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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04. 2024

패니 플래그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1992년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Fried Green Tomatoes)는 미국에서 제작된 존 애브넷 감독의 1991년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배우이자 작가인 패니 플래그가 1987년에 펴낸 소설을 캐럴 소비에스키가 각색하였다. 캐시 베이츠, 메리 스튜어트 매스터슨, 메리루이즈 파커, 제시카 탠디 등이 출연하였고, 조던 커너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1992년 제64회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조연상(제시카 탠디), 각색상 후보에, 제49회 골든 글로브상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 여우주연상(캐시 베이츠), 여우조연상(탠디) 후보에 올랐다. 1993년 제46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에서는 베이츠와 탠디에게 적용되는 후보 지명 항목이 재조정되어 탠디가 여우주연상 후보 자리에 가고, 베이츠는 여우조연상 후보 명단에 들어갔다.     

이 영화 덕분에 약 0.6cm 두께로 썰어 낸 풋토마토에 옥수수 가루를 묻혀 베이컨 기름에 튀겨내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남부를 대표하는 미식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내 인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언제 이렇게 늙어 버렸는지는 말해 줄 수가 없군요. 세월이 내 위로 미끄러져 지나갔다고나 할까요.

(...)

재미있는 게,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 것 같더니 스무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멤피스행 급행열차라도 탄 것처럼 빨리 지나가더라는 거예요.        (P13~14)    

 

“그들은 한때 쿠키라는 이름의 너구리를 키웠어요. 난 너구리가 크래커를 물에 담가 씻으려고 하는 모습을 몇 시간씩이나 앉아서 지켜보곤 했답니다. 그들은 자그마한 물통을 뒤뜰에 놓고서 너구리에게 소다 크래커를 주곤 했어요. 너구리는 크래커를 하나씩 물에 집어넣었는데 그럴 때마다 크래커가 사라져 버리니 대체 무슨 일이 일인가 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매번 자기 빈손을 쳐다보며 몹시 놀라곤 했죠. 크래커가 어디로 가 버리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그 너구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시간을 크래커를 물에 씻으며 보냈어요. 쿠키도 씻었는데, 하지만 더 우스웠던건…… 언젠가 아이스크림콘을 씻었던 일이죠.(P24)   

  

“그게 아니에요. 더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11월 어느 날 커다란 오리 떼가 날아왔는데, 아마 40마리도 넘었을 거예요, 호수 한가운데에 내려앉았죠. 그날 오후, 오리들이 앉아 있는 동안 희한한 일이 일어났어요.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지면서 호수가 바위처럼 꽁꽁 얼어 버린 거예요. 3초나 걸렸을까. 1초, 2초, 3초, 딱 그렇게요.”

스모키가 놀라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랬어요.”

“그래서 오리들이 얼어 죽은 거로군요.”

“오, 절대 아니에요. 오리들이 얼음을 매단 채 날아가 버렸죠.

그 호수는 지금도 조지아주 어딘가에 있어요.” (P35)  

   

어젯밤 저녁 먹는 자리에서 애드콕 부인이 그랬어요. 자기 집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진짜 골동품이라고.... 50년이 넘은 것들이라고.... 자기 물건들은 죄다 큰돈이 되는 것들이라고. 그래서 오티스 부인에게 그랬어요. ‘난 별 가치도 없이 인생을 출발했지만 이제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아주 귀중한 골동품이 됐잖아. 시장에 내놓으면 아마 한 재산 될 거야.’ 라고요. (P51)     


이지는 늘 오버올을 입고 맨발로 다녔던 것 같아요. 좋은 옷도 모조리 망쳐 버리곤 했죠. 나무 타기를 좋아하고, 버디나 다른 남자 형제들하고 사냥을 다니거나 낚시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버디는 이지가 사내아이들 못지않게 총을 잘 쏜다고 했어요. 작고 예쁜 아이였죠. 버디가 머리를 짧게 잘라 버렸을 때만 빼고요. 그때 이지를 봤더라면 틀림없이 사내아이인 줄 알았을 거예요. (P52~53)   

  

에벌린 카우치는 바느질 방에 틀어박힌 채 탁자를 응시하며 배스킨라빈스 초콜릿칩 아이스크림을 두 통째 먹고 있었다. (...) 에드는 자기 동굴 속에서 축구 경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에겐 잘된 일이었다. 요즘 들어 그는 에벌린이 살찌는 음식을 먹는 걸 볼 때마다 놀라는 시늉을 하며 “다이어트하느라 먹는 거야?”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

마흔 여덟 살인 에벌린은 살아오던 중 어디쯤에선가 길을 잃고 말았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빨리 변했다. ‘아들은 남편을 위해, 딸은 자신을 위해’ 두 명의 필수 자녀를 키우는 동안 세상은 생경한 곳으로 변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농담은 갈수록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사람들 모두 너무도 천박해 보였고 상스러운 말을 들으면 아직도 깜짝 깜짝 놀랐다. 그 나이가 되도록 그녀는 한 번도 f로 시작하는 욕을 해 본적이 없었다. (...)

