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유연해지기
5월 초순, 6일의 연휴가 끝나고 무기력에 빠졌다.
올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에너지가 고갈됐다. 사춘기에 접어든 6학년 친구들과의 하루하루도 힘에 부치지만 올해 나의 교실에는 특별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친구가 있기에 아주 많이 예민해져 있다. 내가 할 일은 돌봄이 필요한 친구는 그의 성향에 맞춰서, 나머지 친구들은 사춘기 특성에 맞춰서 가르치고 이끌고 함께하면 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문제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돌봄이 필요한 친구와 나머지 친구들이 부딪히는 일이 속출했다. 수시로 불만이 폭발한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인지 갈등은 나날이 고조되고 있다.
배려, 보살핌, 양보 내가 사랑하는 단어들이 지금 나의 교실에선 사치에 가깝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요즘은 저학년 교실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의 학생들이 차고 넘친다.
6학년 학생들의 특성상 자신의 입장을 교실 안에서도 굽히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다. 사회 시간에 배우는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 공정성이란 용어를 그들의 삶에서도 적절히 사용하면서 말이다.
"다수가 이렇게 불만이 많은데 양보하라고요?"
"공정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몸과 마음이 성장하고 있는 모습에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그 '소수'까지 생각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린 듯하다. 배려의 대상이자 특별 돌봄이 필요한 친구에게까지 공정성이란 단어를 외치고 싶어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참 부끄럽다. 어차피 나도 밖에 나가선 아이들과 똑같이 행동하니까. -
"언제까지 참아야 해요?"
"저희 예전에도 피해 봤다고요!"
내가 모르는 과거의 일까지 끄집어내면서 분노를 표출한다. 시한폭탄을 보는 듯하다.
특별한 친구도 공정성이란 단어를 외치는 아이들도 모두 나의 학생들이다. 내가 그 학생들을 모두 품어야 하는데 말이다.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이해해 줘야 해."
"너그러워져야 해."
"그 친구는 아픈 친구란다."
"친구도 노력하고 있다는 거 알지?"
아이들 모두 내가 이해와 협조를 구할 때는 동의를 하지만, 막상 갈등의 현실에 부딪히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풀어놓을 수도 없다. 머릿속만 복잡해진다.
아직은 대한민국이라는 곳이 교육 쪽으로 매우 인색하다는 사실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실상은 들여다보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바라볼 뿐이니 현장에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실제 도움이 되지 않는 주먹구구식의 정책만 허다하니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불만이 가득하다.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아직 갈 길이 멀었다고, 그런 현실도 감안해 달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저 '이해하자, 양보하자' 이런 말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나에게 5월의 연휴는 정말 한 박자 쉬어갈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에너지를 보충하고, 다시 씩씩하게 학교생활을 해야지 굳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휴일을 보내고 온 나의 학생들은 그와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사춘기 그분께서 더 찾아온 듯 느껴졌다.
퇴근 후에는 한참 동안 누워서 피곤을 풀고, 에너지를 채운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라도 독서와 글쓰기의 시간을 가지면서 지친 마음을 달래곤 한다. 그런데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간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책의 글자들은 온통 춤을 춰댔고, 글쓰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고 싶었다. 독서가 아닌, 글쓰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산책도 나갈 수 없었다. 몸은 이미 땅바닥과 한몸이 되어 있었으니까. 거실에 누운 상태로 유튜브 앱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들을 훑어댔다.
'아이들 보고는 휴대전화 보는 시간 정해 놓을라고 해 놓고!'
'쇼츠는 더더욱 빠지면 안 된다고 침을 튀겨 놓고!'
내가 그러고 있었다. 5월 한 달 내내
어느 순간부터 맘에 들지 않는 영상은 스킵을, 다시 보고 싶은 영상은 두세 번 반복을, 열심히 검지를 움직여댔다. 아이들도 이렇게 쇼츠를 보고 있겠구나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한심한 내 모습에 쓴웃음을 짓곤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교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잠시라도 떨쳐내고 싶었다.
그러다가 만난 영상이 있었다.
골든 햄스터가 주인공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꼰대 상사의 무용담
걱정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지만 듣고 보면 기분 나빠지는 동료의 한마디
지극히 바람직한 모습으로 낮 시간을 보내던 햄찌가 퇴근 후 가방을 던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모습
로또 발표를 기다리며 잠시 꾸어 보는 꿈
아침 알람 소리를 듣고 잠시 눈을 감았는데 두 시간이 지나 있는 상황
영상 한 편당 40초 전후의 분량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영상 속에 지금을 살아가는 직장인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구나!' 위로받을 수 있었다.
비록 -비교적 가벼운(?)- 비속어와 맞춤법에 어긋난 자막이 나오긴 하지만 주인공을 햄스터로 내세웠기에 그 역시 미소로 넘길 수 있었다. 햄스터의 귀여운 모습에 애교스러운 말투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쇼츠는 안 돼!"
마르고 닳도록 잔소리를 해댔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저 무조건 '안 된다! 고 말하는 내가 오히려 그릇된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 시대의 흐름에, 유행에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필요한 모습은 아닐지.
정서불안 김햄찌는 시대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30~40초 분량의 영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감이란 단어로 위로의 선물을 건네주었다. 김햄찌 유튜버가 그 점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90년대 생의 문화를 실천에 옮긴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내가 바라보는 김햄찌 유튜버는 '유연함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현대인의 정서를 담아낸' 유능한 사람이었다.
나의 아이들에게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정서불안 김햄찌의 꼰대 상사의 모습이 아닐지, 걱정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에게 얄미운 한마디를 건네는 동료의 모습은 아니었는지, 공감이란 단어를 선물하긴 했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나의 아이들은 6학년임에도 경청이나 독서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어떤 문제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말하는 활동에는 걱정스러울 만큼 실력이 부족하다. 어쩌면 지금의 아이들은 알파 세대 중에서도 '쇼츠 세대'로 구분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5년 전, 10년 전과는 다르게 특별한 친구에게 매우 인색한 분위기 역시 담임교사인 내가 쇼츠 세대인 나의 아이들의 코드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도.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내가 40초 정도의 영상을 통해 이렇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먹어 본다. 시대의 흐름에, 그들의 생각에 '아니라고! 안 된다고!' 고개를 젓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유행에 관심을 가져 보자고, 적어도 알파 세대들과 -어쩌면 쇼츠 세대로 구분될 수 있는 이들과- 한 공간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코드를 읽기 위해 나의 마음을 열어 보자고. 그 변화의 흐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정서불안 김햄찌 유튜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의 마음이 그대에게 닿기를!