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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17. 2024

김용석의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영화 <미녀와 야수>  2017년

<미녀와 야수>(1992), <미녀와 야수>(1991), <미녀와 야수>(2014), <미녀와 야수: 마법에 걸린 왕장>(2021), <미녀와 야수>(1946), <미녀와 야수>(2010)   

  

저자 김용석은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 킹> <인어 공주> 4편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작품 자체를 텍스트로 삼아 분석하면서 독자와 철학적 대화를 꾀한다.   

   

안데르센의 대표 명작인 <미녀와 야수>를 1991년 월트 디즈니에서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1990년대는 아주 적은 숫자의 뮤지컬이 제작된 시기지만 월트 디즈니에서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등 유명한 히트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제작했다. 그중에서 〈미녀와 야수〉는 감독 게리 트러스데일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 후 트러스데일 감독은 〈노틀담의 꼽추〉(1996),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2001) 등을 연달아 흥행에 성공시켰다. 또한 각본은 린다 울버턴(Linda Woolverton)이 각색했다. 1991년에 등장한 월트 디즈니 사의 애니메이션인 <미녀와 야수>는 아마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버전일 것이다. 이것도 그 밑바탕에는 보몽(쟌 마리 르 프랭스 드 보몽)의 원작이 깔려 있지만, 원작이 권선징악적인 교훈에 충실하고 있다면 애니메이션은 20세기에 발 맞춰 각색했기에 캐릭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줄거리가 원작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보몽의 원작 여주인공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18세기 여성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그보다는 훨씬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20세기 여성상을 보여 준다. 1946년에 개봉한 장 콕토 감독의 <미녀와 야수> 영화는 아브낭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더 추가해 미녀와 야수, 아브낭 사이의 삼각관계를 형성시켰다. 그 시대에 맞는 적당한 재미와 긴장감을 조성한 것이다. 2014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프 갱스 감독의 <미녀와 야수> 영화도,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21세기에 맞춰 작은 요소들을 다시 각색한 부분이 돋보인다.    

 

[마법에 관한 문제]

선과 악의 대립적 상황을 기본 틀로 하는 중세식 이야기 설정에서는, 악을 대표하는 마녀와 마왕이 선의 상징인 주인공에게 마법을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디즈니의 1959년 작품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와 컬럼비아사의 <백조 공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어 공주>도 주인공이 마법에 걸리는 이야가 계약에 의한 것이지만, 마녀가 건다는 면에서는 이 범주에 속합니다. 

마녀와 마왕은 주로 주인공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아니면 권력욕 때문에 마법의 힘을 사용합니다. 통상적으로 마법은 걸린 자가 스스로 풀 수 없으며, 외부인의 힘에 의해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타파해야만 풀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 남자가 영웅적 행동으로 주인공 여자의 마법을 풀지요. 따라서 상황 타파를 가능하게 하는 해결의 열쇠가 마법이 펼쳐놓은 상황 외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미녀와 야수>에서는, 공주가 아닌 왕자가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되며, 마법을 거는 것은 요정입니다. 여기서 요정은 자신이 권력욕이나 시기심 때문에 마법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버릇없고, 이기적이며, 불친절한 왕자가 “사랑의 마음을 갖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마법을 건 것입니다. 즉 중세식 이야기 설정에서는 ‘마법의 동기’가 타자에 있다면, <미녀와 야수>에서는 마법의 동기가 자기 자신에 있는 것이죠.         (P31-32)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 상황은 야수에게 마법을 푸는 길이, 어떤 운 좋은 만남이나 기적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고뇌의 길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즉각적인 매체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야수가 벨을 만나고 나서, 그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해 신하들과 의논하는 동안, 신하 중 하나가 “이런 일에는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조언하는 장면에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야수의 메타포는 ‘사랑이 없는 자’이자,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자’인 것이지요. 더 나아가 아름다운 것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으며, 마음으로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는 추한 노파로 변한 요정이 왕자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왕자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부에 있다는 노파의 말을 듣고도 그녀를 박대하자, 노파가 아름다운 요정으로 변하는 이야기 진입부의 상징성과도 연결되는 것이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와 비슷한 메시지는 다른 문학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왕자에게 한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이지요. 여우는 “중요한 것은 눈에 안 보여.”라고 말하거든요.  (P35)     