에벌린도 시대에 적응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을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로 키우려고 애써 왔다. 하지만 에드는 그러면 아이가 이상하게 될 거라며 겁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접었고 아이와의 관계는 멀어졌다. 이제는 아들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둘 다 그녀를 앞질러 나아갔다. 딸 재니스는 열다섯 나이에 지금의 에벌린이 아는 것보다 섹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았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P60~61) 

    

에벌린은 ‘착한 여자’였다. 항상 숙녀처럼 행동했으며,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었고, 누구에게든 무엇이나 다 양보했다. 어디에선가 그것에 대한 보답, 즉 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 딸이 그녀에게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에구,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답하자, 딸은 이렇게 말했다. “어휴, 엄만 정말 바보야. 그럼 엄마는 아빠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거 아냐. 말도 안 돼.”

사실이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니 길게 보면 착한 여자였건 아니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에서 소위 ‘놀던’ 아이들도 그녀가 예상했던 것처럼 뒷골목에서 치욕스럽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결혼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순결을 지키고자 했던 그 모든 몸부림, 성관계에 대한 공포, 몸짓을 통해 남자를 극단의 격정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임신이라는 가장 궁극적인 공포, 그 모든 에너지 소모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

그렇다면 조신하게 처신한 것에 대한 보답은 무엇이었을까? 에벌린은 술에 취한 여자보다 더한 꼴불견은 없다는 말을 늘 들으며 살아왔다. 따라서 자신에게는 위스키 칵테일 한 잔 이상을 허용해 본 적이 없었다.

(...)

에벌린은 자신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궁금했다. 내게 어울리는 곳은 어디일까..... (P62~63) 

    

왜 인간은 늙고 쇠약해지고 고통을 느끼는 육체 안에 살아야만 하는 걸까. 책상, 크고 튼튼한 책상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아니면 난로 안에서는? 혹은 세탁기 안에서는? 감정을 흔들어 놓는 의사보다는 전기 기사나 배관공 같은 평범한 수리공을 쓰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출산의 진통을 겪고 있었을 때 산과 의사인 클라이드 박사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카우치 부인, 아기를 보는 순간 이 고통을 다 잊게 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지나고 나면 고통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겁니다. 절 믿으십시오.”

천만에! 에벌린은 그 고통을 낱낱이 다 기억했으며, 에드가 아들을 갖자고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둘째 아이는 갖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거짓말도 드러났다. 둘째를 출산할 때도 첫째 때만큼 아팠던 것이다. 그 고통을 미리 알았기에 어쩌면 더 아팠는지도 모른다. 아홉 달 내내 에드에게 화가 나 있었던 에벌린이었지만, 토미를 낳고 나서는 신에게 감사했다. 어쨌든 자신과 관련된 부분에 한해서만은 할 일을 다 마쳤으니까.          (P84~85)     

오늘 아침 남편과 함께 요양원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에 에벌린은 문득 인생이 비참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이면 자신을 속였다. 그저 그날그날을 견뎌 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오늘은 근사한 일이 생길 거야. 조금 있으면 전화벨이 울릴 거야, 인생을 바꿔 놓을 좋은 소식이 올지도 몰라. 깜짝 놀랄 편지를 받을 거야.....’ 그러나 그녀를 찾는 것은 광고 우편물이거나, 잘못 걸린 전화이거나, 뭔가가 필요해서 온 이웃이었다.

마침내 변할 게 아무것도 없음을, 와서 데려가 줄 사람이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 은근한 초조함과 끔찍한 절망이 밀려왔다. 마치 우물 밑바닥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길고 어두운 밤과 우울한 아침이 끝없이 이어졌다. 좌절감이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와 덮쳤고, 에벌린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시커먼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그 속에 뛰어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점점 더 그러한 생각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방법도 알아 두었다. 총알 한 개면 된다. 차가운 푸른색 마티니같이 매끄럽고 부드러운 총알 한 개면. 일을 시행하기 전에 총은 몇 시간 정도 냉동실에 넣어 둘 생각이었다. 머리에 닿았을 때 싸늘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도록. 뜨겁고 뒤죽박죽이 된 뇌를 관통해 들어가 고통을 영원히 얼려 버리는 얼음처럼 차가운 총알의 감촉을 거의 현실처럼 느낄 수 있었다. 총소리는 마지막으로 듣는 소리가 될 터였다. 그 다음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 땅에서 높이 솟아올라 시원한 공기를 가르는 한 마리 새가 들을 수 있는 침묵의 소리 같은 거나 들리려나. 아름답고도 순수한 자유의 하늘 속에서.

