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
공기의 축축함이 내 몸으로 직감된다. 이제 장마의 시작이다.
구름이 넓게 펼쳐져 있어 내가 보는 하늘은 회색빛이다. 언제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증기를 한껏 품은 구름을, 하늘은 품고 있다.
오늘 이 아침 공기의 축축함은 나를 초등학교 시절 이때쯤으로 데려간다.
초등학교 때 ‘우산’이라는 동요를 즐겨 불렀다.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
내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의 우산을 바라보며 가사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노란 우산, 무지개 우산……” 그러면서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찢어진 우산을 걱정스럽게 상상해보곤 했었다. 비가 억수로 많이 오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장화를 신고 등에 멘 가방 위로 우비를 입고 오른손에는 신발주머니를 팔에 걸치고 손으로 우산을 꽉 잡아서 썼다. 학교 가는 길의 내리막길에서, 작지만 그 기세가 거센 거품을 그리며 마치 계곡에서 물이 떨어지듯 내 발목을 감싸고 내려오는, 물을 바라보며 학교에 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학교 가는 길이 꽤 길었던 것 같은데 장마에 대한 추억으로, 그 시기 그 장소 그 거센 물거품에 대한 기억이 유난히 강렬하다.
초등학교 때 나는 연립주택에 살았다. 연립주택의 계단을 내려오면 모래사장 위 빨강, 노랑, 초록, 파랑의 철제 그네, 미끄럼틀, 철봉들이 있는 놀이터가 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대부분이 같은 학교 친구였던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술래잡기와 고무줄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고무줄에 다리가 닿지 않게, 발 힘의 균형을 조절하며 까치발을 디디면서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그때는 공부보다는 고무줄에 온 열정을 바쳤던 것 같다. 공부를 얼마나 잘했는지보다는 고무줄을 얼마나 잘했는지가 나의 성취감과 뿌듯함의 원천이었다.
연립주택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걸어서 나온다. 걸어오는 길 오른쪽에는 연립주택의 다른 동 입구가, 왼쪽에는 석유 가게와 연탄 가게가 있었다. 엄마 따라서 몇 번 갔었던 그 가게에 대하여 마음으로 친숙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곳을 지나쳐 더 걸어오면 약간의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 있다. 내리막길 오른쪽에는 수시로 드나들던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 안의 조명은 그렇게 밝았던 것 같지는 않고 조금 어두웠다. 그곳에서 빵빠레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별사탕이 들어있던 뽀빠이 과자도 사 먹었다. 동전을 들고 뛰어 들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살 수 있었던 그곳을 나는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언덕길 왼쪽에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가끔 갔던 쌀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 앞에는 빨갛게 쓰여 있는 ‘쌀’이라는 간판이 항상 세워져 있었다. 그 간판은 끝이 날카로운 철제 다리로 받쳐져 있었다. 눈이 와서 그 가게 앞이 무척 미끄러웠던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몇 바늘 꿰매고 붕대를 감고 다녔었다. 그때 그 꿰맸던 무릎의 상처는 아직도 내 무릎에 연하게 남아있다.
몇 주전 엄마와 만났다. 그때는 날이 조금 흐린 날이었다. 엄마는 본인의 우산 말고 우산 하나를 더 챙겨 오셨다. 아마도 내가 못 챙겨 올까 봐 우려되셔서 가져오신 것 같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그 우산을 나에게 주셨다. “우산이 많으면 좋아.”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시면서.
오늘은 엄마의 “우산이 많으면 좋아.”라는 말이 내 마음속에서부터 울려 나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우산이 변변치 못한 것이 많다. 창살이 휘어진 우산, 접었을 때 ‘찰칵’하고 잡아줘야 하는 플라스틱 부분이 깨져서 묶어두지 않으면 그냥 펴져 버리는 우산, 양산만큼이나 크기가 작아서 비를 막기에는 왠지 부족한 우산 몇 개…… 이사 오면서 잃어버리고, 밖에 나가서 하나씩 어딘가에 놓고 와서 잃어버려서, 우산이 이제는 몇 개 안 남아 있다.
엄마가 주신 갈색 우산은 신발장 한켠에 다른 우산들과 함께 잘 세워져 있다. 비가 오면 제일 먼저 집어 들고 갈 거로 생각하며 맨 앞에 배치해 두었다. ‘맞아. 엄마 말이 맞았어. 우산이 많으면 진짜 좋아.’를 내 마음으로 여러 번 되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