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계선> 2019년
2011년 발표한 단편소설 「경계선」이 2018년 알리 아바시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져 스웨덴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굴드바게상 작품상과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어판 『경계선』은 영화 원작 외에도 『렛미인』 외전 격인 「지나간 꿈은 흘려보내고」, 『언데드 다루는 법』의 뒷이야기 「마지막 처리」 등을 함께 묶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작은 별』 『우리의 살, 우리의 피, 우리의 뼈』 등이 있다.
티나는 사내가 나타나자마자 뭔가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 사내가 세관 구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확신은 점점 커졌다. 사내가 신고 물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녹색 통로로 들어와 눈앞을 지나가자 티나는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잠시 멈춰주시겠습니까?” (P11)
티나는 카펠셰르 항구에서 일하고 있다. 로드만쇠섬의 일베리아에 있는 집에서 십 분 거리다. 그녀가 일한 뒤로 적발 건수는 극적으로 증가하다 이윽고 감소하기 시작해 계속 줄고 있었다. 밀수꾼들은 그녀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걸 알았고, 카펠셰르를 뚫을 수 없는 항구로 여겼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한 일은 주류 밀반입 아니면 가끔 가방 안감 속에 스테로이드를 어설프게 숨겨 들어온 사람들을 잡아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근무시간을 매주 바꿔서, 밀수꾼들이 어떤 시간대를 피하면 되는지 파악하지 못하도록 했다.
티나는 상자에 손대지 않고 가리키며 말했다. “장난하자는 거 아닙니다. 이게 뭡니까?”
“애벌레 부화기입니다.”
“네?”
사내는 수염 속에서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엷게 미소지으며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제야 티나는 전선 한 끝에 달린 평범한 플러그를 알아보았다. 사내가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은 얇은 판을 세워 네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벌레 새끼를 키우는 거죠.” 사내는 뚜껑을 잡고 계기판을 가리켰다. “온도, 전기, 열. 짜잔! 그렇게 벌레가 나오는 겁니다.”
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물건을 가지고 계시죠?”
사내는 상자를 가방에 도로 넣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불법인가요?”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사내는 검색대 위로 몸을 기울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벌레를 좋아하시나요?”
뭔가 매우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티나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떨림이 훑고 내려갔다. 평소 다른 사람들에게서 잘 포착해내는 긴장감을 스스로 뿜어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다행히 주위에는 그것을 알아챌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티나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잠깐 저쪽으로 들어가주세요.” 그리고 안쪽 조사실을 가리켰다. “가방은 여기 놔두시고요.”
티나와 동료들은 사내의 옷과 신발을 뒤졌다. 가방 속 모든 물건은 물론이고 가방 자체까지 샅샅이 검사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몸수색은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가능했다. (P14-15)
소나무 아래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보슬비가 순식간에 폭우로 변했다. 몇 분 지나자 바위들은 급류 속 삼각주 꼴이 되고 말았다. 티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빽빽한 소나무 가지들이 튼튼한 우산처럼 머리 위를 막아준 덕분에 계속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빗방울이 드문드문 책장에 떨어졌을 뿐이다.
폭풍우가 숲을 가로질러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급기야 굉음이 울리면서 몸 아래 바위의 떨림까지 느껴지는 지경이 되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이만 책을 덮고 빗속을 헤치고 집에 돌아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뒤 아버지가 티나를 찾아냈다. 딸이 가끔 그 나무에 간다는 걸 몰랐다면 며칠, 몇 주가 걸렸을 수도 있었다.
티나는 나무 윗동 가지들 아래 깔려 있었다. 벼락이 나무 꼭대기에 떨어져 밑동까지 타고 내려가 아래에 있던 아이를 강타했고, 그 순간 나무 윗동이 통째로 아이 위로 쓰러졌던 것이다. 아버지는 고지대 벌판에 올라가 산산이 부서진 나무를 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야말로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까.