아니,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회색빛 중환자 대기실을 연상시키는 그녀 자신의 삶이었다.                (P89~90)  

   

“저런...... 그렇게 나쁘기만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하나씩 하나씩 짚어 보자고요. 괴롭히는 것이 뭔지 말해 봐요.”

“그게..... 아이들이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났는데, 그래서인 것 같아요. 제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 같은 생각이 드네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다들 그런 일을 겪는답니다.”

“게다가 도저히 먹는 걸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요. 노력은 많이 했어요. 아침에 잠에서 깰 때마다 오늘은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하죠. 그러고는 매일 그 다짐을 깨뜨려요. 집 안 구석구석에, 심지어 차고에까지 사탕을 숨겨 놓아요. 어찌 된 일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저런! 사탕을 먹는다고 그리 해될 건 없어요.”

“한 개 정도라면 괜찮겠죠. 예닐곱 개가 아니라면요. 정말로 뚱뚱해져서 아예 포기해 버릴 배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체중을 줄여서 정말로 날씬해질 만큼 의지력이 있던가요. 저는 그저..... 딱 그 중간에 끼어 있는 기분이에요. 저에겐 여성 해방 운동이 너무 늦게 왔어요.... 결혼을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더라고요. 부인께서는 결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것 같네요. 제가 뭘 알았겠어요? 이젠 뭔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어요.... 인생이 그냥 제 곁을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만 같아요.”

에벌린은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스레드굿 부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스레드굿 부인, 전 늙었다고 하기엔 너무 젊고, 젊다고 하기엔 너무 늙었어요. 어느 쪽에도 어울리지가 않죠. 죽어 버리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요.”             (P94~95)     


“하지만 부인께서는 걱정거리 같은 건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아주 행복해 보이시는걸요.”

스레드굿 부인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 에벌린, 다 묻어 버렸어요. 어떤 상처든 아프긴 매한가지죠. 주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많은 슬픔을 주시는 걸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하루도 더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았던 시절이었죠..... 이 말을 해주고 싶군요. 슬픔 속에서 살면 안 돼요. 그건 병을 부르는 가장 빠른 방법이랍니다.”             (P97) 

    

엄마는 우리를 보시며 나직이 말씀하셨죠. ‘자, 얘들아, 저 애는 지금 완전히 넋이 나가 있어. 그러니까 이지 보고 웃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지?’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지요. 이지가 들어왔는데 보아하니 얼굴은 힘껏 문질러 씻은 것 같았고, 머리는 욕실 장에서 찾아낸 오래된 기름을 발라 매끈하게 빗어 내렸더군요. 우리는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지의 모습은 정말 볼만했답니다. 껍질 콩을 더 먹지 않겠느냐는 루스의 별것 아닌 말에도 귀까지 빨개질 정도로 얼굴을 붉혔어요……. 팻시 루스가 맨 처음 시작했어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린 거죠. 밀드레드가 그 뒤를 이었고요. 전에도 얘기했지만, 난 언제나 한 박자 느려서 밀드레드의 뒤를 이었고 그다음은 줄리언이 웃기 시작했어요. 더 이상 참지 못한 줄리언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엾은 에시 루에게 입에 들어 있던 으깬 감자를 죄다 뿜어 버렸죠.(P112~113)     


“있잖아요, 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요. 만약 누가 루스를 해치려 한다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당장 죽여 버릴 거예요.”

“오, 이지, 말만 들어도 끔찍해.”

“아뇨, 그렇지 않아요. 증오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사랑 때문에 죽이는 편이 낫지 않아요?”                  (P119)     


늘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점차 사랑을 느끼게 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루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지가 환하게 웃으며 벌꿀이 든 병을 건네주려 했을 때, 그토록 억제하려 했던 감정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이지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안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날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터였다.         (P121)     


서른네 살의 프랭크 베넷은 허영심이 강한 남자였다. 검은 구두는 늘 반짝반짝 광이 났고, 머리는 빈틐없이 손질되어 있었으며, 옷차림은 완벽했다. 또한 그는 매주 이발소에서 손톱을 손질받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말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 혈통인 듯 가무잡잡한 피부에 숱 많은 머리 그리고 강철색 눈을 지닌 그는 잘생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쪽 눈이 구슬로 된 의안이라지만 다른 한쪽에서 차갑게 빛나긴 마찬가지여서 어느 쪽이 의안이고 어느 쪽이 진짜 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P234-235)     


“이봐, 늙은이. 내 두 눈 중에 어느 게 유리구슬인지 알아맞히면 내가 한 잔 사지.”

