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떤 여인의 고백> 2013년
페르시아 신화에서 유래한 개념인 “인내의 돌”은, 사람이 그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마침내 그 돌이 고민의 전부를 가져간 뒤 폭발한다는 상상의 돌이다. 한 여성이 내면의 욕망에 눈을 뜨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이슬람 여성뿐 아니라 남성중심 사회에서 억눌려 지내온 다른 지역의 여성들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는 2005년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저주받은 상황에 대한 시를 발표한 유명한 시인 나디아 안주만이 남편에게 살해당한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방은 비어 있다. 장식이 하나도 없다. 작은 단검이 걸려 있는, 두 창 사이의 벽만 제외하고는, 그리고 단검 위로 수염을 기른 남자의 사진이 붙어 있다. 서른 살쯤 된 것 같다. 곱슬머리, 턱수염이 양쪽 괄호를 이루고 그 안에 네모진 얼굴이 들어 있다. 검은 눈이 반짝인다. 눈은 작은데, 두 눈 사이에 독수리 부리 같은 코가 우뚝하다. 남자는 웃지 않지만, 웃음을 억지로 참는 사람 같은 얼굴이다. 그래서 야릇한 표정,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을 속으로 비웃는 사람 같은 표정이다. 사진은 흑백 사진인데 솜씨 있는 사람의 손으로 바랜 듯한 색을 칠했다.
이 사진 맞은 편, 벽 아래쪽에 같은 남자가, 사진보다 나이 든 모습으로 바닥에 놓인 매트리스 위에 길게 누워 있다. 턱수염을 길렀다. 가죽밖에 안 남았다. 창백하다. 주름투성이다. 코는 사진보다 더 독수리 부리를 닮았다. 여전히 웃지 않는다. 계속 비웃는 듯 야릇한 표정이다. 입은 조금 벌어져 있다. 사진보다 한층 더 작아진 두 눈은 눈구멍 속으로 움푹 들어가 있다. 시선은 한사코 천장에만, 뚜렷하게 드러난 꺼멓게 변하고 썩어가는 대들보 사이에만 고정되어 있다. 두 팔을 몸에 붙인 채 힘없이 축 늘어뜨리고 있다. 투명한 피부 밑으로 보이는 핏줄들이 벌레처럼, 몸 전체의 뼈대에서 불쑥 튀어 나온 뼈와 얽히어 있다. 왼쪽 손목에는 기계식 시계를 찼고 약지에는 금으로 된 결혼반지를 끼고 있다. 오른팔 팔꿈치 안쪽 움푹 들어간 곳에는 소식자(消息子, 관모양의 의료기구)가 부착되어, 벽에 매달린 비닐 주머니에서 나오는 무색의 액체를 계속 몸에 주입한다. 몸의 나머지 부분은 청색의 긴 셔츠로 덮여 있다. 깃 부분과 양쪽 소매에 수를 놓은 셔츠다. 말뚝처럼 딱딱하게 굳은 두 다리는 지저분한 흰 시트 속으로 들어가 있다. (P12-13)
어린 여자애가 운다. 아이는 이 방에 있지 않다. 아마 옆방에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복도에 있거나.
여자의 머리가 움직인다. 지친 모양이다. 양쪽 무릎 사이에 파묻었던 고개를 쳐든다.
여자는 미인이다. 왼쪽 눈가에 작은 상처가 나서 눈꺼풀 한 귀퉁이의 살이 조금 오그라들어 있기에 그녀의 시선에 기이한 근심이 깃들여 보인다. 두텁고 바싹 마르고 핏기 없는 그녀의 입술이 기도문의 똑같은 말을 부드럽게, 천천히 웅얼거린다.
또 한 여자아이가 운다. 이 아이는 아까 울던 아이보다 좀 더 가까이 있다. 아마 문 뒤에 있는 것 같다. (P14-15)
멀리, 도시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진다. 격렬하게, 폭탄은 아마 집 몇 채와 몇몇 꿈들을 부술 것이다. 상대편이 반격한다. 반격의 폭음은 정오의 무거운 정적을 찢으며, 유리창을 떨게 하지만, 어린아이들을 깨우지는 못한다. 그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는 것은 현재로서는 염주 두 알과 여자의 어깨뿐이다. 그녀는 안약 병을 주머니에 넣는다. ‘알-카흐하르’라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알-카흐하르’. 그녀는 이 말을 되풀이한다. 남자가 숨 한 번 쉴 때마다 이 말을 되풀이한다. 이 말을 할 때마다 그녀는 염주알을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뜨리며 돌린다.
