌다. 갑판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비웃는 듯한 키잡이의 그 눈매,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야릇한 웃음만 아니라면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그 웃음은 고통과 쇠약함으로 얼룩져 있었으며, 초췌한 노인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교활하게 지켜보고, 지켜보고 또 지켜보는 그의 표정에는 비웃는 듯한 분우기, 그리고 배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P243)    

 

마침내 나는 바다에서 돌아왔다. 게다가 빈손도 아니었다. 저기에 범선이 있었다. 그것도 해적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우리 일행이 타고 다시 바다로 갈 수 있는 배가 말이다. 어서 빨리 말뚝 울타리로 돌아가 내가 해낸 일들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마도 무단이탈을 한 것에 대해서는 야단을 맞겠지만, 히스파니올라 호를 되찾은 것은 사람들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고, 스몰렛 선장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냥 시간을 허비한 게 아니라고 인정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신이 나서 우리 편이 있는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P259-260)     


그때 발에 뭔가 물컹한 느낌이 왔다. 자는 사람의 다리였다. 하지만 그자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을 뿐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 작은 물레방아가 딸그락거리는 것처럼 그 소리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실버의 녹색 앵무새인 플린트 선장이었다! 뭔가를 쪼는 듯한 소리는 플린트 선장이 나무를 쪼아 대는 소리였다. 그 어떤 인간보다 망을 잘 보는 이 앵무새는 내가 나타나자 그 지긋지긋한 후렴구를 끝없이 지껄여 댐으로써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알린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 날카롭게 후벼 파는 듯한 앵무새 소리에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실버가 지독한 욕설을 퍼부으며 외쳤다. “거기 누구냐?”

나는 뒤로 돌아 도망치려다가 누군가에게 세게 부딪혀 뒷걸음질 치며 물러선다는 것이 하필이면 다른 사람의 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그자는 두 팔로 나를 꽉 잡았다. 

“횃불을 가져와, 딕.” 날 완전히 잡은 게 확실해지자 실버가 말했다. 

누군가 통나무집 밖으로 나가더니 곧바로 횃불을 들고 돌아왔다.                (P262-263)     

실버가 내게 돌아오며 말했다. “날 이해해 주렴.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나는 이제 대지주 편이야. 네가 배를 어딘가 안전한 곳에 둔 것은 나도 알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배는 무사해. 핸즈와 오브라이언이 멍청하게 굴었겠지. 그 두 놈이 믿음직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자, 내 말 잘 들으렴. 나는 이제 아무것도 묻지 않겠어. 저놈들이 네게 뭔가를 묻게 놔두지도 않을 거고. 나는 싸움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 네가 믿음직한 아이라는 것도 알고. 아. 아이가 아니라 청년이지. 우리 둘이 힘을 합쳤다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실버는 술통에 든 코냑을 양철컵에 따랐다. 

실버가 물었다. “좀 마셔 보겠어, 동지?” 내가 거절하자 실버가 말했다. “그럼 나 혼자 마시지 뭐. 나는 골칫거리가 있을 때면 한잔 해야 하거든. 골칫거리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의사 선생은 왜 내게 지도를 주었을까, 짐?”

내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자 실버는 더는 질문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그래, 의사 선생이 지도를 줬어.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분명히 속내가 있을 텐데.”

실버는 최악의 상황을 예견하는 사람처럼 큰 머리를 흔들고 브랜디를 또 한 모금 들이켰다.         (P278) 

    

의사 선생님이 대답했다. “흠, 그렇다면 실버, 한 가지만 더 말해 주지. 보물을 찾으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테니 조심하게나.”