절대 알아맞힐 리 없다고 생각한 그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노인은 그를 쳐다보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 

“왼쪽이오.”

그의 친구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프랭크는 내심 깜짝 놀라면서도 노인에게 운이 좋았다며 웃어 넘기고는 카운터에 50센트를 던졌다. 일당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바텐더가 노인에게 말했다. 

“뭘 드시려오, 손님?”

“위스키.”

바텐더가 노인의 잔에 술을 따르고 나서 말했다. 

“노인 양반, 왼쪽 눈이 유리라는 걸 어떻게 그리 금방 아셨소?”

노인은 술잔을 비우고 나서 말했다.

“간단한 일이었소. 그나마 희미하게라도 사람 냄새가 나는 게 왼쪽 눈이었거든.”           (P236-237)     


오늘 스레드굿 부인은 여느 때보다 한층 행복했다. 종이 접시에 담긴 닭튀김과 양배추 샐러드가 앞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에벌린이 그 음식과 함께 먹을 포도 주스를 가지고 지금 막 복도를 따라 올라오는 중이었다. 

“아유, 고마워요, 에벌린. 매주 이렇게 좋은 걸 갖다주고. 나 버릇 나빠지겠어요. 내가 오티스 부인에게 그랬어요. 에벌린이 나한테 더 할 수 없이 잘해 주는데 내 딸이라면 참 좋겠다고..... 어쨌든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난 딸이 없거든요..... 그래, 시어머니께서는 맛있게 드시던가요?”

“아뇨, 전혀요. 닭고기를 좀 가져다 드렸는데 생각이 없으시대요. 시어머니나 남편은 먹는 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냥 살기 위해 먹을 뿐이죠. 상상이 가세요?”           (P253)     

‘난 지금까지 에벌린 카우치처럼 피부가 고운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에벌린의 어머니가 그녀를 평생 동안 솜으로 싸서 키우지 않았나 싶다니까요.’

“어머나, 고마워요. 스레드굿 부인.”

“사실이 그래요. 주름도 없잖아요? 오티스 부인에게도 말했어요. 에벌린은 메리 케이 화장품 외판원 같은 걸 고려해 봐도 될 거라고요. 그런 피부와 성격이라면, 장담컨대 분홍색 캐딜락 한 대쯤은 금방 탈 수 있을 거예요. 내 이웃인 하트만 부인의 조카딸이 그 화장품을 팔아 큰돈을 벌었고, 보너스로 분홍색 캐딜락을 받았다더군요. 그런데 그녀는 에벌린의 반만큼도 안 예쁘거든요.”

“오, 스레드굿 부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 하지만 전 그런 일을 시작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요. 사람들은 젊은 여자를 원하잖아요.”

“에벌린 카우치, 무슨 말을 그렇게 하우. 당신은 아직 젊어요. 마흔여덟 살이면 아직 아기일 뿐이라고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잖아요! 메리 케이는 나이를 상관 안 해요. 그녀 역시 햇병아리는 아니거든요. 자, 내가 에벌린이라면, 그리고 에벌린처럼 피부가 곱고 에벌린 정도 나이라면, 캐딜락에 도전해 보겠어요. 물론 운전면허를 따야 하겠지만 어쨌든 도전은 해 볼 거예요.......

생각해봐요, 에벌린, 에벌린이 나처럼 오래 산다면 앞으로 살날이 37년이나 남아 있어요.....“

에벌린이 웃으며 말했다. 

“여든여섯 살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스레드굿 부인?”

“그게, 난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해요. 전에도 말한 것처럼 그건 아주 살금살금 다가오죠. 어떤 날엔 젊었는데 다음 날엔 가슴과 턱이 처지고 어느 샌가 고무 거들을 입고 있어요. 하지만 자신이 늙었다는 건 깨닫지 못하죠. 거울을 들여다볼 땐 알 수 있어요..... 어떨 때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기도 하죠. 내 목이 낡은 주름 종이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주름이 너무 심해서 이제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고요. 주름을 없애 보려고 에이번에서 가져온 뭔가를 발랐는데 고작 한 시간 만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리더군요. 그래서 눈속임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이젠 화장도 하지 않고 로션이나 조금 바르고 눈썹 좀 그리고 그래요..... 내 눈썹이 잘 보이겠지만 사실은 하얗답니다..... 게다가 기미투성이라오.”