염주를 한 바퀴 다 돌렸다. 아흔아홉 알. 아흔아홉 번의 ‘알-카흐하르’. (P16~17)
긴 침묵. 염주 거의 다섯 바퀴, 다섯 바퀴 돌리는 동안 여자는 벽에 찰싹 붙어, 눈을 감고 있다. 정오 기도를 알리는 소리에 그녀는 허탈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다. 작은 깔개를 꺼내, 접혀 있는 그것을 펴 바닥에 깐다.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를 마치고, 그녀는 깔개 위에 그냥 앉아서, 요일에 맞춰 설교하는 몰라의 말을 듣는다. “오늘은 피의 날입니다. 이브가 처음으로 썩은 피를 잃어버린 것이 화요일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한 아들이 자기 형제를 죽인 것도 화요일, 그레고리, 자카리아, 야히아를 죽인 것도 화요일입닏. 그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파라오의 마법사들, 아시야 빈트 무자힘, 파라오의 부인,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암송아지에게도......” (P24-25)
기도 시간을 알린 다음, 몰라는 쉰 목소리로, 신에게 오늘 수요일, 이 동네 신도들을 보호해달라고 기원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말씀하셨듯이, 수요일은 살리 선지자의 백성인 아드 족과 사무드 족이 일찍이 멸망한 것처럼 파라오의 그 백성이 물에 빠져 죽은 불행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서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겁먹은 음성으로 재빨리 이어 기도한다. “친애하는 신도 여러분, 내가 항상 말한 대로, 수요일은 우리의 가장 고귀한 선지자의 교시에 따르면 누구의 몸에서 피를 내서도 안 되고 피를 주는 행위나 받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이븐 유누스가 전한 가르침 중 한 말씀에서는, 지하드 기간 동안은 그런 행위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당신들의 형제인 존경하는 사령관께서는 당신들의 명예와 피와 부족을 수호하라고 무기를 주십니다!”
길거리에는 남자들이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라고 소리친다. 그들은 달려간다. “알리-후 아크바르!” 그들의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알리-후......” 목소리는 이슬람 사원 쪽으로 다가간다. (P48-50)
그들이 온다. 군홧발의 그들. 군홧발이 다가온다. 그들은 할머니를 내쫓고 집 뜰로 들어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온다. 그들은 창문 앞까지 온다. 부서진 창살을 통해. 기관총의 총구가 철새 무늬 커튼을 양쪽으로 확 젖히며 겨누어진다. 지팡이로 그들은 유리창을 깬다. 세 남자가 소리를 질러대며 안으로 뛰어든다. “꼼짝 마!”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들 중 하나가 횃불을 붙여 전신 마비된 누운 남자 쪽을 비추어보며 짖어대듯이 “넌 거기 그냥 누워 있어. 안 그러면 엉덩이를 콱 쑤셔버린다!” 하더니 군화 신은 한 발을 그 남자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세 남자는 검은 터번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들은 누운 남자를 빙 둘러싼 채 서 있고, 누운 남자는 여전히 천천히, 소리 없이 숨 쉬고 있다. 셋 중 하나가 그를 향해 몸을 숙이고 말한다. “제기랄, 이 놈 입에 관이 꽂혀 있네!” 그러면서 관을 뺀다. “네 무기는 어디 있어?” 하며 으르댄다. 누운 남자의 시선엔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고, 천장의 어두컴컴한 곳, 거미가 벌써 거미줄을 쳐놓은 곳에 멍하니 가 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횃불을 든 남자가 소리친다. “이 사람 끝났어!” 두 번째 남자가 몸을 낮춰 누운 사람의 손목시계와 금반지를 빼면서 결론 내린다. 세 번째 남자는 방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매트리스 아래, 베개 밑, 무늬 없는 초록 커튼 뒤, 융단 밑..... “아무것도 없어!” 그가 탄식한다. “다른 방에 가봐!” 횃불을 손에 들고, 누운 남자의 가슴에 군홧발을 올려놓은 첫 번째 남자가 명령한다. 나머지 두 명은 복종한다. 그들은 복도로 사라진다. (P68-69)