[금발의 상징]

디즈니 혼화의 여주인공들 가운데에도 금발이 꽤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주인공 오로라일 겁니다. 그녀를 위한 칭송(稱訟)에 “햇살 가득한 금발/붉은 장미보다 고운 입술”이란 표현이 들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신데렐라도 금발에 가까운 연갈색이고요. <피노키오>에 나오는 요정도 눈부신 금발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백설 공주는 흑발이지요. 이것은 아마도 눈같이 흰 살색에 대비하기 위해서 칠흑 같은 머리색을 선택했기 때문일 겁니다. <인어 공주>의 에리얼은 빨강 머리입니다. 인어니까요. <알라딘>에 등장하는 재스민 공주의 머리를 금발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재스민은 아랍인이거든요.

벨은 흔한 머리색이라 할 수 있는 짙은 갈색 머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미녀와 야수>에서 엑스트라지만 자주 등장하는 3명의 동네 처녀들은 한결같이 금발이라는 사실이지요. 많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이 점이 부각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겠지만, 서구의 전설, 동화, 문학 작품 등에 대해 세세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점이 하나의 전형을 깨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대개 마녀들이나, 신데렐라의 계모같이 악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흑발인 것을 보아도 그 숨은 의미를 알 수 있지요. 밝은 색은 선을, 어두운 색은 악을 상징하는 뭐 그런 것 말입니다. 벨이 금발이 아닌 것은 그녀의 정체성에 고정 관념적 미의 기준과 선과 악의 전통적 상징성의 기준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36-37)     

[갈등으로 시작하는 만남]

실제로, 벨과 야수로 변한 왕자의 만남은 갈등과 충돌로 시작합니다. 벨이 아버지 대신 야수의 성에 갇히면서, 야수에게 처음 한 말은 불평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도 못했다는 불평이었지요. 야수가 첫날 저녁 벨을 만찬에 초대했으나, 거절당하자 내뱉은 말(“그녀는 너무 까다로워”) 역시 두 사람의 만남이 갈등으로 시작함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관계에서 넘어야 할 난관이 많음을 의미하며, 둘 사이의 사랑도 둘이 힘들게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P38-39)     

[특별한 선물]

벨과 야수가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야수가 벨에게 하는 선물도 탈중세적입니다. 야수는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벨에게 도서관을 구경시켜주고 이제 그녀의 것이라고 합니다. 야수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은 구체적인 보물이 아니라, 상징적인 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에게 ‘지혜의 보고’인 도서관을 상징적으로 선물하는 것 자체가 탈중세적인 것이죠.

중세 시대 도서관은 계층의 차이뿐만 아니라, 남성 위주의 의식과 가부장적 권위를 대표적으로 상징하였습니다. 성직자, 귀족 외에 여자를 포함한 하층민에게 도서관의 문은 문이 지니는 기능 가운데 반쪽의 기능밖에는 하지 않았지요. 즉 열림과 닫힘의 두 기능 가운데 닫힘의 기능만 한 것입니다. 중세 시대 도서관은 여성 출입 금지 구역이었죠.

이 같은 도서관의 상징을 관찰해보면, 중세의 ‘지식의 개념’과 더 나아가 ‘진리의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 지식과 진리는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정태적(static)인 개념이었던 것이죠. 반면 근,현대의 지식 개념은 동태적(dynamic)이죠. 지식을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니까요.

중세의 지식과 진리에 대한 정태적 개념의 예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의 도서관이 상징하는 것에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도서관은 진리를 보관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진리가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도서관으로 통하는 미로(迷路)는 머리를 잘 쓰면 들어갈 수는 있으나 나오기는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외부인은 운 좋게 도서관에 들어가서 지식과 진리를 접해도 그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벨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죠. 책과 도서관의 은유는 당연히 벨이 외적 아름다움보다 지혜를 추구하는 여성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녀의 사랑이 남녀 간의 본능적인 사랑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더 나아가 플라톤적 에로스의 사랑 및 아가페적 사랑에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지요.             (P40-41)     

[외부의 방해자]

반면 벨과 야수의 방해자는 개스턴이라는 청년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젊고, 힘세며, 잘생긴, 완벽한 남자입니다(혼화 중에는 그를 위한 칭송도 나오죠). 금발의 동네 아가씨들도 모두 개스턴을 동경하고 그의 아내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가 벨에게 억지로 청혼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나, 벨의 아버지 모리스에 대한 음모나, 야수를 잡으러 가기 위해서 동네 사람들을 선동하는(“나를 따를 자 누군가?”라고 마치 전체주의적 선동적 리더처럼 행동하죠) 행위 등을 보면, 바로 그가 야수이며 괴물임을 알 수 있죠. 