아버지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가 쓰러진 딸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힘을 발휘해 부러진 나무 윗동을 간신히 뒤집고 딸을 밖으로 끌어냈다. (P25)
사고 전에도 매력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티나의 얼굴은 정말로 추해졌다. 나무 밑동을 향해 있던 한쪽 뺨은 심한 화상을 입어 피부가 재생되지 못하고 영영 검붉은색을 띠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눈은 다치지 않았지만 눈꺼풀이 반쯤 감긴 채 굳어서 늘 의심하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돈을 제법 벌기 시작하면서 티나는 혹시 성형수술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물론 피부는 이식할 수 있지만, 신경 손상이 너무 깊어 새로운 피부에 자리잡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눈꺼풀은 수술중 눈물길이 다칠 수 있어 고려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래도 티나는 시도해보기로 했다. 등 피부를 떼어내 얼굴에 이식하는 데 돈을 썼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식한 피부는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고 일주일 뒤 쪼그라들어 죽어버렸다.
그때 이후로 성형수술 기술이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티나는 운명을 받아들였고 재도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무도 벼락 맞은 모습 그대로인데 왜 나는 회복해야 한단 말인가? (P26-27)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춰본 것은 여러해 전이었다. 꼬리뼈 바로 위의 커다랗고 붉은 흉터.
티나는 세수하고 종이타월로 물기를 닦았다.
그녀가 보레를 집으로 초대한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베르트는 생각이 다를 테고, 보레의 신체에 관한 정보는 분명 놀랄 일이었지만, 티나는 여전히 그것이 이유가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확실했다.
사내가 뭘 숨기는지 알 수 없지만, 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걸 숨기고 있고, 티나는 그게 뭔지 알아내야 했다. 그 말은 사내를 가까이 두고 관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라는 뜻이었다.
안 그래? (P44)
9월 18일
어젯밤 보레가 왔다. 개들이 짖기 시작해서 그가 왔음을 알았다. 일단 오두막을 일주일 빌리기로 했다.
롤란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전부 내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꼭 ‘무민’시리즈에 나오는 머들러처럼 말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추를 모으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이웃집 부부는 태어난 딸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아직 아이를 보러 가지 않았지만, 한 번은 가봐야 할 것이다.
사는 게 행복하지 않다. 망할 헤이코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범법자를 잡아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세관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은 문제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여전히 힘든 일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롤란드는 저녁 내내 부루퉁해 있다. 그의 가장 이상한 점은 알코올의존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말이지 그게 딱일 텐데.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에게는 텔레비전이 있다. (P64-65)
9월 25일
토요일. 쉬는 날이다.
내가 보기엔 분명하다. 그는 오두막에 아기를 숨겨두고 있다. 아니면 아기 같은 소리를 내는 동물이거나.
보레가 나갔을 때 자동차가 서 있는 걸 보고도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오두막을 조사했다. 나처럼 그도 산책하러 가면 오래 걸린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냈다. 금속 상자의 뚜껑을 열어본 것이다. 뭘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안에는 분명 벌레들이 들어 있었다. 모르겠다. 파리였는지도. 유충이 잔뜩 들어 있었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작은 벌레 몇 마리는 이미 변태를 끝내고 하얀 구더기들 위로 기어다녔다. 구역질이 나야 정상이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왠지 아름다워 보였다.
오두막을 나오는데 신이 났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9월 27일
어제 숲에서 보레를 만났다. 내가 오두막에 들어간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나도 열쇠가 있는데, 하하.) 어쨌든 그는 목적을 이룬 것 같다. 그가 나가면서 문을 잠그는 걸 보자 겁이 났다. 그리고 그를 뒤따라갔다.
내 머릿속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롤란드가 하는 말에 아예 관심을 둘 수가 없다. 중요한 말이라고는 하는 법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한집에 사는 사이인데, 이번 주말에 무슨 박람회인지 간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글로 한번 써보겠다. 나는 보레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보레를 사랑한다. (P70-71)
상자 속 수건으로 만든 잠자리 위에 아주 작은, 태어난 지 고작 이 주 정도 된 아기가 있었다. 가냘픈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보레는 아기 머리를 검지로 어루만졌다. 티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기 맞잖아요.” 티나는 말했다. 여자아이였다. 눈을 감고 있고, 꿈을 꾸는 것처럼 손가락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입가 한쪽에 말라붙은 우유 자국이 조그맣게 보였다.
“아니에요.” 보레가 말했다. “히시트예요. 수정되지 않은 거죠.”
“하지만 아기잖아요. 누가 봐도 아기인데.”
“내가 낳았어요.” 보레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맞겠죠. 이건 히시트예요. 영혼이 없는..... 존재죠. 생각이 없어요. 난자 같은 거예요. 아직 수정되지 않은 난자. 하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변할 수 있어요. 봐요.....”