“당신은 내 말을 단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지. 내 말이 당신 귀에 제대로 들린 적이 없어!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한 번도 서로 주고받아본 적이 없어! 우리가 결혼한 지 십 년 넘었지만, 같이 산 것은 겨우 이삼 년이야. 안 그래?” 그녀는 헤아려본다. “그래, 결혼한 지 십 년 반인데, 같이 산 건 삼 년! 이제야 제대로 헤아려보네. 오늘에야 모든 걸 정리해본다고!”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온갖 회한, 후회를 표현할 1,001가지 단어를 대신하는 노랗게 뜬 짧은 미소……. 하지만 재빨리 추억이 기선을 제압한다. “그 당시엔 당신이 왜 없는지 나 혼자 궁금해해보지도 못했어. 당신이 없는 건 내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 당신은 전쟁에 나가 있었으니까. 당신은 자유의 이름으로, 알라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그거면 모든 게 정당화되었지. 그걸로 난 희망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어. 어떻게 보면, 당신은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그녀의 두 눈은 시간을 관통하여, 그때를 다시 보고 있다……. (P89~90)
그녀가 다시 와서 용액 주머니를 채운다. “이젠 드디어, 당신 아버님이 해주신 성스러운 돌 이야기를 이해하겠어. 아버님 돌아가실 무렵이었지. 당신은 또 다시 전쟁에 나가고 없었어. 몇 달 전, 당신이 이 총알을 맞기 전에, 아버님은 편찮으셨어. 그런데 돌봐드릴 사람은 나밖에 없었지. 아버님의 머릿속엔 마법의 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 검은 돌. 아버님은 끊임없이 그 이야길 하셨지..... 뭐더라, 그 돌 이름이?” 그녀는 그 단어를 찾는다. “아버님을 뵈러 오는 친구들에게, 그 돌을 갖다달라고 정색을 하고 부탁하셨는데..... 검은 돌, 소중한......” 그녀는 남자의 목구멍 속에 관을 깊이 밀어 넣는다. “당신 알지, 그 돌을 앞에 놓고..... 그 앞에서 모든 불행, 모든 괴로움, 모든 고통, 모든 비참한 이야기..... 이런 걸 다 탄식하며 털어 놓는...... 마음에 담은 것, 남들에게 차마 말 못할 이야기, 모두 털어놓는 그런 돌......” 그녀는 똑똑 떨어지는 용액 방울을 조절한다. “그 돌에게 이야기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면 그 돌이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비밀을 모두 빨아들이다가 어느 날인가 탁 깨지는 거야. 산산조각 나는 거야.” 그녀는 남자의 눈을 닦아주고 안약을 떨어뜨려준다. “그렇게 되는 날, 이야기한 사람은 모든 고통에서,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거야...... 그, 돌 이름이 뭐더라?” 그녀는 시트를 매만진다.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날 밤, 나 혼자만 곁으로 부르셨지. 임종의 고통에 시달리고 계셨어. 아버님이 중얼거리셨어. ‘얘야, 죽음의 천사가 가브리엘 천사와 함께 나타났단다. 가브리엘 천사가 비밀을 하나 내게 보여줬는데 내가 네게 말해주마. 이제, 난 그 돌이 어디 있는지 안단다. 그 돌은 메카의 카바 신전에 있대! 알라께서 거하시는 집에! 알겠니, 그 ’검은 돌‘ 주위를 이드 명절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돌고 돈단다. 글쎄 내가 너한테 얘기하던 돌이 바로 그 돌이란다....... 천국에 가면 그 돌이 아담의 좌석 역할을 한다는 거야..... 하지만 신이 아담과 이브를 지상으로 추방하신 다음에, 아담의 자손들이 절망과 고통을 호소할 수 있도록 그 돌도 내려보내셨다는구나..... 아브라함이 하녀 하가르와 그 아들을 사막으로 내쫓은 뒤 가브리엘 천사가 그녀와 그 아들 이스마엘에게 베개로 준 게 바로 이 돌이란다..... 그래, 지상의 모든 불행한 자들을 위한 돌이지. 거리로 가라! 가서 네 비밀을 그돌에게 다 털어놓으렴. 그 돌이 부서질 때까지..... 네가 고통에서 벗어날 때까지 말이다.’” 그녀의 입술은 돌연 슬픔의 재(灾) 빛깔이 되어버린다. 잠시 그녀는 상(喪)을 당한 듯한 침묵 속에 그대로 있다. (P117-120)