스레드굿 부인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P292-293) 

    

버밍햄에[서 급하게 빠져나오긴 전 아티스는 매일 오후 측면에 흰 타이어가 달린 푸른색 시보레를 몰고 레드마운틴 산에 올라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렌지색 연기를 뿜어 내는 높다란 굴뚝이 달린 제강 공장들이 보였다. 그에게 그 시간의 그 도시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렵이면 하늘은 공장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으며, 중심가 도로와 그 너머 슬래그타운에 이르기까지 온 도시에서 켜지기 시작하는 네온 불빛이 흔들리며 반짝거리곤 했다. 

버밍햄, 대공황기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미국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도시’라고 이름 붙인 곳..... 그곳 사람들은 너무 가난했다. 아티스는, 돈을 위해 자신을 쏘아 달라고 했던 남자와, 오래 춤추기 대회에서 우승하려고 사흘 동안 소금물과 식초에 발을 담갔던 소녀를 알았다..... 미국 전체 도시 중 1인당 소득이 가장 낮은 곳이면서도 남부에서 가장 우수한 서커스 도시로 알려졌던 곳.......

버밍햄, 한때 문맹률이 가장 높고 미국 어느 도시보다 성병이 창궐했던 곳. 그러면서도 미국 도시들 가운데서 주일학교 학생 수가 가장 많았던 기록을 자랑스럽게 보유한 곳..... “백인 전용”이라는 문구를 써 붙인 임페리얼 세탁소 트럭이 시내를 돌아다니던 곳. 피부색이 검은 시민은 전차에서 “흑인”이라고 쓰인 판자 뒤에 앉아야 하고 백화점에서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던 곳.

버밍햄. 1931년에만도 131명이 살해된, 살인자들의 남부 중심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티스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버밍햄의 남쪽부터 북쪽까지를 사랑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비가 내리는 겨울이면 붉은 흙이 언덕에서부터 거리로 쓸려 내려왔고, 초록이 무성한 여름에는 푸른 칡넝쿨이 산기슭을 뒤덮고 나무와 전신주를 타고 올라갔으며, 대기는 치자나무와 바비큐 냄새로 눅눅하고 무거웠다. 그는 전국 곳곳을 여행했다. 시카고에서 디트로이트까지, 사바나에서 찰스턴 그리고 뉴욕까지, 그러나 다시 버밍햄으로 돌아왔을 때만큼 행복했던 시간은 없었다.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아티스는 버밍햄에 도착한 순간부터 완전하게 행복했다. 

그래서 오늘 아티스는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떠나 있으니 죽는 게 낫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아내를 그리워하듯 그는 버밍햄을 그리워했다.          (P302-303)    

 

슈퍼마켓에서 그처럼 심한 욕설을 들은 뒤, 에벌린 카우치는 능욕당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말로 당한 강간이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졌던 것이다.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고 싶었으나 불쾌한 남자들과 마주치면 늘 겁이 났고, 욕설을 듣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목장 울타리를 넘어와 치마를 들추어 대는 유의 사람들 주변에서는 늘 몸을 사리고 조심했다. 작은 빌미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그런 상스러운 욕설들이 날아올 태세를 갖추고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에벌린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리고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아이의 난폭한 행동 덕에 그녀가 놀라 자신을 바라보고, 또한 답변이 두려워 회피했던 질문들을 던지게 됐는지도 몰랐다. 

머리를 겨누고 내 삶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총. 그 힘, 그 음험한 위협..... 욕먹는 것에 대한 그 공포는 무엇일까?

에벌린은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순결을 지켰다. 노처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다. 불감증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오르가슴을 연기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가졌다. 괴상하다거나 남성 혐오자라는 소리를 듣지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고,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바가지를 긁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을 실행해 왔음에도 그 낯선 사람은 화가 난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욕설을 던짐으로써 그녀를 시궁창 속으로 밀어 넣었다.               (P313-314)     

이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행복한 얼굴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래요. 프랜시스가 우리를 쇼핑몰에 데려갔을 때 내가 오티스 부인한테 그랬어요. ‘사람들 표정이 죄다 딱딱하고 못마땅해 보여요. 젊은 사람들까지 말이에요.’

에벌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각박한지 모르겠어요. 이젠 더 이상......”