더구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야수는 개스턴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이미 마음이 야수가 아니므로 그를 살려줍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 개스턴은 벨을 향해 가는 야수를 비겁하게 등뒤에서 칼로 찌릅니다. 이것은 야수뿐만 아니라 개스턴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극명하게 대치시켜 보여준 장면이죠. 잘생긴 완벽한 남자 개스턴의 마음은 야수이고, 무서운 모습의 야수의 마음은 가장 훌륭한 인간애를 지닌 것입니다. 이 모순된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이란 말의 의미를 되뇌게 합니다.         (P42-43)   

  

[사랑, 그리고 입맞춤]

어떻게 보면,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투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법을 풀 수 있는 벨과 야수의 사랑이 감각적인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은(물론 그것을 포함하지만)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마법이 풀리고 야수가 왕자로 돌아왔을 때, 야수가 죽은 줄 알고 엎어져 슬픔의 눈물을 흘리던 벨은 왕자를 보고 놀랍니다. 왕자가 “바로 나(Belle, it’s me).”라고 해도 망설이다가, 왕자의 눈을 보고 그가 야수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지요. 그것은 마음의 아름다움은 눈동자를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생긴 왕자의 늠름한 모습에서가 아니라, 진실과 사랑을 담고 있는 눈동자에서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미모가 아니라, 역시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한 자기 정체성 그 자체이고, 이때에 자기 정체성은 사랑과 일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사랑을 사랑한다.”는 동어반복적인 명제도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P45)    

 

입맞춤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이 작품에서 입맞춤은 그것으로 둘 사이의 구체적인 만남과 애정이 표시되고 사랑이 무르익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사랑의 확인이자 축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디즈니의 다른 작품들에 나오는 어떤 남녀 주인공들 사이의 입맞춤보다 <미녀와 야수>에서 키스는 훨씬 더 관능적이고 육감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백설 공주>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같은 중세적 틀의 작품에서는 왕자의 공주에 대한 키스가 너무 상징화되어 있어서, 그야말로 입을 맞추는 ‘입-맞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입맞춤은 악을 물리치고 마법을 푸는 성스러운 정의의 힘을 전하는 매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선과 정의의 사신인 왕자의 일방적인 입맞춤이지, 왕자와 공주 상호간의 에로틱한 행위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공주는 완전히 수동적이어서, 입맞춤 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미녀와 야수>에서 왕자와 벨의 입맞춤은 상호 능동적이고, 매우 관능적인 깊은 입맞춤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P47-48)   

  

[시간의 척도]

<미녀와 야수>에서는 “장미 꽃잎이 시들어 다 떨어질 때까지”로 되어 있지요. 마지막 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야수로 변한 왕자는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여야 하고, 또 그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꽃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이것은 상식적이고 산술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징적 시간이자, 내면적 시간이기도 합니다. 야수의 마음과 행동에 따라 장미꽃이 떨어지는 속도는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거든요.

혼화 전체에서 ‘시간의 의미’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규정하는 조건으로서뿐만 아니라—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혼화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상징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상징 구조는 시간을 대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고대 그리스 사상가 에픽테투스가 말했듯이 인간사에는 항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제 시간은 산술적 시간, 상징의 시간, 마음의 시간에, 하이데거가 주장했듯 ‘실존의 시간’이란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되뇌게 하지요.