실버가 말했다. “선생님, 남자 대 남자로서 말하는 건데,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선생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왜 통나무집을 떠났는지, 왜 제게 지도를 주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렇죠? 그런데도 저는 두 눈 딱 감고 아무 말 없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안 됩니다. 이번은 너무 심하십니다.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여기서 손을 떼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되네. 하지만 나는 더 자세히 말해 줄 권리가 없네. 실버 자네도 알겠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거든. 그렇지만 않다면 내 분명히 자네에게 이야기해 줬을 거야. 하지만 난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가장 자세히 자네에게 말해 주겠네. 그보다 더 말했다가는 모르긴 몰라도, 선장이 내 가발을 쥐어뜯으려할 걸세! 우선, 내 자네에게 약간의 희망을 주지. 실버, 우리가 만약 이 늑대 올가미에서 살아 나간다면, 나는 위증하는 것만 빼고는 자네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네.”

실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 어머니라도 선생님보다 더 너그럽게 말씀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자,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첫 번째 것이야.” 의사 선생님이 덧붙였다. “두 번째는 충고라네. 이 아이를 늘 자네 곁에 두고, 도움이 필요하면 <어이>하고 소리치게나. 내가 단숨에 달려가 도와주겠네. 그것만으로도 내가 멋대로 말하는 건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셈이 될 거야. 짐, 그럼 잘 있어라.”

리브지 선생님은 말뚝 울타리 사이로 손을 넣어 나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실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활기찬 걸음으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P296-297)  

   

우리는 이제 덤불숲의 가장자리에 와 있었다. 

“어이, 모두 함께 가자고!” 메리가 외쳤다. 그러자 맨 앞에 있던 자들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자들은 십 야드도 채 가지 않아서 우뚝 멈춰 섰다.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실버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목발로 땅을 찍어 대며 전보다 두 배는 빠르게 걸어갔다. 다음 순간, 실버와 나 역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우리 앞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패어 있었다. 가장자리가 무너지고 바닥에 풀이 자라기 시작한 걸로 보아 최근에 판 구덩이는 아니었다. 구덩이 안에는 두 동강 난 곡괭이가 하나 있었고, 주변에는 괘짝에서 떨어져 나온 널빤지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널빤지 가운데 하나에는 달군 쇠로 <월러스>라고 찍은 낙인이 보였다. 플린트의 배 이름이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누군가 보물을 발견해 이미 가져간 뒤였다. 칠십만 파운드는 사라진 것이다!                   (P316)    

 

벤은 오랫동안 홀로 섬을 돌아다니다가 그 해골을 발견했다. 해골을 뒤진 이는 벤이었다. 벤은 보물을 찾아냈고, 파냈다(구덩이에 있던 부러진 곡괭이 자루는 벤의 것이었다). 그러고는 보물을 키 큰 나무 발치에서 섬 북동쪽 봉우리가 두 개 있는 산의 자기 동굴까지 여러 번에 걸쳐 등에 지고 날랐다. 그렇게 해서 보물은 히스파니올라 호가 도착하기 두 달 전부터 동굴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었다. 

해적들의 공격이 있던 오후, 의사 선생님은 벤에게서 이 비밀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정박지에서 배가 사라진 것을 알자 실버에게 가서 이제 더는 쓸모가 없게 된 지도를 주었다. 식량도 주었다. 벤 건의 동굴에는 그가 소금에 절여 놓은 염소고기가 넉넉히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말뚝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와 봉우리가 둘인 산으로 갈 기회를 얻기 위해 이것저것 전부 양도했다. 벤 건의 동굴은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도 없었고 보물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P321-322)     


곧 우리는 모두 동굴로 들어갔다. 안은 널찍하고 공기도 잘 통했다. 조그만 샘과 맑은 물웅덩이가 있었고, 양치식물들이 자라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바닥은 모래였다. 커다란 모닥불 앞에는 스몰렛 선장이 누워 있었다. 모닥불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쪽 구석에는 엄청난 금화와 사각형으로 쌓아 올린 금괴 더미가 보였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었고, 또 히스파니올라 호에 탔던 사람들 가운데 열일곱 명의 목숨을 앗아간 플린트의 보물이었다. 보물을 이렇게나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을까. 또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얼마나 많은 멀쩡한 배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을까. 얼마나 많은 용감한 사람들이 눈가림을 당한 채 널빤지 위를 걸어 바다에 빠졌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을 쏘아 댔을까. 얼마나 많은 치욕과 거짓과 잔인무도한 짓들을 저질렀을까. 아마 살아 있는 사람 그 누구도 알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 섬에는 한몫씩 챙길 수 있으리라는 헛된 꿈에 젖어 이 범죄에 가담했던 자 셋이 남아 있었다. 바로 실버, 늙은 모건, 벤 건이었다. 