“저런, 세상 어디나 다 그래요, 에벌린, 말세가 오는 거예요. 2000년도까지 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요.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한테 들었는데 다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말세라더군요. 요한 계시록에 그렇게 나와 있대요...... 물론, 그들도 몰라요. 주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죠.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더 살게 하실지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난 인생의 끝자락에 서 있잖아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요. 준비를 하고 싶거든요. 내가 더너웨이 씨와 베스타 애드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오. 우린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어야 해요.“

에벌린은 질문을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뭐가 어떤데요?”

“아,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직접 그렇게 말했거든요. 손잡고 입 맞추고 껴안고 사방을 돌아다니는 그 사람들을 에벌린도 봐야 하는데. 더너웨이 씨의 딸이 그 사실을 알고는 이곳에 와서 요양원을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어요. 애드콕 부인에게는 불여우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설마.”                        (P328-329)    

 

에벌린이 말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 다 잘 하죠. 저도 흑인이었으면 좋겠어요.”

“흑인요?”

“네.”

스레드굿 부인이 몹시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맙소사, 에벌린. 왜죠? 흑인들은 거의 다 백인이 되고 싶어 해요. 피부를 탈색시키고 머리를 곧게 펴고, 그러면서 말이죠.”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아요.”

“그래요. 지금은 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 왔죠. 백인으로 태어난 걸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흑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요.”

“모르겠어요. 그냥 그들은 서로서로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즐길 줄도 알고요..... 저는 늘.....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은 언제나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스레드굿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그들은 즐거움을 추구하고, 원한다면 마음대로 행동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슬픔이 있답니다. 흑인들의 장례식보다 더 슬픈 건 없을걸요. 그들은 마치 누가 그들의 심장을 찢기라도 하는 것처럼 울부짖고 소란을 피우죠. 우리들보다 상처를 더 많이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윌리 보이가 묻힐 땐 남자 셋이 온젤을 붙들고 있어야 했답니다. 거의 미쳐서 아들과 함께 무덤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거든요. 난 그런 장례식에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아요.”

“어떤 일에든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더군요.”

에벌린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 그들이 부러운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저도 그들처럼 자유롭고 열려 있었으면 좋겠어요.”                        (P392-393)    

 

살면서 늘 흑인들을 보아 왔지만 진실로 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집트 여왕과 같은 광대뼈를 지닌 날씬한 갈색 소녀들. 풍만하고 위풍당당한 가슴을 지닌 여자들, 이곳 여자들은 정말이지 근사했다. 

백인처럼 보이려고 애썼던 과거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무덤 속에서 그들은, 흑인 같은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산층 백인 소년 가수들과 여러 가닥으로 가늘게 땋은 머리나 아프리카 흑인 머리 모양을 한 백인 소녀들을 비웃을 것이다. 판이 바뀐 것이다. 

긴장이 풀리자 조금씩 편안해졌다. 에벌린은 흑인 교회는 백인 교회와 많이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내부를 둘러보던 그녀는 그 교회도 십수 개나 되는 버밍햄의 백인 교회들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밝은 빨간색과 갈색 가운을 입은 250명의 성가대 합창단원들이 일어나더니 우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에벌린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P402)    

 

결혼한 후 재스퍼는 열심히 일했다. 아티스가 옷과 여자들에게 돈을 쓰는 동안, 재스퍼는 도시 밖으로 나온 짐꾼들에게 회사가 제공하는 춥고 쥐가 들끓는 공동주택에서 살았다. 그는 블랜치와 함께 피아노 회사에 가서 현금으로 피아노를 구입할 수 있을 때까지 저축을 했다. 집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였다. 그는 교회에 십일조를 했고, 아이들의 대학 교육을 위해 흑인 전용 소액 저축은행에 예금 계좌를 개설했다. 위스키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한 푼도 남에게서 빌린 적이 없으며, 누구에게 신세를 지는 법도 없었다. 그는 훗날 다이너마이트힐로 알려진 백인 거주 구역 에논 리지로 맨 처음 이사한 버밍햄의 흑인 중 한 사람이었다. 