그녀가 바닥에서 베일을 줍기 전에 이 말이 떠오른다. “생게 사부르(Syngue Sabour)!”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로 이게 그 돌의 이름이야. 생게 사부르, 인내의 돌! 마법의 돌!” 그러더니 남자 곁에 쪼그려 앉는다. “그래, 당신, 당신이 내 ‘생게 사부르’야!”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살며시 스치듯 쓰다듬어본다. 마치 정말로 그 소중한 돌을 만지듯이, “나의 생게 사부르, 당신에게 모든 걸 다 말할 테야. 내 고통, 내 불행을 모두 벗어버릴 때까지. 그리고 당신이.....” 나머지 말은 안 하고 입을 다문다. 남자가 상상하게 둔다.
그녀는 방을 나가, 복도를 지나, 집을 나선다....... (P123)
“.... 자기 몸에 귀를 기울이고 듣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절대로 귀 담아 듣지를 않았어. 당신들 남자들은 오직 영혼의 소리만을 듣나보지.” 그녀는 다시 일어서서 격하게 초록 커튼 쪽을 향해 말한다. “당신의 영혼이라는 게 당신을 이 꼴로 만들었어! 산송장으로!” 그녀는 남편을 숨겨놓은 곳으로 다가간다. “당신의 그 빌어먹을 영혼이 당신을 땅바닥에 이렇게 꼼짝 못하게 붙박아놓은 거라고. 나의 생게 사부르!” 다시 숨을 돌리며 말한다. “오늘, 나를 보호하는 것은 바보 같은 당신 영혼이 아니야.” 그녀는 커튼을 젖힌다. “지금 이 순간 당신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 어디 있는데? 여기, 당신 바로 위에 걸려 있다고.” 그녀는 용액 주머니를 가리켜 보이며 말한다. “그래, 여기 있어. 이 설탕과 소금을 탄 물속에 있지. 다른 어디에도 없어.” 그녀는 가슴을 불쑥 내밀어 보인다. “‘내게 명예를 주는 것은 내 영혼이고, 내 영혼을 보호하는 것은 내 명예다’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여기 당신의 명예가 열여섯 살짜리 젊은애한테 한 방 먹었네! 여기 당신의 명예가 당신 영혼을 한 방 먹이네!” 까칠한 동작으로, 그녀는 남자의 한 손을 잡아 올리며 그에게 말한다. “이제, 당신을 심판하는 건 당신의 몸이야. 당신 몸이 당신 영혼을 심판해.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몸으로 고통을 받는 게 아니야. 영혼이 고통을 받는 거지. 허공에 걸려 있는 그 영혼은 모든 걸 다 보고, 다 듣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더 이상 당신 몸을 좌지우지하지도 못해.” 그녀가 남자의 손을 놓자 손은 바로 매트리스 위로 툭 떨어진다. (P179-180)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면서 그녀는 비로소 그 침묵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방울지는 피를 혀로 핥으며 다시 바느질을 시작한다. “오늘 아침.... 우리 아버지가 또 우리 방에 오셨어. 쿠란, 내 쿠란을, 바로 여기 있던 그 책을 한 팔에 끼고 계셨어..... 그래, 그 쿠란을 가져간 건 아버지였어...... 그래서 공작 깃털은 어디 있느냐고 내게 물으러 오신거야. 왜냐하면 그 깃털이 쿠란 책 속에 이젠 없으니까. 아버지 말씀은, 그 소년, 우리 집에 오는 그애가 깃털을 훔친 거라고. 걔가 오면 꼭 물어봐야겠어.” 그녀는 일어서서 창 쪽으로 간다. “그 애가 왔으면 좋겠네.” (P196-197)