그리고 장미꽃을 ‘시간의 척도’로 선택한 것은 더욱 진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P49)

     

[루미에와 콕스워스]

그들은 다름아닌 마법 때문에 ‘촛대-촛불’로 변한 야수-왕자의 신하 루미에(Lumiere)와 ‘시계’로 변한 콕스워스(Cogsworth)입니다. 이 두 인물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 관계는 상황을 보는 관점, 추구하는 이념, 타인을 대하는 태도, 주인에 대한 자세 등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대립 관계는 전체 상황과 이야기 전개를 두 가지 상반된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체를 둘로 양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으로 생각하면(이 점이 중요합니다) 둘이 함께 전체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구 사상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이항대립적 틀의 전형인데, 전체를 둘로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나눈다는 뜻보다는, 그 두가지로 전체 현상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법적 또는 이항대립적 접근법은 어떤 현상을 단순 구도로 환원시킨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 현상에 대한 효과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장점도 함께 있습니다.       (P53)   

  

루미에 역시 왕자에게는 아주 충직한 신하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따릅니다. 그리고 ‘인간적 의무’를 느끼면 기존의 권위가 규정하는 필요성으로부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결정을 합니다. 즉 가능성의 여지를 놓아두는 것이죠. 다시 말해 콕스워스는 필요한 것만 하지만, 루미에는 가능성을 따릅니다.

콕스워스에게는 의무가 외부에서 오지만, 루미에에게는 의무가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콕스워스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착하지만, 루미에는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압니다. 즉 콕스워스는 전적으로 현실주의자이지만, 루미에에게는 이 세상이 곧 팬터지(Fantasy)인 것입니다.             (P56)     


시계 자체인 콕스워스는 다른 사람들의 비극적 조건을 같이 나누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회귀성으로 시간을 잴 뿐이니까요. 이러한 회귀성은 선택이 필요 없는 삶을 살게 합니다. 따라서 결정하기 위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지요. 냉정하고 무심할 수 있으며, 타인의 고민을 자기 것처럼 나눌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의 삶이란 정체적이고, 변화가 필요 없으며, 변화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선택과 결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반면에 루미에는 시간을 재는 역할을 할 때에도 자기 스스로를 상황에 연관시키고 남들의 사정을 같이 나눕니다. 화면에서 자세히 보면 그는 촛대이자 촛불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소모하면서 시간을 잽니다(곧 살펴보겠지만, “촛불이 타는 동안 편안한 식사를 즐기세요” 등). 시간이 흐르는 만큼 자기 자신을 희생합니다. 어쩌면 그에게 ‘시간을 잰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P62)     


이러한 인식 태도의 이면에는 —사실 이것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균형과 균형적 정의의 문제를 수학 방정식처럼 하나의 ‘등식(等式)’으로 보고자 하는 결정적 단점이 숨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은 아주 ‘과학적’이지만 말입니다. 예를 들면, 변증구조를 이루고 있는 두 입장을 마치 무게가 동일한 두 물체를 저울의 양쪽에 올려놓아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처럼 여기거나,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수학 등식처럼 ‘A=B’라고 보는 태도인 것이죠.

하지만 어떻게 자비와 무자비, 관용과 비관용, 팬터지와 현실감, 자유와 비(非)자유, 필연과 우연 그리고 필요성과 가능성의 의미를 수량화(數量化)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수학 방정식처럼 표시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울의 완전 평형처럼 현실적 정의를 이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변증 구조가 유지되는 것이 균형 그 자체 때문이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P68)     


요정은 왕자가 이런 모순적 대립 상황을 감내하는 길을 찾아가는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왕자가 자신이 겪는 ‘고통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감내의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을 부정하는 길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의 빛이 야수-왕자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미녀와 야수>의 줄거리는 ‘이중적 변증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외부적 상황을 이끌어가는 루미에-콕스워스의 변증 구조와 야수의 내부적 변증 구조가 그것입니다.               (P72) 

    

[삼인칭적 의무와 일인칭적 의무]

이야기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윤리적 요소 가운데 이 작품의 전개에서 전환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수의 대사에 담겨 있는데, 쉽게 포착되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사는 매우 미묘하고 극적인 순간에 야수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로 나옵니다. 그것은 몇 마디 안 되는 대사이지만 야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윤리라고 하면 의무, 권리, 책임 등 좀 ‘무거운’ 개념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미녀와 야수>에서 윤리의 무거움은 사랑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편입니다. 윤리적 메시지의 깊은 의미는 주인공 야수의 미묘한 행동변화에서 감지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개념화해서 표현하면, 객관적 상황에 따른 ‘삼인칭적 의무’에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일인칭적 의무’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전환을 경험하는 주체는 바로 야수입니다.          (P75)     


<미녀와 야수>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갈등으로 시작한 둘 사이의 관계는 위의 사건을 계기로 화해와 상호 이해, 그리고 우정의 관계로 진전되어 결국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첫 번째 커다란 전환점이죠. 이런 의미에서 늑대들의 공격으로 생긴 일은 단순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삶에서 ‘계기가 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만일 야수가 일반적 의무를(누구나 당연히 지키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벨에게도 그런 수준의 일반적 의무를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겠지요.