선장이 말했다. “어서 오너라, 짐, 너는 나름대로 훌륭한 아이지만 다시는 너와 함께 바다로 나가고 싶지 않구나. 네게는 내가 좋아하기에는 벅찬 면이 있거든. 자네는 존 실버 아닌가?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근무에 복귀했습니다.” 실버가 대답했다. 

“어이쿠!” 선장은 이렇게 말했을 뿐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날 밤, 동료들과 함께 둘러앉아 한 저녁식사는 얼마나 멋졌던지! 벤 건의 소금에 절인 염소고기와 히스파니올라 호에서 가져온 맛난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를 곁들인 식사는 어찌나 맛있던지! 장담컨대. 그날 저녁처럼 사람들이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는 실버도 있었다. 실버는 모닥불의 불빛이 거의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나 있었지만 열심히 먹고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면 재빨리 앞으로 튀어나왔으며, 심지어 우리들의 웃음에도 슬그머니 동참했다. 실버는 처음에 항해를 시작할 때의 상냥하고 공손하고 고분고분한 뱃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P324-325)     


우리는 모두 엄청난 보물을 가졌고, 각자의 천성에 따라 현명하게 또는 어리석게 그것을 썼다. 스몰렛 선장은 이제 바다에서 은퇴했다. 그레이는 자기 몫을 저축했을 뿐 아니라 갑자기 출세할 마음이 들어 배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래서 지금 그레이는 장비를 제대로 갖춘 배의 항해사이자 공동 소유자이다. 또한 그레이는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벤 건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천 파운드를 받았지만, 그걸 삼주일 만에,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열아흐레 만에 다 쓰거나 잃어버렸다. 벤 건은 딱 이십 일째 되는 날 다시 돈을 얻으러 왔다. 그리고 문지기 자리를 얻었다. 자기가 섬에서 염려하던 딱 그 신세가 된 것이다. 벤 건은 여전히 시골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아이들은 벤 건을 놀려 대면서도 아주 좋아한다. 또한 벤 건은 일요일과 성인들의 축일에는 교회에서 뛰어난 가수로 활약하고 있다.

실버에 대해서는 더는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 무시무시한 외다리 뱃사람이 내 삶에서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실버는 헤어진 흑인 아내를 다시 만나 플린트 선장과 함께 편히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실버가 그렇게 되었기를 바란다. 실버가 저 세상에서 편한 삶을 누릴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은괴와 무기는 플린트가 뭍어 놓은 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맘만 먹으면 그건 내 것이겠지만 내가 그것을 가지러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황소가 끄는 우마차에 밧줄로 묶여 끌려간다 할지라도 나는 그 저주받은 섬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도 지독한 악몽을 꿀때면 그 섬의 해안에서 우르릉거리던 파도 소리가 들리곤 한다. 그리고 때로는 플린트 선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바람에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곤 한다. “여덟 냥 은화! 여덟 냥 은화!”                    (P334-335)

     

영웅과 악당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있는 실버는 당연히 이후 여러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 재탄생되었다. 영화에서는 오손 웰스, 찰턴 헤스턴, 앤서니 퀸, 잭 팰런스와 같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자신이 해석한 실버를 선보였다. 연극과 애니메이션에도 다양하게 해석된 실버가 등장했다. 이렇게 재해석, 재탄생한 실버 가운데 으뜸은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애니메이션 <보물섬>에 등장하는 실버이다. 데자키 오사무의 작품에서도 실버는 영락없는 악당이지만 동료들에게는 진정한 바다의 사나이이자 의리의 화신이며 짐에게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려 애쓰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형과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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