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P'를 만나다

신중한 사람에 한 걸음 다가가기를

by 글꽃향기



요즘 출퇴근길에 함께하고 있는 팝송 두 곡이 있습니다. 성시경 씨 버전으로 듣고 있습니다.



팬으로서 성시경 씨를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습니다. 데뷔 때부터였으니까 24년 차에 접어듭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TV 화면으로만 그를 만날 뿐이었어요. 라디오의 애청자로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뿐이었고요. 밥벌이를 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를 직접 만나러 간다는 것을요. 주머니의 허락을 받기란 쉽지 않았거든요. 밥벌이를 하고 나서도 10년 동안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콘서트 티켓은 제게 사치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콘서트 티켓팅을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느끼면서부터였지요. 얼마 전에 깨달았어요. 살고 싶어서 그를 만나러 갔었다는 것을요.



지금은 일 년에 최소 두 번은 그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보면서 위로받고 힘을 냅니다. 배우는 것도 참 많습니다. 그가 삶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모습도, 불합리한 일에 의견을 굽히지 않는 당당한 모습도 저에겐 힘든 부분이거든요.



성시경 씨는 코로나 시국을 계기로 전에는 꺼렸던 SNS에서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본업인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요리, 먹방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어요. 제 기준에서는 그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주류 분야에도 발 벗고 뛰어들더군요. 그는 뭐든 시작만 하면 그야말로 '제대로' 해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를 때보다 그가 더 돋보이는 분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미로운 목소리, 따라 부르기에 숨이 찰 정도로 빼곡한 가사, 노래를 부를 때 뿜어내는 그의 진심, 어느 하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노래뿐 아니라 그가 부른 다른 노래도 좋아합니다. 특히 요즘 저의 BGM인 곡이 있어요.

<Reality>

<Perhaps Love>



<Reality>는 영화 '라붐'의 주제곡으로도 유명하지요. 성시경 씨 버전을 처음 만난 건 대종상 시상식 방송에서였어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와 어울리는 형용사를 아직은 찾지 못했거든요. 어휘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튜브 영상 제목을 보니 '2011년 10월 17일 방송'이라는 문구가 있네요. 만으로도 13년이 넘었어요.



유튜브 영상이 언제 처음 업로드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기억은 이렇습니다.



성시경 씨의 <Reality> 영상이 처음 게시되고 조회 수가 폭발했었어요. 덧글 창에는 그의 목소리와 분위기에 감동받은 팬들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감동의 영상이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다시 게시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지요. 주로 비슷한 류의 영상 덧글 창에서 그 바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도 다시 보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문의가 쇄도하면 다시 올려 주겠지!'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몇 년이 흘렀습니다. 혹시나 해서 수시로 영상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아쉬움' 뿐이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러했습니다.



'바라고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던가요?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영상이 어느 순간 유튜브 채널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이었습니다. 아마도 거리 두기로 힘든 아무개들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을지 엉뚱할지도 모르는 상상을 해 봅니다. 그때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몰라요.



무대를 바라보고 있던 셀 수 없는 눈동자들, 내로라하는 쟁쟁한 배우들-주워들은 이야기로는 대종상 같은 큰 행사에서 매우 경직되어 있다는 배우들- 을 앞에 두고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어쩜 저리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는지!



처음엔 그저 그의 노래하는 모습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 한 구절에서 시간이 멈추고 말았습니다.

'Perhaps that's my reality'

그리고 성시경 씨에 따라붙는 여러 수식어 가운데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원어민 뺨치는 발음을 구사한다.'

특히 'Perhaps'의 발음이 그 수식어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입안에 공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가 한 번에 뿜어내야 하는 대문자 'P'


'r'을 위해 적당히 둥글게 몸을 말아 입천장 가까이로 이동해 있을 그의 혀끝


약간의 긴장을 주면서 양옆으로 위치 이동을 해야 하는 두 입술, 그리고 비로소 나오는 'h'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기에 이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신호를 던져야 하는 소문자 'p'


어이쿠 아직 네가 남아 있었구나! 미안, 잊을 뻔했어. 마음을 달래주며 존재감을 잠깐 드러내 줘야 하는 's'


다섯 자음 친구들을 위해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a'와 'e'




그때부터였습니다. 그의 노래하는 모습이 아닌, 그의 입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그 아이들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요. 다른 단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 정확히 발음을 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ality>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어서였을까요? <Perhaps Love>라는 곡도 자연스럽게 재생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지만, 유튜브 영상에도 존재하는지는 몰랐습니다. <Perhaps Love>에서 탄생하는 그의 발음 역시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정성을 오롯이 느끼고 싶어서 가사를 필사했습니다.





그가 그의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는 남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옥같은 목소리를, 명석한 두뇌를, 그리고 영어 원어민 수준의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구강 구조를 이미 조상님들께 물려받았다고요. 그의 실력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고 마침표를 찍고 있었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할 때 매일 두 시간씩 책을 펼쳤어요. 술을 진탕 마신 날에도 집에 와서 그 두 시간을 지켰습니다!"


"중국어도 공부하고 싶은데, 함부로 시작을 못하겠어요. 맘먹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서......"


유튜브 방송에서, 팬미팅 자리에서 그가 건네준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왜 웃기만 했던 걸까요? 농담조로 건넨 그의 한마디 한마디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숨어 있었는지 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나는 타고난 게 없으니까!'생각하며 그저 그렇게 멈추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나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일이 몇 가지나 있었는지도요.



지난 4월, 팬미팅 자리에서 그의 <Reality>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라이브로 그의 발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지요. 노래를 시작하기 전, 그는 팬들에게 같이 부를 수 있는지 질문을 건넸습니다. 몇몇 팬들이 웃음으로 답한 것 외에는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이 노래가 좀 어렵긴 해요."



제가 만약 <Reality>를 무한 반복해 듣지 않았다면, 그의 발음에 귀를 기울이며 그 노력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의 '어렵다'는 세 글자에 조금은 서운함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그 시간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라이브로 <Reality>를 들으며 그의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좋은 씨앗들을 물려받았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갖고 있었으니까!

생각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기까지, 무언가를 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을지, 얼마만큼의 정성과 주의를 기울였을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있더라도 그걸 나의 씨앗 탓으로만 돌리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람 하나가 생겼습니다.

잠시 '멈춤'버튼을 누를지라도,

의지와 끈기가 부족해 오래 걸릴지라도,

‘그만 두자!’는 문구는 멀리하고 싶어졌습니다.



결과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

그 과정까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신중한 사람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

"P"를 만난 덕분입니다.



'P'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t4ViQKXsLs




https://youtu.be/vkX7Dp2UBaw?t=39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