이러한 의무들은 ‘삼인칭적’ 의무입니다. 전적으로 객관성, 당연성, 일반성을 기준으로 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무는 진정한 삶을 위해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에 열려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반적 당연성의 수준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바탕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관계와 인간적 삶에 있어서 새롭고 진정한 지평을 열 것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P81)     


우리들의 일상적 삶은 수없이 많은 삼인칭적 의무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의식과 자의식의 발견은 평범한 의무 이행에 일인칭적 의무를 부여합니다.‘누구나 그래야만’이란 의무에서 ‘내가 해야만’으로 전환하는 것은 모든 윤리의 정점이자, 더 나아가 ‘메타 윤리학’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내가 해야만’은 나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타인’을 위한 것입니다. 내 행동의 우선 조건으로서, 스스로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은 일인칭적 의무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통해 자기 밖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타자(他者)를 위해 아주 특별한 감수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눈먼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사랑이 증오로 쉽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떠나려 할 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게 되는 것이죠. 물론 야수가 타자인 벨 그녀 자체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격, 그녀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인정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수의 사랑은 사랑의 필연적 족쇄로부터 해방된 사랑입니다.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배웠기 때문이죠.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세계의 의지’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불길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넘어서는 것이죠. 하지만 야수의 사랑은 그러한 필연적 조건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P86-87)     

[희생의 마술, 그리고 서구적 의식]

희생이 무거운 개념인 것은 또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체념한다는 사실 자체는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무겁습니다. 더구나 생명과 삶 자체를 포기하거나,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면 그 무게는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희생이라는 말을 쉽게 은유적으로 사용하지만(예를 들어, “내가 희생하지.” 등), 사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속적 의미에서 희생을 생각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희생으로서 목숨을 바칠 경우에도 그것이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요청이 있거나, 더 나아가 강제성이 있다면 그것은 희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바치는 사람에게 행해진 가장 무서운 폭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벨과 야수의 경우도 직접 목숨을 바치는 희생은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희생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 희생을 결정한 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요.               (P94-95)   

  

여기서 희생, 자유 그리고 믿음의 관계는 체념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불러옵니다. 오로지 자유로 얻은 믿음만이 인간에게 ‘체념의 능력’을 보장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체념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 속에서 체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유로운 인간만이 체념할 줄 압니다. 그것은 자신을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맡기는 것입니다.

체념한 사람은 조용하고 담담하며 평화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혼화의 주인공들인 벨과 야수에게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야수에 있어서,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후 그의 행동은 완전히 체념한 자가 보여주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평온함이 더 극적으로 느껴지지요. 

그의 평온함은 마을 사람들이 성으로 쳐들어온다는 전갈 앞에서도 담담한 태도를 보이고, 개스턴의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이죠.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장면에서 야수를 누르고 있는 이상야릇한 ‘무거움’은 숨막힐 듯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언가 위안적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그 위안과 같은 무거움은 가벼운 걱정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것이죠.             (P98)   

  

희생의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인 희생하는 사람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가 많습니다. 희생은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거의 마술과도 같은 효과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종교적 의식(의식)으로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 기적을 기대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은 기대는 할 수 있으나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적은 인간으로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기대할 뿐입니다.

벨과 야수의 경우도 자신들의 희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벨로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과 자신이 바라던 그 조그만 마을의 답답한 삶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라는 것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야수도 자신의 희생이 결국 극적인 대전환을 가져와 벨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따라서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는 계기라는 것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P105)   

  

우리는 흔히 서구 세계에는 합리적 사고가 강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조리성(absurdity)’이라는 것을 관찰해보았습니까? 이것은 이성적 사고에 숨겨진 비밀 같은 요소입니다. 그것이 비밀인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 없죠.