KKK단이 재스퍼와 이웃들의 빨간 벽돌집을 날려 버렸을 때 몇몇은 그곳을 떠났지만 재스퍼는 끝까지 남았다. 그는 수년 동안 “어이, 깜둥이.”, “야, 너.”, “이봐, 조지.” 같은 말을 참고 견뎠으며, 타구를 비우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구두를 닦고, 밤이면 등과 어깨가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짐을 날랐다. 가끔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철도사 직원들이 짐꾼들의 사물함을 맨 먼저 뒤질 때면 굴욕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예, 선생님.”, “예, 사모님.”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 미소를 잃지 않았고, 한밤중에 소란을 떠는 외판원들에게 술을 날라다 주기도 했다. 거만한 백인 여자들로부터 욕지거리를 들었고, 아이들로부터 깜둥이란 소리를 들었으며, 몇몇 백인 차장들로부터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기도 했고, 다른 짐꾼들에게 팁을 도둑맞기도 했다. 토사물을 치웠고, “깜둥이, 너희들은 해가 지기 전에 나다니지 마라.”라는 경고문이 걸린 컬맨카운티를 수백 번이나 통과했다. 

그 모든 것들을 견뎌 냈다. 하지만.......

재스퍼는 네 자녀를 모두 대학에 보냈다. 자녀 중 누구도 팁으로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처럼 오랫동안 뼈가 부서지도록 일할 수 있도록 지탱해 준 힘도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 그리고 기차였다. 쌍둥이 형제 아티스가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면 재스퍼는 기차와 사랑에 빠져 살았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마호가니 목재로 꾸며진 특실과 호화스러운 붉은 벨벳 좌석을 갖춘 기차들. 일몰 특급, 대왕 야자, 뉴올리언스의 도시, 딕시 특급, 불꽃 특급, 석양 특급, 종려나무, 검은 다이아몬드, 남쪽의 미녀, 은빛 별등 시적인 이름을 가진 기차들.            (P412-413)     


“고마워요, 에벌린...... 혹시 내가 싹양배추 싫어한다는 얘기를 했던가요?”  

“아뇨, 왜 싹양배추를 싫어하시는데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싫어요. 하지만 다른 야채는 다 좋아해요. 냉동된 거나 캔 제품은 빼고요. 나는 신선한 옥수수, 리마콩, 동부콩, 풋토마토 튀김..... 그런 것들을 좋아해요.”

“토마토가 과일이라는 거 알고 계세요?”

스레드굿 부인이 놀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렇다네요.”

“그럴 리가. 난 평생 동안 토마토는 야채라고 생각해 왔어요. 야체라고 생각하고 식탁에 올렸죠..... 토마토가 과일이라고요?”

“네.”                           (P419)  

   

“피시, 이 사건은 기소 요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첫째로, 시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증인들의 증언을 반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를 범인으로 볼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내 생각에 그 프랭크 베넷이라는 사람은 술에 취해 차를 몰다가 강으로 추락했고, 오래전에 물고기 밥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사고사로 판정하고 여기서 종결시키겠습니다.”

재판장은 다시 한 번 망치를 두드리며 말했다. 

“공소 기각.”

십시가 발코니에서 춤을 추었고, 그래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커티스 스무트 판사는 12월 중순에 사흘 동안 열리는 부흥회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또한 그가 앉은 자리에서는 목사가 손을 올려놓고 선서했던 책 표지 사이에 성경책이 없다는 것도 알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너절한 밑바닥 인간 군상들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판사의 딸은 도시 변두리에서 개 같은 삶을 살다가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불과 몇 주 전에 죽은 터였다. 바로 프랭크 베넷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개자식을 누가 죽였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재판이 모두 끝나고 나서 스크로긴스 목사라 다가와 이지와 악수를 했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보십시다. 스레드굿 자매님.”

목사는 이지에게 눈을 찡끗해 보이고 떠났다.                (P448-449)  

   

2분 뒤 술에 취한 프랭크 베넷이 뒷문을 발로 차서 열고 부엌을 통해 뒷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십시에게 총을 겨누며 아기 침대로 다가갔다. 십시가 일어나 아기에게로 가려 하자 그가 뒷덜미를 잡아 채서 방 한쪽 구석으로 힘껏 밀쳐 버렸다. 

십시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소리쳤다. 

“아기에게 손대지 마요! 루스 아씨의 아기란 말이에요!”

“썩 꺼져, 이 깜둥이 년아.”

프랭크가 총의 넓은 면으로 십시를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십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귀에서 피가 흘렸다. 

아티스가 잠에서 깨어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

아티스가 십시에게 달려가는 사이에 프랭크 베넷은 아기를 안아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초승달이 뜬 밤이었다. 트럭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추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프랭크는 트럭 문을 열고 아기를 앞 좌석에 내려놓았다. 아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프랭크가 차에 올라타는데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물체가 천으로 감싼 몽둥이 같은 것을 치는 소리 같았다. 프랭크가 들은 소리는 2킬로그램짜리 냄비가 그의 숱 많은 머리를 칠 때 난 소리였다. 머리통이 깨진 건 순식간이었다. 땅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그는 숨이 끊어졌다. 십시는 아기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아기는 아무도 못 데려가. 어림없지.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 한은.”