“....그 빌어먹을 공작 깃털이 우리 아버지에게 왜 그리 중요한지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주러 왔다는 거야. 그가 말해주길, 그건 공작 깃털인데..... 그 공작새는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될 때 깥이 쫓겨났대. 그리고 그는 다시 떠났어. 내가 질문 한 번 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이야.” 그녀는 용액 주머니를 새것으로 갈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간격을 조절하고, 남자 곁에 앉는다. “내가 그애 이야기를 하고, 그애를 이 집에 받아들인다고 내게 원한을 품진 말았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뭐랄까?....... 그는 내 맘속에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해. 옛날 신혼초에 내가 당신과 독대하고 있을 때와 거의 같은 느낌이 들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그애도 역시 당신처럼 끔찍한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 그렇게 될 거라고 난 확신해. 당신들 남자들은 여자를 소유하면 그 즉시 괴물이 되어버리잖아.” 그녀는 두 다리를 쭉 뻗는다. “만약 혹시라도 당신 다시 살아난다면, 서 있게 된다면, 당신은 또 다시 예전의 그 괴물이 되어버리겠지?” 잠시 멈추더니, 그녀의 생각이 나래를 편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쩌면 내가 당신에게 들려주는 얘기 모두가 어쩌면 당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고 난 혼잣말을 하지. 당신 내 말 들리지. 귀담아 듣고 있고, 명상도 하지. 곰곰이 생각도 하고......” 그녀는 남편 곁으로 다가간다. “그래, 당신은 변할 거야. 당신은 날 사랑해줄 거야. 당신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와 사랑을 나눌 거지. 왜냐하면 당신은 이제 많은 것들을 알게 됐으니 말이야. 나에 대해, 당신에 대해, 당신은 내 비밀들을 알잖아. 당신 이제부턴 그 비밀에 짓눌려 살게 될 거야.” 그녀는 그의 목에 입을 맞춘다. “당신 내 비밀 지켜줄 거지. 그럼 나는 당신 몸을 지켜줄 테니.” (P200-201)
“만약 모든 종교가 계시 즉 진실의 계시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면, 그렇다면, 나의 생게 사부르, 우리의 이야기 역시 하나의 종교야. 우리만의 종교!” 그녀는 걷는다. “그래, 몸은 우리의 계시야.” 걷다가 멈춘다. “우리의 몸, 그 몸의 비밀, 상처, 고통, 쾌락.....” 그녀는 마치 진리를 양손에 쥐고 그걸 남자에게 주려는 듯 얼굴이 환해져서 남자에게 와락 달려든다. “그럼, 그럼, 나의 생게 사부르..... 신을 일컫는 아흔아홉 번째, 그러니까 마지막 이름이 뭔지 당신 알아? 그건 ‘알-사부르’, 인내하는 자라는 뜻이지! 당신을 봐, 당신이 신이야. 당신은 존재하면서, 움직이지 않잖아. 당신은 들으면서, 말하지 않잖아. 당신은 보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잖아! 신처럼, 당신은 인내하고, 마비되어 있어. 그리고 난, 난 당신의 메신저야! 당신의 예언자! 난 당신의 목소리야! 당신의 시선이고! 난 당신의 손이야! 난 당신에게 계시를 해주지! 알-사부르!” 그녀는 초록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리고 한달음에, 돌아서서 마치 대중 연설을 하듯이 양팔을 벌리며 큰 소리로 외친다. “바로 이것이 신의 계시입니다. 알-사부르!” 그녀의 한 손이 남자를 가리킨다. 멍한 시선으로, 부재하는 창조를 마주 보는 남자.
그녀는 이 계시에 이끌려간다. 이성을 잃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하던 연설을 마저 하려고 하지만, 그녀 뒤에서 한 손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다. 그녀는 뒤돌아본다. 그녀를 잡은 것은 남자, 그녀 남편이다. 그녀는 움직이지 못한다. 청천벽력을 맞은 듯, 딱 벌린 입. 말을 잃었다. 뻣뻣하고 메마른 바위를 누가 단번에 들어 올리듯이 그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다. (P212-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