비밀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한 비밀을 궁금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것은 중요한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희생, 용기 같은 주제도 바로 그 부조리성 때문에 관심을 끌고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사랑과 자유만큼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주제도 없을 겁니다. 

더 나아가 사랑과 자유라는 주제 이상으로, 부조리성 그 자체는 그리스도교 같은 절대신을 믿는 일신교 신앙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래서 서구인들 스스로도 “신은 부조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라고 명한 것은 그 부조리성을 잘 나타냅니다.                

서구 사상은 부조리성과 합리성의 상호 견제뿐만 아니라, 상호 타협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미녀와 야수> 이야기도 한편으론 서구적 합리성의 핵심 산물 가운데 하나인 변증적 사고의 틀과, 다른 한편으론 서구적 부조리성의 핵심 산물 가운데 하나인 희생의 개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 차원 사이에 개인의 자유 의지가 실행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이죠.                   (P106-107)   

  

화이트헤드(A.N.Whitehead)의 말대로 서양사상사가 플라톤 철학을 재해석하는 과정이라면 이는 다름아닌 이분법적 사고 체계의 진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플라톤 철학의 저변에는 이분법 논리 구조의 대명사 격인 변증법(dialektike)이 깔려 있고, 플라톤은 이를 철학 자체와 동일시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이분법 체계에 대한 부정은 철학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발달한 모든 과학 체계를 밑바닥부터 뒤집어 엎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이분법 체계에 대한 비판은 이분법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문학 담론에서 마구잡이로 무시하듯 이분법 논리 구조를 쉽게 버릴 수 있느냐는 것과 현재의 논리 구조에서 이분법적 요소를 제거하면 무엇이 남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이분법 구조 자체가 자연의 법칙을 반영한다는 손쉬운 이론적 근거를 대어 논지를 전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 이항대립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인식적으로도 극복하고 실체적으로도 초월하고자 하는 시도가 하나의 유행을 이루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이 세상의 질서가 실체적으로 어떠한 구분을 거치지 않은 즉각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역사 속에서 유지된 지배적 사고 체계 또한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왜 이분법적 사고 구조가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관과 세계관의 주축을 이루었는지, 그 의미를 따져보는 것은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그 방법론을 사용하는 학자들 자신도 그 이유와 정당성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그러나 쉽게 극복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보다는, 그 문제의 의미를 천착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P125-126)     

[모순의 감내에 대하여]

‘모순의 감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삶의 모순적 구조를 감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순은 바로 모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공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 모(矛)와 방패 순(盾)의 어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완벽한 창과 완벽한 방패의 모순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순은 서로 다른 것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배타적 상반(相反)의 상황이 아니고, 바로 공존을 전제(前提)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서로 어처구니없게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 최고와 절대를 주장하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결국 ‘모-순’의 상황만이 절대적일 수 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상황의 ‘불가피성’이지요.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 속에 모순이 있다면, 인간은 모순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해방되거나 자유로워질 수 없고, 그렇다고 모순 구조 자체를 파괴해버릴 수도 없으며, 모순 구조의 어느 한 쪽을 택해 다른 한 쪽을 지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즉 ‘모-순’의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경우 결국 모순을 감내하는 것이 모순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감내하지 못하면 모순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할 테니까요.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 각 개인 삶의 차이는 모순을 어느 정도 감내하느냐의 차이이지, 모순이 있는 삶이냐 아니면 모순이 없는 삶이냐의 차이는 아닙니다.

우리가 야수 속의 ‘변증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헤겔 변증법을 전용했는데, 좀 전문적인 말을 하면 ‘모순의 감내’는 헤겔 정신 현상학의 진정한 주제일지 모릅니다. 헤겔 변증법의 과정에서 자유 정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모순의 ‘해결’이 아니라 모순을 감내하는 ‘능력’이었으니까요. 따라서 헤겔에게 신(神)은 모순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완벽하게 모순을 감내하는 존재입니다. 신 속에서 모든 모순이 들어차 있음에도 신은 끄떡없는 것입니다. 신을 흉내내는 인간은 완벽한 감내는 불가능하지만, 감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P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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