프랭크 베넷은 쓰러졌던 십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비쩍 마른 조그마한 흑인 여자가 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냄비를, 그것도 한꺼번에 두 개를 손쉽게 다루리라는 생각 역시 하지 못했다. 완전히 잘못 짚었던 것이다. 

한동안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아티스는 할머니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보았다. 십시가 말했다. 

“가서 아버지를 데려오너라. 내가 백인 남자를 죽였다. 내가 이놈을 죽였어.”           (P472-474)  

   

신임 주지사 건만큼이나 흥미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화요일 아침에 옛 스레드굿 가 집터 부근의 공터에서 사람의 두개골이 발견되었습니다.

버밍햄의 검시관에 의하면 그것은 인디언의 두개골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며 유리 눈이 박혀 있다고 하는데, 시체의 신원은 알 수 없지만 머리가 잘려 있었다고 합니다. 검시관은 비열한 짓이 행해졌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유리 눈을 가진 행방불명자를 찾고 싶으신 분은 <버밍햄 뉴스>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전화 주시면 제가 알아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유리 눈은 푸른색이었습니다.                 (P479-480)     

에벌린은 계속해서 상자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보세요, 여기 쉬슬스톱 카페에서 쓰던 메뉴가 있네요. 1930년대 메뉴가 분명해요. 이 가격들 믿어지세요? 바비큐가 10센트..... 게다가 35센트면 완벽하게 차린 식사를 할 수 있었고요! 파이는 5센트네요!”

“정말 쌌지요. 요즘엔 카페테리아에서도 좀 괜찮게 먹으려면 5~6달러는 들잖아요. 게다가 음료수나 파이는 돈을 따로 받고요.”

다음은 안경을 쓰고 가짜 코를 붙인 이지의 사진이었는데, 정신 나간 듯한 옷차림에 얼뜨기 같아 보이는 네 남자와 함께 서 있었다. 하단에는 “1942년, 딜 피클 클럽..... 누가 누가 썰렁한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클레오가 보낸 부활절 카드 한 장, 에벌린이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던 엽서들, 1950년대의 남부 철도사 침대차 식당 메뉴 한 장, 반쯤 쓴 립스틱, 시편 90장 등사본, “클레오 스레드굿 부인, 86세.”라고 적힌 밴드, 그리고 맨 밑에는 수신인이 에벌린 카우치 부인으로 되어 있는 봉투 하나가 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저에게 편지를 써 놓으셨네요.”

에벌린은 봉투에서 쪽지를 꺼내 읽었다. 

에벌린

여기 십시만의 조리법 몇 가지를 적어 놓았어요. 그 음식들은 나에게 더없는 즐거움을 주었기에 에벌린에게 일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특히 풋토마토 튀김 조리법은 꼭 전해 주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내 소중한 에벌린. 행복해야 해요. 난 행복해요.

당신의 친구, 클레오 스레드굿 부인                              (P494-495) 

    

만명통치약이죠!

풋토마토 튀김

중간 크기의 풋토마토 1개(1인분), 흰 옥수수 가루, 베이컨 기름, 소금과 후추

토마토를 0.5센티미터 두께로 잘라 소금과 후추로 간한 다음 양면에 옥수수 가루를 묻힌다. 큼직한 팬에 베이컨 기름을 두르고 가열한다. 토마토를 넣고 양면이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튀긴다. 

내가 지금 죽어서 천국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들걸요!

우유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풋토마토 튀김

베이컨 기름 3테이블스푼, 계란, 1센티미터 두께로 자른 풋토마토 4개, 마른 빵가루, 밀가루, 우유, 소금, 후추

두툼한 프라이팬에 베이컨 기름을 넣고 달군다. 토마토를 풀어 놓은 계란에 적신 다음 빵가루를 입힌다. 그것을 팬에 넣고 양면이 황금빛 나는 갈색이 될 때까지 튀긴다. 토마토를 꺼내 접시에 담는다. 팬에 남아 있는 기름에 밀가루 1테이블스푼을 넣고 잘 뒤섞는다. 거기에 따뜻한 우유 1컵을 붓고 계속 저으면서 걸쭉해질 때까지 끓인다. 식성에 맞게 소금과 후추를 넣는다. 토마토 위에 소스를 붓고 뜨거울 때 식탁에 올린다. 

단연 최고죠.                    (P52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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