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트Z> 1969년
<제트Z>는 영화 <대통령의 사람들>, <의문의 실종>을 뒤섞어놓은 듯한 정치 스릴러로 1960년대 그리스 군부를 충격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수사 보고서이다. 바실리코스는 어떻게 부패 정권이 인기 좌파 정치인 그레고리스 람브라키스의 암살을 조종했는지에 대해 폭로하고 가차없이 비판한다. 람브라키스는 힘없는 대중의 대변인이었지만 우파는 그를 친공산주의에 반미를 외치는 골칫덩어리라고 간주했다. 람브라키스는 1963년 살로니카의 거리에서 피살당했으며 4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무언의 시위를 벌였다. 영화 <제트Z>는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했고, 호르헤 셈프 룬과 바실리스 바실리코스가 공동 각색했다. 프랑스와 알제리가 공동 제작한 이영화는 1985년부터 1990년까지 그리스 대통령이 될 크리스토 사르체타키스와 유사한 수사 치안 판사로 장 루이 트린티낭이 출연하고, 세계적인 스타인 이브 몽탕과 이레네 파사스도 출연하지만, 화려한 출연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타임은 매우 적다.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영화이자 몇 안되는 영화중 하나였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BAFTA 최우수 영화 음악상,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 Z는 제작 당시 그리스가 군부독재 시절이어서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촬영했다. Z는 기호의 뜻은 He is alive (그는 살아 있다)는 뜻으로 그리스에서 정치적 희생자를 기리는 은어(隱語)로 사용되었다. 스릴러 영화 <제트Z>는 좌파 국회의원인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이브 몽땅 배역)의 살해사건을 밝히려다가 정부가 관여한 복잡한 미로에 빠진 한 판사(장 루이 트리티냥)와 기자(자크 페렝)의 이야기이다.
"사상 오염은 흰 가루 병과 같아 적극적 예방방법이 필요합니다.…우리나라를 좀먹기 시작하는 이데올로기 병균이라는 새로운 변종이 사회 저변에 만연해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하느님과 군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불순한 적입니다. 우리가 목표로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이 적들입니다.…우리의 건강한 사회를 지켜야 하며 질병들을 고쳐줘야 합니다.…건강한 항체로서 사회와 포도주의 모든 병균들과 싸워야 합니다."
농림부차관의 흰 가루 병 설명이 적에 대한 강력 섬멸 의지로 이어지는 경찰청 대책회의 장면으로 영화 <제트>(1969)는 시작된다.
단순한, 매우 단순한 상식이지만, 이런 것 말고도 어두운 결함이 있었다. 그 결함은 너무나 커서 어떠한 조명도 그 어둠을 밝혀줄 수 없었고 어떠한 명석함도 그 결함을 해결할 수 없었다. 오늘 저녁 그 부조리를 보아온 그가 그 부조리에 대해 말하길 원하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좌파의원으로 선출된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노선이 그의 노선과 부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노선은 쌍둥이처럼 들어 맞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아니었다. 즉 체제의 포로는 아닌 것이다. 그는 모든 사상에 개방적이었고, 아무런 구속없이 여러 조류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들을 좋아했다.
인간적인 고통은 개인적으로 치료될 수 없다고 믿게 된 그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자기의 진찰실에서 보수도 받지 않고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약조차도 살 수 없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환자들을 비교하는 것만으로 보수는 충분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구상 빈곤층의 비율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 그것이 바뀌어야 할 차례다. 우선 바뀌어야 할 것은 바로 그 체제였다.
그래서 오늘의 상황과 같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도 그가 침착하고 태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 듯 태연했으며 흥분하지도 않았다. 무관심만이 광신자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는 양심이, 단순한 양심만이 다시 승리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어떤 단어들은 그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야만 했고 어떤 행동들은 그 원래의 중요성을 되찾아야 했다.
문제는 동의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었다. 문제는 오로지 바라보는 것이었다. 인간이 위협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굴복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군국주의자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정신적으로 빈약한가. 독점자본가들은 또 얼마나 독점으로 인한 이익 때문에 그 독점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P49-50)
제트는 생각했다.
죽음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우리는 공포라는 매커니즘의 연결 부위를 잘 돌아가게 하는 기름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마도 횡단보도의 모터사이클처럼 수시로 우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모터사이클과 그 횡단보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기대야만 할 것이다. 우리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의존심이 생길 것이다.
태양은 아침마다 새로운 세상에 완전히 새롭게 떠오른다. 우리가 날이 밝아올 때마다 다시 보게 되고 땅거미 질 때마다 잃어버리는 그 태양이 바로 삶의 보상이다. 내가 시간의 분담을 계산하고 또다시 세어보고 하는 것은 그 시간들이 다른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아무리 밝은 집을 지어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젠 정말 그들 자신만이 착취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어려서 나는 비행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높이, 보다 높이 구름속을 날아 태양 가까이에 가고 싶었다. 그 다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 때문이었다. 내 형제 중 한 사람은 고향에 남아 있었고 또 하나는 외국으로 가버렸다. 부모님은 자식 중에 한 명을 학자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 그것이 내 운명을 떨어졌다. 그러나 내겐 항상 수직 상승에 대한 욕구가 남아 있었다.