보레가 한쪽 눈꺼풀을 쿡 찌르자 아기가 눈을 떴다. 티나는 신음을 내뱉었다. 아기의 두 눈이 새하얬다.
“앞을 못 봐요.” 보레가 말했다. “귀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죠. 그냥 숨쉬고 울고 먹기만 할 뿐.” 보레는 아기 입가에 묻은 하얀 얼룩을 문질러 지웠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을 강조하듯 덧붙였다. “히시트, 우린 그렇게 불러요.”
“그럼 그 벌레들이...... 얘를 위한 거예요? 먹이려고?”
“그래요.” 보레는 손가락에 묻은 하얀 얼룩을 다시 문질러 없앴다. “당신이 본 줄 알았는데. 여기 들어왔을 때 말이에요.”
티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뱃속이 조금 메스꺼워지고, 뭔가 목구멍으로 기어올라오는 것 같았다. 티나는 우유처럼 하얀 아기의 눈에서 억지로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 “그, 변할 수 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보레가 아기의 오른쪽 빗장뼈 부분을 세게 누루자 손가락이 쑥 들어가면서 움푹 팬 자국이 남았다. 아기는 반응이 없었다. “진흙이나 마찬가지예요.”
티나는 움푹 들어간 부분을 노려보았다. 아기 가슴께에 생긴 자국은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티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은 보레를 그냥 두고 침대에서 기어나갔다. 보레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티나는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챙겨 양팔로 안았다.
“도대체....... 왜 그걸 갖고 있어요?”
보레는 티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온기와 사랑이 감돌던 그 눈에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숲속 호수의 외로움만 보였다. 가냘픈 목소리로 보레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P86-87)
“그래.”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얼마나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싶은지 모르지만, 넌 아주 심각하게...... 방치되어 있었어.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10월인데도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기어다니고 있었고, 네 부모는 먹을 거라고는 전혀 없었다. 전기도 물도 없고, 넌 말도 못했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 심지어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무슨 움막 같은 곳에 살았어. 벽만 세운 곳. 땅바닥에 불을 피우면서 말이야. 그래서 널...... 사람들이 구출한 거야. 그리고 결국 우리에게 오게 된 거지.”
티나는 눈물이 차올랐다. 황급히 눈물을 닦고 입을 손으로 막은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P93)
티나는 느닷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노나 눈물과 같은 원천에서 솟아나는 거칠고 끔찍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웃었다. 비명을 질렀다. 모든 것이 이렇게 명확하고 간단하다니.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모든 일이 코밑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나는 양손바닥으로 머리를 때렸다.
“멍청이!” 그녀는 소리쳤다. “이 멍청이! 우리가 뭘 하는지 온 세상이 다 알잖아!” 그녀는 다시 헐떡거리며 웃었다. “우린 아기를 바꿔치기해! 인간들의 아기를 훔치고 대신 우리 아기를 놔두는 거야!” (P99)
보레가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티나는 의사의 표정 없는 단호한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히시트는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인간 세상에서 자라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인간들은 트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혹시라도 트롤을 발견하면 정신병원에 가둬 꼬리를 잘라내고 불임수술을 하고 강제로 인간의 언어를 배우게 만든다.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려 애쓴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 아이들을 데려가는 거야.
티나는 입안에서 녹슨 쇳조각이 갈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안타깝다고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이웃집을 떠났다. 동시에 그곳에 뭔가 다른 것도 남겨두었다. 그녀는 오두막으로 가서 침대에 기어들어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P100-101)
티나
문을 두드렸어요. 아무도 없더군요. 여전히 같은 기분인가요? 내 직업은 아이들을 파는 거였어요. 인간이라면 나쁜 사람이었겠죠.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아마 법정에 선다면 무기징역을 받겠죠. 지금은 그 일을 그만두었어요.
나는 우리 아기를 임신했어요. 히시트는 수정되지 않은 난자예요. 아기는 수정이 된 난자를 말하죠. 이 아기는 자라서 당신과 나 같은 모습이 될 거예요. 잘 자랄 수 있다면. 아기를 낳아서 제 모습 그대로 키우려고 해요. 아마도 북쪽 숲에서 살겠죠. 와서 나와 함께 살아요.
2월 20일 카펠셰르에 갈 겁니다.
보레 (P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