결혼 후 아내가 내가 거짓말을 했다거나 자기를 놀렸다고 화를 내며 내 팔에서 흐느낄 때에 나는 목으로부터 부풀어 오르는 감흥을 경험하였다. 인생은 매 순간마다 죽을 준비를 할 때만 아름다운 것이다. 밤의 뿌리가 우리의 깊은 곳까지 내려와 우리의 피를 강하게 빨아 먹을 때 비로소 인생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내가 달아나고 싶어 하는 허약함을 보이지 않았다. 육체는 거추장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쓸 수 있다. 저개발국일수록 정신은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저개발국에서 박해를 받는 건 육체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혼자 행진을 할 때 그들이 그렇게 악착스레 쫓아 다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에 관한 글을 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겐 그건 바람일 뿐이다! 그 돼지들에게는 육체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주 작은 핏줄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알고 있는 내 육체는 보호를 받고 있다. 의원의 면책특권이 그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날 원하는 만큼 강하게 때리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감히 날 해치우지 못한 것이다. (P112-113)
젊은 시절의 네가 아무리 미천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네가 더 이상 또다른 너로 변하지 않도록 지혜롭기를 바란다. 인생은 아름답고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지혜를 갖기 바란다. 네가 아프면 네가 달려가 돌봐줄 것이고 네가 슬피 울면 네가 네 눈물을 마시는 베개가 되어준다고 믿기 바란다. 그렇다. 인생은 아름답다. 너의 손이 내 안에 있고 우리 인생의 두 개의 길이 하나가 되어 나병환자의 손이라도 꼭 잡고 단결할 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P114)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자!”
“그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기독교도들을 박해하던 로마인들은 이 같은 외침 따위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수없이 많은 붉은 카네이션 가지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 반대로 그 외침들은 화해를 맹세한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영혼은 일종의 출구를 발견하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이었다. 하나가 없어졌을 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십, 수백, 수천이 없어졌을 때는, 그들의 영웅에게 삶을 주기 위해 온 이 국민이라는 한몸은 파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위안이었다. 그의 육체가 그 많은 인간들을 갑작스럽게 단결시키는 데 사용된 것이다!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를 잃은 대신 다른 수백을 얻었다. 평화에 대한 이상이 이 땅 위에 갑자기 구현되었다. 그의 육체는 바로 그 평화를 위해 희생되었던 것이다.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불명의 의지가 인간들의 마음 속에 가득 채워졌다. 바다는 풍부한 자원으로 가득찬 무궁무진한 보고이다. 사람들이 물 한통을 퍼낸다고 해서 바다를 고갈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는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두 하늘 사이에서 그의 영혼은 부활절의 행렬을 지켜보며 따라갔다. 영혼은 육체가 죽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관 주위에 운집해 있기 때문이었다. 영혼은 또한 불명이란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행렬을 따라 들려오는 하나의 외침을 기억한다. ‘그는 살아 있다!’ 그 누구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는 않는다. 죽음이란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을 망연히 알게 된 각각의 개인들에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은 슬퍼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묻히러 간다. 그러나 하나로 뭉친 사람들이 깨어 있을 때 그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P184-185)
잠자리에 든 예심판사의 머리 속은 온통 금이 간 두 개의 벽과 물이 계속 새고 있는 천정 아래에서 공포에 떨며 뒤섞여 있는, 이 포악한 사건의 희생자들로 가득찼다. 그러나 진짜 책임자들인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여전히 가리워진 상태였다. 희생자들만이 쇠그물에 갇혀 꼼짝 못하고 마치 질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예심판사가 그들을 잡아 넣은 것은 그들을 통해 높은 자리에 있는 진짜 책임자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 것인가? 범할 수 없는 정상을 정복하고자 하는 무모한 등산가들처럼 자기 역시 정점을 향한 열정의 희생양으로 쓰러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어딘가 분명히 산의 휴식처가 있을 것이다. 그 휴식처의 따뜻한 모닥불가에서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
그는 누군가의 갑작스런 사라짐이 초래한 혼란과 공백을 사회는 충분히 메꿀 수 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제트가 사라지자마자 소용돌이가 생겼다. 그는 얼마나 썩어 있었으면 이 같은 혼란이 생겨나는 것일까! 젊은 물 —그가 좋아하는 표현대로— 에서의 소용돌이는 저절로 가라앉는 법이다. 물의 분자. 물 속의 생명체들, 하늘의 그림자들이 청년들의 뇌 움직임처럼 빠르게 제 모습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물, 마치 지금 사회 같은 흙탕물에서는 돌 하나만 던져도 썩은 시체의 악취가 풍겨 나오고 있다.
그는 풍부한 경험을 쌓겠다는 희망에 차서 항해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이번 사건에 착수했었다. 그런데 배멀미가 그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단단한 땅을 그리워한지 오래다. 음식이며 놀이며 모든 것이, 선장부터 저 하급 기계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로 하여금 뱃전에다 토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했다. 배는 완전히 녹슨 낡아 빠진 화물선 같았다. 자유선이라 이름 붙어 있지만 모든 것이 노예선에 가까워 곳곳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어떻게 그가 이 모든 구멍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소용돌이가 그를 휘감고 있었다. 그는 조용한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있었다. 압력은 나날이 거세어져 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끝에 와 있었다. (P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